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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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기사를 표현한 그림.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갑옷/병기 전시관의 중세 기사 재현상.
1. 개요
2. 어원
3. 역사
3.1. 형성
3.2. 8~12세기
3.3. 12세기~14세기
3.4. 몰락
4. 무기
5. 정체성
5.1. 소론: 기사라고 다 귀족이 아니다
5.2.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
5.3. 보론: 정답이 없다
6. 종류
6.1. 과정별
6.1.1. 페이지/스콰이어
6.1.2. 나이트 배철러
6.1.3. 나이트 배너렛
6.2. 소속별
6.2.1. 소속기사
6.2.2. 편력기사(나이트 에런트)
6.3. 지역별
6.3.1. 서유럽
6.3.2. 동유럽
7. 환상과 현실
8. 현대의 기사
8.1. 기사작위를 받은 인물
8.2. 와인 기사작위?
8.2.1. 진실
8.2.2. 대표적 예
8.2.3. 대상자
9. 가상의 기사
10. 관련 문서
11. 기타


1. 개요


기사()는 중세 서유럽에서의 중무장한 기병 및 (중세 후기에는)그러한 전사 계급에서 유래된 사회적 계층이다.
서유럽의 기사 계급은 8세기 샤를마뉴프랑크 제국 이래로 황제들이 야만족의 침입을 방조하자, 서유럽에 봉건제에 의한 분권화가 시행됨과 동시에 등자의 유입으로 인해 기병 전력이 대폭 강화되자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봉건제에서는 가신에게 봉토 수여를 통해서 군사적 충성을 약속 받으면 강하고 숙련된 병력을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사 계급들이 중무장하여 기사로써 주군에게 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장기병 병종이 하나의 사회적 계층으로써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사가 병종보다는 사회적 계층으로 자리잡자, 굳이 기병뿐만이 아니라 다른 하급 귀족에게도 기사 작위를 주는 경우가 생겼다. 또한 서유럽의 봉건제가 점점 해체되고 중앙집권화되자, 봉토보다는 화폐를 통해서 급여를 주고, 종사의 군사적 봉사보다는 용병을 쓰고, 군사적으로도 기병이 파이크 방진을 돌파하기 힘들어지는 등 많은 변화가 생겼다. 게다가 16세기 이후로는 의 등장으로 보병의 중요성이 급부상해서 사회적 계급으로써 기사는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른다. 다만 '작위로써 기사'만큼은 현대까지 살아남아, 영국 등 일부 왕정제 국가에서 주는 명예직으로만 남게 됐다.
동유럽에서는 저러한 군사적/사회적 변화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늦었기 때문에, 서유럽에서 기사 계급이 해체된 훨씬 이후에도 기사에 대응되는 봉건 지배층인 보야르가 있었다.
중세 이래로 기사도라는 개념이 잡혀서 기사도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정의로운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나, 실제로는 꽤 달랐다. 실상은 오히려 기사들이 워낙 양아치 같은 존재들이라서 그들에게 '최소한 이런걸 지키는게 맞지 않나?'라고 제시된 개념이 기사도라고 보는 것이 맞을 정도. 문서 참조.

2. 어원


영어knight는 (영주에게 군역을 치르는 존재로서의) 봉신을 뜻하는 단어다. 독일어에 뿌리를 둔 고대 영어 cniht에서 유래된 말로, 시동 혹은 종자을 의미했다. 그 종자의 뜻이 점점 더 확대 해석되어 왕의 부관들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같은 어원을 둔 단어로는 란츠크네히트가 있다. 이쪽은 Land(영토, 혹은 '평지') + Knecht(병사).
반면 프랑스는 슈발리에(Chevalier), 스페인은 카바예로(Caballero) 등으로 불렀는데, 이쪽은 말을 의미하는 후기 라틴어 카발로(Caballo)에서 유래한 것으로, 말을 탄 기병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 독일어의 리터(Ritter) 역시 '타는 자', 즉 기병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영어 역시 캐벌리어(Cavalier)가 같은 어원을 두고 있으며, 기사도를 뜻하는 Chivalry 혹은 Code of chivalry 역시 말을 타는 자들의 규칙이라는 뜻이다.
보다시피 영어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언어에서 '말을 타는 자'로써의 의미가 강조된다. 한마디로 영어가 혼자 어원적으로 따로 논다(...).[1]
동양권 역시 가끔이나마 한자 고서에서 언급된 단어인 '기사(騎士)'라는 말 역시 타고 싸우는 무사(武士)라는 뜻이다. 고전 동아시아 기록에서 기사(騎士)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아니나, 아예 없는 단어는 아니었다. 한 예로, 조선 후기에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고급 기병을 두고 기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려 때 쓰인 책인 삼국유사에, 신라 기사가 어쩌구 하는 얘기가 나온다. 흔히들 '거문고 갑을 쏴라.'라고 하면 다들 아는 그 얘기. 삼국지에서 황조를 벤 풍칙 역시 기사라고 서술된다.

3. 역사



3.1. 형성


로마 제국 후기 (3/4세기)부터 게르만/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기병대가 중요시 되고 전신을 비늘 갑옷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귀족 계급으로서의 기사는 중세 초기 (6~10세기)에 생성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랑크 왕국에서 사라센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전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그 땅에서 말 좀 키워서 전쟁 때 타고 나와라.''라고 한 게 중세 기사의 효시가 되었다는 게 고전적인 중세기사론이다.
그 후에는 사라센 기병은 소수였고, 그나마도 프랑크족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상태다.[2] 여기에 덧붙여 봉토를 받은 기병의 양성은 등자가 8세기 초엽 서유럽으로 전래되면서부터 군사적인 이용가치가 늘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1950년대 이래로 유력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또 최근에는 서유럽의 등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9세기 이후이고, 봉토 분배 이전에도 프랑크에는 다수의 승마전사들을 운영했음을 이유로 등자가 기사계급 등장의 절대적인 요인을 부정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 설에 따르면 기사 계급의 등장은 등자보다는 8~9세기 이후의 농업생산력 증대, 샤를마뉴의 친 귀족정책 및 확장 정책에 따른 약탈로 인한 경제적 부흥, '마자르족'의 침입과 '바이킹'의 약탈에 대한 빠른 대응의 필요성, 그리고 각 지역의 고립으로 인한 인구급감으로 대규모 중보병대보다는 소수정예의 필요성[3]에 의해 말을 탄 기사 계층 및 기병 위주의 전술이 대두되었고, 이후 중세 농업혁명과 등자 및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으로 기사의 초기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하나의 이유만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 때문에 고대의 대규모 중보병대에서 중세의 소규모 중기병대로 편제가 변화한 것이고, 여기에 등자와 랜스가 중기병대의 효율성을 극대화시켜주면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화 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세 기사의 시초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 마르텔부터 시작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전까지 프랑크 왕국의 병사들은 '자유민 보병'이었다는 증거가 많다. 이게 점차 비용이 많이 드는 중장갑 기병으로 넘어가면서 기병들에게 봉토를 내리고 이것이 봉건제로 발전해 나갔다는 설이 주류.

3.2. 8~12세기


서유럽의 기사 형성 초기에는, 무기와 갑옷과 말을 지니고 무사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높은 훈련을 거친 인물이라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갑옷과 무기가 비싸니까 땅을 소유하고 돈이 많은 귀족이 기사가 되기 편한 게 당연하지만, 장비와 실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기사가 될 수 있었으며 사실 상 기사란 직업의 일종이었다. 12세기 정도까지는 기사가 되는데 딱히 고귀한 태생일 필요가 없었고, 딱히 귀족이나 왕이 기사 직위를 하사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봉토를 하사받아 왕을 섬기는 기사가 될 수도 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독학으로 무술을 익히고, 열심히 쇠고리 뜨개질을 해서 자작 체인메일을 만들어 입고, 야생마 한 마리 길들여서 올라타곤 "나는 기사요."라고 자칭해도 그는 기사일 수 있었다. 물론 홀로서기는 힘드니까 대체로 마스터(스승 기사)를 모시면서 무술을 배우고 충분히 장비를 장만한 다음, 마스터가 "너도 이제 당당한 기사다."라면서 죽빵을 갈기면 기사가 만들어지는(나이트 배철로), 기사가 기사를 키우는 전통을 따랐다. 초기 기사는 말탄 고급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중세 초기의 기사들은 보통 다들 투잡을 뛰었다. 원래 농장을 운영하다가 전시가 되면 상급 영주의 호출에 따라 전장에 나서고, 40일간 복무하다가 돌아와서 다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봉급을 받는 전문적인 군인이라기보다 '훈련된 부농'이라든지 작은 장원의 영주라든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시에 생업을 관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점차 주종관계를 맺은 주군이 가신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고, 쌍무적 계약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는 오로지 전문적인 군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점점 순수하게 전투에 집중해 일상을 단련으로 보내는 중세의 인간흉기들이 양성되며 다양한 검술과 무기들이 발전한다.

3.3. 12세기~14세기


이후로 중세 전성기부터 기사가 가문이나 혈통에 주어지는 계승 직위가 되기 시작하면서, 기사라는 것이 준귀족화 하기 시작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1152년 농부들이 기사들의 무기를 휴대하는 것을 금지했고, 1187년에는 농민의 아들이 기사로 서임되는 것을 금지했다.
이때부터 기사는 기사로 태어나는 것, 또는 군주가 하사하는 것이 된다. 군주는 기사의 직위를 준귀족의 개념으로도 하사하기 시작하며, 귀족도 자신의 가신에게 반영구적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기사위를 부여하여 하우스홀드 나이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는 아버지의 기사 직위를 물려받아 기사가 되었다. 즉 기사 가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출신만 된다면 기사로서 훈련을 쌓지 않아도 명목상 기사로 불릴 수는 있었다. 장자상속에 따라 작위를 얻지 못한 귀족의 차남 등등은 대신에 기사를 타이틀로 얻는 일도 빈번했다.
기사하면 생각나는 '칼이나 주먹으로 구타하는 서임식'이나, '칼을 들고 밤샘 기도를 해서 신앙심을 증명하는 의식' 등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불과 13세기 말이면 이미 기사서임식이 간결화되고 그저 형식적인 의식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기사로 서임할 자격'은 서임된 기사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데다가, 기사라는 타이틀 정도는 있어야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갈 수 있다는 관념이 동시에 존재해서, 저 '혈통이 있어야 기사'라는 관념이 무시 당하는 경우는 꽤나 빈번했다. 군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말과 무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평민'이 있다면 지역 군주의 필요에 따라 바로 서임되었다. 더 황당한 사례로는, 기사 세 명이 법정에 가는 길에 자기들 편을 들어줄 기사 증인이 한명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나가던 농부를 붙잡아 목덜미를 칼등으로 두들기며 '이제부터 넌 기사다' 하는 경우도 있었다. '혈통이 없으면 기사 금지'라는 법률은, 그게 엄격하게 지켜지기는 커녕 빈번하게 무시된 일이라서 오히려 강조해서 금지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3.4. 몰락


위에 언급된 기사들은 모두 궁보병과 화약 무기의 활용이 전문화 되는 14세기 후반 ~ 16세기 전반에 걸쳐 몰락하게 된다. 먼저 백년전쟁의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평민 출신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에게 괴멸당하였다. 동시에 동유럽에선 독일 기사들이 활과 화약 무기를 갖춘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에게 니코폴리스 전투바르나 전투에서 연이어 괴멸되었으며 후스 전쟁에서는 교황과 황제와 기사들의 십자군이, 조잡한 화약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민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탈리아 전쟁의 분수령이 된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들이 화승총병에게 괴멸되며 기사 시대의 종언을 알렸다. 이후 점차 평민 출신의 직업 군인, 즉 용병대의 활용도가 높아지게 된다.
사실 화약무기 도입 초창기에 갑옷이 화약무기에 대항해 두꺼워지고, 투구와 흉갑만 두툼하게 만드는 식으로 나름대로 대항해가다가 어느 순간 무너졌듯이, 기사 역시 화약 무기 도입 초기에도 여전히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고, 총포를 다룰 줄 아는 기사도 있었을 정도로 어느 정도까지는 공존했다.
고전적인 기사가 무너진 것은 총화기의 도입 같은 군사적 변화 뿐만 아니라, 봉토를 내림으로써 성립되는 봉건제가 무너진 사회적 변화, 귀족 계급만이 아닌 모든 국민을 징병하는 국민병 제도로의 이행 등 복합적인 사회적 변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병종으로써 기병은 훨씬 후대인 19세기까지도 계속 활용되었다. 중세에 '기사'라고 부르는 조건인 '영지를 가지고, 주군에게 충성하고, 기사도를 지키고' 같은 요소들이 사회적 변화로 인해 전부 박살나면서 기사라고 부를만한 사회적 계층이 소멸했기 때문에 기사가 무너졌다고 표현되는 것이다.[4]

4.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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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기사하면 떠오르는 무기는 랜스다. 특히 검은 기사의 상징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기사서임할 때나 맹세할 때를 비롯한 기사의 의례용품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특히 중세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십자가의 형태와 비슷한 디자인의 장검은 상징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를 대신해 검신에 키스하는 등의 관습은 유럽에서 흔한 일이었다.
기사의 검은 롱소드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롱소드라는 단어를 한손검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 잘못된 인식이다. 도검사에서 롱소드는 한손반-양손검을 말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기사의 부무장인 검은 한손검인 아밍 소드다. 그래서 아밍 소드를 나이틀리 소드(기사검)라고 부르기도 한다. 판금갑옷의 대두로 양손무기가 주력이 되면서 롱소드의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상 사용과 지상 사용, 일상의 무장과 전쟁용 무장 모두를 겸할 수 있는 한손검인 아밍 소드와 그 후계 도검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꾸준히 애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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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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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스 돌격 이후 롱소드와 런들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기병들. 14세기 후반 그림.
검은 중장갑에 비효율적이라 실제 전장에선 도끼메이스 같은 둔기가 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일부의 편견이 있지만, 기사의 무장과 전투방식을 묘사한 당대의 군사 관련 기록들이나 유물 연구에서 얻은 자료를 종합한 결과 전장에서도 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검의 장점은 무게중심이 손잡이 부분에 있어서 다루기가 쉽고[5], 적은 힘으로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으며, 그에 비해 공격거리 역시 긴 편이라는 점이다. 둔기는 헤드에 무게를 집중시키느라 무게 효율이 좋지 않아서 같은 무게의 검에 비해 리치가 짧다.
또한 칼집과 소드벨트를 이용해 패용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 사용을 안할 때에도 다른 무장의 유무에 관계없이 항상 부무장으로 휴대하기도 좋았다. 게다가 검을 사용하는 기술을 익히거나 갑옷이나 방패와 함께 사용하면 폴암 같은 장병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주무장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손반 그립을 가진 장검계열은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용 기법을 충분히 익히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대처 가능하다는 장점까지 있었다.
중세 검술에서는 맨몸의 상대를 대적하는 평복 검술과 갑옷을 입은 상대를 대적하는 갑주 검술의 기법이 서로 달랐는데, 갑주 전투 시에는 칼끝으로 갑옷의 틈새를 찌르거나, 폼멜[6]이나 가드를 망치처럼 휘둘러 둔격으로 쓰러트리거나, 혹은 전투 레슬링을 걸어서 쓰러트리고는 미저리코드와 런들 대거 같은 갑옷의 빈 틈을 찌르는 데 특화된 송곳형 단검을 갑옷의 틈새에 쑤셔넣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사의 부무장으로 런들 대거 타입의 단검이 널리 쓰였다.
이 시기의 검 역시 그런 용법을 부응하기 위해 뻣뻣하고 뾰죽한 찌르기에 적합한 검 형태가 유행했다. 즉, 한국 양판소처럼 풀 플레이트 입은 기사를 검으로 베거나 '몽둥이 같이 두꺼운 칼날로 갑옷째 뭉개'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판금갑옷은 양판소 작가나 독자들의 생각보다 굉장히 튼튼하다. 판금 갑옷이 총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 갔다는 건 역으로 그 이하의 파괴력으로 플레이트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7] 실제로도 이 문제로 총기가 나올 때까지 파이크 같은 창류에 속하는 무장들은 철퇴나 플레일같은 둔기는 물론 할버드, 폴액스같은 폴암이나 롱소드 같은 도검류들에게 밀려 잘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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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iath Fechtbuch (MS Germ.Quart.2020)
16세기 이베리아인 기사 돈 후안 퀴사다는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8]를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적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의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버렸든 놓쳤든 부러졌든) 에스터크를 잃어버릴 경우 아밍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마저 잃어버린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으로 싸운다.
기사들끼리 죽이기는 힘들었지만, 이는 기사들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면 중세 기사들은 사로잡은 다음 몸값을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 없이 무기를 날리고 항복을 받은 다음 구속하여 몸값을 받는 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고로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평민 병사나 중장병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맨앳암즈로 불리는 중세 중후기의 중장병들은 무장으로만 보면 기사나 다름없었으며 잡히면 살해당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보통 기사 이상으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일이 빈번했고 때문에 기사들은 갑주 입은 상대를 끝장내는 기법을 잘 알아야 했다.
그리고 기사들끼리 서로 죽이지 않는 것도 관례가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였다. 아래에도 얘기가 나올 기사가 강도로 전업하는 도둑기사나, 산적단으로 변한 프리 컴퍼니 같은 경우에는 몸값 잡고 그런 것도 없었으니 예의 차리고 몸값 받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에서도 전황이 극히 불리하다 판단한 영국군이 포로로 잡은 기사와 귀족을 참살했고, 그 때문에 후대 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부모나 친척을 잃은 프랑스 기사들이 복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었다.
중세 후기에 장창대열이 생기고 나서는 투핸디드 소드(츠바이핸더) 같은 양손으로만 쓸 수 있는 거대한 검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거대한 검은 장창을 쳐내고 파고들기에 좋았다. 물론 이쯤되면 [피]와 마찬가지로 폴암과 검 사이에 경계선에 있는 수준일 정도의 무기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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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드 랜스 자세로 동시에 격돌한 순간을 묘사한 그림.
마상창으로 잘 알려진 랜스는 형태상 크게 보병 창이나 별 다름 없는 라이트 랜스와, 흔히 기사의 거창 하면 생각나는 둥근 손보호대가 달린 헤비 랜스로 나뉜다. 물론 창의 길이나, 무게추 등으로 다양하게 바리에이션이 있다. 기마 중에 투창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카우치드 랜스가 대세먹은 이후에도 스페인에서는 기마 투창질이 꽤나 애용됐다.
또한 랜스의 사용법도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는데, 투창 하듯이 어깨 위에 들고 가다가 내리찍는 방식과, 허리 쯤 아래에 한 손으로 들고 찌르는 방식, 양손으로 창을 잡고 휘두르는 방식, 그리고 중세 기사 하면 딱 대표되는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이 있었다. 이 방식을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라 한다.
각 기법마다 다양한 장단점이 있으나, 기수가 어지간한 충격을 받아도 낙마하지 않게 해 주는 등자와 전투용 안장, 그리고 창의 리치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카우치드 랜스 기법이 한데 뭉치면 말의 운동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냉병기로서는 어마어마한 공격 거리에서 극대화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므로, 이 콤보가 중세 중기부터 유럽의 대세가 되었다. 중무장한 기사가 밀집대형으로 랜스 차징을 하면 그 자체가 보병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동양에서도 유목민족 기병들이 비슷하게 운용한 기록이 있으며, 말과 말을 쇠사슬로 연결하기도 하였다. 운좋게 옆으로 뛰어 말을 피하더라도 쇠사슬이(...). 다만 이렇게 연결하는 경우에는 집단 돌격시의 템포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9]랜스 차징은 대열을 맞추어서 일사분란하게 동시에 들이박는 조직력 중시 방식과, 대충 각개 돌격으로 최고 속력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나뉘는데 두 방식 공히 동서양에 모두 혼재했다.
십자군 전쟁 때 기사들을 상대한 아랍측의 기록으로는 돌격하는 기사들을 '쏘아진 화살과 같다'라고 평했으며 장창이 등장하기 전까진 정면에서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였다. 기사의 랜스 차징 자체는 매우 강력했지만 랜스는 대부분 1회용이라 차징이 끝나면 부러지거나 해서 재사용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이 끝나면 랜스를 버리고 검이나 보조무기를 꺼내들고 싸우거나, 본진으로 회군하여 여분의 랜스를 다시 장비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전쟁사 기록을 살펴보면, 랜스 차징은 상대 진형이 무너질 때까지 수차례, 낮에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반복했다는 이야기가 흔히 나온다.
이러한 기사들의 랜스차징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의 궁병들은 말뚝을 들고 다니다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말뚝을 적 방향으로 박아넣기도 하였고, 스코틀랜드는 기마돌격에 부적합한 험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하거나, 윌리엄 월레스[10]는 보병대가 팔랑크스와 흡사한 장창의 벽 쉴트론(schiltron)을 만들어 돌격을 저지하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장창 전술은 중세 말에 보병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근데, 기병이 특히 발달한 동유럽에선 '그럼 장창보다 더 긴 랜스를 쓰면 되겠네?'라면서 후사르에게 엄청나게 긴 랜스[11]를 주어 장창병을 돌격으로 밀어버리는 위엄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총이 나오면서 장창진으로 보호받는 총병대가 원거리에서 사격을 가하는 파이크 앤 샷 전술이 장창전술의 후계를 잇고, 랜스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느낀 기병들이 이제 권총 들고 마상총질하는 카라콜 전법을 쓰다가, 결국 권총보다 강한 머스킷의 화력에 밀려 중장기병의 시대가 저물고 엽병 같은 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물론 앞서 말했듯 가장 중요한 원인은 봉건 체제에서 변화해나가면서 생긴 전장 변화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쓰는 랜스는 끝이 뭉툭하고 더욱 잘 부러지게 개조한 토너먼트 전용 랜스이다. 기사 윌리엄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토너먼트 경기를 보면 랜스가 스치기만 해도 와자작 부서지는 이유가 그 때문. 이 때문에 토너먼트 경기에서 주인공을 쓰러뜨리려는 악역들은 랜스 끝을 뾰족하게 하고 잘 안 부러지는 재질로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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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였고, 폴액스할버드 같은 폴암류부터 마상창, 단검, 한손검, 양손검, 도끼, 철퇴, 레슬링, 갑옷, 방패, 기마술 등 사실상 보편적인 무기는 두루 다 다룰 줄 알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격 무기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대체로 중세 기사들은 사격 무기를 천시하거나 비겁한 무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주로 징집된 평민이나 용기병들이 사격무기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얘기로, 급하면 아무 무기나 쓰게 되어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 궁술은 이것 하나에만 매진하는 다년간의 단련이 필요한 전문분야이고, 쇠뇌는 그것 자체로도 엄청나게 비싼 전문 무기이기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전문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유럽의 중장기병들은 보통 기마돌격과 근접전을 담당하기 때문에 궁술을 뽐낼 장면은 그다지 없었고, 그런 것은 전문 궁병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기사 중에도 궁술을 아는 자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의 그림을 보면 맨앳암즈나 기사가 사격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도 곧잘 등장하고, 중세 무술서적에서는 말을 타고 달아나면서 등 뒤로 쇠뇌를 쏘는 파르티안 샷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기사들이 평시에 심심하면 하던 스포츠가 사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12] 활 다루는 것의 기본기 정도는 하는 기사가 많았을 것이다.
단지, 기사 말고도 활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는데 많은 기회비용을 주고 키워서 근접전을 담당해야 하는 기사가 궁술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을 따름이다. 전쟁은 상대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적은 피해를 입는가 역시 중요한데 본인의 역할이 다른 부대의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근접 전투임에도 전장에서 원거리 무기에 의존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면 전장에서의 자기 역할을 하지못한 즉 권리만 받아챙기고 의무는 행사하지 않는 비겁자 취급을 받을 여지가 충분하며 따라서 이 때문에 '원거리 무기=비겁자' 인식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에 타고 돌격하는 중기병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지형 등의 문제로 말타고 싸우기 힘든 상황이라면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싸우기도 했다. 또 평야가 많은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귀족이나 기사가 순수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은 수치지만, 산이 많은 스페인 같은 지역에서는 보병으로 복무하는 것도 별 문제로 여기지 않는 등 환경, 지역적인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13]

5. 정체성


기사라는 존재가 '병종으로써 기사'와 '사회적 계층으로써의 기사'가 공존했기 때문에 기사란 대체 어떠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가 이해에 큰 혼란을 만든다.
아주 짧게 정리하면, '병종으로써 기사'가 먼저 출현(8~9세기)했으나 저런 병종으로써 기사가 오래 간 세습되자 '사회적 계층으로써 기사'가 등장(11~12세기)하여 두 정체성이 한동안 공존(12~15세기)했고, 다시 사회적 변화로 '사회적 계층으로써 기사'가 몰락(16세기 이후)하여 '병종으로써 기병'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5.1. 소론: 기사라고 다 귀족이 아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일단 '기사 = 귀족'은 올바른 등식은 아니다. 기사는 작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구의 봉건제에서 평민과 구분되는 귀족은 분봉을 받아 해당 영지를 다스리고 그 산출물을 관리/분배 할 권력과, 그러한 권력을 가문에 세습할 수 있게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데 이러한 신분을 통칭 '귀족'이라고 하며, 그 귀족의 등급은 (동양의 오등작위의 명칭을 차용하여) 대개 공작(duke/prince), 후작(marquis), 백작(earl/count), 남작(baron) 등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귀족위는 세습작위(hereditary title)라고 부르며, 이에 해당하는 신분이 곧 세습귀족이다.
그런데, '기사(knight/chevalier)'는 원래 이 세습작위의 일부가 아니다. 기사는 혈통에 따른 사회적 신분제의 일부가 아니라 종사하는 직업과(즉, 군무와) 관련되어 있는 칭호다. 예컨대, 귀족으로서 분봉받은 하나의 봉지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작위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노섬브리아 백작"인 사람은 동시에 "노섬브리아 남작"일 수는 없다.[14][15] 이미 해당 봉토의 백작위를 받은 이상 노섬브리아는 백작령이지 남작령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섬브리아 공작"인 동시에 "기사"일 수는 있다. "기사"는 봉토와 관련된 세습작위가 아니라 직무이기 때문이다.
즉, 기사는 작위가 아니며 또한 세습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래 항목에서 사용 된 "기사작위"라는 말도 사실은 잘못된 말이다. '작위' 자체가 세습적 지위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 '서임'되는 기사는 '작위'가 아니라 사실은 '직위'다[16]. 그리고 기사직은 세습되지 않는다.
물론, 이와 같은 엄밀한 구분은 중세사회가 전성기에 들어가는 12~13세기 무렵이 되면 정작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도 꽤 선이 흐려져 '아무래도 좋은' 상태가 된다. 이미 신분질서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귀족신분으로 제한이 되기 때문에 으레 기사는 곧 귀족과 동일시 되었다. 게다가, 르네상스와 근세사회로 들어가게 되면 이미 전적으로 귀족들만 고급의 기병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가고 처음에는 용병으로서, 후에는 대규모로 확충되기 시작한 상비군의 일부로서 평민들도 기병이 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군무에 대대로 종사하는 평민들 중 일부도 전통적인 세습귀족은 아니지만 신진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기사'라는 중세적 직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종국에는 그냥 '기병(cavalry)'이 되어갔다. 결국, 근대 영국에 들어와 "기사"라는 직위는 실력있고 부유한 부르주아들에게 일종의 포상으로 수여되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명예직이 된다.
오늘날 영국에서는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귀족" 신분은 아니다. 오늘날 영국에서도 전통적 의미에서 "귀족"은 과거 세습귀족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왕실로만 제한된다.

5.2.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


우선 귀족이라는 말은 말그대로 귀한 혈통을 말하는 것으로 영어의 번역어로 쓰일때는 Nobility, Aristocrat, peerage 등을 의미한다. 즉, 귀한 혈통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작위가 있고 없고는 관계없다. 남작의 다섯번째 아들은 작위를 받을 확률이 거의 없겠지만, 작위가 없어도 그는 귀족 맞는다. 귀한 혈통이니까. 물론 세습작위가 없으니 사회적인 대우는 크게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다.
둘째, 기사도 세습이 가능하다. 더 정확히는 잉글랜드의 기사가 세습직이 아니었던 것뿐이다. [17] 잉글랜드의 기사가 귀족이 아닌 건 맞지만[18] 잉글랜드의 귀족 제도가 유럽 표준은 아니므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세습 되는 경우도 많다. 사실 유럽 표준 같은 건 없어서 각 나라마다 귀족 제도가 제각각이다. 영국이 특히 귀족에 엄격해서 작위를 받은 경우에 한해 귀족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카스티야 왕국 같은 경우는 귀족이 전인구의 10% 가까이 된다.
네덜란드, 덴마크 왕국의 Ridder, 폴란드의 Rycerz, 벨기에의 Chevalier는 전부 영어로 Knight이지만 세습직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방에 따라 세습이 되는 기사도 있고 안 되는 기사도 있고[19],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기사 작위가 세습이 되는 가문이 따로 있고[20] 나머지는 안 되는 등 나라마다 제도가 제각각이다. 스페인 같은 경우는 더 복잡해서 기사인 Caballero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Caballero와, 레콘키스타 과정에서 받아낸 Caballero는 세습이 되고 나머지는 안 되는 등 제멋대로다.
당연히 나라에 따라 세습 기사(Hereditary knight)의 경우 하급 귀족으로 인정받는다.

5.3. 보론: 정답이 없다


사실 기사(knight) 그 자체가 어떤 문서상에서나 법률상으로 완벽한 정의가 이루어진 적 없는 모호한 통칭이기에 무엇에 중점을 두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기사를 귀족과 동일시 할 수도, 구분할 수도 있다. 즉, 정답이 없다.
이 모든 문제는 그 '기사'가 출현하는 시기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있다. 중세의 전성기에 이르기 전, 유럽왕국들의 원형이 만들어진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 시대에 기사의 원형이 비로소 출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 시대까지 '기사'를 통칭하는 말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라틴어인 "밀레스 miles", 즉 "무사"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또한 모호한 통칭이긴 마찬가지 -- 말 그대로 '군무에 종사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유시민의 징집병을 대규모로 활용하던 고대가 소멸한 이후에 카롤링거 시대에 들어와서 부족한 군사력을 충당하기 위하여 그러한 '무사'들에게 '베네피케스 benefices'라는 토지 및 그 관리권을 수여하여 먹고 살 수입을 보장해주는 대신 무기, 갑주, 전마를 유지하며 싸울 준비를 스스로 갖추도록 하였으니, 이를 통해 '봉지를 수여받은 귀족'이 최초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그 귀족은 곧 무사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점까지는 '기사 = 귀족'이라고 볼 수 있기는 한데, 문제는 아직 그 시절에는 '무사'를 통칭하는 miles 이외에 별도로 '기사'를 지칭하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 달리 말한다면, '기사'의 원형이 제시된 프랑크 왕국 시절에는 군무/직무의 호칭으로서 '기사'와 신분제적 호칭으로서 '기사'라는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 같은 miles 들은 죄다 신흥귀족들이 맞는다.
그 이후, 프랑크 왕국의 시절이 지나고 고중세로 들어가면서 중세의 군제가 확대되는 동시에 종교, 법률, 관습 등 사회제도 및 신분제도가 완성되면서 서서히 '군무'와 '귀족위'가 분리되는 추세가 형성되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잘 무장하고 말 타고 나가 싸우는 사람들'은 밀리테스 milites라고 불렸는데, 문제는 벌써 12세기면 milites gregarii 와 milites nobiles 라는 구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라틴어 'gregarius'는 '일반적인, 평범한'을 뜻하고, 'nobiles'는 물론 '고귀한'을 뜻한다. 즉, 프랑크 왕국 시절에 기사의 원형이 등장한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기사'들이 등장한 고중세에 이르면 벌써부터 평민기사(milites gregarii)귀족기사(milites nobiles)를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것.
사회제도가 심화되고 신분제가 발전하면서 기사와 귀족이 굳이 분리되지 않던 시절과는 달리 중세가 진행되면서 "귀족"이라는 신분제적 질서가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익숙한 작위명으로 널리 대표되는 세습적 지위가 탄생하였다. 즉, 이 시점부터 "귀족"이라는 것은 새로이 정립된 세습귀족위를 뜻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프랑크 왕국 시절로부터 유래하는 오래 된 '무사(=기사)'직을 세습해온 동시에 세습귀족의 작위를 갖게 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평범한' 무사(=기사)와 달리 '고귀한, 진정한 기사들(milites nobiles)'이라고 불리웠던 것이다.
상기 반론: 기사는 귀족이 맞다에 서술된 바와 같이 국가와 지역마다 뒤죽박죽 되는 경향이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 된다. 중세가 심화되고 귀족 신분제가 정립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기존에 '무사(=기사)' 집단에 소속되었던 모든 이들이 무리없이 그 신분제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 12세기~13세기의 고중세까지는 여전히 대귀족, 유력한 귀족이면 당연히 동시에 무사이기도 했으며, 전쟁이 발생하면 주군의 명령에 따라 무장하고 출전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저간의 사정에 따라 새로운 귀족신분제에 제대로 편입하지 못하고 누락된 사람들도 많았고, 형편에 따라 몰락하는 하급귀족들은 새로운 신분제의 틀 안에서 귀족신분을 간신히 유지는 했으나 군무를 수행할 형편은 도저히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중세를 지나가면서 15, 16세기에 들어오게 되면 군무와 신분의 분리는 더욱 뚜렷해진다.
11세기에서 12세기 언저리의 제1차 십자군 언저리의 기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말 타고 싸울 수 있을 것"이었다고 한다.[21] 여기서 말타고 싸울 수 있는 능력이란 직접 말을 소유했다는 의미이며 예비용까지 최소한 2필 이상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많은 기사들이 전쟁 중 말을 잃고 보병이 되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사'란 '잘 싸우는 기병'이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당연히 말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싸울 수도 있었으므로 기사였던 것이고, 말이 있는 자들을 고용해서 생계를 보장함으로써 휘하에 기사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 당시 기사들은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가신들일 수도 있었지만 자기 농장을 가지고 말을 키울 여유도 있는 부농들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면[22] 반드시 기사가 귀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정리하자면 '기사의 원형'이 제시된 프랑크 왕국에서는 정작 '기사'가 아직 없었고, 우리에게 익숙한 '기사'가 등장하는 시절이 오면,
(1) 대중은 잡졸과는 달리 잘 무장하고 싸우는 무사들이면 누구나 다 그냥 '기사'로 여겼고,
(2) 기사인 동시에 명백한 세습 귀족이기도 한 체제의 수혜자들은 '우리만이 진정한 기사'라며 군무에 종사하는 평민이나 하급귀족 기사들을 디스했고, 귀족 작위와 기사 직위를 상호불가결의 것으로 묶어놓으려 했으며,
(3) 굳이 그런 것 신경 안 쓰는 지방에서는 '진정한 기사든 말든' 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군무와 신분제가 서서히 분리되면서 명백한 통일된 원칙 없이 각자의 이해관계와 명예심, 입장에 따라 귀족과 기사가 같은 것이냐, 아니면 상호 구분되는 것이냐를 알아서 설정놀음 했던 것.
결국,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기사가 곧 귀족인지 아닌지 시각이 갈린다.
일단, 기사의 원형, 기사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사는 귀족이 맞다. 프랑크 왕국에 대해 설명한 바와 같이 '무인'과 '고결한 신분'이라는 특성은 상호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통합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제도상으로는 기사는 귀족이 아닌 것도 맞다. 중세 전성기에 들어와 확립된 귀족제도 및 신분질서에는 기사가 그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군무에 종사하는 귀족이 기사직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항상 셋트로 딸려 온다고 해도 햄버거, 후라이, 콜라는 각각 햄버거, 콜라, 후라이지 같은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당대의 현실 및 귀족들의 인식상으로 보면 또 기사는 귀족이 맞다. 사회의 명사로 자리잡은 귀족들은 여전히 프랑크왕국 시절의 이상을 고귀한 것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어지간히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아무리 잘 싸우고 용감하다고 해도 이름없는 듣보잡 평민에게 기사서임을 해주는 일은 실질적으로 없었기 때문.
하지만, 군무와 신분제가 분리되면서 일찍부터 그런 추세를 따라가고 딱히 군무=귀족이라는 원칙에 얽매이지 않던 성향의 지역에서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주인가문 대대로 섬기면서 군무에 종사하면 별 조건 없이 기사로 서임시킨 사례가 드물지만 있긴 있었다. 시대가 좀 더 지나서 전문군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기사'라고 불릴 만한 중무장 기병집단에 평민출신들도 많이 입대하면서 이들은 'milites'를 계승한 통칭인 '맨앳암즈'로 불리우게 된다.
즉, 무사이자 고귀한 혈통이며 군무에 종사하는 의미로 한정한 좁은 의미에서 '기사'의 수는 매우 적었고, 그 시대는 생각보다 매우 짧았다고 할 수 있으며, 중세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10세기에서 14세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일반 병사나 징집병과는 달리 전문적 군사훈련을 받는 엘리트 전투요원으로서 중장기병이라는 의미에서 '기사'의 수와 그 시대는 좀 더 길었으나, 이 경우에는 '군무'로서 기사지 '고귀한 혈통의 무사'로서 기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유럽의 병과 직종으로서 '기사'인가, 아니면 중세유럽의 사회적 신분으로서 '기사'인가, 어느 쪽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온다.

6. 종류



6.1. 과정별



6.1.1. 페이지/스콰이어


먼저 기사 가문 출신이나 귀족 태생, 혹은 귀족의 봉신 출신인 어린[23] 소년이 페이지(Page)라는 시동이 되어, 그가 스승으로 모실 기사 혹은 장차 섬길 영주의 성에 들어가 기사와 영주를 위한 온갖 잡일을 하면서 예법을 익히고 틈틈이 기초체력 단련을 해야 한다. 페이지 과정은 관습적으로 7년이 보통이다.
보통은 친구나 친척처럼 가까운 사람 아이를 들여오거나 기사들끼리 서로 아이를 교환해 맡았다.
힘있는 귀족이나 대영주들은 중요한 가신, 다른 유력귀족이나 영주 등 좋은 가문의 아이를 들여와 다른 관료나 귀족에게 심부름, 전언 등을 전달하는데 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가문 간의 친목질에 더해 아이들에게 정치/행정 등의 실무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유사시에는 인질로 쓸 수도 있었다.
페이지 상태로 나이 좀 먹고 청소년기가 되면,[24] 견습기사 스콰이어(Squire)가 되며, 전장에 직접 기사를 따라다니며 무기갑옷을 손질하고, 승마술, 무기를 다루는 법, 맨손격투술, 기초적인 전법 등의 전투기술, 기사의 복장을 챙기고 말을 손질하는 등의 잡일, 그리고 노래와 춤과 악기 다루는 법을 익힌다. 전장에서 기사에게 시중을 들어주는 건 대부분이 스콰이어다. 단순히 시중만 드는 게 아니라 전장에서 스승의 등도 지켜주고, 스승이 포로로 잡혔다면 그를 구출하러 나서기도 하는 등 전투 임무도 수행했다.

6.1.2. 나이트 배철러


스콰이어 상태로 충분히 교육을 받아[25] 20~21세가 되거나, 혹시라도 따라나간 전쟁터에서 무공이라도 세워서 "고놈 기사 시켜볼 만하군!"하고 기사가 될 만한 용기와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인정받으면, 자신이 모시던 마스터, 혹은 가신 기사의 경우 영주에게 가서, 기사 서임하고 몽둥이 찜질을 받고[26] 정식 기사가 된다. 이때 기사로 임명하는 주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봉신이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가리키는 용어가 바로 오마주이다.
이 정식 기사에 해당하는 계급은 그냥 기사라고만 부르거나, 영국식으로는 나이트 배철러(knight bachelor)[27]라고 한다. 엄밀히 말해 영국식 배철러는 기사단에 들지 않았지만 왕으로부터 전쟁터에서의 무력을 인정받아 직접 기사 직위를 수여받은 초창기 형태의 기사, 혹은 그런 기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다른 기사를 마스터로 섬기면서 전통적인 페이지-스콰이어-기사 과정을 거쳐 인정받은 토종 기사들에 붙이는 말이다. 귀족이나 영주 가문을 반영구적으로 봉신으로 섬기기로 맹세하고 기사위를 수여받은 하우스홀드 나이트(가신 기사) 역시 배철러라고 불린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으로 기사가 되는 경우는 배철러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사단 출신 기사의 원형은 십자군 원정 시기의 군사적 기사단이며, 그때만 해도 기사단에 드는 것에는 신분의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중세후기에 이르면서 기사 계급이 경직되고 기사도적 이상을 숭상하기 위한 기사단이 생겨나면서, 기사단 출신 기사라는 게 귀족용으로 변했다. 이런 기사단은 사실상 상류층 귀족들을 위한 멤버수가 한정된 귀족 클럽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전통 방식을 거치지 않고도 기사가 될 수도 있었다[28].
귀족 출신 기사는 태생이 좋다 보니 (하급 귀족인) 기사 가문 출신의 배철러를 좀 얕잡아보기도 하지만 기사의 본질로 보자면 배철러야말로 진짜 원조의 전통을 지켜온 쪽이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사를 생업으로 알고 어릴 때부터 부단히 수련을 거쳐온 쪽과 귀족 도련님 간에 실력 차이는 뻔하지 않겠는가. 물론 차남이나 서자로 태어나서 장래에 상속 받을 게 없는 귀족 자제들도 전통 방식을 거쳐서 제대로 직업 기사로 나서기도 했으니, 귀족 출신이라고 항상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6.1.3. 나이트 배너렛


나이트 배너렛(Knight banneret)은 흔히 상급기사 등으로 번역하는데,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나 일정 병력을 지휘하는 단대 지휘관 급의 기사를 말한다. 상비군 제도가 없어서 군제가 느슨했던 중세 시대에 부대를 지휘하는 전문 장교가 있을 리가 만무하므로, 기사 중에 실력이 있고 지휘력이 있는 경력있는 기사 혹은 전장에서 실제 용맹을 보인 기사를 배너렛으로 임명하여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일반 기사가 호봉수 찼다고 저절로 배너렛으로 승급하는 것은 아니다. 배너렛은 반드시 전시에 전장에서 군주가 임명해야하는 직위이다. 고로 평시에는 배너렛이 임명되지 않으며, 군주에게 직접 임명받지 않으면 배너렛이 될 수도 없다. 약간 편법으로 군주의 깃발을 전령이 챙겨가서 '여기 전하의 깃발이 있으므로 어전인 것으로 치고 원격 임명(?)하겠소.'하는 경우는 있으나, 평시에 호봉수 높은 기사랍시고 배너렛으로 붙여주는 법은 없었다. 애초에 평시에 기사와 기병 지휘관이 필요할 정도로 대규모의 기사를 측근으로 두는 일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귀족의 차남 이하는 기사 서임을 받자마자 배너렛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이다 보니 부모님이 붙여준 가신 기사나 부하들 수십을 이끌고 전쟁터에 출진하면 왕은 많은 부하를 끌고 힘을 보태러 온 기특한 기사를 보고 "네가 데려온 애들 네가 지휘해라."라면서 배너렛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귀족 장남은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영주의 후계자니 배너렛보다 높았다.
기사가 준귀족화되고 기사로 태어나지 않았으면서 기사가 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면서부터, 국가적으로 볼 때 중장기병은 많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나눠줄 봉토도 없고 귀족층만 늘려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안 지배층은 중무장을 하고 말에 타고 싸움 다 잘 하지만 정식 기사는 아닌 전문 군인층을 고용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군주론에서 뻔질나게 디스당하는 용병들이며, 주로 아래에서 언급하는 편력 기사들이나 스위스이탈리아같이 상대적으로 평민들의 지위가 높은 나라에서 임시로 고용된 사람들이 용병단의 주를 이루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나, 군소 영주에게 고용되어 싸웠는데, 이탈리아 반도의 지정학적 입지때문에 전쟁이 매우 잦은 관계로 귀족 출신 기사를 대거 동원하기가 불가능한 것도 있기에, 빨리빨리 고용해서 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용병들이 애용된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공화국인 나라들이 대부분이라서 귀족과 평민 간의 구분이 모호하거나, 아예 그런 신분제도가 없는 나라도 많았기 때문에, 대를 이어서 기사 노릇하는 귀족들이 절대적으로 모자란데다, 그런 출신 배경이 있는 기사를 양성하는 걸 꺼리는 경향도 커서 이탈리아에서는 유독 귀족 출신 기사를 보기가 어려웠다[29].
기사 서임을 받지 않더라도 평민 병사 중에 집에 돈 좀 있는 경우 기사에 준하는 무장을 스스로 마련하고 전쟁터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평민 중장기병과 기사를 합쳐서 맨앳암즈(Men-at-Arms)라고 부른다. 중세의 전장에서 나온 기병의 절대 다수는 진짜 '기사'가 아니라 평민 중장기병 맨앳암즈였고, 나이트 베너렛은 그 기병 부대의 지휘관이다.
특히 국토가 좁은 영국은 기사의 수는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대신에 맨앳암즈를 많이 동원하여 중기병 전력을 메꾸었는데, 그렇게 되자 맨앳암즈의 위상이 묘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맨앳암즈는 기사처럼 제대로 된 계승 준귀족 계층은 아니지만, 일단 시골 동네에서 신사 소리 들으면서 헛기침 좀 하면서 사는 동네 유지인 경우가 많았고,[30] 기사가 되고 싶지만 태생이 안 돼서 못 되었을 따름인지라 기사도적 이상을 꿈꾸면서 스스로 기사답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출신이 기사 계급이 아니더라도 이런 맨앳암즈에 속한 평민이나 심지어는 일개 잡병이 무공을 세워 기사가 되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돈 많은 평민은 흔치 않은 데다가 10살 이전부터 훈련을 받아 기사가 된 인간 병기하고 평소에 가업을 돕다가 힘 좀 쓴다고 나온 동네 좀 사는 집 아들내미 A의 전투력이 같을 리도 없고, 계급이 다른 만큼 텃세도 심해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존 호크우드처럼 용병으로 나섰는데 너무 잘 싸우니까 상으로 기사작위를 받은 경우가 아예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6.2. 소속별



6.2.1. 소속기사


  • 나이트 배철러(하급 기사)
  • 하우스홀드 나이트(가신 기사)

6.2.2. 편력기사(나이트 에런트)


나이트-에런트(Knight-errant)는 기사의 계급이 아니다. 나이트 에런트 자체가 편력 기사라는 뜻인데, 말 뜻을 잘 생각해보면 기사 계급이 아니라는 걸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편력(遍歷, errant)이란 여기저기 쏘다니는 방랑을 뜻하는 것이므로, 즉 어디 소속해있지 않은 낭인이라는 의미이다.
중세 초기라면 몰라도 사실 영지나 작위란 게 한정돼있어서 그리 쉽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나눠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닥치다 보니 나중에는 기사로 서임받더라도 영지나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래서 기사로 태어났으되 물려받은 재산과 봉토가 없는 많은 가난한 기사들은 편력기사(遍歷騎士)가 되어 떠돌면서 마치 용병처럼 생활하거나[31] 자신을 고용해줄 영주를 찾다가 적당한 조건에 동네 영주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디 먼 동네에 있는 악당을 혼내주러 다닌다든지 물질적 이득을 외면하고 명성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레이디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 한다.'는 흔히 아는 편력 기사의 이미지는 중세가 아니라 근대에 나온 기사도 로망스를 통해 생긴 것이다.
즉 방랑 기사, 편력 행위를 하는 떠돌이 기사 자체는 실존했다. 그러나 실제로 편력 행위를 하는 경우는 숭고한 이상이나 정의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냥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라서 어디 토너먼트나 껀수 없을까, 높은 사람들과 인맥 만들 수 없을까, 어느 가문 아래 들어갈 수 없을까 등등 온갖 이유로 쑤시고 다니는 것이었다.
편력기사가 좀 악랄하게 굴자면, 괜히 지나가는 다른 기사나 상인한테 시비 걸어서 자기 솜씨를 뽐내고 장비를 빼앗아 한밑천 삼으려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건전한 이유를 꼽자면 자기 동네를 위협하는 산적이나 강도 따위를 처리하기 위해서 그 동네 기사가 발벗고 나선 치안 행위 같은 것이 해당된다[32]. 즉 실제의 편력 행위는 봉건 기사의 위치를 탈피한 숭고한 무언가라기보다는 봉건 기사의 위치로 가려는 발버둥에 가까웠다.[33]
아무 기사나 방패에 문양을 새길 수 없다는 속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에런트든 아니든 간에 방패에 자기 가문이나 개인의 문장을 그리는 것은 제한이 없다. 앞서 언급된 윌리엄 마샬은 자신이 신세졌던 가문의 문장을 좀 더 써먹으려고 갖고 다니기도 했다. 색깔로 의미가 부여된 흑기사나 백기사 역시도 아서 왕의 죽음 같은 기사도 로망스에서 만들어낸 허구이자 상징. 작중 등장인물의 역할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에 불과하지, 딱히 실제 관습과는 관련없는 것이다. 기사가 창끝에 달던 작은 삼각형이나 제비꼬리형 깃발은 페넌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것으로, 기사라면 아무나 페넌을 쓸 수 있었다.
아무나 달지 못하는 깃발은 배너라는 것인데,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제법 큰 깃발이다. 배너를 소유할 수 있는 기사를 두고 베너렛 기사라고 부른다. 배너는 일종의 지휘기, 부대기라서 전장에서 배너를 사용하는 것은 배너렛 기사, 그리고 부대를 지휘하는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다.

6.3. 지역별



6.3.1. 서유럽


  • 캐벌리어(Cavalier)(英)
  • 리터(Ritter)(獨)
  • 슈발리에(Chevalier)(佛)
  • 까바예로(Caballero)(西)

6.3.2. 동유럽



6.3.3. 오스만 제국



7. 환상과 현실


기사도의 환상 때문인지 기사들이 명예를 소중히 하고 자신만의 여성을 두는 등 낭만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합법적인 무장 깡패에 가까웠다.
기사 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배신(Vavasour) 계층이었다. 가신 밑의 가신이라는 의미인 이 단어는, 그 휘하에 다른 전사 계급을 두지 못한 최하급 전사 계층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봉토로써 1망스 정도의 토지와 농노가 주어졌는데...1망스란 다름 아닌 1가구를 뜻했다. 즉 대다수의 기사는 그럴싸한 영지를 가진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었고, 안 좋게 말하면 평범한 농민 가정에 얹혀사는 식충이(...)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그렇다고해서 그들이 평소에 일을 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농사 따위 농노들이나 하는 천한 일이랍시고 일 따위 안 했다. 이런 인식은 기사들만 하는건 아니라서 기사가 직접 농사 짓는다하면 기사들 내에서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별종 취급했다. 만지는 게 너무 좋아서 토너먼트에 나가지도 않고 농사만 짓는 기사를 보고 레이디가 "그런 남자는 싫어요."했더니 토너먼트로 나가서 훌륭한 성적을 거둬오더라 하는 옛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당시 귀족들은 글을 안 배운 걸 자랑으로 여겨서 자기 이름도 못 쓰는 인간들이 수두룩했다. 공부는 성직자가 적성에 맞는 겁쟁이들이나 하는 일로 여겼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지의 평화나 약자 보호를 위해서 평소에 뭔가 헌신하는 이들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중세의 일화들을 보면 강도나 양아치, 조폭에 가까운 기사들이 수두룩했다.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나가던 사람들이나 상인들에게 '수금(?)'을 하는 경우는 흔했고, 이들을 가르키는 덤불 기사도적 기사라는 용어가 따로 나올 정도였다.[34] 지금의 독일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경우 대공위 시대에 많이 출몰했고, 영방으로 쪼개진덕에 직접적인 제제를 가할 수단이 부족한 관계로 당시 관세 사무소를 습격하거나 강가의 화물선을 나포하는 등 무법 행위를 자행했다. 괴테의 희곡으로 유명한 실존인물 괴츠 폰 베를리힝엔 역시 도적 기사였다. 봉건 시대 초기 프랑스 남부는 그야말로 혼돈의 극치였는데, 이런 도적 때 기사들이 자체적으로 성을 쌓거나 이미 있던 성을 점령한 다음 주변 마을들을 멋대로 자기 휘하 영지로 삼는 성주라는 존재들이 난립하기도 했다.
때문에 교회에서도 이런 양아치가 대다수인 기사들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고, 프랑스의 몇몇 수도원은 자기네 장원에 속한 기사들에게 '평시에는 무장 금지' 같은 명령을 내리거나 '너무 비싼 무기를 들고 다닌다' 라는 이상한 이유로 처벌하기도 하는 등 교회와 기사는 은근한 갈등 관계였다. 기사도 로망스 따위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기사 따위는 기사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교회와 왕실 등에서 좀 도덕적으로 교화시켜보고자 만든 일종의 줄 같은 개념이고, 실제 기사는 훨씬 현실적이고 돈벌이에 민감했다.# 모시는 주군을 뒤치기한 기사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국왕이나 대영주들은 부하 기사를 신뢰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기사가 그런 강도 무리는 아니어서, 형편이 극도로 나빠졌지만 그리스도교적/인간적 양심이 있는 가난한 기사들은 강도짓이라도 불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경제가 나빠지는 경우 영지를 반납하거나 교회에 봉헌하고 십자군을 떠나거나 수도원 소속 기사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 대기근이나 전염병 등이 대유행했을 때 볼 수 있는 모습이고, 노후가 불안정하고 영지가 없는 노기사/병사들도 흔히 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가난한 기사들은 장가도 못 가고 늙어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이들도 결혼도 하고 싶고, 후임 기사들이나 부하 기사들도 데리고 다니고, 제대로 된 영지도 거느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기사들은 싸움이라면 환장을 했다. 주군이 소집한 전쟁에 나서면 주군이 봉급도 챙겨주고, 전리품도 얻을 수 있고, 공성에 성공하면 사흘 동안 약탈도 가능했기 때문에 기사들에게 전쟁은 곧 생계였다. 잘 싸우면 주군 눈에 띄어서 더 많은 봉토를 얻을 수도 있고, 그러면 결혼하거나 부하 기사를 거느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사가 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기간은 겨우 1년에 40일 일 정도로 짧았다. 이것은 고전 게르만족의 관습법에서 주군을 위해 종사가 복무해야하는 날을 '1년에 중에 40밤을 자는 동안'으로 규정되어왔던 것에서 유래했다. 물론 전쟁이 FM대로 40일만에 끝낼 수 있는 건 절대 아닌지라 실제 복무 기간은 40일을 넘기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때문에 중세에는 이미 40일을 넘겨서 봉사하는 것을 의무로 규정하는 법이 각지에서 제정되었을 정도로 저 고대법은 무시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저 규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고, 40일 이상 복무할 경우 이나 으로 추가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주군 입장에서는 40일을 넘겨서 계속 봉급을 쳐먹는 기사들을 계속 붙드는 것도 나름 힘겨웠던 관계로, 주군 입장에서도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려 했다. 때문에 기사 입장에서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기 위해 다른 귀족 눈에 띄어서 그 귀족과 계약을 추가로 맺어서 조금이라도 일을 더 뛰는 투잡, 쓰리잡(?) 기사들도 흔했다.
물론 다른 주군과 계약을 맺으려면 뭔가 커리어가 있어서 명망이 좀 있어야 스카웃이 들어오는 법. 때문에 토너먼트는 기사들이 활동하며 눈에 띌 수 있는 중세판 프로듀스 101(?) 쯤 되는 빅이벤트였다. 토너먼트에 나가서 체면은 세우고 싶지만 괜히 져서 쪽팔리는 건 싫던 왕이나 이름난 귀족들은 승률 높은 기사를 고용해서 호위로 두곤 했다. 이때 이렇게 용병으로 팔려다닌 기사들의 모습에서 따온 단어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프리랜서(Free Lancer)다. 토너먼트 밀리 경기에서 승자는 패자를 잡고 몸값을 요구하거나 갑옷을 벗겨서 자기가 가질 수 있으니, 가진 게 말 한필과 갑옷에 창검뿐인 가난한 기사는 돈 놓고 돈 먹기 한다는 생각으로 토너먼트에 나가 다른 기사를 털어먹었다. 사실 말과 무기, 갑주의 유지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다 보니 가난한 기사들로선 돈을 벌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밀리 경기는 1 대 1이 아니라 전쟁처럼 꽤 규모가 큰 팀전이라, 아예 이 길로 나섰다가 크게 대성해서 토너먼트 전문 기사단을 꾸린 기사도 있다. 사자심왕을 이긴 사나이로 유명한 윌리엄 마샬이 대표적인 케이스.
최소 12세기까지 유럽이 군소 제후와 귀족들에 의해서 상시적인 내전 상태였던 것에는 이런 기사들의 존재도 한 몫 했다. 기사들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어떤 형태나 이유에서든 전쟁이 필요했고, 기사들의 주군인 영주/왕들 역시 기사들 앞에서 위신을 채우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했다.
한편 저런 극히 가난한 기사들 외에도, 백작, 공작, 심지어 왕까지도 전장터에서는 한명의 기사였던 중세의 특성 상, 전장에 나섰다가 그런 명망 높은 귀족도 한방에 골로 가는 사례는 무척 흔했다. 심지어 프로방스 백작가나 바르셀로나 백작가의 경우는 기사서임식을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징크스 때문에 귀족이면서도 기사 서임식을 최대한 미루는 특이한 가풍도 있었다.
한 일본 학습만화[35]의 묘사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 이후 몇몇 타락한 무술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모시는 주인도 없이 기마창 시합마다 돌아다니며 영주들로부터 알바를 하며 상금에 눈이 먼 것으로 묘사된다. 영주들은 왕이나 주교 같은 높은 사람들 앞에서 그 기사가 자기네 가신이라고 뻥치고 다니면서 체면을 유지한다.
12~13세기를 거치면서 유럽 내부가 좀 평화로워지자 저런 무식한 식충이 강도 기사들의 입지가 점점 줄어든다. 전쟁이 줄어든 유럽에서 저런 하급 기사들이 몰린 곳은 다름 아닌 용병이었다. 이탈리아의 콘도티에리, 스페인의 콩퀴스타도르를 구성한 인물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저런 한미한 귀족 출신 가문이었다. 한편 군주나 영역제후들도 소집하는 봉신들 대신 용병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며, 복무를 대신하는 세금인 Scutage(영: shield pay, 방패세)가 정착하게 된다. 이전 시대의 관습이었던 '기사는 농사 일을 해서는 안된다'가 법으로 이 시대에 확정되는 바람에, 형식적인 기사 타이틀을 단 한미한 귀족들은 군주와 영역제후들이 고용하는 용병으로써 먹고 살았다.
한편 저런 하류 기사들 외에, 중소 귀족으로 그나마 성공했던 기사들도 나름 다른 길을 찾는다. 식충이 기사들을 영지에 붙들어 두기보다는 용병으로 내보냈으며, 기사들 중에서도 행정 능력이나 소양이 좀 있는 이들은 미니스테알리(ministeriales)[36]로 고용해서 영지의 경영에 참가하기도 했다. 남작 쯤 되는 이들은 왕에게 관료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는 분할 상속 경향도 점점 줄어서, 영주들도 장남 미만의 아들들은 용병으로 방출해버리거나 교회로 보내거나 대학에 보내 교육 시켜 관료로 만들곤 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위에서도 상기했듯 '혈통으로써 기사들' 은 꼭 말타고 싸우는 계층이라기보다는 그냥 귀족층이면 으레 붙은 타이틀로 변해간다.
이 시기 쯤이면 그 전처럼 진짜로 무식한 기사들은 찾기 힘들고, 문학이나 시에 조예 깊은 인물들도 흔히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12~13세기 고명한 기사이자 미네징거[37]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38]는 작품 내에서 "나는 글도 모르는 야인입니다." 운운하면서 구술로 썼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진짜로 글을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글월 깨나 읽는답시고 시건방지고 콧대높게 굴던 학자들이나 라틴어를 포함한 정규 교육을 받은 메이저 작가들에 대한 빈정거림 내지는 자신은 아마추어리즘에 충실하므로 저런 자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의 상징적 발언일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볼프람의 글은 작가의 폭넓은 지식문학적 시도가 있는 만큼 그가 문맹일 리는 없다.
라틴어를 못해서 을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시대 식자들의 언어는 라틴어였고, 대부분의 책을 라틴어로 썼으며 De Re Militari 같은 군사서도 라틴어로 적혀있다 보니 그걸 못 읽는 군주가 전쟁터에서 글(라틴어)을 아는 기사를 불러다가 해석을 시켜 군략의 조언을 얻곤 했다. 하지만 그 군주도 평상시에 자기네 말로 편지 쓰고 사무 보고 할 거 잘만 했다.
중세의 끝물인 16세기면 슬슬 보병전술과 총병 전술의 발달, 용병으로 대체 추세가 완연해져서 기사가 플레이트 아머 입고 말타고 돌격할 전장은 없어지지만, 한미한 수 많은 귀족 가문들이 대대로 이어진 기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가 끝난지 한창 된 17세기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도 하급귀족 타이틀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기한 12~13세기 이래로의 변화, 즉 방패세로 봉건 소집을 대체하던 경향을 비롯한 사회적 변화는 이미 진행될대로 진행되어서, 아무리 귀족 작위를 단 사람이라 해도 주군을 찾는다면서 떠돌아다닌다 한들 봉토를 내려주고 기사 서임식을 해줄 사람은 없었다. 다만 월급을 줄 고용주를 찾아야 할 시대였던 것이다.
기사단도 실존하긴 했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 중세 유럽에서 기사단의 시작은 구호기사단이나 성전기사단처럼 십자군 원정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 조직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기사라는 돈 잡아 먹는 중기병 유닛을 상설 유지하기엔 필요성도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십자군 시절의 기사단 역시 종교의 적과 싸운다는 대의명분 하에 세워진 경향이 있어서 절대적 필요성 자체는 글쎄올시다 싶은 수준이다. 십자군 이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유럽 각국의 국가/사설 기사단은 대개 소수의 자격을 갖춘 기사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귀족 클럽에 가까운 양상을 띄고 있었으므로, 보통 생각하는 기사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다만 무슬림 정복 이래 꾸준히 무슬림과 싸울 필요가 있었던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도 특이한 케이스다.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도교라는 구심점을 들기는 했으나, 스페인 기사들은 실제로 자기 땅을 침략한 적과 싸워야 한다는 절실하고도 실질적인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종교보다는 충성을 바치는 군주를 중심으로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에까지 남아 있는 유명 스페인 기사단들의 건립 연혁은 12~13세기까지 올라가고, 하나같이 실제 무력 집단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쳤었다. 물론 다른 유럽 지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기사단도 중세 말로 가면서 귀족 집단화하게 된다.

8. 현대의 기사


전술적인 측면에서 현대의 기사는 공군 파일럿 과 육군 기갑으로 옮겨갔다. 특히 전투기 파일럿의 경우 보통 1:1로 하늘에서 맞붙어 싸우다 보니 첫 공중전이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스스로를 '하늘의 기사'라고 자칭하며 탈출하는 적 조종사는 쏘지 않는 등 나름대로의 기사도를 지키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붉은 남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독일군공군 에이스인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이다. 다만, 이 사람은 격추된 전투기에서 탈출하는 조종사를 공격하지 않는 매우 신사적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격추한 비행기의 잔해를 주워다가 자기 에 장식하는 악취미가 있어서, 적군 조종사들을 피꺼솟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39]. 이 시기의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사도적인 로망을 다룬 작품이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붉은 돼지다. 작중의 시점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지만, 이 시기에도 어느 정도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남아 있어서, 조종사들 사이에서 기사도를 지키지 않는 자를 비신사적인 사람으로 취급했다. 현대에도 제네바 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이런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국제법상 공수부대가 아닌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할 목적으로 낙하산을 편 사람을 공격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현대에는 유럽 일부 국가에서 큰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기사 칭호를 주고, 이 칭호가 기사작위(Knighthood/Damehood)로 통용된다.
대표적으로 영연방에서는 2등급 이상(1, 2등급)의 훈장을 받거나 Knight Bachelor를 받으면 이름 앞에 'Sir(경)'을 붙일 수 있게 된다. 여성이 2등급 이상의 훈장을 받을 경우 'Dame(여사: 女士)'을 이름 앞에 붙인다. 이러한 기사작위는 기본적으로 비세습이라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40] 또한 중세처럼 땅을 준다거나 정치적 입지[41]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장(coat of arms)에 기사의 상징을 쓸 수 있는 등 명예 차원의 여러 의전이 따라 붙는다. 유서 깊은 전통이 있기도 하거니와 영국 사회가 아직 말투로도 암묵적으로 계층을 나누는 철저한 명예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공인하는 이런 경칭은 자국민 입장에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Honours System, 그러니까 훈장 체계는 크게 Chivalric Order(기사단 작위) - Decorations(큰 공이 있어서 주는 훈장) - Medal(공이 있기는 한데 좀 격이 낮은 훈장) 정도로 나뉠 수 있는데 기사가 되려면 기사단에 일원으로 들어가든가, 아니면 기사라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 영국에서, 영국 여왕이 군주(Sovereign)로 있는 기사단은 총 10개가 있는데 그 중 6개만 기사작위를 주기 때문에 여섯 개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영국 기사단 중에서도 제일 서열이 높은 기사단이다. 주로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스에 관련된 사람들(많이 높으신 분들)한테 주는 기사단 자리. 주로 뭐 영국 합참의장이나, 나토 사무총장, 전 국무총리, 대법원장 같은 분야의 탑들에게 주는 명예다. 후술할 티슬 기사단과 유이하게 군주인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준다고 하면 그냥 줄 수 있는 훈장이다. 정부의 조언 같은 거 필요없다.
이 기사단의 단원이 되면, 파란색 가터벨트를 진짜로 수여받고, 본인의 문장(Coat of Arms)에 저 가터 기사단의 표식을 넣는 것이 허용된다. 그리고 당연히 이 기사단에 들어가는 거 자체로 일단 Sir 칭호는 당연히 따라 붙는다고 할 수 있다.
  • 티슬 기사단(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이 기사단은 가터 기사단과 동급이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람들에게 주는 기사단 자리다. 영국은 4개 왕국이 모여서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특히나 독립하려고 애쓰는 동네 사람들이니, 이런 훈장에서도 차별화된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는 것을 것이다. 티슬은, 스코틀랜드의 상징 중 하나인 엉겅퀴를 뜻한다.
이 기사단에 들어갈 시에도 당연히 가터 기사단과 같이 Sir 칭호를 받을 수 있다. 가터 기사단 처럼 문장에 로고도 넣을 수 있다.
  • 바스 기사단(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바스 기사단은 기사단 랭킹 4위에 위치하고 있는 훈장이다. 물론 4위도 많이 높다. 이 단계에서 부터는 정부의 조언을 받아 국왕이 승인을 하는 형태를 띄게된다. 정부의 조언을 받는다는 소리는 결국 입헌군주제 시스템하에 영국 정부에서 리스트 뽑아 올리면 군주가 군말없이 사인해주는 형식으로, 군주가 거부할 수 없다. 이 기사단 부터는 Sir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계급이랑 받을 수 없는 계급이 나뉜다.
  • GCB(Knights/Dames Grand Cross) 120명
  • KCB(Knights Commander)/DCB(Dames Commander) 355명
등급은 SIr 칭호를 받을 수 있고,[42] CB(Companion) 등급 1925명은 아쉽게도 Sir 칭호를 받을 수 없다. 이 기사단의 자리는 앞에서 소개했던 기사단보다는 확실히 격이 낮다. 단적인 예로, 바스 기사단은 인원 제한이 120+355+1925명인 데 반해서, 가터 기사단은 총원 24명을 넘을 수 없고, 티슬 기사단은 16명을 넘을 수 없다. 그래도 문장에 로고 넣게 해주는 건 여기도 같다.
  • 성 미카엘과 성 조지 기사단(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기사단 훈격 6위에 위치한 훈장이다. 이 기사단은 주로 고위급 외교관들에게만 주는 훈장이다. 예를 들어 각국으로 보내는 대사들한테 이 훈장을 하나씩 줘서 보내는데 특히 미국이나 프랑스, 유엔 같은 큰 나라에 보내는 외교관들은 주로 이 기사단의 높은 자리를 줘서 보낸다. 이 기사단도 바스 기사단처럼 등급이 정해져 있다.
  • Knight/Dame Grand Cross(GCMG)
  • Knight(KCMG) / Dame(DCMG) Commander
이들은 Sir 칭호를 붙일 수 있고 CMG(Companion)은 붙일 수 없다. 그래도 문장에 로고 넣어주는 건 가능하다.
  • 빅토리아 기사단(Royal Victorian Order)
훈격 랭킹 7위에 있는 빅토리아 기사단이다. 이 기사단은 아주 특이한데, 군주가 100% 개인의 의지로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기사작위다. 이 작위는 군주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그러니까 궁전에서 일하는 비서들이나 시종들에게 근속을 기념한다거나 하는 느낌으로 주는 훈장이기 때문에, 받은 사람들도 전부 다 군주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기사단부터는 등급이 좀 많아지는데 총 6개 중에서 상위 2개 등급만 Sir/Dame 칭호를 붙일 수 있다.
  • 대영제국 기사단(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이 기사단이 대영제국 훈장이다. 여기는 주로 평민들이 특출한 일을 했을 때 "너 기사." 하면서 주는 느낌. 그래서 우리가 흔히 보는 축구선수와 감독들은 공을 세우면 주로 이 기사단 작위를 받는 편이다. 적어도 훈장을 주는 기준에서 보면, 귀족 출신들은 위와 같이 세세하게 나눠서 기사작위를 주지만 평민들은 거의 이 기사단에 넣는다. 이 기사단도 상위 2개 등급만 Sir/Dame 칭호를 붙일 수 있다.
  • 번외: Knight Bachelor
이 기사작위는 기사단에는 속해 있지 않은데 군주에게 "어디 가서 기사라고 하고 다녀도 된다."라고 인증받은 기사들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프리랜서 기사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앞에 Sir를 붙일 수 있다. Sir 칭호를 달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도 항상 적어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그냥 Sir만 있으면 이 Knight Bachelor를 받은 것이다.
  • 번외 2: Dormant Orders(휴면 기사단)
이 기사단들은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회원이 없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수여된 적이 없어서 묻혀버린 기사단이다.
  • 성 패트릭 기사단: 가터 기사단이 잉글랜드, 웨일즈. 그리고 티슬 기사단이 스코틀랜드 출신 사람들이 들어가는 기사단이라면 이 기사단은 아일랜드 출신의 사람들이 들어가던 곳이다. 물론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더 이상 충원이 안 되는 상황이며, 북아일랜드는 가터 기사단으로 편입되었다. 이 기사단이 원래 훈격 3위에 있었던 기사단이다.
  • 인도에 관련된 기사단(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패트릭 기사단과 같은 의미로 인도가 대영제국의 일부였을 때 만들어놓은 기사단이지만 인도가 독립하면서 더 이상 수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서류상으로는 살아 있는 기사단이다.
한편 프랑스 공화국에서도 레지옹 도뇌르 훈장, 문예공로훈장(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등의 훈장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칭호를 기사라는 의미의 '슈발리에' 칭호로 부른다.
로마 가톨릭교회에도 교황이 훈장을 내려주는 성좌 고유 기사단이 존재한다. 교황 훈장 항목 참조. 링크

8.1. 기사작위를 받은 인물



여기 없는 인물은 보통 아니라고 보면 된다. 낮은 등급 훈장만 받았든지, 영국인이 아니라서 명예 훈장을 받았든지, 그도 아니면 벨기에[43]나 덴마크[44], 태국 같은 다른 국가의 기사이든지 셋 중 하나다. 한글 위키피디아에 문서가 개설되지 않은 인물은, 영어 위키피디아 항목에서 이름 앞에 'Sir'가 붙는지 아닌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은 대영제국 훈장 문서에 되어 있다.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기사작위 서임자 중, 자주 언급되는 경우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 이름(first name) 기준 가나다 순.
  • 다니엘 데이 루이스
  • 데이비드 수셰이
  • 디디 그레고리우스
  • 로저 무어
  • 리들리 스콧
  • 마이클 케인
  • 매기 스미스
  • 믹 재거
  • 바비 롭슨
  • 보비 찰튼
  • 사이먼 래틀
  • 성심당[45]
  • 숀 코너리
  • 스탠리 매튜스
  • 아서 C. 클라크
  • 아서 코난 도일
  • 아이작 뉴턴
  • 안소니 홉킨스
  • 알렉 기네스
  • 알렉산더 플레밍
  • 알렉스 퍼거슨
  • 알프 램지
  • 애거서 크리스티[46]
  • 앤드루 로이드 웨버[47]
  • 앤드루 와일스
  • 앤디 머리
  • 앨런 파커
  • 엘리자베스 테일러
  • 엘튼 존
  • 윈스턴 처칠[48]
  • 이언 매켈런
  • 자하 하디드
  • 제인 구달
  • 조너선 아이브
  • 조지 마틴
  • 존 엘리엇 가디너
  • 존 허트
  • 줄리 앤드루스
  • 찰리 채플린
  • 캐머런 매킨토시
  • 케네스 브래너
  • 크리스토퍼 리
  • 테리 프래쳇
  • 팀 라이스
  • 팀 버너스리
  • 패트릭 스튜어트
  • 폴 매카트니[49]
  • 피터 잭슨[50]
  • 명예 기사작위를 받은 인물[51]
  • [52]

8.2. 와인 기사작위?


기사와 기사단의 전통적 의식과 이미지를 차용해 온 것들일 뿐, 실제 위상은 기사작위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8.2.1. 진실


모르고 보면 영국의 기사작위와 같은 급처럼 보일 수 있지만, 와인스쿨 졸업하면 주기도 하는 게 바로 이 소위 '와인 기사작위'다. 관련기사 와인스쿨 교육을 받는 데 드는 어려움과 비용이 웬만한 박사과정의 뺨을 치기라도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박사도 치우고 영국에서 날고 긴다는 교수들도 석학급에 다다른 뒤에야 받는 것이 기사작위다.
'와인 기사작위'의 가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싼 식대와 와인값을 지불하면 기사작위를 받을 수 있다는 현지의 안내를 받았다기사도 올라왔다.
이것들은 애초에 국가적 공헌에 대한 심사를 정부 주관으로 거쳐서 주는 것이 아니라, 각 와인 생산자 협의회가 '와인' 생산과 홍보에 도움이 되었는가를 기준으로 심사하여 주는 것이다. 심사의 권위도 권위지만 취지도 애초에 다른 것이다.
기사단의 전통과 이미지를 비슷하게 쓰다 보니 언론을 통해 겉보여지는 행사들의 이미지가 기사단과 엇비슷해졌고, 그러다 보니 대외적으로 '기사작위' 또는 '기사단'이라 알리는 것일 뿐이다.
진짜 기사작위는 본인의 전문 분야에서의 명망은 기본으로 있어야 하고, 이것이 국가적으로[53] 어떤 공헌이 되었는지 전문 공훈 심사단의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자선 활동 등 공익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했는지가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며, 사생활 문제가 드러나기라도 하면 후보에 들었다가도 취소된다.

8.2.2. 대표적 예


1) 쥐라드 드 생테밀리옹(Jurade[54] de Saint-Emilion)
2) 론 와인 기사단(Cotes du Rhone Chevalier d'anthelme)[55]
3) 메독그라브 봉탕 사단(Commanderie du Bontemps de Medoc et des Graves)[56] → 일명 '코망드리 와인 기사단'
4) 슈발리에 뒤 타스트뱅 조합(La Confrerie des Chevaliers du Tastevin) → 일명 '부르고뉴 기사작위'
5) 포므롤 오스피탈리에 조합(La Confrerie des Hospitaliers de Pomerol)
6) 포르투갈 형제애 조합(Federacao das Confrarias Baquicas de Portugal)
7) KOV 와인기사단(The Brotherhood of the Knights of the Vine)

8.2.3. 대상자


고재윤, 공승식, 김기원, 김덕현, 김동준,[57] 김양한, 김준철, 김형곤,[58] 문병욱, 박재범,[59] 박찬준, 박철호, 박현진,[60] 배도환, 배형근,[61] 서성호, 신근중, 심재혁, 엄수진, 유안근, 유영진, 유지인, 윤홍근,[62] 이경희,[63] 이다도시, 이동현, 이수만, 이영하, 이제춘,[64] 이프로, 이훈,[65] 이희상, 임권택, 장미화(가수), 정준호, 정하봉, 정회영, 조용학, 조현준 박사, 지니 조 리, 차진선, 최병호, 추교진,[66] 하시모토 켄이치, 한관규, 함현진, 황영조
[1] 이렇게 된 건 앵글로색슨 사회가 게르만의 전통적인 보병 중심 군사문화를 더 오래 유지하였던 점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도 노르드인의 대침공을 겪으면서 봉건적 전사귀족(thegn)이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으나, 군사문화는 여전히 보병 중심이었고, 앵글로-노르드 왕조가 성립하였던 시기에도 역시 보병대 중심이었던 노르드인의 허스칼을 도입하여 기존 앵글로색슨 전사와 병존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도 앵글로색슨 군대는 일반적인 자유민 부대(fyrd)와 전사 가신군(selected fyrd)으로 구성되었다. 바로 이 앵글로색슨 시대에 "cniht"(knight)는 궁정의 하인이나 고용인, 가신을 의미하거나 무장한 부하를 뜻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노르만 정복으로 앵글로-노르만 문화가 탄생하고, 노르만인이 지배계급으로서 자신들 문화를 전파하고서야 기병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니 종래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Knight에는 기마전사라는 의미가 담기지 않고 섬긴다는 의미가 담겨있을 수밖에.[2] 실제로 푸아티에 전투 1년 전인 732년에 교회령을 몰수하여 봉토를 내렸으며, 명분도 북방 유목민족을 상대로였다는 증거도 나와 있다.[3] 단순 전력만 비교할 땐 보병보다 기병이 더 우월하니[4] 전근대 일본의 사무라이도 마찬가지로 영지를 잃고, 충성할 주군이 사라지고(교토의 사무라이들은 천황이 주군이었으므로 제외), 부시도를 못 지키게 되는 사회적 변화로 인해 몰락했다. 그래서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은 기사와 사무라이의 역사에 대해 서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5] 도끼나 메이스 같은 둔기는 무게중심이 머리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민첩하게 다루기 힘들었다.[6] 손잡이 끝의 무게추[7] 초기형 머스킷으로도 잘 뚫리지 않았다. 갑옷 장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갑옷이 총알을 막을 수 있다는 증거로 갑옷에 실제로 총을 쏴서 총알 자국을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8] =롱소드[9] 다만 최근 들어서는 쇠사슬로 말을 연결하는 것은 한마리라도 쓰러지면 전체 대형 붕괴라는 결과로 초래되기에 원래는 한몸인듯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병들을 쇠사슬로 연결한 것으로 묘사한것이 후대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10] 자세한 건 브레이브 하트 참조[11] 랜스 길이가 무려 5.5m에 달한다. 물론 서방의 파이크도 5.5m에 달하지만 이들이 설칠 즈음의 동유럽의 장창은 3~4m 정도로 짧았고, 그 규모도 적었다. 다만 후기에는 역관광 당하지만...[12] 당장 사냥을 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뭔지를 한번 생각해보라. 물론 보어스피어 같은 것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겠지만 말이다.[13] 복잡한 예로 잉글랜드의 경우 브리튼섬은 평야가 많다고 보기 애매했고 실제로 잉글랜드 기사들도 보병으로서 자주 싸우긴했지만 그렇다고 절대 순수 보병으로서 복무하진 않았다. 본디 잉글랜드의 기사 자체가 기병의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개념이기도 했고 기사계급이 보통 노르망디 혈통의 앵글로-노르만이었으며 나름 다수의 프랑스 영지를 소유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백년전쟁 당시 기사들을 보병으로 전환시키는 전술을 매우 자주 사용했음에도 기마전투를 고도로 훈련했다고 한다. 애초에 나이트라는 영어 단어도 기마전사라는 뜻이니...[14] 물론 노섬브리아 백작이면서 렐름 자작일 수는 있다. 백작령과 자작령 두 개를 봉작 받거나 백작이 자작령을 점령하면 작위는 영지에 귀속되는 것이기에 두 개 세 개의 작위를 가질 순 있다. 하나의 영지에서 두개의 작위를 가질 수 없는 것뿐이다.[15] 그러나 근현대의 작위에서는 하나의 봉지에 두 개의 다른 작위가 존재할 수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웨스트민스터 후작을 겸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16] 다만, 영국에는 일대귀족이라 하여, 작위를 받은 진짜 귀족이라도 그 작위의 세습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17] 사실, 잉글랜드가 아닌 영국 전체를 보면 세습되는 기사가 있긴하다. 아일랜드에선 흑기사,백기사,녹기사의 세 세습 기사가 있었다. 하나 백기사는 17세기에 대가 끊기고, 흑기사는 2011년 대가 끊겨 남은 건 녹기사뿐이다.(여담으로 녹기사 가문은 19대 당주 때 준남작을 수여받았다.)[18] 잉글랜드에서 다른 작위없이 기사 작위만 갖고 있다면 보통 젠트리로 분류된다.[19] 독일의 Ritter는 대개 세습이었지만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에서는 비세습 Ritter가 혼재되어 있었다.[20] 피츠제랄드 가문이 갖고 있는 Knight of Kerry, Knight of Glin, White Knight는 세습기사작위이고 나머지는 세습이 안 된다. 참고로 현재는 Knight of Kerry만 대가 끊기지 않고 외롭게 남아 있다.[21] 출처: Thomas Asbridge, The First Crusade[22] 영주가 전투에 참여한 가신들이나 부농들의 농장을 대신 경작해주는 식이었다.[23] 보통 7~8세 정도.[24] 14~16세 정도. 관습에 따라 페이지를 시작한 지 7년 후에 스콰이어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25] 관습적으로 4~7년의 훈련과정[26] 영화 등에서 칼이나 권장 등으로 어깨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것은 이것을 간소화한 것이다. 몽둥이 찜질이 아닌 경우 보통 따귀를 때려서 코피를 보았다. 실제로 몽둥이 찜질로 죽은 기사 후보생도 종종 있었다고 하며, 기사서임식에서 쳐맞고 뻗는 신참 기사가 나오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두들겨 패는 것이 너무 심해서 부상자랑 사망자가 많이 나온 나머지, 지역에 따라 따귀 한 대 치는 걸로 간략화 되거나, 하룻밤 정결하게 지내면서 의식을 거치거나, 칼로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는 정도로 변형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훌룡히 고증된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주인공 발리앙의 아버지 고드프리가 죽기 전에 그를 기사로 임명하면서 따귀를 후려치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한다. 또 나중에 벨리안도 예루살렘 방어전에서 성 안의 모든 남성들에게 기사 직위를 내릴 때 대표 중 한 청년의 뺨을 후려치면서 똑같이 하는 장면이 나온다.[27]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하급기사라고 번역한다. 지금도 영국에서는 1920년대에 창설된 하급기사협회가 하급기사들을 관리한다.[28] 물론 구호기사단, 튜튼 기사단이나 구출기사단, 성전기사단 같이 현장에서 직접 구르는 기사단은 여전히 군사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아무래도 외적과 직접 맞붙는 입장인 만큼, 후방에 본부가 있는 다른 기사단처럼 귀족 클럽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기는 어렵고, 숙련된 무사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29]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중에서 교황령이나 기타 봉건 영주들이 통치하는 곳은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귀족이 기사로 서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에 교황 요한 23세의 치세 때 해체된 바티칸 산하의 평신도 군대인 팔라딘이 있다.[30] 이런 집안들이 향사(鄕士) 혹은 젠트리 계급으로 발전한다. 심지어는 이들 중 몇 대 뒤의 후손이 귀족 작위를 따내기도 한다. 노퍽 공작위를 가진 하워드 가문의 경우, 젠트리이던 하워드 집안이 런던으로 진입하여 돈을 모으면서 법관이 되고 이 법관직을 대대로 잇다가 노퍽 백작위를 가진 여성과 결혼한 후손이 공작위로 승격하면서 공작가문을 만든 것. 이때가 중세의 끝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경우가 상대적으로 프랑스보다 많았던 영국이 왕정복고를 오랬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고.[31] 실제로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이런 편력 기사가 진짜로 용병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잉글랜드 출신 용병대장인 존 호크우드다.[32] 대부분은 그 지역의 영주 본인이나, 그 부하인 기사들이 범죄자 토벌에 나선 경우다.[33] 일본낭인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무사도를 실천하는 진정한 무사의 길을 걷고자 방랑하는 사무라이라는 인식은 근현대, 또는 빨라도 전국시대의 혼란상이 끝난 에도 막부 시기부터 나온 것이다. 원래 낭인들은 주군으로 모시던 다이묘가 패망했거나, 모종의 이유로 소속 번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탈번사무라이들이 일거리와 새로 모실 주군을 찾아 방랑하는 이들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생계 유지에 허덕이느라고 무사도 따위는 알 게 뭐야로 일관했다. 그래서 명색이 사무라이라는 자들이 다이묘들마다 찾아다니면서 용병 일을 하거나, 아예 도적이 되어서 지나가는 상인이나 농부들을 털어먹는 짓거리를 일삼으면서 살았다. 특히 일본은 섬나라라서 유럽의 기사들과는 다르게, 낭인들은 배타는 데도 익숙한 사람이 많다 보니, 직접 배타고 바다로 나가서 해적질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들이 바로 소위 말하는 왜구다.[34] 19-20세기 자본가들을 뜻하는 영어 Robber Baron의 유래 역시 이런 깡패 기사들을 부르던 독일어 Raubritter(Raub 강도 + Ritter 기사)이다.[35] 슈에이샤(集英社)가 1980년대에 내놓은 시리즈. 국내에서 해적판으로 상당히 많이 나왔다.[36] 영단어 minister 의 어원이기도 하다.[37] 중세 독일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행한 '미네장(연애시)'을 지은 시인들.[38] 유명한 파르지발이 볼프람의 작품이다.[39] 위에서 언급했듯이, 중세 유럽의 기사도 체포된 적군이나 주스트 경기에서 패한 기사의 갑옷이나 무기를 압수해서, 시장에 내다 팔거나 전리품으로서 자기 에 가지고 갈 수 있었다. 리히트호펜의 악취미도 따지고보면, 중세 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전통인 셈이다.[40] 준남작(Baronet) 작위를 받아도 Sir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는 세습할 수 있다. 다만 20세기 중반부터는 이런 세습작위가 새로 주어지지 않는 추세라 마가렛 대처 전 총리의 남편 데니스 대처가 90년대 초에 받은 게 유일하다는 게 함정. 데니스 대처도 고인이 됐기 때문에, 현재 실존하는 준남작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세습되어온 작위를 승계한 2대 준남작, 3대 준남작 등등이다. 이렇게 준남작이 새로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준남작이 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제도 자체가 휴면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기사작위를 받은 이후에도 공헌을 꾸준히 쌓은 인물에게는 요즘엔 '오더 오브 메리트(OM)'나 '컴패니언 오브 아너(CH)' 등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있다. 현대 사회에 맞게 서훈제도가 바뀌어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41] 정치적 입지는 남작 이상 작위의 이야기다. 20세기 중반부터 세습 작위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 추세지만, 영국의 의회 중 상원은 이름부터가 여전히 'House of Lords'다. 그래서 지금도 여기 들어오려면 Lord, 즉 남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정치인이 상원에 진입하고자 하거나 다른 분야의 유명인사가 정치를 하게 될 경우, 현대에는 형식적으로 비세습 작위(Life peer)를 받은 이후 들어오게 된다. 이 경우 대부분 비세습 남작 작위가 주어진다. 그래서 남작이라 하면 의전상 기사보다 높은 작위임은 사실이지만, 현대에는 정치적 성격도 강한 타이틀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공헌 인정 성격이 강한 기사작위와는 성격이 좀 다른 타이틀이라고도 할 수 있다.[42] Dame은 여성에게 주는 기사작위. 여성이면 그냥 Sir 대신에 Dame을 넣으면 된다.[43]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44] 닐 D 존스, 디네스 비에른.[45]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기사단(Order of Saint Gregory the Great). [46]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주디 덴치도 그렇고, 여자들은 Knight와 동급인 Dame(女士) 이라는 작위를 받는다.[47] 1992년 예술에 대한 공로로 Knight Bachelor를 받아 기사가 되었다. 지금은 'Sir'이 아니라 'Lord'라고 불리지만, 이는 정치경력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상원의원으로서 당연직으로 따라붙는 비세습 남작칭호(life peerage)에 따른 것. 1988년에 하원의원이 되는 등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97년 상원에 진입하면서 남작이 되었다.[48]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때 가터 훈장을 받으면서 서임되었다.[49] 1997년 3월 11일에 비틀즈 멤버 중 단독으로 받았다.[50] 뉴질랜드인이라서 대영제국 훈장이 아니라 뉴질랜드 메리트 훈장이라는 걸 받았다. 2010년에 2등급으로 승급돼서 기사가 됨.[51] 정원 외로 주어지며, Sir 칭호가 안 붙음.[52] 일단은 기사다. 그리고 영국이 아닌 노르웨이.[53] 심사 결과 국가 수준이 아니라 지역 수준의 공헌으로 봐야 한다 인정되면, 기사작위가 아니라 하급 훈장 수훈자로 선정된다.[54] '기사(Knight)'를 뜻하는 불어는 Chevalier라고 따로 있고, 이 쥐라드(Jurade)는 Jurat라는 단어의 복수 형태로 의미가 시정관(市政官)에 더 가깝다. 사전링크[55] 이는 16세기에 론 와인을 생산하던 생산자들이 사업과 농지를 지키기 위해 결성한 기사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6세기부터 오는 그 전통만은 인정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5등급 슈발리에와 엇비슷한 권위를 현지에선 인정해 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도 업적을 엄격히 심사한 뒤 정부에서 이를 공인하며 범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기사작위'는 절대 아닌 것은 마찬가지.[56] 보르도의 메독(Médoc)과 그라브(Graves) 지역의 와인 생산과 홍보에 공헌해 '봉탕(Bontemps)'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57] 영남이공대학교 호텔관광전공 교수[58] 세종대학교 호텔관광경영학과 교수[59] 금양인터내셔날 대표[60]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 교수[61] 백석예술대학교 외식산업학부 겸임교수[62] 제너시스BBQ 회장[63] 대유와인 대표[64] 더젤(The Jell) 대표[65]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교수[66]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핀란드 헬싱키 지회장


8.3. 시랜드 공국 기사


일정 금액을 기부하면 임명장을 받고 기사가 될 수 있다. 당연하지만 특혜나 명예는 딱히 없다(...). 자세한건 항목 참고.

9. 가상의 기사


기사 캐릭터, 가공의 기사단 분류 참고.
'나이트'로 표기되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이트 문서 참조.

9.1. 가면라이더 스트롱거의 기사


여기서는 적 괴인으로 등장한다. 갑옷 기사 문서 참조.

9.2. 다크 소울 시리즈기사


프롬 소프트웨어의 유명한 게임 다크 소울 시리즈에 네임드 기사 혹은 기사형 적들을 표기한 문서.

9.3. 얼음과 불의 노래의 기사


배경이 중세 판타지인 만큼 중세 유럽의 기사와 거의 동일하다.
기사(얼음과 불의 노래) 참조.

9.4. GARO 시리즈의 마계기사


마계의 괴물인 호러를 소울메탈로 만들어진 검과 갑옷을 사용하여 퇴치하는 존재. 마계기사 문서 참조.

9.5.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의 기사


기사 작위를 가진 마술사들이 기사라고 불리는 것 같다.
지금까지 등장한 기사들은 로마 정교 소속의 기사들과 영국 기사파 소속의 기사들이 있다.[67] 강력한 신체능력과 그 신체능력을 강화해주는 마술병장을 기본무장으로 한다.
영국 기사파 소속 기사들은 검은색의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나오는 것이 특징. 다만 나이트 리더윌리엄 오웰 같은 경우는 갑옷을 입지 않고 평복 차림으로 싸운다. 무기로는 주로 도검 형태의 마술병장을 사용하는 편으로, 이것을 통해 마술의 행사 외에도 단병접전도 실시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마법사'보다는 백병전을 주로 수행하면서 보조적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기사' 내지는 '마검사' 쪽에 가까운 이미지이다. 말하자면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적마도사 같은 하이브리드 클래스로, 덕분에 설정상 엄연히 마술사임에도 마술사로서의 이미지는 별로 없는 편.
기사 중 비중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나이트 리더. 과거 기사였던 인물들까지 합치면 윌리엄 오웰. 그 외의 기사는 이름도 안 나온다. 작중 취급도 나이트 리더나 윌리엄 오웰 같은 최강자들은 정말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만, 나머지 다른 기사들은 거의 잡몹 수준의 취급.

9.6.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지위


나이트메어 프레임의 조종을 담당하며, 귀족이 아니라도 기사 작위는 얻을 수 있다. 넘버즈#s-3는 기사가 될 수 없었지만 쿠루루기 스자쿠의 등장으로 불문율은 깨졌다. 브리타니아 황제(=98대 샤를 지 브리타니아)의 직속 기사는 나이트 오브 라운즈라 불린다.

9.7. 나이트런에 등장하는 특수병


자세한 건 기사(나이트런) 문서 참조.

9.8.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시리즈의 기사


베르카식 마법(고대, 근대 가라지 않고)에 능숙한 마도사를 부르는 호칭. 작중 대사로 보아 별도로 치르는 시험이 있는 것 같다.

9.9.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전투인종


기사(파이브 스타 스토리) 참조.

9.10.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 나오는 중기병 유닛


기사(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9.11. 워크래프트 시리즈


기사(워크래프트 시리즈)

9.12. Warhammer(구판)의 브리토니아의 주요 병종들


모티브부터 프랑스의 농노제와 영국의 아서왕 전승을 융합시킨 기사도의 국가기 때문에 기사가 주요 병과로 등장한다. 실제했던 편력 기사부터 시작하여 수행기사와 페가수스를 타고 다니는 페가수스 나이트에 고결한 임무를 마치고 성배의 축복을 받은 성배 기사들까지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설정상 브레토니아 사회의 지배층이다.

9.13. 클래시 로얄의 캐릭터


기사(클래시 로얄) 문서 참고.

9.14. 도미네이션즈에서 중세 시대의 중장갑 기병



10. 관련 문서



11. 기타


서양에서의 기사를 21세기에서 그나마 가장 근접한 신분을 찾으려면 공군 영관급 장교 정도가 해당될 수 있다. 전투기로 바꾸기만 하면 용도도, 대우도, 지위도 비슷하다. 다만, 말을 사비로 들여야하는 기사와 달리 공군 파일럿이 타고다니는 비행기들은 국가소유라는 점의 차이가 있겠다.


[67] 그런데 작가가 까먹은 건지 설정이 바뀐건지 2권 이후로는 기사는 영국 기사파 소속의 기사만 나온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도 프랑스 소속의 기사는 한명도 안 나오는 등, 기사가 영국의 전유물인 듯이 변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