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2세

 



그리스어 Μιχαήλ Β', Mikhaēl II
재위 820년 12월 25일 ~ 829년 10월 2일
생몰 770년 ~ 829년 10월 2일[1]
1. 개요
2. 치세
2.1. 즉위 과정
2.2. 토마스의 반란 (~ 824년)
2.3. 크레타 상실
2.4. 시칠리아 상실의 시작
2.5. 종교 관용 정책
3. 사후


1. 개요


아모리아 왕조의 창시자이며, 그의 고향인 아나톨리아 중서부 프리기아 지방의 도시 아모리온[2]에서 왕조의 명칭이 유래되었다.[3] 명분 없는 암살로 즉위하여 동로마 역사상 가장 큰 반란으로 평가받는 '''토마스의 난'''(820 ~ 824년)을 겪었다. 또한 아랍인들에게 크레타를 잃었으며 (827년) 같은 해에 시칠리아를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영토 상실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2세는 성상 옹호론자들을 용서하는 등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100년 넘게 제국을 분열시키던 종교 문제를 누그러뜨렸으며, 후계자인 테오필로스에게 제위를 안정적으로 물려주어 9, 10세기 '''비잔틴 르네상스'''의 기초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치세



2.1. 즉위 과정


성탄절에 성찬예배에 참례한 황제가 사제들 앞에서 끔살당한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암살자들에 의해 감옥에서 나온 미하일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총대주교 테오도토스의 주관 하에 대관식을 치렀다. (820년 12월 25일)
자세한 암살 과정은 레온 5세 문서 참고.

2.2. 토마스의 반란 (~ 824년)


803년 니키포로스 1세 재위 당시 장군 바르다니스 투르코스(Βαρδάνης ὁ Τοῦρκος)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바르다니스 휘하에는 레온 5세, 미하일 2세 말고도 슬라브족 출신의 토마스라는 장군이 있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넷은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반란은 실패할 것이고 레온과 미하일은 황제가 될 것이며 토마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괘를 받았다. 이후 미하일과 레온은 황제 측에 투항했는데, 토마스는 반군 편에 남았다가 바르다니스가 항복하고 섬으로 유배되자 그역시 10년간 유배되었다. 이후 옛 동료였던 레온 5세는 토마스를 아나톨리콘 테마의 피데라티[4] 투르마(기병대) 지휘관으로 임명했는데, 미하일 2세에게 레온 5세가 암살되자 토마스는 은인에 대한 복수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키며 토마스는 스스로를 (797년에 모후 이리니에게 죽은) 콘스탄티노스 6세라 칭하였고, 눈이 뽑히기 직전에 도망쳐 살아있는 것이라고 둘러대었다. 신빙성이 떨어지는 엉터리 주장이었지만 미하일 2세가 자행한 명분 없는 쿠데타에 분노한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미하일 2세의 고향이자 바르다니스가 봉기한 곳인 아모리온에서 거병한 토마스는 미하일 2세에게서 진압 명령을 받은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격파하고 동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토마스의 반란 소식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은 소아시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토마스가 그에게 동맹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다. (821년 봄)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랍 군대는 패배하였고 알 마문은 그제서야 동맹을 허락하였다. (비슷한 시기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조로아스터교도인 바박이 반란을 일으킨 것도 한몫했다) 알 마문은 토마스에게 영토 통행권과 군대 모집권을 주었고, 토마스는 황제가 되면 칼리파의 조공국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동로마와 아바스 조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소아시아 동부의 분쟁 지역을 떼어주기로 하였다.
군대가 모이자 토마스는 이슬람 지배하의 안티오크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부하 콘스탄티우스를 양자로 삼으며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다. 민중들 사이에서도 예배 중인 황제를 살해한 문맹의 미하일 2세보다 비록 이민족 출신이지만 위트 있고 점잖은 토마스가 더 나은 황제감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다민족으로 구성된 8만 대군이 소아시아로 진격하자 아르메니아콘과 옵시키온 테마를 제외한 아시아 방면의 모든 테마가 항복하였고, 토마스는 별다른 저항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시작하였다. (821년 12월)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2번의 공격을 버텨내었다. 전임 황제인 레온 5세가 크룸의 공격에 대비하여 취약점인 블라헤르네 등을 보수한 것도 토마스에게는 악재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의 함대 역시 그리스의 불로 파괴되었으며, 1년이 지나 822년 겨울이 되자 포위군은 지쳐버렸다. 이때 미하일 2세는 불가르의 오무르타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불가르 기병대가 토마스의 후방을 습격하자 포위가 풀려버렸다. (823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토마스는 후퇴하여 최후의 결전에 운을 걸었다.
823년 5월, 양측은 아나스타시우스 성벽 인근에서 만났고 토마스는 후퇴하는척 하다가 반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하지만 전략은 좋았으나 사기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토마스 측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미하일 2세에게 투항해버려 작전이 무산된 것이다. 이후 토마스는 패잔병을 이끌고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농성하였는데, 5달을 버텨내었으나 미하일 2세가 항복하면 부하들은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포하자 병사들이 배신하여 토마스를 쇠사슬로 묶고 성문을 열어 투항하였다. 미하일 2세는 쓰러진 토마스의 머리 위에 발을 얹고선 그의 손과 발을 자른 후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다. 토마스의 시신은 장대에 걸려 성벽에 걸렸다. 이후 그의 양자인 콘스탄티우스도 처형되었고 소아시아의 반란군 잔당도 척결되며 동로마 역사상 가장 컸던 내전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824년 초)

2.3. 크레타 상실


비록 3년간 내전을 겪었지만 제국의 북방과 서방은 각각 20년간의 평화와 니키포로스의 평화가 이어져 안정을 유지하였다. 동방의 알 마문도 내전이 황제 쪽으로 기울자 침공을 미루었다. 그런데 남쪽 바다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나 동로마를 위협하였다. 바로 아랍인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기존의 이집트나 시리아 방면이 아니라 안달루스, 즉 스페인 출신 집단이었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816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코르도바에서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에미르 알 하캄에게 진압되었다. 헌데 반란이 워낙 큰 규모다보니 잔당만 1만 5천이 넘었는데, 그들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이집트에 도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눌러 앉았다. (818년) 하지만 내전을 끝낸 알 마문이 타히르를 보내어 도시를 공격하자 그 중 1만 2천은 다시 지중해를 떠돌다가 아부 하프스[5]의 지휘하에 내전으로 해군이 약화된 동로마의 크레타 섬을 점령한 것이었다(824년).
이후 알렉산드리아가 타히르에게 함락되자(825년) 안달루스 인들은 크레타에 완전히 정착하였다. 미하일 2세는 섬을 수복하기 위한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회복에 실패하였다. (826년) 안달루스 인들이 29개 도시들을 완전히 정복한 것은 (시칠리아 정복이 시작된) 827년이었으며, 기독교가 허용된 1개의 자치 도시를 제외하고는 종교 탄압을 개시했다. 이후 해적들의 메카로 전락한 크레타를 되찾고자 동로마 측은 수차례 원정대를 보내었으나 로마노스 2세의 치세인 961년에야 그 뜻을 이루게 된다.

2.4. 시칠리아 상실의 시작


시칠리아에 아랍 군대가 도달한 것은 다소 어이없는 일에 의한 것이었다. 826년에 미하일 2세는 메시나 출신의 에우피미오스를 시칠리아 해군 제독으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상당히 유능하였다. 하지만 827년에 그는 수녀와의 결혼을 빌미로 지탄받았고 평소에 그의 능력을 질투하던 미하일은 그를 해임하고 코를 자르게 하였다. 그러자 에우피미오스는 함대를 점거하고 시라쿠사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하지만 발라타 등 시칠리아의 장군들은 곧바로 출정하여 시라쿠사를 회복하였고, 쫓겨난 에우피미오스는 바다를 건너 북아프리카의 아글라브 왕조에 의탁하였다. 그러곤 당시 아미르이던 지야다트[6]에게 시칠리아를 회복해주면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7]
지야다트는 70대의 노장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에게 1만 보병과 7백 기병을 주어 80여척의 배에 태워 시칠리아로 보냈다. 수스에서 출항하여 3일간 항해한 함대는 시칠리아 서남부 마자라 (마르살라)에 도착하였고, 동로마 장군 발라타와의 서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자라는 함락되어 아랍 측의 교두보가 되었고, 발라타는 중상을 입고 후퇴하던 중 사망하였다. (827년 6월) 시칠리아 남부의 동로마 군대가 괴멸되자 아랍 군대는 동진하여 섬 동남부의 아크리[8]를 거쳐 시라쿠사를 포위하였다. (828년 가을)
미하일 2세는 크레타에 신경쓰느라 시칠리아 문제에 바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동로마 소속인 베네치아에서 파견된 원군[9] 역시 격퇴되었다. 시칠리아 테마의 치소인 시라쿠사 함락은 임박해 보였고, 300년에 걸친 동로마의 시칠리아 지배는 곧 끝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신이 개입한듯 포위군 진영 내에 전염병이 돌았고, 사령관 아사드가 그로 인해 사망하였다. (828년 봄) 이로써 곧 끝날 것 같던 아글라브 왕조의 시칠리아 정복은 밀고 밀리며 902년까지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후 사기를 잃은 포위군은 여름까지 공격해 보다가 식량마저 고갈되자 서쪽의 미네오로 퇴각하였고, 동로마 군대가 추격해 오자 군대를 둘로 나누어 퇴각하였다. 절반은 남쪽의 아그리젠토로 갔고 나머지는 에우피미오스를 따라 서쪽의 엔나를 공격하였다. 수비군 측에서는 에우피미오스에게 협상을 위한 특사를 보내었는데, 협상장에서 에우피미오스는 살해되었다. 한편, 아사드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하일 2세는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경력이 있는 테오도토스에게 구원 함대를 준비시켰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테오도토스는 서진하여 섬 중앙부의 요새도시 엔나를 포위하고 있던 아랍 군대를 역포위하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테오도토스는 아랍 군대에 패배하였고 인근 요새로 후퇴하였다. 동로마 정예병에 승리한 아랍인들은 승리를 확신하여 아미르 지야다트의 이름으로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테오도토스는 자만하여 경계를 늦추고 있던 아랍 군대를 패배시켰고, 그들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아랍인들은 밤을 틈타 포위를 뚫으려 했지만 이를 예측한 테오도토스의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다. 이후 패전병들이 미네오로 가려 했지만 다시 습격을 받아 패하고 흩어졌다.
섬 중부의 엔나와 미네오 등지가 동로마에게 수복되자 남부 아그리젠토의 아랍 군대도 서남쪽의 마르살라로 후퇴하였다. 시칠리아는 다시 동로마 제국 하에 평화를 회복하는듯 하였다. (829년 가을)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글라브 왕조 측은 이베리아 반도후우마이야 왕조에 도움을 청하였고, 그 지원군은 830년에 당도하여 전세를 재차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60세의 미하일 2세는 테오도토스의 승전보만을 접한 채로 829년 10월 2일에 사망하였다. 이후 902년에 이르러서야 아랍인들의 시칠리아 정복은 마무리된다.

2.5. 종교 관용 정책


미하일 2세는 자신이 살해한 레온 5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주의자였고 역시 전임 황제와 마찬가지로 옹호론자들을 박해하지 않았다. 추방된 옹호론자들을 불러들였고 제국은 안정될 수 있었다.

3. 사후


[image]
미하일 2세의 죽음
미하일은 토마스의 반란이 한창이던 822년에 아들 테오필로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였고 829년에 사망하였다. 미하일은 780년에 사망한 레온 4세 이후로 반세기 만에 황제 직위를 유지한 체로 자연사 한 동로마 황제였다. 그에서 시작된 아모리아 왕조는 867년까지 48년간 이어지며 10세기 동로마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다.
[1] 향년 60세[2] Ἀμόριον. 현 터키 에미르다으(Emirdağ).[3] 다만 영미권에서는 '''프리기아 왕조'''라는 명칭도 많이 쓴다.[4] Φοιδεράτοι. 라틴어로는 '포이데라티'(foederati). 원래는 공화정 로마 시절 로마 시민권을 갖지도 않고 로마의 지배를 받지도 않는 대신 전시에 로마에게 군사를 제공하는 군사 동맹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제정 로마 말엽으로 가면서 '''로마 영토 내에서의 영주권을 인정받는 대신 병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민족'''들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했다.[5] 그는 크레타에 상륙하자마자 배를 불태우고 크레타 정착을 명령하였다.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부인과 자녀들을 두고 왔다고 항의하자 크레타 여자들과 새 가정을 꾸리라는 명령을 내렸다.[6] 재위 817 ~ 838년[7] 시칠리아의 토마스 반군의 잔당이 지중해 너머 마그레브의 아랍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8] 이곳에서 시라쿠사의 특사를 만났으나 아사드는 협상을 거부하고 바로 공격을 명했다[9] 도제인 귀스트니아노가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