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혁명당

 


[image]
'''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
'''약칭'''
PRI
'''상징색'''
녹색, 흰색, 붉은색[1]
'''한글명칭'''
제도혁명당
'''창당일'''
1929년 3월 4일
'''이념'''
혁명적 내셔널리즘 (공식)
사회보수주의
관료주의[2]
'''스펙트럼'''
중도[3]
'''1928~1934:'''
우익[4]
'''1934~1940''':
좌익[5]
'''주소'''
Av. Insurgentes Norte 59 col.
Buenavista 06359, 멕시코시티
'''국제 조직'''

'''대표'''
알레한드로 모레노 카르데나스
(Alejandro Moreno Cárdenas)
'''상원 의석수'''
14석 / 128석
'''하원 의석수'''
47석 / 500석
'''웹사이트'''


1. 개요
2. 역사
3. 여담
4. 역대 선거결과
4.1. 대통령 선거


1. 개요


멕시코의 정당. 혁명제도당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으나, 국내의 스페인어학과나 중남미학과 교수들을 비롯해서 일반적으로는 제도혁명당으로 번역하며 영어로도 Institutional Revolutionary Party라고 쓴다. 이쪽은 멕시코측 문서에서도 쓰는 공식 번역.
1929년 창당된 이래 2000년까지 '''71년간''' 장기 집권한 정당이다. 만약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소련 공산당의 장기집권 기록을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1929년부터 1989년까지만 해도 멕시코의 32개 주의 주지사직을 전부 독점했다.

2. 역사


전신은 노동자당으로 카예스가 멕시코 혁명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모아서 창당한 좌익 정당이었다. 알바로 오브레곤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정권(1920~1928) 때 노동자당은 강력한 반교권주의 정책을 실행했고, 무자비한 종교인 탄압에 반발한 카톨릭교인들이 크리스테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권력을 계속 잡고 싶었던 카예스는 바지사장 3인을 각각 2년간 대통령으로 올린 채 본인이 정권을 독점했고 이 시기(1928~1934)를 막시마토(Maximato)라고 부른다.
Maximato 기간 동안 카예스와 혁명 장군들(Caudillo)은 점치 보수적인 성향을 띄게 되었고, 국제 파시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카예스는 1930년 멕시코 공산당 금지, 파업 금지, 소작농의 지역 카우디요로의 예속화 등 우경화했다. 또한 반미선동 및 히스패닉 통합을 통한 멕시코 고토 회복을 주장해서 멕시코와 미국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카예스는 1934년 선거에서도 라사로 카르데나스를 바지사장으로 올리려고 했으나 카르데나스는 카예스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카우디요들의 권력을 제거하기 시작해서 결국 권력투쟁에 패배한 카예스가 망명한다.
카르데나스 하의 국민혁명당은 멕시코 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소작농을 위한 토지개혁, 원주민 보호, 석유 국유화, 공산당과 연합해서 노동조합 증강 등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했다.[6]
그 뒤 1940년 선거에는 온건파 후보인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 후로는 중도 성향의 정당이 되었다.
이처럼 카르데나스 시기의 성향은 석유 국영화 등 확실히 사회주의 노선을 띈 좌익 성향의 정당이었으나(현재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며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확고히 띄게 되고 경제정책면에서도 점점 우경화되었으며 현재는 중도 성향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의 여파로 농촌지역이 황폐화되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결국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다가 진압과정에서 수백명이 죽어나가는[7]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석유값 상승으로 정권을 안정적으로 연장하고, 학생운동의 주도자도 영입하기도 했다.
제도혁명당의 독주 아래 멕시코의 정치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독특한 특색을 띄었다. 제도혁명당 자체는 사실상 유일한 지배적인 정당으로 공천이 곧 당선일 정도로 권력이 셌지만 당 내부에서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을 잡지 못했다. 대통령 후보, 즉 사실상의 후계자를 결정할 때를 비롯해 많은 일들이 관료, 정치원로, 법조인, 기업인, 노동조합등의 밀실협의로 결정되었다. 군부나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전무해 다른 라틴아메리카와 대조를 이뤘다. 거의 모든 고위관료들이 제도혁명당 소속이었고 기업이나 노동조합은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 그 대가로 관료들은 정치인들의 정책을 앞장서 실행했고 기업과 노동조합은 종업원들을 관제시위등에 동원하거나 부정선거를 도와줬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은 혼자서 당의 결정을 뒤집고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6년 단임 임기를 마치면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된다. 아즈텍 황제나 독재자에 비유될 정도로 힘이 센 대통령이지만 짧은 기간에만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랭크 브랜드버그는 "멕시코는 독재자를 6년마다 갈아치움으로써 개인적인 독재를 막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사실 이 같은 정치체제는 당대에도 지식인들이나 좌파성향의 운동가들로부터 쓴소리를 적지 않게 들었고, 멕시코의 경제성장이 막을 내린 1980년대 이후로는 멕시코의 발전을 가로막던 일등공신이라며 여러모로 욕을 들어먹고있지만 1970년대까지는 이 같은 정치 체제가 많은 옹호를 받았는데 쿠데타가 다반사거나 독재국가가 판을 쳤던 다른 중남미 국가와는 다르게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성장을 둘다 이루었기 때문이고, 비록 권력을 독점해왔다고는 하지만 군부가 독재했던 국가에 비하면 파업할 자유나 정부나 기업을 욕할 자유같은 여러가지 자유는 비교적 보장된 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멕시코도 운동권이나 야당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고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대학생 수백명을 학살한 사건이 증거지만, 그래도 운동권을 포용하려고 시도하는 등 여타 중남미 국가에 비하면 온건한 축이기는 했다. 본래 좌파정당이었다고는 하지만 우경화되어가다보니 미국의 태클을 받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1982년 석유값 하락과 외채위기로 멕시코의 고도성장 신화는 막을 내렸고[8] 이후로 NAFTA와 노동규제 완화, 민영화, 재정지출 축소, 임금삭감 등 신자유주의, 보수적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고 그 여파로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에 반발한 좌파 상당수가 민주혁명당(PRD)으로 떨어져나갔고,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때 그 무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1988년 대선에서 정권교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초기 개표에서 카르데나스 후보가 우세를 보였고 개표 중반까지도 이 기세가 이어졌는데 정권교체가 두려웠던 제도혁명당이 의도적으로 정전을 시킨 후에 투표함 바꿔치기 즉 개표조작을 자당 후보를 50%를 겨우 넘는 득표율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표 초반까지 제도혁명당 후보가 아닌 야당 후보가 앞섰던것은 멕시코에서 엄청난 일이었고 부정선거로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이후 선거개혁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야권의 세가 넓어지는 계가도 되었다.
한편으로 70년대까지만 해도 멀티정당 신세였던 국민행동당(PAN)이 제도혁명당의 고질적인 부정부패에 진저리 난 보수성향 국민들의 지지로 세를 불려나갔다. 또 금융규제 완화로 경제구조가 외국자본에게 털리기 좋은 구조로 재편되어 경제위기가 반복된 바람에, 제도혁명당의 세가 약화되어갔고 1994년에 금융위기와 더불어서 남부 일대에 사파티스타 좌파무장단체가 제도혁명당의 정책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는 상황이었지만 여당후보가 도중에 암살당하는 바람에 동정표가 모이면서 재집권에는 성공을 거둘수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결국 1997년 중간선거를 기점으로 의회 과반수에 미달하면서 1당체제가 붕괴되고 우파-국민행동당 / 중도-제도혁명당 / 좌파-민주혁명당의 3당구도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2000년 대선에서 제도혁명당 후보가 고작 36%의 득표를 거두는데 그치면서 국민행동당(PAN)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12년간 야당으로 지냈다. 2003년 중간선거에서 탄탄한 조직력 덕택에 나름대로 선전할수있었지만 딱히 괜찮은 대체 후보를 내지 못한데다가 이미지가 개판이었던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2006년 대선에서 3위에 그쳤고, 동시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참패를 거두웠다.
하지만 국민행동당 정부가 아슬아슬하게 재집권에 성공한 뒤로 마약과의 전쟁을 펼쳤는데 마약과의 전쟁이 오히려 마약 카르텔들의 무장화만 가속화시키며 변변치 못한 성과를 거두는데 그치며 지지율이 급감했고 이 틈을 타서 엔리케 페냐 니에토가 멕시코주 지사 당시의 좋은 이미지를 쌓아올렸던 덕택에 2012년 대선에서 정권탈환에 성공하였다. 현재는 민주혁명당(PRD)이 좌파성향을 띄고 있고 국민행동당(PAN)이 확고하게 우파성향을 띄고 있어서 중도정당으로 분류되고, 심지어 언론보도 등에서는 아예 우파에 넣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안티들은 기회주의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좌파인사 후보와 보수 인사 후보들을 필요할때마다 골고루 등용해서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그러나 니에토 대통령은 집권 내내 낮은 경제성장률로 인한 경기침체에다가 자기 친인척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지지율이 폭싹 떨어졌고 2015년 중간선거에서는 국민행동당이나 민주혁명당이나 쌍으로 삽질한 덕택에 겨우 선전할수 있었지만 대학생 43명 실종사건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으로 썩은 정당이라는 평판이 더욱 강해진데다가, 치안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고, 더군다나 2016년 대선에서 당선된 트럼프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약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까지 두터워지면서 지지율은 10%대를 겨우 넘나들고 있으며 2018년 대선에서 국가재건운동(MORENA)의 오브라도르가 당선되었고[9] 호세 안토니오 미드 (José Antonio Meade) 후보는 10%대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주지사는 1명도 건지지 못했으며 하원에서 모레나, 국민행동당은 물론이고, 하원에서 모레나당과 선거연합을 구성한 노동자당과 사회만남당만도 못한 42석 가량의 의석을 확보, 원내 5당으로 몰락하며(연합정당까지 합하면 60석) 한때 멕시코를 호령하던 정당, 3당제의 한축을 구성하던 정당에서 일개 중견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상황은 좋지 않은데 국민행동당, 민주혁명당과 연합전선을 꾸리고 있지만 지지율은 별로 좋지 않다.

3. 여담


멕시코에서 이 당의 당원이나 옹호자는 '프리스타 (priísta)' 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당의 약자인 PRI에 '-주의자'라는 뜻의 스페인어 접미사 -ista를 붙여서 만들어진 말이다.
참고로 멕시코 시티에서는 힘이 약하다. 멕시코 시티에서는 좌파 정당들의 세력이 강한데, 지금은 모레나당이 강세이며, 과거에는 민주혁명당 (PRD)의 힘이 강했다. 지금은 무소속인 멕시코시티 시장인 미겔 앙헬 만세라 (Miguel Ángel Mancera) 역시 PRD 출신. 멕시코주에서 제도혁명당의 세력이 가장 강하다.
부정부패로도 악명이 높다. 장기집권을 하는 과정에서 각 기업들과 관료들과 협력관계를 맺었는데 집권이 장기화되다보니 변질화되어서 부패가 난무하게 된데다가 이게 일부 조직만의 문제도 아닌 것이 지방 농민이나 노동조합들을 대상으로도 협력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표를 대가로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부패가 판을 칠 수밖에 없게 되니 아예 제도혁명당이라는 정당 자체가 부패의 온상이 되어왔다. 1988년 대통령 선거때 초기 개표에서 야당후보인 라사로 카르데나스 전 대통령의 아들 '쿠아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당선될 듯하자 개표도중에 정전을 시켰다. 멕시코는 1970년대 남미 각국에서 독재정권들이 판쳤을때 탄압받는 시민들을 대거 망명자로 받아들였었던 나라들 중 하나였는데 자당 후보 당선시키려고 독재정권들이 했던 일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정전을 시킨 후 투표함 바꿔치기를 통해 자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일은 유명하며[10] 이외에도 각종 정경유착이나 권언유착[11]등...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덕분에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니에토 당시 대통령 후보에게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대거 벌어졌을 정도였다.
다만 제도혁명당만 특별히 부패한 건 아니고 국민행동당이나 민주혁명당도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해졌다는것이 중론이다. 제도혁명당이 장기집권해서 멕시코의 부패의 큰 축을 담당하며 저지른 일이 많아서 덜 주목받을 뿐이다.[12]
기행을 많이 저지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 포퓰리즘과 관련된 것인데 멕시코가 1980년대 이후로 제도적인 민주화가 단행됨에도 이러한 짓거리는 오히려 확산되었고 심지어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도 이런식으로 유권자 매수를 자행해오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도 유권자 상당수를 매수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치렀는데 이때 제도혁명당측에서 상품을 뿌렸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음에도 제대로 된 수사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멕시코주의 대표적인 우범지대 중 하나인 시우다드 네사와코요틀에서는 한 후보자가 자신이 당선되면 도시 내 100만 가구에 매일 1kg씩 또르띠야를 주겠다는 말을 했었고, 주민들에게 쥐꼬리만한 돈을 주는 것은 이미 전통적인 수법이다. 2015년에는 PRI 소속의 한 후보자가 여성의 브래지어 사이에 걸 수 있는 동전주머니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한다. 한국 같으면 후보자는 경찰서 정모를 열고, 이를 받은 사람도 최고 50배에 가까운 과태료를 물어야 되는데, 멕시코는 제대로 된 단속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2018년 대선판에서도 제도혁명당 측에서 돈을 뿌리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증언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지만 미운털이 많이 박혀있기때문에 생각보다 별 효력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미드 나르코스 멕시코편에 나오는데 부정부패와 무능의 극한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에서도 시도때도 없이 까인다.

4. 역대 선거결과



4.1. 대통령 선거


후보자
연도
득표율
당선여부
파스쿠알 오르티스 루비오
1929년
93.6%
'''당선'''
라사로 카르데나스
1934년
98.2%
'''당선'''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1940년
93.9%
'''당선'''
미겔 알레만 발데스
1946년
77.9%
'''당선'''
아돌포 루이스 코르티네스
1952년
74.3%
'''당선'''
아돌포 로페스 마테오스
1958년
90.4%
'''당선'''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1964년
88.8%
'''당선'''
루이스 에체베리아 알바레스
1970년
86.0%
'''당선'''
호세 로페스 포르티요
1976년
100.0%[13]
'''당선'''
미겔 데 라 마드리드
1982년
74.3%
'''당선'''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1988년
50.7%[14]
'''당선'''
에르네스토 세디요[15]
1994년
48.7%
'''당선'''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오초아
2000년
36.1%
낙선
로베르토 마드라소
2006년
22.3%
낙선
엔리케 페냐 니에토
2012년
38.2%
'''당선'''
호세 안토니오 미드 쿠리브레냐
2018년
16.41%
낙선
80년대까지 결과가 심히 대단한데, 이는 제도혁명당이 조합주의에 기반한 정당이기 때문이다. 쿠데타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 농민, 군대의 조합주의적 구성을 규정한 정당이었다.

[1] 멕시코 국기 색깔에서 따왔다.[2] 물론 선거철이 되면 포퓰리즘을 남발하지만 그 외 시기에는 본인들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한마디로 무능 부패정당의 표본.[3] 언론에서는 스펙트럼을 보도하지 않거나 아예 (친미)우파라고 보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소속이며 중도 우파 국민행동당과 중도 좌파 민주혁명당 사이에서 중간에 위치해 있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단순 중도정당으로만 표기.[4] 국민혁명당(PNR)(1929~1938)시기. 우경화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가 바지사장 대통령 3인을 내세운 시기(Maximato)로 혁명기의 노동자당을 승계한 정당이었지만 보수주의, 반공주의, 반미 성향을 띄었다.[5] 멕시코 혁명당(PRM)(1938~1946) 시기. 라사로 카르데나스 통치기에는 지금의 민주혁명당이나 국가재건운동보다 좌경화한 사회주의 정당이였다.[6] 카예스를 비롯한 망명파들은 석유 국유화로 카르데나스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자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정권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착 카예스가 미국 망명기에서 현지 파시스트들과 친하게 지냈고 이는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 정계가 그냥 카르데나스 정권을 승인하게 만들었다.[7] 이를 틀랄텔롤코 참사라고 한다. 68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일어난 학생 집회였으며, 결국 1968년 10월 2일에 멕시코시티 역사지구 근처에 있는 틀랄텔롤코에서 군경이 데모 학생들에게 발포하여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지금도 매년 10월 2일에는 틀랄텔롤코에서 집회가 일어난다.[8] 사실 1976년 금융위기로 멕시코의 고도성장이 막을 내렸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후로 석유산업에 힘을 쏟으면서 단기간에 극복했는데 1982년 금융위기는 1976년 금융위기와 다른차원에서 그걸 뿌리채 뒤 흔들었고, 1982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해서 임금수준이 폭락하면서 여파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멕시코의 최저임금 수준이 경제수준에 비해서 말도 안되게 낮은데 이는 1982년 금융위기를 극복을 명목으로 임금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고 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을 낮게 유지했고 이게 21세기 들어서도 계속 유지되다보니까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트럼프 당선 이후로 미국이 멕시코에 수시로 압력을 가하고 멕시코 자체적으로도 내수시장의 중요성을 체감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을 올려서 빈민층들의 구매력을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내수시장을 확충시키겠다는 식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크게 낮다. [9] 오브라도르는 제도혁명당 출신 정치인이기는 하다. 물론 출신만 그렇지 대통령이 된 시점에서 제도혁명당에서 탈당한지 30년은 되었고 9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제도혁명당 측에서 저질렀던 선거부정을 폭로하거나 멕시코 석유공사의 민영화 정책에 항의하는 등 대표적인 反 제도혁명당 활동을 하던 인물이었다.[10] 물론 가장 유명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도 몇개의 위성정당을 둔 사실상의 일당독주체제였고, 선거도 요식행위 정도에 불과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멕시코가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굴러가던 국가다보니 저항이 눈에 띌 정도로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11] 텔레비사가 대표적인 친 제도혁명당 언론이다. 물론 따로 국영 방송국을 안 만든것은 아니지만 1980년대까지 텔레비사가 방송시장 점유율의 대다수를 차지하게끔 내버렸던것도 이 때문이었다. [12] 극단적으로 한 정당에서 부패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멕시코 시티에서 잘 보여주는데, 아예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새로 차린 신당의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 일례로 국가재건운동이 있다.[13]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독출마해서 당선되었다.[14] 부정선거. 개표 초반까지만 해도 야당 후보인 콰우테모크 카르데나스(라사로 카르데나스의 아들)가 근소한 표차이로 승리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개표도중에 의도적으로 정전을 시킨 후에 투표함 바꿔치기를 통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도 사상 최저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상당한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에도 말이 많았으며 후에 마드리드 대통령도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이 선거가 부정선거임을 시인하고 당시에 사용되었던 투표용지는 1991년에 전부 소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15] 루이스 콜로시오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가 콜로시오가 의문의 살해를 당한 뒤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