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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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가이오 체사레 "칼리골라", 칼리골라라고 부르며, 황제본명을 부를 경우에는 가이오(Gaio), 카이오(Caio)라고 한다.
칼리굴라(Caligula)는 별명으로 '작은 군화'[9] 라는 뜻이다.
2. 상세
로마 황제로서 살아생전 이름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중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역대 로마황제 중 카이사르라는 명사를 황제 지칭 표현이 아닌, 황제 개인 공식 성씨로 불린 마지막 황제이다. 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친혈육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이기도 하다.
로마 황제 중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이사르(CAESAR)를 황제라는 개인명사가 아닌, 형식상 공화국인 원수정 로마 아래에서 개인 성씨로 황제 본인과 원로원이 사용해 부른 마지막 ‘카이사르’이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의 직계를 중심으로 한 혈육 간의 입양 형식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배신당해 일가족 전체와 살해됨으로써 역사상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10] .
원로원 회의록, 금석문, 관보, 타키투스, 필로의 기록 등 당대기록에서는 이 황제를 오늘날 통칭으로 부르는 칼리굴라 대신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어린 시절 불렸던 별명을 통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 본인을 비롯해 로마 원로원과 로마인들도 공식석상에서는 가이우스, 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11] 라고 했다.
이는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역시 이 황제를 다룬 저서의 이름은 <가이우스>였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기록에서 가이우스를 칼리굴라로도 혼용해 기술했는데, 반대로 최대한 관보, 회의록, 당대 로마인들의 표기 등을 존중한 타키투스는 살아생전 칼리굴라를 부른 것처럼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고 별명을 넣더라도 '''가이우스 칼리굴라'''라고 했다. 따라서 이 황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연대기>에서도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이 이 황제를 굳이 별명이자 통칭 '칼리굴라'로 부르거나 이름 뒤에 넣어 언급하는 이유는 풀네임이 거의 비슷한 외삼촌 가이우스 카이사르(가이오 체사레)와 비교하기 어려운 까닭과 살아 생전 로마인들에게 이 사람의 별명이 이름 뒤에 같이 불리거나 별칭만 불렸던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과 국내 논문 중에서 이 황제의 외교정책이나 국방정책 등을 언급하는 경우 로마 공식 관보와 황제 본인 생전의 통칭을 존중해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하면서 칼리굴라라는 이름을 통칭, 별칭으로 각주, 괄호로 언급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고대 전승기록에서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보여준 통치 방식에 대한 반발로 광기에 휩싸인 사치, 폭력, 쾌락"으로 서술됐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타키투스의 저서에서도 가이우스 카이사르 편을 다룬 7권, 8권은 분실됨에도 간접적으로 그의 통치시대가 티베리우스 시대와 비슷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고대 기록의 작성자들인 원로원과 재위 내내 갈등을 빗다가 일부 근위대에게 암살된 황제라서 오늘날 대중들에게 네로,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과 함께 로마 제국의 폭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고, 고대 전승기록을 토대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구제 불능의 미치광이 폭군"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이 황제의 짧은 4여년간의 재위기간은 실패로 끝났지만 권력강화와 애매모호했던 로마황제 권력의 절대화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12] . 그래서 그의 시대는 초기 원수정 시대(과도기적 상태의 제정 시대)임에도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권력강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원수정과 비슷했고, 본인은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식 전제군주를 지향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기대했다가 후기 티베리우스때와 비슷했던 젊은 황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질릴대로 질린 티베리우스 시즌 2 내지 광기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이후에는 의외로 자신의 직책에 대한 이해도와 통치철학은 확고한 군주였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그렇지만 칼리굴라가 즉위할 당시 로마는 초기 원수정 상황상 이런 그의 통치스타일은 상당한 정치력과 자기통제가 필요한 프린켑스 상황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그의 행동이 광기, 불안, 과대망상으로 인식됐고 마크로 숙청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해 황제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치닫게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그의 암살 사건은 말년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집약된 불만이 폭주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칼리굴라는 현대 연구 등을 통해 중병을 앓게 된 이후 얻게 된 후유증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은 암군 내지 프린켑스 권한 강화 도중 근위대에게 암살된 실패한 황제로 재조명받고 있다. 그러면서 스카레와 같은 현대학자들은 칼리굴라가 변덕스럽고 잔인한데다 불안정하며 흥분을 잘하는 젊은 황제여도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의 악의에 찬 평가를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분명히 드러냈다.
즉, 로마제국의 세번째 황제인 가이우스라는 인물이 위험하고 불쾌한데다 과대망상 환자에 가까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의 정보 출처에는 끔찍한 농담과 공허한 허풍과 과장이 담긴 소문들이 많은 탓에 무작정적으로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현대 서양 학계에서는 그가 짦은 재위 기간동안 했던 공공건축과 인프라 입안 및 건설, 화폐발행권 일원화 등 행정 개혁과 내정 정책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행정적 측면에서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괜찮았다"고 평가해주고 있고, 칼리굴라가 죽기 전 추진한 로마와 이탈리아 건설 프로젝트는 후임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오스티아 인공항구를 제외한 대부분 건설 프로젝트에서 계속 이어졌다고 말한다.
3. 생애
3.1. 황제가 되기 전
3.1.1. 출생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와 대(大)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13] 에 이어 게르마니아를 공략했던 영웅,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14] 와 대(大)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나 살아남은[15] 세 번째 아들[16] 이었다. 대 드루수스의 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는 법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이어받은 티베리우스[17] 와 달리, 부모 양쪽 모두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와 ‘리비아의 피’를 모두 이어 받은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였다. 즉 그는 오직 리비아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입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달리, 혈연적으로는 부모 양쪽을 통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양가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18][19]
서기 12년 8월 31일 안티움에서 태어났는데, 이 해는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가 집정관직에 있을 때였다. 칼리굴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수에토니우스의 기록과 로마에서 발행된 관보에 따르면 안티움 태생이 맞다고 기록되어있다.[20] 실제로 칼리굴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자신의 고향인 안티움을 좋아했고 자신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소문에 따르면 가이우스(칼리굴라) 편에서 칼리굴라가 안티움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담으로 칼리굴라의 고향인 안티움은 로마시대 부유층의 별장들이 즐비했던 도시로 칼리굴라의 외조카인 네로의 고향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네로 시대에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또한 19세기가 지난 후 안치오 상륙 작전으로 다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도시이다.
3.1.2. 칼리굴라라고 불리게 된 이유
가이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게르마니아 지역의 사령관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게르만족과의 전선지대인 병영에서 자랐다. 부모는 칼리굴라에게 병사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히고 병사들 틈에서 자라게 했는데 외모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군인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21] 오늘날 우리가 통칭하는 "칼리굴라(Caligula, 작은 군화)"라는 별명은 이때 지어진 가이우스의 애칭이었다. 당시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병들은 자신들의 사령관인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중 막내였던 가이우스가 걸음마를 갓 떼면서 칼리가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 지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가이우스는 죽을 때까지 본명 대신 자신을 지칭할 때 칼리굴라라고 불리는 것을 진짜 싫어했다.[22]
당시 칼리굴라가 얼마나 군단병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나타내는 증거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단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였다. 이때 티베리우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유언 실행을 요구한 군단병들은 협상 대표로 숙영지에 방문한 게르마니쿠스의 매제(칼리굴라의 고모부)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를 감금하더니, 게르마니쿠스를 협박하면서 칼까지 겨누는 행동을 두 숙영지에서 동시에 벌였다.[23] 이런 병사들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가이우스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를 그들의 폭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웃 도시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안 병사들은 로마인들인 자신들의 품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칼리굴라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기도 했다.
3.1.3. 어린 시절
게르마니아 전쟁 이후 잠시 로마로 귀환한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칼리굴라는 다시 시리아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동방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19년에 시리아 안티오키아[24] 에서 사망한 이후,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와 함께 귀국하여 함께 살았다. 아버지 사후, 아버지의 입양동생[25] 이자 고모부인 소(小) 드루수스가 공식적으로 칼리굴라와 그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칼리굴라 형제를 지켜주던 그마저 얼마 안 있어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노리던 세야누스와 고모 리빌라의 공모로 독살당했다.[26]
소(小) 드루수스가 갑자기 급사한 이후, 종조부이자 할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입양 형식으로 후계자로 만든 뒤 이들의 공식 후견인이 됐고, 얼마 뒤 갓 성년이 된 두 사람을 원로원에 자신의 후계자로 소개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얼마 안 있어 카프레아이(카프리)에 마련해둔 별궁에서 은둔정치를 펼쳤다. 이때부터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로 카이사르 가문 직계들에게 반역죄가 씌워져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27] 와 큰 형 네로 카이사르[28] 가 세야누스의 1차 고발과 티베리우스의 2차 고발 형식을 통해 반역 혐의로 외딴 섬으로 각각 추방됐다.[29] 따라서 칼리굴라는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증조모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증조모 리비아가 죽자 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칼리굴라는 율리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리비아 장례식 추도연설을 로스트라에서 가졌다. 그 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카프레아이(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부르기 전까지는 친할머니였던 소 안토니아와 함께 살았다.[30]
3.1.4.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건너가다
칼리굴라의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 무렵 공직 생활과 복점관 업무 등을 수행하면서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고, 평가가 굉장히 좋았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둘째형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카시우스 세베루스[31] 의 고발과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의 배신과 거짓 증언으로 말도 안 되는 성 스캔들과 정신착란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혐의, 그리고 반역죄의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둘째형은 자택에서 체포된 뒤 세야누스 일당과 공모한 아내의 거짓 증언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서기 30년 황궁지하실에 유폐됐다[32][33] .
이렇게 마지막 성인 남성 보호자였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세야누스 일당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유폐된 이후, 세야누스 일당은 곧 성년식을 치룰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직계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마저 제거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증조할머니 리비아 사망 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본가에서 할머니, 세 여동생 그리고 작은아버지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로마 안에서 가이우스를 지켜줄 수 있던 사람은 전무했다. 따라서 그는 세야누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10대 중반의 가이우스에겐 친할머니 소 안토니아가 유일한 보호자나 다름없었다. 익히 알려졌듯이 그의 할머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였는데 가이우스의 할머니는 아버지와 외삼촌처럼 여장부였고 세야누스 일당은 티베리우스가 신임하던 그녀를 쉽게 건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신분이 황족이고, 시아주머니가 티베리우스 황제였다고 해도 정계에 큰 영향을 행사하거나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 안토니아는 세야누스와 그 일당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씨 말리기가 계속되고, 이들 가족을 노린 음모들이 끊이지 않자, 자신의 마지막 혈육을 살리기 위해 가문의 믿음직한 노예 팔라스[34] 를 시아주머니였던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은밀히 보내 "저와 드루수스의 유일한 혈육이자, 요절한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아들인 어린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고 호소했다.
사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젊은 시절부터 냉정하고 비정했는데, 유독 친동생 대 드루수스에게만은 살갑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또 그는 26살에 미망인이 된 제수씨 소 안토니아에 대해서도 죽은 동생과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신뢰했다. 이때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칼리굴라의 할아버지(대 드루수스)가 요절한 이후에도 어떤 소문없이 정절을 지키고 묵묵히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소 안토니아의 모습을 젊은 시절부터 보면서 진심으로 존경했고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됐다고 한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당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연이은 반역죄 기소 당시부터 세야누스의 반역 혐의를 의심했는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정신착란증세와 난잡한 사생활이라는 것에 의심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할머니의 간곡한 호소가 담긴 편지와 피해방인 팔라스의 세야누스 음모 고변을 즉시 받아들인 뒤, 곧 성인이 될 칼리굴라를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불러들였다.
할머니의 간곡한 편지 덕에 목숨을 겨우 건진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부름을 받고 카프레아이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이야기는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서도 정확히 나와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칼리굴라는 이때부터 티베리우스 곁에 살면서 후계자 중 한명으로 교육을 받았다. 로마를 떠나 나폴리만에 도착한 그가 배를 타고 카프레아이에 도착한 날, 칼리굴라는 뒤늦게 성인용 토가를 입고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한 성년식은 비공식적인 성년식이었고 성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3.1.5. 후계자 시절과 근위대장 마크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궁정의 신하들이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입 밖에 내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양할아버지나 전체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었기에 누군가는 칼리굴라를 가리켜 "그보다 더 나은 노예나 그보다 더 나쁜 주인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온갓 소문을 적은 기록이기에 신뢰성은 상당히 떨어지지만 분명한 것은 칼리굴라는 공포정치를 하던 티베리우스에게 그다지 관심(나쁜 쪽으로)을 받지 않았다.
칼리굴라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딸 유니아 클라우딜라[35] 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 대신 복점관에 임명되어, 책임감있는 행동과 모범적인 삶의 태도를 인정받고 사제직에 올랐다. 이 무렵, 세야누스가 몰락했고, 칼리굴라의 첫 아내였던 유니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한편 수에토니우스는 소문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근위대장 마크로의 아내 에니아 나이비아(엔니아 트라실라)를 유혹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면 엔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으로 시작된 루머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게 된다.[36] 같은 소문을 기초로 한 이야기인데 타키투스는 자신의 책 <연대기>를 통해,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는 다른 주장을 했다.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처럼 34년 젊은 가이우스가 마크로의 아내 엔니아 트라실라와 연인관계 비슷한 관계를 맺고, 서면으로 마크로, 엔니아 부부의 영향력을 보장하겠다고 한 뒤 유부녀인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런 타키투스의 기록은 티베리우스의 죽음이 임박할 무렵 수에토니우스가 주장한 "칼리굴라가 마크로의 아내를 유혹해 자신이 황제가 되면 결혼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주장과 다르게 서술됐고 구체적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가이우스(칼리굴라)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큰할아버지 티베리우스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확실히 불안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별궁 안에서 세야누스 후임으로 근위대장이 된 이후 권세를 휘두른 마크로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근위대장 마크로와 그의 아내 엔니아는 25살의 젊은 가이우스(칼리굴라)의 호의를 이용해 의도적으로 엔니아가 가이우스에게 불륜 비슷한 관계를 먼저 제안했고, 마크로는 아내와 합심해 사별해 독신인 칼리굴라에게 먼저 자신과 엔니아에게 젊은 왕자가 표면상 결혼을 하겠다고 서약 직전으로 행동토록 했다고 한다. 즉, 타키투스는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마크로와 그의 아내 엔니아가 칼리굴라에게 먼저 스폰서 비슷한 불륜관계를 제안하고, 마크로는 이를 의도적으로 조장하고 모르는 척 해주면서 교묘하게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이들 부부의 영향력을 보장하겠다”고 문서로 보장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칼리굴라에게 결혼하겠다는 맹세까지 요청해 이를 받아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학자들은 이 당시 “칼리굴라가 마크로 아내를 꼬셔 불륜을 맺고 결혼약속을 해줬다”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마크로와 엔니아가 칼리굴라에게 제위를 보장하는 대신, 불륜관계를 맺게 하고 서면으로 약속까지 받아냈다”는 타키투스의 주장 중 타키투스의 기록을 사실로 보고 있다[37] . 그래서 연구자들은 마크로 아내에게 결혼 맹세까지 했다는 이 이야기는 마크로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칼리굴라가 자신의 불안한 미래와 확실한 제위계승을 위해 마크로 측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마크로 부부는 칼리굴라를 밀어주는 대신 타키투스가 말한 마크로 아내에게 결혼맹세를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타키투스는 이때 25살 밖에 안 된 가이우스 칼리굴라가 마크로 부부의 이런 속 보이는 제안을 자신의 할아버지와 마크로에게 배운 방법대로 역이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모든 상황을 꿰뚫어본 만큼 이런 가이우스의 행동을 확실히 안 좋아했고,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이런 소문 외에도 이 시절 칼리굴라의 카프레아이 별궁 이야기는 다양한 소문들로 인해 로마인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이 당시, 로마 원로원 의원들과 풍자시인들은 로마를 떠나 나폴리 일대와 카프레아이 섬을 오가며 살던 티베리우스와 황제의 친구들, 그리고 칼리굴라의 은둔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성적 판타지가 가득한 농담조 풍자시로 지어 이를 비꼬고 궁금해했다. 이는 로마 서민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궁금증과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판타지들은 길거리와 공공장소 내에서 음란하고 잔인하고 음험한 소문들로 생산됐다. 그리고 이런 풍자시와 온갖 소문들은 서민들에게 사실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 탓에 말년의 티베리우스는 참다 못해 민감하게 반응했는데[38] , 이런 경고에도 대 드루수스의 오른팔로 게르마니아 전쟁때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참모 출신 원로원 의원 베스틸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섬에서 방탕하고 음란하게 지낸다”는 풍자시를 지었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들게 됐는데, 당사자와 원로원, 황제까지 풍자시인 것을 알았어도, 이 당시 티베리우스는 “자신과 친혈육 가이우스에 대한 도전은 곧 응징과 피의 복수”라고 정의할 정도로 화를 냈다. 따라서 베스틸리우스에게 티베리우스는 “(풍자시가)거짓말이어도 용서할 수 없다”며 차가운 문체의 서한장을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낭독케하며, 친구들과 원로원의 탄원서에 분노의 일갈을 날렸다. 그리고 그는 이전까지 무척 아낀 측근을 '황제의 식탁'이라고 불린 자리에서 쫓겨낸 뒤 그를 정치적, 사회적으로 처참하게 몰락시킨 뒤 본인 스스로 굴욕감 속에 자살케했다.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 말년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후계자 시절 칼리굴라를 적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살았던 이 역사가는 최대한 기록에 따라 소문과 사실을 구분했는데 그의 기록 안에서 나타난 칼리굴라의 행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극히 냉담하고 음험하며 이중적인 티베리우스의 행동과 복사판처럼 비슷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나마 남아있는 <티베리우스> 편에서 서술했다. 그러면서 타키투스는 갓 성년식을 마친 어린애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영향을 받으면서 정치술을 배웠고, 실제로 그는 티베리우스가 마크로를 앞세워 벌인 일들을 직접 배울 수 밖에 없었음을 지적했다. 또 그는 이런 티베리우스의 해악들은 마크로의 비열한 술수와 함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그에게 악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동시에 후계자 시절 가이우스는 두 형과 어머니, 고모부가 비극 속에 세야누스의 음모 아래 죽은 이후 겨우 목숨을 건지고 카프레아이로 소환된 이후, 어떤 상황이었는가에 대해 티베리우스와 보낸 은둔 생활이 비극적이고 음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 당시 가이우스는 본래 상황을 이용한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나면서도 혈기왕성하고 화를 잘 내는 솔직한 성격임에도 자신과 죽은 혈육을 위해서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고 한다. 또 칼리굴라는 이 시절 내내 본인이 사랑했던 부모와 두 형, 고모부를 위한 복수심과 그로 인한 울분을 삼키고 어쩔 수 없이 이를 참아야 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처럼 친혈육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와 그로 인한 격한 감정을 통제하던 동생의 손자를 루키우스 술라 펠릭스에 비유하기도 했다[39] .
그러면서 그는 가이우스 칼리굴라가 세야누스 제거 이후부터 놀라울 정도로 힘을 키운 근위대장 마크로와 협력 상태를 구축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티베리우스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에서는 근위대장 마크로 주도로 대대적인 반역죄, 불경죄 그리고 숙청이 터지는 동안 마크로의 원한관계 탓에 반역죄로 기소된 아룬티우스의 자살 전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타키투스는 아룬티우스가 반역죄 사건에 함께 기소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친부), 마르수스 등처럼 자기변호를 하지 않고 자결을 결심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당시, 아룬티우스는 이때 자살 직전 만류하는 친구에게 세야누스와 마크로를 비교하고,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뒤 괴물이 된 사람이라고 비판한 이후 칼리굴라 이야기를 꺼내며 아직 어린 그를 걱정하고 티베리우스와 마크로를 비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 것도 모르고 (티베리우스라는) 해독 속에서 자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세야누스보다 한층 더 나쁜 자인 마크로의 지도를 받으며 통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하고 도피 대신 혈관을 잘라 죽었다. 그리고 이런 기록 외에도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3월 16일 나폴리 만 별장에서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영면하자 일개 사인 자격임에도 근위대장 마크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파견해 마크로 세력을 이용했고, 마크로 측과 협력관계를 유지해 목숨을 부지하고 후계자 입지를 키웠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가이우스는 마크로에게 자신이 즉위하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황제령 이집트 장관직을 보장했다고 하며, 마크로는 지속적으로 그가 새 황제가 되는 것에 도움을 줬다고 한다.
3.2. 황제
3.2.1. 즉위
타키투스의 기록 중 관보를 토대로 한 사건만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의 제위 등극은 다음과 같았다.
서기 37년 3월 16일,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나폴리 만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등이 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런데 이 당시 명의 카리클레스가 연회를 주최하고 있던 티베리우스의 맥박을 집고 그의 건강을 면밀히 진찰한 후, 황제 곁에 있던 마크로에게 “카이사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이후 마크로를 포함한 황실 관료 및 티베리우스 측근들은 서둘러 회의를 연 뒤 일찌감치 제국 각 속주총독과 군대에 급사를 파견해 뒤를 대비한 상태였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이후 상황은 대비가 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티베리우스 일행이 머문 나폴리에서는 어떤 관직도 갖고 있지 않은 가이우스가 자신의 이름으로 근위대장 마크로를 로마로 파견해 본인이 단독 프린켑스가 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사망 이틀 뒤인 18일, 원로원에서는 너무 손쉽게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단독 임페라토르 결정이 통과됐고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에 이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의 세습을 완료지었다.
이렇게 가이우스는 근위대장 마크로의 도움과 그동안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 마크로에게 배운 정치술을 기반으로 아무런 반대 없이 제위에 오르게 됐다. 이후, 그는 로마인들과 "전 세계인들의"[40] 열광을 받으며 서기 37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다. 사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등극 당시 인기는 로마 사상 최고였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소문에 의해 음침한 성격인 데다가 말년에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서 시민들에게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인기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또 게르마니아를 정복직전까지 이끈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의 갑작스러운 낙마사,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전쟁 영웅으로 여겨진 부친 게르마니쿠스의 인기와 후광,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피소와의 갈등 후 젊은 나이에 오리엔트 속주에서 병[41] 으로 요절한 사건[42] , 세야누스의 음모와 비정한 늙은 황제의 은둔 속에 어머니와 두 형들이 억울하게 비극적으로 죽은 일 등 3대째 이어진 가족사로 인한 아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인기는 더했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의 긴축정책과 수성 위주 국방정책 등으로 인해 로마 여론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향수도 상당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 가이우스의 등장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입고 미세눔에서 티베리우스의 시신과 만나 함께 로마로 향했다. 이때 거리로 나온 군중들은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바치고 횃불을 밝혔으며 칼리굴라를 열렬히 환영했다. 로마인들은 키가 크고 잘생긴 칼리굴라에게 "가이우스는 우리의 별", "병아리", "아기", "귀염둥이"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이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하자 원로원과 우격다짐으로 원로원 건물로 들어온 수많은 군중들은 만장일치로 즉시 그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유언장은 안중에도 없었고, 티베리우스의 유언에 따라 가이우스(칼리굴라)와 공동 상속자이자 공동 황제로 지명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43] 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 대신 칼리굴라는 성년식을 치루지 않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선포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를 기리는 장례연설을 할 때, 수많은 군중 앞에서 시종 눈물을 펑펑 흘렸다. 또한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의 유언집행을 보류하기로 하자 이를 무효화하고 시민들에게 예외없이 성실히 유산을 지불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때 무효화해서 욕을 많이 먹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도 집행하여 환호를 받았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형 네로 카이사르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악천후를 뚫고, 판다테리아와 폰티네 제도로 달려갔다. 이 사건은 칼리굴라의 효성을 부각시켰으며, 칼리굴라가 경건한 태도로 유골을 직접 수습하여 유골단자에 담아, 오스티아를 거쳐 테베레 강을 거슬러 로마를 오는 내내 2단 갤리선의 고물에서 군단기를 들고 서 있던 모습은 인기를 더하게 했다. 더불어서 칼리굴라는 어머니를 위해 희생제를 올리는 날을 정하고, 키르쿠스에서 축제를 열도록 했다.[44] 그리고 9월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인 "게르마니쿠스"로 바꿔 아버지를 기렸으며, 할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증조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살아생전 누렸던 모든 영예를 원로원 포고를 통해 수여했다. 또한 임기 첫 동료 집정관으로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양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성인이 되자 "젊은이들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러한 칼리굴라의 첫 7개월간은 티베리우스와 달리 성대한 축하 행사로 가득했다.[45] 티베리우스는 지나치게 절약하고 시민들의 쾌락을 배척했기에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나오지도 않았다. 칼리굴라가 행사를 많이 벌였던 이유는 아마도 그러한 티베리우스를 기억하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축제 3개월 동안(혹은 그보다 짦은 기간 동안) 16만 마리의 제물이 제단에 바쳐졌고, 새 황제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많은 양의 무료급식을 나눠줬다. 그리고 각종 검투사, 전차 경기도 많이 개최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 시기, 칼리굴라는 캄파니아 지방 인근의 섬들을 방문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앞다투어 그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더불어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는 칼리굴라가 즉위하자 먼저 친교를 청하고, 시리아 총독과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파르티아 왕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에 로마의 은독수리기와 군단기, 그리고 카이사르의 조각상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 또한 칼리굴라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두어들이던 0.5 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하고 화재로 집이 파괴된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인 보상 대책을 실행에 옮겼다.아울러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왕위를 잃은 여러 왕들을 복위시켜주어 그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3.2.2. 중병
즉위 7개월 만인 37년 10월쯤, 칼리굴라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과 두통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칼리굴라가 몸져누워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밤새도록 궁을 에워싸고, 신들에게 칼리굴라를 병에서 회복시켜주기를 기도했다. 특히 이때 어떤 사람은 칼리굴라가 병에서 회복된다면 검투사가 되어 시합에 나가겠다고 맹세했고, 누군가는 신에게 칼리굴라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현수막을 걸어 무사안일을 빌었다.[46] 그러다가 칼리굴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 모두는 환호를 하며 칼리굴라의 회복을 기뻐했다. 그러나 칼리굴라 본인은 회복된 이후,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의심이 많아지고 밤마다 종종 환청이 들려서 한밤중에도 황궁 안을 배회해야만 했다. 또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려서 공허에 대고 제발 잠 좀 자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젊은 황제는 원인 모를 병으로 생사를 넘나든 이후 정신이 이상해져 그 후부터는 제우스로 분장하고 이상한 옷을 입는 등 기이한 행동을 종종 벌였고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타키투스의 분실된 기록 중 남아 있는 일부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10월 중엽 중병을 겪은 이후 이전과 달리 간헐적으로 정신 이상이 생기고 항구적인 증세가 심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타키투스에 따르면 동생이자 양자인 게멜루스와 장인 유니우스 실라누스 자살강요를 지시내렸다고 한다. 그 결과, 서기 38년에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완쾌되자마자 의심을 하면서 양자이자 공동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였다. 또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문제가 많았고 자신의 즉위 후에는 세야누스 수준의 권력 위치로 나아가던 근위대장 마크로와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을 숙청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칼리굴라의 중병 완쾌 후 행동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미치광이가 된 황제가 벌인 무자비한 행동보다는 당연한 조치였다고 해석되고 있다. 특히 자신의 단독 제위계승을 도와줬지만,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부터 세야누스 수준의 권력을 향해 나가던 마크로 숙청은 어린 시절 친족들을 대거 잃은 뒤 겨우 목숨을 건졌던 가이우스에게는 반드시 해야 했던 숙청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때 벌어진 숙청 중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제거는 가이우스가 제위 안정을 위해 필요했고, 원로원과 암묵적 동의 하에 이뤄진 조치였다고 해도 어거지로 꼬투리 잡아 벌어진 숙청작업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당시에는 큰 방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넘어갔어도 그가 병에 걸리더니 미치광이가 됐다는 이야기의 예시로 사용되게 됐다.
게멜루스 숙청 당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18살의 어린 사촌동생이 만성적인 기침 완화를 위해 복용한 약 냄새가 심하게 나는 것을 의심하더니 본인을 독을 먹여 죽일 거라고 생각해 죽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또 다른 말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쓰러진 이후 양자 게멜루스가 부재 중인 칼리굴라를 대신해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국가 행사를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을 두고 빼앗긴 제위계승권을 되찾기 위해서 힘을 키웠다고 의심해 죽였다는 말도 있다. 이런 까닭에 친할머니 소 안토니아는 병이 완쾌된 직후 180도 달라진 손자의 행동에 크게 실망해 대립했고, 결국 외손자가 억울하게 죽은 지 얼마 안 가 화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소 안토니아의 딸 리빌라가 소 드루수스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었다.[48] 게멜루스는 어머니 리빌라가 생전에 남편 소 드루수스(칼리굴라의 당숙이자 고모부)를 독살한 범인이고, 세야누스의 정부가 되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까닭에 티베리우스 생전에 정통성에 타격을 입긴 했어도, 율리우스 가문의 직계 혈통 중 한명이었다. 이런 정통성 때문에 세야누스 일당의 표적이 됐고,[49] 소 안토니아의 노력으로 나란히 목숨을 건진 혈육들이었다. 게멜루스는 억울하게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왜 죽어야 되는 지 그 이유도 몰랐고, 칼을 잘 다루는 것도 모를 정도로 착하고 순한 성격이었다. 이런 이유로 할머니 안토니아는 이런 외손자가 아무 이유 없이 숙청되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는데, 칼리굴라 역시 게멜루스가 황족이고, 자신의 몇 없는 피붙이인 까닭에 망나니가 처형하도록 하지 않고, 명예롭게 자결하라고 칼을 보냈다고 한다.
자살강요로 살해 당하기 전 게멜루스는 워낙 착하고 순해서 칼을 보낸 의미조차 몰랐기에, 명을 전하러 온 백인대장이 게멜루스에게 자결하는 법을 알려준 뒤 게멜루스를 살해했고 그의 유해는 장례절차를 거쳐 매장됐다. 그러나 게멜루스의 처형은 별다른 이유없이 칼리굴라가 친혈육 게멜루스를 죽인 것이고, 별다른 증거없이 어거지로 이뤄진 탓에 소 안토니아 입장에서는 굉장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가장 증오했던 티베리우스의 유일한 혈육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된 직후,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면서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 가문 내 유일한 남자황족 후계자를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처형 사건은 의외로 칼리굴라와 원로원 모두 언급을 자제할 정도로 조용히 흘러갔다. 따라서 현대 로마사 권위자 안소니 배럿을 위시한 학자들은 칼리굴라 재위 초반 황제를 대신한 행사주최 당시, 황제의 권한을 대리할 정치적 이벤트는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담당하고 비정치적인 행사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형식상으로 담당한 것에 관심을 갖고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칼리굴라가 원로원과 암묵적 틀 아래에서 티베리우스가 만든 제위계승구도를 중병 회복 후 과감하게 무너뜨린 조치였다고 말한다. 즉, 자신의 권력안정화를 위해 별다른 실권도 없는 사촌동생이라고 해도 전임자가 공동제위계승권자로 지명한 이유를 의식해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칼리굴라의 결정은 속사정을 내심 짐작하고 있던, 할머니 안토니아와 황제의 여동생들에게 사촌동생 살해라는 부분에서 실망을 안겨 줬고, 황제 본인이 장차 추진한 권력강화는 당시에는 넘어간 원로원이나 일부 근위대에게 노골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다.
수에토니우스가 기록한 길거리 소문에 의하면 아마도 칼리굴라는 정황상 여동생들과 근친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는 당시 칼리굴라가 자신과 3명의 여동생에 대한 충성서약을 원로원에게 요구한 일이라고 한다. 이 주장은 오늘날 사실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데,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차용하는 경우에는 최소 한명 또는 두명의 동생과는 그러지 않았을까하고 추측성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아울러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회복한 이후부터 황제와 율리우스 가문 위상을 강화하고 선전을 극대화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자신의 매제 중 황실의 실질적인 시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주동자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후손 카시우스를 자신의 여동생과 강제로 이혼시켰으며, 여러 행사들을 통해 황실을 홍보했다. 그러다가 여동생 세 명 중 평소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던 둘째 드루실라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자 신격화하여 '디바 드루실라'라고 부르게 했다.
3.2.3. 내정
38년 아퀼리우스 율리아누스와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집정관이 된 이후, 가이우스는 인기영합정책으로 1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했으며, 화재 피해자들에게 개인국고를 통해 시혜를 베풀었다. 따라서 37억 세스테르테우스나 되는 티베리우스의 유산은 칼리굴라의 무절제한 소비로 인해 곧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해, 그는 민회를 형식적으로 부활시켜 로마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냈고 이를 통해 원로원을 견제했다. 또 그는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를 보좌하는 관료층을 보강하면서[50] 기사계급에 본격적으로 속주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을 채워넣었는데, 이런 그의 방식은 후임자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가속화됐다.
칼리굴라는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로 공급되는 곡물 수급을 위해 대대적으로 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여러 항구들을 건설, 보수했다. 이 조치는 재정적으로 무리로 보였는데, 요세푸스는 "재정적으로 무리처럼 보인 남부이탈리아 일대의 항구 건설들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곡물 수급을 증대시키고, 기근을 해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했다.
이 외에도 칼리굴라는 불안정한 프린켑스 귄위 향상을 위해 내정 전반에서 조금씩 변화를 꾀했다. 현대 연구들의 발표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내정 개혁은 놀랍게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비슷하면서 후기 로마의 전제군주정의 모습을 일정부분 띠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제정한 재정 행정 개혁 및 사법 행정 부분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사법 행정 쪽에서 칼리굴라는 원로원을 견제하면서, 자신과 율리우스 가의 권위 신장을 추진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 시대동안 유명무실해진 민회 집회를 허용하면서 아우구스투스처럼 자신이 치안판사를 맡고 원로원을 견제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또 그가 원로원에게 빼앗은 각종 임명권과 발행, 통제 권리 역시 사후에도 로마황제들이 원로원과 파워게임을 하거나, 황제가 개입을 통해 시급한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무작정 칼리굴라를 폭군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증거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2.4. 전제 군주로의 권력 강화
칼리굴라는 즉위 초반부터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로마 민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유흥문화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했다. 그는 평범한 국가 행사에 참가할때마다 남신이나 여신을 퍼포먼스하는 듯한 의상을 착용해 행동했으며, 늘 헬레니즘 왕국들의 전제 군주나 후대 로마의 황제들이 연상되는 비단 재질의 화려한 의복을 차려 입었다. 이는 화려함을 거부하고 투박한 토가 차림을 선호했던 티베리우스와는 다른 행보였는데,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은 젊은 가이우스가 병에 걸리더니 자신을 신격화하는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이전과 달리 검투사 경기를 매우 과격하게 바꾸었으며 전차경기는 칼리굴라의 지원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 외에도 칼리굴라는 자신의 수호신으로 카스토르와 폴룩스 쌍둥이신을 모티브로 삼고 대대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는데, 그가 모티브로 삼은 쌍둥이신은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숙부 소 드루수스가 칼리굴라 나이 무렵 로마인들에게 사랑받을 때 비유된 신들이었다. 아울러 그는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 군주나 공화정 시대 일부 귀족들처럼 참석자들의 충성심 확인, 위상 향상을 목적으로 매일 화려한 만찬을 벌이는가 하면 자신을 태워다준 인부에게 대한민국 한화로 약 2000만 원이나 해당하는 금액을 하사하고 각종 여러 희귀동물들을 매우 비싼 값에 구하는 등 너무 많은 엔터테인먼트를 벌였다.
그러나 그의 소비 대부분은 소문과 달리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계획되거나 취임 후 해야 했던 각종 보수 공사 등 티베리우스 시대 이래 중지된 공공건물 건축 분야, 황실 어른들의 유언장 집행 등이 많았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긴축정책을 펼치며 쌓아둔 국고가 1년 만에 바닥이 나버렸다. 이때 소문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카이사르 집안의 잡다한 물건들과 노예들을 경매로 팔고,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뒀으며, 부자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게 했다고 한다. 또 자신을 상속자 이름에 넣게 해서 부족금을 메우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 중 39년 금융위기라고 부르는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막대한 유증을 다 써먹고, 국고까지 바닥나게 했다는 주장은 2003년 샘 윌킨슨 등의 연구를 통해, 로마 제국 원수정 초기의 재무부에서 벌인 귀금속을 통한 화폐 주조 등으로 쉽게 반박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칼리굴라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중병 이후 자신이 증상을 알았다고 해도, 오늘날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미치광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강렬하게 자기애를 드러내면서 프린켑스로서의 본인을 강조했고, 주변에게 모든 권한을 대리시키지 않고 직접 통치했다. 먼저 그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해 즉위 후 로마 시에 수도교 2개를 건설했다. 오늘날에도 일부 남아있는 클라우디아 수도교(아쿠아 클라우디아)와 아니오 노부스인데, 모두 클라우디우스때 완공됐다. 이 수도교들은 유이하게 엄청난 인구 수를 자랑하는 로마 시내까지 깨끗한 물을 공급해줬다. 또한 티베리우스때 중지된 공공시설 건설도 다시 시작해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폼페이우스 극장을 완공했다. 그러나 37년 이후 짦은 밀월 이후부터 원로원 귀족층과 부유한 사람들은 티베리우스와 비슷해지는 칼리굴라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칼리굴라가 원로원이 힘이 없음을 알고 원로원과 파워싸움을 노골적으로 벌인데다, 이전 권력자들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자신과 카이사르 가문을 신격화하면서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 방식으로 황제권을 위협하는 반대파들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여러 고대 기록과 현대 연구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전임자 티베리우스 이상으로 원로원에게 암살 위협을 실제로 시달렸다고 한다. 따라서 서기 39년, 칼리굴라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억울하게 세야누스의 음모로 고발돼 처형된 일을 직접 언급하면서 원로원이 율리우스 가문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사실상 방치한 세야누스의 공범이라고 맹비난했다. 과거 칼리굴라는 어머니와 두 형이 비극 속에 처형되는 과정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 조절을 잘 해내면서 위기를 넘겼고, 가족들의 장례식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원로원에서는 칼리굴라가 그토록 원망 섞인 지적을 함에 적잖이 놀랐다. 이어서 같은 해 9월, 두 집정관이 모반을 계획한 것을 이유로 모두 직권 면직시켰다. 이는 오늘날 연구들을 통해 분석되듯이 사실로 보여지는데 이례적인 집정관 2명을 모두 면직처리한 사건은 원로원 전체를 벌집 쑤시듯 혼란의 소란돌이에 빠뜨렸다. 그리고 다음해인 40년, 실제로 젊은 프린켑스의 목숨을 노린 음모가 드러났다. 여기에는 칼리굴라가 그토록 아낀 둘째 여동생 율리아 드루실라의 전 남편이자 오랜 친구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칼리굴라의 살아 있는 두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네로의 어머니), 리빌라가 포함된 황실 음모였다. 이에 칼리굴라는 레피두스를 반역 주범으로 추방시켰다가 처형시켰고, 두 여동생은 지중해에 떠 있는 폰티아이의 작은 섬들로 유배보내고 그들의 전 재산을 압류했다.
이처럼 칼리굴라는 친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면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반역법에 따라 강하게 견제하거나 처벌했다. 반대파들의 재산은 압류됐고, 원로원 귀족들의 가족을 궁 안에서 살게 하도록 해 반대파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으면서 친황제파로 육성하려고 했다[51] . 따라서 이러한 행동들이 위와 같은 비방성 소문 외에도 ‘황제가 돈이 궁해 황궁 안에 귀족 아이들을 집어 넣고 매음굴을 설치했다’, ‘황제의 사생활이 문란하다’ 등의 새로운 괴담까지 재생산돼 민심까지 악화됐다. 그런데 실제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엄청난 유증금을 너무 빨리 써버린 까닭에 황제가 직접 운영하던 검투사 훈련소의 검투사들을 막대한 가격을 매겨 부자들에게 경매식으로 넘겨 황실 경비로 충당했다. 반면, 칼리굴라는 자신과 율리우스 가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까지 높일 목적으로 48살이었던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를 15살의 방계황족 메살리나 발레리아와 결혼을 주선해 결혼시켰다. 동시에 여러 행사와 퍼포먼스를 통해 '''노골적으로 원로원을 무력화시키고 원수정 프린켑스 권력 강화에 힘쓴''' 조치들을 취했다.
칼리굴라는 프린켑스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취하면서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라고 발언할 정도로 원로원과 힘싸움을 벌였다. 이때 원로원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압박하던 프린켑스에게 밀리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프린켑스의 안정적인 물가 조절권 확보 등을 목적으로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조폐 발행권을 황제 속주인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의 주도 루그두눔(리옹)[52] 으로 이전시켰다. 또 원로원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일부 속주 총독 파견권까지 황제가 행사하도록 바꿨다[53] . 이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를 거치면서 프린켑스의 거수기로 전락함을 강하게 느끼고 있던 원로원은 젊은 20대 황제에게 자신의 애마를 집정관에 앉혀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농담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들의 무력감을 체감했다. 따라서 원로원은 일찌감치 칼리굴라에 대한 환상을 버렸고, 황제와 원로원의 좋았던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이런 까닭에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제외하면 칼리굴라 암살 이후 수십년이 지난 뒤 저술된 남아있는 기록들은 전부 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 황제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서술되고 있다. 그런데 칼리굴라가 미쳤다고 주장한 기록 중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황제 본인도 중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는 본인 스스로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황제열전> 중 <가이우스> 편에서 칼리굴라가 종종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으로 걷거나, 서 있거나, 생각을 하거나, 머리를 들고 있기를 힘들어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칼리굴라에게 불면증은 가장 큰 고통이어서 기껏해야 3시간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마저도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 앉아 있거나 긴 주랑을 헤매며 어서 태양이 뜨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멀리서 천둥소리만 들려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고, 폭풍우가 다가오면 침대에서 뛰쳐나와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기도 했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볼때, 현대 학자들은 심한 중병을 앓은 이후부터 고열로 인해 뇌손상이 생겨(뇌세포는 고열에 매우 취약하다) 환각을 경험하게 되는 등 뇌병변장애가 발생한 것에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인해 자신을 불멸자의 위치에 두려고 한 노력이 겹쳐 이러한 이상행동이 생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중병 이후 “최고 권력자인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과격한 방법들을 실행에 옮겼을 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3.2.5. 게르마니아 원정
칼리굴라는 즉위 당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맹활약한 게르마니아 전쟁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고, 자신 역시 대를 이어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못지 않은 영예와 영광을 가져야 한다는 열망에 휩싸였다고 한다. 따라서 39년 9월, 두 집정관이 모반을 계획한 것을 이유로 모두 직권 면직시킨 직후[54] 칼리굴라는 예정대로 로마를 떠나 갈리아 북부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로 2개 군단을 모집했고, 할아버지 드루수스때부터 인연이 깊은 루그두눔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이런 황제의 행동은 원로원 입장에서 서술한 타키투스에 따르면 느닷없이 진행된 갈리아 출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연구들을 통해 살펴보면, 이때 칼리굴라의 느닷없이 벌어진 게르마니아 출정길은 드루이드 문제 등으로 안전상 큰 위협을 겪던 갈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한 군사행동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원로원은 칼리굴라의 행동에 대해 “느닷없다”로 생각해 반응하면서 무계획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크게 태클은 걸지 않았던 것을 볼 때 로마 지도층 역사 갈리아 일대의 상황 해결에는 일정부분은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과대망상적 광기로 진행된 일로 완전히 치부되지 않았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야만족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실제 군사행동도 벌인 것은 성과가 미미했기 때문에 사후 그가 비난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루그두눔을 떠나 갈리아 북부로 가던 칼리굴라는 로마에서부터 꾸준히 이 일대의 정황을 보고 받은 상태에서 라인강변의 게르마니아로 향했다. 이때 그는 이 지역 내 보고를 원로원 등과 함께 보고받으며 게르마니아에 진입했는데, 이야기에 따르면 황숙 클라우디우스 등 칼리굴라 시대의 주요 황실, 정부 인사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라인강 주둔 사령관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는 라인 방어선 주둔 군단병들을 형편없이 다뤄 기강이 형편없었고, 무능한 장군이었다. 따라서 칼리굴라는 가이툴리쿠스를 형편없는 기강 문제에 대한 책임과 음모 혐의를 이유로 면직시킨 뒤 10월 18일 모반죄로 처형시켰다. 동시에 새로운 라인 주둔 사령관으로 훗날 황제가 되는,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에 속하는 명문 귀족 갈바[55] 를 임명시켜 엄하게 라인 주둔 군단병들을 훈련시킨 뒤 기강을 잡고 상 게르마니아 일대의 게르만족들과 전투를 치뤘다. 그러나 이 전투는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상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칼리굴라는 전투 후 해안을 타고 서쪽으로 행군하면서 브리타니아 원정길에 올랐다. 이때 칼리굴라가 한 일은 브리타니아의 코 앞에서 병사들에게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줍게 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56] . 그런데 칼리굴라는 본인이 진심으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원했음에도 위험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오늘날의 불로뉴에 등대만 건설한 채 40년 5월 로마로 귀환해야 했다.
이와 함께 칼리굴라는 그리스 지역의 경제 부흥을 위해 반도 지협에 운하를 뚫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했음에도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저지른 실책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점성가가 살아 생전 티베리우스에게 한 예언[57] 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나폴리 만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말을 타고 건너며 제우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칼리굴라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으로 거론되는 부분은 게멜루스를 죽였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마우레티니아 왕 프톨레마이오스를 소환해 잔인하게 죽인 것이라고 한다. 또 칼리굴라는 팔리티누스 언덕에 자신의 신전을 세운 뒤 상류층들에게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자신을 경배하라고 했다. 이 행동은 동방 헬레니즘 군주들이 권력 전제화를 위해 사용한 자기 신격화의 칼리굴라적인 표현이었는데, 죽은 사람을 신격화시킨 적이 있는 로마인들에게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이어 그는 제국 전체에 명을 내려 대대적인 황제 신격화를 홍보케하고 에루살렘에 있는 신전을 율리우스 황실을 위한 신전으로 바꾸도록 지시내렸다. 이 조치들은 암살 직전 내려진 명령이었는데, 원로원 내 반대파들에게 황제와 율리우스 황실의 대대적인 전제군주화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서기 41년 1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열린 전차경주 대회장에서 자신의 근위대 대장인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그 일당들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58] 이때 칼리굴라를 살해한 근위대는 암살 실행 전 황숙 클라우디우스에게 칼리굴라의 명이라면서 황궁으로 불러 방에 가둔 뒤, 암살을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근위대의 극히 일부였는데,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황제의 동선과 스케줄을 이용해 내막을 감췄다. 카이레아 등은 24시간 칼리굴라를 보호하던 게르만 황제 호위부대를 떨어 뜨린 뒤, 비무장 상태였던 칼리굴라를 기습 공격해 궁에서 경기장으로 이어진 지하 복도에서 살해했다. 이후 그들은 칼리굴라의 아내 카이소니아와 이들 부부의 어린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각각 난도질해 살해하고 벽에 집어 던져 머리를 부딪치게 하는 방식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자체를 멸문시켰다. 재위 4년 만의 일이었다.
3.3. 암살과 그 이후 상황
칼리굴라가 죽던 41년 1월 24일 정오가 지날 무렵, 사실 칼리굴라는 극장 안에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때 점심을 먹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식사를 과식한 결과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때 칼리굴라는 거리에서 귀족 남자아이들이 트로이 전쟁 춤을 연습하고 있자, 잠시 멈춰서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연습을 도와주고 공연을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얼른 가자고 불평해서 가야만 했다.
그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2가지가 전해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서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근위대장 카이레아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걸 받아라" 하고는 목 깊숙이 칼을 꽂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라는 장교가 칼리굴라의 가슴을 찔렀다는 것이다.[59]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정확한 것인데 장교 사비누스가 먼저 군중을 시켜 군중들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사비누스는 황궁 통로에서 칼리굴라에게 그날의 암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웃으며 "유피테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뒤에서 경호를 하고 있던 카이레아가 "그래, 그렇다고 해주지."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린 칼리굴라의 턱을 칼로 베며 공격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져 게르만 근위병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카이레아는 가담자들에게 "다시 내려쳐!"라고 명령을 내려 상처를 입은 채 저항하는 칼리굴라에게 30군데의 상처를 입히며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황제의 가마꾼들이 장대를 들고 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사이, 칼리굴라의 외침을 들은 게르만 근위병들이 "황제를 보호하라!"를 외치며 암살자 몇명과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죄없는 원로원 의원 몇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칼리굴라는 29세(28세)의 나이에 죽었다. 재위기간은 3년하고도 10개월 정도였으며 칼리굴라의 유해는 비밀리에 카이레아에 의해 라미우스 정원으로 옮겨져 숨겨진 다음, 황급히 만든 장작더미에 대충 태워져 얇은 잔디층 아래에 가매장되었다. 그 사이 율리우스 루푸스와 백인대장은 황궁으로 가서 칼리굴라의 아내 카이소니아를 칼로 찔러 죽이고, 딸 율리아 드루실라는 벽으로 던져져 머리가 깨져 죽었다. 또 칼리굴라의 조각상들을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것처럼 끌어내려 모조리 부쉈다. 이후,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명으로 유배가 있던 칼리굴라의 여동생들이 귀국한 이후, 칼리굴라의 유해는 수습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당시 칼리굴라 암살에는 직접적인 암살가담자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사비누스 외에도 원로원 의원 중 영향력 있는 인사 몇명[60] 과 해방노예 출신으로 칼리굴라를 배신한 것으로 알려진 칼리스투스[61] , 두 명의 근위대장을 움직일 수 있는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황제의 동선을 관리하던 황실 관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용의자 명단 중 여러 증거상 아에키누스 클레멘스의 경우에는 카이레아와 사비누스가 칼리굴라 암살 정당성을 내세울 때 이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반면,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반역죄로 처형된 아시아속주 총독 아시아티쿠스는 클레멘스와 다르게 이 암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여러 정황상 칼리굴라 암살에 직접 개입한 이들을 도운 세력의 흑막인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62] . 아울러 음모에 가담한 원로원 인사들로 추정되는 인사들은 원로원 소집 후 열린 회의에서 “율리우스 가문, 그리고 카이사르 가 남자들[63] 에게 제위가 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강력하게 주장됐는데, 이는 회의 소집 후 파회될 때까지 원로원 대다수에게 강력한 동의를 얻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타키투스의 원전 중 이 부분은 완벽히 남아있지 않으므로 어떤 의원들이 이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고, 밀어붙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카이레아와 사비누스는 20명의 부하들과 함께 칼리굴라 암살 계획에 따라, 결점 많고 병약한 육체를 가졌던 황제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황궁으로 불러 가뒀다가 , 칼리굴라 일가의 학살을 마무리한 직후 그를 로마 외곽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연행했다. 이윽고 그들은 다른 7개 대대와 2개 대대 중 암살에 참여하지 않은 근위대 병사들이 칼리굴라 암살의 정당성에 동의할 것을 굳게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램과 달리,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포함한 7명의 대대장과 2대 대대 중 20명을 제외한 2천명을 포함한 1만명에 이르는 근위대 병사들은 이들이 칼리굴라를 암살한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카이레아, 사비누스와 그 부하들을 그 자리에서 체포해 황제 살해라는 대역죄로 가뒀다. 즉,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클라우디우스의 즉위에 찬성하면서도, 칼리굴라 암살을 결행한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 연구자들은 칼리굴라의 암살 사건을 폭군 제거를 위한 가장 완벽하면서도 우발적인 사건으로 단정하기 보다는 근위대 내 반발과 원로원 내 반 카이사르일가 세력의 엇박자 속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우면서도 준비되지 않은 공화주의 복구 움직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카이레아를 비롯한 근위대, 관료 내 암살집단이 내세운 클라우디우스는 그들의 생각처럼 결코 허수아비가 아닌 인물이었다.[64] '''황제로 옹립된 그는 암살결행자들에게 연행된 인질이나 다름없었지만, 칼리굴라가 암살된 지 24시간도 안 된 상태에서 원로원 주도하의 공화정 복귀 움직임을 완전히 제압했다.''' 느닷없이 근위대에게 황제로 옹립된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 병영 안에 들어온 직후 황제로 공표되자마자, 정신을 차린 뒤 병영 안에서 1만여명의 근위대 병사들과 7개 대대 지휘관들을 차분히 설득했다. 이때 그는 말로만 설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근위대의 마음을 확실히 잡기 위해 병사 개인 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하사하면서 그들의 충성을 확실하게 받아냈다. 아울러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에게 황제로서 명을 내려 국법과 가족법에 따라, 칼리굴라와 그 일가의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 등 암살범들을 인도받아 그 즉시 사형을 판결하고 자살하라고 명했다[65] . 따라서 카이레아와 사비누스, 그 부하들은 어떤 변명없이 모조리 자살했다.이후 가매장된 칼리굴라의 유해는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에 따라 수습돼 칼리굴라의 여동생들의 참석 아래 정식 장례가 치뤄진 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의 마음을 다잡음과 동시에 로마와 이탈리아 민중들을 상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명예와 공훈을 행사 등을 통해 알렸다. 이 방법은 로마와 이탈리아 군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는데, 칼리굴라가 암살된 지 24시간도 지나기 전에 로마 내의 혼란이 잠재워지고 모든 분위기는 클라우디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사람들에 대한 재신임으로 흘러갔다.
반면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 지길 기다렸다는 듯, 계획대로 신속히 움직였다. 이때 이들의 회의 소집은 카이레아 측과 사전교감을 통해 진행된 일이 아니었고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 같아도 어설펐다. 원로원은 평소와 달리 유피테르 신전에서 열렸는데, 집정관이 수도 경비대를 이용해 포로 로마노(Foro Romano) 일대와 유피테르 신전을 장악한 뒤 원로원이 보조를 맞췄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공화정 복귀 분위기가 현실화되는 듯 했다. 하지만 회의 분위기는 “카이사르 가문을 멸문 시켰다고 해도 클라우디우스 가문 내 카이사르 일가(클라우디우스)까지 제거하자” 같은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도 중구난방적 이야기들이 결론 없이 계속 벌어질 정도로 실속이 없었다. 아울러 원로원의 바램과 달리 칼리굴라의 뒤를 잇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반나절도 안 된 시간에 이미 근위대를 장악한 뒤 황제 암살범과 이에 동조한 근위대 소속 대대장 등을 모조리 반역죄로 체포해 처형시킨 상황이었고, 황궁 내 엘리트 관료들은 황제 시해범들과 별개로 반칼리굴라, 반 클라우디우스 분위기에 동조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수도 경비대를 장악한 원로원은 입장을 정리한 뒤, 클라우디우스와 근위대에게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서한을 보냈는데 타이밍을 완벽히 놓친 상황인데다 과거처럼 제 힘으로 주도권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이탈리아 내의 유일한 최정예 부대인 근위대 병력 대부분은 애초부터 원로원과 칼리굴라 암살을 비밀리에 주도한 이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칼리굴라 암살에 동조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 그들 대부분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칼리굴라 생전 내내 스스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특히, 그들이 옹립한 클라우디우스가 개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너스를 준 까닭에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수도 경비대를 동원해 항복하라고 요구하는 원로원은 그들에게 아니꼬운 존재였다. 그래서 근위대는 원로원의 서한이 공개된 직후 오히려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지지를 더욱 확실히 했다. 여기에 더해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파 인사들과 클라우디우스의 개인 고문들은 원로원과 동조하지 않고 새 황제 밑으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의 경고성 서한을 무시할 것을 조언하면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근위대를 움직여 반역행위를 명백히 한 원로원을 끝장내고 판 전체를 갈아 엎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체감하고 있던 수도 경비대는 근위대에게 전면행위를 시작한 원로원을 내팽겨친 뒤, 클라우디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사실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으로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의 생각 이상으로 이탈리아 민중들과 제국의 주력인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많던 황족이었다[66] . 이미 로마의 모든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근위대를 장악해 통제하고 있던 클라우디우스는 상술했듯 고문들의 권고에 따라 근위대를 대동하고 원로원에 찾아갔다. 이때 그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 복귀에 따르겠다는 의사표시 대신 존중하겠다고 언급했으며, 자신이 암살범 카이레아 등을 인도받아 국법에 따라 즉시 처형한 사실을 공표했다. 또 일부 불충한 세력에게 황제가 죽음을 맞았다고 언급하면서 죽은 조카에 대해 '기록말살형'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부탁하는 연설을 했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정중함이 묻어난 경고성 부탁이었는데,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예상치 못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상황 정리를 두 눈으로 본 원로원은 무력감 속에 근위대를 등에 업고 있는 클라우디우스의 의견을 따라줬다.[67] 따라서 칼리굴라는 생전 원로원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음에도 기록말살형의 불명예를 뒤집어 쓰지 않았다.
4. 외모에 대한 왜곡
가이우스의 건강과 외모 부분은 그가 4년만에 암살된 결말과 함께 폭군 이미지를 굳히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구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수에토니우스였다. 그는 당대 칼리굴라의 과격하고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목격한 세네카, 필로, 요세푸스조차도 말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으로, 칼리굴라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왜곡해 묘사했다고 평가받는다[68] .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키가 크고 안색이 창백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드문드문 나 있었고 정수리는 완전히 대머리에다 이마는 넓고 주름이 많았으며, 몸에는 털이 아주 많고 체형은 좋지 못했다고 한다. 더불어서 눈동자는 공허하고 목과 다리는 굉장히 가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칼리굴라가 몸에 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머리였기에 누군가 걸어갈 때 자신을 내려다보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염소를 언급하면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불쾌하고 괴상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늘 거울 앞에 서서 험악하고 무섭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더 끔찍한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동시에 소년 시절부터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69]
칼리굴라는 전통적인 로마 의상이나 유행하는 옷차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옷차림에 있어서 남녀 구별이나 인간적인 품위를 추구하지 않았고, 자수로 뒤덮이고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오리엔트 군주식 망토를 걸치거나 소매가 긴 튜닉에 팔찌를 차기도 했다. 또한 법에 의해 남성은 입을 수 없는 비단 옷을 입기도 했고, 슬리퍼나 반(半)장화, 군화, 여성용 신발을 신기도 했다. 더불어서 아주 가끔은 개선장군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거나, 금빛 수염을 붙이고 손에 제우스의 번개, 포세이돈의 삼지창 등을 들고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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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위에서 언급된 외모 묘사나 행적들을 상당 부분 믿지 않고, 그냥 참조하고 있다. 카츠, 모건 교수 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이들은 칼리굴라가 갑상선 항기능성 장애을 앓았을 확률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질환을 앓을 경우라고 해도 수에토니우스의 말처럼 외모가 되긴 힘들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010년 바르바라 교수 등이 발표한 '가이우스의 건강과 관련된 연구'에 따르면, 그의 행동이나 묘사들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그대로 믿고 따른다고 해도 상당히 의문이 든다고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백번천번 양보해서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믿어준다고 해도, 외모 묘사처럼 그대로 닮기 위해선 상당히 무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의 흉상을 비교해 분석한 연구들, 당대 기록이나 이야기를 보면, 칼리굴라의 외모는 수에토니우스 기록대로 ‘공허한 눈두덩이+대머리+털보+괴물’이 아니었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오히려 그의 머리색은 갈색이며, 지극히 건강한 또래 이탈리아인의 피부색과 갈색눈이 그의 현실적 외모였고 두상이나 키 역시 혈통적 가계 등을 종합해볼때 더 적합할 것이라고 하며, 그가 진짜 간질을 앓았거나 광기에 휩싸여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도 의문이라고.
하지만 그의 외모를 기록한 수에토니우스의 책이 오늘날까지 분실되지 않고 남아 있고,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님에도 워낙 강렬하고 문학이나 희곡 등에서 악역 소재로 훌륭했기에, 대중매체들은 칼리굴라에 대한 비방성 기록들을 사실로 만들어 재창작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칼리굴라는 ‘루머에 루머가 더해져 결국 ‘간질환자+폭군+근친상간+미치광이+사이코패스+복수귀+변태+대머리+털보’로 알려지게 됐다. [70][71]
5. 평가
구제불능의 폭군으로 평가받았던 칼리굴라는 과거와 달리, 오늘날 권력강화 중 그 결과를 보여주기 전에 실패한 황제 내지 갑작스런 질병의 후유증에 시달린 암군 정도로 재평가받고 있다[72] . 그래서 그는 로마 대화재 이후 화재 원인을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돌려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자신의 사치를 위해 죄없는 황족들과 제국 내 부자, 장군 등을 죽인 네로, 내란 당시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며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말한 비텔리우스, 본격적으로 암흑기에 들게 만든 장본인 콤모두스,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제국을 피바람으로 몰고 가고 세금징수를 위해 꼼수로 안토니누스법을 만들어 로마 제국 시스템 전체를 망가뜨린 황제로 비난받은 카라칼라,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폭군 포카스와 달리 폭군 대열에 포함되어 있지만, 했다고 주장되는 일들이 사실이 아니거나 실제 한 일로 치부되는 것도 비방성 풍문인 이유가 많아서[73] , 카라칼라와 함께 실제로는 이미지와 달리 그렇게 나쁜 황제로 평가되지는 않는다[74] .
칼리굴라의 악행이나 이상한 외모, 부정적 평가는 수에토니우스, 세네카, 파비우스 루스티쿠스, 그리고 이 세사람의 기록을 참고로 서술한 디오 카시우스의 남은 기록이 과거에는 활용됐다. 그런데 수에토니우스는 세상의 온갖 뜬 소문을 기록할 정도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받는 사람인데다,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공화정을 없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혐오"를 이어받은 탓에 근대 이후부터는 황색언론 취급을 받을 정도로 신뢰도가 떨어지는 인물이다. 그리고 세네카와 파비우스 루스티쿠스의 사라진 기록들은 그들이 동시대 사람이라고 해도, 칼리굴라를 서기 39년 암살하려는 혐의로 기소된 전과가 있기에 객관성을 온전히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아울러 디오의 기록은 세네카, 루스티쿠스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됐고 부정적 부분만을 추려 간추린 부분을 다시 추린 측면이 있다 . 따라서, 우리가 고대 기록이라고 말하는 가이우스 칼리굴라에 관한 4여년간의 기록은 이상할 만큼 개인적 원한을 이유로 한 의도적인 비난과 증오에 가까운 서술이고, 이런 기록들은 무차별적으로 근대 이전까지 주된 평가의 자료로 활용됐다. 따라서 이 황제에 대한 종합적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대 사가 중 하이켈하임, 존 영거, 스카레 등 로마사 권위자들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록만 가지고 칼리굴라를 미치광이, 4년동안 악행만 하다가 살해당한 황제로 단정짓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연구 흐름처럼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의 평가와 달리, 근대 이후 금석문과 여러 기록들의 종합 연구를 통해 수에토니우스와 세네카로 대표되는 인간 칼리굴라를 묘사한 부분은 반박되고 있다.
- 39년 금융위기라고 부르는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막대한 유증을 다 써먹고, 국고까지 바닥나게 했다는 주장은 2003년 샘 윌킨슨 등의 연구를 통해, 로마 제국 원수정 초기의 재무부에서 벌인 귀금속을 통한 화폐 주조 등으로 쉽게 반박되고 있다.
- 디오가 많이 참고한, 세네카가 주장한 기록들에서 세네카는 "칼리굴라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일대에서 곡식수송선을 가지고 장난질했다", "공공마차를 압류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 당시 그가 비난한 부분은 정작 로마 정부가 갈리아에서 벌어진 기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조치인데다, 네로 시대 이전부터 오랜 기간동안 인신매매와 고리대 문제로 갈리아 북부와 브리타니아 일대에서 큰 원성을 들은 이는 정작 세네카였다. 따라서 현대에는 곡물 수송 및 기근 해결 문제에서 칼리굴라와 당시 로마 정부가 세네카에게 왜 낭비만 하고 악행을 전부 했다고 까이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을 듣고 있다.
- 후술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들은 그 악행을 중구난방식으로 서술하면서 근거없는 소문들을 같이 적어놓고 ‘이랬다고 하더라’ 식이고, 악행의 피해자로 언급된 인사들 역시 대개 ‘그렇게 되었다더라’ 식인 경우가 워낙 많다.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필로 등 당대 기록들의 묘사 부분도 차이가 있는데, 필로의 경우 이 황제가 미숙하고 지나치게 노골적이긴 해도 나름 긍정적 부분도 알렉산드리아 문제 해결 중 면담 과정 서술 등을 통해 서술했다. 이는 당대 로마인 사가인 필로의 조카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를 직접 경험한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같은 인사들도 비슷한 입장인데, 요세푸스의 경우 "재정적으로 무리처럼 보인 남부이탈리아 일대의 항구 건설들은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곡물 수급을 증대시키고, 기근을 해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할 정도로 이미지처럼 쓰레기 같은 결정들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 칼리굴라를 두 번이나 직접 만나 면담까지 한 필로 등 당대의 기록을 보면 칼리굴라는 상당한 유머감각이 있었고 머리도 좋았다고 적혀 있다. 또 웅변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사건의 본질을 빨리 파악해 이를 이용해 재치있게 말을 잘하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즉, 칼리굴라는 지극히 괴물같지 않은 나름 잘생긴 외모에 유머 감각과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75]
5.1. 원로원과 후대 사가들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 이유
칼리굴라 시대는 내정적인 진보는 거의 없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로마 제정의 중요한 정책들은 정작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 그가 취한 속주 정책들 역시 기존의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와 그 스타일만 다를 뿐, 변덕스럽고 독단적이었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이전 로마 공화정 시대의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와 비슷했다.''' 또 '''칼리굴라는 네로처럼 돈이 궁해졌다고 속주세를 인상하지는 않는 등,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결정한 중요 사항을 제멋대로 교체한 경우가 없었다. ''' 그가 매춘세를 고려했다는 소문도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고, 실제로 이런 세금을 만들지 않았다.
이미지와 달리 실정이라고 불린 내정상 실수도 크게 없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도 평화롭게 유지하기 힘겨워했던 파르티아와의 관계에서도 실적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본인이 먼친척인 왕을 불러들여 죽이면서 마우레타니아 반란의 원인을 제공하긴 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과격했어도 마우레타리아 병합문제는 근본적으로 본인 혼자 과대망상 속에서 내린 멍청이 같은 결정이 아니었다. 당시 원로원과 로마군부는 분명 북아프리카 일대는 미래적인 입장에서 군사적인 움직임이 없다면 마우레타니아 왕국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고, 상대적으로 안전해보여도 언제까지 로마 입장에서는 클라이언트 왕국이라는 이유로 잠재적인 곡물 문제, 정치경제적 문제 예방을 위해 필요했다고 봤다. 또 칼리굴라의 방식이 두 전임자처럼 세련되지 않고 과격하긴 했어도, 원로원과 황제 모두의 판단처럼 마우레타리아 문제는 로마의 국력으로는 동방에서 벌어지는 문제보다 빨리 해소할 수 있었다[77] . 이 외에도 그는 필로 등 당대 기록처럼 시한폭탄과 같았던 알렉산드리아 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 갈등 문제도 직접 양쪽 이야기를 들은 뒤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결했다.
그럼에도 가이우스가 당대 자신과 대립을 해온 세네카를 제외하고, 100여년 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150여년 뒤의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에게 부정적 평가를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티베리우스 통치 후반기를 경험한 원로원 입장에서 본다면, 젊고 신선한 이미지의 가이우스는 제위에 등극한 이후 선황 티베리우스와 판박이 수준으로 비슷한 절대군주였고, 그들 입장에선 실망감만 안겨줬다. 가이우스는 즉위 후 중병에서 쾌유된 직후부터 아주 노골적이고 급진적으로 임페라토르의 권한 강화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원로원에게는 변덕스럽고 냉혹하게 보였는데, 그에 대해 가이우스는 그들을 대할 때 아우구스투스처럼 능수능란하지도 않고 티베리우스처럼 냉혹하면서도 노련하지 않았다. 이는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가이우스는 초반에는 선심성으로 막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전임자처럼 호주머니를 닫아 버렸다. 그러면서 늘 자신과 가문을 위한 홍보와 퍼포먼스를 통한 자기 신격화를 했으니, 그들에게 이 부분은 흥미만 유발할 뿐 재미도 없고 좋게 보이지도 않았다.
또 그는 원수정 초창기인데도 훗날 등장할 도미티아누스처럼 자기과식적인 황제였고, 암살직전까지도 원로원과 끊임없이 기싸움을 벌였는데 그 모양새도 젊은 임페라토르가 노련한 원로원에게 힘겨루기를 하면서 골탕먹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따라서 원로원 입장에서 그를 평가한 100여년 뒤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에게, 칼리굴라는 진짜 버릇없고 나쁜 황제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즉, 원로원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칼리굴라는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그냥 티베리우스 시즌2였기 때문에 욕을 더 먹을 수밖에 없었고, 즉위 초반 그가 베푼 시혜책을 계속 기대한 민중들 입장에서는 칼리굴라는 3년차 이후부터는 화끈한 소비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 좋은 소리가 나온 것은 당연했다.
원로원 입장에서 칼리굴라의 자기과시적인 모습을 보면,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들[78] 은 지나치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에 비해 노골적으로 점증된 프린켑스의 지위 향상으로 비춰졌다.''' 특히, 그 방법 역시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위한 홍보를 목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 속 분장을 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을 입고 등장했다. 이런 모습은 당시 기준으로 로마인들에게도 익숙치 않았는데,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보다 빠른 원수정 초창기의 보수적인 로마인들 관점으론 "병에 걸리더니 젊은 황제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치부됐다. 또 칼리굴라는 중병 이전까지는 말쑥하고 단정한 차림의 황제인 터라, 이런 퍼포먼스들은 보는 입장에서 그 충격이 상당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원로원과 상류층들은 8개여월 만에 젊은 황제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미치광이이자 괴물’로 느껴졌고, 정국은 이어지는 암살 음모와 황제 측이 숙청으로 대응하면서 상당한 긴장관계로 몰아갔다.
또 그는 제2의 세야누스 등장을 의식해 자신의 장인을 비롯해, 마크로 등 근위대장들을 숙청하면서, 티베리우스에게 배운 방법대로 견제를 했고 이런 부분은 실망과 비난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근위대장과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자신이 암살되는 결과를 맞았으니(....) 반대파 입장에선 제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욕을 더 먹었다[79] .
-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가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한 이후 동료 공모자들을 모을 당시 "지나치게 원로원과 기사계급 부자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과 암살 사건 당시 친황실파와 게르만 호위대의 대응,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일어난 아시아티쿠스 사건, 요세푸스의 주장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80] .
-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등극 당시 원로원에 대한 반역죄를 없애고 기록도 불태우는 등의 행동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후 원로원 의원을 정면에서 모욕하는 일이 흔했으며, 원로원의 각종 특권을 박탈하고, 반역죄로 원로원 의원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몇몇 원로원 의원을 고문하고 자살시키는 등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또 자신의 저서에서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를 기록하길 ‘원로원 의원과 대화 중 폭소하기에 의원이 이유를 묻자, 당신의 목숨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게 떠올라서 웃었다며 섬뜻한 농담을 하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원로원을 비꼬아서 자신의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야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농담으로 말한 애마 이야기는 훗날 나중에 칼리굴라의 폭군 이미지와 결합해서 칼리굴라가 정말로 말을 원로원 의원에 임명시켰다는 루머로 변질되기도 했고, 이후 창작물들을 통해서 근친상간, 익명의 원로원 의원 살해 등 카더라식 서술들이 진짜 그가 해버린 일들로 변질되었다.
- 칼리굴라의 사치와 악정이라고 불리는 부분들을 살펴보면, 그의 치세기때 결정이나 행보들은 네로처럼 그것이 심각한 부채와 제국 전체를 흔드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처럼 엄청난 유증금을 다 쓰고 국고까지 바닥낸 까닭에 국가 재정기능이 망가지거나, 이를 이유로 속주민들에게 강탈을 하거나 군대 월급을 밀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즉, 이미지와 달리 칼리굴라의 악정이라고 주장되는 부분은 이후 네로, 콤모두스처럼 로마 역사에 큰 해가 된 것도 아니다.
- 중병에서 회복한 직후, 칼리굴라는 원로원이 가지고 있던 화폐 발행권을 빼앗아 그 권한을 갈리아 지방의 리옹으로 옮겼고, 원로원에게서 속주 총독 임명권을 빼앗는 등의 행동으로 평가가 상당히 나빠졌다. 이런 까닭에 즉위 후 기반을 만들고 있던 시점부터 원로원과 꾸준히 대립했다. 아울러 제국 전역에 자신과 황조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를 강화해 암살 전 원로원에게 노골적으로 프린켑스 지위를 전제화킨다고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짦은 4여년간의 통치 기간동안 프린켑스와 원로원 간의 관계는 티베리우스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이런 연유로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일부 근위대에게 암살된 뒤,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 실제로 칼리굴라가 한 일들은 순전히 전임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시대때 결정난 무언가를 중지시킨 것을 되돌려 계획대로 짓거나, 황실어른들의 중지된 유언장을 집행 또는 큰 행사를 여는 등 돈을 쓰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개인적으로는 사치가 전임자보다 심했다고 해도 다른 폭군들과 달리, 순전히 개인적인 쾌락만을 위해 국고를 낭비하지 않았다. 또 그의 시대동안 로마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화폐주조, 발행 등의 일과 국가 업무 재정 정책들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다는 연구 역시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세네카의 주장이 쉽게 반박된 이유이다.
''' 이런 이유 등으로 당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성격,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은 교차 검증되지만 악정에 대한 기록은 중구난방이고 대부분 카더라식 서술들이라서 실제로 악정인지도 의문일 정도로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고 평가받고 있다. ''' 이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이런 조치들을 과거처럼 ‘미치광이 폭군’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탓에 남아있는 기록조차 극소수인, '''뭘 보여주기도 전에 죽은 황제''' 내지 '''처음으로 가면을 벗고 노골적으로 원로원에게 프린켑스의 점증화된 권력을 보여준 황제'''라고 재평가하고 있다.
5.2. 수에토니우스 기록에 따른 기행들
북아프리카의 히포 레기우스(오늘날의 알제리 안나바) 태생인 수에토니우스는 사실 칼리굴라 시대를 직접 살아본 인물도 아니고 100년이 지난 이후 살았던 인물이었다.[82]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칼리굴라의 이미지(섹스와 폭력, 근친상간, 미치광이, 폭군)는 모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물인 "《황제들의 삶(De vita Caesarum)》"이라는 저서에서 나왔다.
수에토니우스는 지독하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싫어했던 집안에서 이 시대 이야기를 들었고, 고향인 북아프리카와 성인 이후 살게 된 로마 거리에서 100년이 지난 이후에도 떠도는 온갖 뜬 소문을 모으고 모아 책을 출간하였다.[83] 특히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외모와 잔인함, 폭력성 등과 카이사르 간질설,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등 역시 수에토니우스의 책에서 처음 기록되었다. 또 다른 인물들의 동시대 저서에서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 검증되지 않은 채 상당수 나와있기에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읽을 때 유념할 필요가 있다.
- 자신을 신이라 생각해 베누스 등의 신들을 자신의 형제 자매라고 거론했다고 해서 미친 황제로도 유명하다. 콤모두스의 헤라클레스 코스프레가 로마 황제들 중에서는 유명한 편이지만, 시기상으로는 칼리굴라가 한 짓이 훨씬 앞선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유피테르를 본따 머리와 수염을 금색으로 염색하고 상반신을 벗은 차림에 번개를 들고 나타나거나, 넵투누스를 본따 삼지창을 들고 나타나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칼리굴라가 정말로 그렇게 믿은 건 당연히 아니고 이는 정치적 효과를 노린 쇼맨십 내지 상징적인 컨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소문에 따르면 첫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근위대장 마크로의 아내 에니아 나이비아를 유혹해 자신이 황제가 되면 에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으로 시작된 루머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근친상간 등과 함께 영화 소재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괴담.
- 위에서 언급된 주장의 연장선인데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에니아를 통해 마크로에게 환심을 산 뒤, 티베리우스를 독살했고, 늙은 황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티베리우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베개로 숨을 막아 죽였다고 한다. 이 내용 때문에 오늘날 연구자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데, 티베리우스는 동시대 기록들에는 죄다 노환으로 자연사했다고 나오고 있다.
-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으며, 그 증거는 당시 칼리굴라가 자신과 3명의 여동생에 대한 충성서약을 원로원에게 요구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이 주장은 각색되면서 각종 영화, 연극 등으로 널리 활용돼 칼리굴라의 이미지를 근친상간하는 폭군으로 굳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작가의 추측과 100여년 후 돌아다니는 야담이 섞여 완성된 거짓말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기록의 대표격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다. 칼리굴라에게는 여동생이 세 명 있었는데, 아그리피나(小),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였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여동생 중 드루실라를 가장 사랑하였으며, 나머지 누이들도 연회 때 자신의 아내가 앉는 자리에 앉히는 둥 수상쩍은 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참고하는 역사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 셋 중 셋 모두, 혹은 아그리피나를 제외한 둘과 근친상간을 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
-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가장 사랑했던 여동생 드루실라가 죽자 이후 사람들 앞에서 맹세할 때는 드루실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누이를 신격화했다'는 에피소드의 원본인데,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맹세를 할 때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기 때문에, 이 주장 역시 근친상간과 마찬가지로 신뢰성이 없는 기록으로 치부되고 있다.
- 어느날 사자와 죄수들의 싸움을 하려고 했는데 죄수가 다 죽어버려 죄수가 없자, 강제로 경기장 맨 앞의 5줄에서 구경하던 관중들을 끌어내어 사자밥으로 던져 주었다. 나머지 관중들은 열광했는데, 이는 맨 앞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귀족층이나 돈 많은 부유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리굴라에 대한 기록의 상당 부분이 2세기 즈음에 여기 저기서 돌아다니던 루머를 기술한 게 허다한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서 나왔음을 고려하면 헛소문이라고 일축되고 있다.
- 여러모로 전선 군단병들의 마스코트와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게르마니아 변경의 로마군이 반란이 일어났는데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내와 칼리굴라를 로마로 돌려보냈고, 이 사실을 안 병사들이 제발 칼리굴라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하면서 반란을 그만 두고 게르마니쿠스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수도를 자신의 고향인 안티움(안치오)로 옮기려고 계획까지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칼리굴라가 자신의 고향이 안티움이고, 자신의 고향을 어떤 도시보다 좋아했다고 한 말이 와전돼서 나온 도시괴담으로 치부되고 있다.
-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기록을 통해 칼리굴라가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지진, 화재,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나기를 신들에게 빌었다고 한다. 이유는 그런 게 터지면 멋지게 수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이런 주장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정치적 생명과 실제 목숨까지 한번에 날려 먹을 행동이기에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 근위대 대장인 카시우스 카이레아에게 살해당한 이유가 매우 웃긴데, 카이레아는 생김새가 여자같아서 칼리굴라에게 매우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안 그래도 평판이 안 좋은 마당에 자기 근위대 대장을 지속적으로 모욕하는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그것 하나 때문에 암살을 결행하지는 않았겠지만.[84]
- 칼리굴라가 궁 안에 매음굴을 지었다는 루머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귀족들의 가족을 궁 안에서 살게 했다는 부분은 사실일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흔히 군주들이 사용하는 ‘유사시 인질로 삼기 위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특히 칼리굴라가 한 말 중에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프린켑스의 권력 강화를 위해 공포 정치로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 로마 시내에 있던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본떠 테베레 강 서안에 개인용 전차경기장을 만들면서 트랙을 구분하는 띠 모양의 가운데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운반해왔다. 자르지 않고 통째로 가져오기 위해 길이 105m, 너비 20m에 달하는 대형선을 건조했는데, 임무를 마친 후 항구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외항을 재개발할 때 방파제로 재활용되었다. 그리고 오벨리스크는 1586년 성 베드로 대성당 앞으로 옮겨져 성 베드로 광장을 장식하게 된다.
- 노골적이고 발정난 개처럼 여러 여자들을 희롱했다고 한다.
6. 매장지 발견?
로마인들의 일관된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암살된 후, 에스퀼리누스 언덕 내 개인정원에서 시신이 급히 화장된 뒤 가매장되었다가, 숙부 클라우디우스 즉위 후 여동생들의 장례식 참석 아래 정식으로 유해가 화장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있는 부모 곁에 매장됐다. 이후 칼리굴라를 비롯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 황후, 황자, 황녀 등의 유골 항아리는 로마를 침공한 서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골들이 곳곳에 분산됐다는 것이 오늘날 정설이다.
그런데 2011년 1월 17일 이탈리아 로마 남부 라치오주의 도시 네미에 위치한 호수에서 2.5미터짜리 칼리굴라 동상을 훔치려던 도둑이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칼리굴라의 유골 중 일부가 발견됐다는 발표가 났다. 이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메리 비어드 교수는 이 발표에 대해 자신이 이 소식을 아침뉴스로 듣고 흥분해 모든 라틴 기록을 다시 읽었다고 한 뒤, 네미 호수에 있는 동상은 그의 매장지도 아니고 그렇게 화려하게 매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아울러 다른 서구권 학자들 역시 비슷한 의견을 냈는데, 이들의 의견도 가매장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에 칼리굴라가 영면했다는 기존 정설의 재확인이었으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며 한때 괴물로 묘사된 로마 황제가 묻혔다는 네미와 네미 호수 일대는 칼리굴라의 매장지가 아니라고 밝혔다.
7. 사생아 논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여러 명의 근위대장 중 제5대 황제 네로의 마지막 근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네 황제의 해 당시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사생아라고 애매모호한 말을 하면서 이를 주장한 일이 있다. 그런데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나쁜 쪽으로는 악마같았던 천재'라고 불린 티겔리누스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워낙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사람인데다 여러 정황상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받고 있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35년생으로 검투사 아버지 마르티아누스와 해방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의 딸 님피디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마시민권자였다고 해도 그는 로마 최하위층 출신이었는데, 이후 여러 악행에 가담하다가 네로의 최측근, 친구인 티겔리누스가 자신의 동료 루푸스를 쳐내고 피소 사건을 반역사건으로 확산시킬 때 네로의 두 근위대장 중 한명이 됐다. 그는 네로의 세번째 아내로 거세된 미소년 스포루스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며, 이후 네로와 티겔리누스를 도우면서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키우고 부하들에게 두둑한 보상을 약속한 뒤, 네로를 불신임한 갈바, 오토 편을 들었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완벽히 장악해 네로 몰락의 결정타를 날렸다. 따라서 네로는 그토록 믿던 님피디우스가 티겔리누스의 사임을 조장하고 프라이토리아니와 같이 원로원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난 다음 자살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람은 네로 몰락 이후에도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권을 보장받고 권세를 유지했는데, 그 방법은 티겔리누스의 사임을 조장해 그가 잠시 도망간 사이 갈바 측과 접근해 권세를 유지받았다. 하지만 그는 갈바가 무능함을 드러내다가 결국 무너지자 "다른 사람을 제위에 올리지 않고, 내가 오르겠다"며 황제를 선언하기 전 부하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평소 자신의 콤플렉스였던 최하층 출신이라는 점을 감추기 위해, 외조부의 옛주인 칼리굴라와 자신을 연결지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나는 칼리굴라의 사생아다"고 주장했는데, 이 일은 처음부터 사실도 아닌 터라 호응도 받지 못했고 그 역시 자신있게 주장하기 보다는 모호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호응도 못 받고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오히려 거짓말을 한다며 68년 로마에서 끔살당했다.
학자들은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이렇게 주장한 것은 지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존재한 혈통적 정당성을 노리고 벌인 자작극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칼리굴라에게 자유를 얻은 그리스인 해방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였다는 점과 길거리에서 떠돌던 칼리굴라의 막장 소문을 결합해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로마인들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고, 그의 부하들도 그가 네로 몰락 전까지는 티겔리누스의 친구이자 네로의 동료로 온갖 악행은 다했던 위인이었고, 티겔리누스처럼 자신이 로마 최하위계층 출신이라는 것에 콤플렉스가 대단했다고 알고 있었다. 따라서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과 당대 로마인들이 이 주장을 거짓으로 치부한 것에 대해 현대 학자들도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게 자유를 얻은 해방노예의 외손자라는 것을 이용해 제위를 노리고 나온 주장이었고, 지극히 제위를 노리고 내건 명분이라고 말한다.
8. 대중문화 속의 칼리굴라
8.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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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을 소재로 삼은 영화. 대부분의 내용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거했다는 평이다. 감독에 틴토 브라스 외. 칼리굴라 역에 맬컴 맥도웰, 티베리우스 역에 피터 오툴[85] , 네르바[86] 역에 존 길구드(1904~2000) 경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여배우 둘이(그 중 하나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의 여주인공인 마리아 슈나이더(1952~2011)이다.) 감독과 싸우고 나가서 별로 이름 없던 배우가 캐스팅된다. 문제는 이 영화의 등급은 '''X등급''', 즉 포르노 영화와 동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첫 개봉했을 때는 아예 등급 심사를 받지 않고 극장을 세 내어 개봉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 포르노 잡지인 펜트하우스가 제작에 참가해서 펜트하우스의 쟁쟁한 포르노 여배우들이 줄줄이 나와 시도 때도 없이 농도 짙은 에로 씬을 선보인다. 에로 씬만 모아서 보면, 어느 누구의 눈으로 봐도 빼도 박도 못할 야동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펜트하우스 섭외 담당자가 남자는 크기, 여자는 '''힘'''[87] 으로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포르노 영화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 캐릭터의 깊이 있는 내면묘사, 로마 시대를 잘 재현한 소품도 훌륭하고 굴지의 명배우 맬컴 맥도웰의 광기 어린 연기가 관객을 압도한다. 게다가 포르노 영화 수준의 에로 씬도 로마 시대의 타락상과 칼리굴라의 광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수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예술적이어서 봐도 느낌이 없다" 라는 의견까지 있다. 상업성으로 서로 엇갈림이 커서 영화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틴토 브라스 영화라고 하기에는 모호하다.
우선 감독인 틴토 브라스는 포르노 감독이 아니다. 에로티시즘 영화로 유명하지만 브라스는 줄거리가 있고 배우들 연기를 중요시하는 예술적인 에로티시즘 감독으로 추앙받는 감독이다. 그런 양반이니 줄거리와 배경을 더 깊게 파고들었고 결국 제작자가 원하던 포르노 위주 영화가 아닌 것에 서로 갈등이 커서 제작자가 도중에 잘라 버렸다. 사실 틴토 브라스의 가장 야한 작품도 검열삭제는 나올지언정 삽입 장면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 다음 감독은 무방비도시로 유명한 네오 리얼리즘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아들인 프랑코 로셀리니 감독이었다. 바로 이 영화 기획자 중 하나였기에 같이 기획하고 제작자인 펜트하우스 사장 보브 구치오네는 원한 만큼 야한 포르노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프랑코 로셀리니는 광기어린 칼리굴라에게 초점을 맞춰 영화를 감독했고, 결국 프랑코도 구치오네랑 다퉈가며 중도에 잘렸다.
3번째로 맡게 된 감독인 기안카를로 루이 역시 이런 영화를 단지 포르노로 만든다는 건 낭비라고 지적하며 구치오네랑 다퉈서 결국 또 잘렸다.
그래서 제작자인 보브 구치오네(1930~2010) 스스로 나머지 부분을 감독하면서 그냥 포르노가 되었고 세 감독이 만들어낸 부분과 영화가 아주 따로 놀아버렸다. 사실 궁궐을 개조한 창녀촌 장면 등은 나중에 제작자가 펜트하우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삽입했고 유명 배우들이 나온 부분과 외설부분은 따로 찍은 경우가 많은데 펠라치오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맬컴 맥도웰의 물건 노출은 진짜다. 여하튼 개봉 이후 틴토 브라스가 왜 내 이름 들이대고 개봉하느냐? 이름 빼라며 분노했고 여러 배우들과도 또 갈등이 빚어지며 우여곡절도 많았다.
결국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작품성과 막장 포르노 씬이 공존하는 독특한 포르노 영화라는 것이 중론이다. 감독판의 러닝타임 4시간짜리 물건이 존재한다는 루머가 있지만 헛소문이다. 틴토 브라스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데 감독판이 있을 리가 있나. 일반 상영판도 2시간 30분으로 상당히 긴 편이다.
칼리굴라 황제의 대중적 이미지를 '섹스에 미친 미치광이'로 굳히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영화가 되었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증언하시기를, 1980년대 한국에 비디오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을 무렵 복사 테이프로 인기가 꽤 좋았던 물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6월 항쟁 이후에 아주 잠깐이지만 진짜로 극장 개봉을 했고, 양지운이 번역한 영화 예고편이 TV에 방영되었다. 물론 전부 다 잘린 것이었지만. 전체 영화 중 무려 1시간 27분 정도가 잘려나가서 보고나면 뭐가 뭔지 몰랐다고 한다.
영화잡지인 월간 로드쇼의 1990년 1월호에서 마광수 교수의 영화 추천목록에 이 영화가 끼어 있다.
하재봉이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성기 노출도 극찬했고, 이 영화의 진짜 백미로 네르바의 자살 장면을 꼽았다.[88] 심지어 위에선 언급한 극장 개봉판을 봤는데, 도저히 줄거리 파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2시간 반짜리 짝퉁 비디오로 보고 나서야 이렇게나 많이 잘렸는지 경악했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음란한 왕비 역으로 영화 팬들이라면 낯이 익을 얼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젊은 시절의 '''헬렌 미렌'''이다.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누드도 꽤 찍었다고.
시칠리아에서 촬영할 때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로케이션을 지켜봤는데 포르노 영화 촬영장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 결국 주변의 험악한 분위기에 사색이 된 배우와 스태프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고 한다.
'칼리굴라 효과'라는게 있는데 이 영화와 관련된 일화에서 비롯된 심리학 용어이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켰고, 이것이 화자되어 다른 지역에 가서 보고 올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현상'을 칼리굴라 효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슷한 것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있다.
2-Disc 버전인 Imperial Edition의 블루레이판은 1번 디스크가 지역 코드 A(한-미-일 공용)의 블루레이이고, 2번 디스크는 블루레이가 아닌 지역 코드 1번(미국 등지)의 DVD다.
8.2. 연극
칼리굴라를 소재로 한 연극. '''흔히 칼리굴라 하면 떠오르는 위 항목의 영화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알베르 까뮈가 쓴 희곡을 일컫는다.''' 다만 내용상의 문제로 공연을 제한하는 국가도 있다. 내용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누이동생이 급사하자 너무나 슬픈 나머지 인간의 유한성에 회의를 느낀 칼리굴라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고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다.
악역 전문 캐릭터이자 야인시대에서 조병옥으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학철씨가 주로 칼리굴라 역을 맡았다.
위 항목의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사려고 하다 용팔이에게 속아서 이 연극 실황중계 녹화분을 샀다는 웃지 못할 전설도 있다.
8.3. 참마대성 데몬베인의 안티 크로스
니트로 플러스의 에로게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나오는 안티 크로스 중 하나.
왼쪽 1/3가량이 붉은색의 해골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코트를 걸친 거한.
성우는 고리 다이스케.[89]
보통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니며 클라우디우스는 뚱보나 덩치라고 놀리고 칼리굴라는 주먹으로 맞받아치는 기묘한 페어. 물론 둘의 실력은 비슷하기 때문에 주변의 일반인만 휘말려서 죽는다...'''그런데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블랙롯지의 평신도들.(어?)'''
평상시엔 과묵하고 침착한 성격이지만 피를 보면 이성을 잃고 난폭한 본성을 드러낸다.
전투방식은 마력으로 완력을 강화해서 싸우는 육탄계열. 방어력은 높은 편으로, 기신비상에서는 갑각류의 껍질같은것을 둘러 크투가의 총탄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본편에선 방심하다가 쌍마총의 첫 타켓으로서 왼팔과 오른눈을 잃었고 그걸 의수/의안으로로 대체했다. 이후 다이쥬지 쿠로에게 강한 원한을 품게된다.
사실상 안티 크로스중 가장 존재감이 없고 모든 루트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심지어 하도우 루리 루트에선 하도우 루리가 처음으로 조종해 본 데몬베인에게 레무리아 임팩트 맞고 소멸...
코믹스에는 게임 이상의 안습가도로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이쥬지 쿠로와 메타트론을 궁지에 몰아넣때 등장한 산달폰에게 맞아 배에 구멍이 뚫린뒤 발광하다 완성직후의 헌팅 호러를 '''멋대로 가져간''' 산달폰에 의해 상반신에 더 큰 구멍이 뚫려 데우스 마키나도 소환못해보고 사망(정말 압도적으로 발렸다.).
보유 마도서는 수신 크타아트, 데우스 마키나는 크라켄.
사실 딥 원 이라는 의혹이 있다(비늘피부, 물 속성 마도서, 단세포, 괴력 등).
8.4. Fate/Grand Order의 등장 서번트
클래스는 버서커. 열병으로 미쳐버린 건 디아나(아르테미스)의 축복[90] 때문이라고 나온다.
8.5. 게임 및 애니메이션 Caligula -칼리굴라-
[1]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을 통해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표기에 의거[2] 약칭으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으며, 로마인들에게는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렸다.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본인, 황실 일가를 비롯해 원로원, 군대에서 사용해 부른 이름이기도 하다.[3] 카이사르는 황제 제호가 아닌 성씨로 사용됐다.[4] 태어날 당시 본명. 게르마니쿠스는 할아버지 이래로 대 드루수스 일가 후손들이 성씨 뒤에 붙인 존칭 성씨이다.[5] 유니아 클라우딜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산욕으로 사망. 이 아이도 이름을 지어줄 8일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6] 후술하지만 대부분의 거짓참칭자처럼 사생아를 주장했던 사람이다. 네로의 근위대장이지만, 제위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칼리굴라의 사생아를 주장하면서 네로 사후 황제를 칭했던 사람이다. 네로 몰락 당시 원로원 편에 붙었다가 제위에 욕심이 생겨 느닷없이 자신이 칼리굴라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휘하 병사들은 당연하고 호사가들조차 이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주장을 하며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호응도 크게 얻지 못하고 살해당했다.[7]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의 셋째 형으로 유년기때 병으로 요절했다.[8] 동명이인의 친형으로 유아기때 사망했다.[9] 여기서 말하는 군화란 당시 로마군이 애용한 딱 발목까지만 오는 샌달 형태에 밑창에 적을 밟기 위한 징까지 달린 군화 '칼리가이(Caligae)'를 의미한다. 오늘날 종아리까지 감싸는 군화와는 상당히 다르다.[10] 완전히 끊겨진 것은 직계혈연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게 살해당한 시점이며, 역사상 멸문 시점은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의 양자 네로가 실각하고 자살한 이후이다.[11] 실제 기록에서는 그냥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린다.[12] .칼리굴라는 짧은 재위기간동안 총 4번의 집정관 경력을 경험했고, 이중 단독 집정관 취임도 있었다.[13]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 칼리굴라의 할아버지이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결혼한지 3개월 만에 태어났다. 그래서 그가 태어났을 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의 간통으로 태어난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풍자시까지 나왔는데 놀랍게도 로마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는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막내사위였기 때문에 친형 티베리우스와 달리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14] 대 드루수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소 안토니아 부부의 첫째 아이이자 장남이다. 옥타비아의 외손자,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외외종손이기도 하다. 그의 막내 동생이 칼리굴라 암살 후 정국 혼란을 수습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이다.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는 본래 그의 아버지인 대 드루수스에게 원로원에서 게르마니아 전쟁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부여해 사용하던 이름이기도 하다.[15] 게르마니쿠스 부부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다. 칼리굴라의 형 4명 중 큰 형 네로 카이사르,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 시대때 세야누스의 음모로 죽었으며 칼리굴라 바로 위의 두 형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모두 유년기때 죽었다. 이 중 셋째형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년기때 요절했고, 이름이 똑같은 바로 위의 넷째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16] 아버지 사후 성년까지 살아남은 아들 중에서 셋째아들이며 오형제 기준으로는 막내아들이다.[17]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친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입양했기때문에 칼리굴라에게는 혈연적으로는 큰할아버지, 법적으로는 할아버지였다.[18] 칼리굴라는 생전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평민출신이었던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기록하고 있다.[19] 단순히 양가가 명문가계일 뿐 아니라 부계와 모계 양쪽을 통해 같은 가계의 피를 받으면 열성형질의 발현가능성을 높이지만, 근세까지 그런 거 의식한 왕가는 별로 없이 지배자 가문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0] 대(大)플리니우스는 칼리굴라가 모젤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트레베리 인근의 암비타르비움 태생이라고 주장했으며, 가이툴리쿠스는 칼리굴라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 칼리굴라의 탄생지가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신성한 도시 티부르라고 주장했다.[21] 그런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안티였던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소문을 들으니 나이 들어서부터는 몸에 털만 많은 괴상한 모습의 대머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22] 칼리가(Caliga, 로마군인의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작은 군화라는 뜻의 '칼리굴라(Caligula)'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된 이후 황제가 된 칼리굴라에게 애칭이라고 해도 ‘아기군화’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한 콤플렉스였다고.[23] 이 당시 게르마니쿠스와 그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군단병들에게 맞선 백인대장이 훗날 칼리굴라를 배신하고 암살한 카이레아였다.[24] 시리아에 위치한 도시가 아니라 오늘날 터키 남서부에 위치한 안타키라 시이다. 오론테스 강 동쪽 유역에 있으며, 기원전 4세기 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장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셀레우코스 제국의 시조)가 자신의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리고자 처음 도시를 건설한 도시이다.[25] 혈연적으로는 게르마니쿠스와는 사촌형제 지간이며, 칼리굴라에게는 혈연상 오촌 당숙이기도 했다.[26]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아내 리빌라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일찍부터 세야누스의 교활함과 야망을 알아채고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 그의 기용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는 세야누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제위를 노리던 그에게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카이사르 가문의 합법적 후계자로서 각종 공직 특권과 영예를 수여받은 드루수스는 율리우스 가문 남성 중 가장 큰 걸림돌이자 제거대상이었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의도적으로 리빌라를 유혹해 아내와의 이혼과 리빌라와의 재혼을 약속한 뒤, 그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공모해 드루수스를 독살했다.[27] 소 드루수스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티베리우스와 갈등이 상당히 심각했음에도 남편의 법적 동생이기도 한 소 드루수스의 중재와 티베리우스의 인내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 드루수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는 더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됐고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티베리우스가 남편을 독살했다고 굳게 믿던 아그리피나는 계속해서 황궁 안팎에서 반 티베리우스 파를 모아 대립했다. 이런 황궁 내 대립에 리빌라와 세야누스가 끼어 들었고 티베리우스가 은둔 정치를 펼치는 동안 칼리굴라의 어머니 스스로 파멸하게 됐다고 한다. 아그리피나는 반역죄로 고발된 이후, 외딴 섬에 유폐되어 서기 33년에 사망했다. 사인은 아사.[28] 게르마니쿠스 생전에 시리아 총독 실라누스의 딸과 약혼한 상태였지만, 파혼 후 20년 소 드루수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고모 리빌라의 딸 율리아와 결혼했다. 이후 후계자 수업을 차근 차근 밞다가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양할아버지 티베리우스의 갈등이 고조되고, 세야누스가 이 틈을 노려 네로 카이사르와 대 아그리피나를 반역죄로 고발해 ‘국가의 적’이 되어 억울하게 추방됐고 자결했다.[29] 큰 형 네로와 작은 형 드루수스는 각각 31년과 23년에 유배지와 황실 지하실에서 사망했다. 네로는 유배지에서 자살, 드루수스는 지하실에서 짚으로 만든 침대 매트리스까지 뜯어먹으면서 버티다가 역시 어머니처럼 아사.[30] 이때 게르마니쿠스 가족의 비극적인 모습에 로마 사람들은 이들의 가족이 죽고 추방된 것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력 유지를 위해 희생된 것이라 여겼다.[31] 뛰어난 수사학자이자 변호사였는데, 악독할 정도로 잔인한 고발관이었다. 그는 세야누스 몰락 후, 칼리굴라의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운 죄가 밝혀져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영구 추방된 뒤 추방지에서 사망했다. 이후 칼리굴라가 즉위하자 그의 저서들은 칼리굴라의 명으로 금서로 지정돼 출판이 영구금지됐다고 한다.[32] 세야누스 처단 당시, 티베리우스는 유폐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하실에서 풀어주고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이용해 대항하라고 긴급 서신으로 명을 내렸다. 또 본인도 세야누스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정비하고 함대까지 이용해 속주로 도망갈 수도 있는 루트를 차단하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풀려나지 못했고, 황제의 명을 받고 그를 풀어주러 갔을 당시 아사된 채 발견돼 원로원과 로마 전역을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다.[33]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망 후, 대대적으로 원로원과 세야누스 파에게 다시 한번 복수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거짓증언 외에도 세야누스, 남성노예, 주치의와의 불륜 등이 적발돼 반역죄, 간통죄 유죄 선고 뒤 자살을 강요당하는 방식으로 처형됐으며,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기소하는데 앞장선 카시우스 세베루스 역시 반역죄 혐의로 모든 재산이 압류된 뒤 영구추방됐다가 추방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34] 그리스 왕가 후손 출신 노예로 동시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사건 후 고마움을 표시한 소 안토니아에 의해 해방노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그는 대 드루수스 일가의 노예였으며, 상당히 명석했다고 한다. 팔라스는 자신을 해방시켜준 옛 주인 소 안토니아가 사망한 후에도 해방노예로서 몸이 불편한 클라우디우스를 치근거리에서 수발들면서 충성을 다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모시던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된 후, 그의 신임 아래 재무부 장관에 올랐다. 이후 그는 칼리굴라의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를 클라우디우스의 네번째 결혼 상대자로 추천해 그녀를 다시 황궁으로 복귀시켰으며 네로가 즉위한 이후에도 해방노예 관료 3인방 중 2명인 나르키수스, 칼리스투스와 달리 공직을 유지했다. 소 아그리피나파의 핵심인사였던 그는 네로의 명에 따라 실각한 뒤 63년 살해됐는데, 그의 후손 중 한명은 167년 로마 원로원의 집정관이 되었다.[35] 명문귀족 가문인 유니우스 일족 출신으로 모계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칼리굴라와는 먼친척이다.[36]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수에토니스는 더해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에니아를 통해 마크로에게 환심을 산 뒤, 티베리우스를 독살했고, 늙은 황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티베리우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베개로 숨을 막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이 거짓말인 게 티베리우스는 자연사했고, 주치의의 말을 듣고도 자신의 건강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고 죽었다는 것이다.[37] 타키투스의 주장이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마크로에게 칼리굴라가 알려지지 않은 약속을 서면으로 보장하고 난 이후부터 이들이 연합을 형성해 칼리굴라 즉위까지 이어졌고, 원로원 회의록을 기반으로 한 타키투스의 저술 방식은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비교적 객관성에 입각하려고 했다. 또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처럼 왕자 본인이 유부녀에게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었고, 진짜 결혼맹세를 했다면 친손자 게멜루스에게 제위를 주고 싶어한 티베리우스에게 칼리굴라는 친혈육인 이유로 처형되지는 않아도 율리우스 간통죄로 기소돼 추방되었을 텐데 말년의 까칠한 티베리우스는 종손자의 행동을 알고 있어도 이들을 공격하거나 숙청하진 않았다.[38]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 섬에서 틀어박혀 살았어도 로마와 이탈리아, 각 속주의 사정을 계속 보고 받았고 수도와 본국에서 나오는 소문과 정보를 근위대에게 직접 보고받아 모를 리가 없었다.[39] 타키투스는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 일당을 쳐낸 직후부터 죽은 혈육들을 위한 피의 복수를 선언하면서, 서한에 신들이 자신을 저주하더라도 자신이 더 파멸하겠다는 문구를 적어 공개했다고 한다.[40] 수에토니우스는 지중해 세계를 이렇게 기록했다.[41] 오늘날에는 말라리아로 추정된다.[42] 심지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는 설까지 생겨났기에 인기는 더욱 상승했다.[43] 소(小)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사망할 당시에는 아직 성년식을 치루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아이에 불과했다.[44] 키르쿠스 축제에서는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의 조각상을 마차에 실어 지나도록 했다.[45] 전임 황제 티베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했을 때는 큰 행사가 없었고 엄숙한 분위기였다.[46]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칼리굴라는 회복된 뒤 이들을 잡아다 "약속 지켜야지?"라면서 검투사로 시합에 내보내고 물에 빠뜨려 죽였다.[47]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48] 다시 말해서 소 안토니아는 게멜루스의 외할머니였고, 칼리굴라와 게멜루스는 양부-양자 관계인 동시에 고종사촌형제이기도 했다. [49] 율리우스 가문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티베리우스 게멜루스’로 이어지는 적법한 직계라인이었다. 이런 까닭에 리빌라와 재혼해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한 세야누스는 리빌라를 끌어들여 율리우스 가문의 피를 이은 칼리굴라와 게멜루스를 모두 죽이려고 계획했다.[50] 이 무렵,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법무관 자리까지 연이어 승진한 대표적인 기사계급 출신이 베스파시아누스였는데, 그는 고리대와 경매업에 종사한 탓에 가문의 평판이 좋지 않음에도 칼리굴라 시대때 법무관에 추천받아 취임했다고 한다.[51] 이 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흔히 군주들이 사용하는 ‘유사시 인질로 삼기 위한 조치’로 자주 활용됐다. 그러나 본래부터 왕정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칼리굴라의 이런 왕권 강화책은 상당히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다.[52] 카이사르 이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연관성이 깊었던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의 주도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당시, 칼리굴라의 할아버지였던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가 이곳의 총독으로 있었고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도 이곳에서 유년 생활을 보냈다. 또한 칼리굴라의 고모 리빌라와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모두 이 도시 출신이었으며, 티베리우스 즉위 당시 게르마니쿠스의 가족들이 급히 거처를 옮긴 도시 역시 루그두눔이었다. 이런 까닭에 루그두눔은 일찍부터 칼리굴라 일가와도 연관이 깊은 도시였다.[53] 칼리굴라가 원로원에게 빼앗은 조폐발행권과 일부 속주 총독 임명권은 이후 황제들도 내놓지 않을 정도로 황제가 경제정책과 속주 인사권을 주도할 수 있게 한 결정이었다. 실제로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자신들에게 빼앗은 조폐발행권 등을 제자리에 되돌리기 원했지만,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클라우디우스조차도 이를 거부했으며, 그는 오히려 재무관 2명을 추가 배치하는 등 칼리굴라보다 황제의 국고 장악력을 더 강화시켰다.[54] 두 집정관은 오늘날 연구들에 따르면 실제로 칼리굴라 암살을 계획했다고 한다.[55] 칼리굴라의 증조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생전부터 황실과 친했고, 칼리굴라의 작은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완전히 정계에 배제된 시절부터 그의 진정한 친구 중 한명이었다.[56] 조개껍질 줍기는 칼리굴라의 광기의 예로 쓰였지만, 악의적인 소문이라는 의견과 바다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이 항명을 저지른 걸 반역죄로 처벌하지 않기 위해 조개줍기로 모욕을 주었다는 의견, 언제 작전이 실행될지 몰라 대기하던 병사들이 대기 기간 중 부업삼아 조개껍질을 주워 석회 제조인에게 팔려고 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기에 칼리굴라가 미쳐서 조개 줍기를 시켰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57] "칼리굴라가 황제가 된다면 이것은 칼리굴라가 말을 타고 나폴리 만을 왕복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58] 일설에 의하면 칼리굴라가 동성애자였던 카시우스 카이레아를 놀린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카이레아는 황제 암살 혐의로 처형되기 직전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고, 근위대와 원로원이 서둘러 칼리굴라 암살을 무마하려고 했기에 내막은 알 수 없다.[59]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곳은 황궁 내 지하통로였다.[60] 학자들은 정황상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비니키아누스 등이 연관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다른 원로원 인사들도 몇명 더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중 아시아티쿠스는 소시비우스와 루키우스 실리우스 루푸스 등이 메살리나와 함께 유죄를 밝혀내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칼리굴라 암살 배후와 반역 혐의, 비니키아누스의 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운동을 도운 혐의 등으로 처형됐다.[61] 밑에 서술된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의 외조부이다.[62] 실제 그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한 격한 감정과 경멸을 가지고 있었고 적대심도 상당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즉위 직후 반란들을 후원하고, 반 아우구스투스 일가 파벌을 구축하면서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친 황실파, 메살리나가 이 사람의 막대한 재산과 루쿨루스의 정원 때문에 기소한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실제 아시아티쿠스는 빼박인 터라 체포 후 자살해버렸고 온순한 것으로 이름난 클라우디우스조차 갈리아에서 이 사람의 비열함을 간접적으로 힐난했다.[63] 여기에는 황숙 클라우디우스도 포함됐다고 한다.[64] 클라우디우스는 어렸을때부터 황실 가족들과 주변 귀족들에게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이때 친할머니 리비아, 친어머니 소 안토니아도 마찬가지였는데, 가족 중 형 게르마니쿠스,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는 몸이 불편한 그를 무시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굉장히 아꼈다.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들 대 드루수스 사후 그가 남긴 세 아이의 법적 보호자가 됐는데 문자 그대로 조카딸의 자녀들이기도 한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를 물심양면껏 지원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 클라우디우스에게 정치 외에 하고 싶은 모든 학문 공부를 적극 지원해줬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녁마다 클라우디우스를 자신의 옆에 앉게 해 같이 식사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누나의 외손자이기도 한 혈육의 비범함과 문제 해결의 용의주도함을 꿰뚫어봤고, 정치쪽에서 후계수업을 받을 수 없던 외외종손에게 로마 최고의 역사가 리비우스를 스승으로 삼게 해 로마의 법과 전통, 정치 등을 자연스레 익히게 했다.[65] 카시우스 카이레아는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휘하 백인대장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도움을 받아 근위대장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가족법상 클리엔테스였고 이 혐의도 추가됐다.[66] 클라우디우스는 신체적 장애 탓에 제위 계승 서열이 말려나 있었음에도 상상 이상으로 인지도가 높고 인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 자체도 온화했고, 명문가 수장인데다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자 양손자였다. 또 부친은 대 드루수스, 형은 게르마니쿠스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해 기본적으로 호의적이고 향수가 강한 이탈리아 민중들과 이 일대의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상당했다.[67] 이때 상황을 보면 원로원 입장에서는 당장 공화정 복귀는 클라우디우스의 신속하고 정확한 행동으로 무산된 상황에서 근위대를 등에 업은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칼리굴라에게 그런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원로원에게 당부한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더해서 칼리굴라를 암살한 카이레아 등이 침묵을 유지한 끝에 처형됐기에 클라우디우스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할 경우, 그 후폭풍은 원로원 내 공화정 회귀론자들이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상황까지 고려해본다면, 의견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68] 이들은 칼리굴라의 과격한 행동을 까긴 했지만, 어린 시절 경험한 광기 같았던 체험의 탓이 크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거나 자신을 신처럼 묘사한 행동이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이상해보였다고 말했다.[69] 수에토니우스는 최초로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카이사르 간질설을 올리기도 했다. 또 티베리우스가 밤에 자다가 눈을 뜨면 얼마동안 초능력을 구사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70]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죽고도 한참 뒤의 사람이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자체를 미워하다 못해 혐오했다. 수에토니우스 집안이 수에토니우스가 출세를 위해 이탈리아로 넘어가기 전까지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살던 이들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어린 시절 동네 사람들과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말들은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71] 칼리굴라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는 잘생겼다는 기록이 있고, 칼리굴라 역시 이탈리아 내 당대 사람들에게 외모에 대해 못생겼다거나 기괴한 외모라는 말이 없다. 실제로 즉위를 위해 티베리우스 유해와 로마로 가는 동안 칼리굴라는 잘생긴 외모로 더 찬사를 받았다. 아울러 당대에 직접 칼리굴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필로 역시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외모에 대해 잘생겼고 세심할 정도로 꼼꼼한데다 본질을 파악해 이를 유머감각과 재치로 바꾸는 재주가 뛰어났다고 말하고 있다.[72] 만약에 그의 재위기간이 네로, 콤모두스와 비슷한 기간이었다면 그가 암군인지, 폭군인지 평가가 명확해졌을 거라고 평가받는다. 문제는 너무 이른 시간에 어떤 이유로 암살되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암살되었다는 것.[73] 공화정, 원수정 초중반 당시 반대편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가 길거리 등을 통해 비방성 소문을 퍼트리고 이를 사실로 선전하는 방식이었다. 그 예로 안토니우스는 정적 옥타비아누스의 가계를 해방노예와 로마인들이 혐오한 고리대금업, 세금징수원 등과 연관지어 비난했고, 그의 집안이 빵장수였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에 대해 기사계급과 원로원 인사들은 풍자시로 “종손 가이우스, 오랜친구들과 별궁 안에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 온갖 변태행위를 한다”고 한 뒤 이를 길거리에 뿌렸다. 당연한 말인데, 사실을 안 티베리우스 황제는 “거짓말이어도 절대 용서못한다”고 일갈한 뒤 이런 풍자시를 지은 이들을 잡아 반역죄로 고발하거나, 그들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준 뒤 사회적으로 비참하게 몰락시켜 자살케했다.[74]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들(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플라비우스 왕조의 도미티아누스의 재평가처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외의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 역시 유적, 유물, 금석문 등의 발굴, 연구로 평가가 많이 좋아졌다. 20세기 이후, 군인황제시대라고 불린 3세기의 위기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재평가받기 시작한 세베루스 왕조 시대 중 카라칼라 시대는 과거 분노조절 장애와 동생 살해 등으로 당대부터 폭군으로 욕먹거나 안토니누스 칙령의 후유증만 부각됐다. 하지만 로마군제 연구, 법체제 등의 연구 결과, 의외의 업적들이 발견되면서 후기 로마제정에게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고 재평가받고 있다.[75] 칼리굴라는 몇차례에 걸쳐 그리스인 대표들과 유대인 대표들을 함께 만난 자리에서 보여준 태도에서 딱히 ‘과대망상적이고 잔인하며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그리스인들을 편들어 비아냥거리며 유대인들을 놀렸지만("너희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악한 족속은 아니지만, 멍청한 족속인 것은 틀림없다. 나 칼리굴라가 신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니 말이다."), 필로 및 유대인 대표들을 만난 뒤 즉각 알렉산드리아 장관을 교체시켜 유대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그리스인들의 횡포를 철저하게 막도록 지시를 내려 성과를 거두었다.[76] 물론 일부 주장은 사실도 있긴 하다. 오펠리스크를 옮기고 퍼포먼스를 위해 칼리굴라가 만들었다던 큰 선박에 과실수 등을 심어 놓았다는 대형 유람선 이야기는 칼리굴라 시대 즈음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됐다. 칼리굴라가 만들었다던 개인용 전차경기장이라던지 조개껍데기를 줍게 한 뒤 설치한 등대 역시 마찬가지.[77] 그래도 이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후임인 클라우디우스는 무려 3년간 마우레타니아에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78] 이집트 파라오들처럼 로마 시민들의 재산 소유권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 이집트에서 발행한 화폐에 ‘Neus Helius(새로운 태양)’라고 자신을 묘사한 것,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제우스로 분장한 퍼포먼스 등[79] 칼리굴라 암살범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누가 배후인지, 왜 죽였는지 등을 말하지 않았다. 더해서 클라우디우스의 부탁에 따라 충성을 맹세한 근위대, 기록말살형 등을 내리지 않은 원로원은 너무 신속하고 급하게 칼리굴라 암살 이후 상황을 넘어가고 클라우디우스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80] 칼리굴라 암살 시도가 여러 번 있던 탓에 친황실파 인사들과 게르만 호위대는 말 그대로 슬픔과 분노에 찬 나머지 맹렬할 정도로 강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또 원로원의 공화정 복귀 움직임과 암살 행동이 엇박자가 난 상황에서 암살을 주도한 이들이 속주 주둔 군대와 접촉하려고 한 정황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사가 바로 아시아티쿠스였다고 한다. [81] 선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가 워낙 구두쇠로 소문이 난 터라 그가 죽고 난 이후로는 어느 정도 돈을 쓰지 않으면 곤란했을 것이다.[82] 단적으로 말해, 수에토니우스는 남자 시오노 나나미, 동인남이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한 남자였다.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시작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에 대해 왜곡해 놓은 것을 볼 때면 거의 시오노 나나미의 기독교 혐오와 비슷하다.[83] 물론 수에토니우스가 관보를 분석해서 황제들의 업적을 조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칼리굴라의 고향이 안티움이었던 것.[84] 클라우디우스와 원로원 모두 워낙 신속하게 암살범들을 근위대에게 인도받아 처형했기에 그 내막은 잘 알수가 없다. 카이레아를 비롯한 암살범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입을 다물었고, 암살의 동기와 그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른다.[85] 1932~2013.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역인 그 사람이다. 2003년에 영국 - 이탈리아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 아우구스투스에서 주인공 아우구스투스(노년) 역할도 맡았다(젊은 시절의 아우구스투스는 밴자민 새틀러). 다만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성에 문제도 있고 막장 드라마 같은 요소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86] 후대의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이다.[87] 여성의 질로 무엇을 잡을 수 있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88] 존 길구드 경이 열연했다. 이 영화 이전에도 율리우스 시저(1953), 로미오와 줄리엣#s-8.6(1954), 햄릿(1964)에도 출연해 명연기를 펼쳤다. 괜히 셰익스피어 전문배우가 아니다.[89] 슈퍼로봇대전 UX에서는 미야케 켄타.[90] 달의 여신인 만큼 광기를 상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