됭케르크 철수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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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절망적인 전황에서 연합군의 탈출 작전. 독일의 프랑스 침공 여파로 서부전선이 완전 붕괴되어 전면패배의 위기에 봉착해 있던 연합국에게 항전의지를 되살리고 사기를 크게 올렸으며, 향후 1944년의 대반격의 단초를 제공했다. 작전 당시 세계 전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탈출작전이다. 현재까지의 세계 최대 규모의 탈출작전은 나치 독일 멸망 직전에 카를 되니츠 제독이 동프로이센 등지에서 벌였던 한니발 작전(Operation Hannibal)이다.[1] 이와 비견되는 규모의 작전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흥남 철수 작전이 있다. 이쪽의 경우 장병 10만 민간인 9만명 규모로 약간 적지만 대신 됭케르크 철수작전과 달리 장비와 물자들도 적군에 넘기지 않고 대부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다.한편, 수많은 상선의 지원을 받아, 왕립해군은 영국군과 연합군의 구출에 총력을 다했고, 220척의 군함과 650척의 선박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악천후 속,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탄과 증가하는 포병 사격의 집중 아래에, 해안 위에서 어려운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바다는 기뢰나 어뢰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은 며칠 밤을 쉬지 않고 위험한 바다를 건너, 사람들을 옮기며 구조해 냈습니다. 그들이 되찾아 온 숫자는, 그들의 헌신과 용기의 척도입니다.[원문]
윈스턴 처칠,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연설 출처
작전의 이름인 '''다이나모'''는 도버의 한 오래된 성채에 자리한 어느 영국 해군 지휘소의 방 이름이다. 이곳에서 윈스턴 처칠 총리에게 작전의 내용을 설명한 것에서 유래했다.
이 작전의 핵심이 되는 도시는 프랑스의 Dunkerque이며, 외래어표기법(프랑스어)을 기준으로 표기하면 '됭케르크'이다.[2] 영어로는 Dunkirk이며 이를 기준으로 하면 '덩커크'에 가깝다. 프랑스어 /œ/는 분명 'ㅚ'와 비슷한 발음이지만 비모음 /œ̃/은 실제로 '엉~앙'에 가까운 발음이 되기 때문에(발음 참고) 해당 발음을 '덩'으로도 표기한 것에 착안되어 '덩케르크'가 되었다.[3] 2015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영어 표기를 Dunkirk 로 채택했고, 국내에서도 보시다시피 '덩케르크'로 표기하여 배급되었다. 프랑스에서 개봉할 때는 원래 지명에 맞게 Dunkerque로 표기했다.
2. 배경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전면적 침공으로 서부전선이 마침내 포화에 휩싸였다. 베네룩스 3국은 물론, 영프 연합군도 각지에서 참패와 후퇴만을 거듭했으며, 독일군이 아르덴 산림지대를 돌파하고 뫼즈 강을 넘으며 연합국이 예측치 못한 대규모 우회포위기동으로 주력부대가 모조리 포위섬멸될 위기에 빠졌다. 연합국은 아라스에서 반격을 개시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독일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만다.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부대가 퇴로가 없는 연합군을 짓밟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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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포위망에는,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계속되는 연전연패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영국·프랑스·벨기에의 군인 수십만 명이 갇혀 있었다. 프랑스 군 지휘부는 포위망 내부와 외부에서의 동시반격으로 이들을 구원한다는 계획을 실행하려 했으나 사실상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영국은 영국대로 본토에 남은 전력을 최대한 빨리 보내 구원코자 했으나, 그 시점에서의 구원군 파견은 포위망에 갇혀 포로가 될 병력만 늘려주는 꼴이었다.
게다가 영국에게는 이들을 탈출시켜야 하는 이유가 더 존재했다. 본래 영국 육군은 상비군의 수가 적은 편이었고, 포위망에 갇힌 영국 육군 병력, 즉 '대륙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이 시점에서 사실상 영국 지상군 전력의 전부였다. 본토에선 예비역을 소집하고 신병들을 징집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당연히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해외의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 식민지에 주둔한 병력은 그 여건상 함부로 영국 본토로 뺄 수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의 병력도 마찬가지로 당장 영국 본토를 증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이 대륙 원정군 병력을 구출하지 못하면 영국 본토는 빈털터리가 된다는 뜻이었다.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다.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규모의 탈출작전이었다.
3. 작전 직전 상황
3.1. 독일군의 상황
패배라는 걸 모르고 전진해오던 독일 육군은 아라스 전차전에서 역습을 당해 당황해했지만, 이내 격퇴하고 다시 진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독일 육군 최선두부대는 사기가 드높았으며, 하인츠 구데리안은 5월 22일, 예하 1기갑사단에게 칼레로, 2기갑사단에게 불로뉴쉬르메르[4] 로, 그리고 10기갑사단에게 운명의 땅 됭케르크로 각각 진격할 것을 지시했다. 이들 3개 항구도시는 포위망 안에 있던 연합군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항구들이었으며, 독일 육군이 이들 항구도시를 진입, 점령하면 철수는 '''불가능'''했다. 천만다행히도, 이들 3개 도시에 대한 방어준비는 그 직전에 간신히 끝났는데, 여기에는 독일군이 연합군의 역습 정보를 듣고 5월 21일, 24시간 공격중지 명령을 내린 행운이 겹쳤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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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5월 25일, 독일 육군 제2기갑사단이 불로뉴를, 26일에는 제1기갑사단이 칼레를 함락시켰다. 됭케르크가 무사했던 이유는 단 하나, 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 됭케르크를 맡았던 제10기갑사단을 클라이스트 기갑군의 예비부대로 돌리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 육군은 이미 5월 24일, 됭케르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몇 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됭케르크였고, 철수는 불가능했겠지만…
독일 육군 제4군 사령부는 5월 24일을 기해, '''예하 부대에 부대간격 단축 명령'''을 내렸다.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거리가 너무 벌어졌으니 이를 좁히라는 명령이었고, 당연하게도 보병을 빨리 걷게 할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기갑부대에 이동을 정지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결정타가 내려졌다. 전선을 방문한 아돌프 히틀러가 '''전군에 진격정지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5월 26일이 되어서야 철회되었고, 독일군은 5월 27일에야 공세에 나섰다.
3.1.1. 독일군 오판의 원인
- 우선 아라스 전차전에서의 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독일군내에 선두 기갑부대가 고립되어 전멸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다. 너무 작전대로 잘 되어가자 아돌프 히틀러와 A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 등은 연합군이 반격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둘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마른 전투에서 이 같은 상황을 보았던 탓에 지휘부의 걱정은 매우 컸다. 하지만 정작 육군 총사령부인 OKH에서는 히틀러가 쓸데없이 걱정한다고 여기고, 적극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문제는 일선의 야전군사령관들의 상당수가 육군사령부의 주장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공세의 주역인 A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와 참모장 조덴슈타인은 기갑부대와 보병부대 간의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끊임없이 클라이스트에게 진격 속도를 낮추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육군 총사령부 및 최일선 장군들의 의견과 히틀러 및 일선 사령관의 의견이 완전히 대립된 상태다.
- 이런 상황에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이 '공군만으로 뒹케르크에서 연합군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고,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공격하려면 기갑부대가 꼭 필요함을 절감한 히틀러가 괴링을 믿기로 한 것이다.[5] 일설에 따르면, 에르빈 롬멜 장군은 이때부터 히틀러의 능력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지명령으로 인해, 독일군은 됭케르크 직전의 지역을 폭우가 오기 전에 통과해서 아직 방어가 상당히 허술한 됭케르크를 비교적 적은 병력만으로도 손쉽게 점령하여 연합군의 해상철수를 손쉽게 차단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진격 정지 명령이 지닌 큰 군사적인 실책 중 하나로 '''이미 아 운하를 도하하여 교두보를 만든 기갑 집단의 선견 부대들까지 운하 너머로 되돌린 것'''을 들 수 있다. 정지 명령 그 자체는 당시의 전술적 상황과 부대 운용상의 기술적 조건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는 연구자들조차 이미 만들어진 교두보에서 철수시킨 것은 큰 실수라고 지적한다. 아 운하 너머의 독일군 교두보가 사라진 동안 영불 연합군은 방어 진지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여, 철수 기간 동안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군 교두보가 소규모나마 운하 너머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면 영불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 정지 기간 동안 방어 진지 구축보다 교두보 소멸에 중점을 두고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것이기 때문에 독일군의 진격 정지 명령이 해소된 이후에는 도리어 반격을 받아 보다 적은 수의 병력만이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2. 연합군의 상황
불로뉴와 칼레의 연이은 함락으로 마지막 남은 됭케르크로 철수를 서두르던 연합군은, 독일군의 갑작스런 공격 정지에 당황하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됭케르크로의 철수를 완료했으며, 프랑스 해군 북부해군사령관(commander-in-chief of the northern naval forces)인 해군중장 장-마리 샤를 아브리알 제독[6] 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시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우주방어에 돌입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방어라 해도, 결국 독일 측 전력이 훨씬 우세한 것은 사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이들이 패해 바다 속으로 쓸려나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지휘 체계도 혼란에 빠져있어서, 서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은 프랑스 지휘부는 여전히 포위망 내외부에서의 협격이란 망상에 빠져 있었고,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3세는 5월 28일 독일에 항복한 반면 벨기에 내각은 런던으로 도망가서 망명 정부를 구성하고 항전을 선언, 지휘 체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포위된 연합군에 대한 구출을 단독으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실행하기 위한 충분한 선박을 확보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 대영제국 해군이었으나, 그만큼 영국에겐 지켜야 할 바다가 많았다. 지중해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바다에 전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충분한 철수 선박의 제공이 어려웠다. 더군다나 영국군은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철수까지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노르웨이에 파병된 부대는 규모 면에서 대륙 원정군에 비하면 수가 한참 적고 본토와의 거리는 훨씬 멀었지만, 어느 정도의 선박을 할당해야 했다.
결국 영국은 어떻게든 최소 30만 이상의 병력 철수를 위한 선박을 하나라도 더 긁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4. 작전 준비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5월 26일 첫 실행하기로 한 영국군이지만 선박이 부족했다. 영국군은 프랑스 해군, 벨기에, 네덜란드 해군[7] 에게 협조 요청을 해서 선박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선박 징발령을 내렸는데…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선박들이 몰려왔다!'''위넌트 대령 : "'''무엇이 보이십니까?'''(What do you see?)"
볼튼 중령[8]
: "'''조국..!'''(Home)"
화물선, 유람선, 트롤어선 등등 가리지 않고 650여척의 일반 선박들이 총알이 빗발치는 다이나모 해변가로 향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선박에서는 선주와 항해사들이 '''"햇병아리 놈들에게 내 배를 절대 맡길 수 없다!"'''라면서 배를 손수 몰아 됭케르크로 갔다. 심지어 징발 대상에서 제외된 소형 선박들도 우르르 몰려왔다.[9] 통통배라 불릴만한 어선들부터 시작해서, '''영국 상류층들은 레저용 호화 요트를 직접 몰고 합류했다.''' 심지어 10대 청소년들이 학교 실습용 보트를 끌고 합류해서 영국 해군은 이들을 만류하느라 온갖 고생을 했다. 한 소형 선박을 몰고 온 선주에게 관구 사령관이 "이건 진짜 전쟁입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진짜 전쟁이에요."하고 말리려 하자 그 선주는 '''"이봐요, 나는 갈리폴리 전투에도 참전했던 사람이오. 겁 안 납니다."'''하고 배를 몰고 갔다는 에피소드까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약 900여 척의 대규모 철수 선단을 확보했는데 그 중의 핵심 전력은 누가 뭐라 해도 속도가 빠른 220여척의 해군 구축함들이었다. 이때 영국 해군에서는 오직 총기함에만 게양 가능한 성 조지의 십자가가, 작전기간에는 작전에 가담한 모든 선박에 게양이 허용되었다.
그동안 서부 전선에서 온갖 굴욕을 당한 영국 공군도 반격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영국 공군의 투입 가능한 전투기가 총동원되어 됭케르크와 영불 해협의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계획했으며, 비장의 신예기인 스핏파이어도 출격을 기다렸다. 프랑스는 지상에서의 반격을 통한 포위망 돌파를 뒤늦게 포기하고, 영국 측에 자국군도 데리고 가달라고 요청하면서 지휘권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후위를 맡아 지연 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한편, 독일은 지상에서의 공세를 강화하는 가운데, 대대적인 항공 작전을 준비했다.
5. 작전 진행
영국군은 첫 이틀 동안 45,000명을 탈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정작 그동안 탈출시킨 인원은 3만 명도 채 안 되면서 영국군 지휘부는 망했어요를 외쳤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폭풍치던 영불 해협이 갑자기 고요해지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철수 작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당연히 독일군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Ju87, Ju 88, He 111 등 폭격기를 대거 투입하여 됭케르크 해안의 병력들과 철수 선단에 무차별 공격을 쏟아부었다. 또한 독일 공군은 해안가의 항구 시설도 폭격했고, 이 과정에서 물탱크가 파괴당하면서 작전 내내 항구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한 대응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작전 기간 영불 해협의 구름이 짙게 드리우면서 철수하는 선단에 대한 정확한 공격이 어려웠고, 무엇보다 본토의 기지에서 발진하여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도전해오는 영국 공군에 맞서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폭격기들을 저지하기 위해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출격했고, 연료가 간당간당해질 때까지 싸우며 됭케르크의 대학살을 막아냈다.
당시 됭게르크 전투에서의 양측 항공력의 충돌은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서곡이었다. 이 항공전을 영화화한 《Battle of Britain》(국내에서는 "공군 대전략"으로 소개) 은 철수 작전이 끝난 됭케르크를 배경으로 스토리가 시작된다.
5월 29일부터의 기상 변화로 영국군은 훨씬 양호한 상태에서 작전이 가능해졌다. 항구뿐만 아니라 해변에서도 탈출 병력의 승선이 가능해졌고, 바다가 고요해지면서 탈출선들의 항해 속도도 빨라졌다. 어느 귀족의 보트는 정원의 '''30배가 넘는''' 사람들을 태우고 무사히 도착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때 흘수선이 갑판까지 올라오는, 말 그대로 가라앉기 직전까지 갔다고. 어떤 선박은 해안에 지나치게 접근하다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자 오히려 그걸 역이용, 다른 선박을 접현시켜 안전하게 승선시키는 마치 임시 부두 같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5월 31일과 6월 1일에 걸쳐 병력 철수는 최고조에 달하였고, 이후 후위부대들의 철수가 이루어지다가 6월 4일을 기해 작전은 종료되었다.
6. 작전 결과
6.1. 철수작전은 성공
9일 동안의 작전으로 영국은 총 338,226명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철수 병력은 영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 기적과도 같은 철수로 영국 국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후 영국 대륙 원정군은 재편성을 시작했으며, 정부가 항복 혹은 망명한 네덜란드와 벨기에 군민들도 각자의 망명정부 통제하에 재조직을 시작했다. 철수 마지막날에 됭케르크를 떠났던 아브리알 제독 이하 프랑스군 병력 10만여 명은 아직 프랑스 정부가 항복하지 않았기에 본토로 재수송되어 독일군의 6월 공세를 방어하러 나섰고, 본토로의 귀환을 기다리다 독불 간에 휴전이 맺어진 후 영국에 남은 잔여 세력들 중 잔류키로 한 이들이 항복 후 망명한 이들과 함께 샤를 드 골 장군의 자유 프랑스 정부에 가담한다.
이는 가장 큰 성과로써 전시에 그것도 30만이나 되는 전문 직업군인[10] 들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킨 것이다. 전쟁이 아무리 첨단화 되어도 결국 사람손에 결정되기에 전투경험이 많은 군인들은 필수적인데, [11] 이러한 인적자원을 한번의 철수작전으로 상당수 지켜냈다는 것 자체가 연합국에게는 고무적이였다. 이들은 후일 아프리카 전선부터 노르망디를 거처 독일까지 진격하게 된다.
6.2. 프랑스군의 후방 사수
이렇게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육군 후방사수 부대는 철수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둘러싼 독일군 80만의 진격을 저지하며 됭케르크 철수작전의 성공에 큰 공헌을 했다. 이들은 프랑스 육군 제12기계화보병사단, 제68, 21, 32, 60보병사단들의 예하 부대 및 그리고 제8주아브연대였다.
후방 사수를 맡았던 이들은 철수작전이 끝날 때까지 진지를 사수했고, 최후의 부대까지 해협을 건너 도피하는데 성공하는 것을 본후, 군기가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사르고 독일군에 항복했다. 이렇게 된 프랑스 육군 병력은 3만 4천 명에 달했다. 이들의 엄호가 아니었으면 철수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됭케르크 철수에서 이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12]
6.3. 연합군의 손실
냉정하게 보면 철수가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단기적으로는 서부 전선 전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해 프랑스는 결국 항복했다. 철수 병력은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고 와야 했다. 각종 차량, 화포 등은 물론이고 소총이나 기관단총 같은 개인화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였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영국군이 버리고 온 무기는 8~10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 충분한 양이었다. 페도어 폰 보크 육군 상급대장은 자신의 일기에 '무수한 차량들, 야포, 전차와 각종 지상군 장비들이 좁디좁은 공간에 밀집해 있었으며 서로 뒤엉켜 폐기물 처리장을 방불케 했다 (중략) 여기 버려진 물자는 족히 1개 야전군 분량은 되었으며 적들의 장비는 휼륭하고 완벽해서 너무나 빈약한 장비를 가진 우리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후략)' 라고 썼다.
영국군이 버리고 간 장비는 막대한 분량의 식량과 피복, 탄약, 야포 880문, 대구경포 310문, 대공포 500문, 대전차포 850문, 기관총 11,000정, 전차와 장갑차량 475대, 오토바이 20,000대, 그리고 차량 약 6만3천대 등이었다.[13] 이때 영국 본토에는 오직 2개 사단을 무장시키는 데나 충분한 장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사실상 빈털털이 상태에서 재무장을 시작해야 했으나 영국의 산업력으로는 당장 쳐들어올 독일 공군에 맞설 전투기를 뽑기에도 벅찼다. 이들의 재무장은 결국 미국이 장비지원을 하는 걸로 해결했다. 덕분에 영국군은 194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에 ANZAC을 투입해야 했다. 대신 철수에 성공한 병력은 1943년부터 연합군 반격의 선봉이 된다.
작전 기간 동안 철수 선단은 구축함 13척, 대형 선박 9척, 그리고 소형 선박 200여 척, 총 272척이 침몰 및 파괴되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이는 기상 조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국 공군의 결사적인 반격과 엄호 덕분이기도 했다.
영국 공군은 작전 기간 동안 총 4,822 소티[14] 를 띄워 무려 177기의 전투기의 손실을 입어야 했다. 프랑스 항복까지 영국이 서부 전선에서 입은 전투기 총 손실이 432기이다. 전체 손실의 40%를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잃은 것이다. 곧 있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생각하면 엄청난 전력 손실이었으나 독일이 프랑스를 먼저 공략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전투기를 뽑아내는등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됭케르크에서 영국 공군이 보여준 투혼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Ju87에게 신나게 두들겨맞은 지상군 병력은 오히려 '공군 놈들은 독일 놈들이 폭격하고 있는데 어디서 뭐하는거냐'면서 공군을 비난했다. [15] 이런 반응이 나왔던 것은 공중전 자체가 철수 작전이 진행중인 해안가와 좀 떨어진 곳에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상공에서는 영국공군 전투기를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으로 그 결과 격추당한 조종사들이 철수 병력 대열에 합류하면 그야말로 싸늘한 시선에 푸대접을 받았다.
이 작전에서 2차대전의 명전투기로 꼽히는 스핏파이어와 Bf109가 처음으로 맞대결을 벌였으며 조종사들은 드디어 "호적수"를 만났다는 반응과 함께 서로 상대편 전투기를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더불어 영국 공군에서 투입한 전투기 디파이언트가 후방부 터렛형 무장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여 많은 독일 공군 조종사들을 당황하게 만들면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6.3.1. Wormhout 학살
작전 막바지이던 5월 28일, 무장친위대 제1기갑사단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는 됭케르크 근처의 Wormhout 마을에서 80명 가량의 영국군 포로들을 학살했다.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왕립 포병대의 브라이언 파헤이(Brian Fahey) 일병의 증언에 따르면, SS는 백 명 가량의 포로들을 한 헛간에 몰아넣고는 막대 수류탄들을 던져넣어 한꺼번에 수십 명을 살해하고 폭발 이후 살아남은 생존자 몇 명을 밖으로 끌어내어 총살해버렸다.[16]
자칫 전원이 몰살당할 뻔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제닝스(Augustus Jennings) 원사(Warrent officer class 2)와 스탠리 무어(Stanly Moore) 중사가 '''헛간에 투척된 수류탄 몇 개를 몸으로 막아내어''' 여러 생존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파헤이 일병의 경우도 그 두 부사관들의 영웅적 희생으로 생존한 경우였다. 그는 폭발 이후 독일군에 의해 끌려나와 가슴에 총을 맞았지만 다행히 즉사하지는 않았고, SS 부대가 확인 사살을 하지 않고 헛간에 공격을 재차 퍼부은 후 곧 자리를 떠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헛간 안에도 몇 명이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는데, 그들 중 알프레드 툼스(Alfred Tombs) 일병을 포함한 4명은 SS가 물러간 후 헛간을 탈출하여 다른 독일군에 포로로 잡힘으로써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파헤이 일병과 남은 생존자들은 약 이틀간 헛간에서 버티다가 근처를 지나던 독일군 부대에 구조되었다.
또다른 생존자로는 버트 에반스(Bert Evans) 일병이 있다. 그는 수류탄이 터졌을 때 오른손이 박살났지만 살아남았고, 폭발 속에서도 다친 곳 없이 멀쩡했던 제임스 린앨런(James Lynn-Allen) 대위가 그를 헛간 밖으로 끌어내어 같이 포복으로 탈출하였다. 그들은 수십 미터 가량을 기어 근처 연못에 숨어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불행히도 그곳에서 독일군 병사 한 명을 마주치고 말았다. 결국 앨런 대위는 그 독일군 병사가 쏜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하였다. 에반스 일병 또한 두 발을 맞았지만 치명상을 입었을 뿐 죽지는 않았다. 그는 근처 농가로 500미터 가량을 기어갔고, 그곳에서 만난 한 독일군 장교가 그를 야전 병원으로 직접 데려다주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7. 작전 이후
한편 프랑스에서는 됭케르크 철수, 엄밀히 말해서는 철수 후에 다시 프랑스로 상륙해서 프랑스군을 돕지 않은 것을 영국의 배반이라며 격분했는데, 항복 직후 영국 해군이 캐터펄트 작전으로 메르크 엘 케비르 공격을 감행, 자국 함대를 박살내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북아프리카에 미군이 상륙해 프랑스군과 교전하자 '''"영국놈들이 머저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신들은 다르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영국놈들하고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군!"'''라면서 까댔으며, 비시 프랑스 군대 중에는 '''연합군과 죽자살자 교전한 부대'''도 나왔을 정도였다![17]우리는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땅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윈스턴 처칠.'''
본 작전에서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던 크릭스마리네도 덩달아 쏠쏠한 부수입을 챙겼는데, 영국 원정군이 버리고 간 영국 육군 전투복(Battle Dress)이 그것이었다. 육군 기준에선 쓰기는 양이 적고 버리기는 양이 많아서 애매하던 전투복들 중 하계용을 해군이 가져다가 약간 개조하여 U보트 승조원들의 함상 작업복으로 지급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대박을 친 것. 밑단이 짧아 걸리적거리지도 않고, 갈색 계열의 색상은 기름때 등을 잘 가려 줬으며, 면의 일종인 데님은 덥고 습한 잠수함에서 기존의 모직보다 덜 덥고 잘 말랐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전용 피복을 받았다는 점이 이들로 하여금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자부심도 심어 주었다. 이런 호평에 놀란 해군은 노획품이 소진되자 비슷한 디자인의 작업복을 자체생산하여 지급해주었다.
8. 창작물에서의 등장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김모세 병장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자 허경영이 나타나 바다를 가르는 기적이 일어난다.(여기까지는 웹 연재본) 출판본에서는 나아가 운하를 세우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연합군은 운하를 타고 철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작가의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사업의 패러디인 것으로 보인다.
- 겁스 무한세계에 나오는 세계 중 하나인 라이히-1에서는 독일이 됭게르크에서 영국의 철수를 막아 영국을 무찌르는데 성공하고 소련까지 격파했으며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일본을 공격하여 최종적으로 미독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으나 북대서양에서 결국 전선이 교착된다.
- 카를로 젠의 1, 2차 세계대전의 재구성 소설인 유녀전기에서 약간 다르긴 하지만 됭게르크 철수작전과 비슷한 경우가 나온다. 군 수뇌부가 안일한 선택을 해 적의 전력을 놓아주었고, 주인공은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기회였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이 때 배경으로 보아 프랑스가 모티브인 공화국 군대는 일부 전함들까지 몰고 탈출에 성공했으며, 영국이 모티브인 왕국 함대의 엄호로 인해 제국군 수뇌부는 해군을 동원한 추격을 포기한다.
- 2015년 12월 29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다룬다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공식 발표했으며, 2017년 7월에 <덩케르크>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국내에서는 2017년 7월 20일 개봉.
- 2017년 6월부터 워게이밍에서 해당 영화 개봉 기념으로 영화 홍보를 시작한 데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육해공 컬래버레이션을 시작했다. 다이나모 작전에 관련된 영상을 많이 올리기는 했으나, 정작 메인인 이벤트의 내용은 애매한 느낌이다. PC 월탱은 북미서버에서 언제나 진행하던 Tankreward 이벤트고, 월탱 콘솔판에서는 3티어 골탱 셋 중 하나를 받는 이벤트와, 5티어가 되면서 엔진 마력이 올라간 풀업 마틸다랑, 20파운더 A바렐 달린 채리어티어를 골탱으로 묶어파는 패키지 판매가 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워플레인은 덩케르크 컨셉의 프리미엄 기체 2종을 받을 수 있는 미션이 진행되는 정도, 그나마 철수작전 PVE 시나리오모드 '다이나모 작전'[18] 을 진행하는 워쉽 쪽이 그럴싸하다.
- 월드 오브 탱크 블리츠에서 덩케르크 영화 개봉 기념으로 4.0.0 업데이트때 "덩케르크" 위장을 추가했다.
- 2017년에 제작된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선 배우 게리 올드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을 연기하였고, 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과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히틀러가 영국군들이 버리고 간 장비와 영국군의 시신을 보면서 영국군이 패잔병들의 모습을 보고 사기를 잃을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보내줬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