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후 왕씨(당)
廢后 王氏
1. 고종의 폐후 왕씨
? ~ 655년
당시의 황제였던 고종에 의해 황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칭호는 폐후이다.
병주 기현 출신으로 서위의 왕사성의 현손녀이었으며, 태종의 누나인 동안공주(同安公主)과 왕유(王裕)의 손녀이며, 정관 연간에 나산현령을 지낸 왕인우(王仁祐)의 딸로 태어났다. 태종의 아들이었던 진왕 이치(훗날의 고종)의 왕비가 되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고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지 않아 고종이 왕씨를 폐위하려고 하였는데,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이 여기에 반발하면서 분쟁이 심각해진다.
여기에 고종은 태종 사후 비구니가 되었던 무조를 총애하였다. 그리고 653년에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황후 왕씨는 고종에게 무조를 소의로 책봉하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황후 왕씨는 숙비 소씨가 고종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생각하여 안심했지만, 소의 무씨가 고종의 총애를 독점하면서 왕씨는 소의 무씨의 도전을 받았고 결국 장손무기 등과 세력을 구축하여 소의 무씨와 대립하였다.
소의 무씨는 654년에 안정공주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왕씨는 안정공주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이듬해에 숙비 소씨와 함께 나란히 쫓겨났다. 왕씨와 소씨는 얼마 안 있어 죽었다. 폐서인된 왕씨는 사후 성이 '망(蟒, 이무기 망)'씨로 바뀌었다가[1] 중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원래의 성씨로 돌아갔다. 여기에는 왕씨의 복권을 요청했던 측천무후의 부탁이 강하게 남아있다. 물론 숙비 소씨도 중종이 즉위하면서 복권되었다.
2. 현종의 폐후 왕씨
? ~ 724년
중국 당나라의 황후였던 인물로, 당시의 황제였던 현종에 의해 황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칭호는 폐후이다.
동주 하규현 출신으로 양나라의 관리를 지낸 왕신념의 후손이자 왕인교의 딸이었다. 현종이 임치왕으로 있을 때 왕씨를 임치왕비로 맞이하였으며, 현종이 예종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왕씨도 황태자비가 되었다. 이윽고 712년에는 예종이 현종에게 양위하고 현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현종이 임치왕으로 있었을 때, 혼인한 황후는 위황후를 주살하고 태평공주[2] 를 제거할 당시 밀모에 가담해 대업의 성공에 일조했다. 그녀의 아버지 왕인교와 오빠 왕수일(王守一) 또한 몇 차례에 걸친 정치적 모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현종을 지지했다.
하지만 문제는 현종과 왕씨는 오랫동안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현종도 장차 황후를 폐위하려고 하였다. 또한 당시 현종의 총비였던 정순황후 무씨와의 갈등도 있었다. 여기에 황후의 오빠였던 왕수일은 자신의 여동생이 황후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적 사건을 일으켰다.
왕수일은 결국 개원 12년(724년)에 사태가 발각되어 사사되었고, 왕수일의 동생인 왕씨도 결국 황후 자리에서 쫓겨나 폐서인되었고, 왕수일이 사사되고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왕씨는 사후 38년 뒤인 보응 원년(762년)이 되어서야 황후로 복위되었다.
2.1. 참고문헌
임사영, 류준형 옮김, 『황제들의 당제국사』, 푸른역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