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프로이센

 


'''오스트프로이센
Ostpreuß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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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州旗)'''
'''주장(州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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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 1945년'''
'''프로이센 왕국 (1772~1871)
독일 제국 (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9~1933)
나치 독일 (1933~19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SFSR'''
'''폴란드 인민 공화국'''
'''리투아니아 SSR'''
'''행정'''
'''시간대'''
(UTC+1/+2)
'''주도(州都)'''
쾨니히스베르크
'''인문환경'''
'''면적'''
37,047km²(1939년 기준)
'''인구밀도'''
54.1명/km²
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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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프로이센(독일어:Ostpreußen, 영어:East Prussia)은 1945년까지 독일 동북부에 존재했던 지방. 주도는 쾨니히스베르크. 면적 36,992 km² 에 인구는 2,488,112명(1939년)이었다. 독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오스트프로이센'으로 불리기도 하나, 동프로이센 쪽이 구글 검색에서 압도적이므로 이 표기를 썼다.[1][2]

2. 역사



2.1. 독일 기사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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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로이센은 본래 발트족이 살던 땅으로 이곳의 발트족은 '프루센' 또는 '고 프로이센인(Prussians)'으로 불렸으며, 동쪽의 리투아니아와 함께 13세기에도 기독교화가 되지 않은 유럽의 몇 안되는 지역이었다.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가톨릭 세력은 여러차례에 걸쳐 선교와 개종을 위한 시도를 벌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1206년, 시토 수도회의 '올리바의 크리스티안'이 선교 활동을 벌여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 1215년, 크리스티안은 신생 프로이센 주교구의 초대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원주민의 대대적인 적대행위에 직면하였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잔학 행위에 분노한 원주민은 폴란드 왕국의 헤움노, 마조비아, 포메라니아 등지를 공격하였다.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십자군 조직을 허락,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프로이센인들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막아낸다. 그러나 1223년, 대부분의 십자군이 철수[3]한 후 프로이센인들은 헤움노, 마조비아를 또다시 침공하였고 마조비아 공작은 남쪽의 프워츠크 시까지 도망쳐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튜튼 기사단[4]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1226년, 튜튼 기사단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통해 앞으로 기사단이 정복한 영토를 영지로 하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어서 교황과 콘라트 1세의 지지와 약속까지 얻어낸 기사단은 1230년부터 본격적인 프로이센 정복을 시작, 기독교화하기 시작하였다.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프로이센 십자군은 대규모 회전보다는 소규모 기동대의 정찰, 기습, 약탈, 철수 등의 유격전 위주로 벌어졌다. 십자군이 원주민 마을 불태우고 주요 요충지를 점령하면 요새를 건축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원정을 계속하였다. 1241년까지 '포메사니아인(Pomesanians)', '포게사니아인(Pogesanians)', '와르미아인(Warmians)', '나탕기아인(Natangians)', '바르티아인(Bartians)'이 십자군에 정복되었다. 프로이센인들은 1242년 ~ 1249년의 봉기(1차 프로이센 봉기), 1260년 ~ 1274년의 봉기(대 프로이센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프로이센 십자군은 1274년 '나드루비아인(Nadruvians)'이 정복당하며 십자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써 동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되었다.
기사단에 정복된 원주민들은 학살, 추방, 독일인 이주민과 동화 등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17세기 ~ 18세기에 그들의 언어인 '고 프로이센어'도 사멸하였다.

2.2. 튜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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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튜튼 기사단국은 그 영토가 남쪽으로는 포메라니아와 동프로이센, 븍쪽으로는 고틀란트 섬과 에스토니아에 이르러 북유럽의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기사단국은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대패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1453년, 폴란드와의 '13년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기사단국은 무역의 황금알 단치히와 포메른, 서프로이센 일대를 상실하였다. 1466년, 13년 전쟁을 끝낸 '2차 토른 조약'의 결과 튜튼 기사단국은 폴란드에 복속되었다. 튜튼 기사단국의 국체는 유지되었으나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기사단장)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었으므로 기사단국은 폴란드의 속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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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튜튼 기사단의 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이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 후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의 세속화, 튜튼 기사단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몇몇 튜튼 기사들은 이 결정을 반대하여 프로이센을 떠나 독일 본토로 향했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이 결정을 환영하며 루터교도인 알브레히트와 조약을 체결, 프로이센 공국의 건국을 승인하였다.
프로이센 공작은 과거의 튜튼 기사단장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였으므로 프로이센 공국은 여전히 명목상 폴란드의 속국이었다. 공국은 같은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과 수 차례에 걸쳐 근친혼을 맺고 한 쪽의 대가 끊기게 되면 다른 한 쪽이 상속받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한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사망한 2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를 이어 프로이센 공작이 되었고 이로써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종주국인 폴란드 국왕이 대가 끊긴 공국의 영지를 회수하여야 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 공작의 신분으로서 공국은 앞으로도 폴란드 국왕의 봉신국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동군연합에 대한 폴란드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프로이센 공국은 아직까지도 명목상 폴란드의 속국이었다.

2.3.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프로이센 공국이 완전한 독립국이 된 것은 1660년으로,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폴란드가 대홍수로 스웨덴과 러시아와 전쟁하고 있는 폴란드에게 선전포고, '올라바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에서 폴란드 국왕이 갖는 권리를 완전히 청산한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3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서 신성 로마 제국에게 원군을 제공한 대가로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2세의 허락을 받아 프로이센 왕국을 세우게 되었고, 공작 프리드리히 3세는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된다. 이로써 기존의 프로이센 공국은 신생 프로이센 왕국의 동쪽 영토(브란덴부르크 기준으로는 동쪽 월경지)를 구성하게 되었다. 대북방전쟁 당시에는 전염병으로 인구의 3분의 1인 25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력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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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의 1차 폴란드 분할 이후 월경지에서 벗어나 왕국 서쪽과 영토가 이어졌다. 1807년의 틸지트 조약 이후 쾨니히스베르크가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동프로이센은 한동안 왕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나 얼마 안가 베를린으로 수도를 옮겼다. 1829년부터 1878년까지는 서프로이센과 함께 프로이센 주라는 행정 구역에 묶여있었으나, 이후 분리되었다.
독일 제국이 건국된 후에도 동프로이센은 여전히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였고, 왕국의 발상지이자 독일 제국의 발상지로써 그 상징성과 중요성이 막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바이에른, 라인란트, 베스트팔렌과 같은 라이벌 지역에게 발전도에서 뒤쳐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은 보수성향의 귀족 출신의 지주 융커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이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영지 경영에서 적극적인 이윤을 추구하였다. [5]
1차대전에서는 포젠이랑 더불어 제정 러시아의 합병 목표로써 초기 동부전선의 주요 전장이 되는데,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전국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탄넨베르크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졌다[6]. 탄넨베르크의 참패 이후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에서 쫓겨나 방어에 급급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7]

2.4.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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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게 1773년 1차 폴란드 분할 이전의 폴란드의 영토였던 지역을 양도해야 했다. 폴란드 회랑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을 넘겨준 결과 동프로이센은 독일 본토와 분리된 월경지가 되었다. 이 때 동프로이센 일대는 약간의 영토 변화를 겪는데, 메멜 지역을 리투아니아에 넘겨준 대신, 서프로이센 지역 중 일부분[8]을 흡수했다.[9] 이 밖에도 폴란드는 동프로이센 남부에 폴란드계가 다수라는 이유로 주민투표를 통해 이 지방의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민투표를 시행하였으나 투표 결과는 폴란드 측의 보이콧으로 절대 다수가 독일 잔류에 투표하여 독일 잔류가 그대로 확정되었다.[10][11]
2차대전 시기에 독일의 패배가 자명해지자 소련군의 보복을 피해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독일 본토로 달아났다. 1945년 독일의 패전 후 연합국은 전쟁의 직접적 원인(폴란드 회랑단치히 자유시 문제)이자[12] 가장 근본적인 원인(독일의 군국주의제국주의의 발원지 겸 성지 겸 상징)이 되었던 프로이센 지역, 즉 동프로이센을 해체하여 지도에서 아예 없애버리기로 합의한다. 소련스탈린은 동프로이센 전체를 소련이 차지하거나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차지하려 했지만 관대하게(...)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 남부 3분의 2를 넘겨주었다.[13] 동프로이센 북부 끝자락의 메멜란트리투아니아에게 넘어갔다.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당연히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도 모두 추방[14][15]. 서독은 이 지역에 대한 폴란드와 소련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동방정책을 외교정책으로 채택한 이후 외교노선에 변화를 주어 실질적으로 이 지역을 포기했으며, 공식적으로는 1990년의 통일 과정에서 영구히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을 선언한다.
폴란드가 획득한 동프로이센 지역은 몇 차례 행정구역 변화를 거쳐, 1998년 이후 옛 서프로이센 지역과 합쳐져 바르미아마주리 주를 이룬다.

2.5. 현재의 동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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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칼리닌그라드(구 동프로이센의 북부 1/3)일대에서 독일로의 재편입 움직임이 일기도 했지만 정작 독일 당국은 시큰둥한 반응. 이제 칼리닌그라드 주민 대부분은 2차대전 이후 들어온 러시아계고, 설령 진지하게 독일 편입 여론이 생긴다 하더라도 러시아 정부가 칼리닌그라드 이탈을 묵과할 리 자체가 없는데다가 이미 독일이 동독과의 '''통일에 따른 호된 경험을 해봤던 터라.''' 독일 당국은 이 지역 인구 중 이젠 전체의 1%도 채 되지 않는[16] 몇천명 독일계 주민들에게 그냥 독일 국적을 부여하는 정도로 넘어가려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편 볼가 강 일대에 거주중이던 독일계 러시아인들도 요새 많이 이 곳으로 이주해오는 추세라고 한다.
독일 재편입과 관련하여 동프로이센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참고. 결론부터 말하면 '''동프로이센이 다시 독일땅이 될 가능성은 없다.''' 물론 동프로이센 말고도 폴란드에 대부분 넘어간 슐레지엔, 포메른, 프랑스에 넘어간 알자스-로렌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이 상실한 다른 영토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미 '''유럽 연합폴란드가 가입'''되어 있어 상호 이동이 자유로워졌는데, 독일이 굳이 무리수를 던질 이유가 없기도 하고.

3. 관련 문서



[1] 혹은 프로이센의 영어식 명칭인 프러시아를 따와서 동프러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2]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프로이센 ‘지역’은 동프로이센을 말한다.(그냥 ‘프로이센’은 당연히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 왕국을 가리킨다)서프로이센과 남프로이센은 실제로는 프로이센과 전혀 관계없고 폴란드 왕국이 건국된 후 부터 줄곧 폴란드 영토였다. 그러다가 폴란드 분할 때 프로이센이 강탈한 순서에 따라 각각 서프로이센과 남프로이센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을 뿐이다.[3] 십자군은 대부분 '성지 순례 왔습니다' or '이만큼 하느님을 위해 봉사했으니 됐다' 며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4] 원래 예루살렘 왕국에서 활동하던 독일계 기사단으로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넘어간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헝가리 왕의 의뢰를 받아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방어 및 개척을 담당하다 헝가리와 갈등을 빚자 교황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시도했다가 도리어 헝가리에서 쫓겨났다.[5] 공업 발전이 안되니,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공업지역으로 떠나고 일손이 모자라서 농업이 흔들리는 악순환이 19세기 후반부터 나치 독일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얼핏 모순적인 것 같은 서술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프로이센의 융커 지주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토지 기반의 농업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로 서부 독일의 상공업 기반 신흥 부르조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뒤쳐지게 되었다. 지주 계급인 융커의 이익은 상공업이 아니라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세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제국이 서구 열강들에 비해 낙후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토지 생산력에 기반한 전통적인 귀족과 지주들의 영향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6] 탄넨베르크 전투는 1410년에도 벌어졌는데, 이때의 전투는 독일 기사단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패배하였다. 자세한 것은 탄넨베르크 전투 참조.[7] 다만 러시아가 독일 측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동원을 마치고 동프로이센을 침공해서 슐리펜 계획이 다 틀어지고 만다. 전략적으로만 따지면 동프로이센을 잠시 포기했다가 프랑스를 먼저 깨고 난 뒤, 러시아에게 전력을 집중해서 탈환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지만 독일 군부는 융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양반들이 자기의 농지가 로스케에게 넘어가는 꼴을 그냥 지켜볼 리가(...)[8] 엘빙, 마리엔베르더, 마리엔베르크, 슈툼, 로젠베르크[9] 기본적으로는 폴란드 분할 이전 폴란드가 가지고 있던 옛 영토가 반환의 기준점이 됐지만, 이미 독일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의 경우 독일계 주민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주민투표를 거쳐서 몇몇 지역은 독일에 잔존하는 쪽을 선택해서 벌어진 일.[10] 딱 두 곳을 제외한 모든 선거구에서 독일 잔류 측의 득표율이 90%를 넘겼다. 특히 올레츠코 선거구의 경우 독일 잔류가 28,625표가 나올 동안 폴란드 귀속은 단 2표. 득표율 99.99%. 반올림해서 100%.[11] 다만 동프로이센 남부에 위치한 졸다우(Soldau, 폴란드어 : 자우도보(Działdowo))라는 도시는 투표 결과와 관계없이 폴란드로 넘겨졌다. 졸다우는 전간기 동프로이센 지역 중 유일하게 폴란드령으로 귀속된 곳이었다.[12] 물론 이는 독일의 개전 명분 중 하나로, 실제로는 전쟁 발발에 수많은 원인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원인 참조.[13] 그러나 소련은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와 부동항인 필라우 등 요충지 항구도시를 모두 차지했으며 커즌 선 이동의 구 폴란드 영토를 반환하지 않았다. 하지만 폴란드도 융커의 기반 지역 중 하나였던 동프로이센 남부 곡창지대와 폴란드도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영토를 합병하면서 소련에게 잃은 영토 손실을 벌충하긴 했다. 사실 민족감정을 차치하고 산업적, 농업적 가치만 놓고 보면 얻은 영토가 더 높기 때문에 폴란드에 마냥 손해는 아니다.[14]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구 독일 영토에 살던 독일계 주민은 피난민과 추방민을 합쳐서 대략 800만 명 정도로 당시 독일 인구의 10% 정도. 체코, 헝가리 등 중부유럽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추방당한 독일계 주민들까지 포함하면 1500만 명에 달한다. 이들 중 서독을 정착지로 택한 난민들 중 다수가 종전 후 '추방민협회'라는 이익단체를 조직해서 1970년대까지 서독 정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5] 폴란드와 소련 당국에 의한 추방과정은 꽤나 잔혹해서 수십만 명 가량이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그렇지만 이게 다 나치의 업보로 인한 자업자득이니 누굴 탓하리... 여담으로 폴란드 쪽은 오늘날에도 '이주'라는 표현을 쓸 뿐, '추방'이라는 단어에 엄청난 거부감을 보인다.[16] 80% 이상이 러시아계이고 그 외에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리투아니아계 등이 있다. 독일계 주민들은 소련 편입 당시 죽어도 못 떠나겠다며 뻗댄 끝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