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주
1. 개요
1. 개요
속주(屬州)란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주를 말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주로 고대 로마를 대상으로 쓰인다.[6]
고대 로마에서 속주(라틴어: Provincia)는 296년 사두 정치 체제 이전까지 본국 이탈리아 바깥의 가장 큰 행정 단위를 말한다. provincia란 원래 영토적 의미와 무관하게 정무관의 임무 혹은 활동 범위를 뜻했으며, 로마가 최초로 점령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 서부는 그런 의미에서 행정관의 처리 대상이었다. 그러나 후에 이는 이탈리아 밖의 로마 지배 지역이라는 지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도 provincia는 라틴계 국가인 이탈리아,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기초행정구역의 명칭이며 캐나다의 행정구역인 province는 provincia의 프랑스어/영어식 변형이다(각각 프로방스/프로빈스 로 발음한다). 또 한국의 행정구역인 도나 중국의 성을 영어로 번역할 때도 province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도도부현의 영어 표현으로 쓰이는 Prefecture(라틴어: Praefectura)도, 사두정치로 황제가 4명으로 늘어나면서 각 황제마다 있어야 할 근위대장(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 Praefectus praetorio: 영어 Praetorian prefect)이 종래의 무관적 성격은 거의 사라지고 문관화되면서 그 '프라이펙투스가 할당된 각 황제의 통치 지역'이라는 의미로 지리적 의미가 더해진 것이 어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4두정치기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3형제 동안에는 각 황제들의 담당구역이 지속적으로 변했던 관계로 프라이펙투스의 관할구역인 프라이펙투라(대관구) 또한 거기에 연동되어서 변했었고, 행정구역으로 완전히 고정된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마그넨티우스를 제압하고 다시 한 번 통일한[7] 354년이었다.
2. 로마 공화국 시대 속주
- 시켈리아(시칠리아) 속주
-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울테리오르 속주
- 일리리쿰 속주
-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속주
- 아시아 속주
-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 비티니아 속주
- 시리아 속주
- 갈리아 코마타 속주(임시)
- 모이시아 속주
3. 로마 제국 원수정 시대 속주
[image]
♠표시가 있는 속주는 원로원 속주[8] 이고, 없으면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9] 황제 직할령)이다. 위 지도에서 분홍색 지역이 원로원 속주, 연두색 지역이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 황제 직할령)이다.
순서는 12시 방향부터 시계방향이다.
3.1. 브리타니아 지역
'''Britannia'''
오늘날의 영국. 정확히 말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스.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가르는 국경선인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 해당 속주
- 브리타니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Britannia Superior)[10]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도중 처음으로 브리튼 섬에 상륙한 지역이다. 윈스턴 처칠은 대영제국이 카이사르가 영국에 발 놓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남겼지만, 실제 속주화 된 건 약 1세기 뒤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서다. 주도는 론디니움(현 영국 런던). 한편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까지 로마제국의 영토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이 추가된 영토는 훗날 서기 197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로 분화되었다.
- 브리타니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Britannia Inferior)[11] : 브리튼 섬 중 위에서 언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정복된 영토.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남부를 포함하며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분화하였다. 주도는 에부라쿰(현 영국 요크).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칼레도니아(Caledonia): 현 스코틀랜드 일대. 남부를 넘어 스코틀랜드 전역을 정복하기 위해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까지 여러 황제가 나섰으나, 실패하거나 정복 완료 전 죽어서 흐지부지 되었다.[12]
3.2. 갈리아 지역
'''Gallia'''
서부 게르마니아와 함께 로마의 우주방어 지역 1.[13] 나르보넨시스를 제외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정복되었다. 또한 프랑스 애니메이션 아스테릭스의 주 배경이기도 하다. 밑의 '히스파니아'에 나오듯 히스파니아와 함께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불렸다.[15]
- 해당 속주
- 갈리아 벨기카 속주(Provincia Galia Begica)[16] : 현 네덜란드 남부, 벨기에, 룩셈부르크, 북프랑스 지역. 주도는 두로코르토룸(현 프랑스 랭스). 벨기카 속주는 갈리아 부족 중 하나인 벨가이 족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현대 벨기에 왕국의 국호도 여기에 나왔다.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수페리오르 속주와 함께 라인강 좌안에 접해있으며 갈리아 지역의 속주들 중에선 유일하게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현 독일 트리어)에 군단기지가 있었다. 어쩌면 프랑스(갈리아)가 중세에서 근대까지 내내 문화적 경계선을 라인 강으로 생각해오고 팽창정책을 편 이유도 이 속주 때문인 것 같다.
-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Provincia Gallia Lugdunensis)[17] : 현 프랑스 중북부 대부분 지방이며 갈리아의 속주 중 가장 넓다. 파리도 포함되어 있으며 주도는 루그두눔(현 프랑스 리옹).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Provincia Gallia Narbonensis)[18][19] ♠: 현 프랑스 남부. 로마 정복 이전부터 그리스의 식민도시국가가 있었으며 그들 중 현대 도시로 남아 있는 곳으로 마르세유가 있다. 갈리아 지역의 속주 중 가장 역사가 깊으며 이 지역을 현재 프로방스라 하는데 이는 로마 속주를 뜻하는 말 프로빙키아에서 왔다. 주도는 나르보 마르티우스(현 프랑스 나르본).[20] 오현제 중 네 번째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배출한 속주이다.
3.3. 서부 게르마니아
'''Germania'''
갈리아 지역과 함께 라인강을 주축으로 한 우주방어 지역 2. 다만 게르마니아 서부는 티베리우스 황제 이후에야 국경선화 된다. 이유는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이 아닌 엘베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의 라인강은 도나우강에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라인강과 도나우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엘베강과 도나우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 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 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엘베강과 라인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일족들인 두르수스와 티베리우스를 파견하였는데, 이는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두르수스는 로마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타고 북상 지금의 덴마크 일대인 엘베강 근처에 내려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낙마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미 노년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후계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 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버리는 등의 소동을 겪게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와중 우선은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를 시도해보려 하였다. 지역 안정화에 적합한 인재로는 유능한 행정가가 적임으로 보였고,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재능을 보인 바루스를 총독으로 부임시켰는데 이는 인사상의 큰 실책이었다. 바루스는 그 지역의 통치를 맡아 동방에서 하던 대로 했었으나 이러한 로마식 행정은 게르만족에게는 꽤 불편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기에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로서 아우구스투스는 라인강 동쪽의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3개 군단은 대군이라 보기는 어려운 병력으로[21] 해당 군단이 소멸했다고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군대에는 바루스를 비롯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료들을 대거 동원했었는데 군대가 소멸하면서 점령지의 통치집단이 증발해 버렸다. 둘째로 해당 전과에 고무된 게르만 족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군단기지를 공격하였고, 3개 군단이 소멸된 직후의 공백으로 인해 그 기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곳이 모두 점령당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점령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에 기인한다. 셋째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인해 병력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배치된 데에 최소한으로 감축한 군단수, 또한 임페리움을 황제가 독점하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으로 인해 세 개 군단의 소멸을 메울 수 있는 병력이 즉시 동원되어질 수가 없었다. 또한 바루스의 실패는 아우구스투스의 고지식한 점령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공화정 당시 로마는 점령지를 동맹시로 두고 부족들이 통치하면 뒤에서 파트리아 역할만 하는 간접통치를 선호하였으며, 공화정 인물이었던 카이사르 또한 점령지의 부족들에게 통치를 맡기되 이들에게 씨족 부여, 원로원 의석 부여, 그리고 전쟁에서 차출시켜 같이 싸우게 하여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자발적으로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로마의 점령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증거로서 카이사르가 내전을 치르면서 갈리아에 있는 모든 주둔군을 철수시켰으나 갈리아 부족들은 갈리아에 로마군이 한 명도 없음에도 불구, 그대로 로마에 복속하였으며 카이사르에게 군대까지 제공해주었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점령지를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제국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고 이러한 변화된 통치방식은 점령지의 기존 통치집단의 반발을 낳기에 기존 공화정 로마와 같은 빠른 정복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황제들이 시도한 제국주의적 정복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오는데 가령 브리타니아 정복 같은 것은 반세기에 가까운 점령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키아 정복은 성공하였으나 이는 트라야누스가 통치집단과 지배 민족을 소멸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으며 파르티아 정복은 군사적으로는 쳐부수는 데 성공하였으나 대규모 반발에 직면하여 점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그 지역은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심하게 자책하긴 하였으나 엘베-도나우 리메스의 구축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았는지 복귀한 티베리우스를 다시 그 지역에 파견하여 재정복을 꾀한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곧 노환으로 인해 죽게 되고 뒤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그의 후임인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에게 그 지역의 정복을 맡긴다. 게르마니쿠스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연승을 거두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하고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서 엘베강을 국경선으로 삼고자 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백지화시킨다. 결국 엘베강과 도나우강에 이르는 리메스의 구축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황제였으며, 그가 확립한 시리아와 도나우 강의 국경선은 수백 년에 걸쳐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해당 속주
-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Germania Superior)[22] : 라인강 이서(以西)지역 및 슈바르츠발트 숲[23] 을 포함한다. 수페리오르는 라인강 상류, 고지대(Upper)의 게르마니아란 뜻이다. 고지 독일어란 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 로마 멸망 이후에도 저지 게르마니아 지역과 함께 유럽 역사의 중심이 되어왔다. 현재 프랑스 알자스, 로렌과 스위스 북부 및 독일 라인란트-팔츠,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이며 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등 유럽 배낭여행족들에게 인기 많은 도시가 포진해있다는 점도 윗동네 저지 게르마니아와 닮았다. 주도는 모곤티아쿰(현 독일 마인츠).
-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Germania Inferior):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처럼 라인강 이서(以西) 지역. 여기서 인페리오르는 저지란 뜻인데 저지 독일어 처럼 저지대, 강 하류를 뜻한다. 즉 라인강 하류 저지대 지방의 속주를 말하며 현재 네덜란드 북부, 독일 북서부(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헤센 주)에 있다. 주도는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현 독일 쾰른). 사실 쾰른의 어원 또한 식민지를 뜻하는 라틴어 콜로니아에서 왔으며 식민지를 뜻하는 영어단어 '콜로니(Colony)'와 어원이 같다.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프리시아(Frisia):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독일 북부,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남부에 걸친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시 가장 먼저 차지한 지역.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파견된 드루수스는 라인강 유역을 서서히 국경선화 시켰듯이 엠스 강, 베저 강, 엘베 강 순으로 국경선화 시킬 계획이었다고. 그리고 프리지아 지역은 이들이 모두 모인 지역이다. 동프리슬란트라고도 한다. 개정 전 로마인이야기에서는 이 지역이 포함된 로마의 지도가 있다.
- 마그나 게르마니아(Magna Germania): 엘베강과 라인강 유역 사이의 중류 지역. 드루수스가 정벌 도중 낙마해 사망한 곳이며, 오늘날의 독일 대부분의 지방이 해당된다. 만약에라는 대체역사 에세이에 의하면,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일어나지 않고 트라야누스 시대에 이르면 로마는 엘베 강을 건너 오데르 강은 물론 비스와 강[24] 까지 닿는다고. 뱀발로 "만약에"의 다른 챕터에서는 반대로 로마가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이야기도 있다.[25]
3.4. 알프스 산맥 지역
'''Alpes'''
이탈리아 북서부와 프랑스 남동부가 맞닿은 알프스 산맥 지역이며, 면적도 가장 작고 주변에 비해 크게 유명한 지역은 많이 없는 편이다.
- 해당 속주
- 알페스 포이니나이 속주(Provincia Alpes Poeninae): 알프스 속주 삼 형제 중 가장 북쪽. 주도는 다란타시아(현 프랑스 무티에르)/옥토두룸(현 스위스 마르티니).
- 알페스 코티아이 속주(Provincia Alpes Cottiae): 알프스 속주 삼 형제 중 가운데. 주도는 세구시오(현 이탈리아 수사).
- 알페스 마리티마이 속주(Provincia Alpes Maritimae): 알프스 속주 삼 형제 중 가장 남쪽. 지중해에 면해 있으며 주도는 세메넬룸(현 프랑스 시미에즈) → 에브로두눔(현 프랑스 엥브룅).
-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Provincia Gallia Cisalpina): 현 루비콘 강 이북 이탈리아 북부. 제2차 삼두정치 시절에 옥타비아누스가 본국 이탈리아에 합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친 루비콘 강은 사실 프랑스가 아니라 이곳에 있다.[26] 공화정 시대의 기준에 따르면 밀라노, 토리노, 베로나, 아퀼레이아[27] 등 이탈리아 북부의 많은 도시들은 이탈리아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28]
3.5. 다뉴브 강 유역 및 중유럽 지역
'''Danubius'''
로마의 기병 셔틀 1이자 우주방어 지역 3. 이 지역은 발칸반도 북부와 함께 갈리아처럼 단시간 내 점령한 게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조금씩 북상하여 도나우 강으로 경계를 고정화 한 것이다.
- 해당 속주
- 라이티아 속주(Provincia Raetia): 도나우 강 최상류 지역이며, 현 스위스, 오스트리아 서부 및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남부. 주도는 아우구스타 빈델리코룸(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그러나 정작 여기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지역은 뮌헨이다. 사실 당시 주요도시였던 레겐스부르크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고.. 참고로 스위스에서 쓰이는 로망슈어,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에서 쓰이는 라딘어, 이탈리아 북동부의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에서 쓰이는 프리울리어를 묶어서 레토-로망스어(Rhaeto-Ramance Languages)라고 하는데, 여기서 레토가 이 라이티아에서 유래하였다.
- 노리쿰 속주(Provincia Noricum): 서부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거의 전지역을 아우르며 주도는 비루눔(현 오스트리아 촐펠트). 잘츠부르크를 비롯한 이 속주에 속한 많은 오스트리아의 도시들은 다뉴브 강을 경비하는 로마 군단의 군사주둔지 또는 군단기지로부터 출발하였다.
-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Pannonia Superior)[29] : 사실 판노니아는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 서부, 세르비아 북부, 크로아티아 북부, 슬로베니아 등 많은 나라를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들 중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 서부 및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지방은 오현제 시대 이후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로 분화 되었으며 나머지 지방은 인페리오르 속주가 되었다. 주도는 카르눈툼(현 오스트리아 페트로넬)이며 빈, 류블랴나, 마리보르, 자그레브 등이 주요 도시이다.
-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Pannonia Inferior): 판노니아에서 판노니아 수페리오르로 분화되고 난 뒤의 나머지 지방이며 헝가리, 크로아티아 동부, 세르비아 북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동부가 이에 속한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야지게스족과 콰디족이 이 속주 근처에서 살았다고 하며 로마인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한다. 주도는 아퀸쿰(현 헝가리 부다페스트)/시르미움(현 세르지아 스렘스카 미트로비차).[30] 디오클레티아누스 및 콘스탄티누스 등 4세기 초 주요황제들의 출신지인 시르미움은 이 속주와 모이시아 속주의 경계에 있다.[31]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보헤미아(Bohemia): 현재 체코 및 슬로바키아[32] 일부 지역.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다키아 정복과 같은 이유로 정복하려 했으나 마르쿠스 사후 콤모두스가 돌연 취소하였다. 만약 콤모두스가 취소하지 않았더라면 프라하를 로마 제국 지도에서 볼 수 있었을 것이다.[33]
3.6. 하이모니아
'''Haemonia'''[34]
로마의 기병 셔틀 2이자[35] 우주방어 지역 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컨커러의 아틸라 캠페인 2번째 장대한 여정에 나오는 로마인 도시는 거의 다 이 곳에 있다.(나이서스-모이시아 수페리오르, 두러스-에피루스, 소피아-모이시아 인페리오르, 테살로니카-마케도니아, 아드리아노플-트라키아)
- 해당 속주
- 다키아 속주(Provincia Dacia)[36] : 현 루마니아[37] 서부. 주도는 울피아 트라이아나 사르미제게투사(현 루마니아 사르미체게투사). 다키아는 1세기까지 다키아 왕국이 존재하였고 로마사에 제대로 언급된 왕 중 하나는 데케발루스가 있다. 데케발루스는 지정학적 전략적 이점을 이용해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로마군을 괴롭혔다고.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본격 추진한 다키아 정벌로 인해서 GG를 친다. 3세기의 위기 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 속주의 전략적인 가치가 소진되었음을 깨닫고 265년경에 다키아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이미 다키아에 거주하였던 로마 시민들에게는 강제이주 대신에 거취선택의 자유를 주었다고. 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떠난 로마인도 많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다키아에 남은 로마인도 많았다고 한다. 현재의 루마니아는 이들의 후손이 주축이 되었다고 하며 루마니아라는 국명 또한 로마인이라는 뜻에서 왔다고 한다. 게다가 루마니아어가 현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은 루마니아인이 다키아 로마인의 후손이란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 신(新) 다키아 속주(Provincia Dacia Aureliana)[38] : 3세기 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도나우 강 이북의 다키아를 포기하고 나서 도나우 강 이남의 여러 속주(모이시아, 트라키아, 일리리아 등)들의 자투리 땅을 모아 만든 속주. 주도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 이후 4황제 시대에 관구 제도로 재편될 때 까지 기간도 길지 않은 데다 이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도 거의 없어서 조용히 묻혔다.
- 달마티아 속주(Provincia Dalmatia)[39] : 현 크로아티아 남부 아드리아 해에 면한 지역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서부이다. 주도는 살로나이[40] (현 크로아티아 솔린)이다. 이 지방의 주요 도시로는 스플리트. 보통은 두브로브니크를 생각하지만 두브로브니크는 11세기에 건설되었다.
-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Superior)[41] : 현 세르비아 대부분과 불가리아 서부. 주요도시로는 신기두눔(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및 나이수스(현 세르비아 니쉬)가 있고 주도는 비미나키움(현 세르비아 코스틀라치)이다.
- 모이시아 인페리오르 속주(Provincia Moesia Inferior): 현 불가리아 대부분 지방. 라이티아-노리쿰-판노니아 수페리오르-인페리오르-모이시아 인페리오르-수페리오르로 이어지는 도나우 방위선의 최종착지이며 이 때문에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오이스쿠스, 실리스트라, 이글리차 등 군사기지가 집중되어있어 로마의 우주방어를 실감케 한다. 주도는 노바이(현 불가리아 스비슈토프). 주요 도시로는 세르디카(현 불가리아 소피아)가 있다.
- 트라키아 속주(Provincia Thracia): 그리스 동부 및 터키의 유럽 지역, 그리고 불가리아 남부 지방이다. 동로마 시대의 수도권.[42] 주도는 [43] 헬라클리아 페린투스(현 터키 마르마라 에레을리시), 필리포폴리스(현 불가리아 플로프디브)이다. 미국 드라마를 통해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스파르타쿠스의 고향이기도 하며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최종 목적지[44] 이기도 하였다. 다만 스파르타쿠스가 트라키아 왕국의 왕자였다는 설은 과장된 것인데, 로마이전의 트라키아는 제대로 된 중앙집권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45] 그러나 트라키아 부족장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긴 하다. 또한 트라키아는 스파르타쿠스 사후에도 오랫동안 촌동네 취급을 받았으며[46] 기병, 전사, 검투사 등 무인의 산실로 불리웠다.[47][48]
3.7. 그리스
'''Graecia, Hellas'''
소아시아와 함께 로마의 부유한 지역 TOP를 달리는 곳이자 로마의 돈셔틀 1. 원래 이곳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이 있었으나 피드나 전투 이후 로마가 이 지역을 꿀꺽해버렸다.
- 해당 속주
- 아카이아 속주(Provincia Achaea) ♠: 현재 그리스 중남부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대. 아테네와 스파르타[49] 는 이 속주에서 주요 대도시였으며 주도는 코린트(현 그리스 코린토스)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자치도시로서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었고[50] , 다른 그리스계 도시들도 로마의 관용정책의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51]
- 에피루스 속주(Provincia Epirus) ♠: 현재 그리스 북서부 및 알바니아 일대. 주도는 아폴로니아(현 알바니아 포야니 근교). 피로스 1세의 에피루스 왕국이 있던 곳이다.
- 마케도니아 속주(Provincia Macedonia) ♠: 현재 그리스 북부 및 북마케도니아 일대. 주도는 테살로니카(현 그리스 테살로니키). 주요 도시로는 디라키움(현 알바니아 두러스) 등. 알렉산드로스 사후 안티고노스 왕국이 들어섰지만 피드나 전투 이후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먼저 로마에 합병당했다.
3.8. 타우리카 및 카프카스 (흑해 연안)
'''Pontus Euxinus, Mare Scythicum Litus'''
'''Taurica et Caucasus'''[52]
이곳은 로마가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은 아니지만, 이 지역의 동맹 왕국들은 로마와 매우 밀접한 외교적 관계를 가졌다. 이곳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 있는 등, 로마의 시스템은 유지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게다가 '''일부 지도는 로마의 영역에 이 지역을 포함시킨다!'''
- 해당 속주
- 아르메니아 속주(Provincia Armenia)[53] : 트라야누스 황제 최후의 정복이라 할 수 있는 중근동 정복 때 얻어진 영토. 고대 로마사 및 카프카스 역사에 뻔질나게 나오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즉위 후 이곳과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로마는 정복사업보다는 내치 수성에 힘쓰게 된다. 주도는 아르메니아 아르타하타(현 아르메니아 공화국 아르타슈트). 현대의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고대 아르메니아의 영역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수준이다. 어느정도냐 하면 아르메니아 왕국의 리즈시절에는 레바논 북부와 터키의 지중해에 닿은 부분까지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토였다.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보스포루스(Bosporus): 흑해 북안의 동쪽 지역이며. 페르시아계 왕조인 보스포루스 왕조가 있었다. 왕조의 영역은 크림 반도와 케르치 해협을 포함한다. 수도는 판티카파윰[54] (현 명목상 우크라이나 영토이고 실질적 러시아 영토인 크림 공화국 케르치[55] )이며 현재 이 왕국은 가끔 로마 지도에 포함되기도 한다. 보스포루스 왕국은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부터 4세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로마의 속국 중 가장 오래 지속된 왕국이었으며, 그 와중에 네로 황제가 일시적으로 속주화했지만 다음 황제 갈바에게서 다시 자치권을 얻어내기도 했다. 왕의 이름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가 계속 들어가고 '필로카이사르 필로로마이오스'(황제와 로마를 사랑하는)라는 별칭까지 칭할 정도로 로마에 철저히 저자세로 나간 결과일지도 모른다. 342년 고트족의 침략에 멸망하였으며 이후 서진하는 훈족의 놀이터가 되었다. 몇 세기 뒤에는 동로마 제국 및 불가리아 제국의 보호 아래 다시 번영하였다고 한다.
- 사르마티아(Sarmatia): 흑해 북안 보스포루스 속주 이북 지역이자 서쪽 지역. 사르마티아족이 거주하였던 지역을 말한다. 해안가에는 그리스계 이주민이 세운 도시국가가 있으며 이들은 로마제국과 밀접한 연관을 맺기도 하였고 로마의 산하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들 도시국가 중 현대까지 존재한 곳으로 우크라이나 오데사, 크림 반도의 케르손이 있다.
- 콜키스(Colchis):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 호가 황금양털을 찾던 신화로 유명하며 지금의 조지아 및 카프카스 일대이다. 로마가 속주화 하진 않았지만 로마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카파도키아 속주에 합쳐진 상태로 있었다. 또한 로마 제국에 포함되었을 때 이 지역을 라치카(Lazica)라고 불렀다. 이는 훗날 이란인들이 이 지역을 라지스탄[56] 이라고 불리우는 계기가 되었다. 루쿨루스는 최초로 이곳에 당도한 로마인이었으며,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영토가 되었다. 자세한 건 조지아 참조.
3.9. 소아시아
'''Anatolia'''
로마의 돈셔틀 2이자 그리스와 함께 가장 부유한 지역. 또한 기병 셔틀 3.[57][58] 이들 지방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 초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거나 종속 관계를 맺었다. 고대 그리스 및 중근동 지방과 함께 사도 베드로, 바울로 등 1세기 사도 및 교부들의 주 무대.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59]
- 해당 속주
- 비티니아 속주(Provincia Bithynia)[60] ♠: 소아시아 서북부(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 북쪽으로 흑해에 면해있다. 주도는 니코메디아(현 터키 이즈미트)이다.
- 폰투스 속주(Provincia Pontus) ♠: 소아시아 북부(현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북쪽으로 흑해에 면해 있다. 주도는 폴레모니움(현 터키 파트사). 원래 이곳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미트리다테스 가문의 폰투스 왕국이 있었으나 기원전 2세기경 로마의 보호국 신세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폰투스 왕 미트리다테스 6세가 세 번 전쟁을 일으켰으나 모두 패하고 로마의 속주신세로 굴러 떨어졌다. 자세한 건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참조.
- 아시아 속주(Provincia Asia) ♠: 우리가 생각하는 그 아시아는 아니고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반도 최서단 지역을 말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륙 이름 아시아의 유래가 이곳에서 유래되었는데 원래 아나톨리아 반도 최서단 지역를 가리키는 말에서 그 너머의 대륙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페르가몬 왕국이 있었으나 마지막 왕 아탈로스 3세가 후계자 싸움을 염려해 영토를 로마제국한테 유증해버렸다.[61] 그 바람에 왕위 계승자 에우메네스 3세는 망했어요. 주도는 터키 에페수스(현 터키 셀추크). 신약성경 에페소스서에 나오는 그 에페소스 맞는다. 또한 아시아 속주는 프리기아[62] , 리디아 등 고대 아나톨리아 지방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 갈라티아 속주(Provincia Galatia):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에 있으며 주도는 안키라(현 터키 앙카라)이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로가 이 지역 교회 신자들에게 쓴 편지이며 갈라티아라는 말은 갈리아에서 나왔다. 즉 켈트족이 이주한 지역이라는 뜻인데 보통 켈트족 하면 프랑스(특히 브르타뉴)나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을 떠올리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켈트#s-2.4문서 참조. 많은 로마제국 지도에서 남쪽의 피시디아와 합병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 카파도키아 속주(Provincia Cappadocia): 공화정 시대까지 속국이었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해 자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르켈라우스 왕은 로도스 섬으로 은퇴하여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것처럼 보였던 티베리우스에게 밉보이는 실수를 저질렀고, 이를 잊지 않고 있던 티베리우스는 황제 즉위 후 아르켈라우스를 축출하고 카파도키아를 로마 속주로 편입한다. 현재 터키 동부 내륙지방이며 배낭관광객들에겐 기암괴석과 스타워즈 촬영현장, 그리고 열기구 타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변방이나 다름없던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절벽이나 바위에 구멍의 뚫어 도시와 교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데린쿠유 참조. 주도는 카이사레아(현 터키 카이세리). 파르티아나 사산조, 아르메니아와 마주하는 최전방이라 2개 군단이 상주하였으며 우수한 기병대로 유명했다.
- 콤마게네 속주(Provincia Commagene)[63] : 이 지역은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 산하로 가장 늦게 편입되었다. 서기 1세기 후반까지 콤마게네 왕국이 있었고 아르메니아 왕국과 함께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 있어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버텼다. 하지만 서기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점령되었다. 주도는 사모사타(현 터키 삼사트)이며 현재 이 도시는 터키의 수자원 무기화를 위한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기 때문에 근처에 재건되었다.
- 뤼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Provincia Lycia et Pamphylia): 뤼키아는 전설상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벨레로폰이 이곳의 왕을 지냈다고 하며 트로이 전쟁 때에는 트로이 편을 들었다 한다. 기나긴 페르시아의 점령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알렉산드로스의 후계국 중 셀레우코스 왕조에 속하게 되었으며 기원전 89년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편입되었다. 또한 팜필리아는 ‘모든 백성’, ‘여러 족속’이란 뜻이 있으며 도리아의 3부족 중 하나인 팜필리(Pamphyli)에서 파생된 것으로 바다 민족이 도래하였을 때 팜필리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뤼키아와 많은 역사를 공유하였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뤼키아와 통합되었다. 이 통합 속주의 주도는 아탈리아(현 터키 안탈리아)이다.
- 킬리키아 속주(Provincia Cilicia):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부에 있으며 키프로스와 마주보고 있다. 로마제국 점령 전에는 이수스 전투가 발생된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이 지역을 비롯해 리키아, 팜필리아 등 아나톨리아 남부 해역은 예로부터 해적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폼페이우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물론 속주 점령은 덤으로 따라왔다. 주도는 타르수스(현 터키 아다나)로, 사도 바울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3.10. 중근동 및 레반트
'''Oriens et Levans'''
로마의 밀셔틀 1. 이 역시 대부분의 땅이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되었다. 파르티아 및 페르시아와 접해있기 때문에 이곳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게르만족의 서진 이전까지 로마가 외부 세력이랑 가장 치고박고 싸운 곳이며 로마나 외부 세력 모두 수차례의 전쟁에서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외교적 밀당으로 평화를 유지한 지방.[64][65][66][67]
- 해당 속주
- 아시리아 속주(Provincia Assyria)[68] :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 세 속주는 2년 만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폐지된다. 워낙 단명해서 주도가 없다.
- (북) 메소포타미아 속주(Provincia Mesopotamia):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한 속주 삼총사 중 하나이나, 메소포타미아 북부 속주 형태로 197년에 재설립 되었다. 후기 로마제국의 지정학적 상황에 있어 북부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귀중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주도는 아미다(현 터키 디야르바크르), 니시비스(현 터키 누사이빈)이다.
- 시리아 코일레 속주(Provincia Syria Coele): 서쪽은 지중해에 북쪽은 킬리키아 속주에 있으며 이집트, 아나톨리아와 함께 로마제국 최대의 곡창지대 중 하나. 현 터키 동남부 및 레바논 지역이다. 주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인 안티오키아(현 터키 안타키야)이다. 이름의 유래는 시리아를 다스렸던 헬레니즘계 왕조인 셀레우코스 왕조. 최근에 IS의 반달 행위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역 중 하나이며 이미 이곳에는 위험에 빠진 로마 유적들도 굉장히 많다. 시리아 속주 총독은 강국인 파르티아와 대치하는 동부전선의 사령관이나 마찬가지인 요직이었으며 보통 3개 군단의 대병력을 상시 지휘하였다. 헤롯 왕조 치하의 유대 왕국을 감시하고 이후에는 유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곳의 유명한 총독으로는 코르불로, 무키아누스가 있는데 코르불로는 명장이면서도 파르티아 및 아르메니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것으로 유명하며, 무키아누스는 유대인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와 협력하여 유대 정벌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만들었다. 타키투스는 무키아누스에 대해 교만하고 베스파시아누스와 적대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실제로 무키아누스는 그 자신이 유력한 황제 후보이면서도[69] 오히려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즉위에 조력하였다. 덕분에 무키아누스 자신보다 인지도가 한참 낮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70]
- 시리아 포이니키아 속주(Provincia Syria Phoenicia)[71] : 시리아의 남쪽지방, 페니키아 지방을 일컫으며 현재의 시리아 및 레바논, 요르단 지역이다. 주도는 다마스쿠스(현 시리아 디마시크)이며 시돈과 베리투스(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또한 유명한 도시이다. 사실 이 지역 또한 IS의 마수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팔미라 유적이 이곳에 있는데 IS에게 훼손당했다.
- 유다이아[72] 속주(Provincia Judaea):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이다. 마카비 전쟁을 통해 성립된 하스몬 왕조가 폼페이우스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이 지역은 시리아 속주 총독의 감시 아래 이두매인 헤롯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서기 66년 헤롯 아그리파스 2세 시대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으로 시리아 속주 주둔 1개 군단이 전멸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만다. 반란 진압을 위해 베스파시아누스가 파견되었고, 성공적으로 진압하던 도중 네로 황제의 죽음과 네 황제의 해로 대표되는 혼란기가 찾아와 베스파시아누스는 내전에 참여, 황제로 등극하고 예루살렘은 서기 70년 아들 티투스의 주도로 점령되었다. 이때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위시로 한 온건파 유대인은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유대 속주는 시리아 속주 총독 관할이 아닌 독자적인 속주로 승격한다. 이 이후에도 두 번 더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마지막 반란인 바르 코크바의 난은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일어났는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유대인은 강제로 예루살렘에서 내쫓기게 되었다. 자세한 건 디아스포라 참조. 주도는 의외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아비브 근처 해안가의 도시인 카이사레아 마리티마(현 이스라엘 케사리야)인데 이는 유대인을 자극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 오스로에네 속주(Provincia Osroene):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지역으로 시리아 코일레에서 좀 더 내륙으로 들어가 있으며 주도는 에데사(현 터키 샨르우르파)/레사이나(현 시리아 라스 알 아인). 지정학적으로 여러 세력의 길목인지라, 헬레니즘 시대부터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대표적으로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있다.
-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Provincia Petraea): 로마의 제국 이전에는 이곳에 페트라 왕국이 있었다. 이곳은 트라야누스 황제 때 가장 늦게 편입 되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페트라 왕국과 로마 제국 사이에 우호적인(실제로는 일방적인)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도는 페트라 왕국의 수도인 페트라(현 요르단의 페트라 유적)와 로마가 세운 도시인 보스트라(현 시리아 보스라) 공동.
3.11. 북아프리카
'''Africa'''
로마에서 두번째로 밀 생산량이 많았던 지역이자 두 번째로 부유한 지역.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포에니 전쟁을 통해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지역이 대부분이다.
- 해당 속주
- 아이깁투스 황제 직할령(Provincia Aegypti): 아이깁투스는 현재의 이집트 일대를 그리스인들이 부르는 명칭이었으며 원래 이집트라는 말 자체가 아이깁투스를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 당시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다른 헬레니즘계 알렉산드로스 후계국보다 오래 독립국으로서 버티는데 성공한다. 이는 이집트 특유의 폐쇄적 위치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유지해 온 줄타기 외교 정책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기 동생과 권력을 나눠갖기 싫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끌어들이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패착이 되었고 균형외교를 무너뜨렸다.[73][74] 2차 삼두정치 결렬 이후, 이집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악티움 해전이후 가세가 옥타비아누스(나중의 아우구스투스)로 기울어지게 되고 이는 안토니우스 패배 후 이집트가 속주가 아닌 황제 직할령이 된 원인이 된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 최대의 밀셔틀이 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을 거쳐 7세기 이슬람의 침공이 있을 때 까지 약 700년간 어느 야만족의 침공을 받지 않고 열심히(?) 로마의 밀셔틀이 된다. 이집트는 다른 로마의 황제 속주와는 달리 황제 직할령인데 황제가 직접 이집트 장관을 임명하여 다스린다. 이 황제 직할령의 이점 중 하나는 이집트를 통해 수도에 공급되는 밀 공급량을 황제가 직접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김연아의 2009-10 시즌 갈라 프로그램이 마스네가 작곡한 '타이스의 명상곡'인데, 이 곡의 배경은 4세기-로마제국 말기의 여기, 즉 이집트이다.[75] 직할령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알 이스칸다리야)다.
-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속주(Provincia Creta et Cyrenaeca) ♠: 크레타는 말 그대로 현재의 그리스 크레테 섬이며 키레나이카는 현재의 리비아 바르카 지방(그리스어 명인 키레네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입장에서는 상당히 백괴스러운 속주인데 크레타는 아카이아 같은 그리스 또는 가까운 아시아 속주에 묶지 않고 훨씬 먼 키레나이카 묶어놓은 것도 웃기지만 정작 이 속주의 주도는 고르티나인데 크레테 섬에 있다(...). 위치는 현대 그리스 크레테 주의 주도 이라클리온에서 가깝다고 한다.
- 트리폴리타니아 속주(Provincia Tripolitania) ♠: 현 리비아 타라불루스 지방 일대. 속주 이름인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으로 더 유명하다. 주도는 렙티스 마그나(현 리비아 콤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기 전의 출신지이며 이 때문에 세베루스 황제는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가 되었다.
- 아프리카 속주(Provincia Africa) ♠: 현 튀니지 일대 이며 주도는 처음엔 자마 레기아(그 유명한 자마 전투가 벌어진 곳 맞다. 현 튀니지 자마)에서 카르타고(현 튀니지 카르타지.[76] )로 옮김[77] 3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여러번 재건 시도가 있었고 결국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재건되어 주도의 지위를 되찾는다. 이 카르타고는 로마인들이 재건한 신도시었기 때문에 오리지널 카르타고 유물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한다. 카르타고가 폐허였을 때의 주도는 우티카(현 튀니지 자나)이다. 아프리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은퇴 후 자신의 일자리가 없어진 사병을 정착시킨 땅이기도 하다. 즉 마리우스는 여기 속주를 최초의 기반 및 클리엔테스로 가지게 되었다.
- 누미디아 속주(Provincia Numidia)[78] ♠: 현재의 알제리 북부이나, 지중해성 기후의 북부 해안을 제외한 알제리 땅의 대부분이 사막인 걸 감안하면 실제 알제리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다.[79] 주도는 키르타. 아프리카와 함께 로마의 코끼리병을 책임져왔으며 누미디아 왕국은 2차 포에니 전쟁 까지만 해도 카르타고에 협력하였다. 하지만 2차 포에니 전쟁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자를 회유했고, 전쟁 이후 마시니사가 왕이 되어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다. 마시니사의 누미디아는 종전 협정 결과로 카르타고가 독자적인 교전권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을 이용하여 카르타고를 괴롭힌다. 이는 로마가 보기에도 도를 넘어설 정도였다고. 이 때문에 모든 로마 지식인들이 불필요하다고 욕한[80] 3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된다. 한편 카르타고 멸망 약 반 세기 후에는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가 오해와 실책 및 악수를 쌓은 끝에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를 유구르타 전쟁이라 부른다. 유구르타 전쟁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전쟁이었으며 유구르타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물론 유구르타는 처형되었고 영토 상당 부분은 이웃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에는 유구르타의 배다른 형제 가우다와 그의 아들 히엠프살 2세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고, 실정으로 본국에서 쫓겨난 히엠프살 2세를 폼페이우스가 복위시켜 주면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히엠프살의 아들 유바 1세는 로마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어 아프리카에 쳐들어온 카이사르파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전사시키는 실적을 올렸지만, 결국 직접 쳐들어온 카이사르에게 탑수스 전투에서 패하고 자살했다.[81] 이후 누미디아는 주인을 잃고 이웃 마우레타니아 세력이 활개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르러 유바 1세의 아들 유바 2세가 복위되었지만 누미디아 대신 마우레타니아를 다스리게 되었고 누미디아는 속주화되었다.
-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속주(Provincia Mauretania Tinginata) : 아프리카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속주. 주도는 팅기스(현 모로코 탄자). 참고로 마우레타니아라는 말에서 무어 및 무어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으며 모로코, 모리타니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유바 2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와 결혼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모두 능숙하여 자연사, 지리 등 여러 분야의 책을 남기는 등 교양인이었다. 왕비 클레오파트라 역시 남편의 통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며, 유바 2세의 통치 아래 왕국은 번영하여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고 교역을 진흥시키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유바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대까지도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로마 치하의 왕국들 중 가장 부유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로마에 방문한 프톨레마이오스를 미친 황제 칼리굴라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암살해 버리면서 번영은 갑작스러운 끝을 맞게 된다. 왕의 죽음에 반발한 마우레타니아에서는 대규모 베르베르인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는 이를 진압한 후 마우레타니아를 둘로 나누어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를 설치하였다.
-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Provincia Mauretania Caesariensis) : 누미디아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사이에 끼인 속주. 주도는 카이사리아(현 알제리 셰르셸)이다. 여러 속주들에 카이세리, 카이사리아 등 이름이 비슷한 도시가 많은데 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또는 역대 황제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카이사르 이후 황제들의 공식 이름에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들어갔으며 카이사르 자체가 황제를 뜻하게 되었기 때문. 이 카이사리아는 위의 유바 2세가 마우레타니아로 옮긴 이후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수도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 기타 주요 주변 지역
- 아비시니아(Abyssinia): 아비시니아 고원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에티오피아 일대이자 청(靑)나일강[82] 의 최상류지대이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서기 1000년경까지 존속하였던 악숨 왕국(The Kingdom of Aksum, The Kingdom of Axum 또는 Aksumite Empire) 및 악숨 왕국이 있었던 지역을 말한다. 악숨 왕국은 본래 에티오피아 북부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작하였으나, 기원 전후로 제국을 칭할 정도로 국력이 향상되었다. 제국을 칭하기 시작한 후, 서기 2세기에 이르면 로마와 파르티아 및 인도의 쿠샨 왕조와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군대를 이끌고 나일강 상류를 따라 이곳까지 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나일강 유람선 여행에 불과하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간 에티오피아는 아비시니아 고원이 있는 아프리카의 뿔 지방의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이 아닌, 아스완이 있는 지방이자 현재의 상 이집트(나일강 중상류의 이집트 남부 지방과 수단 북부)인 누비아 지방(Nubia)[83] 이다. 즉 기록이 혼동 된 것이다. 하지만 "아비시니아 에티오피아" 악숨 왕국은 이집트 및 홍해를 통해 로마로부터 의류 및 유리제품을 수입하였고 상아, 노예, 흑요석, 대모, 산호, 금 등을 수출하는 무역을 왕성하게 했으며. 서기 4세기경에는 로마로부터 기독교가 전해져 프레스터 존의 전설의 원형의 후보 중 하나가 된다. 이 악숨 왕국은 이슬람이 발흥하면서 동로마와 사산 왕조와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해서 서기 10세기에 멸망한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는 그리스어로 "햇볕에 그을린 남자들의 땅"이라는 뜻이 있다.
3.12. 히스파니아
'''Hispania'''
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로부터 빼앗은 영토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산악지형이라 게릴라전이 자주 일어났으며 한니발의 동생이 이곳을 근거지 삼기도 하였고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이후에는 갈리아와 함께 '''로마화의 우등생'''으로 불렸으며 황제 트라야누스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갈리아, 북이탈리아, 북아프리카와 함께 퇴역한 예비군 로마군이 정착하여 세운 도시가 굉장히 많다.(거의 로마제국 서부지역의 도시들은 거진 다 이런 과정을 거쳤다.) 이 지역 속주는 대부분 히스파니아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스페인어로 에스파냐, 영어표현으로는 스페인이 나오게 된다.
- 해당 속주
-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Provincia Hispania Tarraconensis): 현 스페인 영토의 대부분.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 후 착실히 로마화의 길을 걷는다. 주도는 타라코(현 스페인 타라고나). 바르셀로나와 같이 카탈루냐에 위치했지만 레콩키스타를 겪으면서 바르셀로나와 타라코의 운명은 뒤바뀌었다. 5세기경에는 이 속주에 고트족들이 쏟아져 들어와 서고트 왕국을 세운다. 갈바가 네로의 뒤를 잇기 직전 이곳에서 총독을 역임하였다.
-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Provincia Hispania Baeticia)[84] ♠: 현 스페인 남부. 주도는 코르두바(현 스페인 코르도바). 서 지중해 및 서유럽 세계에 위치했지만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속주. 원래 카르타고 땅이었으나 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에 귀속되었다. 빈덱스가 네로에 항거하였을 때 가장 먼저 지지를 보낸 곳 중 하나이며 트라야누스의 고향인 이탈리카가 이곳에 있다. 5세기경에는 이 속주에도 고트족들이 쏟아져 들어와 서고트 왕국을 세우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동로마가 일시 수복해 가기도 하였다.
- 루시타니아 속주(Provincia Hispania Lusitania)[85] : 현 포르투갈 중 두오루 강 이남 지역이며 일부 스페인 서부 영토(현재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를 포함한다. 주도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현 스페인 메리다)이다. 하지만 리스본, 코임브라, 브라가 등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 중 상당수가 로마제국 시대에 건설 된 것이다. 네로의 자살 전에는 후임 황제 오토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었던 곳이다.
3.13. 지중해 도서 지역
본격 로마의 밀셔틀 3
- 해당 속주
- 시킬리아 속주(Provincia Sicilia) ♠ : 현재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최초의 로마 밀셔틀이자 라디푼디움[86] 의 고향. 이칼리카르타고와 함께 로마 자영농의 몰락의 원흉이 된다.[87] 하지만 갈리아 키살피나(북이탈리아)와는 달리 로마가 멸망할 때 까지도 본국 이탈리아에 편입되지는 못하고 속주로 남았다. 편입되었으면 아마 시칠리아 속주 항목에 취소선 그었을 것이다. 주도는 시라쿠사(현 이탈리아 시라쿠사).
- 코르시카 에트 사르디니아 속주(Provincia Corsica et Sardinia) : 코르시카는 현재 프랑스 코르시카 섬, 사르디니아는 현재 이탈리아 사르데냐 섬. 로마제국 이전에는 카르타고의 세력이 미치는 지역이었으며, 1차 포에니 전쟁 직후인 기원전 238년에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는 두 섬을 묶어 한 속주가 되었으며, 티베리우스 때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이곳으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주도는 사르디니아 섬에 위치한 카랄리스(현 이탈리아 칼리아리).
- 로두스 속주(Provincia Rhodus) ♠ : 현재의 그리스 로도스 섬. 주도는 로도스 섬에 위치한 동명의 도시 로도스(현 그리스 로도스)이며 장미꽃이 피는 섬이란 뜻이 있다. 아테네 수준은 아니지만 아카데미들이 많이 몰려있어 학원도시라 불렸다고. 많은 명사들이 도피성 유학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 키프루스 속주(Provincia Cyprus) ♠ : 말 그대로 현재의 키프로스 섬이다. 조그만 섬 안에서 그리스인과 터키인이 반띵하고 있는 그곳. 이곳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떠난 곳으로 유명하며 주도는 파포스(현 키프로스 파포스). 성경에서도 이 도시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이 바보(...)
3.14. 이탈리아
'''Italia'''
[image]
수도인 로마. 재밌는 것은 로마 시를 14개 구(區)로 나누었는데, 이탈리아 반도 또한 1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고. 여기에는 11개였지만, 후대 가서 증설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 시민권자는 세금이 면제였다고 한다. 서로마 제국 시기로 갈수록 수도 로마의 중요성은 떨어지고 대신 메디올라눔, 라벤나등 지방도시들이 중심지화 한다. 이는 로마 시가 이탈리아의 중서부에 있었던 관계로 북방의 라인 강, 다뉴브 강 전선과 매우 멀었으며, 또한 이탈리아 기준의 서해(티레니아 해)와는 가깝지만 동해(아드리아 해)와는 멀어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정부와의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위의 지도에서 이탈리아 내 지역 넘버링이 남쪽이 북쪽보다 앞섰던 것으로 보아, 북이탈리아보다는 남이탈리아가 더 우대받았던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북이탈리아까지 이탈리아 본국으로 포섭되었던 것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탈리아란 개념은 오로지 지리적인 것으로서 이탈리아 반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동맹시 전쟁 이전에는 정치적 행정적으로 '''본국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없었다. 동맹시 전쟁 이전의 이탈리아 반도는 도시국가로서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 연합체인 로마 연합 그리고 여러 로마의 사유지와 에트루리아 족, 삼니움 족 등의 부족국가 또는 그 영토들이 섞인 짬뽕과도 같은 상태였다. 또한 로마 연합의 동맹국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 보다 한 단계 격이 낮은 라틴 시민권[88] 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민족을 포용한 다는 점에서 굉장히 장점인 제도였지만 '''라틴 시민권을 로마 시민권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되어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 세계 곳곳에 속주를 두게 됨으로서 동맹국 시민에 대한 역차별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포에니 전쟁 때 끌려온 카르타고인 소년 노예가 능력만 좋으면 주인의 신뢰를 얻고 장성하여 자유를 '''구입'''할 수 있었고 그 소년의 자식이나 손자대에 가서 일정 재산을 갖추게 되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동맹국 시민은 영원히 라틴 시민권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로마의 동맹시들이 불만을 갖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되자 기원전 91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이러한 불만 및 사회적 문제를 막기 위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자고 하였으나 기득권 층은 물론 무산자 로마 시민까지 반대하였다. 반대만 하면 모를까 기득권 층은 드루수스를 살해해 버리는 짓을 저질러 버렸고, 중재 역을 해줄 드루수스가 사라지자 동맹시 및 이탈리아의 부족들은 일제히 반기를 들게 된다. 이를 동맹시 전쟁이라 부른다. 피첸토족, 베스티노족, 마루키노족, 파엘리노족, 마르시족, 프렌타노족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독자적 수도(코르피니움), 독자적 국명(이탈리아), 독자적 화폐와 상징(로마의 늑대에 대비되는 이탈리아의 황소)을 만들었다고. 이 전쟁은 마리우스, 술라, 크라수스, 폼페이우스[89] 등 로마의 쟁쟁한 정치가들이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90] 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내고 민회의 찬성을 얻음으로써 동맹시 전쟁은 종결된다. 동맹시 전쟁의 결과로 한니발이 침공 했을 때도 굳건하였던, 로마와 동맹 도시국가의 연합체인 로마 연합은 해체되고, 로마 연합을 이루던 도시들은 모두 합병되어 본국 이탈리아의 각 지방을 구성하게 된다.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전환이 되었으며, 한 국가이기도 하였던 로마는 영토국가의 수도가 된다. 그리고 합병된 도시 국가들을 가리키던 단어인 무니키피움(municipium)은 본국 이탈리아 내의 각 지방으로 의미가 변했다가, 오늘날 영어의 municipal, 즉 기초자치단체의 의미로 정착했다.
4. 고대 로마 후기[91] 의 지방행정 체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의 로마 행정구역 전도. 260년 발레리아누스의 에데사 전투 패배와 생포로 동쪽 국경이 꽤 밀려 있었다가, 오히려 사산 페르시아 쪽으로 상당히 멀리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298~299년 갈레리우스의 사탈라 전투 승리와 크테시폰 일시 점령 이후로 보인다. [image]
400년, 즉 아르카디우스·호노리우스 형제 때의 로마 행정구역 전도. 빨간 속주 세 곳은 프라이토르 급이 일반적인 속주 장관 중에서도 프로콘술 급으로 급이 높은 곳이며, 문민 원로원 귀족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부임되는 곳이었다. 원수정기의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라는 개념 자체가 그 동안의 제국 관료제와 지방행정의 발달로 거의 사라지고 나서도 원로원 속주들 중 마지막까지 특별히 남아있었던 곳으로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라인·도나우 강과 동방 국경 모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평화로웠고 문명의 역사가 깊으며 부유한 곳으로서[92] , 문관 입장에서는 완전 좋은 곳이었고, 무관 입장에서는 너무 평화로운 나머지 전공을 쌓을 수가 없어서 한직(...)인 곳이다. 상주병력도 정규 군단이 아닌, 오늘날로 따지면 경찰이나 치안대 정도만 있었다. [image]
2명의 정제(正帝)와 2명의 부제(副帝)가 제국 영토를 4분하여 분담 방위하는 체제가 성립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방 정제를 맡고, 서방 정제는 막시미아누스, 동방 부제는 갈레리우스, 서방 부제는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방위하게 되었다.각 황제들의 담당 지역은
- 동방 정제 - 오리엔트
- 동방 부제 - 일리리쿰
- 서방 정제 - 이탈리아
- 서방 부제 - 갈리아
대관구의 장은 종전의 근위대장에서 이름이 유지되는 Praefectus Praetorio가 맡게 되었다. 단 중앙직과 지방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익숙한 현대와는 달리 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또한 직위의 유래 자체가 로마 시의 근위대장이라는 중앙직이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지방관은 전혀 아니었고, 중앙정계에도 힘을 발휘하는 자리였다. Anthemius (praetorian prefect), 참고로 동명이인인 후대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외조부) 문서에 의하면, 이 직위에 있는 405년에서 414년까지의 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플 성벽(테오도시우스 2세의 통치기간이라 후대에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도 불리는) 증축을 책임졌고, 아르카디우스 말기과 테오도시우스 2세 초기의 '''실질적인 섭정(effective regent)'''이었을 정도이니 지방관에 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동서로마의 각 수도를 끼고 있던 이탈리아와 동방 대관구의 치소는 다름아닌 수도 그 자체이며, 한편 그 프라이펙투스에게는 산하 지방의 통치보다는 수도에서의 중앙정치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에, 측근들이나 비카리우스 등 산하의 지방관들에게 지방통치를 보다 많이 위임했다. 반면 수도를 끼고 있지 않던 일리리쿰과 갈리아 대관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한편 관구의 장은 일반적으로 Vicarius로 불렸다. 단 안티오키아에 소재했던 동방 관구장은 Vicarius 대신에, 동급의 무관직이었던 Comes로 불렸는데, 이는 범지중해적인 판도 형성 후부터 로마 주변의 체급을 갖춘 유일한 문명국이었던 이란계 국가와의 상시적인 대치 상태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실제 운영상으로는 겸직이 많아서 프라이펙투스(대관구의 장)가 해당 대관구의 치소를 끼고 있는 관구의 장(원래대로라면 비카리우스)를 겸했던 경우도 있었고, 비카리우스가 해당 관구의 치소를 끼고 있는 속주의 장(원래대로라면 프라이토르 등)을 겸했던 경우도 제법 보였다. 한편 급박한 사태에서 3단계 보고·명령체계를 지키기가 어려운 나머지, 비카리우스는 위아래에서 치이게 되어,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원로원 속주니 황제 속주니 이런 구분에서 아예 열외되어 황제의 직속으로 운영되어 오던 이집트 관구와[98] 수백년간 거의 유일하게 로마 주변의 큰 체급을 갖춘 문명국이었던 이란계 국가를 최일선에서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100여개가 넘게 나뉘어졌던 개별 속주급으로는 상대도 안 되고 그걸 크게 한 단위 묶은 관구급으로나 상대해야 했던 동방 관구[99] 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5세기 말, 6세기에 사문화되기 시작했다. 속주가 100여개나 되니 그 각 속주 총독들은 그만큼 관할구역이 좁아서 현장에 밀착되어 있었던 한편, 프라이펙투스들은 로마 전국에서도 권력 순위로는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들이었던 가운데, 비카리우스 급은 그 사이에서 포지션이 애매해졌던 것이다.[100]
서로마가 망하면서 4개 중 서쪽의 2개를 잃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때 이탈리아 대관구의 전역과, 갈리아 대관구의 일부였던 스페인 동남해안을 찾았다.[101] 하지만 서로마 시절과 다르게, 신설된 이탈리아 대관구는 이탈리아 반도에 국한시키고, 북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대관구[102] 를 신설했다가, 580~590년대에 둘 다 총독령(Exarchatus)으로 전환했다. 차이는 종전의 민정-군정 분리와 달리 민정-군정이 일원화되었던 것으로서, 노골적으로 말하면 군사령관이 민간통치를 겸한 일종의 군정이다. 이탈리아 대관구는 그 유명한 "라벤나 총독부[103] "가 되며, 아프리카 총독령[104] 도 총독제가 실시되며 설치되었다. 엑사르카투스는 총독령/총독부 정도로 번역되며, 원래 서로마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만 두었고[105] , 동로마의 기존 영역에는 두지 않았다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잃고 나서 7세기 중반 콘스탄스 2세 때 테마로 바꾼다. 서방의 총독령들은 테마로 바꾸지 않고 총독령으로 두다가, 7세기 말 ~ 8세기 초에 북아프리카를, 8세기 중반에 로마 시와 라벤나를 비롯한 중북부 이탈리아를 전부 잃고 남이탈리아도 이슬람 세력과 랑고바르드, 프랑크 세력 가운데에서 몇몇 거점을 가까스로 지키다가 반격을 시작해 다시 어느 정도 확보한 9세기 후반 바실리오스 1세 ~ 레온 6세 때 남이탈리아에도 테마를 설치했다.
4.1. 동방 대관구[106]
치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수도를 끼고 있기에, 이 직위는 지방관이라기보다는 중앙관료에 더욱 가까웠다.
- 동방 관구[107] : 치소는 안티오키아였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소아시아의 동남부 일부(킬리키아 등) 지역은 폰토스나 아시아가 아니라 여기에 속해 있었는데, 타우루스 산맥이라는 천연 경계 때문이었다. 후대 아랍 이슬람 세력의 침공도 동로마가 타우루스 산맥에 의지해서 소아시아 내부의 영토화를 어찌저찌 막았기 때문에, 경계가 이와 같이 형성되어서 킬리키아 지역은 10세기 중반 동로마가 타우루스 산맥을 완전히 넘어서 고토 탈환을 시도할 때까지[108] 7세기 중반부터 약 300년간 이슬람의 영역이었다.
- 폰투스 관구[109] : 치소는 소아시아 북부의 아마시아였다. 소아시아의 동·북부와 아르메니아를 관할했다.
- 아시아 관구[110] : 치소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페수스였다. 소아시아의 서·남부와 에게 해의 섬 대부분을 관리했다. 소아시아 본토 부분은 하나도 없이, 에게 해의 섬만을 관리하는 속주가 이름도 정직하게 '섬들'[111] 로 편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쪽에 가까운 섬들 일부와 크레타는 마케도니아 관구에 속해 있었다.
- 트라키아 관구[112] : 치소는 필리포폴리스(現 불가리아 플로브디프)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다면 산하에 6개의 속주를 두었다. 콘스탄티노플이 359년 로마와 동급의 수도 내지는 특별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113] 트라키아 소속이었다. 주목할 점은, 동로마의 전통적인 유럽 영역(≒ 발칸 반도) 중에서는 트라키아만이 일리리쿰이 아닌, 마르마라 해 너머와 함께 동방 대관구 소속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날 기준으로는 유럽의 동남쪽 끝인,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속주의 이름이 에우로파, 즉 '유럽'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 아이깁투스(이집트) 관구[114] : 치소는 알렉산드리아였으며, 산하에 6개의 속주를 두었다.(리비아(키레나이카) 2곳, 좁은 의미의 원래 이집트 4곳) 오리엔트 관구에 속해 있었으나, 380년경 이집트 관구가 분리신설되었다. 現 리비아의 동부지역인 키레나이카 지역도 여기 속해 있었던 반면, 중·서부 지역인 트리폴리타니아는 아프리카 관구에 속했다. 즉 각각 동로마 및 서로마에 속했다는 얘기도 되는데, 이 구분은 해당 시대에 갑자기 만들어졌던 것이 절대 아니며,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기원전 631년에 그리스인들이 중심도시인 키레네를 세웠으며, 그 점이 반영된 그리스 신화 상의 동명의 여왕도 있었을 정도이니 키레나이카는 오래 전부터 그리스 문화권이었던 반면, 트리폴리타니아는 로마 이전에는 페니키아(카르타고)-베르베르 문화권이었고 그리스와 거의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4.2. 일리리쿰 대관구[115]
치소는 판노니아가 이탈리아 대관구로 붙는 379년까지는 시르미움, 379년부터는 테살로니키였다. 모에시아 관구를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뉴브 강을 낀 내륙 지역의 다키아 관구와, 에게 해를 낀 그리스 지역의 마케도니아 관구로 분할했다.
- 일리리쿰 관구(~379, 이후 판노니아로 명칭변경): 치소는 시르미움이었으며 산하에 7개의 속주를 두었다. 그런데 시르미움은 관구 내에서 동쪽 끝의 다뉴브 강변 국경에 있었다. 여하튼 대체로 서로마의 영역이었지만, 동로마도 이따금씩 영유권을 주장하는 지역이었으며[116] , 근현대 학계에서 정식 서로마 황제로는 잘 간주되지 않으나, 동로마의 인준을 받았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흔히 말하는 476년 서로마 멸망 후에도 480년까지 웅거하던 곳이었다.
주목할 점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좁은 의미의 일리리쿰은 원래 이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117] 서로마 쪽으로 할당하기로 동서로마가 합의하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판노니아로 바뀌면서 이탈리아 대관구 산하로 넘어간 반면, 밑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만 기존의 일리리쿰 대관구 산하로 남아 있으면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의 사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image] : 일리리쿰과 다키아 관구가 같이 나온 지도. 일리리쿰이 이탈리아 대관구로 소속이 변경된 이후로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속주 중 'OOO(지역이름) Ripensis/Ripense'가 보이는데, 라틴어로 강변이라는 뜻으로서 그 강은 당연히 다뉴브 강이고, 바로 옆에 세트로 'OOO Mediterranea/Mediterranum'이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지중해에 가까워서 붙은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지중해 해안가가 아니라 내륙이라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마케도니아 관구[119] : 치소는 대관구와 마찬가지로 테살로니키였으며 산하에 6~7개의 속주를 두었다. 대강 좁은 의미의 원래 그리스 + 에피루스 + 테살로니카 주변의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6~7개인 이유는, 위의 로마 전도에는 테살로니카를 낀 마케도니아 속주가 크게 하나로 합쳐져 있으나, 이후 테살로니카와 주변의 해안 지역이 마케도니아 제1속주로, 내륙 지역이 제2속주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원래는 희한하게도 바다 너머의 키레나이카와 합쳐서 복합 행정구역을 이루던 크레타가 이 때부터 비로소 그리스와 같이 마케도니아 속주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관구 산하의 아카이아(Achaea)[120] 속주의 치소가 아테네가 아니라 코린토스라는 점이다.[121] 공화정 말이나 제정 초만 해도 아테네와 스파르타 둘만이 역사성을 인정받아서,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상당한 자치권과 특수지위를 부여받은 바 있었는데, 그 때와 구도가 달라진 것이다. 이는 동로마 때까지도 이어져서,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되면서 생긴 펠로폰네소스 테마에서도 스파르타를 제치고 코린토스가 치소였고, 헬라스 테마에서도 아테네를 제치고 테베가 치소였다가 테베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가 동로마와 14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을 때[122] 그리스 지역으로 남하하며 테베를 함락시키고 파괴한 후에야(...) 아테네가 치소가 되었다. 그마저도 확고하지 못해서 이따금씩 지도에 나온 테살리아 속주의 치소였던 라리사가 헬라스의 치소였던 경우도 있었다.
[image]- 6세기 동로마 시대의 발칸반도: 시르미움이 서북쪽 끝에 있고, 그 너머는 실질 영역에서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4.3. 이탈리아 대관구[123]
- 이탈리아 관구
- 아노나리아(북부) 관구[124] : 실질적 수도[125] 였던 메디올라눔(現 밀라노)과 라벤나를 낀, 서로마의 실질적 수도권이었지만, 제정 초기의 이탈리아는 아니었고 오늘날의 이탈리아도 아닌 라이티아(Raetia, 現 스위스 동부와 오스트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 수부르비카리아(중남부[126] ) 관구[127] : 'Suburbicaria'의 뜻 자체가 'under the City'(=Rome)으로 로마 시의 직할지라는 뜻으로서 당연히 치소는 로마 시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프라이펙투스를 따로 두어서 특별시 비슷하게 간주되던 로마 시를 제외한다면[128] 산하에 10개의 속주를 두었다.(이탈리아 본토 7개, 섬 3개[129] ) 이 곳은 서로마의 명목상 수도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여기서 로마 시가 북이탈리아보다 남이탈리아와 더 관계가 밀접했다는 것이 엿보이는데, 실제로 카이사르 때까지는 루비콘 강 이북의 북이탈리아는 갈리아 키살피나라는 이름으로 본국이 아닌 속주였고 그 이남의 중남부만이 본국이었는데, 카이사르 사후 제2차 삼두정치 시절, 즉 황제가 되기 전의 '옥타비아누스' 시절에 아우구스투스가 속주에서 승격시켜서 종전의 본국에 합쳤고 그 본국에 이탈리아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붙인 후 11개의 위에서도 나온 무니키피오[130] 로 나누었다. 뒤에 3개가 추가되어 14개가 되었다. 이것이 '이탈리아'라는 이름이 로마 행정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쓰인 것이다. [131]
- 아프리카 관구[132] : 치소는 카르타고였으며 산하에 6~7개의 속주를 두었다. 아래에 보이는, 카르타고를 끼고 있는 좁은 의미의 아프리카 속주(= Zeugitana)의 바로 서쪽에 있는 곳이 누미디아인데, 디오클레티아누스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에만 북쪽 해안가의 'Cirtensis'와, 남쪽 내륙의 'Militiana'로 나뉘어 있었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시 하나로 합쳤다. 그 외에도 북아프리카 가장 서쪽의 'Mauretania Tingitana'(현 모로코)는 혼자 스페인 쪽의 관구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530년대 동로마의 재정복 이후에는 이탈리아 대관구와 따로 아프리카 대관구[133] 를 세웠다가 마우리키우스 때 총독부[134] 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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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리쿰 관구(~379, 이후 판노니아로 명칭변경): 치소는 시르미움이었으며 산하에 7개의 속주가 있었다. 그런데 시르미움은 관구 내에서 동쪽 끝의 다뉴브 강변 국경에 있었다. 여하튼 대체로 서로마의 영역이었지만, 동로마도 이따금씩 영유권을 주장하는 지역이었으며[135] , 근현대 학계에서 정식 서로마 황제로는 잘 간주되지 않으나, 동로마의 인준을 받았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흔히 말하는 476년 서로마 멸망 후에도 480년까지 웅거하던 곳이었다.
주목할 점은, 위 지도에서 보듯이 좁은 의미의 일리리쿰은 원래 이 곳인데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136] 서로마 쪽으로 할당하기로 동서로마가 합의하며,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름이 판노니아로 바뀌면서 이탈리아 대관구 산하로 넘어간 반면, 밑의 다키아 및 마케도니아 관구만 기존의 일리리쿰 대관구 산하로 남아 있으면서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의 사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4. 갈리아 대관구[137]
치소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Augusta Treverorum, 現 독일 트리어)였다가, 407년[138] 에 아렐라테(Arelate, 現 프랑스 아를)로 옮겼다.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구 로마 직제에 그대로 올라탄 동고트 왕국 때까지 형식적으로 존속했었다.
- 갈리아 관구: 치소는 대관구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이었으며, 산하에 10개의 속주를 두었다. 한편 갈리아라는 이름은 남부 대신 북부인 이 곳으로 이어졌다. 대강 오늘날의 중·북부 프랑스, 스위스 서부, 벨기에 전역, 네덜란드의 라인강 이남·이서, 독일의 라인강 이서 지역이다.
- 비엔네시스 관구: 치소는 부르디갈라(Burdigala, 現 프랑스 보르도)였으며, 이름대로 산하에 7개의 속주를 두었다. 윗 지도 프랑스 중남부의 'Septem Provinciae'가 여기다. 비엔네시스였다가 셉템으로 바뀌었는데 뜻은 7이라는 뜻이다. 저 부분을 잘 보면 7개로 쪼개져 있다. 여기서 따서 프랑스 중남부 지역을 칭하는 '셉티마니아'라는 역사적 지명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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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파니아 관구[139] : 치소는 아우구스타 에메리타(現 스페인 메리다)였으며, 산하에 6~7개의 속주를 두었다. 북아프리카 가장 서쪽의 'Mauretania Tingitana'(현 모로코)도 색상으로 볼 때 아프리카 관구가 아니라 여기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7개인 이유는, 4세기 중에 발레아레스 제도가 북동부의 타라코넨시스 속주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속주로 신설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지도는 발레아레스가 분리되기 전의 지도이며, 북아프리카의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는 나와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지브롤터 너머 히스파니아 관구에 속했다. 눈썰미가 있거나 로마에 대한 배경지식이 다소 있으면 느낄 수 있겠지만 다른 관구에 비해서 속주 하나하나의 크기가 큼직큼직했는데,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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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리타니아 관구
5. 동로마 제국 시대 속주
[1] 비잔티움 초기와도 겹치며, 476년에 고대가 끝났고 중세가 시작했다는 일반적인 통념은 학계에서는 지나간 옛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으며, 요즘 학계의 주류 의견은, 476년의 서로마 멸망에도 불구하고, 지중해권에서의 로마의 압도적인 위상으로 상징되는 고대는 끝나지 않았으며, 고대(정확히는 고대 후기(Late Antiquity))의 끝과 중세의 시작을 아랍인의 이슬람 정복으로 본다. 게르만족은 포에데라티로 로마군에 들어갔다가 조금씩 서로마 군부를 잠식해 들어가면서도 로마의 체제에 포섭되었고, 기독교를 믿었으며, 이후로도 동로마로부터 작위, 주화 시스템 등을 한동안 하사받거나 차용해서 쓰다가, 로마 시 및 교황으로 상징되는 구 서로마·라틴 문화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및 황제·총대주교로 상징되는 동로마·그리스 문화권이 지리적, 신학적, 문화적, 언어적, 종족적으로 점점 멀어지자 그 빈틈을 노려 전자를 후자에서 분리해서 자신들 쪽으로 포섭해가면서 조금씩 동로마의 종주권에서 독립해 나간 반면, 아랍인은 아예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체계를 창안한 후 로마를 완전히 극복하려 했다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2]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Orientis,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the East, 그리스어 Ἐπαρχότης τῶν πραιτωρίων τῆς Aνατολῆς. 이하 동로마 지역에는 그리스어까지 병기하나 서로마 지역에는 그리스어까지 병기하지 않기로 한다.[3]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per Illyricum,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Illyricum, 그리스어 Υπαρχία Ιλλυρικού.[4] Praefectura praetorio Italiae,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Italy.[5]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Galliarum,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Gaul.[6] 발해의 행정구역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자 자체가 다르다(涑州). 또한 허생전에서 장기는 일본의 속주로 인구가 30만 호에 달한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것 말고는 보통 고대 로마의 속주를 가리킨다.[7] 이후 서방통치는 사촌 율리아누스에게 맡겼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전에 서방을 다스렸던, 그 시점에서 이미 죽은 형제들은 콘스탄티우스와 동급의 정제(Augustus)였던 반면, 율리아누스는 그에 못 미치는 부제(Caesar)였다는 것이다.[8]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의 속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아이깁투스의 경우 황제 직할령)가 그것이다. 원로원 속주의 특징으로는 제정 이전부터 로마 속주였거나, 경제력이 월등한 동지중해 지역 또는 전선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점을 가진다.(주로 남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남부, 아프리카, 소아시아, 그리스에 위치) 그리고 총독은 공화정 시대의 그것과 같이 전직 집정관(Proconsul) 중에서 원로원의 선출에 의해 나왔다는 특징이 있다. 반대로 황제 속주는 카이사르 이후에 추가되었거나, 서지중해 지역 또는 라인 & 도나우 전선 또는 그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점(주로 브리튼 섬, 갈리아, 발칸 반도, 시리아 등)이고 선출 방법은 황제가 임명한 황제 대리인(legatus Augusti)이 총독을 맡았다. 하지만 황제 속주나 원로원 속주 둘 다 공통적으로 원로원 계급 출신자 또는 일부 기사(에퀴타스-여기서 기사는 말 타고 다니는 나이트(Knight)가 아닌 경제인. 재벌 총수 즉, 이건희나 정주영 구본능, 최태원 같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된다.)출신들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제도적인 것 이외에 일반적으로 속주의 종류를 크게 구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주로 황제 속주의 총독은 군대 경력이 있는 예비역 장군들이 맡았다고 생각하면 되고, 원로원 속주 총독은 문민 관료 출신들 또는 정계 은퇴 직전의 정치가들이 맡은게 보통이었다고 한다.[9] 오늘날의 이집트 지역이다. 개신교의 애굽이 이 아이깁투스를 한역한 것이다.[10]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11] 브리타니아로부터 분화[12] 다만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 글래스고와 에딘버러를 잇는 선 까지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이는 현 스코틀랜드 남부 지방이다.[13] 로마식 방어의 개념을 당시에는 리메스(Limes)라 불렀으며, 이런 리메스 시스템은 팍스 로마나의 기초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대 이탈리아의 군사전문 잡지의 이름도 이걸 따서 리메스라 한다.[14] 이쪽을 전공하고 있어서 퀄리티가 높기로 유명한 모 블로그의 주인장도 이 학자의 저서를 매우 자주 언급 및 인용하고 있다. 물론 좋은 쪽으로.[15] 동로마를 주로 연구하며, 그 학계에서 젊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학자인 Anthony Kaldellis[14] 의 "From Rome to New Rome, From Empire to Nation-State: Reopening the Question of Byzantium’s Roman Identity," in Two Romes: Rome and Constantinople in Late Antiquity 라는 논문에도 이를 지지하는 내용이 나온다. 'New" Romans from Gaul, for instance, amazingly soon after the conquest looked back to '''Caesar as their "ancestor" and not to Vercingetorix'''.'[16]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17]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18] 원래 이름은 갈리아 트란살피나(Provincia Gallia Transalpina)였으나 후에 바뀌었다.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는 Trans+Alpina로 되어 있으며, 트란스는 "반대 방향의", "변화의"란 뜻을 가진 접두사이다. 즉,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이탈리아와 반대 방향에 있는 갈리아, 알프스 산맥을 넘은 갈리아란 뜻이다. 물론 한국어판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알프스 저쪽의 갈리아"라고 번역했다. 이와 같이 지명에 트란스를 쓰는 경우는 루마니아어로 숲 넘어의 땅이란 뜻의 트란실바니아, 그리스어로 옥수스 강(아무다리야 강) 넘어의 땅이란 뜻의 트란스옥시아나, 요르단 넘어의 땅이란 뜻의 트란스요르단, 몰도바어로 드네스트르 강(니스트르 강) 넘어의 땅 이란 뜻의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이 있다. 냉대동계건조기후의 이명인 트란스바이칼 기후 또한 시베리아를 기준으로 바이칼 호수 넘어서의 지역의 기후대를 말한다.[19] 갈리아 코마타로부터 분화[20] XX(경기도, 충청남도, 강원도, 경상북도 등)도청을 영어로 XX Provincial Office라 하는데 여기서 Provincial이란 말도 프로방스처럼 프로빙키아에서 유래하였다.[21] 한 개 군단이 약 6천 명 규모이므로 3개 군단은 약 1만 8천 명에서 2만 명 사이. 이 당시 로마군의 규모는 약 4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였다.[22] 라인강 동쪽 지역은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인해 상실되었다.[23]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을 통해 편입.[24] 비스와 강은 심지어 독일도 아니고 폴란드에 있는 강이다.[25]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로마의 데나리우스가 발견된 적이 있다.[26] 루비콘 강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불명이다. 루비콘 강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강이 여러 곳이기 때문.[27] 베네치아의 전신이 된 도시. 훈족에 의해 파괴된 후 유민들이 근처 섬에 베네치아를 건설하였다.[28] 참고로 키살피나의 스펠링은 Cis+Alpina인데 알피나(Alpina)는 알다시피 알프스 산맥을, 시스(Cis)는 "이쪽의", "같은 방향의"란 뜻이다. 화학에 있어서 기하 이성질체에서 같은 방향 배열이란 뜻의 시스화합물, 같은 유전자에 A, B형 인자가 모두 있는 cis-AB형, 젠더에 있어서 시스젠더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즉, "갈리아 키살피나"는 알프스 산맥을 기준으로 이탈리아와 같은 방향에 있는 갈리아란 뜻이고, 로마인 이야기 한국어판에선 "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고 번역해놨다. 마찬가지로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개명 전 이름인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 또한 Trans+Alpina로 되어 있으며, 트란스는 "반대방향의", "변화의"란 뜻을 가진 접두사로 트랜스젠더나, 트랜스지방, 변압기란 뜻을 가진 저글리시인 도란스 같은 단어들 때문에 시스보다도 잘 알려져 있다.[29]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30] 시르미움은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4등분할 때 일리리아 속주의 수도가 된다.[31] 여기서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는 수도 로마를 기준으로 해서 가깝냐(수페리오르) 아니면 머냐(인페리오르)에 따라 기준이 나뉘며, 영어 superior(우등한), inferior(열등한)의 어원이 된다.[32]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다뉴브 강 좌안(하류 방향 기준, 로마제국 영토는 주로 다뉴브 강 우안에 있다.)에 있다. 공식적으로 로마제국이 다뉴브 강 바깥인 슬로바키아 땅에 무얼 한 건 없지만 브라티슬라바 남쪽 근교에서 로마 제국의 국경촌 유적이 발굴된 걸로 보아 국경 거점 몇 개 정도는 세운 것으로 보인다.[33] 다만 마르쿠스의 사망 당시 로마는 재정적 한계에 봉착해서 콤모두스가 취소하지 않더라도 정복되었을 확률이 낮았고, 정복되더라도 단기간내에 포기될거라는 예상이 다수. 최악의 경우 보헤미아에서 도나우 군단이 소멸하여 도나우 강이 뚫리고 사실상 빈집인 그리스나 이탈리아까지 털릴 가능성도 높다.[34] 원래 남동유럽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은 이 일대에 존재하는 하이모스(Αἵμος) 산맥에서 이름을 딴 하이모니아였지, 발칸(Balkan)이라는 이름은 이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 튀르크인들이 하이모스 산맥을 발칸 산맥이라고 불렀고 이 것이 지역 이름으로 확대되면서 19세기경부터 이 일대의 명칭으로 발칸이라는 단어가 자리잡게 된다.[35] 로마의 유명한 기병대장들이나 3~4세기의 황제 대부분은 이 지역 출신으로, 기병을 장악한 뒤에 황제가 되곤 했다.[36] 118~158년 사이에 다키아 수페리오르, 다키아 인페리오르로 분할되었다가 다시 합쳐짐[37] 보통 다키아 하면 도나우강 이북 루마니아를 떠올리지만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었다. 지금의 루마니아는 물론 몰도바, 우크라이나 서부(舊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역) 및 폴란드 남부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언급된 다키아의 범위이다.[38] 뜻은 아우렐리아누스의 다키아[39] 20-50년 사이 일리리쿰 속주에서 분화[40] 혹은 살로나라고도 부른다.[41] 모이시아로부터 분화[42] 다만 트라키아 일대가 수도권으로서 우월한 지위를 제대로 형성하기 시작한것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한 세기가 더 지나고 나서였다. 자세한 것은 레오 1세 트라키안 참조.[43]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가 새 수도를 건설하기 전까지는 주도나 로마제국 주요 도시가 아닌 그냥 소도시였다. 즉, 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가 노무현의 원안대로 서울에서 수도기능 및 정치적 중심지 기능을 세종시로 모조리 이전했다면, 아마 콘스탄티노플과 위상이 비슷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 최대도시, 아니 유럽 최대도시로 성장하기는 했다. [44] 스파르타쿠스의 원래 목표는 고향인 트라키아에 독립국을 세우는 것이었다.[45] 물론 로마 이전의 트라키아 지방에 왕국이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고 기원전 5세기 말엽에 오드뤼사이 왕국이 있긴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물론 그 이전의 그리스인들도 트라키아인을 전통적으로 호전적이고 야만스런 민족으로 알고있고 촌동네 취급하였다. 즉, 왕국이라봐야 그리스와 교류가 용이한 국경이나 해안 지대에 적당한 규모의 도시 몇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대다수는 내륙이나 산지에서 야만스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46] 대표적으로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가 있다. 여기서 트라쿠스는 트라키아 정복자라는 영예로운 이름이 아니라, 트라키아 촌놈이라는 반멸칭이다. 스파르타쿠스 사후 군인황제시대 까지는 약 300년의 기간이 지났음에도 촌동네 이미지는 여전하였다.[47] 이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고대 그리스~헬레니즘 시대 사이에 활동했던 경보병 병과 펠타스트 때문이었다. 이들은 투창과 작은 방패를 들고 다니면서 척후병 겸 경보병 역할을 담당했기에 그리스 폴리스나 헬레니즘계 왕국들이 경보병 용병으로 흔히 트라키아인들을 고용하기도 했다.[48] 물론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에는 아나톨리아 내륙지방이 대신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이루게 된다.[49] 스파르타의 병영국가적 생활양식은 이미 로마시대 때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어 스파르타 사람들의 돈벌이가 되었다.[50] 게다가 속주세까지 면제되었다! 물론 네로가 속주세 면세 혜택을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했으나 베스파시아누스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혜택을 주기로 원상복구 되었다.[51] 미국의 뉴욕 주와는 큰 도시는 주도가 아니며 오히려 주도는 잘 알려지지 않는 도시라는 점이 공통점이다.[52] '타우리카'라는 단어는 원래 이 일대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인의 일파인 타우리(Tauri)인에서 유래한 것이며 현재 쓰이고 있는 '크림(Crimea)'이라는 단어는 13세기 타타르인들이 세운 도시인 '에스키 크름(Eski Qırım)'에서 유래했다.[53]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54] 판티카파움이 아니다![55] 2014년 유로마이단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계가 다수이던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해 러시아에 편입되었다.[56] 라자스탄이 아니다![57] 실제로 동로마는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소아시아를 점점 상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기병의 공급처인 목초지가 없어짐으로서 기병의 양과 질이 줄어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물론 12세기 알렉시오스 1세-요안니스 2세-마누엘 1세로 이어지는 콤네노스 황조 시대의 회광반조 시기에는 소아시아 상실로 인한 악영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후 암군들의 등장과 함께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원인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58] 3세기의 위기 때 로마 군사들 대부분은 페르시아 및 파르티아로부터 이 지역을 방어하고 반격하기 위해 쳐들어 가는 것을 마치 '''스페인인들이 엘도라도를 정복하는 것 처럼 생각하였다고''' 한다.[59] 당장 신약성경 에페소스서, 갈라티아서, 콜로사이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쓰여졌는지 생각해보자.[60] 사실 비티니아 속주는 폰투스 속주와 함께 오랫동안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Bithynia et Pontus)라는 한 속주로 묶여 있었고 분리 된 것은 거의 말기의 일이다.[61]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유언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62] 사도 바울로가 쓴 콜로사이서는 프리기아에 위치한 콜로사이라는 도시의 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서신이다.[63] 후에 시리아 속주에 흡수[64] 카르헤 전투에선 크라수스가 수레나스의 파르티안 궁병에게 농락당하며 대패하였고 크라수스의 전사로 이어졌다. 이는 삼두정치가 무너져버린 원인이 되었다. 그 후에도 카르헤 전투의 복수전이 많이 이어졌지만 전투로 이긴 건 없었다. 대표적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의 파르티아 진격이 있었지만 욕만 잔뜩 먹고 성과가 없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외교적 합의를 통해 카르헤 전투 때 빼앗긴 대장기를 되찾아 오는데 만족해야 했다.[65] 그 외에도 트라야누스의 원정은 대성공을 거둔 듯 보였지만 유지하는 데 한계가 분명하였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알아서 포기하였다. 트라야누스 이후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각각 파르티아를 정벌하고 크테시폰을 점령하였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경우 "안토니누스의 역병" 때문에 세베루스의 경우 내부의 반란 진압 때문에 파르티아에서 철수하였다. 세베루스의 후임 황제인 카라칼라도 파르티아 원정을 떠났고 또한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실패로 끝난 건 물론 자신의 실책 때문에 파르티아에서 마크리누스의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파르티아가 멸망하고 로마에 대해 더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세워지는 원인이 되고 로마의 시리아 지역 국경관리가 더 빡세질 수밖에 없었다. 사산조 페르시아 건국 이후에도 여러 로마 황제들이 정벌에 나섰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세베루스의 경우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를 궤멸 시키는 등 일련의 성과는 있었지만 역사가들이 밝혀낸 실상에 의하면 패배 또는 무승부나 다름 없었고 잘 해봐야 피로스의 승리였다고 한다. 군인 황제 시대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시대(테트라키아)에도 마찬가지였다.[66] 반대로 파르티아와 페르시아 또한 로마제국의 동부를 일시적으로 유린하거나 점령하긴 했어도 마찬가지로 점유하진 못했다. 일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초반부에 일시적으로 파르티아가 쳐들어 왔지만 역관광 당하였고 사산조 페르시아 역시 파르티아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가 각각 점령에 성공하였고 특히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기까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또한 명군 샤푸르 2세 또한 아미다 전투를 일으키고 구원나온 율리아누스 황제까지 전사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아나톨리아 및 중근동에 대한 영구적인 점령엔 실패하였다.[67] 이와 같은 대치는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로 넘어온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결과적으로 로마와 페르시아 양국에 막대한 국력소모를 가져와 7세기경 이슬람 세력에게 중동 전체를 내주게 되는 원인이 된다.[68] 116년 트라야누스때 설립 후 2년 후인 118년 하드리아누스가 폐지[69] 제국 동부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속주인 시리아의 총독이었다.[70]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네로가 자살 명령만 내리지 않았더라면 업적이나 명성으로 보아 네로 사후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가 황제가 되었을 거라 추측한다.[71] 시리아로부터 분화[72] 흔히 아는 유대는 개신교 성경식 표기이고 실제로는 유데아, 유다이아 등으로 불렸다.[73] 게다가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정식 결혼함으로써 모든 로마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다. 로마 시민은 자기네 정치가가 외국 공주와 정략결혼하는 것을 끔찍히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앞서 클레오파트라와 관계를 가진 카이사르는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사생아 카이사리온까지 낳았어도 클레오파트라를 애인으로만 삼았지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을 감안해 카이사르의 유언에서 사생아 카이사리온은 빠져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 의도를 파악했는지는 불명.[74] 또한 후일 황제가 되는 티투스도 유대 왕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긴 했으나 결혼하지는 않았고 이는 티투스의 치세 내내 지지율이 높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75] 부연 설명을 하자면 타이스의 명상곡은 원래 오페라 타이스(Thais)에서 막이 바뀔 때 나오는 음악이었다. 또한 오페라 타이스는 아나톨 프랑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이교도 여사제 타이스가 기독교의 수도승 아타나엘과 사이에서 종교적인 지조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이다.[76] 튀니스 근교의 도시다. 튀니스 대도시권 안에 속함.[77] 카르타고의 경우 7세기의 이슬람의 발흥으로 인해 최종 멸망하였는데, 이 멸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 한다.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서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근대도시로 탈바꿈 한 유럽지역의 로마 도시들은 개발과 맞물려 제대로 된 문화재 발굴도 어렵고, 또 개발이 잘 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많다고. 대표적으로 로마 지하철이 문화재 발굴 때문에 1호선을 만드는 데만 20년이 넘게 걸리고, 이제야 3호선을 만들정도 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의 거대 도시들 중에서는 고대에는 타 도시 주변의 위성도시였으나, 근대에 그 도시를 제치고 거대도시가 된 곳이 많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톨레도-마드리드의 관계가 있다.[78] 아프리카로부터 분화[79] 먼 훗날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어 유럽인들을 이주시켰을 때에도 이 지역에 대부분 정착했다.[80] 심지어 2차 포에니 전쟁의 명장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까지도 반대했다고 한다.[81] 폼페이우스파의 장군 페트레이우스에게 죽었다는 설도 있다.[82] 말 그대로 푸른 나일강(The Blue Nile)이다. 나일강의 가장 큰 두 개의 지류 중 하나. 다른 하나는 우간다의 앨버트 호에서 발원하는 백(白)나일강.[83] 참고로 고대 이집트인은 누비아 지방을 카슈(Kash), 구약성경에서는 쿠슈라고 불렀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페르세우스가 구출한 공주 안드로메다가 속한 에티오피아가 "누비아 에티오피아"이다. 단, 구약성경에서 솔로몬 왕과 지혜에 대한 대담을 나눈 시바의 여왕이 통치했던 에티오피아는 "누비아 에티오피아"가 아닌 "아비시니아 에티오피아" 맞다.[84] 히스파이나 울테리오르 속주로부터 분화[85] 히스파이나 울테리오르 속주로부터 분화[86]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의 식민지와 땅이 늘어나자 귀족과 부자들은 이 땅을 싸게 매입하고 싼 값에 노예를 부려 밀값을 폭락하게 한다. 이 대농장을 라디푼디움이라 하며 세계사시간에 단골소재이기도 하다.[87] 전쟁으로 땅이풀리네 → 밀 농사의 플랜테이션화 → 밀값 폭락 → 자영농은 망했어요 테크 → 온갖 사회문제 발생. → 로마 공화정의 근본이 흔들림 → 걸출한 장군과 사병의 등장 → 내전! → 로마제국 성립 → PROFIT![88] 로마 시민권과 다른 권리는 동일하지만, 공직 선거권·피선거권(suffragio)이 없다. 이것을 Civitas sine suffragio(영어로는 Citizenship without suffragette)이라고 했다.[89] 이때 폼페이우스는 10대 청소년이었다![90]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큰아버지이다. 이 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생이므로 10살 남짓한 어린이였다.[91] 비잔티움 초기와도 겹치며, 476년에 고대가 끝났고 중세가 시작했다는 일반적인 통념은 학계에서는 지나간 옛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으며, 요즘 학계의 주류 의견은, 476년의 서로마 멸망에도 불구하고, 지중해권에서의 로마의 압도적인 위상으로 상징되는 고대는 끝나지 않았으며, 고대(정확히는 고대 후기(Late Antiquity))의 끝과 중세의 시작을 아랍인의 이슬람 정복으로 본다. 게르만족은 포에데라티로 로마군에 들어갔다가 조금씩 서로마 군부를 잠식해 들어가면서도 로마의 체제에 포섭되었고, 기독교를 믿었으며, 이후로도 동로마로부터 작위, 주화 시스템 등을 한동안 하사받거나 차용해서 쓰다가, 로마 시 및 교황으로 상징되는 구 서로마·라틴 문화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및 황제·총대주교로 상징되는 동로마·그리스 문화권이 지리적, 신학적, 문화적, 언어적, 종족적으로 점점 멀어지자 그 빈틈을 노려 전자를 후자에서 분리해서 자신들 쪽으로 포섭해가면서 조금씩 동로마의 종주권에서 독립해 나간 반면, 아랍인은 아예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체계를 창안한 후 로마를 완전히 극복하려 했다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92] 스페인 같은 곳은 국경에서는 멀었지만, 문명의 역사가 얕았다. 반면 레반트의 지중해 해안은 문명의 역사는 그리스와 로마 그 이상으로 깊었고 생산물도 풍부했으며 상업도 발달했지만, 동쪽의 이란계 국가와의 국경과 너무 가까웠다. 아미다 등 내륙의 국경기지에서 한 번 삐끗해서 뚫리면 안티오키아까지 바로 위험해졌던 때가 여러 번 있었다.[93] 카톨릭에서도 여기서 따와서 그대로 Dioecesis라는 용어를 쓴다.[94] 중국에서도 한나라 ~ 삼국 ~ 진나라 시기에는 삼국지의 '후한 13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주가 최상급 행정구역이었다가, 오호십육국과 남북조를 거치면서 수-당 대에는 한대의 군과 같은 규모로 축소되고, 도가 최상급행정구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참고로 도는 송나라 때까지 유지되다가 원나라 때 ~~행성으로 바뀌어 그 줄임말인 '성'이 명, 청, 현대중국까지 이어지고 있다.[95] 적나라하게 말해서 숨어있는 세금과 인력을 발굴해서 뽑아내는.[96] Diocese of Moesiae.[97] 한글로 적절한 번역이 아직 없지만 필요할 때는 이하에서 편의상 대관구로 칭한다.[98] 즉 이집트의 관구장은 황제 직속의 이집트 속주 총독(Praefectus Augustalis)의 후신이다.[99] 단 바로 위에서 보이듯이, 동급의 무관직인 Comes였지만.[100] 영어 위키백과의 Roman diocese 중, 'the vicars' responsibilities were progressively taken over, judicially and fiscally, by the reassertion of the two-tier prefect-governor direct governance policy as had existed prior to the early 4th century.', 즉 대강 번역하면 '4세기 초 이전 기존의 2단계 지방행정 체제가 다시 우세해지면서, 비카리우스 급의 법적·재정적 직무가 점점 (위로는 프라이펙투스에게, 아래로는 각 속주 총독에게) 넘어갔다'는 대목이 있다.[101] 여기는 금방 서고트 왕국에게 다시 뺏겼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워낙 멀기도 하고,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 비해서 중요성도 확실히 떨어지니만큼... 지형도 이탈리아는 남북으로 길쭉한데 비해 스페인은 원형이나 네모 비슷한 큰 덩어리라서, 상륙해서 해안 일부를 장악하고 나서 내륙 지역으로부터 들어오는 공격을 버티기에 훨씬 불리한 지형이다.[102]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Africae,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Africa.[103] 라틴어 Exarchatus Ravennatis, 영어 Exarchate of Ravenna.[104] 라틴어 Exarchatus Africae, 영어 Exarchate of Africa.[105] 외세에게 몇 십년에서 백 년 가까이 잃었다 다시 찾았기 때문에, 계속 로마령이었던 동로마 지역과는 구분해서 통치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06]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Orientis,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the East, 그리스어 Ἐπαρχότης τῶν πραιτωρίων τῆς Aνατολῆς. 이하 동로마 지역에는 그리스어까지 병기하나 서로마 지역에는 그리스어까지 병기하지 않기로 한다.[107] 라틴어 Dioecesis Orientis, 영어 Diocese of the East, 그리스어 Διοίκηση Ανατολής.[108] 이 때의 킬리키아 재정복에 대한 문서가 영어 위키백과에 따로 있다. Byzantine conquest of Cilicia[109] 라틴어 Dioecesis Pontica, 영어 Diocese of Pontus, 그리스어 Διοίκηση Ποντικής.[110] 라틴어 Dioecesis Asiana, 영어 Diocese of Asia, 그리스어 Διοίκηση Ασιανής.[111] 라틴어 Insulae, 영어 the Islands, 그리스어 ἐπαρχία νήσων.[112] 라틴어 Dioecesis Thraciae, 영어 Diocese of Thrace, 그리스어 Διοίκησις Θράκης.[113] 로마 시를 제외한 중요 도시의 시장은 프로콘술이었는데, 359년에 콘스탄티우스 2세가 콘스탄티노플 시장의 직급을 프로콘술에서 종전에는 로마 시에만 있었던 Praefectus Urbi로 올렸다.[114] 라틴어 Dioecesis Aegypti, 영어 Diocese of Egypt, 그리스어 Διοίκηση Αιγύπτου.[115]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per Illyricum,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Illyricum, 그리스어 Υπαρχία Ιλλυρικού.[116] 이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이 지역이 동서로마 중 어디에 속하는지 동서로마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지되고 있었다.[117] 동서로마 간의 세력 균형, Jirecek 라인 상 그리스 문화권보다는 라틴 문화권에 가까웠던 점, 이탈리아와 트리에스테-아퀼레이아를 통한 육로로든, 아드리아 해를 통한 해로로든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 역할 등.[118] 라틴어 Dioecesis Daciae, 영어 Diocese of Dacia, 그리스어 Διοίκησις Δακίας.[119] 라틴어 Dioecesis Macedoniae, 영어 Diocese of Macedonia , 그리스어 Διοίκησις Μακεδονίας.[120]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베 등 과거 네임드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두 모여있는, 그야말로 가장 좁은 의미의 그리스 되겠다.[121] 치소를 의미하는 동그란 빨간 점이 아테네가 아니라 코린토스에 찍혀 있다.[122] 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123] Praefectura praetorio Italiae,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Italy.[124] 영어 Diocese of Annonarian Italy, 라틴어 Diocesis Italia Annonaria.[125] 행재소 내지는 행궁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여하튼 서로마의 명목상 수도가 로마 시였다는 점은 서로마 멸망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126] '중부' 즉 로마 시와 그 주변지역도 여기 포함된다.[127] 영어 Diocese of Suburbicarian Italy, 라틴어 Diocesis Italia Suburbicaria,[128] 한국에서 특별시/광역시가 출신 도에서 독립하고 나서도 한동안 출신 도의 도청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현상은 경상북도청신도시를 마지막으로 모두 해소되었다.[129]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몰타는 시칠리아에 포함.[130] 지방자치단체 격.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방행정제도 개혁 이전 이탈리아가 본국으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누렸었을 때는 저 11~14개의 하나하나가 지방의 커다란 속주와 법적/행정적인 지위가 동급이었다.[131] 동맹시 전쟁에서 반 로마 연합이 이탈리아라는 국호를 짓고 독립을 시도했었지만 실패했다.[132] 라틴어 Dioecesis Africae, 영어 Diocese of Africa.[133]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Africae,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Africa.[134] 라틴어 Exarchatus, 영어 Exarchate. 대강 서방 지역에만 적용되는 민군합동 특수 행정구역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유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만 이 직제를 적용했고, 기존 동로마 영역에는 적용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대관구-관구-속주 직제를 유지했었기 때문.[135] 이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이 지역이 동서로마 중 어디에 속하는지 동서로마 모두에게 확실하게 인지되고 있었다.[136] 동서로마 간의 세력 균형, Jirecek 라인 상 그리스 문화권보다는 라틴 문화권에 가까웠던 점, 이탈리아와 트리에스테-아퀼레이아를 통한 육로로든, 아드리아 해를 통한 해로로든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안보를 위한 완충지대 역할 등.[137] 라틴어 Praefectura praetorio Galliarum, 영어 Praetorian prefecture of Gaul.[138] 영어 위키백과의 Praetorian prefecture of Gaul에 따르면 어떤 기록에서는 395년, 다른 기록에서는 407년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래의 갈리아 지도에는 아렐라테는 치소가 아닌 일반 도시였던 것으로 보아, 407년이 보다 맞다고 보인다.[139] 라틴어 Dioecesis Hispaniarum/Hispaniae, 영어 Diocese of Hispa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