더글러스 베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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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Douglas Bader, CBE, KB.[1] 1910~1982.
1. 개요
2. 생애
2.1. 전간기
2.2. 2차 세계 대전
2.3. 전후
3. 기타


1. 개요


성이 '베이더'로 알려졌지만 '바더'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약한 영국 공군에이스. 일명 '나무다리 에이스'로 유명하다. 공인 격추수는 31기. 최종 계급은 대령.
나중에 절친한 친구가 되는 아돌프 갈란트[2]와는 달리, '''"탈출하는 독일 놈도 쏴버려라."'''고 외쳤을 정도의 싸움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전간기


많은 공군 조종사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하늘을 동경해서 공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조종사로 임관된 뒤에, 비행 도중 사고를 당해서 양 다리를 잘라내야했고, 결국 공군에서 의병 제대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비행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베이더는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근성'''과 각고의 노력 끝에 2차 대전이 벌어지자 사람 수가 절대적으로 모자랐던 공군의 상황과 동기들의 도움으로 12 그룹의 19비행대대의 조종사로 복귀한다. 거의 8년만의 복귀였기에 비행대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조종사 중 한명이었고 사관학교시절 친구는 비행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2.2. 2차 세계 대전


됭케르크 철수작전이 끝나고 몇 주 뒤 베이더는 242 비행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42비행대대는 프랑스 침공에서 큰 피해를 입은 채로 철수해서 사기가 뚝 떨어진 상태였고 새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양 다리에 의족을 달고 있는 걸 보고서는 '보나마나 책상 앞에서 잔소리나 늘어놓겠구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 부하들을 본 베이더는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허리케인 하나를 끌고는 30분 동안 곡예비행을 펼쳐보였다고 한다. 그 기가 막 히는 광경을 본 대대원들은 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굳은 신뢰를 보였다고 한다.
베이더의 부대는 일명 '덕스포드 비행단'으로 불렸는데[3], 그 유명한 대편대 전술을 제안한 사람도 베이더였다. 그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적군을 상대로 10여기도 안되는 전투기로 요격해야한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파크 소장의 전술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충분한 숫자를 모은 뒤에 요격에 나서면 훨씬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들은 트래퍼드 리맬러리 소장은 옳다구나 해서 그 전술을 채택하지만…, 문제는 12그룹의 임무는 적 전투기 요격이 '''아니라''' 11그룹의 본진을 지켜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속하게 대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대편대는 그게 안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속출하게 된다.[4] 물론 이후 독일 공군이 런던 등 시가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12그룹이 대편대를 형성해서 대응할 시간이 생겼기 때문에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12그룹은 대부분의 전투기가 허리케인이면 좋은편이고 후방포탑달린 디파이언트같은 요상한 놈들이 주력인 그룹이라 동수로는 독일 전투기에 상대가 되질 않아서 대편대 전술을 쓸수밖에 없기도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1940년 당시 12그룹이 보유한 15개 비행대대에서 7개 비행대대가 허리케인을 보유하고 있었고 6개 비행대대가 스핏파이어를 보유하고 있었으니 틀린 이야기다.[5] 이런 상황이니 계속 본진이 털리고 있었던 11 그룹 입장에서는 충분히 짜증날 상황이었다.[6]
1941년 3월에 바더는 중령으로 진급하였고 145, 610, 616 비행대대로 구성된 비행전대를 지휘하게 되었지만 1941년 8월 9일에 영국-프랑스 사이의 해협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베이더는 적기에 격추당했고, 당연히 포로가 되었다.[7] 이때 베이더를 격추시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느 이름없는 조종사한테 격추당했다는 생각에 상당히 침울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아돌프 갈란트는 그날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실력있는 중위를 베이더를 격추한 사람이라 소개시켜줬다.[8][9]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사람은 "Bf109를 한번만이라도 몰게 해주면 원이 없겠네." "그걸 타고 뭘 하게? 영국으로 날아가려고 그러지? 내가 자네를 또 쏴야 되겠나?" 하는 농담까지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다.[10]
또한 격추될 때 탈출하다가 의족이 부서지자 "님, 난 영국제 의족 말고는 달 수가 없음."하자[11] 갈란트가 상부에 요청해 괴링이 특별히 허가해서 영국측에서 의족을 보내주기로 했다. 독일군은 이 의족을 싣고 오는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를 절대 격추하지 말 것을 명령받았으나 정작 저 모스키토의 조종사들은 의족을 투하하자 마자 활주로에 폭탄을 냅다 뿌려놓고 도망가 버렸다고. [12] 그리고 베이더 자신도 의족을 받자마자 며칠만에 탈옥을 시도하고 몇 번이고 탈옥을 시도해서 의족을 뺏길 뻔 했다고 한다.
1945년 4월 15일에 미군이 그가 갇혀있던 수용소를 해방시켰지만 이미 전쟁이 다 끝나가는 마당이었기 때문에 영국 공군은 그를 후방의 비행교관이자 홍보 인사로 발령했고, 후방에서 종전을 맞았다.

2.3. 전후


1948년에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퇴역 이후에는 많은 시간을 비행을 하면서 보냈으며 1969년에 영화 공군 대전략에 친구인 갈란트와 함께자문역을 맡기도 했다.
1950년에는 독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전쟁은 시합이 끝나면 악수를 나누는 크리켓 경기가 아니다."라는 그다운 말을 남겼다.
1975년에 자신의 옛 상관의 라이벌이자 자신이 비판했던 파크 공군 대장이 사망하자 뉴질랜드까지 날라가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82년 9월 2일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기타


  • 그의 투사 기질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자신이 갇혀있던 수용소(위에서 말했듯이 하도 탈옥시도가 많아서 오래된 성을 개조한 탈출하기 힘든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가 연합군에 의해서 해방되자마자, "나한테 스핏파이어를 주시오!"라고 외쳤던 일화에서도 드러나있다.[13]
[1] 1976년 CBE, KB를 수훈받아 이름 앞에 Sir를 붙인다[2] '''독일군''' 에이스 파일럿[3] 덕스포드 공군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4] 11그룹 지휘관인 파크 소장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서 대편대 전술이 비효율적이라는걸 간파했기에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12그룹 지휘관 리맬러리는 이를 무시했던것.[5] 그 외에는 디파이언트를 보유한 1개 비행대대(264비행대대)와 브리스톨 보파이터와 블렌힘으로 구성된 1개 비행대대(29비행대대)가 있었다.[6] 11 그룹의 본부는 런던 남쪽의 미들섹스 억스브리지(Uxbridge)에 있었고 12 그룹의 분부는 노팅엄시가 있는 노팅엄셔(Nottinghamshire) 왓널(Watnall)에 있었다. 독일의 공습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11 그룹이 보기에는 12 그룹의 행동을 강건너 불구경처럼 생각 할 수 밖에 없었다.[7] 이날 그가 평소에 호흡을 맞췄던 윙맨이 감기에 걸려서 출격하지 못했다고 한다.[8] 출처:아돌프 갈란트, 처음과 마지막 216쪽[9] 책에 따라서는 "자네를 격추한 자는 숙련된 고참장교로 확인됐다." 라고 위로했다는 설도 있다. [10]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전후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 되어서 아돌프 갈란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발언에 대해서 베이더는 가장 먼저 앞서서 변호를 했고, 갈란트가 죽자 베이더의 아들이 그의 관을 운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 사후에도 가족끼리 친분을 나누고 있다고.[11]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Air Ace"에선 독일 파일럿의 입으로 당시 독일엔 제대로 된 의족만드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우생학에 빠져 '건강한 게르만'을 천명하던 나치 치하에선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상이군인 외의 장애인은 '죄'였다. 그런 독일에서 장애인을 위한 의료기구를 제작할 리가.[12] 이 소식을 들은 갈란트는 '이런 신사 협정도 안 통하는 친구들 같으니라고.' 라고 투덜거렸다고 한다.[13]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의 절친이었던 독일군아돌프 갈란트히틀러괴링 앞에서 "우리 비행단에 스핏파이어를 주십시오!" 라고 외친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