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들 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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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본명은 게어트라우트 훔프스. 트라우들(Traudl)은 그녀의 애칭이었다.[1]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연설 원고와 인사만을 기록하는 담당관이었다. 흔히 비서로 알려져 있지만 타자수에 더 가깝다. 당시 유럽에서는 문서 작성 기술상 받아쓰는 것만 하더라도 특별한 숙련도가 요구되고, 구술하는 것을 받아쓰는 것만 하더라도 어휘력 수준이 중등교육 이상 거쳐야 하기 때문에 타자 역할만을 전담할 필요가 있었다.
2. 생애
2.1. 유년기
1920년 뮌헨의 양조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장성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익 활동을 했던 인물로 터키로 이주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무용가가 꿈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독일의 실업학교에 진학, 그곳에서 비서직을 공부하게 된다.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한 봉제회사의 비서로 일하던 그녀는 세계 2차대전이 터지면서 1942년 , 여동생과 함께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2.2. 히틀러의 비서가 되다
1942년 12월, 히틀러의 측근이자 그의 4명의 개인비서중 한명이었던 알베르토 보어만[2] 과 알게된 그녀는 히틀러의 여비서인 게르다 크리스티안이 결혼을 하면서 6개월간의 장기 휴가를 떠나게 되자 [3]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프로이센의 라스텐부르크에 위치한 볼프스샨체(Wolfsschanze)[4] 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무용수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5] 히틀러의 비서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때를 회상하며 그녀는 "히틀러의 비서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고작 22살이었고, 나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라고 했다.
히틀러의 비서로 있던 1943년 7월 14일 히틀러의 부관이자 SS 친위대장교였던 한스 융에(Hans Junge)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후에 한스 융에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에 투입되어 전사했기 때문이다.
이후 베를린으로 연합군의 총공세가 이어지며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베를린 총독관저의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융에가 직접 작성한 그의 유언장을 보려면 여기로. 그리고 1945년 4월 30일, 15:00경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자살한 이후[6] 지하 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했는데 이후 행적에 대해 여러 설이 있다. 하나는 융에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 처럼 연합국 지역으로 넘어가던 중 러시아 군에게 억류 되었는데 별탈없이 미군에 보내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설과, 또 하나는 탈출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하고 부상을 당한 그녀를 치료한 후 소련군 장교에게 보내져 수개월간 그녀를 현지 종군처로 데리고 있었다는 설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블로그를 참조.
2.3. 전후
전후 게르다 알토라는 가명을 쓰며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해주었지만,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버리는 등 인격적인 문제도 많았다고 한다.
트라우들 융에는 이후 히틀러를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 등에 출연하여 1942~45년의 기간 동안 곁에서 지켜본 히틀러의 개인적인 면모와 사생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여러 일화들을 증언하였다. 이런 작업들은 훗날에 말년의 히틀러를 묘사한 다운폴 등의 영화들을 제작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2001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다큐멘터리 영화인 《히틀러의 여비서( Im toten Winkel - Hitlers Sekretärin )》(또다른 제목은 "맹점 : 히틀러의 여비서"이다)에 본인 역으로 출연하여 히틀러의 여비서로 근무하던 시절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여기서 트라우들 융에는 하얀 장미 단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그들에 비하여 나치를 합리화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비판하고 성찰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7]
이후 2002년에 영화의 시사회가 끝난 후, 병원에 입원중이었던 트라우들 융에는 암으로 인하여 향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히틀러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 사망 시사회 직후 감독이 병원으로 찾아와 그녀에게 시사회 이야기를 하자 "그럼 이젠 제가 할 일은 다 끝났군요. 한결 홀가분해지겠어요."라는 한 마디를 유언으로 남기고 영면했다. 사후인 2003년 Bis zur letzten Stunde. Hitlers Sekretärin erzählt ihr Leben.(마지막 순간까지 - 히틀러의 여비서의 회고)라는 제목으로 예전에 썼던 회고록의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재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남편은 결혼 1년 만에 전사한 한스 융에 외에는 없었다.[8] 융에뿐 아니라 히틀러의 비서였던 사람들은 전쟁 후에 아무도 결혼/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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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 이름 '거트루드(Gertrud/Gertrude)'와 어원이 같은 이름인데, 영어로도 이 이름의 애칭은 '트루디'이다.[2] 히틀러의 비서인 일명 '''갈색의 배후자''' 마르틴 보어만의 동생. 형이나 동생이나 히틀러의 신임을 얻기 위해 서로 끊임없는 암투를 거듭했다.[3] 1913~1997. 구방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다가 공군 소령과 결혼하면서 장기 휴가를 신청했다. 1943년 복귀를 했고 이후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벙커에 탈출했지만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미군에 넘겨지게 되었다. 전후에는 이혼하고 호텔에서 일하다 1997년 뒤셀도르프에서 암으로 사망했다.[4] 늑대소굴이라는 뜻. 발키리 작전이 벌어진 장소로도 유명하다.[5] 이때까지 그녀는 비서는 임시로 하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6] 이때 그녀는 옆방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6명의 자식들과 식사 하는 중이었다.[7] 이 다큐멘터리에 들어간 인터뷰의 내용은 영화 다운폴에 일종의 나레이션으로 삽입되기도 하였다.[8] 하인츠 발트라는 약혼자가 있긴 있었으나 물리적으로 떨어져있는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마음 역시 멀어지는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