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남

 





1. 개요


동인에서 분당한 남인에서 다시 분당하여 청남이 되었다.

2. 상세


조선 숙종조 초 남인(南人) 내에서 분파된 세력의 하나이다. 허적권대운을 영수로 했으며 서인의 처벌의 온건한 입장이였다. 또한 자신들의 군사권 장악을 비판하는 청남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18세기 초 남인이 다시 문내파(門內派)·문외파(門外派)·과성파(跨城派) 등으로 나뉘었는데, 문내파가 탁남을 계승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탕평책이 진행된 영조대 이후 정치에 참여하면서 남인의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청남과는 다르게 인조반정 후부터도 중앙에에 진출했던 허적권대운을 영수로 한다. 또한 군사권 장악을 계속 시도했는데, 대표적으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다시 설치함으로써 청남으로부터 쎈 강도의 비판을 받았다.
현종갑인예송남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어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의 여당화가 진행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소수 세력으로 정권에 참여하였던 남인 세력이 처음으로 정권을 장악한 것이었다. 한편 정권을 잡게 된 남인은 서인 세력의 축출에 힘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현종기해예송의 책임을 물어 남인송시열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여당의 분열은 필연적인지 남인 내부에서 분열 양상이 나타났다. 청남과 탁남으로의 분열로 주원인은 서인의 처벌 문제에서 청남은 강경파였고 탁남은 온건파였다. 또한 국방 정책 등에 대한 입장 차이도 분열의 원인 중 하나이다.
남인 내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 남인 내에서도 당파 간 당쟁의 심각성을 경계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1]. 이런 상황에서 청남은 탁남의 군사권 장악 움직임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숙종 초 남인들은 훈련도감/어영청 등의 현 국방부를 김석주 등 권신/척신들이 장악하자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군권을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다시 설치하며 세웠다. 그러나 탁남의 허적이 부의 최고인 체찰사가 되자. 청남은 탁남의 군사력 장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결국 숙종 6년인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탁남이나 청남이나 남인 계열 전체가 상당한 인적 손실을 경험하였다.
숙종 15년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잠시 남인이 정권 교체를 했으며 정국의 주도권 역시 청남이 아닌 탁남이 가지고 있었다. 다만 민씨(閔氏)·권씨(權氏)·유씨(柳氏) 등 일부 가문이 국정을 주도했다. 숙종 20년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또다른 타격을 입었으며 앞 시기 정국을 주도한 탁남의 희생이 상당히 심했다. 사실상 청남으로 흡수되었다.
18세기 초 남인은 다시 문내파·문외파·과성파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때 탁남은 주로 문내파로 결집하였으나, 이후 청남 계열이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과는 달리 탁남은 위상이 격하되었다.

3. 주요 인물


  • 허적[1]
  • 권대운[2]
  • 민희(閔熙)
  • 김휘(金徽)
  • 민점(閔點)
  • 목내선(睦來善)
  • 심재(沈梓)
  • 권대재(權大載)
  • 이관징(李觀徵)
  • 민종조(閔宗道)
  • 이당규(李堂揆)
  • 이우정(李宇鼎)
  • 최문식(崔文湜)
  • 모호한 인물[3]
    • 이하진(李夏鎭)
    • 이담명(李聃命)
    • 이옥(李沃)
    • 조위명(趙威明)

4. 둘러보기



[1] 다만 청남, 서인과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2] 경신환국 때 사망하지 않고 기사환국 때 복귀했다.[3] 실록의 기록으로는 양다리를 걸쳤다고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