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히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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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오쿠보 히로모토 (大久保博元)
'''생년월일'''
1967년 2월 1일
'''국적'''
일본
'''출신지'''
이바라키 현 히가시이바라키 군 오오아라이 정
'''학력'''
이바라키현립 미토 상업 고등학교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세이부 라이온즈 (1985~1992)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2~1995)
'''지도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08)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군 타격코치 (2010)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2)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군 감독 (2013~201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5)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역대 감독'''
호시노 센이치
(2011~2014)

'''오쿠보 히로모토'''
'''(2015)'''

나시다 마사타카
(2016~2018.6)
1. 소개
2. 선수 시절
3. 은퇴 후
3.1. 지도자 시절
4. 논란
5. 기타


1. 소개


일본의 전 야구선수이자 야구 해설가, 연예인, 프로 골퍼, 야구 지도자. 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연예인으로서의 예명은 데이브 오쿠보 (Dave Okubo, デーブ大久保)[1]

2. 선수 시절


미토상고[2]를 졸업하고 1984년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부터 장타력으로 주목받았으며, 입단 2년차인 1986년에는 미국 마이너리그 싱글A 팀 산호세 비즈(San Jose Bees)에서 연수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세이부에는 획고한 주전 포수 이토 쓰토무가 건재했기에, 주로 이토의 백업 포수나 대타로 출장했다.
세이부 시절 시련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 계기는 모리 마사아키 감독과의 만남이었다. 전임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과 비슷하게세밀한 야구 스타일을 중시하던 모리와는 맞지 않았다. 연습때의 일화로 이시게 히로미치, 쿠도 키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본인, 이토 쓰토무 순서로 일렬로 워밍중인데, 모리 감독이 나타나 한 명씩 이야기를 걸다가 오쿠보를 무시하고 바로 이토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모습에 아연실색했으며 이 팀은 주전한테만 감독이 말을 걸어주는가 생각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음식량에 대해 언급하자 오쿠보는 오히려 '리필 부탁합니다!'라고 반항한적이 있었기 때문에 2군에서 비록 실적을 내어 1군에 승격해도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대타 기용 시 한 타석에 결과를 내지못하면 바로 2군으로 돌아가는 식을 반복했다. 우승 축승회에서도 오너가 '오쿠보도 이번 우승 여행에 데리고 가는거지?'라고 감독에 묻는 것을 보고, 오쿠보는 본인이 모리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1992년 시즌 도중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포수 나카오 타카요시(中尾孝義)[3]와 맞트레이드 되어 이적하게 되는데, 이게 오쿠보의 야구인생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요미우리에서 그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주전 포수로 맹활약했고, 규정타석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타율 0.277, 15홈런, 43타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야구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특히 그 해 오쿠보가 홈런을 때려낸 경기에서 요미우리는 무조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오쿠보가 치면 지지 않는다(大久保が打てば負けない)"'''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1992년 시즌이 끝난 이후 감독이었던 후지타 모토시가 물러나고 나가시마 시게오가 부임하였고 당시 기존의 주전포수 무라타 신이치가 부상 복귀 후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오쿠보는 1군 백업[4]과 대타를 전전하다가[5]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통산 성적은 10시즌 303경기 696타석 635타수 158안타 41홈런 100타점 75득점 타율 .249.

3. 은퇴 후


1995년 시즌 후 28세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 그는 '''데이브 오쿠보''' 라는 예명으로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했다. 또한 탤런트로 TV에 출연하고, 프로 골퍼로도 뛰었다.

3.1. 지도자 시절


그렇게 야구에서 멀어져 가는가 했는데, 2008년 친정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1군 타격코치로 야구계에 전격 복귀한다. 그 후 2010년에 세이부 2군 타격코치를 1시즌 맡다가, 2012년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타격코치로 선임되었다. 2013년에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되어 2014년까지 2군을 지휘했으며, 2015년 시즌을 앞두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성적 악화와 지병을 이유로 물러나자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개막전부터 한번도 A클래스에 진입하지 못하며 오릭스와 꼴찌를 다투다가 8월 28일에 사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결국 라쿠텐은 2년 연속 최하위. 후임 감독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마지막 감독 이었던 나시다 마사타카.
선수시절란에 상술한 모리 감독과의 일화를 덧붙이면, 오쿠보 본인이 지도자가 된 뒤 모리의 참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실력도 없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선수는 감독이 사용할 이유가 없다. 본인을 분발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선수는 감독이나 코치가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선수시절 모리와의 일화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쿠보 본인이 세이부 1군 타격코치로 재직할 때는 게임에서 뛰지 않는 선수들에게 말을 걸고 고민을 들어주었다.

4. 논란


나카무라 타케야의 각성에 기여[6]하는 등 타격코치로써의 지도능력은 상당한 수준으로써 야구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인물이지만, 문란한 사생활과 강압적 지도방식, 선수들에 대한 폭행 논란 등 여러 구설수에 끓임없이 오르내렸으며 심지어 자신에게 대드는 외국인 선수인 이람 보카치카를 '''"밖으로 나와!"''' 하면서 폭행하려 했을 정도로 기질이 다혈질에 강압적인 스타일이다. 물론 당시 용병이었던 보카치카도 개차반같은 성깔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점이 많다는점도 있긴 하다.
2008년에는 내연녀와 혼외자녀까지 둔 사실이 드러나고 이 내연녀를 폭행해서 입건당하기도 했으며 2010년에도 선수들에게 강제 벌금을 먹이고 폭행까지 행사하는등 물의를 많이 일으켰다. 사실 알려진 정도가 이정도이지 오쿠보 히로모토가 선수들을 상습 폭행하고 욕설을 한다는 소문은 이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논란 속에서도 야구계에서 일감이 끓이지 않고 결국 프로야구 감독자리까지 꿰찼다는건 그런 논란 속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기도 하고, 또 하나는 높으신 분들에게 처세술을 잘 발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논란중 하나라도 한국프로야구에서 벌어졌다면 해당 선수나 감독은 야구계에서 일감을 얻는게 불가능해지는 상황인데 끓임없는 구설수 속에서도 결국 지도자 복귀에 성공하는걸 보면 한국 야구계와 일본 야구계의 분위기 차이일수도 있다.
오쿠보의 이러한 행보가 가능했던 데에는 1992년 요미우리에서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오쿠보가 요미우리로 트레이드될 당시 요미우리는 4~5위권을 헤매는 중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우승만이 목표인 팀이 시즌 중반이 되도록 그 위치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되지 않고 후지타 모토시 당시 감독의 시즌 도중 경질설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자마자 오쿠보가 세이부에서 트레이드 되자마자 상술한 활약으로 팀을 상승세에 올려놓으면서 단숨에 우승 경쟁에 뛰어들게 했다. 비록 1위부터 최하위까지 9.5경기 차밖에 나지 않는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팀은 당시 노무라 카츠야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우승을 내주고 2위에 머물러야 했지만, 와타나베 츠네오 구단주가 친히 금일봉을 하사할 정도로 임팩트가 큰 활약을 했다. 사실 요미우리에서의 활약도 1992년 한 해 반짝이었는데 이 해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요미우리 OB회에서 조차 인정을 할 정도였고 타 팀 출신으로서는 그 어렵다는 '''5두품 인증'''[7](...)을 받는데 성공할 정도였다.[8] 그래서 연예계 활동 당시에도 자이언츠의 본사인 NTV가 든든한 뒷배경으로 작용해 주는 등 요미우리에 잠깐 적을 두었던 다른 타팀 출신과는 달리 방송에서의 대접은 다른 요미우리 OB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5. 기타


  • 둔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9] 운전면허 시험의 레전드라고 한다. 중형/대형/대형이륜 면허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 한류 드라마에서 한 노인이 한 말에 감명을 받아 수첩에 기재했다고 한다. '비단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의 말만큼 아름답지 않다. 반면에 뱀이 아무리 추하고도 인간의 말 정도로 추악하지 않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실크인지 뱀인지 알아야 인간이다.'

[1] 현역시절 뚱뚱한 체형 때문에 일본어로 뚱보를 뜻하는 데부(デブ)가 별명이었는데, 미국 연수 당시 통역이었던 와다 히로미 코치가 이 별명을 착안, 데부와 일본식 발음이 같은 데이브(デーブ, 데이브의 일본식 발음과 일치)를 영어이름으로 쓸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2] 학교 및 라이온즈의 대선배로 토요다 야스미츠가 있고, 후배로는 이가와 게이가 있다.[3] 1982년 주니치 드래곤즈의 주전 포수로 센트럴리그 MVP를 차지한 뒤 1989년 요미우리로 트레이드 되었다. 현 한신 타이거스 스카우트 부장.[4] 하지만 백업임에도 세이부에선 상상도 못해본 4번타자로 선발출장까지 해봤다. 이로써 단 두경기이지만 '''요미우리 제59대 4번타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5] 94년의 경우 대타와 두번째 포수로 팀에 공헌했고, 1994년 친정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 동점 홈런을 치기도 했다.[6] 오카와리 군을 포함한 젊은 세이부 강타자들의 기량 향상에는 후임 타격코치인 도이 마사히로의 공도 있다.[7] 관련해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항목의 '''순혈주의''' 단락 참조[8] 그나마 가장 비슷한 케이스는 한큐출신으로 30-30클럽에 두번이나 가입한 미노다 고지. 뭔말인지는 여기를 참조.[9] 체중이 108k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