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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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Θεόφιλος
라틴어 Theophilus
영어 Theophilos
1. 개요
2. 생애
2.1. 즉위
2.3. 알 마문과의 대결
2.3.2. 연이은 패배와 구원
2.4. 트라키아 전역
2.5. 아바스 조와의 2차 대결
2.5.1. 다지몬 전투
2.5.2. 아모리움 함락
2.5.3. 무타심의 죽음
2.6. 죽음
3. 문화적 번영

재위 829년 10월 2일 ~ 842년 1월 20일
생몰 800/805년 ~ 842년 1월 20일

1. 개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1]

성상파괴운동을 제창한 마지막 황제.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바스 왕조와 2번이나 (830 ~ 833년, 837 ~ 838년) 대결하였음에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만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동로마 제국이 중흥기에 다가섰음을 알린 중흥 군주이다. 다만 동맹국 세르비아의 성장과 불가리아의 칸과 아바스 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급사하는 천운이 따르기도 했다. 국력의 회복과 더불어 문예 부흥도 시작되었는데, 당시 서유럽이 게르만 특유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프랑크 왕국의 해체와 노르만족의 침입으로 대혼란에 빠져 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2. 생애



2.1. 즉위


테오필로스는 서기 800년경 황제 미하일 2세와 황후 테클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레온 5세의 대자(代子)였다. 미하일 2세는 820년 12월 25일 성찬예배 때 레온 5세를 잔혹하게 살해한 뒤 822년 아들을 공동 황제에 임명했다. 테오필로스는 군사적으로는 유능했지만 문맹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문법학자 요안니스 하릴라스로부터 폭넓은 교육을 받아 학식이 풍부했고 신학에 대한 열정도 품고 있었으며 음악과 미술에 식견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아 상당히 유능한 야전 지휘관이기도 했다. 829년 10월 2일 미하일 2세가 사망하자, 그는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2.2. 시칠리아 전역


830년, 아랍군은 시칠리아를 침공해 팔레르모를 포위했다. 그들은 1년간 포위한 끝에 831년에 함락시키고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운 후 점차 영역을 섬 전체로 확장했다.

2.3. 알 마문과의 대결


830년, 아바스 군대가 침범하자 테오필로스가 친히 출정하여 방어했는데 동로마 군은 패배하였고 타우루스 산맥의 요새 몇 곳을 상실하였다.

2.3.1. 타르수스 점령


831년 봄, 보복에 나선 테오필로스는 대군을 이끌고 킬리키아를 공격, 타르수스를 함락하고 거주하던 아랍인들 중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자들을 추방하였다. 황제는 수도로 돌아와 성대한 개선식을 치렀으나 그 해 가을, 아랍 군대는 카파도키아의 동로마 군을 패배시켰다.

2.3.2. 연이은 패배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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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7세를 알 마문에게 파견하여 평화 조약을 체결하다
833년, 칼리파 알 마문은 재차 카파도키아를 공격하였고 또다시 패배한 테오필로스는 금화 10만 개와 아랍 포로 7천 명을 석방하는 대가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2.4. 트라키아 전역


836년, 동로마와 불가르 간의 20년 평화 조약이 끝나자 테오필로스는 공세에 나서 트라키아 북부를 유린하였다. 이에 보복에 나선 불가르 군대는 필리포폴리스(플로브디브)를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플을 위협하였다. 그러자 테오필로스는 서쪽의 세르비아인들의 독립을 허용하며 불가르에 맞서게 했는데, 이 작전은 맞아들어가 839년~842년에 걸친 전쟁에서 불가리아 제국의 프레시안 1세는 중상을 입고 패퇴하였다. 이로써 첫 세르비아 독립국이 형성되었다.

2.5. 아바스 조와의 2차 대결


837년에 테오필로스는 7만 군대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하였고, 멜리테네 (말라티야)를 조공 도시로 만들며, 칼리파 알 무타심의 출생지인 소조페트라를 폐허로 만들었다.
칼리파 알 무타심은 타르수스에 8만 정예병을 결집시켜 아나톨리아 정벌에 나섰다. 칼리파의 고향인 소조페트라를 파괴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아랍 병사들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넣었다.

2.5.1. 다지몬 전투


838년, 이슬람 제국의 8만 군대는 대장군 알 아프신과 칼리파 본인의 두 갈래로 나뉘었으며 전자는 카파도키아, 후자는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하였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두 군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 (안젠)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하였다. 동로마 군대는 아랍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한편, 테오필로스는 말도 없이 친위대와 동분서주하였는데, 일부 병사들이 그가 죽은줄 알고 후퇴하였고 결국 동로마 진영은 무너졌다. 이후 테오필로스와 친위대는 작은 언덕에서 포위되었는데, 때마침 폭우가 쏟아져 아랍 군대가 흐트러지자 탈출할 수 있었다.

2.5.2. 아모리움 함락


다지몬 전투 이후 테오필로스는 본인의 사망설을 무마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갔고, 아나톨리아 군대는 붕괴되어 앙카라가 함락되었다. 앙카라에서 집결한 아랍 군대는 서진하여 아모리움을 포위하였고, 2주간의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보수가 덜 된 성벽에 집중 공격을 퍼부운 아바스 군대에게 도시가 함락되었다. 7만에 달하던 시민들 중 절반은 학살되었고 나머지는 노예가 되었다. 이후 아나톨리아 중서부 ~ 중부 거점 도시로서의 역할은 멀지 않은 곳의 이코니온으로 넘어가서 현재에 이른다.

2.5.3. 무타심의 죽음


하지만 대승에도 불구하고 알 무타심은 내부 반란과 테오필로스의 반격에 대한 소문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 이후 알 무타심은 가혹한 숙청을 강행했고, 동로마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알 아프신이 그 과정에서 옥사했다. 알 무타심은 841년 10월 병에 걸렸고 842년 1월 5일에 사망했다. 이후 아바스 왕조는 당분간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지 않았다.

2.6.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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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출신 장군 테오포보스의 수급을 보고서야 임종하는 테오필로스
842년 1월 20일, 테오필로스는 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향년 38세. 이후 아들 미하일 3세가 즉위했지만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테오필로스의 황후 테오도라가 섭정했다.

3. 문화적 번영


테오필로스의 치세는 아랍과의 전쟁이 이어지는 시기였지만 동로마 제국과 아랍의 문화가 교류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테오필로스는 예술을 사랑하는 황제로서 미술과 음악을 적극 후원했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는 황궁을 새로 지었는데, 그 구조엔 아랍의 문화가 깊게 배여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마그나우라 궁전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옥좌를 설치했다. 황제를 영접한 대사들은 황금 플라타너스의 그늘 아래 놓은 옥좌의 위용을 보고 감탄했다. 황금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에는 보석으로 만든 새가 가득했는데, 그 중에는 막 옥좌로 뛰어내릴 듯한 자세로 조각된 새들도 있었다. 또한 나무 주위에는 황금으로 제작된 사자와 그리핀[2]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대사들은 그 다음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호가 내려지자, 동물들이 모두 제각기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후 황금 오르간 소리가 울러퍼지면서 사방이 조용해졌고 황제와 손님들의 접견이 시작됐다. 이윽고 접견이 끝나고 손님들이 떠나가려는 순간, 다시 동물들의 합창이 시작되었고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한편 테오필로스의 치세에서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풍조는 사그라졌고, 새로운 인문주의의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과 명증성을 지지하는 옛 고전 정신이 부활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 및 문학자들의 서적이 재연구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각적 아름다움을 갈망했고, 옛 시절의 성화상을 갈망했다. 테오필로스 본인은 아버지처럼 성화상 파괴주의자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고, 그가 사망한 후 성화상 파괴주의는 자취를 감춘다.
[1] 이름인 테오필로스의 이름. 테오 = 디오 (신), 필로 = (사랑)[2] 독수리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가진 신화 속의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