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제(전한)

 


<colbgcolor=#a11><colcolor=#ece5b6>'''한 제9대 황제'''
'''廢皇帝 | 폐황제'''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제호'''
폐황제(廢皇帝)
'''연호'''
없음
'''작위'''
창읍왕(昌邑王) → 황제 재위(27일) → 해혼후(海昏侯)
'''출생'''
기원전 92년
'''사망'''
기원전 59년(만 33세)
'''재위'''
'''한의 황제'''
기원전 74년 7월 18일 ~ 기원전 74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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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
유(劉)
''''''
하(賀)
'''부모'''
아버지 유박

1. 소개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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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한나라의 제9대 황제. 폐위된 관계로 묘호와 시호는 없고, 그의 즉위전 작위였던 창읍왕(昌邑王)[1] 또는 폐위 후 왕에서 강봉(降封)된 해혼후라 부른다. 휘는 하(賀).

2. 생애


소제의 부황 무제에게는 여태자 유거(劉據), 제회왕 유굉(劉閎), 연날왕 유단(劉旦), 광릉여왕 유서(劉胥), 창읍애왕 유박(劉髆)[2], 소제 등 여러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소제가 사망한 당시 생존해 있던 사람은 광릉왕뿐이고, 다른 형제들의 자손으로는 창읍애왕의 아들 창읍왕 유하, 여태자의 손자 유병이(劉病已)(후의 선제)가 있었다.[3]
이에 곽광(霍光)은 창읍왕 유하를 황제로 추대한다. 《한서》 곽광전과 《자치통감》에는 소제가 죽자 다른 대신들은 모두 광릉왕을 추대했으나, 곽광은 무제 눈밖에 난 광릉왕을 추대하는 것을 꺼려, 자신의 외손녀이기도 한 효소황후의 조서를 받아 유하를 불러들여 새 황제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4]
유하는 교지를 받고 기뻐하며 자기 세력 200여 명을 이끌고 장안에 도착했다. 소제의 장례가 진행되는 중간에도 술과 고기를 먹었으며, 심지어 죽은 소제가 아끼던 후궁 몽(夢)까지 취했다. 이에 유하가 폭군이 될 가능성을 염려하고, 유하에게 자신이 숙청될 기미를 느낀 곽광은 황제가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는 이유로 27일만에 전연년(田延年), 장안세(張安世) 등과 공모하여 폐위시키고, 그해 9월 유병이를 제10대 황제 선제(宣帝)로 세웠다.[5]
효소황후는 창읍국을 없애고 그곳에 산양군(山陽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유하를 잘못 보필했다는 이유로 창읍의 신하 20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유하는 신분이 평민으로 떨어졌음에도 창읍왕가의 재물을 그대로 보전받았고, 2천 호의 탕목읍(湯沐邑)을 받았다. 이는 곽광이 만약 선제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경우 선제를 협박하거나 제거할 수단으로 남겨두기 위함이었다.
곽광이 기원전 68년에 죽은 후 곽씨 일족의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한 선제 또한 유하를 잠재적 위협으로 여겼다. 그래서 선제는 기원전 63년(선제 11년) 유하를 해혼후(海昏侯)로 봉해 다시 제후의 지위로 복권시키고 식읍을 4천 호로 늘려주면서도, 막상 봉지를 유하의 기반인 산양군에서 멀리 떨어진 해혼현(현재의 장시 성 난창)으로 옮겨 실제로는 유하의 세력기반을 약화시켰다. 이때 이미 유하는 중풍에 걸려 몸도 마음도 온전치 않았다고 유하를 감시한 태수 장창(張敞)이 선제에게 보고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질병에도 불구하고 선제가 걱정한 것처럼 유하는 제위에 복귀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6], 결국 불온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고 선제는 유하의 식읍에서 3천 호를 빼앗고 1천 호만 남겨두는 처벌을 내렸다. 이 처벌을 받은 직후 유하는 3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지병인 중풍에다 처벌로 인한 울분 때문에 병사했다는 설과 선제에게 살해당했다는 타살설이 있다.
유하의 장남과 차남은 유하와 비슷한 시기에 죽었고(이 역시 선제에게 죽임당했다는 설이 있다), 해혼후 작위는 일시 폐지되었다가 원제가 즉위한 후 셋쩨아들 유대종(劉代宗)이 물려받았다. 그 후 손자 유보세, 증손자 유회읍까지 해혼후 작위를 물려받았으나 유회읍에게 적통 후손이 없어 해혼후 작위는 다시 폐지되었다.

3. 기타


2011년, 장시성 난창시 신젠현에서 해혼후 유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마왕퇴 한묘 이후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한나라 때의 무덤으로, 200만개의 동전, 수백킬로그램에 달하는 금붙이를[7] 비롯한 진귀한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해혼후, 지워진 황제의 부활이라는 책을 참조.
[1] 현대 행정구역상 위치는 중화인민공화국 호남성 남창시 창읍향(후난성 난창시 창이향).[2] 유박은 위청 사후 대완전, 흉노전을 책임졌던 이사장군 이광리(李廣利)(사기의 그 사람)의 외조카다. 이광리는 무제 말년이었던 당시 승상 유굴리와 함께 유박을 태자로 올리려다 발각됐다. 유굴리는 요참(허리를 짜름)됐고 흉노전 중이던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했다. 이후 외롭게 살던 창읍애왕은 죽고 아들 유하가 봉작을 계승했다.[3] 연날왕의 세 아들도 살아있었으나 '''연날왕은 곽광이 죽였다'''.[4] 유서를 추대할 경우 유서 본인의 능력이 출중하고 집안의 권세가 있어 곽광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황후의 조사를 내세워 권력과 동떨어진 창읍 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5] 유병이를 세운 이유는 전적으로 권세가 없는 유병이를 황제로 세워 자기 가문의 권세를 다지기 위함이었다.[6] 실제로 아래에 나오는 유하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 명문이 새겨지지 않은 엽전 수만 꾸러미가 발견되었다. 아마 반란을 위한 군자금으로 준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7] 서한 시대의 고액화폐인 마제금(馬蹄金)과 1단계 낮은 화폐인 금병(金餅)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