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티오 빌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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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대중적으로 '''빌라도'''는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군인으로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속주 행정장관(프라이펙투스 유다이아, Praefectus Iudaea)이었으며,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루살렘 일대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 최고 의회와[3] 이 시기 최고 의회에 소속된 사제들 중 "열심당원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된 이들이 있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2. 상세
2.1. 이름
본티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는 그냥 그의 본명이다[4] . 라틴어로서 'Pontio Pilato'는 원명의 탈격으로,[5] "sub Pontio Pilato (폰티우스 필라투스 아래에서)"라는 구절이 사도신경에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라틴어 표기의 -ti 형태를 '시'로 음역하는 관습 때문에[6] "본시오 빌라도"가 되었다.
폰티우스는 대충 다섯번째라는 의미로 삼니움 족의 부족이름 중 하나이다. 필라투스는 삼니움족의 가문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출처). 또는 로마의 창인 필룸에서 유래한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원래 그의 조상은 삼니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삼니움 전쟁은 예수가 태어나기 290년 전에 끝났고 진작에 로마에 합병되었으니 삼니움족 출신 같은 건 의미 없고 그냥 로마인이다. 폰티우스는 로마시대에는 꽤 흔하게 쓴 이름으로 키케로의 친구이자 호민관을 지냈고, 카이사르 암살자 중 하나인 폰티우스 아킬라라는 사람도 있었다.
2.2. 역사적 기록
로마인임에도 정작 성경 외에 그의 신원에 대한 로마 쪽의 기록은 없는 수준이며, 성경 외의 그에 대한 로마의 기록은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에서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설명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처형당했다" 정도로 짧게 언급하는 정도 밖에 없다. 오히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지역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살펴봐야 하는 실정이다.
유대 철학자 필로는 빌라도를 "거칠고 악의가 있으며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적인 저작물들 중 하나에서 "빌라도가 부임하고 나서 곧 유대인들을 적대하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남아 있는 행적들을 보면 평가가 썩 좋지 않은데, 빌라도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유혈 진압하는 군사적인 탄압 외에도, 유대교 성전에 로마식 신상(神像)을 달았다가 유대인들의 반발로 철회한다거나, 성전의 자금을 가져다가 로마식 수도관을 건설하는 정책을 세웠다가 유대인들의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다.
생몰년도나 어디서 나고 어디서 죽었는지도 불명.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 파견나갔던 외교관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스코틀랜드 땅에서 태어났다는 떡밥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설 비슷한 이야기다. 워낙 기록이 희박한 탓에 한 때는 기독교 측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이스라엘 카이사레아에 있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야외극장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석판이 발견되어 그가 실존인물임이 증명되었다.[7] 이 석판은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서 계단의 층계참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발견될 당시 사람들이 밟고 다녀 이미 돌의 왼쪽 부분이 깎여나간 상태였다. 이 명각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유대의 총독이라고 나온다. 정확히는 다음과 같다.
괄호 부분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깎여나간 부분이다. 이를 번역하면,(DIS AUGUSTI)S TIBERIÉUM
(...PO)NTIUS PILATUS
(...PRAEF)ECTUS IUDA(EA)E
(...FECIT D)E(DICAVIT)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본티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본인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의미로서, 석판을 세겨서 야외극장에 놔뒀다는 말이다. 그러니 본시오 빌라도는 기독교인들이 부른 칭호나 호칭같은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불린 그의 본명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석판을 헌정했을 리는 없다. 이걸로 그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증명되었다.존엄하고 신성하신 황제 티베리우스께
폰티우스 필라투스
유대의 총독
헌정했다.
2.3. 직함에 대해서
빌라도의 직함을 총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냐는 여부에 대해서 소소하게 문제제기가 있다. 빌라도는 유다이아 속주를 관할하지만, 또한 더 상위의 속주인 시리아의 총독 밑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의 직함을 총독으로 번역하는 게 오역이 아니냐 하는 것. 일단 라틴어로 쓰자면 빌라도는 Praeses(행정장관)이고 시리아 총독은 Proconsul(전직 집정관)이므로 구분이 된다. 당시 빌라도의 직함은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 군단장이자 시리아 총독의 수석부관 겸 유대 속주의 행정장관이었다. 그리고 원래 유다이아 속주의 총독은 시리아 총독이 겸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이라는 한국어는 역사적인 이유로 '식민지의 관할권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굳이 익숙하지도 않은 Proconsul과 Praeses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번역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한 사두정치 ~ 테오도시우스 1세[8] 시대의 로마사를 이야기할 때 정제와 부제를 가리지 않고 이해가 쉽도록 모조리 황제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를 보면 무작정 오역이라 몰아붙이긴 힘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의 집필진들조차 이렇게 엄격한 어휘 구분을 하지는 않는데, 이를테면 루카 복음서에서는 시리아 총독이고 유다이아 총독이고 간에 그냥 Praeses로 적혀있고, 똑같은 저자가 쓴 것으로 매우 강하게 추정되는[9] 사도행전에서는 시리아 총독과 동급인 아카이아 총독을 Proconsul로 적었다.
즉 당대 사람들은 이 둘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둔게 아닌데 신자들을 헷갈리게 하면서까지 이 둘을 구분하는게 큰 의미를 가진다고는 하기 힘들 것이다. 일례로, New Jerusalem Bible에서는 Praeses에 해당하는 그리스어[10] 가 쓰인 부분은 (시리아 총독이든 유다 총독이든 구분 않고) 모조리 governor로 번역했고,[11] Proconsul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쓰인 곳은 원문 그대로 Proconsul로 옮겼다. 여기서 시리아 총독와 유다 총독을 모두 governor로 옮긴 게 오역이라 보긴 힘들다.
2.4. 유명해진 이유
기록이 부실한 점을 보면 크게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예수를 처형한 것 때문에 현대까지 알려진 것처럼 보인다. 로마 제국의 지방 총독 휘하의 관료는 많았고, 뭔가 비범한 일을 하지 않은 이상 평범한 공무원들 가운데 현대까지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없다. 이 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현대까지 인지도가 높으려면 황제 아니면 뭔가 정말로 비범한 군사적·문화적 업적을 세운 사람 정도. 사실 황제도 별 업적이 없으면 인지도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지방 관료 정도 지위로 현대까지 이름을 알린 건 하필이면 상대가 그 '''예수'''였다는 점 덕분이다. 사실 당시 예수와 같은 종교 지도자는 흔했고 빌라도 입장에서는 그저 민중소요나 일으키는 듣보잡을 지방 토호들 여론에 따라 처형한 것이다. 정말 재수가 없어도 없어도 억세게 없는 케이스. 당시 민중소요는 드물지 않게 일으났으며 이에 대한 진압과 지도자의 처형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게 하필이면 예수였을 뿐.
다만 지금 시점에서 그렇다는 거고, 당시 로마 제국 정계 시점에서는 엄청난 고위직까진 아니어도 정계의 중요 인물이었다. 성경만 봐서는 알 수 없겠으나 로마 역사서와 당시 국제 정세를 살펴보면 시리아 총독은 전직 집정관(proconsul)령으로, 원로원이 터치할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게다가 당시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가상 적국 1호인 '''파르티아'''와 인접한 최전선으로 무려 2개 군단이 상주하는 자리였다. 이런 집정관령 총독 자리는 시리아 지방[12] 과 영국 북부지방, 라인 강 게르마니아 전선, 도나우 강 전선, 북아프리카 전선 등이 있다. 이처럼 막중한 직책을 맡은 그의 직속상관 루키우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측근이기도 하였다.
2.5. 성경에서
Τί στιν αλήθεια;[13]
QUID EST VERITAS?
-요한의 복음서 18장 38절
예수는 본래 신성모독으로 기소되어 유대 지방 최고 의회(성전)에 출두했는데, 속주의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빌라도의 법정으로 보냈다. '''성경에 따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고 여러 차례 카야파(가야파) 파벌을 설득하려 했으나, 끝내 대제사장 카야파 파벌들에게 떠밀려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15]δοὺ ανθρωπος.
'''자, 이 사람이다.'''(요한의 복음서 19장 5절, 공동번역성서)
신약성경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빌라도는 바라빠[16] 를 처형하느냐 예수를 처형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예수를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의견에 떠밀려서 대충 예수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하고,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며 손을 씻은 비굴하고 교활한 법조인 정도로 묘사된다.
여기서 가나안 지방의 명절인 유월절에는 광복절 특사 비슷하게 죄수를 1명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다는 배경 설명이 나오는데, 문제는 이게 '''떡밥'''이라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에 그런 관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직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에만 등장할 뿐 다른 그리스도교/유대교 관련 전승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선택 자체가 후대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식민 지배로 불만이 누적되어갈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계 죄수를 명절에 하나 석방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말이 되는 조처이기에 실제로 그런 제도가 있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원래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에 존재하던 풍습이라는 이론도 있다.
빌라도는 예수의 처형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임에도 예수가 죽는 것을 방관했다. 속주의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었으므로, 빌라도가 끝까지 거부하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수 있었고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편 요한의 복음서 19장에 보면 빌라도가 꽤나 적극적으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힘썼다는 투로 기록되어 있다. "빌라도는 몇번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는 죄가 없으니 태형만 하고 풀어줄 것이다"라고 했고, 빌라도의 아내 역시 남편에게 예수의 무고를 증언하며 놓아주기를 권했으나 당시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십자가형을 주청하며 "민란이 나려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카야파와 성직자들은 강력하게 빌라도를 압박하여, '''"만일 그자를 놓아준다면 장관 & 지사님은 황제의 충신이 아닙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들이 빌라도를 압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의 죄목에 있다. 예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되어있었는데, 이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것이 죄라는 이야기이다. 왕을 사칭한 반역죄를 사형으로 다스려야 옳다는 것이 유대인의 논지. 그러나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는 그냥 지나가던 또라이 내지 정신병자(....) 에 지나지 않았으므로,[17] 빌라도의 관점에서는 죄가 되기 어려웠다. 어찌되었든 유대인이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가 죽었으므로, 이 문제는 수 백년간 기독교인에 의한 유대인 박해의 근거 중 하나가 된다.
게다가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의 죽음은 사실 계획된 것이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능동적으로 배신을 때린 케이스라면 모를까, 빌라도가 막지 못한 것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하느님의 의지가 개입했다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18] 그냥 철저히 야훼의 장기말이었을 뿐. 비슷한 경우로 전에 제사장 일행이 예수를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가 검을 들고 막아나서자 오히려 예수가 말린 내용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스카리옷 유다와 비교하면 의외로 그렇게까지 심하게 비난받지 않는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는데 왜 안 그랬을까 쯧쯧쯧." 정도의 중립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 인물이 예수의 지지자도 반대자도 아닌 제3자였던 점과, 복음서에 묘사된 끝까지 예수를 처형하기를 주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다.
2.5.1. 현대 신학에서 해석
복음서에 묘사된 빌라도의 태도는, 실제 빌라도의 태도라기보다는 호교론적인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특히 로마인들을 겨냥한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으로 받드는 이스라엘인 남자가 빌라도 장관에게 사형을 당하긴 했지만, 로마 법에 어긋난 사악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유대 총독은 그저 최고 의회의 압박 때문에 사형을 선고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범법자를 숭배한다고 하지 마라!"'''인 것이다.
당시 선교 대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유대인과 로마 제국이 짜고 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기 보다, 로마는 예수의 비범함을 알고 살리고자 했으나 유대인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했다고 말하는 것이 교세 확장이 더욱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성경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복음서 내부의 몇몇 글귀나, 위에서 언급한 요세푸스의 기록 등 다른 것과 비교해보면 빌라도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반란 등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진압을 잔악하게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복음서에서도 빌라도가 이스라엘인을 학살했다는 글귀가 있는데, 루가의 복음서에 빌라도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많다.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루가 복음서 13장 1절, 공동번역성서).
와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반목하고 지냈지만 바로 그 날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루가의 복음서 23장 12절, 공동번역성서).게다가 복음서 내부에서 일관적으로 묘사된 사실들을 보면, 예수는 잡히고서 바로 하루 이틀만에 처형이 결정되었다. 빌라도가 정말로 예수의 처형을 망설였다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도 검증한 바로는,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한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 역시 이상한 점이 매우 많다. 산헤드린 공회는 밤에 열리지 않았는데 마르코 복음서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밤에 열린 듯이 묘사되고, 반대로 루카 복음에서는 낮에 열렸다고 말이 또 바뀌어 있다(...). 유대인들의 소송법에 규정하기를 중범은 낮에만 판결을 받고 명절 때는 전혀 재판하지 않고 하루만의 재판으로써는 판결을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도 이상한 부분이 많은데다가 복음서간의 기록이 일치되지 않은 산헤드린 재판 장면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창작이라는 것이 중론#이며, 빌라도가 예수의 처형 판결을 망설인 것과 같이 친로마-반유대적인 당시 기독교들의 시류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복음서 중에 예수가 반로마적 행보나 발언을 하는 부분이 기술된 복음서는 루카 복음서 뿐이다.
다른 복음서보다 루카 복음서를 참고하면 빌라도는 예수 처형에 주도적인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이 로마의 식민지들 중에서 자치권이 특별할 정도로 컸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당대 유대교 제사장 계급들이 예수의 체포에 대해 아무것도 안했거나 반대했을리는 없겠지만, 복음서에서 묘사된 것처럼 유대인이 주도하고 빌라도는 떠밀렸을 가능성은 낮고 오히려 정반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영적 의미로 따질 때에는, 빌라도는 순수히 '''세속인'''이기 때문에 '''선민(유대인) 내부의 영적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위에서도 언급된 빌라도가 예수에게 한 말 '''"Quid est veritas?(Τί στιν αλήθεια;진리가 무엇인가?)"''' 직후에 예수의 답을 듣지 않고 빌라도가 가버리는 부분은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장면이다. 기독교 교리에서 십자가 사건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행한 영적 범죄자"라고 선민들 사이에서 결론이 내려진 사건이며, 이것이 예수의 부활로 부정됨으로써 '''반전'''이 일어난 사건으로, 순전히 '''선민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이 "외부"로 발산되는 사건이다. 성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죄다 저렇다. 항상 '''내부'''에서 시작하고 온전히 "내부"의 문제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외부"로 발산되는 것[20] 이다. 예수의 역사적 행보보다는 신학적 의미를 서술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서 등은 이러한 성경의 묵시 문학적 성격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2.6. 사도신경에서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가톨릭의 사도신경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개신교의 사도신경
사도신경에서 본시오 빌라도를 언급하며 그를 깐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도신경의 라틴어판에서는 ''''sub''' Pontio Pilato'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본시오 빌라도 '''아래에서''''라는 뜻으로,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서''' 고난받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 가톨릭이나 대한성공회[22] 에서 쓰는 사도신경이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성공회의 사도신경
이것은 예수가 언제 처형되었는지 시간을 명시하는 목적이 크며, 또한 빌라도에게 단죄의 직접적인 책임을 돌리지 않는 서술이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예수와 가장 큰 갈등을 빚었던 당대 유다인 주류사회를 언급하는 것도 피해 간, 굉장히 온건한 서술이다. 빌라도에게 책임을 직접 돌리려고 했다면 '본시오 빌라도에게('''a''' Pontio Pilato)' 고난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경 및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등에서도 같은 원리로 sub로 되어 있다. 물론 가톨릭이 빌라도가 예뻐서 이렇게 말해주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개신교에서는 가톨릭보다 사도신경을 중요하게 여기진 않는다. 한국 개신교의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으니 라틴어 원본으로 볼 때 오역으로 볼 소지는 있는데, 복음서의 내용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번역까지는 아니다.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자초지종이 어찌되었던간에 최종적으로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맞기 때문에 개신교의 그러한 번역이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은 아니다. 복음서 이외의 자료에서 본다면 빌라도는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예수의 재판에 사형을 막아보려고 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예수가 로마인과 유태인을 막론하고[23] 기득권층, 정치적 권력자에 의해 박해당하고 정치적 명분에 의해 살해당한 것도 분명히 사실이다. [24]
가톨릭에서도 현재 역사적으로 빌라도를 무죄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그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자이기도 하다"(마르 14-15장; 마태오 27장; 루카 23장; 요한 18-19장)고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가톨릭 교리에 따르더라도 빌라도는 비열한 행정관이며, 지상의 나라와 그곳의 권력자들을 상징하는 인물로,[2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번역이 심각한 오역이라 하기는 어렵다.
2.7. 역사적 기록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필라투스에 대해 언급한다. 당대의 기록 중에 예수와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관해 쓴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서기 26년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후임으로 유대 지방에 부임했다. 이 시절 유대 지방은 심심하면 폭동을 일으키는 험지라 로마 제국에서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겼고,[26] 이전 로마 총독들은 번번히 안정적인 통치에 실패했기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는 만만한 인물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때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에 강경책을 쓰자는 세야누스의 추천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임명받았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행정장관의 임기는 관례적으로 3년이지만 티베리우스가 이례적으로 장기집권을 맡겨 필라투스는 서기 36년까지 10년동안 유대를 통치했다.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지론 때문이기도 한데, 신하들을 극히 불신하던 티베리우스는 지방관들을 '파리'에 비유하며 '''"상처 부위에 여러 파리가 와서 빨아먹는 거보다, 처음부터 빨아먹던 파리 한 마리가 계속 빨아먹는 편이 낫다"'''면서 필라투스에게 장기간 통치를 보장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세야누스의 예상대로 강경한 정책을 자주 시행했는데, 우선 부임할 때 카이사레아 지역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를 유대 왕국의 수도이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재배치했고, 더불어 유대의 행정 장관 중 처음으로 유대인이 우상으로 여기며 혐오하던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가 유대인들의 강경한 반발로 다시 철수시킨 일도 있었다. 더불어 치수공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왔는데 이것이 성수 장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불만을 내비쳤다. 유대인들이 필라투스에게 항의하는 집회를 계속 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해산시켰지만 갈수록 먹히지 않았고, 결국 진압은 유혈사태로 비화되지만 일단은 소요를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그 즈음 예수가 처형당한다. 그러나 기록을 토대로 판단해볼 때 빌라도가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예수를 처형하는데 주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로마 제국은 이미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현재 유대교 학자들은 당시 산헤드린 재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경 구절이 산헤드린 공회법정의 재판절차와 권한과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27] 빌라도가 손을 씻은 것과 유대인들이 적극 처형을 주장한 것이 후대 복음서 성립 시 기독교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섞여 왜곡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28]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앞서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인에게 반감을 샀고, 통치시기에도 유대인의 풍속으론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 군기나 장비에 있는 황제의 형상을 가려야 하지만 일부러 대놓고 무시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두개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성전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는데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 성전자금은 고아나 과부들의 구휼자금으로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착복하고나서 수로작업에 썼다고 변명했다. 그럼에도 수로작업에 들어갈 공사비가 모자라 다시 세금을 걷었다.[29] 이처럼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정직하지도 유화적이지도 않았다. 예수의 사형집행 과정에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30]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집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 티라타바라는 마을 근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31] 에게 항의한다. 비텔리우스는 필라투스를 10년 동안 있었던 유대 지사에서 해임시키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유대에서의 폭력사태에 대해 답하도록 로마로 보낸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도착할 때, 티베리우스가 죽는다.[32]
유대인들은 사두가이인, 바리사이인, 열심당원 모두 가리지 않고 빌라도를 증오한 걸로 보인다.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폭동에서도 빌라도는 유대인의 종교를 무시했고, 유대인들은 이런 간섭에 대해서 반감이 컸다.
3. 기타
- 영화 벤허의 명장면 전차 경주의 개막을 선언한 총독이 바로 이 사람이다. 유다 벤허의 양부가 된 아리우스 제독이 곧 유대 총독이 될 자기 친구라며 벤허에게 그를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33] 전차 경주 후 지인의 양자에게 협조를 구하다 유대 총독으로 압박을 주는 등 입체적인 모습으로 나온다. 프랭크 트링(Frank Thring, 1926-1994)이라는 배우가 이 역할을 맡았다.[34]
- 코미디 영화 몬티 파이선과 브라이언의 삶(에릭 아이들 분)에서도 조연으로 등장. 모든 R 발음을 W로 발음하는 언어장애가 있는 것으로 나온다. 브라이언이 아버지가 로마인(Roman)이라고 하자 '자네 아버지가 여자(Woman)라고?' 라고 한다던가...[35] 주인공 브라이언이 빌라도의 부인을 납치하려던 음모가 실패해 그의 앞에 잡혀왔는데, 브라이언을 심문하던 중 자기 친구 중에 '비구스 딕쿠스(Biggus Dickus. '거시기 큰 놈' 이란 이름이다)'란 이가 있다고 하는 바람에 주위 병사들이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가[36] 딕쿠스의 아내 이름이 '인컨티넨티아 버톡스'(Incontinentia Buttocks. '음란한 엉덩이' 정도의 이름)라는 빌라도의 말에 그만 빵 터져버리자 그 틈을 타서 브라이언은 탈출한다. 후반에는 이 '비구스 딕쿠스'라는 친구가 빌라도를 만나러 직접 놀러 온다.
- 3~4세기의 교부 에우세비오가 교회 전승에 따라 저술한 교회사에 따르면 가이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이게 맞다면 티베리우스 대신 칼리굴라가 폭력사태의 책임을 물어 자살을 지시했을 수도 있다.[37]
- 꿈자리가 사나웠다며 처형을 말렸던 빌라도의 아내가[38]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전승이 있는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도 묘사되었다. 빌라도의 아내의 꿈에 대한 얘기는 메리에타 데이비스의 "천국에서 보낸 9일" 책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 야사 중에는 아예 빌라도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예수를 옹호하다가 순교했다는 것까지 있다. 합성론 계열인 이집트의 콥트 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빌라도의 아내를 성녀로 모시고 있는데, 이 전승에서 빌라도의 아내의 이름은 클라우디아 프로쿨라라고 한다. 그러나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39] 한편 빌라도 자신이 주교가 되었다는 전설, 빌라도가 처참하게 처형당한다는 외경의 이야기도 전한다.[40]
- 유대 장관 외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많은 역사 소설의 떡밥이 되는 인물이다. 대체역사를 모아둔 만약에라는 책에서는 유대인들의 반항을 묵살하고 예수를 풀어 준다.[41] 러시아의 문호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죄없는 예수를 처형한 죄책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으로 꽤 비중있게 등장했다.[42][43] 한국에서도 임동진[44] 이 주연한 연극 《빌라도의 고백》이라는 1인극이 만들어졌다.
- 빌라도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티베리우스에게 보냈다는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었으나, 위작으로 밝혀졌다. 애초에 이런 문서가 진짜로 존재하면 예수의 실존문제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가 없다. 빌라도가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보고서가 실제로 있다면 현장증인이 책임지고 작성하는 보고서류에 빌라도와 예수가 기록되어 있다는 이야기인데 애초에 논쟁이라는 게 성립할 수가 있나.
- 예수를 판결했기 때문에 인지도가 매우 높다. 게다가 사도신경에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매주마다 수십억명에게 비난받는다. 사실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함께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진 양대 기도문이기 때문에 매주가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아프거나 자기 전에나 딱히 기도가 떠오르지 않을때 간단히 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매주 정도가 아니라 매일 수억명 정도는 외울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 근대에는 사도신경의 중요성이 조금씩 약해지는 추세라 사도신경을 매주 암송하지 않는 교회도 꽤 많은 편.
- 희한하게도 스위스에도 흔적(?)을 남겼는데, 루체른에 관광 가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필라투스 산이 이 인물이 죽은 곳이라 그의 이름을 땄다는 전설이 있다.
[1] 실존인물는 맞지만 출생연도가 불분명하다.[2] 하술의 해설 참조.[3] 흔히 '산헤드린(סנהדרין)'으로 지칭된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고유명사가 아니며, 그냥 최고 의회를 일컫는 그리스어 '쉬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의 아람어 변형일 뿐이다.[4] 공동번역 성서에서의 명칭은 '''본티오 빌라도'''로, 가톨릭 성경에는 '''본시오 빌라도''', 개신교 성경에는 '''본디오 빌라도'''로 기재되어 있다. 워낙 성경에서의 이미지가 유명해서 '빌라도'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고전 라틴어 명칭은 '폰티우스 필라투스'다.[5] 개역성경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티베리우스'를 '디베료'로, '아우구스투스'를 '아구스도'로, '클라우디우스'를 '글라우디오'로,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로 표기하는 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남성인명 주격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 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역개정 성경에서의 표기가 나온다. 구한말 번역에선 어미 끝의 s를 종종 생략하곤 했는데, 조선인들이 듣기에 잘 안 들렸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남성 인명의 주격이 -os로 끝나는데, 여기서 끝의 s를 제거하면 자연히 -o만 남는다. 그래서 'Petrus'도 '베드로'라고 음역했다.[6] 교회 라틴어에서 단어 중간·모음 앞에 있는 -ti는 치경 파찰음 (/t͡si/)으로 발음되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를 그냥 발음하기 편한 '시'로 음역함이 관례화되었다.[7] 발견된 이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8] 3C 말 ~ 4C 말로 약 100년, 중간에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있음.[9] 전통적인 성서 이해 뿐만 아니라,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도 두 책의 저자는 같은 사람인 것으로 강하게 추정한다.[10] 헬라어로는 ἡγεμον(헤게몬)으로 표기된다. 헤게모니의 어원이 된 그 단어이며 정확한 뜻은 '이끄는 자'. 군주, 통치자, 총독 등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11] governor는 사실 총독이나 도지사 등등 번역하기 나름이다.[12] 물론 본시오 빌라도 당시엔 시리아 속주는 황제령으로 전환.[13] 세미콜론(;)이 아니라 그리스어 물음표(;)이다.[14] 고전 라틴어로 에케 호모라 발음되나, 교회 라틴어로는 엑체 호모라고도 한다.[15] 당시 유대 속주는 시리아 총독의 직할구역이고 유대지사는 수석 군단장이 맡는 지위다.[16] 복음서에 따라 강도살인을 저지른 죄수로 나오기도 하고, 열심당원으로 히브리인 민족주의 혁명가로 나오기도 한다. 두 설 모두에서 공통된 점은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악질 범죄자'''임은 틀림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설마 죄인이라는 증거자료가 아무것도 없는 예수를 죽게 하려고 이런 대흉악범을 석방시키겠냐?'라는 생각으로 바라빠를 들이민 것이라 할 수 있다.[17] 빌라도가 정말로 예수를 또라이나 정신병자로 보았다면 살리려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데 역사적으로 적어도 사회적 약자를 사형시키는 일은 웬만한 폭군 아니면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감방에 집어넣거나 죽여도 암살을 하지 사형은 잘 하지 않았다.[18] 실제 빌라도의 아내는 "꿈자리가 사나우니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문자 그대로라면 중립을 지켜 아무런 개입도 말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19] 이 때의 헤로데는 헤로데 안티파스이다.[20] 구약에서도 끝없이 반복된 테마인, '유대인들이 우상숭배하면서 말 안 듣자 하느님이 이민족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벌줬다' 식의 레퍼토리가 그것이다.[21] 성공회 전례에서는 니케아신경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기에 니케아신경과 아래의 사도신경을 같이 수록하였다.[22] 공동번역성서를 쓰는 대한성공회의 기도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라고 한다. 기도서 개정 이전에는 가톨릭과 동일하게 '본시오 빌라도'라고 썼었다.[23] 사실 로마 제국이나 유태인 사제들 때문이라고 하기보다 '기득권층'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포괄적이고 정확한 표현이다.[24] 국가에 대한 순종이나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근거로 기성 종교권력에 의해 '성경의 예수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오랫동안 설파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인 해석과 연구들이 많이 나와 있다. 예수가 열심당원 식으로 저항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가 '저항을 하지 않고 종교적인 것에만 골몰한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다고 봐야 한다. 열심당에 반대한 것도 단순히 혁명가를 부정적으로 봐서가 아니라, 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 사상이 예수의 사상과는 도저히 융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사상은 한 구절 한 구절을 봐도 결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다.[25]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중에 당신 자비로 죄를 이기시는데, 그 수난을 통해서 죄의 폭력성과 다양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불신, 살인적인 증오,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거부와 조소, 빌라도의 비열함, 병사들의 잔인함, 예수님께는 큰 아픔이었던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 따위가 그대로 폭로된다. 그러나 바로 어둠의 시간, 이 세상 권력자의 시간에 그리스도의 희생은,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죄에 대한 용서가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851절)[26] 예수가 살아있을 때도 젤롯이라 불리는 저항세력이 활동했고, 훗날 예수가 죽은 지 겨우 30년 뒤에 로마와 전쟁이 벌어질(1차 유대 전쟁) 정도로 저항이 심한 지역이었다.[27] 기독교 측에서는 이 불일치를 종교권력이 사법절차에 개입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망칠 정도로 부패한 결과라고 본다. 진실은 저 너머에.[28]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29] 이 자체는 로마 입장에선 별 문제가 안된다. 지방관이 로마에 바치는 세금액만 잘 맞춰 내면 추가적으로 통치지역을 쥐어 짜는 건 원래 지방관들에게 합법적인 주수입원이었고 이걸 로마 고위층에 상납해야 승진도 하고 최소 자리도 보전하고 일가도 먹여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하여 반란이 일어나 진압비용이 더 들어가면 이건 또 문제가 된다.[30]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한 학자가 말하길 그에게 다시 예수의 대해서 물어보면, 오히려 누구냐고 반문했을 것이라 한다. 즉 예수 처형은 그에게 단순 업무 처리에 불과했다는 소리다. [31] 네로 사후 잠시 황제가 되었던 비텔리우스는 이 사람의 아들이다.[32] 티베리우스는 기원후 37년에 죽는다.[33] 사실 아리우스는 유다가 귀향을 간절히 원함을 알아 곧 유대로 파견갈 빌라도의 측근 중 한 자리로 넣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타는 유다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개인 자격으로 떠난다.[34] 흥미롭게도 1961년 영화 왕중왕에서는 다름아닌 헤로데 안티파스로 등장한다. 왜 흥미롭냐고? 누가복음 23장 12절을 다시 읽어보라(...). [35] 실제로 있는 '엘머 퍼드 증후군'이란 언어장애다. 시트콤 빅뱅 이론의 등장인물 배리 크립키 역시 이 증후군 증세가 있으며, 폴아웃 3에 나오는 무기인 웨이저 와이플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36] 촬영 당시 병사 역을 맡은 엑스트라들은 웃었다간 바로 해고당할 거라는 말만 듣고, 스크립트를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들의 웃음을 참는 표정은 진심이었던 것.[37] 제정 이후 사형 집행이나 십자가형은 동방은 시리아 총독이, 서방은 로마의 집정관이 보고 후 황제의 허락이 없이는 형을 집행유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이걸 일개 유대장관이 멋대로 형을 집행했으니...[38] 마태오 복음서 27장 19절: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습니다."하고 당부하였다.[39] 다만 개신교 계열 라디오 방송인 극동방송의 방송인 주일 드라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뤘을 때 빌라도의 아내의 이름을 클로디아로 설정했다.[40] 외경에서 빌라도에 대해 이렇게 말이 다른 것은, 결국 외경이 쓰여진 시절에도 빌라도에 관한 소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41] 이 책에서 예수는 무려 97세란 경이적인 장수를 누리고 평온하게 사망한다.[42] 이 책에서의 빌라도는 예루살렘을 증오하며, 자신의 개 외에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살을 꿈꿀 정도로 성마르고 피폐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끌려온 예수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그를 자신의 별장이 있는 지방으로 추방시키고자 했으나 결과는...[43] 사실 단순히 잠을 못 이루는 정도가 아니라 그 죄책감, 즉 죄없는 이를 처형시켰다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무려 1만 2,000번의 잠 못드는 만월을 반복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거장이 자유를 부여하고 나서야 예수의 곁으로 떠났다.[44] 원래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연기자였으나, 후에 신앙심이 깊어 목사가 되었다. 애마부인에 출연한 흑역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