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우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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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h Caswall Tremenheere Dowding, 1st Baron Dowding GCB, GCVO, CMG
(1882-1970)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사령부[1] 사령관. 최종 계급은 대장.
독일 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조국을 지켜냈고, 나아가 전세를 역전시킨 전쟁 영웅.[2]
2. 영국 본토 항공전 시기
일단 인상부터가 참 꼬장꼬장하게 생겼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애증을 담아서 붙여준 별명이 고집쟁이 영감.[3] 1930년대 공군을 지배했던 폭격기무적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인물로 전투기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상관인 공군참모총장 시릴 뉴월 원수에게 전투기 사령부 조직을 강력히 건의, 초대 사령관에 취임하게 된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활약한 허리케인과 불멸의 스핏파이어 개발을 지시한 것도 이 사람의 공이 컸다. 이 영향으로 독일 공군의 전투기 배치 계획까지 늦어지는 결과를 빚었다.[4] 또한 영국 전역에 레이더 기지와 방공관제소도 설치해서 영국의 방공망을 만들어놓았다. 이게 별일 아닌 거 같지만, 당시 사람들은 막 개발된 레이더의 가치를 반신반의했다. 심지어 적외선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하는 반론도 있었을 지경.[5] 결국 영국 해안가에 레이더 기지를 고집고집해서 세우고야 말았다.그리고 어느 정도 낭만에 죽고 살던 하늘의 사나이들을 중앙 통제 시스템으로 길들인 것도 그의 공로이다.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지상에서 브리핑한 후 하늘에서는 조종사들이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그걸 다우딩이 바득바득 윗선에게 대들고 뜯어고쳐 현재같은 기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레이더 기지에서 적기 파악 → 중앙 관제 시스템에서 실시간으로 적기 현황 파악 후 통신으로 전투 비행단에게 작전 지시 → 조종사는 실행하는 효율적인 구조가 완성되었다.[6]
개전 후 프랑스가 그야말로 완벽하게 털리자 수상인 윈스턴 처칠 경에게 "이미 끝장난 프랑스에 지원군을 보낸다면 우리는 우리 하늘을 지킬 전투기가 바닥날겁니다"라는 서신을 보냈고, 이후에도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영국 해군과 국방부의 압력이 들어오는 와중에도 눈감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처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도 저렇게 버텼다는 게 대단하다.
또한 의회에서 예산을 이유로 전투기 조종석에 설치하는 방호판을 도입하지 않으려하자 '''"시카고의 갱단들도 자기네 차에 방탄유리를 넣는 마당에 우리 공군 조종사들이 돈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방호판을 못 가진다는 게 말이 됩니까?"'''하고 강하게 면박을 주면서 전투기에 방호판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부하들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고 부하들에게 진심어린 존경을 받았다.
결국 그의 선견지명은 제대로 들어맞아서 영국 공군은 독일 공군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워낙 윗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한직으로 좌천당했고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하고 퇴역했다.[7]
3. 다우딩의 해임과 말년
다우딩은 1940년 11월경에 전투기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되는데, 이 시기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 사실상 끝나고 대신 런던 및 영국 대도시들이 폭격받던 시기이다(London Blitz). 다우딩의 방어적 전투기 운용은 수적 열세 속에서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았고 효과도 물론 뛰어났기에 끝임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8] 하지만 독일의 야간 폭격은 이런 상황을 바꾸었다. 다우딩이 구축한 다우딩 시스템은 아직 야간 공격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가 소집되어 각종 해결책이 제안되었지만 많은 제안은 이미 준비중인 내용이었고 적지 않은 제안이 전투기에 탐조들을 달아서 써먹자는(...)식의 다소 터무니없는 주장이었기에 다우딩은 이를 모두 수용하지 않았고 공대공 레이더를 장착한 야간전투기가 야간폭격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다우딩이 처칠의 신임을 잃고 해임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레이더를 장착한 야간전투기가 야간폭격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다우딩의 판단이 옳았다.[9]
당시 영국 공군 내에는 보다 적극적인 전략적 폭격 전술을 주장하는 멤버들이 많았는데 이는 초대 공군참모총장인 휴 트랜차드를 비롯한 다수의 공군 원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는 이른바 리맬러리를 필두로 하는 Big Wing 지지자들은 대편대 전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에 반대하는 파크, 다우딩과 정면 대립하였다. 이 대립은 런던 폭격이라는 루프트바페의 실책으로 잠시 잦아들었지만, London Blitz 기간 중 재발하여 공군참모차장 숄토 더글러스, 트래퍼드 리맬러리, 폭격기 사령관 찰스 포탈 등의 인물들과 대립하였다.
결국 다우딩을 적극 후원해준 뉴월 공군참모총장이 먼저 물러나고 포털이 후임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공군참모차장 숄토 더글라스가 휴 다우딩의 사령관직을, 리맬러리가 키스 파크의 제11그룹 지휘관직을 이어받게 된다. 이후 전투기 사령부의 새로운 지휘부는 파크, 다우딩이 거부한 전술을 이용하여 영불해협을 건너가서 싸움을 걸었으나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원래 2차대전 전에 퇴역했어야 했는데 여러 사정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까지 치러 버린 노장이기도 했고, 영국 공군은 다우딩 반대파가 장악하고 있기도 해서 마땅하게 갈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처칠의 배려로 미국에서의 항공기 조달 업무를 잠시 맡지만 결과는 신통찮았고, 영국 본토 항공전 후기(Despatch)를 쓰는 것을 끝으로 1942년 퇴역. 처칠의 제안으로 1943년 Bently Priori 남작 작위를 받는다.[10]
전쟁 후에는 전사한 파일럿의 아내[11] 와 재혼을 했고, 영국 공군의 기념식에 간간히 참석하는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1970년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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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세인트 클레망트 교회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흥미롭게도 곁에는 2차대전 후반기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주도했던 아서 해리스의 동상도 함께 있다.
그가 소령시절 지휘했던 16 비행대대는 한번도 해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2008년 이후로는 조종사 훈련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역대 전투기 사령관 중 유일하게 대장 계급으로 사령관직을 수행했으며 그 다음 사령관인 숄토 더글라스부터 전투기 사령부의 마지막 사령관인 Frederick Rosier까지 모든 사령관들은 중장계급으로 사령관직을 수행하였다. 임시계급까지 포함하면 숄토 더글라스도 있지만 전투기 사령부에 근무하던 시기의 대부분은 중장이었기는 하지만.
영화 《공군 대전략》에서는 명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다우딩 역을 맡았다.
세계정복자 4에서는 은급 장교로 나오고, 공군 능력치가 최강이다.[12]
그런데 알고 보면 다소 충공깽한 사실도 있다. 휴 다우딩은 영국의 심령술사 모임인 고스트 클럽의 회원이었는데, 영국 본토 항공전의 와중에서 심령술을 사용하여 독일군의 공습에 맞서려고 했다. 휴 다우딩은 전사한 영국 공군 전투기에 탑승했던 조종사들의 유령들을 불러내어 그들한테서 독일군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려고 했었다. 아울러 휴 다우딩은 전사한 조종사들의 부인들한테 영매를 찾아가서 죽은 남편의 영혼을 불러내어 이야기를 해보라는 조언까지 남겼다(...)유령들을 군사 작전에 사용하려 했던 영국군 장군
다우딩과 그의 두번째 부인은 심령술적인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동물권과 관련되어 활동하기도 했는데 영국 동물실험반대협회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 단체가 제정한 실험동물의 날은 다우딩의 생일과 같다.
5. 관련 문서
[1] 이외에 방공, 폭격, 해안방어 사령부 등이 존재하며, 각 사령부의 사령관들은 공군참모총장의 최고 지휘를 받는 것과 동시에 각 사령부의 실질적 책임자이다. 그 중 전투기 사령부는 공대공 전투기들을 총괄했다.[2]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군 대표가 독일군 룬트슈테트 원수를 향해 "독일이 전쟁에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러나 룬트슈테트 원수는 "물론 쿠르스크나 스탈린그라드도 뼈아픈 패배였지만 '''영국을 무너뜨리지 못한 게 가장 큰 실책이었소.''' 만약 영국을 점령했다면 소련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면 미국도 무사하진 못했을 겁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물론 연합군 대표가 모두 모여있었기 때문에... 뒷일은 알아서 생각해보시라. 물론 미국도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에서 상당히 자뻑이 들어갔다는건 확실하지만 영국을 점령하지 못한 게 큰 타격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기는 하다.[3] 영어로 Stuffy. 꽉 막힌 노땅 쯤 되겠다.[4] 하리케인과 스핏파이어에 기관총 8정이 장비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독일 공군이 Bf-109의 무장을 강호하기 위해서 설계를 변경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볼튼 폴 디파이언트라는 괴작을 강력하게 지지했었다.[5] 이러한 불신의 가장 큰 원인은 레이더에 당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1937년 EMI사가 해결책을 제시 할 때까지 논쟁은 계속 되었다.[6] 이 중앙 관제 시스템은 당시 현역 조종사들에겐 굉장히 생소한 구조였으니 당연히 반발도 심했다. 게다가 여기서 조종사에게 지시하는 사람들은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한 젊은 여성들... 다우딩은 현역 조종사들을 이 중앙 센터에 일정 기간 로테이션으로 근무하게 시켜서 이 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믿음직스러운지 몸으로 체험시켰다. 또한 독일군의 폭격에 건물이 무너지고 주변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이 어린 여성들은 동요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내 다우딩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7] 결정적인 그의 실각요인은 독일군의 야간 폭격을 막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는 기술적으로 차근차근 해법을 제시했지만 (당시 영국 기술로는 야간 폭격을 막기가 곤란했다.) 큰 호응을 얻을 순 없었다. 그 외에도 이전부터 전술적인 부분에서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고, 그 특유의 꼰대 기질 때문에 남한테 아부하거나 좋은 말로 슬슬 넘어가지 않았기에 내부의 적들이 엄청 많았고, 반대 의견도 어느 정도는 이유가 있긴했다.[8] 다우딩은 이전에 공군의 주력을 프랑스로 보내야 한다는 처칠의 주장에 절대로 안된다고 반대한 적이 있었다. 처칠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다우딩이 처칠의 신임을 받았다는 자체도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9] 멀리 갈것도 없이 영국이 레이더를 달아서 야간 전투기에 잘 써먹었다.[10] 참고로 Bently Priory는 영국 전투기 사령부가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 Bentley Priory Museum이 존재한다.[11] Muriel Dowding(1903.03.22 ~ 1993.11.20). 영국에서는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가로 유명했다. 첫번째 남편은 아브로 랭커스터의 조종사로 복무하던 도중 1944년에 전사했으며 1951년에 다우딩과 재혼했다.[12] 하지만 공군메타 특성상 장갑보병 타고다니며 폭탄떨궈주는건지라... 다우딩의 이동력 자체가 매우 안습이라 다른공군장들에게 많이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