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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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
2. 관련 항목


1. 일생


許積(1610~1680)
조선 후기의 문관, 학자, 정치인. 자는 여차(汝車). 호는 묵재(默齋), 휴옹(休翁). 시호는 숙헌(肅憲). 허견의 아버지.
인조~숙종 시기에 활동한 남인파의 중진. 주로 관료적인 입장에서 남인의 온건파인 탁남파를 이끌었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재야에 있다가 올라와서 청류를 자처한 남인 청남파의 허목, 윤휴, 윤선도하고는 같은 남인인데도 갈등하였다.[1]
1671년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당시 주류 세력이던 서인 송시열의 배척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1674년 2번째 예송인 갑인예송에서 1년간 상복을 입는 기년설을 주장했는데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 때 남인은 서인에 대해 강건한 입장의 청남과 온건한 입장의 탁남으로 갈라졌는데 허적은 탁남의 영수로 활동했다. 1678년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유통시킨 것도 허적.
남인의 종주로서 중량감이 있어 서인을 견제하려는 현종의 총애를 받았으나[2] 숙종은 커져가는 남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경신환국을 일으키면서 허적은 실각한다. 거기다 아들 허견이 복선군역모를 꾸미던 것이 들통나 죽고 그로 인해 허적도 사약을 받는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신원되었다. 그 후 갑술환국으로 또 추탈되었으나 1795년(정조 19년) 10월 정조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3][4]

2. 관련 항목



[1] 허적은 서인의 거두인 송준길과 인척 관계이기도 했고 경신환국으로 실각했을 때도 서인인 김수항, 민정중 등이 허적을 구명하려고 할 정도였다.[2] 경신대기근 중에 14번의 사직서를 거절했다.[3] 아이러니하게도 허적의 복관 명령이 떨어지자 같은 남인인 채제공은 허목이 그를 반대한 점을 들어 허적의 신원에 반대하였다. 같은 남인이라도 채제공은 허목, 윤휴의 계열인 청남 계열에 속했고 허적은 탁남의 영수였던 게 컸다.[4] 실제 채제공은 청남과 탁남이 달랐음에도 탁남으로 인해 모두 다 남인으로 싸잡아서 죄를 물었다며 청남의 억울함을 정조 앞에서 어필한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