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기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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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고교 시절엔 코시엔 출장 경험이 없었지만 츄오 대학에서 1학년 때부터 주전을 맡아 1979년 동도대학 춘계리그, 대학야구 일본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대학 졸업 후 1980년 드래프트에서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3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입단 2년차부터 서서히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준족을 자랑하던 3년차인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풀타임 2루수로 뛰면서 .314 14홈런 49타점 27도루의 호성적을 기록했고, 이해부터 빠른 발과 좋은 타격을 주무기로 삼아 마찬가지로 빠른 발을 자랑했던 야시키 카나메, 카토 히로카즈와 함께 타이요 역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진으로 불리는 '''슈퍼카 트리오(スーパーカートリオ)'''를 결성해 타선의 리드오프의 중축으로써 활약하였다. 1984년에는 56도루로 센트럴리그 도루왕에 올랐으며,[3] 1985년부터 1986년까지는 주전 유격수였던 야마시타 다이스케[4] 와 자리를 바꾸어 유격수로 뛰기도 했다. 이후에도 3할을 넘나드는 타율과 높은 출루율, 적절한 펀치력, 빠른 발로 다이요 타선의 활력소로 자리매김한다.
팀 이름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바뀐 1993년에는 로버트 로즈가 2루수 자리를 꿰차면서 시즌의 대부분을 1루수로 뛰게 된다.[5] 성적은 .268 3홈런 42타점으로 사실상 커리어 로우를 찍었는데, 이후 요코하마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로 하면서 결국 FA로 팀을 나오게 된다.[6]
이후 닛폰햄 파이터즈와 계약을 맺고 좌익수로 뛰게 되었으나 1년차 이후 최저 타율인 .249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하락세가 완연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성적은 .297 .378 .411 1716안타 88홈런 545타점 321도루.
은퇴 이후 연예 기획사인 선 뮤직과 계약해 연예인(!)으로 데뷔,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후지 TV의 야구 해설자를 거쳐 2001년에 친정팀인 요코하마의 코치로 부임해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1년만에 사임, 다시 해설자로 복귀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12년에는 요코하마의 수석코치로 부임해 2년간 활동했다.
2018년부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야구 관련 동영상을 만들면서 활동중이며, 주로 코코큐지(孝行球児)[7] 란 2명의 꼬붕들(?)과 함께 자신의 현역 시절 이야기, 야구에서 발생하는 여러 플레이 재현, 야구이론 설명 영상 등을 주로 올리는 중. 타 유투버들과도 콜라보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에가와 스구루''', 오쿠보 히로모토,마나카 미츠루 등 거물 야구선수들까지 게스트로 불러 대담을 나누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개설한지 반년도 안 되어 '''구독자 2만명'''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참고로 올라온 영상 중엔 '''우노 마사루의 전설의 헤딩 사건'''을 재현한 것도 있다(...) #채널 링크
슬하에 아들이 세 명 있는데, 재미있는 건 세 명 모두 축구를 좋아해 축구선수가 되었다는 것. 세 명 모두 도쿄 베르디 유스 출신인데, 장남인 타카기 토시유키는 우라와 레즈에서 뛰고 있으며, 차남인 타카기 요시아키와 삼남인 타카기 다이스케는 도쿄 베르디에서 뛰고 있다. 이에 대해 타카기 유타카는 자신이 야구선수라고 해서 자식들도 야구선수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고 한다.
2010년 출시된 도쿄여자류의 頑張って いつだって 信じてる 원곡이 이 사람 응원가다. 웨일스 시절엔 다른 응원가를 썼으나 베이스타즈로 바뀌며 해당 곡을 사용했다. 이후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물려받았다가 호크스로 이적한 뒤엔 주인이 없다.
이쪽이 타이요 시절 응원가. 가사는 위에 적혀 있듯 매우 심플하지만 그 심플함의 매력 덕분에 오늘날까지 타이요 최고의 응원가 중 하나로 고평가를 받는다.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2. 선수 시절
고교 시절엔 코시엔 출장 경험이 없었지만 츄오 대학에서 1학년 때부터 주전을 맡아 1979년 동도대학 춘계리그, 대학야구 일본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으며 대학 졸업 후 1980년 드래프트에서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3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입단 2년차부터 서서히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준족을 자랑하던 3년차인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풀타임 2루수로 뛰면서 .314 14홈런 49타점 27도루의 호성적을 기록했고, 이해부터 빠른 발과 좋은 타격을 주무기로 삼아 마찬가지로 빠른 발을 자랑했던 야시키 카나메, 카토 히로카즈와 함께 타이요 역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진으로 불리는 '''슈퍼카 트리오(スーパーカートリオ)'''를 결성해 타선의 리드오프의 중축으로써 활약하였다. 1984년에는 56도루로 센트럴리그 도루왕에 올랐으며,[3] 1985년부터 1986년까지는 주전 유격수였던 야마시타 다이스케[4] 와 자리를 바꾸어 유격수로 뛰기도 했다. 이후에도 3할을 넘나드는 타율과 높은 출루율, 적절한 펀치력, 빠른 발로 다이요 타선의 활력소로 자리매김한다.
팀 이름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바뀐 1993년에는 로버트 로즈가 2루수 자리를 꿰차면서 시즌의 대부분을 1루수로 뛰게 된다.[5] 성적은 .268 3홈런 42타점으로 사실상 커리어 로우를 찍었는데, 이후 요코하마가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로 하면서 결국 FA로 팀을 나오게 된다.[6]
이후 닛폰햄 파이터즈와 계약을 맺고 좌익수로 뛰게 되었으나 1년차 이후 최저 타율인 .249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하락세가 완연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성적은 .297 .378 .411 1716안타 88홈런 545타점 321도루.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 연예 기획사인 선 뮤직과 계약해 연예인(!)으로 데뷔,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후지 TV의 야구 해설자를 거쳐 2001년에 친정팀인 요코하마의 코치로 부임해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1년만에 사임, 다시 해설자로 복귀했으며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12년에는 요코하마의 수석코치로 부임해 2년간 활동했다.
2018년부턴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야구 관련 동영상을 만들면서 활동중이며, 주로 코코큐지(孝行球児)[7] 란 2명의 꼬붕들(?)과 함께 자신의 현역 시절 이야기, 야구에서 발생하는 여러 플레이 재현, 야구이론 설명 영상 등을 주로 올리는 중. 타 유투버들과도 콜라보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에가와 스구루''', 오쿠보 히로모토,마나카 미츠루 등 거물 야구선수들까지 게스트로 불러 대담을 나누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개설한지 반년도 안 되어 '''구독자 2만명'''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참고로 올라온 영상 중엔 '''우노 마사루의 전설의 헤딩 사건'''을 재현한 것도 있다(...) #채널 링크
4. 기타
슬하에 아들이 세 명 있는데, 재미있는 건 세 명 모두 축구를 좋아해 축구선수가 되었다는 것. 세 명 모두 도쿄 베르디 유스 출신인데, 장남인 타카기 토시유키는 우라와 레즈에서 뛰고 있으며, 차남인 타카기 요시아키와 삼남인 타카기 다이스케는 도쿄 베르디에서 뛰고 있다. 이에 대해 타카기 유타카는 자신이 야구선수라고 해서 자식들도 야구선수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고 한다.
2010년 출시된 도쿄여자류의 頑張って いつだって 信じてる 원곡이 이 사람 응원가다. 웨일스 시절엔 다른 응원가를 썼으나 베이스타즈로 바뀌며 해당 곡을 사용했다. 이후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물려받았다가 호크스로 이적한 뒤엔 주인이 없다.
이쪽이 타이요 시절 응원가. 가사는 위에 적혀 있듯 매우 심플하지만 그 심플함의 매력 덕분에 오늘날까지 타이요 최고의 응원가 중 하나로 고평가를 받는다.
[1] 현 타카가와가쿠엔 고등학교[2] 센트럴리그 최다 시즌 도루 기록[3] 다만 도루 실패도 28번으로 리그 최다였다. 타카기 유타카의 통산 도루 성공률은 64.3%인데(321도루 178실패) 이는 NPB 역사상 300도루 이상을 기록한 선수들 중에 최저 성공률이다.[4] 다이요의 또다른 프랜차이즈 스타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 연속으로 다이아몬드 글러브(현재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당대 정상급 수비형 유격수였다.[5] 단, 이해 시즌 개막전에선 3루수를 맡았다. 참고로 이날 타카기는 1번 타자(선두타자)로 출장했기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대 최초의 타자(선두타자)가 되었다.[6] 한편으로는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강타자 1루수였던 코마다 노리히로의 FA 선언도 영향이 있었다. 센트럴리그에 속한 간토지역 팀에 가고 싶어했던 코마다와 요코하마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결국 코마다는 요코하마 유니폼을 입게 되는데, 이에 맞춰서 타카기를 포함한 베테랑들을 대거 방출한 것은 코마다를 영입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로 통하고 있다.[7] 일본의 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을 가르키는 高校球児와 발음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