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리 파이어플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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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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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형

'''Fairey Firefly'''
제원
승무원: 2명
전장: 11.46m
전폭: 13.57m
전고: 4.14m
공허중량: 4,432kg
최대 이륙 중량: 6,373kg
최고 속력: 509km/h
항속거리: 2,090km
최대 상승 고도: 8,530m
무장: 주익에 HS.404 이스파노 기관포 4정
폭장: RP-3 60파운드 로켓 8개 또는 1000 파운드 폭탄 2개
출력원: 롤스-로이스 그리폰 IIB V12 (1,730 마력)
제2차 세계대전 후반에 등장한 영국 해군의 함상 전투/공격/정찰기. 페어리사에서 개발했으며, 1943년 후반부터 페어리 풀머의 후계기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영국 해군은 사양서 N.5/40을 발행했는데, 이는 함상복좌전투기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서 안전하게 행동, 귀함하기 위해서는 조종사 외에 항법사가 탑승한 복좌기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전투기에도 복좌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나 일본 제국의 전투기는 단좌임에도 불구하고 무리없이 해상운용을 소화했기 때문에 복좌는 중량면에서 단좌전투기에 비해 명백히 불리했다. 실제로도 풀머는 근대적인 단좌전투기에 패배를 맛봤다.
이 사양서를 기초로 페어리사의 H.M.채플린이 이끄는 설계팀이 개발한 것이 파이어플라이이다. 엔진은 롤스로이스 그리폰IIB엔진(1730마력)이 사용되었다. 이 기체는 전투기로서는 당시 상당한 대형기였던 풀머보다도 무거웠고, 자체 중량은 대략 400kg, 전비중량은 1.5t 가량 더 무거웠다. 이 자체중량 4,254kg는 영국 공군의 전투기인 스핏파이어 Mk.V형의 거의 2배, 전비중량 6,359kg는 중량과다로 고민하던 바라쿠다 폭격기의 전비중량과 거의 비슷한 수치였다.
하지만 풀머 이상으로 공력적으로 세련된 기체형상, 풀머 MK II보다 400hp 향상된 출력의 엔진 덕분에 최고속도는 풀머 Mk II형보다 60km 가량 상승했다. 또 항법겸 통신사가 탑승하는 후방석은 밀폐형으로 되어 있어 후방석이 기총좌를 겸하는 일이 많은 일반적인 복좌형 전투기와는 다른 이 기체의 외형적 특징이다. 플랩에는 새로이 특허를 얻은 영맨식(페어리 영맨식이라고도 한다) 플랩을 채용, 저속하의 고양력을 실현, 높은 착함성능을 보유하는 데 성공했다.
1941년 6월에는 이미 200대의 발주를 얻었으며, 9월에는 100대의 추가발주를 얻은 이 기체의 시작기는 1번기가 1941년 12월 22일에 비행, 2번기는 1942년 6월 4일, 3번기는 동년 8월 26일에 첫 비행했다.
파이어플라이의 초기 임무는 주로 나치 독일의 점령 아래에 있던 노르웨이 연안의 무장 정찰 및 해당 해역에서의 적 선박 공격이었다. 또한, 1944년 8월 24일에 개시된 티르피츠 공격에서는 공격대의 호위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이 호위는 제1770비행대가 맡았다.
전후에 파이어플라이는 영국 해군을 비롯해 캐나다호주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캐나다 해군은 65대의 AS.Mk 5 형을 1946년부터 1956년까지 사용했다. 호주는 AS.Mk 5 형 등을 운용해 항모 시드니의 함재기와 나우라 근교에 위치한 알바트로스 공군 기지(HMAS Albatross)에서 사용했다. 영연방 이외에서는 네덜란드가 사용했으며, 1946년 1월 18일부터 6월 20일까지 30기의 F.Mk I 형을 영국에서 받고 절반은 독립 전쟁이 긴장화된 네덜란드령 동인도(수마트라 섬)에 배치됐다. 파이어플라이는 6.25 전쟁에서도 사용되었지만, 영국 본국에서는 1956년에 가넷으로 교체되어 전선 임무에서 물러났다. 또한, 생산 수가 많아 여전히 가동기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

1. 미디어에서의 등장


항공 시뮬레이션 게임 워 썬더 영국트리에서 등장한다.
전함소녀에서 대공, 대잠, 폭격이 모두 되는 5성 폭격기로 콜로서스의 기본장비로 등장한다. 파이어플라이AS.MK5는 전리품 상점에서 구매가능한 6성 폭격기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