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5세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전임 황제 미하일 1세 랑기베스가 불가리아 국왕 크룸과 맞서 싸울 때 멋대로 전장을 이탈해 제국군이 패전하게 만듬으로서 미하일 1세가 퇴위하게 만든 후 스스로 황위에 올랐다. 황제가 되기 위해 제국에게 피해를 끼친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렀지만, 시대가 그를 7년이나마 제위에 있게 해주었다. 제위 초기에 제국을 위협했던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크룸이 814년에 급사했고, 같은 해에 프랑크 제국도 카롤루스 대제가 병사하며 외부에 신경쓰지 못하고 분열기에 접어들게 된다. 한편, 군사적 & 종교적으로도 동로마 제국의 가장 큰 적수였던 이슬람권의 아바스 왕조 또한 칼리파 알 마문의 사후 일어난 두 아들간의 내전으로 아나톨리아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따라서 제국은 814 ~ 820년간 전례 없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820년 12월 25일 성찬 예배 도중 살해당했다.
2. 치세
레오는 아르메니아/시리아 혈통의 장군이었다. 그는 미하일, 토마스와 함께 바르다네스의 부하였으나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미하일과 함께 황제 니키포로스에게 투항하였다. 이후 레오는 니키포로스 1세와 미하일 1세 하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쌓아 나갔다.
크룸과 미하일이 대결한 베르시니키아 전투 직전에 레오는 아마 병사들에게 은밀히 후퇴 명령을 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사들이 이탈하고 자신은 못이기는척 후퇴한 후 패전한 황제로부터 양위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레오는 자신이 성상 파괴주의자였음에도 총대주교 니키포로스에게 성상 옹호를 선언하고 황제로서 인정받았다.[2] 이후 미하일은 유배되었고 그 아들들은 거세되었다.
2.1. 대 불가르 전쟁 (vs 크룸)
레오의 즉위 과정을 보면 그가 크룸과의 모종의 계약을 했다는 의심이 든다. 회전을 피하던 그가 미하일의 전면전 참여 요청에 응랬다가 전투 도중 도주한 것과 레오 즉위 이후 크룸이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까지 와서 '약속대로' 금, 비단, 미인을 요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레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크룸에게 골든혼 해변가에서 비공개 회담을 갖자고 제안한 후, 크룸이 일부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오자 레오는 복병을 배치하여 그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매복에도 수행원들만 사망하고 크룸은 부상만 입고 살아 돌아가 레오의 암살이 실패한다. 그래서 크룸은 격분하여 복수심에 가득찬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셀렘브리아 등 콘스탄티노플 인근 지역을 유린하였으며 아드리아노플을 함락하여 주민 1만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레오도 보복으로 메셈브리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불가르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813년) 그러자 제대로 화가 치민 크룸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718년 이후 백여년만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레오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프랑크 제국의 2대 황제로 갓 즉위한 경건왕 루트비히 (그해 1월에 즉위)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니키포로스의 평화를 상기시키며) 불가르의 후방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프랑크 측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때, 하나님이 동로마를 도와준 듯한 일이 일어났으니, 바로 크룸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2.1.1. 20년간의 평화
크룸의 뒤를 이어 칸이 된 오무르타그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애초에 수도 플리스카가 폐허였다)를 위해 평화 조약을 제안하였고 레오 역시 동의하며 20년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 역시 하룬 알 라시드 사후 이어진 내전 (4차 피트나) 때문에 수도 바그다드가 파괴되는 등의 피해를 입어 동로마를 건드리지 못하였다. 정말 오랜만에 서부, 북부, 동부 전선이 모두 안정된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2.2. 성상 파괴 운동
한편, 813년에 크룸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할 때에 성당들에서는 구국 기도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때 나이가 지긋한 퇴역병들이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부활하여 제국을 구해줄 것을 기도하며 성당 앞의 무덤으로 모여들었다. (원래 군대는 성상 파괴파가 다수였다) 이를 자켜본 (군인 출신의) 레오 5세 역시 본래 성상 파괴론자였고, 숨기고 있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로 하였다.
평화가 찾아온 814년의 6월부터 레오 5세는 신학자들과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머지않아 성경에서 성상을 숭배하라는 얘기가 없었다는 큰 근거를 내세워 성상 파괴 노선을 확립하였다. 이후 레오 5세가 즉위 직전에 무릎 꿇었던 황궁의 칼케 문 위에 있던 성상[3] 을 철거하였다.[4] 그리고 815년에 황궁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는 성상 옹호파/파괴파 모두 참석하였으나 결국은 황제의 뜻이 관철되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 28년에 성상파괴파가 재림한 것이다.
황제는 그해 4월에 성상 옹호파인 총대주교 니키포로스를 현재 프린스 아일랜드 (마르마라 해에 위치)로 유배보내었고[5] 강경 단성론파인 파울리키아파에 대한 탄압도 실시하여 그들의 세력을 아르메니아로 축소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상 옹호론을 억압한 것도 아니어서 제국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황제를 비난한 옹호론자 몇 명은 처형되었다)
2.3. 어이 없는 죽음
레온 5세는 소아시아의 아모리움 출신 장군인 미하일이라는 장군과 친했다. 니키포로스 1세 문서에도 나오듯 그들은 803년에 바르다네스의 진영에서 이탈하여 황제에 항복할 때도 함께 했고 레온이 미하일 1세를 배신할 때에도 그들은 함께였다. 비록 미하일은 문맹인데다 말도 더듬었지만, 레온이 미하일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줄만큼 친했다. 하지만 레온이 미하일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하자 그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820년 여름, 레온은 미하일이 자신을 험담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불러 타일렀다. 하지만 그해 성탄에 미하일이 반란을 모의한다는 소식이 들자 레온은 그를 체포하였고, 미하일은 레온 앞에서 모반 사실을 털어놓았다. 분노한 레온은 당장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황후 테오도시아는 "크리스마스가 2시간 남았는데 성찬예배 직전의 살생은 불길하다"며 막았다. 따라서 미하일은 감옥에 갇혔는데, 마지막으로 옛 친구를 보기 위해 레온은 감옥을 다녀갔다. (열쇠는 그에게 있었다)
마침 간수와 미하일 모두 졸고 있었는데, 레온은 조용히 둘러보고 나왔다. 한편, 감옥에는 간수와 미하일 외에도 미하일의 심복 하나가 탁자 밑에 숨어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도포 자락과 독수리가 새겨진 장화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누가 다녀갔는지 알아차렸다. 레온이 떠나자 그는 미하일과 간수를 깨웠고, 간수에게 "황제가 왔는데도 졸고 있었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결국 셋은 레온을 죽이기로 하였고, 간수의 협조로 미하일의 부하들 몇 명을 소환하였다.
크리스마스 새벽 4시, 레온은 황궁 성당에서 성찬예배 중이었는데 수도복 차림을 한 미하일의 부하들이 성가가 울려퍼지고 있던 때에 돌진하여 도포 속에 숨기고 있던 칼을 뽑아 휘둘렀다. 암살자들의 칼은 황제 옆에 있던 사제를 내리쳤고[6] , 그에 당황한 레온은 제단의 십자가를 들고 대항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십자가를 쥐고 있던 팔은 잘려나갔다.
황제가 쓰러지자 암살자들은 그의 목을 찔렀다. 레온 5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성찬예배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암살자들은 경악하고 있던 사제들을 밀치고 현장을 빠져나가 감옥에서 미하일을 데려와 아직까지 족쇄를 차고 있던 그를 황제 미하일 2세로 선포하였다. 큰 철제 족쇄는 그날 정오에 이르러서야 망치로 해체될 수 있었고 미하일은 즉위식을 올려 황제에 즉위한다.
3. 사후
레오의 시신은 시민들에게 공개되었고, 레오의 아들들은 과거 레오가 미하일 1세의 아들들에게 했듯이 거세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미하일 1세의 차남 이그나티우스가 후에 총대주교가 된 것과 비슷하게 레오의 아들 중에서는 시라쿠사의 대주교가 배출된다. (그레고리오스, 844 ~ 853년과 858 ~ 867년, 877 ~ 878년[7] ) 그리고 이그나티우스가 867년에 그리고리오스를 해임하는 것도 재미있는 점.
여담으로 마케도니아 왕조의 콘스탄티노스 7세는 레오 5세를 가문의 선조로 삼았다.
더불어, 황후 테오도시아는 목숨을 유지했지만 머나먼 지방 수도원으로 추방당해 거기서 살다가 826년 경에 약 50세로 죽었다. 남편이 자기 말대로 하다가 암살당하고 아들들은 거세당하고 자신도 멀리 수도원에 갇혀 유배당해 살다가 죽었으니 미하일을 죽이려던 남편을 말리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1] Leōn ho ex Armenias[2] 단성론자였음에도 칼케돈파와 타협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생각나는 부분[3] 레온 3세에 의해 철거되고 이리니에 의해 재건된[4] 그 과정이 치밀하고도 웃긴데, 726년처럼 병사들의 일방적인 철거가 아닌 명분을 만들었다. 우선 병사들을 보내 성상 앞에서 저주와 투석을 시킨 후, 황제가 (우연히) 그 앞에 나타나 성상을 '보호'하고 신성모독을 금한다는 이유로 성상을 철거하라 하는 것이었다.[5] 828년에 그곳에서 죽는다[6] 성찬예배 때에는 황제와 사제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7] 아랍 왕조인 아글라브 왕조에게 시라쿠사가 함락된 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