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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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500?-548 6.25)
동로마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권세를 누렸던 여인 중 하나.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녀를 그녀의 남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함께 성인으로 기리고 11월 14일에 기념한다.
원래는 천한 신분으로, 아버지는 곰 사육사였고 어머니는 배우이자 댄서,[1] 테오도라 역시 술집의 댄서를 겸했는데... 확실히 보통 댄서는 아니었다. 스트립쇼도 했었고[2] 가끔 몸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남자에게 내주는 천한 계집'''이란 프로코피우스의 언급은 일방적인 욕설에 가깝지만, 그녀가 대단히 천한 신분에 있었음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에도 나이트클럽에서 스트립댄서를 겸하는 AV 여배우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대단히 좋지 못한 것을 감안해 보면, 테오도라가 얼마나 불리한 처지에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사>에 의하면 그녀는 실제로 낙태를 여러 번 했다고 한다. 물론 비사는 의도도 확실하지 않고 한쪽 방향으로 치우쳤으므로 적당히 걸러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3]
하지만 그녀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부인이 되어서,[4] 단순한 부인이 아닌, 아우구스타로서 사실상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테오도라는 결혼 전엔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도, 결혼 후엔 대단히 정숙하게 살았으니 자기 절제에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원대한 야망과 유능함은 여러 일화에서 드러나는데,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니카의 반란'이 있다.
53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형 경기장을 방문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부부는 매우 성난 시위대와 마주한다. 월드컵 경기가 열려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관람객들이 대통령을 죽이자면서 국빈석을 에워싼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를 탈출하려 항구로 도망쳤는데, 테오도라는 '자줏빛 옷[5] 은 가장 고귀한 수의'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꾸짖었다. 이에 마음을 다잡은 유스티니아누스는 도시로 돌아가 반란을 진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거의 3만 명이 학살당한다.[6]
게다가 프로코피우스 비사에 의하면 궁전 지하에 사설 감옥을 불법적으로 운영하며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을 가두어 고문하기도 했다. 지하감옥에 잡혀 온 사람들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고문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이런 테오도라의 악행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왜냐하면 황제 자신도 로마 시민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기에,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고 창녀들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했다. 프로코피우스의 비사에 따르면 창녀들을 갱생 시설에 보냈지만 강제였기 때문에 탈출하는 창녀들도 있었다. 또한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고 남편을 평생 보좌했다. 황제 몰래 독단으로 페르시아 황제에게 평화 사절을 보내기도 했다. 이것을 페르시아 귀족들이 알게 되어 로마는 여자가 지배하는 나라라는 비아냥을 듣는 구실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남편을 지지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자신과 남편의 의견이 다르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유스티니아누스를 꺾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했다. 또한 그녀는 단성론을 신봉했기 때문에 종교면에서는 정통파인 황제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허나 유스티니아누스가 테오도라가 죽은 후에야 진정한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얘긴 과장이 지나치다. 역사책에 확연히 드러나는 큰 업적만 정무 활동이라고 보는 큰 편견이 이유인데, 재정 관리를 비롯한 회계 사무와 행정적인 건 철저히 유스티니아누스 본인이 직접 챙기던 분야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에 걸려 골골골 하자마자 제국의 국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게 이것의 명확한 예.
문명 5 신과 왕 확장팩에서 비잔틴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 춤을 의외로 잘 못 췄으나... [2] 음문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고 한다.[3] 게다가 프로코피우스는 이상한 루머까지 쓰기도 했다. 테오도라가 남편을 마법으로 조종하거나 유스티니아누스의 머리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는 내용도 있다.[4]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외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를 꼬셔서 귀족과 천민의 결혼을 허락하는 법을 만들었으나, 법이니 뭐니 이전에 유스티누스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하지만 유스티누스 1세 본인도 군인이 되기전엔 가난한 농부 출신, 유스티누스의 황후, 즉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외숙모인 유페미아도 해방노예 출신이라 반대할 만한 명분도 별로 없어서 결국은 법안에 도장을 찍어 줬다.[5] 당시에는 오직 황실에서만 입을 수 있어 제위를 상징했다.[6] 사실 로마의 공화정 전통을 이어받은 제국에서,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시민 봉기를 진압한 경우는 이때가 유일하다. 다른 경우 퇴위를 안 하고 버틸지언정 진압은 하지 않았다. 경기장 때문에 일어난 폭동인 점과 몇천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면 에서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테살로니카 학살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