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마다 노리히로

 


* 야구 관련 인물(NPB)
코마다 노리히로(駒田徳広)
생년월일
1962년 9월 14일
국적
일본
출신지
나라현 시키 군 미야케 정
학력
나라 현립 사쿠라이 상고
포지션
1루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0년 드래프트 2위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1981~199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1994~2000)
지도자 경력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05)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군 타격코치 (2009)
고치 파이팅 독스 감독 (2016~2019)
1. 개요
2. 데뷔 이전
3. 선수 생활
4. 은퇴 이후
5. 기타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자, 평론가.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고치 파이팅 독스 감독.
현역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주전 1루수로 활약하면서 요미우리의 4차례의 리그 우승과 1989년 일본시리즈 역전우승, 요코하마의 1998년 38년 만의 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거구의 1루수임에도 불구하고 거포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갭파워를 앞세운 중장거리형 타자였으며, 정작 가장 높게 평가받은 부분은 골든글러브를 10회 수상한 수비력[1]이었던 독특한 스타일의 선수.
만루 상황 때 강한 모습을 보여서 '''만루의 사나이(満塁男)'''란 별명을 가졌다.

2. 데뷔 이전


초등학교 시절부터 신체능력과 운동신경이 좋아서 야구 이외에 수영도 할 정도였다.[2] 이후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게 된다.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는 1학년 때 우타자였다가 2학년 때부터 좌타자로 전향했는데, 그후 프로 은퇴 때까지 계속 좌타자로 뛰게 된다.
중학교 시절엔 장신이었긴 했어도 장타를 날릴 만한 힘은 아니었기에 주로 2번타자로 뛰며 단타를 많이 날리는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체격이 갖춰지면서 야구부의 에이스 투수 겸 4번타자로 활약하며 통산타율 .490와 43홈런을 기록했다.[3] 하지만 예선에서 번번히 물을 먹으며 코시엔 출장은 단 1번도 못 이뤘다(...)

3. 선수 생활


1980년, 드래프트 2위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한다.[4]

3.1. 요미우리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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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후 코마다는 투수로 뛰는 것에 한계를 느껴, 당시 감독이었던 후지타 모토시에게 직접 타자 전향을 직소하여, 허락을 받아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다만 선수등록은 여전히 투수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후 2년간 2군에 머물러 있다가 1983년 오픈전(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남겨 개막 1군 선수진에 들어가는 데 성공. 그후 개막 2차전인 VS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戰에서 시합 전 연습 중에 부상당한 나카하타 키요시를 대신하여 7번타자 1루수로 선발출장. 그후 첫 타석에서 무려 '''NPB 최초'''의 '''프로 첫 타석 만루홈런'''이란 엄청난 기록을 달성하였고[5], 이해 86시합 출장에 타석수는 고작 199타석뿐이었음에도 52안타 '''12홈런''' 47타점 타율 .286을 기록하여 두 자릿수 홈런을 치며 요미우리의 크나큰 기대를 받는 신예로서 주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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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팅 케이지 뒤에서 지켜보는 배번 1번은 외다리타법의 1인자 오 사다하루 당시 감독이다.
하지만 이후 3년 동안은 외다리 타법으로 타격폼을 바꿨다가 성적부진으로 다시 타격폼을 바꾸는 등 타격폼 변경에 의한 부진 등으로 인해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다. 그러다가 1986년 시즌 후반기 당시 2군 코치였던 마츠바라 마코토[6]의 지도를 받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홈런 위주의 어퍼스윙 타격 스타일을 버리고 레벨스윙의 타격 스타일을 확립한다.
그후 1987년부터 출장기회를 크게 늘려가기 시작한 코마다는 시즌 후반 마츠모토 타다시[7]에게서 주전 외야수 자리를 빼앗았고[8] 1988년 등번호를 '''10'''번으로 바꾼뒤 드디어 선수생활 처음으로 규정타석 만족에 성공[9], 타율도 리그 4위를 기록하며 주전에 완전히 정착하여 이후 요미우리의 주전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이듬해인 1989년, 당시 주전 3루수였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10], 주전 1루수였던 오카자키 카오루가 3루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되면서 코마다가 대신 1루수로 전향하게 되었고, 이해 "공포의 7번 타자"로 불리며 125안타 11홈런 56타점 10도루[11] 타율 .303을 기록. 이해 생애 첫 골든글러브(1루수)를 획득하며 팀의 2년 만의 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한다. 이후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도 '''타율 .522, 1홈런 5타점'''에 우승이 결정된 7차전에서 선발투수 가토에게 선제 홈런을 날려 킨테츠 버팔로즈리버스 스윕패의 나락에 몰아넣으며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해부터 주로 1루수로 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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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엔 7번 타자로 뛰며 22홈런 83타점으로 팀 최다 타점을 기록했고 생애 처음으로 올스타전 출장(팬투표로 선출)을 달성하기도 하며 2년 연속으로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 1991년엔 3번 타자로 출장하며 팀 최고타율 겸 본인 생애 최고타율인 .314를 기록, 3년 연속으로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주전선수로써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다. 이해 8월 22일 도쿄 돔에서 열린 VS 주니치 드래곤즈 戰에서 '''프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내기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1992년엔 아킬레스건 통증으로 인해 주전 3루수였던 하라 타츠노리1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다시 외야수로 전향했다. 그러나 타율 .307에 개인 최다의 27홈런을 기록하고 올스타전 MVP까지 수상했으나 타점이 고작 64점에 득점권타율 '''.231'''의 전형적인 찬스 상황에 약한 타자의 모습을 보여주어[12] 골든글러브 4년 연속 수상에도 실패한다.
다음해인 1993년에는 하라 타츠노리가 다시 3루수로 포지션을 바꾸며 1루수로 재전향. 그러나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타격부진에 빠지면서 이 해 1990년부터 시작된 연속 풀이닝 시합출장[13]기록과 1989년부터 시작된 연속시합출장 기록[14]이 각각 307시합과 450시합에서 멈춰버렸고 '''타율 .247. 7홈런 39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보다 성적이 더 심하게 추락하고 말았다.[15] 다만 이 해 골든글러브를 2년만에 수상하기도 한다.[16]
그 후 코마다는 새롭게 도입된 FA 제도 행사를 선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게 된다.[17][18] FA를 선언해 요미우리를 나간 이유는 나카하타 키요시 등의 구단 수뇌진들과의 불화도 원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강타자이자 코마다와 똑같은 주전 1루수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한 것 때문에 주전 자리와 출장기회를 뺏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로 추측된다.[19]
아무튼 요미우리에서 고쿠보 히로키, 오오무라 사부로 등 前 소속구단에 FA로 돌아간 사례,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등 주전에서 벗어나 백업으로 머물다가 구단에 사실상의 전력 외 통보를 받아 FA를 선언해 퇴단한 사례가 있지만, 주전선수가 요미우리에서 FA로 일본프로야구의 타 구단에 이적한 것은 현재까지 코마다가 유일하다.

3.2.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image]
요코하마로 이적한 첫해인 1994년, 개막 초엔 3번타자로 뛰며 호성적을 남겼지만, 갈수로 점점 성적이 저하하면서 중반부터는 6번 타자로 주로 출전하게 된다. 성적은 타율 .284, 13홈런 68타점이었으며 리그 최다 2루타(33개)를 기록했지만 반면 리그 최다 병살타(29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요코하마에 이적한 후론 주로 2루타를 양산하는 2루타머신으로써 활약하게 된다.
그 후 1995년엔 타율은 .289로 살짝 올랐으나 6홈런 66타점을 기록하며 파워가 하락하여 홈런 갯수가 심하게 낮아지게 된다. 이후 발을 크게 올리는 타격폼을 때때로 시험해 보게 된다.
1996년엔 5,6월쯤까지 좋은 기세를 보이며 이적후 첫 3할 타율이 기대되었으나, 후반기 들어 실속을 거듭하며 결국 타율 3할에 딱 1리 모자라는 타율 .299에 그쳤다. 대신 후반기에 배트를 눕히는 방식으로 타격폼을 개조하며 10홈런을 기록. 다시 두 자릿수 홈런을 날렸고 이해 8월 22일 도쿄 돔에서 열린 친정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합에서 만루 홈런을 날리면서 센트럴리그 전 구단에게 만루 홈런을 빼앗는 대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근데 타점은 63점으로 더 떨어진게 함정(...)
1997년엔 주로 5번 타자로 출장. 전년도보다 더 오른 타율 .308, 12홈런 86타점을 기록하며 5년만에 3할 타율을 달성. 타점도 개인최다 기록을 찍었다.
그 후 이듬해인 1998년, 새로 취임한 곤도 히로시 감독 휘하에서 머신건 타선의 주축 5번 타자 겸 주장으로 활약하며 타격성적은 시즌 막판 부진에 빠지면서 타율 .281, 9홈런 81타점으로 전년보다 하락한 성적을 기록했으나 만루의 사나이답게 만루 상황 등 찬스 때 좋은 활약을 펼치며 81타점을 기록, 팀의 38년 만의 2번째 센트럴리그 우승에 대공헌했고 본인도 이해 생애 유일의 베스트나인을 수상하게 된다. 일본시리즈에선 4차전까지 시즌 막판의 부진이 계속되며 고작 2안타로 부진했지만 5차전에서 만루 적시타를 포함한 4안타 5타점으로 대활약하며 부진을 벗는데 성공, 6차전에서도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결정지는 2타점 적시 2루타를 날리며 이 해 시즌과 마찬가지로 팀의 38년 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에 대공헌하며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한다. 그러나 시즌오프 때 야구교실에서 부상을 당하여 수술을 받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99년에도 마찬가지로 타율 .291, 9홈런 71타점과 25시합 연속안타, 12년 연속 100안타의 좋은 성적을 남겼지만[20], 1993년 시즌 말부터 이어진 739시합 연속 출장이 끊기며[21] 2번째로 연속출장 기록이 끊기는 일을 맛보기도 한다(...)
그후 2000년, 대망의 2000안타까지 불과 73안타만 남은 상황이 되었으나, 수뇌진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성적부진에 빠진다.[22] 한때는 2000안타 달성을 그만두고 바로 은퇴를 하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였으나, 은사였던 오 사다하루의 수필 편지를 받고 개심하여 선수생활을 지속, 결국 9월 6일 대망의 2000안타를 달성하며 명구회에 들어간다. 그 후 구단 측에서 은퇴를 권고했으나 거부하여, 결국 시즌 말 전력외통보를 받는다. 전력외통보를 받은 후 현역생활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나, 그를 부르는 구단은 없었고, 결국 이듬해인 2001년 1월 은퇴를 선언하며[23]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
코마다의 통산 성적은 아래와 같다.
출장시합
2063
타석 - 타수
7598 - 6941
득점
810
안타
2006
2루타
357(통산 34위)
3루타
27
홈런
195
타점
953
도루 - 도루사
35 - 35(통산성공률 50%)
희생타
28
희생플라이
47
사사구 - 삼진
582 - 1113
병살타
229(통산 11위[24])
타율
.289
출루율
.342
장타율
.433
만루 상황 성적
타율 .332, 13홈런(통산 5위), 200타점
베스트나인 수상
1회[25]
골든글러브 수상
10회[26]
일본시리즈 타이틀
1989년 MVP, 1998년 우수선수상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엔 야구 해설가, 평론가 등을 일하다가 2005년 신생구단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군 타격코치로 취임한다. 그러나 성적부진으로 시즌 초부터 2군 타격코치로 강등되었고,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
그 후 또다시 야구평론가로 일하다가[27] 2009년 제2의 친정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타격코치로 부임한다. 그러나.. 작년 리그 5위긴 했지만 3,4위였던 요미우리와 야쿠르트랑 불과 2리 차의 .266이었던 팀 타율을 리그 꼴찌의 .239로 떨구는 무능함을 보이면서 결국 한 해만에 다시 해임되고 만다(...)
요코하마 이후엔 또다시 야구해설가, 평론가로 일하면서 치바 롯데 마린즈, 토키와대학의 임시코치를 맡기도 하다가 2016년부터 일본의 야구 독립리그 팀인 고치 파이팅 독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4년 간 감독을 맡았고 2019년 퇴임했다.

5. 기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응원가는 요코하마 역대 응원가뿐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역대 응원가 중 가장 많은 호평을 받는 응원가 중 하나로 유명하다.[28] 나중에는 좌타 거포 유망주 나이토 유타에게 이어졌으나 나이토는 주전 자리조차 차지하지 못하고 방출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白い流れ星 大きく舞い上げろ 
하얀 유성을 커다랗게 흩날려라
시로이 나가레보시 오오키쿠 마이아게로
冴えたホームラン 見せてよ駒田
선명한 홈런을 보여줘 코마다
사에타 호ㅡ무랑 미세테요 코마다
반면 요미우리 시절 응원가는 다른 일본 선수들과 다름없이 신나는 분위기이지만, 얼굴이 귀엽다는 가사 때문에 병맛 응원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顔はかわいい駒田 打ったボールは一級品
얼굴은 귀여운 코마다 친 공은 일품
카오와 카와이 코마다 우타 보루와 잇큐우힌
打て打てジャンボだ 一発駒田 ライトスタンドへ
쳐라 쳐라 점보다 한방 코마다 라이트 스탠드에
우테 우테 잔보다 잇파츠 코마다 라이토 스탄도에

[1] 단 최근의 세이버메트릭스적 분석에서는 수비 지표가 바닥을 긴다. 보살이 매우 적기 때문인데, 안정적인 포구 능력을 주 무기로 내야 세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를 땄지만 정작 좁은 수비범위로 인해 세이버메트릭스적으로는 최악의 평가를 받는 타츠나미 카즈요시와 비슷한 케이스.[2] 대회에서 상위성적을 기록했을 정도.[3] 당시 지역 매스컴에서 '''"나라현찰리 매뉴얼"'''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또 고교 시절 코마다가 타격연습을 할때면 교내방송으로 타구 방향에 조심하라는 안내방송이 많이 나왔을 정도. 고교에 와서 비로소 장타를 뻥뻥 칠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됐던 거였다.[4] 입단동기가 무려 '''보살동님'''. 본래는 코마다도 하라보살의 모교인 도카이대학 진학을 염두해뒀으나 당시 후지타 모토시 감독이 냅다 2순위로 지명하면서 요미우리에 투수포지션으로 그대로 입단을 수락했다.[5] 이 기록은 최단타석 만루홈런 기록(물론 전혀 깨질 수 없는 기록이다.)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참고로 그 전에 이 기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퍼시픽 리그 한큐 브레이브스의 '''350승 투수''' 요네다 테츠야(1956년 데뷔후 4타석 만에 달성)였다. 지명타자는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1975년에 도입되었다는 걸 기억하자.[6]타이요 훼일즈무관의 제왕 맞다.[7] 1982, 83년 2년 연속 센트럴리그 도루왕. 1983년 세운 76도루는 센트럴리그 통산 시즌 최다 도루 기록이다.[8] 결국 마츠모토는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9] 이후 1999년까지 13년 연속으로 규정타석 만족에 성공한다.[10] 결국 나카하타도 부상으로 인한 성적 부진 때문에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11] 코마다가 선수생활 동안 유일하게 기록한 두 자릿수 도루다.[12] 이 해 득점권 여포짓을 한 타자는 나카오 다카요시와 맞트레이드되어 세이부에서 이적해온 오쿠보 히로모토. 오쿠보는 이해 코마다의 입단동기인 4번타자 하라를 받쳐주는 요미우리의 5번타자로 활약, 꼴찌로 추락하던 요미우리를 우승권으로 끌어올렸다.[13]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99년 7월 21일부터 2010년 4월 17일까지 1,492경기, 13,686이닝[14] 일본프로야구 기록은 기누가사 사치오 2,215경기이며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칼 립켄 주니어가 2,632경기로 갱신했다.[15] 입단동기인 하라도 에이징 커브가 오면서 2년 후 은퇴한다.[16] 이후 요코하마로 이적한 94~99년까지 포함해 7년 연속으로 수상한다.[17] 당시 간토 지역의 구단으로 이적하길 원했던 코마다와 前 요미우리 수석코치 출신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콘도 아키히토 감독이 코마다의 영입을 원했던 것등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았기 때문에 요코하마로 이적했던 것이었다. 은사였던 후지타 모토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고. 정작 코마다는 간사이 출신인건 함정.[18] 이해 요코하마 구단은 훼일즈 시절이던 1980년대의 주전이었던 타카기 유타카, 야시키 카나메, 다이몬 카즈히코, 야마자키 켄이치, 이치카와 카즈마사, 마츠모토 유타카 등 무려 6명의 베테랑 선수들을 젊은 선수 중심의 팀 재편을 명목삼아 방출시켰는데, 이 방출의 실상은 코마다를 영입하기 위한 FA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19] 1996년 요미우리가 1993년과 마찬가지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강타자이자 주전 1루수였던 기요하라 카즈히로를 FA로 영입하자 오치아이 히로미츠도 이에 반발해 코마다와 마찬가지로 구단에 자유계약을 신청해 요미우리를 퇴단.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하게 된다. 다만 코마다와는 달리 오치아이는 이미 황혼기인 40대였고 무엇보다 노쇠화로 기량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오래 뛰지 못하고 2년 후 은퇴한다.[20] 하지만 이 해 팀 타선이 '''타율 .294'''란 무시무시한 성적을 기록하는 바람에 .294보다 더 낮은 타율을 기록한 코마다가 저조한 성적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21] 요코하마 시절만 포함하면 딱 1시합을 뺀 738시합인데, 이 기록은 구단사상 최다 연속출장기록이다.[22] 결국 이해 규정타석 만족에 실패하며 연속기록이 끊긴다. 마찬가지로 골든글러브 수상에도 실패하여 연속기록이 끊긴다. 이 와중에 대타 기용 문제 등으로 격분해 경기도중 팀을 이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3] 하지만 현역생활 지속에 대한 욕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은퇴선언 기자회견에서도 '''"1주일 후에 (선수로) 뛰어주지 않겠냐고 (어느 구단에서라도) 부르면 그렇게 하겠다"''' 라고 말하며 그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부르는 구단은 여전히 없었다.[24] 오오시마 야스노리, 코다마 하루토시와 공동[25] 1998년(1루수 부문)[26] 1989~1991, 1993~1999년(전부 1루수 부문)[27] 2006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프링캠프에서 임시로 '''이승엽'''의 개인 1루수비 코치를 맡기도 했다. 여담으로 본인도 입단동기인 하라다쓰노리, 이승엽처럼 요미우리 역대 4번타자 명단에 있다.[28] 90년대의 요코하마 선수 응원가는 다른 구단의 선수 응원가와 비교하여 작곡센스가 뛰어나다고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