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
1. 개요
壞土室說[1]
토실을 허물어 버린 이야기. 한자를 그대로 읽어 "괴토실설"이라고도 한다.
이규보가 지은 글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제 21권에 수록되어있다.
교학사의 제 7차 교육과정 문학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2]
2. 원문/해석
- 원문과 해석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十月初吉, 李子自外還, 兒子輩鑿土作廬. 其形如墳. 李子佯愚曰, 何故作墳於家. 兒子輩曰, 此不是墳, 乃土室也. 曰奚爲是耶? 曰冬月宜藏花草瓜蓏. 又宜婦女紡績者, 雖盛寒之月, 溫然若春氣, 手不凍裂, 是可快也.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3]
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아들들[4] 이 땅을 파서 움막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양이 무덤 같았다. 이자는 아무것도 모른 체하고 말했다. "어인 일로 집에 무덤을 짓느냐?" 아들들이 말했다. "이건 무덤이 아니고 움집입니다." "움집은 무얼 하려고?" "겨울에 화초나 채소를 갈무리하기에 좋고 또 길쌈을 하는 부녀자들이 비록 혹독하게 추운 때라도 이곳에서는 봄 날씨같이 따뜻해서 손이 얼어 터지지 않으니 참 좋습니다."李子益怒曰, 夏熱冬寒, 四時之常數也. 苟反是則爲恠異. 古聖人所制, 寒而裘暑而葛, 其備亦足矣. 又更營土室, 反寒爲燠, 是謂逆天令也. 人非蛇蟾, 冬伏窟穴, 不祥莫大焉. 紡績自有時, 何必於冬歟? 又春榮冬悴, 草木之常性, 苟反是亦乖物也. 養乖物爲不時之翫, 是奪天權也.
이자가 더욱 노해서 말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사계절의 한결같은 이치이다. 만일 이에 반하면 괴이한 일이 된다. 옛 성인이 만든 제도는 추우면 갖옷을 입고 더우면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또 다시 움집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돌린다면 이는 하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에 엎드려 지낸다는 것은 이보다 상서롭지 않은 것이 없다. 길쌈은 제 때가 있는데 하필 겨울에 하느냐? 또 봄에 꽃이 피고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한결같은 성질인데 만일 이에 반한다면 또한 철을 어긴 물건이다. 철을 어긴 물건을 길러서 때에 맞지 않게 즐긴다면 이는 하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此皆非予之志. 汝不速壞, 吾笞汝不赦也. 兒子等𢥠懼亟撤之. 以其材備炊薪, 然後心方安也.
이는 모두 내 뜻에 맞지 않다. 너희가 빨리 헐어버리지 않는다면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고 때리겠다." 아들들이 두려워서 얼른 헐어버렸다.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3. 비판
저자인 이규보가 뛰어난 문인이며 이 글 역시 교과서에 실린 고전이라고는 하나, 위 수필에서 보이는 이규보의 생각은 무척 근거가 박약하기에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이규보의 행동은 상당히 꼰대 같은 것으로 비추어지곤 한다.
이규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자연의 이치는 거스를 수 없는 것으로 겨울엔 추운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토실을 만들어 겨울에 따뜻함을 누리려 하는 발상은 잘못되었으니 토실을 부수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에 추운 것은 자연적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여름에 '더워야 한다'거나 겨울은 '추워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규보의 논리대로라면 토실과 같이 인간이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자연에 적응하고 환경을 바꾸려 한 모든 시도나, 기술과 문화의 발전은 좋지 않은 것이니 없애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의견에 설득력이 있거나 받아들일 만하다고 볼 여지는 거의 없다. 이 밖에도 옛 성인의 법도를 지켜야 한다거나 사람이 두꺼비나 뱀처럼 살면 그게 상서로운 것이겠느냐는 곁가지 주장이 이어지지만 모두 같은 맥락에서 옳지 않다.
움막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짐짓 모르는 체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며 갈굴 각을 잡기 시작하는 것 역시 오늘날의 지독한 꼰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럴듯한 해석은 아니지만, 얼핏 보면 무덤처럼 생긴 미관이 마음에 안 든 것이 아니었냐는 생각까지도 해볼 수 있다.
심지어 움막이라는 소재로 논의를 한정시켜도, 이규보 본인은 몰랐을 것이지만 인간은 움집에서 지낸 역사가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더 길었다. 움막 역시 원시 시대부터 인간이 추위를 피하고자 고안해 낸 지혜의 산물인 셈인데, '옛날에는 안 그랬다'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격하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이규보의 오판인 것이다.
게다가 글 말미에는 ''''그 재목으로 땔감에 쓴 뒤에야''''라는 문구도 있다. 이규보는 토담집을 허물고 나온 나뭇가지를 자기 방 온돌을 덥히는 땔감으로 쓴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겨울에 추운 것은 당연한 것이면서, 땔감으로 자기 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래놓고 자기 혼자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고 하고 있으니 주장의 일관성 역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불을 피워 땔감으로 쓰는 것은 과거부터 해온 익숙한 일이니, 자연스럽고 올바르지만, 움막은 생소한 일이니 비판하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 한 점은, 그 소빙하기 이후의 온돌의 보급이 조선의 삼림 고갈을 가속화하고, 온 조선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는것(...) 오히려 이런 관점에선 움막이 더 자연친화적이다.
이러한 위 관점에서 버트런드 러셀 역시 노자의 자연사상을 비판한 바 있다. 정확히 말하면 노자나 루소의 자연회귀 사상에서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그 작자가 익숙해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들이 사악한 인위라 부르는 것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즉, 노자는 길이나 다리, 나룻배로 통행을 편하게 하는 것이 인위로써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옷을 입거나 불로 음식을 익혀먹는 것과 같은 인위는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므로 인위로 보지 않았다는 논리이다. 자세한건 해당 항목의 3.3번 문단 참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저자인 이규보의 삶이다. 오늘날 괴토실설이 '유교 탈레반 씹선비의 일화'쯤으로 여겨지고는 하지만, 오히려 정상적인 유교 사대부의 관점에서 이규보는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규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출세하지 못하다가 최충헌의 무신정권기에 들어서야 최충헌에게 발탁되는 것을 시작으로 비로소 고위직을 밟게 된다. 그의 권력이 최충헌에게서 비롯된 이상, 이규보는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에게 아첨하는 행보를 보이기 마련이었고, 따라서 무신정권에 영합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비양심적인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괴토실설은 거의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무신정권 치하에서 권력에 살랑거리기 바빴던 이규보가 오히려 자기 식솔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이는 오히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이규보라는 타락한 지식인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실제로 무신정권기의 집권자 최우는 강화도 천도 후 섬에 빙고를 지었다. 자기 집에 세워진 토실은 부숴 버리려 한 이규보도 최우의 빙고 건설에 손을 대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의 침입과 잦은 민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무신들의 권력에 굴종했던 것은 사대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즉 오늘날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사람들 입장에서도 그리 존경할 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를 가진 인물인 이규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겠다'는 식의 엄포를 놓으며 남을 훈계할 자격이 있는 인물인지는 의심스럽다.
즉 이규보는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정치가인데다가 겨울에 길쌈을 할 필요 없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는 상류층이면서도, 아들들(혹은 머슴들)이 집안일을 조금이라도 쉽게 해 보려 하니까 이에 공감하고 도와주진 못할 망정 오히려 엉뚱한 의견을 내세우며 방해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 교과서에서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소박한 자연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명문장가의 작품'으로 해석되어 온 괴토실설에 대해서, '무신 정권 부역자 꼰대의 억지 가득한 수필'이라는 비판적 해석도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비교적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