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지셔널 아머
[image]
정확히는 Transitional armour(트랜지셔널 아머).
풀 플레이트 아머 이전에 나온, 경번갑(플레이트 앤 메일), 두정갑(브리건딘), 그리고 코트 오브 플레이트 를 통틀어 이르는 말.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오직 봉토를 가진 기사들만 불러모으는, 겨우 40일 간만 동원 시키는 원시적 징집 시스템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기사라고 무조건 봉토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냥 자유민이 영주 밑으로 들어가서 영주의 후원을 받고 무장과 말을 받아서 기사가 되어 복무하는 것이 전형적인 기사 양성 방식이었다. 기사(역사) 항목에서 나오는 기사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런 자유민이 기사가 되는 커리큘럼. 또 중장기병인 기사의 전투력이 워낙 우수해서 전투의 주축이 되다 보니 잊혀진거지, 실제론 기사가 아닌 자유민들은 자기 나름대로 무장을 직접 사서 무장하고 징병의 의무를 졌으며, 그들이 보병의 주축이었다. 또 40일 의무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 농토를 너무 오랫 동안 방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생긴 제약이지, 농토 없이 오직 주군인 영주에게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자유민 가신들은 영주가 어디 전쟁만 나가면 항상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저런 전형적인 봉건제식 징병의 단점이 사람들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일단 사람이 죽어도 무기랑 무장은 고쳐서 다시 쓸 수 있으니, 중보병이건 중장기병이건 자식이 물려받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중세 성기를 거치자 유럽의 인구가 마구 늘었는데 땅은 그대로였고, 유럽의 분할 상속 전통에서는 보통 땅은 첫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둘째,셋째 아들들이 저런 무장을 물려받고는 한 것이다.
영주 입장에선 땅이 있는 자유민은 40일 이상 징집할 수 없는데다가 무장도 없는 상태니, 그냥 땅 없이 무장만 갖춘 사람들을 전문 병력으로 징집하는게 훨씬 낫다. 그렇다고 봉건제가 아무 대가 없이 사람을 병력으로 쓰는 제도도 아니었고, 주군은 그들을 먹여 살릴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 전쟁 중이면 모를까, 평화시에 아무 일도 없는데 그들을 먹여살리는건 당연히 일종의 낭비로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신의 '무장은 있지만 땅은 없는 가신들'을 자기가 알아서 밥벌이를 하게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그게 바로 용병.
반대로 땅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도 굳이 자기 농토를 버려두고 죽을지도 모르는 군대로 끌려가는 것도 싫었고, 아무리 땅과 재산이 있다지만 비싼 무장을 또 갖춰서 무장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이런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생긴 것이 Scutage, 방패세(shield pay)다. 직접 참전하는 것을 대신해서 특별세를 내는 것으로 의무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싫은 자들은 대체로 스큐티지를 낸 것이다.
왕은 이 돈으로 용병을 고용했다. 전문 병사 수준의 훈련도를 보유한 우수한 부대이면서도, 평소에 휘하에 두던 자신의 기사들과는 달리 돈만 지불한다면 즉시 불러다 쓸 수 있고 40일 제한이 없다 보니 고용주 입장으로서는 꽤 매력적일게 분명하다. '''용병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명문화되어서 indentures(계약서)가 되고, 대규모의 전문화된 계약제 병력이 해외원정을 출병하는 풍경을 보여주게 된다. 용병 시대의 개막은 나름 순수하던 봉건제도의 변질을 불러왔고, 용병단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단체로 어슬렁거리거나 아예 일정 지역을 점거 농성하면서 산적화해버린 용병단이 폐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 전쟁터는 왕과 기사가 중심이 되던 때를 벗어났고, 전문화된 병사와 하급병력들도 잘만 운용하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가 프랑스 정규군과 플랑드르 귀족 기사들을 물리치고,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스위스의 농민들은 할버드로 오스트리아 맨앳암즈를 박살내버리며,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보병 장창중심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가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의 기사대를 물리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병사가 전장의 주무대에 올라서게 되자, 기사 간의 전투라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면 죽이기보다는 포로로 잡아서 몸값을 챙기려 들겠지만 평민들은 상관없이 죽여버리는 일이 많아진다. 게다가 기사계급이 아니지만 전문화된 중장병력(Men-at-arms)도 전장에 대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만큼 형편이 좋은 경우가 드물다 보니 기사보다 더 독하고 가열차게 싸우려 들었고, 그래서 맨앳암즈라고 확인되면 포로로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갑옷을 개량하려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
주류 갑옷이 사슬에서 판금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반적으로 도검갑주계에서는 14세기쯤을 사슬과 판금을 혼용하면서 점차 판금으로 전환하던 시기라 하여 Transition Period(이행기)로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에 사용한 사슬과 판금을 혼용한 갑옷을 Transitional Armour(이행기 갑주)라고 한다.
풀케라는 학자는 1277년에서 1410년대 정도까지(십자군 원정 이후, 백년 전쟁 중반까지)라고 찍어서 말하고 있기도 하나, 이런 정확한 연도를 지정하는 것은 학자 개인의 소견이라서 일반적으로 대략 14세기 중후반 정도로 보고 있다.
왜 십자군 원정 이후 인가 하면, 고대시대 수준의 풀무를 사용하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풀무가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강철의 대부분을 무역으로 충당하던 서양은 자체적으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수력 풀무질 까지 발명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독일 등지는 강철제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게 된다. 그런데 풀무만 넘어가고 강철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초강법은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
1420년대는 판금 갑옷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의 시점이다. 이전까지는 갑옷의 스타일은 전 유럽을 통틀어 그다지 차이랄 것도 없었고 대부분의 변화점은 장식적인 부분에 기인했는데, 1420년대를 기점으로 이탈리아 식과 독일 식 판금갑옷의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븐테일도 주폰도 입지 않는, 최초로 완벽하게 판금화된 한벌의 갑옷이 기록 상에서 등장하는 것이 1410년이다.
일부 진보적인 기사들은 이런 새로운 패션을 일찍부터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군대 보급품도 그렇게 한순간에 퍼지는 게 아니라, 대개는 제조의 난이도, 비용, 전통, 유행, 발상의 전환 등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여 점진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시기 상 1548년 정도로 보이는 황동 기념패에 시대에 걸맞지 않는 mail coif가 보인다든가, 1546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다른 흉갑 없이 소매 있는 사슬 호버크만 사용한 기사 같은 예가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구식 갑옷을 사용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게다가 단숨에 전신 갑옷을 판금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 부위를 조금씩 사용해가면서 점차 판금화를 전신으로 확대해나갔다. 즉 처음에는 일부만 섞어입기 시작했었다.
갑주에서 가장 먼저 판금이 도입된 것은 투구였다. 부위가 부위니 만큼 고대부터 철판이나 청동 등으로 만드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메일 시대에서 처음으로 판금제 도구가 방어구로 사용된 것은 Poleyn이라고 부르는 무릎 방어구다.
[image]
폴린은 13세기 중반이라는 꽤나 이른 시기부터 등장해서 사슬 쇼스 위에 착용했다. 이때는 메일(체인, 사슬)의 시대 그리고 방패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후로 총화기가 등장하는 17세기 초까지 꾸준히 디자인을 개량해가면서 사용되었다. 1300년 롱다리왕 에드워드 1세의 전투복장에 관한 내용에 Poleyn이 언급된 적이 있다.
무릎 다음으로 판금으로 보호하는 부분이 다리다. 무릎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판금으로 대체하는 사례가 나온다. 대개 13세기 후반에 나타나지만 1230년 이후 쯤부터 무릎 아래를 가리는 보호구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처음에는 정강이가리개인 schynbalds를 사슬 쇼스 위에 덮은 것이나 전방 부분만 가리는 demi-greave가 먼저 나오고, 1300년대 이후부터는 앞뒤를 모두 가리는 closed greave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하여 schynbalds는 1310년 정도면 사라진다.
[image]
[image]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부위 중에서도 무릎과 다리 갑옷이 먼저 나온 이유는, 주 고객인 기병의 취약점이 무릎과 다리 부분이기 때문이다. 말에 타게 된다면 방패를 들어도 한쪽 다리는 어쩔 수 없이 두들겨 맞기 딱 좋은 높이에서 노출될 뿐더러, 관절부위란 상당히 섬세한 부분인 만큼 잘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다.[2] 또한 방패가 짧아지는 것과 동 시기에 다리 보호구를 개발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둘 간에는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리 보호구를 개발함에 따라 굳이 하체를 모두 보호할 만큼 큰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몸통에 대한 금속제 방어구는 데미그리브와 비슷한 시대에 나온다. 이 초창기 시절의 실물은 유물로 남은 것이 없고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서 살펴봐야 하는데 막상 서코트 아래에 입다 보니 형태를 짐작하기가 좀 어렵다. 그래도 이르면 1190년에 철판으로 만든 흉갑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다.
트랜지션 시대의 철판을 사용하는 흉갑 중에서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coat of plates다. 또는 pair of plates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철판을 조끼 안쪽에 리벳으로 매달아서 만든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armoured surcoat라는 서코트 자체에 철판을 붙이는 것도 있었다. 사실상 코트 오브 플레이트가 아머드 서코트에서 발전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대개의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호버크 위에, 서코트 아래에 입는 별도의 방어구였다. 이르면 12세기 말에 개발해서 호버크와 함께 계속 사용했으며 14세기에 가장 흔한 타입의 흉갑이 이것이고, Battle of Wisby의 유물 발굴에서 잘 알려졌다.
[image]
코트 오브 플레이트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Studded leather armour인데, 세간에는 '스터디드 레더 아머'라는 게 가죽조끼에 스터드(못대가리, 징, 리벳)를 박아서 보강한 종류라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정작 중세 유럽에서는 없었다[3] . 간혹 갬버슨에 스터드를 달았다거나 팔다리에 스터드 달은 가죽제 방어구를 쓰는 경우, 그리고 갑옷으로 분류할 수 없지만 브리갠딘 비슷해보이는 소매없는 웃옷에 리벳을 박아 장식한 것 정도는 있는데, 몸통의 보호구로 징박은 가죽갑옷 같은 게 '갑옷의 종류로 분류될 만큼' 중세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때 스터디드 레더 아머라고 알려졌던 것들은 사실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나 '브리갠딘' 같은 종류의 가죽제 옷 '''아래에 판금'''을 넣어 리벳으로 고정하는 놈이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인데, 비스비 전투의 유물을 통해서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비스비 발굴 이전에 나온 19세기 책에서는 스터디드 레더라는 게 있다고 믿었고 D&D가 그것을 고스란히 베끼다 보니 퍼졌다.
그리고 서양 연구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동양에 있는 이런 모양새의 천이나 가죽제 갑옷도 사실 징 박는 건 몇겹의 재질을 서로 고정하는 용도거나, 장식성으로 달았거나, 두정갑 삘이 쫌 나게 만든 이미테이션 비전투용 복식이 보통이라고 한다. 즉 징 자체에서 엄청난 방어력 증대 같은 걸 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4]
Brigandine도 트랜지션 시대에 등장한 것인데, 비단이나 벨벳으로 된 조끼나 더블릿 따위에 작은 철판을 리벳으로 붙여 만드는 종류로, 철판은 내부에 붙어있어서 천과 리벳만 겉으로 보인다. 트랜지션 시대 갑옷에는 마치 말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스타일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브리갠딘이 바로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리벳에 금도금을 한다든가 예쁜 모양새가 나는 리벳을 쓴다든가 비단이나 벨벳 같은 고급 천으로 만든 조끼처럼 보여서 화려해보이게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대개 소매가 없지만 가끔 달린 것도 있긴 하다. 이것에 대한 기록은 꽤 여러군데에서 발견되고 14세기 초반에서부터 흔하게 보이지만 일단 제일 흔히 사용된 시기는 15세기 중반이다.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14세기에 쭉 사용되었지만, 본격적인 판금 한장으로 성형한 Breast-plate도(종종 backplate도 같이) 1350년대부터 사용했다. 이 시기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대개 조각상의 형상이며, 현재의 유물들은 1420년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뮌헨에는 제법 이른 시기인 1390년대에 만들어진 판금 흉갑의 유물이 하나 남아있다. 뮌헨의 이 유물은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보호를 할 수 있는 형태이며, 겉에는 캔버스 천에 붉은 벨벳으로 감싼 것이 붙어있는데, 이 천 부분은 짧은 스커트처럼 허리 아래로까지 내려가게 되어있고 여기에 둥근 철판 띠를 리벳으로 박음질해서 스커트 방어구 - Fauld로 사용되었다. 허리 아래 방어구로 Lamé을 사용하던 것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에도 있던 것이지만, fauld는 전방 만이 아니라 측면 후면까지 다 가려주므로 더 유용하다.
몸통의 갑옷을 말하는 cuirass라는 단어는 가슴과 등을 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15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단어의 어원 자체는 13세기에 가슴의 방어구를 가리키는 가죽제 cuirie나 cuiret에서 기인한 것이다. 흉갑과 등갑을 합해서 (=cuirass) breat and back이라거나, a pair of plates라고 부르기도 한다.
13세기 후반에는 어깨에서 목 부분 정도에 달아놓는 직사각형의 평평한 판인 Ailette라는 특이한 방어구도 나왔다. 대개 퀴어뷜리나 목판, 철판 등으로 만들어서 가죽끈 따위로 달아놓는다. 이것에는 문양이나 기호가 그려져있기 때문에 오크셧은 이것이 순수하게 장식용이며 문장학적인 표시를 하는 데 썼다고 주장하나, 풀케는 전투 장면을 묘사한 기록에서도 나오는 만큼 목이나 어깨를 방어하는 방어구라고 주장했다. 1290년대에서부터 1325년 정도 사이에 잠시 쓰였던 것으로 어깨관절을 방어하는 좀 더 나은 갑옷이 나오면서 사라지게 된다.
[image]
다리 방어구(jamb, jambeaux)는 그리브, 폴린, 그리고 cuisse가 포함된다. 그리브는 무릎 아래를 덮으며, 폴린은 무릎 부분을 가리는 것이다. 안장에서 무릎으로 조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폴린의 안쪽에 철판을 깊게 대는 일은 드물지만, 바깥쪽에는 철편을 달아서 더 넓은 부위를 가리게 만들어 놓는다. 폴린은 위아래로 그리브와 퀴스에 연결한다.
cuisse는 허벅지를 가리는 방어구로 천으로 만든 것은 전부터 사용했지만 판금제 퀴스는 좀 늦은 14세기 후반 경에 개발한다. 일반적으로 태싯 같은 허벅지 가리개로 허벅지 보호를 할 수 있지만, 아랫쪽에서 찔러올리면 태싯이 별 도움이 안 돼서 필요성이 제기된 것 같다. 원래 바깥쪽 앞쪽 부분만 덮는 것이었으나 1380년 이후 허벅지 뒷쪽도 가린다. 퀴스는 스트랩으로 앞뒤판끼리 고정하고, 예전의 사슬제 쇼스처럼 윗부분에 스트랩으로 허리띠에 연결을 해서 매달아 둔다.
sabaton(또는 soleret)은 발을 보호하는 것인데, 작은 철판 여러개가 곤충의 관절처럼 서로 덮어서 수축하기 편하게 만들어준다. 사바통은 그리브 아랫부분에 고정된 것도 있고, 별도의 신발처럼 착용하는 것도 있다. 별도의 신발처럼 착용하는 거라면 자체적으로 신발 발등에 고정되어있지만, 그리브에 고정하는 형태라면 발바닥 부분으로 가죽 스트랩이 지나가는 형태다. 따라서 발바닥에는 철판이 들어있지 않다. 흔히 사바통이 완전무결한 철구두라고 생각하지만, 발바닥 부분은 평범한 신발바닥에 지나지 않는다.
[image]
팔의 방어구에서 하박(손목에서 팔꿈치까지)을 가리는 것은 vambrace(lower cannon)라고 하고, 팔꿈치는 무릎의 폴린과 비슷한 역할인 couter로 가리며, 상박은 rerebrace(upper cannon)로 가린다. 원래 뱀브레이스는 팔뚝을 가리는 것만을 말했지만, 14세기 후반부터는 팔 전신을 가리는 것도 가리킨다. 어깨는 spaudler라는 마디가 서로 겹쳐서 덮어지는 형식의 가리개로 보호한다. 아직 팔과 어깨가 연결되는 부위라든가 철판이 덮을 수 없는 부위가 많기 때문에, 사슬 호버크를 판금 아래에 착용했었다. 하지만 겨드랑이 같은 쉽게 노출되어보이면서 취약한 부위를 가려주기 위해, besagew라는 철판을 겨드랑이가 가려져보이도록 걸어놓았다(완전히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스트랩으로 달아서 대충 매달려있게 해놓는 형태다).
판금 Gauntlet은 13세기 중반부터 사용하며, 처음에는 철판이나 고래수염, 뿔로 만든 작은 판쪼가리들이 가죽 장갑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형태였으나 1350년대 쯤 한장의 철판을 마치 모래시계 모양처럼 성형해서 손등과 손목을 덮는 짧은 건틀렛(hourglass gauntlet)이 나온다.
[image]
이것도 가죽 장갑 위에 부착하는 형태이고, 손가락 등쪽에는 작은 철판을 매달아놓았다. 물론 건틀렛도 손바닥 안쪽은 평범한 가죽이나 천으로 된 장갑에 지나지 않는다. 판금이나 고래수염 따위 재질을 가죽장갑에 붙이는 형태를 만들자, 이전에 사용하던 사슬로 만든 벙어리장갑(mufflers)은 1330년대 경에 사라진다.
[image]
구형 그레이트 헬름.
[image]
14세기경의 그레이트 헬름.
이 시대 투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레이트 헬름. 14세기의 그레이트 헬름은 13세기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개 sugar-loaf 형, 슈거로프형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수리 쪽을 원뿔이나 반구형으로 곡면처리했다. 곡면처리를 하면 구조적으로도 튼튼해질뿐더러 칼이 잘 안박히고 미끄러지는 효과를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 투구는 머리를 한방 얻어맞거나 격돌 시의 충격으로 투구가 튕겨나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투구가 착용자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체인이나 가죽스트랩 따위로 동체에 묶어두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레이트 헬름은 시야를 많이 제약하고 호흡에도 불편하고 머리 움직임도 제약을 받기 때문에 처음 돌격시에는 그레이트 헬름을 쓰고 있다가, 장창 격돌이 일어난 후 접전이 벌어질 때 그레이트 헬름을 벗어던지고 그 아래에 쓴 배시넷을 노출시킨 채로 싸우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초기 배시넷에는 코를 보호하기 위한 나잘을 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의외로 커다래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무게는 그럭저럭 버틸 만한 수준이라고 한다.
경량 헬멧은 구식의 노르만 헬름도 간혹 언급은 되지만, 대개 투구를 꼭대기는 좀 더 높게 아랫단은 좀 더 낮게 늘려놓은 듯한 형상의 Bascinet을 주로 사용했다. 물론 전통의 캐틀햇이나 기타 오픈헬름 종류도 사용했다. 배시넷은 원래 그레이트헬름 밑에 쓰는 이중투구의 형태로 시작했지만, 아븐테일을 달아서 목까지 보호하다가 나중에는 자체적으로 올리고 내릴 수 있는 바이저를 장착해서 크고 불편한 그레이트헬름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바이저는 보통 돼지코나 개코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했다.
[image]
배시넷 바이저의 힌지가 이마 쪽에 한개만 달린 것은 독일쪽에서 주로 사용한 klappvisor이고, 양 귀쪽 측면에 두개가 달린 것은 이탈리아식 디자인이다. 힌지는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자주 바이저가 필요없으면 그냥 힌지의 핀을 뽑아 바이저를 뗀 채로 다니기도 했다. 떼어버린 바이저는 아마 종자에게 넘겨줬을 것이다. 힌지 핀은 투구에 사슬로 연결돼 있으므로 잃어버릴 일은 없다.
[image]
배시넷과 함께 애용한 것은 영어로 Aventail, 불어로 Camail라고 부르는 목과 어깨를 덮는 크기의 투구 주변에 두르는 사슬로 만든 드림인데, 14세기에 대개 배시넷과 함께 사용하면서 메일 코이프를 대체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이 되면 메일 코이프는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 메일 코이프를 사용하는 가난하거나 여러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긴 했다.
아븐테일을 배시넷에 장착하는 경우 배시넷에 다는 나잘이 이전 노르만 투구와는 달리 배시넷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이 특이한 점이다. 아븐테일의 앞자락에 나잘이 달려있는데, 전투가 임박하면 이것을 들어올려서 배시넷의 눈썹 부분에 걸어서 나잘을 장착하면 아븐테일 앞자락이 나잘에 걸린 채로 들어올려져서 뺨과 안면을 보호하게 된다. 하지만 아븐테일과 배시넷 조합 만으로는 그다지 완성도 높은 안면방어를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별도의 바이저를 장착하기 시작하고, 바이저 달린 배시넷이 그레이트헬름을 대신해서 대형화다가 나중에는 결국 목까지 보호하게 되면서 그레이트 배시넷으로 넘어간다.
14세기에는 아븐테일이 어깨를 덮은 것이 겉으로 보이도록 노출시켰는데. 심지어 갑옷 위에 입는 주폰 같은 의류를 걸치더라도 아븐테일 자락은 주폰 위에 드러나보이게 했다. 그래서 1360년대에서 1405년대 사이에는 특히나 이 아븐테일이야말로 기사 갑옷의 장식성을 화룡점정하는 부분이라고 여기는 풍조도 약간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상 전신의 갑옷이 거의 완전히 판금화에 가까웠지만 아븐테일은 계속 두르고 있는 시기를 카마일 시기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트랜지션 시기와 판금 시기의 차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요소다. 프랑스 디용에 있는 성 조지의 목상을 보면 카마일을 가죽 스트랩으로 배갑에 고정해놓은 걸로 봐서 자락이 출렁거리면서 돌아가지 않도록 단속하기도 한것 같다.
이렇게 각부를 점차 판금으로 두르게 되면서, 판금화가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기에 이르면 거의 플레이트 아머와 별 다를 바가 없어보이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판금화가 된 것과 판금화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아직까지도 흉갑 아래에는 호버크를 걸치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트랜지션 시기에는 전신을 완전히 판금으로 두르지 못하기 때문에 겨드랑이나 옆구리나 팔꿈치 같은 곳이 노출되게 되고,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호버크를 한겹 입고 그 위에 각종 판금 보호구를 둘렀다. 플레이트 아머 시기에는 안에 입는 아밍 더블릿에 거셋이 붙어있으므로 따로 입을 필요가 없다. 그래도 겨드랑이 같은 취약부는 사슬만으로는 불안한 만큼 Rondel이라는 둥글거나 네모나거나 여튼 다양한 모양의 판을 달아서 가렸다.
[image]
갑옷과 투구는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종종 주석을 입히기도 했다. 현대에는 갑옷이 완전히 금속 표면을 노출시키는 것이 유행이지만, 예전에는 페인트칠을 하거나 그 위에 의류를 둘러 직접 노출을 피하는 일이 많았고, 종종 금속제 갑옷과 투구 위에 가죽이나 고급 옷감을 붙여 덮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14세기까지는 아직 서코트 부류의 갑옷 위에 두르는 의류를 사용했으나, 14세기에는 13세기 식의 치렁치렁한 잠옷같은 서코트는 유행이 지났을 때다. 치렁거리는 서코트는 휘감겨서 곤란한 때도 있었기 때문에 대개 앞자락이 허벅지를 넘어가지 않게 짧게 만든 서코트인 Cyclas을 쓰거나, 몸에 잘 맞고 허리가 잘록하게 강조되며 소매가 없고 아랫단도 힙 정도 길이의 외투인 jupon을 사용했다. 영국에서는 coat of arms라고 불렀다. 문장학이 발전한 시대인 만큼 부유한 이들은 보통 주폰에다 화려한 장식을 했다.
허나 1420년대를 지나면 더이상 서코트 류를 걸치지 않는 'surcoatless period'이며, 서코트를 걸치지 않은 상태로 금속색을 그대로 내보인 판금갑옷을 white armour, 또는 alwyte armour라고 불렀다.
14세기에 이르면 방패의 종류는 수없이 많아지고 형태와 장식이 무궁무진했다. 방패는 당연히 방어용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 문장학이 발전하여 규격화 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문장을 그려 식별용도로도 발전했다. 특히 독일의 방패가 터무니없이 사치스럽게 다양했다. 길다란 구식의 카이트 실드도 동 시기의 기록 상에서 발견은 되나, 1270년대 경부터 방패는 히터 실드라고 하는 좀 더 짧은 형태에 아랫쪽이 둥그스름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또한 마상용 방패에는 우측 상단 모서리에 bouché라고 부르는 패인 홈을 만들어서, 여기를 통해 랜스를 거치하고 몸이나 팔이 공격 시에 방패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만든 것이 많았다. 방패는 강철판으로 만드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몹시 드물고 대개는 목판에 가죽이나 퀴어(뷜리로 덮어 보강해 만들었다)목재와 가죽으로 만든 소모품이다 보니 방패의 실제 유물이 드문 것이다.
체인 위에다 코트 오브 플레이트에다 각종 부위 갑옷을 걸치면 방어가 상당히 우수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단점이 많다. 우선 갑옷끼리 빈틈없이 잘 맞물린 것이 아니다 보니 각 부위 사이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이나 틈새를 쑤시고 찔러올 수 있다는 단점. 그리고 가죽 옷, 패드를 넣은 아케튼, 메일 호버크, 코트 오브 플레이트, 그리고 서코트, 건틀릿과 그리브까지... 트랜지션 시대의 갑옷 한벌을 다 걸치면 몹시 무겁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때문에 빈틈없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도록 전신 부위를 판금화한 플레이트 아머가 더 경량이며 훨씬 우수한 방어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갑옷에 있어서 국가적인 특색이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에 들어선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그래서 그 이전의 복장을 보고 싶다면, 13세기 영국 귀족의 전투복 차림을 보고 싶다면 동시기 스웨덴이나 스페인의 유물화 등을 살펴도 된다. 1380년대에서 1400년대 사이에 판금 갑옷의 '인터네셔널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판금 갑옷의 공통형이나 표준형 같은 것이 생기는데, 1350년 이후부터는 갑옷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던 국가적인 특징은 사실 세부에 있어서는 서로간의 차이가 거의 없고 장식면에 있어서만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갑옷 위에 뭐를 걸쳤나, 어떤 장식을 달았냐가 차이점.
그런데 1420년대 정도를 기점으로 해서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고 불리던 기존의 플레이트 아머 스타일 = 후기의 플레이트 앤 메일 스타일을 탈피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고유한 스타일의 판금 갑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국가적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기초 토대는 이미 14세기부터 잡혀있었다.
1298년에서 1344년 사이에 이탈리아 작가인 Galvano Fiarnma는 Chronichon Extravagans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에는 13세기 중반에서부터 16세기까지 최고의 갑옷 제조처로 손꼽힌 밀라노 장인들에 대해 쓴 부분이 있는데, 대규모의 조직화된 장인들을 묘사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를 시작으로 한 서브컬쳐계열에서 가장 골치아프게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는 도검이 '바스타드 소드와 롱 소드'라면, 가장 경원을 살 만한 갑주 용어가 '플레이트 메일'이다.
19세기, 몇몇 빅토리아 시대 학자들은 '사슬 갑옷'을 뜻하는 'mail'이라는 단어를 갑옷을 가리키는 보편의미로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었다. 이래서 mail이 armour와 같은 뜻으로 오인되면서 그 뒤로 계속 혼용했기 때문에 플레이트 아머를 플레이트 메일, 스케일 아머를 스케일메일로 불러버리고, 심지어는 그냥 메일로 불러야 할 것을 "체인메일"이라고 동어반복을 하는 요상한 용어가 탄생했다.
D&D 제작진들은 학교 숙제 수준의 구식 자료서적을 참고해서 만들다 보니 이런 잘못된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판타지 게이밍 서브컬쳐계 전역에 이런 오류가 퍼진 것도 따지고 보면 원조인 D&D부터 이어진 원죄인 셈.
그래서 '플레이트 메일'이란 용어 자체는 도검갑주계에서 정식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현재 학자들은 Platemail이란 말은 쓰지 않고 'plate '''and''' mail', 'transitional armour' 등으로 표기한다.
하지만 D&D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서브컬쳐 계열에서는
1. 플레이트메일과 플레이트 아머의 구분을 할 줄 모른다, 같은 것으로 안다.
2. 플레이트메일이 플레이트 아머 이전 시대의 것으로 안다
의 두 타입이 있다.
하지만 Plate-mail이란 단어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잘못된 용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 도검갑주계열로 가서 엄격한 구분을 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서브컬쳐 쪽에서 플레이트메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별로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트랜지셔널 아머라는 개념과 흔히 말하는 플레이트 메일은 것은 또 서로 좀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플레이트메일로 알고 있는, 혹은 플레이트메일과 착각하는 비슷한것들을 나열해 보자면
A Knight and His Armor by Ewart Oakeshott
Armour & weapons by Charles J. Ffoulkes
Arms and Armor of the Medieval Knight by David Edge and John M. Paddock
European Armour circa 1066 to circa 1700 by Claude Blair
http://en.wikipedia.org/wiki/Brigandine
http://en.wikipedia.org/wiki/Coat_of_plates
http://en.wikipedia.org/wiki/Plated_mail
http://en.wikipedia.org/wiki/Ailette
http://en.wikipedia.org/wiki/Great_helm
http://en.wikipedia.org/wiki/Bascinet
http://en.wikipedia.org/wiki/Camail
1. 개요
2. 배경: 14세기의 변화
3. 이행기(Transition Period), 1277 ~ 1410년 정도
4. 판금 갑옷의 완성
5. 등장순서별 구성요소
5.1. 머리(투구)
5.2. 무릎(폴린): 13세기 중반
5.3. 다리(스킨발즈, 데미 그리브, 클로즈드 그리브): 13세기 후반
5.4. 몸통: 13세기 후반
5.5. 어깨에서 목(알리에트): 13세기 후반
5.6. 다리 (잼, 잼뷱스 - 그리브(무릎 아래), 폴린(무릎), 퀴스(허벅지)): 14세기 후반
5.7. 발(사보탄)
5.8. 팔(뱀브레이스(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카우터(팔꿈치), 리리브레이스(상박), 스파우들러(어깨), 베사규(겨드랑이), 건틀릿(손)): 14세기 후반
5.9. 머리(그레이트 헬름(외부), 베시넷(내부), 나잘(코)): 14세기
5.10. 갑옷의 각부분 완료
5.11. 치장
5.12. 방패
6. 종말
7. '플레이트 메일'?
8. 참고문헌
1. 개요
정확히는 Transitional armour(트랜지셔널 아머).
풀 플레이트 아머 이전에 나온, 경번갑(플레이트 앤 메일), 두정갑(브리건딘), 그리고 코트 오브 플레이트 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배경: 14세기의 변화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오직 봉토를 가진 기사들만 불러모으는, 겨우 40일 간만 동원 시키는 원시적 징집 시스템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기사라고 무조건 봉토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그냥 자유민이 영주 밑으로 들어가서 영주의 후원을 받고 무장과 말을 받아서 기사가 되어 복무하는 것이 전형적인 기사 양성 방식이었다. 기사(역사) 항목에서 나오는 기사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런 자유민이 기사가 되는 커리큘럼. 또 중장기병인 기사의 전투력이 워낙 우수해서 전투의 주축이 되다 보니 잊혀진거지, 실제론 기사가 아닌 자유민들은 자기 나름대로 무장을 직접 사서 무장하고 징병의 의무를 졌으며, 그들이 보병의 주축이었다. 또 40일 의무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 농토를 너무 오랫 동안 방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생긴 제약이지, 농토 없이 오직 주군인 영주에게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자유민 가신들은 영주가 어디 전쟁만 나가면 항상 따라가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저런 전형적인 봉건제식 징병의 단점이 사람들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일단 사람이 죽어도 무기랑 무장은 고쳐서 다시 쓸 수 있으니, 중보병이건 중장기병이건 자식이 물려받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중세 성기를 거치자 유럽의 인구가 마구 늘었는데 땅은 그대로였고, 유럽의 분할 상속 전통에서는 보통 땅은 첫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둘째,셋째 아들들이 저런 무장을 물려받고는 한 것이다.
영주 입장에선 땅이 있는 자유민은 40일 이상 징집할 수 없는데다가 무장도 없는 상태니, 그냥 땅 없이 무장만 갖춘 사람들을 전문 병력으로 징집하는게 훨씬 낫다. 그렇다고 봉건제가 아무 대가 없이 사람을 병력으로 쓰는 제도도 아니었고, 주군은 그들을 먹여 살릴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 전쟁 중이면 모를까, 평화시에 아무 일도 없는데 그들을 먹여살리는건 당연히 일종의 낭비로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신의 '무장은 있지만 땅은 없는 가신들'을 자기가 알아서 밥벌이를 하게 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그게 바로 용병.
반대로 땅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도 굳이 자기 농토를 버려두고 죽을지도 모르는 군대로 끌려가는 것도 싫었고, 아무리 땅과 재산이 있다지만 비싼 무장을 또 갖춰서 무장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이런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생긴 것이 Scutage, 방패세(shield pay)다. 직접 참전하는 것을 대신해서 특별세를 내는 것으로 의무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전쟁에 참여하기 싫은 자들은 대체로 스큐티지를 낸 것이다.
왕은 이 돈으로 용병을 고용했다. 전문 병사 수준의 훈련도를 보유한 우수한 부대이면서도, 평소에 휘하에 두던 자신의 기사들과는 달리 돈만 지불한다면 즉시 불러다 쓸 수 있고 40일 제한이 없다 보니 고용주 입장으로서는 꽤 매력적일게 분명하다. '''용병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명문화되어서 indentures(계약서)가 되고, 대규모의 전문화된 계약제 병력이 해외원정을 출병하는 풍경을 보여주게 된다. 용병 시대의 개막은 나름 순수하던 봉건제도의 변질을 불러왔고, 용병단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계약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단체로 어슬렁거리거나 아예 일정 지역을 점거 농성하면서 산적화해버린 용병단이 폐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 전쟁터는 왕과 기사가 중심이 되던 때를 벗어났고, 전문화된 병사와 하급병력들도 잘만 운용하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302년 코르트레이크 전투에서 플랑드르 민병대가 프랑스 정규군과 플랑드르 귀족 기사들을 물리치고, 1315년 모르가르텐에서 스위스의 농민들은 할버드로 오스트리아 맨앳암즈를 박살내버리며,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보병 장창중심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가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2세의 기사대를 물리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병사가 전장의 주무대에 올라서게 되자, 기사 간의 전투라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치면 죽이기보다는 포로로 잡아서 몸값을 챙기려 들겠지만 평민들은 상관없이 죽여버리는 일이 많아진다. 게다가 기사계급이 아니지만 전문화된 중장병력(Men-at-arms)도 전장에 대량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날 만큼 형편이 좋은 경우가 드물다 보니 기사보다 더 독하고 가열차게 싸우려 들었고, 그래서 맨앳암즈라고 확인되면 포로로 잡을 생각을 안 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갑옷을 개량하려는 시도는 계속 있었다.
3. 이행기(Transition Period), 1277 ~ 1410년 정도
주류 갑옷이 사슬에서 판금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반적으로 도검갑주계에서는 14세기쯤을 사슬과 판금을 혼용하면서 점차 판금으로 전환하던 시기라 하여 Transition Period(이행기)로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에 사용한 사슬과 판금을 혼용한 갑옷을 Transitional Armour(이행기 갑주)라고 한다.
풀케라는 학자는 1277년에서 1410년대 정도까지(십자군 원정 이후, 백년 전쟁 중반까지)라고 찍어서 말하고 있기도 하나, 이런 정확한 연도를 지정하는 것은 학자 개인의 소견이라서 일반적으로 대략 14세기 중후반 정도로 보고 있다.
왜 십자군 원정 이후 인가 하면, 고대시대 수준의 풀무를 사용하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풀무가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강철의 대부분을 무역으로 충당하던 서양은 자체적으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수력 풀무질 까지 발명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독일 등지는 강철제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게 된다. 그런데 풀무만 넘어가고 강철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초강법은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
4. 판금 갑옷의 완성
1420년대는 판금 갑옷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의 시점이다. 이전까지는 갑옷의 스타일은 전 유럽을 통틀어 그다지 차이랄 것도 없었고 대부분의 변화점은 장식적인 부분에 기인했는데, 1420년대를 기점으로 이탈리아 식과 독일 식 판금갑옷의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븐테일도 주폰도 입지 않는, 최초로 완벽하게 판금화된 한벌의 갑옷이 기록 상에서 등장하는 것이 1410년이다.
일부 진보적인 기사들은 이런 새로운 패션을 일찍부터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군대 보급품도 그렇게 한순간에 퍼지는 게 아니라, 대개는 제조의 난이도, 비용, 전통, 유행, 발상의 전환 등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여 점진적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시기 상 1548년 정도로 보이는 황동 기념패에 시대에 걸맞지 않는 mail coif가 보인다든가, 1546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다른 흉갑 없이 소매 있는 사슬 호버크만 사용한 기사 같은 예가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구식 갑옷을 사용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다. 게다가 단숨에 전신 갑옷을 판금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 부위를 조금씩 사용해가면서 점차 판금화를 전신으로 확대해나갔다. 즉 처음에는 일부만 섞어입기 시작했었다.
5. 등장순서별 구성요소
5.1. 머리(투구)
갑주에서 가장 먼저 판금이 도입된 것은 투구였다. 부위가 부위니 만큼 고대부터 철판이나 청동 등으로 만드는 게 당연했다.
5.2. 무릎(폴린): 13세기 중반
그리고 메일 시대에서 처음으로 판금제 도구가 방어구로 사용된 것은 Poleyn이라고 부르는 무릎 방어구다.
[image]
폴린은 13세기 중반이라는 꽤나 이른 시기부터 등장해서 사슬 쇼스 위에 착용했다. 이때는 메일(체인, 사슬)의 시대 그리고 방패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후로 총화기가 등장하는 17세기 초까지 꾸준히 디자인을 개량해가면서 사용되었다. 1300년 롱다리왕 에드워드 1세의 전투복장에 관한 내용에 Poleyn이 언급된 적이 있다.
5.3. 다리(스킨발즈, 데미 그리브, 클로즈드 그리브): 13세기 후반
무릎 다음으로 판금으로 보호하는 부분이 다리다. 무릎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판금으로 대체하는 사례가 나온다. 대개 13세기 후반에 나타나지만 1230년 이후 쯤부터 무릎 아래를 가리는 보호구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처음에는 정강이가리개인 schynbalds를 사슬 쇼스 위에 덮은 것이나 전방 부분만 가리는 demi-greave가 먼저 나오고, 1300년대 이후부터는 앞뒤를 모두 가리는 closed greave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하여 schynbalds는 1310년 정도면 사라진다.
[image]
[image]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부위 중에서도 무릎과 다리 갑옷이 먼저 나온 이유는, 주 고객인 기병의 취약점이 무릎과 다리 부분이기 때문이다. 말에 타게 된다면 방패를 들어도 한쪽 다리는 어쩔 수 없이 두들겨 맞기 딱 좋은 높이에서 노출될 뿐더러, 관절부위란 상당히 섬세한 부분인 만큼 잘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다.[2] 또한 방패가 짧아지는 것과 동 시기에 다리 보호구를 개발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둘 간에는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리 보호구를 개발함에 따라 굳이 하체를 모두 보호할 만큼 큰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5.4. 몸통: 13세기 후반
5.4.1. 코트 오브 플레이트
몸통에 대한 금속제 방어구는 데미그리브와 비슷한 시대에 나온다. 이 초창기 시절의 실물은 유물로 남은 것이 없고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서 살펴봐야 하는데 막상 서코트 아래에 입다 보니 형태를 짐작하기가 좀 어렵다. 그래도 이르면 1190년에 철판으로 만든 흉갑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다.
트랜지션 시대의 철판을 사용하는 흉갑 중에서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coat of plates다. 또는 pair of plates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철판을 조끼 안쪽에 리벳으로 매달아서 만든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armoured surcoat라는 서코트 자체에 철판을 붙이는 것도 있었다. 사실상 코트 오브 플레이트가 아머드 서코트에서 발전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대개의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호버크 위에, 서코트 아래에 입는 별도의 방어구였다. 이르면 12세기 말에 개발해서 호버크와 함께 계속 사용했으며 14세기에 가장 흔한 타입의 흉갑이 이것이고, Battle of Wisby의 유물 발굴에서 잘 알려졌다.
[image]
코트 오브 플레이트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Studded leather armour인데, 세간에는 '스터디드 레더 아머'라는 게 가죽조끼에 스터드(못대가리, 징, 리벳)를 박아서 보강한 종류라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정작 중세 유럽에서는 없었다[3] . 간혹 갬버슨에 스터드를 달았다거나 팔다리에 스터드 달은 가죽제 방어구를 쓰는 경우, 그리고 갑옷으로 분류할 수 없지만 브리갠딘 비슷해보이는 소매없는 웃옷에 리벳을 박아 장식한 것 정도는 있는데, 몸통의 보호구로 징박은 가죽갑옷 같은 게 '갑옷의 종류로 분류될 만큼' 중세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때 스터디드 레더 아머라고 알려졌던 것들은 사실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나 '브리갠딘' 같은 종류의 가죽제 옷 '''아래에 판금'''을 넣어 리벳으로 고정하는 놈이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잘못 알려진 것인데, 비스비 전투의 유물을 통해서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비스비 발굴 이전에 나온 19세기 책에서는 스터디드 레더라는 게 있다고 믿었고 D&D가 그것을 고스란히 베끼다 보니 퍼졌다.
그리고 서양 연구가들의 판단에 따르면 동양에 있는 이런 모양새의 천이나 가죽제 갑옷도 사실 징 박는 건 몇겹의 재질을 서로 고정하는 용도거나, 장식성으로 달았거나, 두정갑 삘이 쫌 나게 만든 이미테이션 비전투용 복식이 보통이라고 한다. 즉 징 자체에서 엄청난 방어력 증대 같은 걸 노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4]
5.4.2. 브리간딘, 14세기 초반
Brigandine도 트랜지션 시대에 등장한 것인데, 비단이나 벨벳으로 된 조끼나 더블릿 따위에 작은 철판을 리벳으로 붙여 만드는 종류로, 철판은 내부에 붙어있어서 천과 리벳만 겉으로 보인다. 트랜지션 시대 갑옷에는 마치 말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스타일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브리갠딘이 바로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리벳에 금도금을 한다든가 예쁜 모양새가 나는 리벳을 쓴다든가 비단이나 벨벳 같은 고급 천으로 만든 조끼처럼 보여서 화려해보이게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대개 소매가 없지만 가끔 달린 것도 있긴 하다. 이것에 대한 기록은 꽤 여러군데에서 발견되고 14세기 초반에서부터 흔하게 보이지만 일단 제일 흔히 사용된 시기는 15세기 중반이다.
5.4.3. 브레스트 플레이트, 14세기 중반
코트 오브 플레이트는 14세기에 쭉 사용되었지만, 본격적인 판금 한장으로 성형한 Breast-plate도(종종 backplate도 같이) 1350년대부터 사용했다. 이 시기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대개 조각상의 형상이며, 현재의 유물들은 1420년 이후의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뮌헨에는 제법 이른 시기인 1390년대에 만들어진 판금 흉갑의 유물이 하나 남아있다. 뮌헨의 이 유물은 목에서부터 허리까지 보호를 할 수 있는 형태이며, 겉에는 캔버스 천에 붉은 벨벳으로 감싼 것이 붙어있는데, 이 천 부분은 짧은 스커트처럼 허리 아래로까지 내려가게 되어있고 여기에 둥근 철판 띠를 리벳으로 박음질해서 스커트 방어구 - Fauld로 사용되었다. 허리 아래 방어구로 Lamé을 사용하던 것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에도 있던 것이지만, fauld는 전방 만이 아니라 측면 후면까지 다 가려주므로 더 유용하다.
5.4.4. 큐어래스, 페어 오브 플레이츠(가슴 + 등), 15세기
몸통의 갑옷을 말하는 cuirass라는 단어는 가슴과 등을 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용어는 15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단어의 어원 자체는 13세기에 가슴의 방어구를 가리키는 가죽제 cuirie나 cuiret에서 기인한 것이다. 흉갑과 등갑을 합해서 (=cuirass) breat and back이라거나, a pair of plates라고 부르기도 한다.
5.5. 어깨에서 목(알리에트): 13세기 후반
13세기 후반에는 어깨에서 목 부분 정도에 달아놓는 직사각형의 평평한 판인 Ailette라는 특이한 방어구도 나왔다. 대개 퀴어뷜리나 목판, 철판 등으로 만들어서 가죽끈 따위로 달아놓는다. 이것에는 문양이나 기호가 그려져있기 때문에 오크셧은 이것이 순수하게 장식용이며 문장학적인 표시를 하는 데 썼다고 주장하나, 풀케는 전투 장면을 묘사한 기록에서도 나오는 만큼 목이나 어깨를 방어하는 방어구라고 주장했다. 1290년대에서부터 1325년 정도 사이에 잠시 쓰였던 것으로 어깨관절을 방어하는 좀 더 나은 갑옷이 나오면서 사라지게 된다.
5.6. 다리 (잼, 잼뷱스 - 그리브(무릎 아래), 폴린(무릎), 퀴스(허벅지)): 14세기 후반
[image]
다리 방어구(jamb, jambeaux)는 그리브, 폴린, 그리고 cuisse가 포함된다. 그리브는 무릎 아래를 덮으며, 폴린은 무릎 부분을 가리는 것이다. 안장에서 무릎으로 조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폴린의 안쪽에 철판을 깊게 대는 일은 드물지만, 바깥쪽에는 철편을 달아서 더 넓은 부위를 가리게 만들어 놓는다. 폴린은 위아래로 그리브와 퀴스에 연결한다.
cuisse는 허벅지를 가리는 방어구로 천으로 만든 것은 전부터 사용했지만 판금제 퀴스는 좀 늦은 14세기 후반 경에 개발한다. 일반적으로 태싯 같은 허벅지 가리개로 허벅지 보호를 할 수 있지만, 아랫쪽에서 찔러올리면 태싯이 별 도움이 안 돼서 필요성이 제기된 것 같다. 원래 바깥쪽 앞쪽 부분만 덮는 것이었으나 1380년 이후 허벅지 뒷쪽도 가린다. 퀴스는 스트랩으로 앞뒤판끼리 고정하고, 예전의 사슬제 쇼스처럼 윗부분에 스트랩으로 허리띠에 연결을 해서 매달아 둔다.
5.7. 발(사보탄)
sabaton(또는 soleret)은 발을 보호하는 것인데, 작은 철판 여러개가 곤충의 관절처럼 서로 덮어서 수축하기 편하게 만들어준다. 사바통은 그리브 아랫부분에 고정된 것도 있고, 별도의 신발처럼 착용하는 것도 있다. 별도의 신발처럼 착용하는 거라면 자체적으로 신발 발등에 고정되어있지만, 그리브에 고정하는 형태라면 발바닥 부분으로 가죽 스트랩이 지나가는 형태다. 따라서 발바닥에는 철판이 들어있지 않다. 흔히 사바통이 완전무결한 철구두라고 생각하지만, 발바닥 부분은 평범한 신발바닥에 지나지 않는다.
5.8. 팔(뱀브레이스(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카우터(팔꿈치), 리리브레이스(상박), 스파우들러(어깨), 베사규(겨드랑이), 건틀릿(손)): 14세기 후반
[image]
팔의 방어구에서 하박(손목에서 팔꿈치까지)을 가리는 것은 vambrace(lower cannon)라고 하고, 팔꿈치는 무릎의 폴린과 비슷한 역할인 couter로 가리며, 상박은 rerebrace(upper cannon)로 가린다. 원래 뱀브레이스는 팔뚝을 가리는 것만을 말했지만, 14세기 후반부터는 팔 전신을 가리는 것도 가리킨다. 어깨는 spaudler라는 마디가 서로 겹쳐서 덮어지는 형식의 가리개로 보호한다. 아직 팔과 어깨가 연결되는 부위라든가 철판이 덮을 수 없는 부위가 많기 때문에, 사슬 호버크를 판금 아래에 착용했었다. 하지만 겨드랑이 같은 쉽게 노출되어보이면서 취약한 부위를 가려주기 위해, besagew라는 철판을 겨드랑이가 가려져보이도록 걸어놓았다(완전히 고정시키는 게 아니라 스트랩으로 달아서 대충 매달려있게 해놓는 형태다).
판금 Gauntlet은 13세기 중반부터 사용하며, 처음에는 철판이나 고래수염, 뿔로 만든 작은 판쪼가리들이 가죽 장갑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형태였으나 1350년대 쯤 한장의 철판을 마치 모래시계 모양처럼 성형해서 손등과 손목을 덮는 짧은 건틀렛(hourglass gauntlet)이 나온다.
[image]
이것도 가죽 장갑 위에 부착하는 형태이고, 손가락 등쪽에는 작은 철판을 매달아놓았다. 물론 건틀렛도 손바닥 안쪽은 평범한 가죽이나 천으로 된 장갑에 지나지 않는다. 판금이나 고래수염 따위 재질을 가죽장갑에 붙이는 형태를 만들자, 이전에 사용하던 사슬로 만든 벙어리장갑(mufflers)은 1330년대 경에 사라진다.
5.9. 머리(그레이트 헬름(외부), 베시넷(내부), 나잘(코)): 14세기
5.9.1. 중량 헬멧
[image]
구형 그레이트 헬름.
[image]
14세기경의 그레이트 헬름.
이 시대 투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레이트 헬름. 14세기의 그레이트 헬름은 13세기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대개 sugar-loaf 형, 슈거로프형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수리 쪽을 원뿔이나 반구형으로 곡면처리했다. 곡면처리를 하면 구조적으로도 튼튼해질뿐더러 칼이 잘 안박히고 미끄러지는 효과를 기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 투구는 머리를 한방 얻어맞거나 격돌 시의 충격으로 투구가 튕겨나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투구가 착용자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체인이나 가죽스트랩 따위로 동체에 묶어두는 부분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레이트 헬름은 시야를 많이 제약하고 호흡에도 불편하고 머리 움직임도 제약을 받기 때문에 처음 돌격시에는 그레이트 헬름을 쓰고 있다가, 장창 격돌이 일어난 후 접전이 벌어질 때 그레이트 헬름을 벗어던지고 그 아래에 쓴 배시넷을 노출시킨 채로 싸우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초기 배시넷에는 코를 보호하기 위한 나잘을 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의외로 커다래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무게는 그럭저럭 버틸 만한 수준이라고 한다.
5.9.2. 경량 헬멧(베시넷, 캐틀햇, 오픈헬름), 목(아븐테일), 바이저
경량 헬멧은 구식의 노르만 헬름도 간혹 언급은 되지만, 대개 투구를 꼭대기는 좀 더 높게 아랫단은 좀 더 낮게 늘려놓은 듯한 형상의 Bascinet을 주로 사용했다. 물론 전통의 캐틀햇이나 기타 오픈헬름 종류도 사용했다. 배시넷은 원래 그레이트헬름 밑에 쓰는 이중투구의 형태로 시작했지만, 아븐테일을 달아서 목까지 보호하다가 나중에는 자체적으로 올리고 내릴 수 있는 바이저를 장착해서 크고 불편한 그레이트헬름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바이저는 보통 돼지코나 개코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용했다.
[image]
배시넷 바이저의 힌지가 이마 쪽에 한개만 달린 것은 독일쪽에서 주로 사용한 klappvisor이고, 양 귀쪽 측면에 두개가 달린 것은 이탈리아식 디자인이다. 힌지는 뽑아버릴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자주 바이저가 필요없으면 그냥 힌지의 핀을 뽑아 바이저를 뗀 채로 다니기도 했다. 떼어버린 바이저는 아마 종자에게 넘겨줬을 것이다. 힌지 핀은 투구에 사슬로 연결돼 있으므로 잃어버릴 일은 없다.
[image]
배시넷과 함께 애용한 것은 영어로 Aventail, 불어로 Camail라고 부르는 목과 어깨를 덮는 크기의 투구 주변에 두르는 사슬로 만든 드림인데, 14세기에 대개 배시넷과 함께 사용하면서 메일 코이프를 대체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이 되면 메일 코이프는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 메일 코이프를 사용하는 가난하거나 여러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긴 했다.
아븐테일을 배시넷에 장착하는 경우 배시넷에 다는 나잘이 이전 노르만 투구와는 달리 배시넷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이 특이한 점이다. 아븐테일의 앞자락에 나잘이 달려있는데, 전투가 임박하면 이것을 들어올려서 배시넷의 눈썹 부분에 걸어서 나잘을 장착하면 아븐테일 앞자락이 나잘에 걸린 채로 들어올려져서 뺨과 안면을 보호하게 된다. 하지만 아븐테일과 배시넷 조합 만으로는 그다지 완성도 높은 안면방어를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별도의 바이저를 장착하기 시작하고, 바이저 달린 배시넷이 그레이트헬름을 대신해서 대형화다가 나중에는 결국 목까지 보호하게 되면서 그레이트 배시넷으로 넘어간다.
14세기에는 아븐테일이 어깨를 덮은 것이 겉으로 보이도록 노출시켰는데. 심지어 갑옷 위에 입는 주폰 같은 의류를 걸치더라도 아븐테일 자락은 주폰 위에 드러나보이게 했다. 그래서 1360년대에서 1405년대 사이에는 특히나 이 아븐테일이야말로 기사 갑옷의 장식성을 화룡점정하는 부분이라고 여기는 풍조도 약간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상 전신의 갑옷이 거의 완전히 판금화에 가까웠지만 아븐테일은 계속 두르고 있는 시기를 카마일 시기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트랜지션 시기와 판금 시기의 차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요소다. 프랑스 디용에 있는 성 조지의 목상을 보면 카마일을 가죽 스트랩으로 배갑에 고정해놓은 걸로 봐서 자락이 출렁거리면서 돌아가지 않도록 단속하기도 한것 같다.
5.10. 갑옷의 각부분 완료
이렇게 각부를 점차 판금으로 두르게 되면서, 판금화가 거의 완료되어가는 시기에 이르면 거의 플레이트 아머와 별 다를 바가 없어보이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판금화가 된 것과 판금화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아직까지도 흉갑 아래에는 호버크를 걸치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트랜지션 시기에는 전신을 완전히 판금으로 두르지 못하기 때문에 겨드랑이나 옆구리나 팔꿈치 같은 곳이 노출되게 되고,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호버크를 한겹 입고 그 위에 각종 판금 보호구를 둘렀다. 플레이트 아머 시기에는 안에 입는 아밍 더블릿에 거셋이 붙어있으므로 따로 입을 필요가 없다. 그래도 겨드랑이 같은 취약부는 사슬만으로는 불안한 만큼 Rondel이라는 둥글거나 네모나거나 여튼 다양한 모양의 판을 달아서 가렸다.
[image]
5.11. 치장
갑옷과 투구는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종종 주석을 입히기도 했다. 현대에는 갑옷이 완전히 금속 표면을 노출시키는 것이 유행이지만, 예전에는 페인트칠을 하거나 그 위에 의류를 둘러 직접 노출을 피하는 일이 많았고, 종종 금속제 갑옷과 투구 위에 가죽이나 고급 옷감을 붙여 덮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14세기까지는 아직 서코트 부류의 갑옷 위에 두르는 의류를 사용했으나, 14세기에는 13세기 식의 치렁치렁한 잠옷같은 서코트는 유행이 지났을 때다. 치렁거리는 서코트는 휘감겨서 곤란한 때도 있었기 때문에 대개 앞자락이 허벅지를 넘어가지 않게 짧게 만든 서코트인 Cyclas을 쓰거나, 몸에 잘 맞고 허리가 잘록하게 강조되며 소매가 없고 아랫단도 힙 정도 길이의 외투인 jupon을 사용했다. 영국에서는 coat of arms라고 불렀다. 문장학이 발전한 시대인 만큼 부유한 이들은 보통 주폰에다 화려한 장식을 했다.
허나 1420년대를 지나면 더이상 서코트 류를 걸치지 않는 'surcoatless period'이며, 서코트를 걸치지 않은 상태로 금속색을 그대로 내보인 판금갑옷을 white armour, 또는 alwyte armour라고 불렀다.
5.12. 방패
14세기에 이르면 방패의 종류는 수없이 많아지고 형태와 장식이 무궁무진했다. 방패는 당연히 방어용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 문장학이 발전하여 규격화 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문장을 그려 식별용도로도 발전했다. 특히 독일의 방패가 터무니없이 사치스럽게 다양했다. 길다란 구식의 카이트 실드도 동 시기의 기록 상에서 발견은 되나, 1270년대 경부터 방패는 히터 실드라고 하는 좀 더 짧은 형태에 아랫쪽이 둥그스름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또한 마상용 방패에는 우측 상단 모서리에 bouché라고 부르는 패인 홈을 만들어서, 여기를 통해 랜스를 거치하고 몸이나 팔이 공격 시에 방패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만든 것이 많았다. 방패는 강철판으로 만드는 경우도 간혹 있으나 몹시 드물고 대개는 목판에 가죽이나 퀴어(뷜리로 덮어 보강해 만들었다)목재와 가죽으로 만든 소모품이다 보니 방패의 실제 유물이 드문 것이다.
6. 종말
체인 위에다 코트 오브 플레이트에다 각종 부위 갑옷을 걸치면 방어가 상당히 우수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생각보다 단점이 많다. 우선 갑옷끼리 빈틈없이 잘 맞물린 것이 아니다 보니 각 부위 사이로 보호되지 않는 부분이나 틈새를 쑤시고 찔러올 수 있다는 단점. 그리고 가죽 옷, 패드를 넣은 아케튼, 메일 호버크, 코트 오브 플레이트, 그리고 서코트, 건틀릿과 그리브까지... 트랜지션 시대의 갑옷 한벌을 다 걸치면 몹시 무겁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때문에 빈틈없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도록 전신 부위를 판금화한 플레이트 아머가 더 경량이며 훨씬 우수한 방어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갑옷에 있어서 국가적인 특색이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에 들어선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그래서 그 이전의 복장을 보고 싶다면, 13세기 영국 귀족의 전투복 차림을 보고 싶다면 동시기 스웨덴이나 스페인의 유물화 등을 살펴도 된다. 1380년대에서 1400년대 사이에 판금 갑옷의 '인터네셔널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판금 갑옷의 공통형이나 표준형 같은 것이 생기는데, 1350년 이후부터는 갑옷에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던 국가적인 특징은 사실 세부에 있어서는 서로간의 차이가 거의 없고 장식면에 있어서만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갑옷 위에 뭐를 걸쳤나, 어떤 장식을 달았냐가 차이점.
그런데 1420년대 정도를 기점으로 해서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고 불리던 기존의 플레이트 아머 스타일 = 후기의 플레이트 앤 메일 스타일을 탈피해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고유한 스타일의 판금 갑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국가적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기초 토대는 이미 14세기부터 잡혀있었다.
1298년에서 1344년 사이에 이탈리아 작가인 Galvano Fiarnma는 Chronichon Extravagans라는 글을 썼는데, 여기에는 13세기 중반에서부터 16세기까지 최고의 갑옷 제조처로 손꼽힌 밀라노 장인들에 대해 쓴 부분이 있는데, 대규모의 조직화된 장인들을 묘사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피안마의 글은 중세시대에 서로 다른 갑옷의 부위를 만드는 장인들이 같이 일하는 전문화된 작업공정이 있었고, 14세기 초반에 이미 판금 갑옷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일차사료다. 이런 대규모 공방이 성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유한 스타일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리고 갑옷 업계에서는 플레이트 아머가 대세가 된다."우리의 땅에는 갑옷의 모든 부분을 만드는 무수한 장인들이 존재한다 - 긴 쇄자갑, 흉갑, 판금, 투구, 강철 스컬캡, 목 가리개, 장갑, 허벅지 가리개, 무릎 가리개, 기병창, 투창, 검과 기타 등등. 그리고 이들은 단단한 철을 사용하고 거울보다 더 반짝거리게 광을 낸다. 긴 쇄자갑 제조공만 해도 백여명이며, 그 아래에서 메일을 위한 링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기술을 지닌 작업공들의 수는 셀 수도 없다. 방패와 버클러, 도검 제조공 역시 수없이 많다. 이 도시는 이탈리아 전역의 도시들에 무기를 공급할 수 있으며 심지어 타타르와 사라센에게까지 물량을 수출한다."
7. '플레이트 메일'?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를 시작으로 한 서브컬쳐계열에서 가장 골치아프게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는 도검이 '바스타드 소드와 롱 소드'라면, 가장 경원을 살 만한 갑주 용어가 '플레이트 메일'이다.
19세기, 몇몇 빅토리아 시대 학자들은 '사슬 갑옷'을 뜻하는 'mail'이라는 단어를 갑옷을 가리키는 보편의미로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었다. 이래서 mail이 armour와 같은 뜻으로 오인되면서 그 뒤로 계속 혼용했기 때문에 플레이트 아머를 플레이트 메일, 스케일 아머를 스케일메일로 불러버리고, 심지어는 그냥 메일로 불러야 할 것을 "체인메일"이라고 동어반복을 하는 요상한 용어가 탄생했다.
D&D 제작진들은 학교 숙제 수준의 구식 자료서적을 참고해서 만들다 보니 이런 잘못된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판타지 게이밍 서브컬쳐계 전역에 이런 오류가 퍼진 것도 따지고 보면 원조인 D&D부터 이어진 원죄인 셈.
그래서 '플레이트 메일'이란 용어 자체는 도검갑주계에서 정식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다. 현재 학자들은 Platemail이란 말은 쓰지 않고 'plate '''and''' mail', 'transitional armour' 등으로 표기한다.
하지만 D&D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서브컬쳐 계열에서는
1. 플레이트메일과 플레이트 아머의 구분을 할 줄 모른다, 같은 것으로 안다.
2. 플레이트메일이 플레이트 아머 이전 시대의 것으로 안다
의 두 타입이 있다.
하지만 Plate-mail이란 단어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잘못된 용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 도검갑주계열로 가서 엄격한 구분을 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서브컬쳐 쪽에서 플레이트메일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별로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트랜지셔널 아머라는 개념과 흔히 말하는 플레이트 메일은 것은 또 서로 좀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플레이트메일로 알고 있는, 혹은 플레이트메일과 착각하는 비슷한것들을 나열해 보자면
- Plate and mail : 사슬 호버크 위에 판금 흉갑이랑 건틀렛이랑 그리브 등등을 낀거. 흔히 생각하는 '플레이트 메일'이 이것.
- plated mail = Splinted mail : 유쉬만, 깔란따르, 베흐테레쯔 같은 크고작은 철판 사이사이를 사슬로 연결해놓은 것, 또는 사슬갑옷에 판금 조각을 끼워 보강한 것. 중동이나 동유럽의 갑옷이지만 그 형식을 부르는 이름이 비슷해서(플레이티드 메일, 플레이트 메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 plate armour : 가끔 거셋(Gousset)이 노출되는 것을 보고 이걸 플레이트 메일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다. 거셋은 겨드랑이나 팔꿈치 엉덩이 등 판금으로 가리기 어려운 부분을 덮어주는 메일 파츠로, 호버크를 생략하도록 만들어주는 요소이며 원래 완전히 판금화된 시대에 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트랜지션 시대 후기의 판금 흉갑과 그리브와 뱀브레이스 등등 주요 요소를 판금으로 두르고 있다면, 이걸 그냥 플레이트 아머라고 불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 cuirass, breast and back : 흔히 잘 아는 판금제 흉갑+배갑.
- coat of plates : 천이나 가죽제 옷 아래에 중간 크기에서 좀 큰 정도의 판들을 리벳으로 연결한 것. 겉에서는 천과 리벳만 보인다.
- brigandine : 천이나 가죽제 조끼나 더블릿 아래에 작은 철판들을 리벳으로 연결해놓은 것. 역시 표면에는 천과 리벳만 노출된다.
- jack of plate : 브리갠딘과 비슷하지만, 철편을 리벳으로 고정한게 아니라 꿰메어서 고정한 형태
- scale armour : 스케일 아머도 트랜지셔널 시대에 사용되었다.
- splint armour : 스플린트 아머는 띠 모양으로 길쭉한 판을 연결해놓은 형태를 말하는데, 기본 모양을 잡아주는 천이나 가죽재질이 철판 위에 덮을 수도 있고 철판 아래에 있을 수도 있다. 서양의 유럽에서는 스플린트 아머를 몸통 방어구로 쓰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개 팔다리 부분만 덮었다. 몸통에는 위에 나온 브리갠딘이나 코트 오브 플레이트, 스케일 아머 등등을 사용했다. 간혹 브리갠딘이나 잭, 코트 오브 플레이트도 이 카테고리로 넣는 사람이 있지만, 편의 상 구분하는 게 좋다.
8. 참고문헌
A Knight and His Armor by Ewart Oakeshott
Armour & weapons by Charles J. Ffoulkes
Arms and Armor of the Medieval Knight by David Edge and John M. Paddock
European Armour circa 1066 to circa 1700 by Claude Blair
http://en.wikipedia.org/wiki/Brigandine
http://en.wikipedia.org/wiki/Coat_of_plates
http://en.wikipedia.org/wiki/Plated_mail
http://en.wikipedia.org/wiki/Ailette
http://en.wikipedia.org/wiki/Great_helm
http://en.wikipedia.org/wiki/Bascinet
http://en.wikipedia.org/wiki/Camail
[1] 동양은 이미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 사용하던 기술 이였는데, 서양은 산업혁명 시기에야 발견하게 되는데, 이도 식민지인 인도가 사용하던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한다.[2] 현대에도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개시 이후의 보병용 보호장구 강화 움직임에 따라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가 방탄복 강화와 함께 니패드, 엘보패드의 도입이었고, 오토바이 운전자가 가장 먼저 구입하게 되는 안전장구가 헬멧, 장갑 다음으로 무릎 보호대인 점 등, 해당 부위의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3] 동양에는 식양갑이라고 이렇게 생겨먹은 게 있긴 했지만, 실전용이 아닌 의례용 갑주였다.[4] 조선은 두정갑의 징만 박아두면 철갑의 부착 여부를 확인하기 힘들다. 그래서 징만 박아두고 가라를 쳤는데 들켜서 왕이 화를 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