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칼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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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8월 18일 ~
Felipe de Jesús Calderón Hinojosa(펠리페 데헤수스 칼데론 이노호사)
1. 개요
멕시코의 정치인으로, 2006년 ~ 2012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인물.
2. 생애
미초아칸 주 모렐리아에서 태어났다. 집안에서는 막내이고, 위로 형이 5명이나 있다.
아버지 루이스 칼데론 베가는 국민행동당 창당 당시 활동한 인물인데, 칼데론은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멕시코 기술자치대학(ITAM)에서 수학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는 잠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한 이력이 있다. ITAM이 멕시코에서 가장 인정받는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운이 좋았다는 건 덤.
3. 정치 활동
1980년대 아버지를 따라 국민행동당에 입당했다. 이 시절에는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개시했다. 곧바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95년에는 연고지인 미초아칸의 주지사로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당대표를 지냈는데, 이 시절 60년 이상 장기집권 중이던 제도혁명당이 서서히 김 빠지기 시작하면서, 칼데론은 이러한 점을 노려 역전을 시도했다. 이미 그가 정치 활동을 개시하던 1980년대부터 제도혁명당의 세가 기울고 국민행동당이 서서히 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한 지라, 사실상 거기서 거기였고 부진할 때도 있었는데, 가령 1988년 대선에서는 아주 미미하게나마 6년 전에 비해 부진했던 것은 덤.
하지만 1994년 국민행동당의 후보로 나간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세바요스가 25.9%를 얻어, 사상 처음으로 20% 대에 접어드는 등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임 대표로 취임한 이가 바로 칼데론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국민행동당은 멕시코 31개 주(+멕시코 시티) 중에서 14개 주의 주지사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공로로 잠재적 대권주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대신에 비센테 폭스가 나갔다. 비록 과반득표에는 실패했지만, 42.5%를 득표해 당선되어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폭스는 칼데론을 바노브라스 은행의 이사장으로 지명했고, 7개월 정도 지내다 에너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물러났다. 이 때만 해도 둘은 꽤나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계자 문제를 두고 갈등이 불거진 끝에 결국 1년 만에 장관직을 그만 두었다. 당초 폭스는 내무장관이던 산티아고 크릴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칼데론이 이에 반발한 것.
2006년에 대선 출마 선언했다. 경선 끝에 앙숙이던 크릴을 누르고 국민행동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비록 2003년 국회의원 중간선거에서 부진하는 등 나름의 불안감도 있었으며, 이 때문에 35.9%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혁명당의 후보로 나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를 단 '''0.6%''' 차이로 누르고 극적으로 당선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제도혁명당 후보였던 로베르토 마드라소를 3위로 광탈시킨 나름의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는 문제가 많았다. 우선 폭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아 오브라도르가 인기를 얻었는데 이에 대해 국민행동당에서 오브라도르를 우고 차베스와 연관시키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행했으며, 금권선거 문제도 있었다. 또한 저 정도 표차면 부정선거 시비도 있을 법한데 전면 재검표도 거부되었다. 이 때문에 오브라도르가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등 한동안 정치적 혼란이 있었다.
4. 대통령 시절
대통령 시절 칼데론은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쇄신을 단행했다. 무려 '''96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대학을 건립했으며, 1,000여개의 병원을 건립하는 한편, 2,000여개의 병원을 리모델링하는 등 사회적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구축했다. 또한 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한편,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해 고질적인 약물 중독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덕에 약 5년이 지난 2011년까지 지지율이 50%대에 이르는 등, 매우 인기가 좋았다. 특히 의료 정책은 현재도 꾸준히 높게 평가받는 등 칼데론이 의료 분야에 대대적인 공을 들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레임덕이 걸리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생각보다 한계가 걸리기 시작하는 와중에, 유권자들 사이에서 제도혁명당 시대의 향수가 자극되기 시작했다. 사실 2012년 초만 해도 지지율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중순에 접어들고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지지율이 3~40%로 추락하는 등, 상황은 나쁘게 흘러갔다.
멕시코는 대통령 6년 단임제이므로 2012년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대신에 호세피나 바스케스라는 여성 후보가 출마했지만,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제도혁명당이 멕시코 주의 주지사를 지내면서 인기를 얻은 엔리케 페냐 니에토를 내세우면서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결국 바스케스는 3위로 패했고, 니에토가 당선되면서 12년 만에 제도혁명당이 재집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