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티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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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us Flavius Domitianus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출생지
로마
생몰년도
51년 10월 24일 ~ 96년 9월 18일
재위 기간
81년 9월 14일 ~ 96년 9월 18일
플라비우스 왕조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의 삶
2.2. 치세
2.2.1. 즉위 초반
2.2.2. 재위 중반
2.2.3. 전쟁
2.2.4. 황제권 강화와 자기 우상화
2.3. 암살
3. 성격
4. 평가


1. 소개


로마 제국의 제11대 황제. 두 번째 세습 황조였던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처음 박해[1]한 황제로 유명하며, 매우 과시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 탓에 원로원 의원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킨데다, 노골적인 공안, 공포정치로 정국을 운영한 이유 때문에 원로원을 비롯해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악랄하고 잔인한 황제로 대차게 까였다. 따라서 사후 대중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에는 폭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원로원, 지식인 등 로마 상류층의 평가와 별개로 당대 기사계급, 일반민중, 군대에게는 지지를 받은 황제였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 역사가들의 연구와 각종 로마사 관련 서적들을 통해 도미티아누스의 통치와 행정적, 국방적 성과가 인정받으면서, ‘잔인하고 악랄한 폭군’이라는 오명을 벗고 행정가로 상당히 뛰어난 황제로 재평가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즉위 전의 삶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둘째 아들로 51년 10월 24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위로는 11살이나 연상인 친형 티투스, 여자 형제인 도미틸라가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승진을 거듭해 로마 주류 사회에 편입된 이후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과는 성장 과정부터 많이 달랐다. 티투스가 소년시절까지 은수저조차 없는 가난한 평민 가정에서 자랐다면, 아버지가 집정관에 취임하기 한 달 전 태어난 도미티아누스는 로마 상류층 자제로서 갖춰야 하는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서민적 풍모, 형 티투스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달리 소년시절부터 귀족적인 풍모를 가지고 있었고,[2] 황제 즉위 전까지 형과 달리 군복무를 경험하지는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사후 벌어진 내전 당시 로마에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비텔리우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큰아버지 사비누스와 함께 유피테르 신전 안으로 도망쳐 밤새 관리인 숙소에 숨어 있다가 변장을 하고 탈출해야만 했다. 이후에도 추격을 받다가 어머니의 친구 도움으로 여러 번 목숨을 구했다. 얼마 뒤 아버지가 내전 승리 후 황제가 되자 로마를 관할하는 수도 법무관에 올랐다.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명장 코르불로의 딸이자 아일리우스 라미아의 아내였던 도미티아 롱기나를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이미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의 지위를 가지면서, 아들이 없던 형 티투스의 후계자로 선언된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황제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이미 6차례나 집정관을 지내는 등 제왕 교육을 받아서, 형 티투스가 황제가 된 뒤에 아버지 생전 형이 누렸던 호민관 특권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티투스가 예전부터 동생에게 집정관을 양보하는 등 배려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줬기에 가능한 요구였다. 그러나 티투스는 동생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를 적대해 제위에 오른 뒤 티투스의 신격화 허용 외에는 어떤 영예도 수여해주지 않았다. 아울러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도 모호한 표현으로 티투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 형의 요절 당시 죽음의 배후일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왔다.

2.2. 치세



2.2.1. 즉위 초반


도미티아누스는 티투스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예정대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의 황제들처럼 파트리키가 아님에도 워낙 귀족적이고 지나치게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했다. 이는 타고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성격과 행동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들과 많은 부분에서 비교된 아버지, 형과 많이 달랐다. 즉위 직전에는 이런 모습을 자제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와 형이 죽은 뒤 아버지의 정부 카이니스[3]가 해방노예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상시와 달리 입맞춤을 거부하고 손등을 내미는 행동을 저질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과 행동 모두 뻔뻔하고 무례해 젊은 시절부터 상냥한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받았다. 또한 아버지, 형과는 달리 제국 통치에 필요한 실무 경험이나 군사 경험이 없는 채로 즉위했기에 실무적인 약점이 뚜렷했다.

2.2.2. 재위 중반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부터 도미티아누스 경기장, 네르바 포룸[4][5][6]의 공사를 시작하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축을 시작한 콜로세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 100년 만에 로마 병사들의 급여를 인상하였다. 또한 라인 강도나우 강 사이 군사상 취약지점인 슈바르츠발트를 로마 영토에 편입하고 그곳에 처음으로 게르마니아 방벽을 세워 국경선의 방어를 더욱 강화시켰다. 또한 법집행과정을 공정하고 엄격히 하도록 노력했으며, 공공도덕을 강조하고 유죄로 판결난 사건들을 꼼꼼히 검토해 억울하게 유죄가 된 사건들을 취소시키고 돈에 매수되어 판결을 뒤집은 배심원들을 처벌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이르게 된 이후 로마는 행정관과 속주 총독들의 성실성과 청렴도가 상당히 높아졌고, 로마 일반 시민들에게 축제를 제공하는 등 선심성 정책들을 많이 베풀어 평가가 괜찮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점점 원로원과의 관계가 악화되어가면서 통치에 그늘을 드리웠다. 이는 원로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기사계급을 더 중용한 탓도 컸지만, 도미티아누스의 개인적인 성격과 행동 탓도 컸다. 도미티아누스는 스스로 사치가 심했는데, 그럼에도 타인(특히 원로원과 부자들)에게 유독 엄격했다. 그는 풍속과 도덕적 양심을 이유로 임페라토르 스스로 이를 바로잡아야 된다는 사명감 아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원로원 의원들의 사생활까지 간섭하고 그리스 문화에 심각하게 빠진 나머지 동성애를 즐긴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풍속 위반 혐의로 처벌했다. 아울러 그는 베스타 처녀 사제 중 최고 사제 코르넬리아를 비롯한 총 4명의 여사제들을 근친상간과 맹세위반 혐의로 처벌했다. 따라서 코르넬리아는 여러 명의 애인을 뒀다는 혐의로 생매장이라는 로마에서 거의 사라져간 전통처벌방식으로 죽고[7],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된 세 여사제는 스스로 사형방식을 선택받아 살해됐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소 플라니우스, 타키투스 등에게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허세가 심하다고 혹평을 들었는데, 실제로도 로마 상류층에서 도미티아누스는 평판이 굉장히 나빴다. 하지만 이런 평과 별개로 도미티아누스의 대대적인 풍속, 도덕 교화정책에서 모든 로마인들에게 훌륭하다고 평가받은 것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부 극소수의 부자들이 집안 남성노예를 거세시켜 환관처럼 만드는 불법행위 처벌이었는데,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단호하고 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를 금지하고 어길 시 정한 규칙대로 무관용 처벌했다. 또 도미티아누스는 그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던 타키투스수에토니우스의 평가처럼 공적 업무를 볼때 양심적이고 성실한 황제였다. 그래서 원로원에서는 그를 독재자라고 미워했음에도 자애로운 성격도 갖고 있다고 평했다.

2.2.3.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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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콜라 원정 칼레도니아의 육상 해상의 진출로를 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진출로와 요새를 말하고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는 즉위 전부터 수많은 전투경험과 군사적 업적을 가진 황제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전부터 치세 내내 유독 군사적 업적이 없었고, 군무경험조차 부족했다. 따라서 스스로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로서의 책무를 중요시 여긴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직후부터 군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황실 예산의 많은 부분에 꾸준히 국방비를 측정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두 번째로 로마군의 임금 인상을 확정해 이를 실행했다. 그 결과, 국방비의 대부분은 병사들의 연봉 인상과 복지 향상에 책정되어 집행됐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는 83년 게르만족 분파 중 하나인 차타족과의 전투 승리를 기념한 정식 개선식을 로마에서 거행했고, 원로원으로부터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존칭을 받았다. 하지만 이 존칭은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선사한 존칭보다는 황제가 너무 원해서 얻어낸 칭호였고, 도미티아누스는 전쟁터에서 로마군을 이끌고 원정조차 제대로 참전하지 않았음에도 개선장군이 된 이유 때문에 존칭을 받은 모양새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원로원에서는 즉위 직후부터 아니꼬웠던 도미티아누스가 반강제식으로 얻어낸 이 칭호를 자랑스러워 한 것을 놓고 쓴웃음을 지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치세에는 명장 아그리콜라가 활약했다. 아그라콜라는 브리타니아에 파견되어 히베르니아(아일랜드)까지 탐험과 토벌전을 나가 이름을 남기고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를 합병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때마침 멀리 떨어진 본국의 도나우 강 지역에서 여러 군단과 군사를 잃어, 85년 로마로의 귀환을 명령받아 합병을 앞두고 정벌 도중 그간 수년간의 고생길이 무색하게 빈손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85년, 도나우 강 북쪽의 다키아족이 로마로 쳐들어오자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족과 전쟁을 벌여 우여곡절 끝에 88년 다키아족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89)에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이로 인해 후의 황제가 되는 트라야누스가 등장하게 된다. 이 반란의 경우 사투르니누스가 죽기 전 증거를 소각하는 바람에 증명되지는 못했으나, 밀고자를 대거 고용하고 재무관직에 종신 취임하면서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불만을 품은 원로원 반대파들이 뒤에서 사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로 인해 원로원과 도미티아누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다키아를 완전 섬멸할 것으로 기대한 것과는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와 강화를 체결하여 로마인들을 실망시켰다. 특히 로마인들은 포로가 된 병사들을 돈으로 구해낸 것에 분통을 터트렸다. 물론 도미티아누스에게도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키아와 싸우는 사이에 도나우 강 유역에 거주하던 야만족들이 로마로 쳐들어올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다키아와 다른 야만족들과 동시에 전쟁을 치루기는 무리라고 판단한 도미티아누스는 일단 다키아와 강화를 맺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키아와의 강화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결정적으로 민심이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2.2.4. 황제권 강화와 자기 우상화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초반을 제외하고 꾸준히 원로원에게 나쁜 평가를 받았다. 이는 그가 매우 비타협적이고 단호했던 성격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황제권을 강화시키면서 자기 우상화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먼저 그는 이전 여느 황제들보다도 원로원을 대놓고 빈 껍데기로 여기고 황제는 원로원의 말을 충고하고 존중만 해주면 된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줬다. 이는 이전까지 원로원과 관계가 틀어졌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나 치세 중반 이후의 네로조차 하지 않은 방법이라서 당하는 원로원에서는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네"라고 생각했고, 굴욕감까지 느꼈다. 여기에 더해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원로원보다 황궁 내 관료들에게 실권을 부여하고, 늘 중요 정책을 새롭게 건설한 황궁 안에서 관료들과 처리한 뒤 원로원에 명령조로 통보하는 방식을 일관했다.
그러면서 그는 황궁 관료사회와 원로원에 지속적으로 속주민들을 수혈하면서 새로 들어온 속주민들에게 큰 역할을 부여했다. 따라서 많은 속주민들이 도미티아누스 시대동안 귀족, 기사계급으로 편입됐는데[8], 이 중에서 대부분은 그리스 출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때 황제는 노골적으로 그리스 출신들에게 집정관 자리까지 여러 차례 추천해 당선시켰는데, 이는 자연스레 원로원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그런데 이런 황제권 강화보다 원로원에게 더 모멸감을 느끼게 한 것은 바로 황제의 한결같은 언행이었다. 즉위 직후 몇개월을 제외한다면 도미티아누스는 늘 원로원에게 역대 황제들처럼 "원로원 여러분"이라는 존중 표현조차 없었고, 늘 상대를 존중하는 말은 모두 생략한 뒤 사무적이고 명령조로 말했다[9]. 그런데 이는 원로원 뿐만 아니라 속주 총독과 황실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까닭에 지나치게 나쁜 평판을 듣게된 이유가 됐다.
아울러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자신을 지칭할 때 높였고, 원로원에게 자신을 부를 때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인이시자 신(神))'라고 부르게 했다. 그리고 그는 늘 원로원과 고위관료들이 자신과 접견하거나, 황제 자신이 이들을 대상으로 공식연회를 베푸는 공간을 황궁으로 정한 뒤 예법을 만들어 운영했다. 또 그는 역대 황제들과 달리 여러 첩들을 공개적으로 뒀고, 이와 관련해 자신이 첩들과 침대에서 레슬링을 한다는 등의 발언을 주변에 한 까닭에 이 부분에서도 큰 비난을 받았다. 이는 이전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고 한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었고, 이전까지 가장 귀족적이었고 사생활이 난잡했다는 소리를 들은 네로조차도 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이런 도미티아누스의 고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언어선택과 행동은 무시와 퉁명스러움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자신의 저서 <아그리콜라>에서 "네로조차도 자기가 명령한 추악한 행위를 목격하는 일을 삼갔다."고 맹비난했다.
이 외에도 그는 원로원 입회때마다 늘 개선장군 복장을 착용하고 등장했으며, 9월과 10월을 자신이 원로원에게 부여받아 사용을 허가받은 존칭과 자신의 이름을 넣어 게르마니쿠스(9월), 도미티아누스(10월)로 부르도록 일방적으로 바꿨다.[10] 또 원로원 의원들의 비리를 감시하는 '델라토르 제도'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런 그의 정국 운영은 원로원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런 양측의 갈등 관계는 85년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종신 재무관직에 취임하면서 결정적으로 폭발했다. 재무관은 국세조사를 담당하는 직책이었지만 또한 원로원 의원을 추방할 권한도 있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의 종신 재무관 취임은 원로원 의원들은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아누스는 반역죄를 활용함에 있어서도 이전 황제들보다 뻔뻔하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데다 숙청대상 역시 광범위한 탓에 원로원에서 불만이 상당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숙청하기로 결정한 자신의 재산관리인, 전직 집정관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반역죄로 죽이기 전 이들에게 상냥하게 굴고 인내심을 시험한 뒤 십자가형으로 죽이거나 과거 죄인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사형시켰다.[11] 아울러 이전보다 잔인한 방법의 취조 방법과 고문법[12]을 개발해 정적들의 주변 사람들을 고문해 증거를 얻어내고, 이를 증거삼아 정적을 고발한 뒤 사형을 언도하는 방식으로 제거했다. 이런 까닭에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됐고 회복불가수준으로 치닫게 됐다.

2.3. 암살


상술했듯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위상에 상당히 공을 들였고 본인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그래서 자신이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마다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다. 또한 경기시 동료 심판들에게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쓰게 해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자신이 우월함을 홍보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과 관계가 악화됐는데, 이를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85년 스스로 종신 감찰관에 취임해 고발을 남발하면서 원로원과 제국 내 장군들을 지나치게 통제했고, 늘 개선식 의상으로 원로원에 출입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모든 부분에서 로마 상류층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렇게 원로원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파들과 척을 지고 있으면서, 도미티아누스는 자주 주인(도미누스)이자 신인 짐이 하찮은 너희들에게 이렇게 명하노라.[13]와 같은 발언들로 반대파들을 자극했다. 따라서 원로원 내에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불만은 상당히 컸고, 실제로 이런 평판은 도미티아누스가 생전 정적들을 고발하고 제거하는 일들과 합쳐져 암살된 뒤 ‘폭군’으로 단죄된 이유가 되었다.
사실 도미티아누스 역시 이런 상황을 잘 알아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암살에 대비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호위를 강화하고 자신의 배게 밑에 늘 호신용 검을 두고 잤는데, 이런 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96년 9월 18일 황궁 안에서 암살됐다. 황제는 시종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됐는데, 처음 일격을 당할 당시 배게 밑에 숨겨 놓은 검이 없자[14] 하인들에게 칼을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고 침실을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도미티아누스는 맨손으로 스테파누스와 싸워야 했다, 이때 도미티아누스가 얼마나 처절하게 저항했는지 칼에 손이 베인 상황에서 부상당한 손으로 암살자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후벼 파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치명상을 입고 44살의 나이에 죽었다. 시신은 도미티아누스를 아기 때부터 키워준 유모가 수습해 화장한 뒤 조카딸 율리아의 무덤에 재를 섞는 방법으로 매장되었다. 유모의 이 행동 때문에 후일 도미티아누스가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을 황후 도미티아가 알게 되어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많다, 도미티아가 이후 재혼하지 않고 남은 평생을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라고 말하며 수절하는 등 부부 사이가 좋았다는 증거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 암살극의 이면에는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위에 나온 것처럼 반론도 있지만)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가 있었으며,[15]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도미티아누스에게 "기록말살형"을 선고했다.[16] 그러나 시민들은 무관심했고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네르바에게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협박했고 스테파누스, 파르테니스 등 암살자들을 끌어내 처형했다.[17] 그 외에 공화정으로 복귀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군대가 제정이 공화정보다 낫다며 무산시켰다. 어쨌든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27년 만에 붕괴되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3. 성격


도미티아누스는 책임감이 강하고, 일반 민중이나 속주민들에게는 자애롭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교성이 지나치게 부족했고, 사색적이었으며 의심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 형과 달리 사람들과 밤 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게 새로운 황궁에 투명한 흰 대리석 주랑들을 만들어 일렬로 세우도록 했다.
그러나 여러 부분에서 티베리우스와 비슷해보여도 많이 달랐다. 티베리우스는 혼자놀기를 좋아했어도 어린시절부터 로마, 그리스 문학을 좋아했고 자신이 좋아한 그리스 문학가의 필체로 시나 문학을 짓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 그는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 네르바로 대표되는 소수의 부랄친구나 일부 가족들[18]과는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를 진짜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처럼 태생적으로 과묵하고 수줍음이 많은 폐쇄적 성격이 아니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취미가 딱히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자기 우상화에 관심도 없었고, 원로원이 이를 먼저 제안했어도 늘 완강하게 거부했다. 또 그는 가계 전체가 파트리키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박함과 투박함을 선호한데다, 여자문제나 사생활에서도 정적들이 공격할 만한 것이 딱히 없었다[19].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어린시절부터 매우 귀족적이고 화려함을 선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이가 먹을수록 더 귀족적이고 화려해졌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달리 자기애가 강렬했던 칼리굴라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자기를 높이는 성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나 아버지, 형과 달리 유머 감각이 매우 없었고 유머에 큰 관심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는 부분에서도 얼핏보면 두 사람은 비슷했는데, 여기에서도 차이가 분명했다. 티베리우스는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 엄격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엄격한 성격이었다고 하도 자신과 타인을 구분해 엄격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스타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차가운 짠돌이, 잔정도 없는 구두쇠로 로마민중과 원로원에게 비난받았고, 도미티아누스는 민중들과 일반군인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어도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로마 엘리트 지식인들에게는 더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는 경호대를 대동해 저녁식사 후 산책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취미도 없었고, 취미라고 해도 자신의 책무에 더 몰두하거나 첩들의 털을 뽑는 가학적 취미 등으로 더 유명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정적이나 원로원에게는 사치가 심하고, 잔인하고 변태같은 인간으로 치부됐다. 반면 적어도 로마 내에서 나름 중립적이라는 이들에게 자기애가 강한 사람임에도 퇴폐적이고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4. 평가


도미티아누스는 당대에는 폭군으로 여겨졌고, 기록말살형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행정 능력 등이 재평가되고 있고 그가 황제로 기록말살형을 받을 정도로 어떤 악행을 벌였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의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황제로 평가받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두 황제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에 비해 원로원 외 다른 로마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기록말살형을 선고받을 만큼 폭군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성격적, 행동적 결점이 분명한 까닭에 원로원과의 사이가 아주 나빴고, 이는 그가 당대부터 필요이상 욕을 먹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그는 자신을 우상화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정치 조율 능력은 떨어졌기에 재위 4년여 만에 원로원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근위대장과 일부 근위대의 배신으로 암살당한 칼리굴라와 많이 비슷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와 달리 자기절제가 상당했고 위엄과 절제를 강조한 황제였다. 또 행정적 능력이 재평가된 황제답게 미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티베리우스와 통치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는 매우 비슷했다고 말했고, 도미티아누스는 전반적으로 원로원 관계가 두 사람과 일정부분 비슷했다. 특히, 도미티아누스는 여러 부분에서 티베리우스와 비슷했고 그를 참조했다. 따라서 간단히 보급형 티베리우스 또는 업그레이드된 칼리굴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재평가받고 있는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도미티아누스 역시 일반적인 로마 역사상의 폭군과는 달리 로마 제국을 안정시키고 발전시키려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던 황제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었음에도 자신에 대한 우상화 등으로 필요 이상의 적을 많이 만들었으며 티베리우스 통치기 중 후반기처럼 정국을 끌고 갔다. 그 결과, 그는 실패한 황제가 되고 말았다. 이 당시, 원로원과 달리 근위대 및 군단병으로 대표되는 군부와 적극적으로 기용한 기사계급, 그리고 로마의 서민층에서 도미티아누스의 인기는 상당히 높았다. 특히 국방면에서 보면 아우구스투스 시절 게르마니아 지역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기존 로마의 영토정책의 개혁을 추구하여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많이 비교되는 티베리우스에 비해 여러모로 떨어졌고 적이 너무 많았다.
도미티아누스는 재평가 이후에도 정치, 행정, 군사적 경험이 많고 정치적 계략도 먼치킨이었던 티베리우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부족한 능력을 지닌 황제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를 몇가지 살펴보면 먼저 도미티아누스는 즉위 당시 너무 경험이 없었다. 이 부분은 티베리우스의 후임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비슷한 부분인데, 문제는 도미티아누스는 복점관 같은 정치와 무관한 관직 외에는 원로원이나 군대를 다룬 적이 없는 가이우스처럼 아버지와 형 곁에서 예비후계자 임에도 명예만 있을 뿐 경험이 없었다.
그의 평가가 안 좋았고, 티베리우스와 비슷했다고 해도 혹평을 들은 또 다른 이유는 친형 티투스와의 관계 및 형과의 비교도 있었다. 아버지 생전부터 차기후계자 중 한명으로 각종 명예, 훈장을 수여받고 관직을 경험한 도미티아누스는 항상 친형 티투스보다 후순위였다. 그런데 이는 비타협적이고 자기애가 강한 그가 형과 냉담한 관계로 치닫는 원인 중 한가지가 됐다고 한다. 따라서 형제 관계는 냉담한 사이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형 티투스가 즉위 후 그의 무리한 요구를 절차 등을 들어 거부했던 일과 도미티아누스가 즉위 후 형에게 보인 태도는 이런 비교를 더 돋보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독살설의 배후가 도미티아누스라는 말도 안 되는 풍문까지 나오게 했다. 여기에 더해 형 티투스가 어린 시절부터 로마 상류층의 예법을 익힌 것과 반대로, 즉위 전까지 궁중 교육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귀족적인 사내임에도 거만하고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 부분에서 매우 단점이 뚜렷했는데, 이는 서민적이었던 아버지, 즉위 전까지는 냉혈한 같았지만 즉위 후 모든 로마인들에게 따뜻함과 공정함으로 사랑을 받은 형과 자연스레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많이 참조한 티베리우스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짠돌이 군주였어도, 최소한 원로원에게 공허한 절차와 예의는 항상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의 평가가 고대부터 나빴던 또 다른 이유는 그와 많이 비슷했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처럼 냉혹한 정국 운영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부분은 그가 최악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더 비난받은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무시와 자기강조가 컸다. 하지만 상술했듯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와 달리 매우 절제적인 군주였고, 확실히 티베리우스와 비슷했다.
도미티아누스와 많이 비교된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공포 정치를 했어도, 10대 때부터 양부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제국 전역에 파견돼 공적을 쌓았고 그 능력을 정적들조차 이미 인정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는 일평생을 로마에 머물면서 통치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즉위 전부터 군사적, 정치적, 행정적 경험이나 성과 역시 또래나 연배가 많은 인사들과 비교해도 아그리파 등 극소수 외에는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풍부했다. 즉, 당대에 티베리우스보다 많은 경험과 실력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즉위 후에도 그보다 제국 전체를 손바닥 꿰듯 알고 미래까지 예측해 장기적으로 정책 전체를 마련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또한 이 황제는 본인의 능력도 출중한 상황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후계자였다고 해도, 어찌되었던 간에 실력으로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로마의 일인자가 된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번째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지위도 전임자의 친혈육들이 여러 이유 때문에 부족해서 물려받았다고 해도, 어머니는 리비아 드루실라였다. 또 이미 로마 사회에 악티움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에서 12살의 나이에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로 소개된 뒤 개선마차 위 개선장군 왼쪽에 같이 타는 방식으로 데뷔하고, 마르켈루스 생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생뚱맞게 양자로 입적된 인물이 아니었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이런 티베리우스와 다르게 즉위 당시부터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간 뒤 충성 보너스를 지급하고 오르는 모양새로 즉위했고, 후반기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이나 정적을 제거할 때, 본인이 이를 대놓고 담당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공통점이 많은 그와 다르게 대놓고 뻔뻔하고 강압적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고, 황족, 황실 관료들까지 숙청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판을 깎아 먹었는데 설상가상 치세후반부터는 편집증 증세까지 나타나고 사치까지 심해졌다.
이는 매우 엄격했어도 시종일관 공사 모두 한결같았던 자신의 우상과 대비됐다. 또 티베리우스는 이런 분위기가 재위 후반, 특히 세야누스가 야심을 표출하면서 터진 세야누스 숙청 사건 이후 시작됐던 황제라서 여기에서도 안 좋은 소리가 나왔다. 티베리우스는 당대 사람들에게 그토록 비난받은 은둔정치 당시 세야누스에게 실권을 넘겨줬다고 해도, 모든 결정은 티베리우스가 직접 내렸고, 군권은 본인이 장악한 상태였다. 즉 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스스로 제어할 수 있었고, 원로원과 사이가 험악했어도 이 부분 역시 본인의 역량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었다. 이는 도미티아누스도 비슷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도미티아누스처럼 황제 본인이 원로원에 출석해 직접 상대를 반역죄로 고소하거나, 때론 상대를 안심시킨 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거나 고문까지 개발해 정적을 대놓고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카프리 섬이나 나폴리에 머물면서 세야누스 숙청 이후 확실한 이유로 원로원 동의 아래 정적을 고발하고 숙청했으며, 대부분의 친혈육을 세야누스에게 잃고 독이 바짝 오른 상태에서도 원로원에게는 매몰차게 서한장을 보내도 항상 "원로원 의원 여러분" 같은 존칭을 사용하면서 최대한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본인이 직접 고소하거나 상대를 공격하면서도 그 범위가 원로원 내에서 너무 광범위했다. 또 업무 역시 원로원을 대놓고 무시하고 황궁 안에서 처리한다던지, 아니면 원로원까지 아랫사람 다루듯 사무적이고 명령조로 말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 같아도 당하는 입장에겐 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의 정적 숙청 과정은 세야누스 사건 이후, 황제이자 친족을 위한 복수를 위한 피해자 자격으로 이뤄졌는데, 지나치게 공포분위기를 조장했다고 욕을 먹었어도 원로원 입장에서는 확실히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원로원 입장에서 보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처럼 음험하고 냉혈한로 비춰졌어도 본인이 원로원에 출석해 직접 상대를 고소하고 그 과정도 잔인한데 이유도 말 그대로 기강 잡기 같은 이유라서 "음험하고 거만한데다 잔인하다"며 욕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 모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차갑고 거만하다고 소리를 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여기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었고 이 부분은 두 사람의 평가가 크게 엇갈린 이유가 됐다.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와 다르게 로마군 월급 인상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자신과 비교된 사람과 달리 빵과 서커스 제공도 많이 한 황제라서 상류층에겐 최악이어도 일반 병사들과 군부, 서민들에게는 매우 공정하고 자애로운 황제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본인 스스로 우상화를 거부할 정도로 본인과 타인 모두에게 차갑고 엄격했고 본인 스스로도 사치와는 거리가 멀어 기본적으로 '차갑고 거만한 짠돌이', '잔정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더 까였지, 도미티아누스처럼 상류층 전체에게 평판이 최악은 아니었다. 즉, 기록상 평가를 내리는 원로원, 교양인들에게 도미티아누스는 개인적 결함으로 티베리우스보다 인자했어도 평판은 나빴다.
이런 차이점은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전임황제들과의 여러가지 차이점 중 자신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따라서 즉위 후 티베리우스의 정책 등을 많이 참조하고 활용해 약점을 메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경험부족은 기록이나 정책을 참조해 진행하더라도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로서의 책임감과 별개로 성격적으로 의심이 많고 칼리굴라 이상으로 자기애가 대단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살아 생전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거부한 티베리우스와 달리 스스로를 노골적으로 우상화시키고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필요 이상으로 원로원과 대립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경험이 전무한 탓에 아그리콜라같은 명장도 휘하에 두었음에도 다키아 전쟁 등 여러 군사적 사안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국경 확장에는 실패했다는 비판을 듣게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세습왕조의 마지막 황제, 특히 암살로 제위를 잃은 황제들이 그렇듯 다음 황제와 그 왕조의 정통성과 명분 때문에 근대 이후 학자들에게 지극히 저평가되고, 폭군이 됐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의 성격, 행동 문제가 큰 결점이라고 해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평화는 전임자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제국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실이며, 도미티아누스의 행정적 성과로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과시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잔인한 황제였다. 따라서 자기과시로 점철된 사치, 잔인함, 편집증에 시달린 독재자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고, 이런 실패들이 업적보다 주목을 받으면서 이 사람의 치세 결과는 암살과 기록말살형이라는 불명예로 끝났다고 평가받는다.
[1] 이쪽으로는 네로가 더 유명하고 시기적으로도 앞서지만, 네로는 대화재 때문에 우발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다면,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숭배에 저항하는 기독교를 박해했다는 목적성에서 차이가 있다.[2]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자신이 잘생겼다는 것을 대놓고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들며 뱃살이 나오고 탈모까지 오자 가발을 썼다고 한다. 외모 집착과 대머리 콤플렉스가 심해서 직접 <모발 관리에 대하여>라는 책까지 집필했다.[3]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내와 사별한 뒤, 사실상 아내였다. 카이니스는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소 안토니아의 해방노예 출신이었다.[4] 물론 당연히 건설 당시에는 이 이름이 아니었다.[5] 짧은 재위를 했던 네르바의 이름으로 남는 행운을 누린 건축물로 원래는 도미티아누스 때 착공된 통로 포룸(카이사르 - 아우구스투스의 포룸 사이의 공간)으로 포로 로마노에서 베스파시아누스 포룸으로 가는 통로였다.[6] 도미티아누스가 건설을 시작한 포룸이지만 네르바가 즉위해 사망까지의 기간동안 완공이 되었고,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을 당해서 네르바의 이름이 붙는 행운을 누렸다.[7] 코르넬리아의 애인들로 지목받은 이들은 모두 포룸에서 전통방식대로 매를 맞아 죽는 개죽음방식으로 처형됐다.[8] 대표적인 인물로는 트라야누스 부자,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친가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 등이 있었다.[9] 원로원과 사이가 나빴던 이전까지의 황제들은 감정대립을 하거나 관계가 험악했어도 늘 원로원에게 존중이 담긴 말을 했다.[10] 여담이지만 도미티아누스 자신이 롤모델로 삼고 그렇게 행적을 탐독했던 선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정작 7월(율리우스), 8월(아우구스투스)에 이어 9월을 자기 이름으로 하는 걸 거절함으로서 관행을 끊어버렸다. "황제가 12명이 넘으면 어떻게 할거냐?"라는 일침도 함께. 해석하기에 따라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를 '참고'한 것이며, 원로원을 깔아뭉개는 데는 한술 더 떴기 때문에, 되려 이 일화를 알았기 때문에 9월과 10월을 자기 이름으로 삼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기록말살형에 따라 도미티아누스 사후 9월과 10월은 원상복구 되었다. [11] 숙청이 결정된 자신의 재산관리인을 구슬리며 뻔뻔하게 자신이 주최한 저녁식사 자리에 손님으로 초대시켜 융숭히 대접하고 온갖 말로 안심시킨 다음 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또한 아레키누스에게는 함께 여행가자고 말한 뒤 친구로 잘 대해주다가 돌아온 뒤 반역죄로 죽였다.[12]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항문에 불붙은 막대기를 삽입하는 고문법을 개발했다고...[13] 이 시기만 해도 황제 신격화 및 숭배는 로마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서 오히려 속주민들을 대상으로 장려했을 정도다. 이 현상이 공식적으로 정착한 것은 200여 년 뒤 도미나투스(전제정) 체제 성립 이후의 일이다.[14] 스테파누스와 공모한 하인 파르테니스가 검을 치워버렸다.[15] 이들의 철저한 사전모의 속에서 암살이 이뤄졌기 때문에 암살자들이 황제의 침실을 습격했던 날, 도마티아누스는 무방비 상태로 암살됐다.[16] 로마 상류층에게 가장 불명예스런 형벌로, 고인이 생전에 이룩한 모든 업적에 대한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 벌은 원로원의 화풀이에 가까운 것으로, 네로도 이 벌을 받았으며 말년에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진 하드리아누스도 사후 다음 황제였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원로원을 설득하지 않았으면 이 벌을 받을 뻔했다. 의외로 칼리굴라는 이 벌을 받지 않았다. 사실 칼리굴라가 이 벌을 받지 않은 것은 암살 직후 워낙 상황도 급박했고 근위대의 지지를 업은 황숙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컸다. 특히 암살에 참여한 이들이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제거된 직후 상황 정리 속에서 원로원이 서둘러 이 문제를 덮고 넘어가려 했기에 그러했다. 다만 도미티아누스가 완성한 플라비우스 경기장을 만든 사람이 도미티아누스라고 쓰여진 석판만큼은 경기장을 지은 것을 감사히 생각한 시민들이 결사적으로 막아서 지우지 못했다.[17] 도미티아누스는 군대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이유는 도미티아누스가 카이사르 이후 처음 군인들의 급여를 올려주었기 때문이다.[18] 젊은 시절에는 연애결혼으로 맞이한 첫 아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친동생 대 드루수스 부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쉬는 날 대부분을 보냈고 나이를 먹은 후에는 조카와 아들 내외 정도였다고 한다.[19] 당대, 후대 로마인들이 지적했듯 너무 깨끗해서 재미없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평생 순결을 맹세한 베스타 여사제 수준이라고 반놀림을 당할 정도였다. 그래서 현대 학자들은 티베리우스를 공적, 사적으로 너무 엄격한 청교도적인 로마 황제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