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투스

 



1. 개요
2. 생애
3. 서술 성향
4. 여담


1. 개요


푸블리우스(혹은 가이우스(Gaius))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120?). 저술가이자 정치가로서, 자신의 장인이자 로마의 명장이었던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일대기에 대해 다룬 아그리콜라(Agricola), 게르만 족에 대해 쓴 게르마니아(Germania)와 네로 사후 내란기에서부터 네르바까지의 로마 제국을 서술한 역사(Historiae), 그 이전 황제 시기를 다룬 연대기(Annals)[1]가 있다.

2. 생애


알프스 남부의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2]으로 부유한 환경[3]에서 태어나 로마로 가서 공부를 하고[4] 타키투스는 연설과 더불어 정치적인 성공을 갈망하여서 정치계로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당대 젊은이들이 첫 공직으로 꼽는 '10인 위원회'의 멤버로 들어가고 20살 무렵에는 천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에는 원로원 의원이자 유능한 장군인 아그리콜라의 딸[5]을 아내로 맞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티투스 황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걸쳐 재무관, 호민관, 법무관 등의 정무관 코스를 거치며 원로원 계급에 편입된다. 특히 법무관 시절에는 로마의 종교의식을 담당하는 중요한 집단인 '15인 사제단'에 들어가게 되고 로마를 나와 군단의 고문을 맡기도 한다.[6]
93년에는 타키투스는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 그가 몸담고 있던 원로원은 여러 의원들을 고발해 숙청하던 도미티아누스와 대립 중이었다. 그럼에도 타키투스는 다행히 황제를 필두로 한 감찰관들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제정에 대한 거부감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티내지 않은 인사인데다 유연하게 어느 정도 제정을 인정하는 비교적 온건한 세력 쪽에 속했기 때문이다.
96년, 도미티아누스가 황후와 근위대장 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한 뒤, 새 황제로 로마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인 네르바를 지명해 잇게 한다. 네르바 때 타키투스는 집정관에 당선되게 됐으며, 98년 네르바의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 때도 평온하게 잘 지낸다. 그 뒤 15년은 사료가 부족해서 알 수 없지만 노년기인 113년경에는 아시아 총독으로 부임했으며 총독 임무를 수행한 이후, 사실상 정치적 경력을 끝내게 된다.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으로 재직하는 동안 여러 관직을 역임했는데, 다른 로마 엘리트들과 달리 군사적 업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즉, 그는 단지 명에로운 경력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코스를 거쳤지만, 장인인 아그리콜라, 네르바 황제 등의 추천 등으로 경력을 쌓앗기 때문에 군사적, 행정적 명성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렸을 적부터의 다양한 경험과 재능을 토대로 부단히 노력한 신참자답게 상당히 학식이 풍부했다. 이런 까닭에 타키투스는 자신의 시각에서 갖은 책들을 저술해 나간다. 그중 유명한 것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죽음부터 네로 황제의 죽음까지를 다룬 연대기와 그 뒤의 역사인 역사가 있고, 장인 아그리콜라의 생애와 업적 등을 다룬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의 생애에 관하여>,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 등을 저술하였다. 이 책들은 고대 로마를 비롯해 고대 게르만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

3. 서술 성향


타키투스는 자신의 저서를 지을 때 상당히 시니컬한 문체와 서술 태도를 보였다. 또 흔히 이르기를 그는 원로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로마 제정에 대해 가장 신랄한 비판을 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고발하는 델라토르 제도에 대해 무한한 증오와 비난을 표출하는 태도를 곳곳에서 보이며 황제에게 대항하여 직언을 행사하는 원로원 의원에 대해서는 매우 큰 찬사를 보낸다. 또한 팍스 로마나 등을 언급할 때 으레 같이 나오는 비판적 시각을 대변하는 어구 중 하나인 '그들은(로마인) 폐허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타키투스가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삶을 돌이켜보자면 알 수 있듯이 타키투스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었고, <연대기>에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모든 황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을 모두 직접 체험한 인물이 아니었고,[7] 그를 정계와 로마 사회에서 원로원 핵심으로 이끌어준 장인 아그리콜라의 부친이 칼리굴라의 지시를 어기고 항명죄로 처형된 개인적인 이유 등으로 그가 살지 않았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갈리아 출신으로 출세를 꿈꾸며 로마로 와서 개인적인 능력과 장인의 도움으로 원로원 의석을 꿰찼다. 이때 그는 온건하고 유연한 공화정 회귀론자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원로원 중심론자였다. 따라서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정치적 신념으로도 원로원 중심 시스템을 뒤엎고 원수정을 열어 혈통세습을 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뒷세대의 수에토니우스처럼 온갖 소문들을 무차별적으로 집어넣지 않아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후세사람들에게 막장 황제로 이름난 칼리굴라[8]네로,[9] 원로원 의원들에게 빅엿을 먹였던 티베리우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서술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도미티아누스에 대해서도 당대 원로원의 동료들처럼 좋게 서술하지 않았다.

4. 여담


기독교에서 가끔 다루는 고대 역사가이기도 한데, 요세푸스(유대고대사)와 마찬가지로 예수와 그를 기원으로 하는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기록(연대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네로 황제 치세에 기독교인들이 탄압받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본티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그리스도를 기원으로 하는 종교인들임을 기술했다.

[1] 연대기라는 명칭은 16세기에 붙여진 것으로, 원래는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으로부터'이다. 다른 저서들도 마찬가지이다.[2] 능력 위주의 사회였던 로마에도 이탈리아 출신이냐 아니면 속주 출신이냐에 따라 미묘한 온도차가 있었는데 그의 출신지를 생각하면 상당히 출세한 셈.[3] 선조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숙부, 혹은 조부는 벨기카 속주에서 황제 대리인으로서 역임했다(Plinius Historia naturalis, 7.76.).[4]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타키투스의 저서인 연설가들에 대한 대화에서 당대 수사학의 일인자였던 퀀틸리아누스의 수사학의 이론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그의 장인이 바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로 도미티아누스 치세에 브리타니아를 거의 평정할 뻔한 사람이었다. 이것도 그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동방 전선에 위기가 닥치면서 거의 평정되다시피한 브리타니아의 병력을 물린 것으로 만일 다른 지역의 전황이 안정적이었다면 스코틀랜드 지역도 로마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사위인 타키투스가 쓴 그의 전기는 칭찬 일색이다.[6] 당시 도미티아누스와 원로원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서 숙청당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 된 것이었다.[7] 타키투스는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태어났다.[8] 칼리굴라 항목 중 평가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 후세 기록처럼 막장행보를 계속하다가 구제불능이라고 암살된 황제가 아니다.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는 개인적 사치를 위해서 돈을 펑펑 쓴 황제도 아니다. 그가 까인 이유는 초기 원수정이라는 복잡한 성격 등을 고려치 않던 그의 노골적인 권력 강화와 티베리우스의 막대한 유증금을 아우구스투스 유언 집행에 따른 공공사업 재개, 즉위 직후 열린 국가축제 등으로 거의 써먹었기 때문이다.[9] 네로의 경우에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그럭저럭 국정도 잘했으며 나라도 굴러갔다.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