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당)

 


'''당 제6대 황제'''
'''玄宗 明皇帝 | 현종 명황제'''
'''묘호'''
'''현종(玄宗)'''
'''시호'''
지도대성대명효황제
(至道大聖大明孝皇帝)
'''출생'''
685년 9월 8일
'''사망'''
762년 5월 3일 (76년 7개월 25일)
'''연호'''
선천(先天, 712년 8월 ~ 713년 11월)
개원(開元, 713년 12월 ~ 741년)[1]
천보(天寶, 742년 ~ 756년 7월)[2]
'''재위'''
'''당의 황제'''
712년 9월 8일 ~ 756년 8월 12일 (43년 11개월)
'''당의 태상황'''
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3일 (5년 8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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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서 이(李)씨
''''''
융기(隆基)
'''부모'''
부황 예종, 모후 소성순성황후
'''황후'''
폐후 왕씨, 정순황후 무씨[33], 원헌황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1.1. 초기
2.1.2. 정변을 일으키다
2.2. 즉위 후
2.3. 천보난치
3. 퇴위 후
4. 평가
4.1. 양귀비와 관련해서
4.2. 절도사 문제
4.3. 도덕적 결함
5. 기타
6.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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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 이름은 이융기(李隆基).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아명은 이삼랑(李三郎)이었다.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로 줄여서 명황제(明皇帝). 당명황(唐明皇)이라고도 불린다. 묘호는 현종으로 검을 현(玄)을 쓰는 게 특징.[3]

2. 생애



2.1. 즉위 전



2.1.1. 초기


처음에는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다시 책봉되었다. 할머니측천무후가 집권하고 있던 무렵에 소년기를 보냈는데 측천무후 집권기부터 내심 반기를 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의 근위대인 남북위군[4] 중 일부인 만기군을 슬슬 포섭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반기를 들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측천무후가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당예종의 첩을 여럿 죽였기 때문.[5] 이후 큰어머니인 위황후와 그 딸인 안락공주가 큰아버지 중종을 독살(710년 6월 2일)하자[6][7] 6월 20일 자신의 영향력하에 있던 만기군을 움직이는 한편 우림군까지 장악한 다음 고모태평공주와 손을 잡아 정변을 일으켰다.

2.1.2. 정변을 일으키다


이 과정에서 위씨와 무씨 가문 일파[8][9]를 대부분 참살하고 정국을 수습하면서 아버지를 황위에 복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공헌도로만 따지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태자가 될 수 있었지만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미묘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적장자이자 큰형이었던 송왕 이성기가 스스로 양보함으로써 큰 무리없이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형인 이성기와 신왕 이성의는 각각 근면성실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황제에 오른 뒤에도 현종과의 우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즉위하자마자 식사와 생활은 물론이고, 기다란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형제들과 같이 잠을 잤을 정도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그림자 형제'로, 당태종은 같은 뿌리를 두고 엮어 자라는 대나무와 같다고 하여 '죽의(竹義)'라고 그 우애를 정의하기도 했다. 특히 이성기는 개원 29년, 재위 30년 만에 숨을 거두자 고력사에게 시를 짓게 할 정도로 애도했다고. 이성기는 피리에, 동생 이융범은 비파에 능했다고 한다.
동생 이융범과 설왕 이융업은 태평공주 숙청에 동참한 즉위 공신급이었으며, 이융범은 선비와 예를 아는 사람이었지만 이융업은 개원 13년 처형인 위빈과 황보순이 당현종 중병 중 길흉을 논하다가 발각 되어 위빈은 몽둥이로 맞아 죽고, 황보순은 좌천되었다. 물론 우애를 깨진 않은 정도. 당 현종은 이융업을 손수 위로하며 "내가 만약 형제를 시기하고 막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천지신명이 벌을 내릴 것"이라고 다짐했고, 이후로도 이융업이 아프자 현종은 손수 간호를 하다가 촛불이 바람에 날려 수염을 태워먹은 적이 있는데, "'아우가 낫는다면 수염이 문제냐"'면서 대범하게 넘겼다고 한다.
이후 고모인 태평공주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는데 태자로서 길게 있을 경우 위험할 수 있다 여긴 예종은 얼마 안 가 그에게 양위하여 27세에 당나라의 6번째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2.2. 즉위 후



2.2.1. 정적 제거


그러나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한때 동지였던 태평공주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벌여야 했다. 태평공주는 여러 번 현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즉위 다음해(713) 태평공주와 그 일파까지 싸그리 제거하며, 측천무후가 물러난 후 연거푸 무력을 동원한 정변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유능한 재상들을 등용하고 측천무후 시기부터 진행되던 사회변화[10]에 맞추어 제도를 개혁하며, 국방력을 재건하고 대외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라를 최전성기로 끌어올렸다. 수문제 당시 인구수를 넘은 때도 바로 당 현종 재임기로, 당현종의 재위 말기인 754년에 당나라 인구는 약 906만 9천 호[11]인데, 수양제 재위 3년차(606) 때 인구 약 890만 7천 호[12]를 훌쩍 뛰어넘었다.

2.2.2. 개원지치


이 시기 현종을 보좌한 유능한 재상으로는 요숭ㆍ송경ㆍ장가정ㆍ장열ㆍ이원굉ㆍ두섬ㆍ한휴ㆍ장구령[13] 등이 있는데, 요숭과 송경은 개원지치 초창기를 빛낸 명재상으로서 정관지치를 보좌한 방현령ㆍ두여회와 비견될 만하다.[14] 한휴는 현종에게 자주 간언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나서부터 폐하는 단 하루도 즐겁게 지내신 적이 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잔소리꾼[15]이었다. 그 외에 유명한 정치가로는 유능한 재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정국을 길게 주도했던 원건요, 재정난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우문융이 있다.[16]
단순히 이러한 유능한 재상들의 목록만 놓고 본다면 '신하를 잘 둬서 명군'이라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의 강력한 황권을 생각한다면 저러한 명신들은 현종을 보좌하는 자들이고, 결국 정책을 실시하는 주체는 황제 현종이 분명하다. 즉, 개원지치를 실시해 당이 직면했던 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로는 현종에게 있는 셈 그 대표적인 사례가 '화적법' 이다. 이 법은 추수기에 국가에서 강남 등 곡창 지역의 곡식을 시가의 2~3할 정도 더 높게 처서 사들여(화적) 이를 각지의 군진들에 직접 공급하고, 빈번이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수도권 관중 지역[17]에도 공급하는 제도로, 기존의 지조(농민들이 직접 부담)와 영전(군사들이 둔전을 행함)을 대체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성공을 거두어 2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데 성공한다. 이런 식의 괜찮은 제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이루는 데 성공한 공로는 결국 현종에게 있다.
대외적으로는 현종은 기존의 부병제를 기반으로 하는 당의 군제가 측천무후 집권기에 파탄을 맞자 당의 군제를 모병제 중심으로 개혁하는 데 성공. 개원 말엽(730년대)에는 부병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리고 당은 이러한 모병제로 구축된 대규모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방력을 재정비하고 대외적으로 다시끔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외 활동에는 천운도 따랐다. 측천무후 치세부터 예종 대에 이르기까지 돌궐의 가한으로써 군림하며 돌궐 제2제국을 전성기에 올려놓고 하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묵철가한(카파간 카간)이 무척이나 허무한 죽음[19]을 당함으로써(716년) 돌궐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발예고ㆍ회흘ㆍ동라ㆍ습ㆍ복고 등 돌궐에 복속되었던 5개 부족이 한꺼번에 귀부해오면서 북방국경선이 크게 안정되었다.

2.2.3. 위구르


이후 대처에서 미숙함을 보이면서 뒤를 이은 비가가한(빌게 카간)-궐특근(퀼 테긴)에 의해 다시 돌궐은 상당한 세력을 회복하지만 묵철의 전성기와 같은 압도적인 위용은 보여주지 못하게 되면서 현종은 상당히 여유있게 돌궐에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개원지치 시절엔 그래도 돌궐이 여전히 힘을 내고 있던 시기이기에 기본적으로는 돌궐 수하 부족들을 귀부시키고 돌궐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20] 이러한 왠지 운 좋은(...) 전개는 토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이시기의 토번은 매우 강성했으며, 측천무후 즉위 초 가르친링은 당나라에 '''안서 사군 우리에게 넘기고 서돌궐 반 잘라서 나눠 먹는 거 어떠심?''' 이라고 제안할 정도로[21]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나 700년 가르친링이 토번 내부의 정변으로 인해 숙청 당하고, 이후 토번은 정치적 혼란에 의해 약화되었다. 그래도 개원 초기(710년대) 토번은 상당히 강성하였던 데다 경운 2년(예종 시기. 710년) 토번으로 시집간 금성 공주[22]의 탕목읍으로 황하의 만곡 일대인 구곡 지역을 그냥 줘 버리는[23] 삽질을 한 결과 다수의 기병을 충원하는 데 성공한 토번군이 714년 대규모로 침공해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으나[24], 군제 재정비를 마무리지은 당은 점차 토번의 침공을 막아내고 밀어붙이기 시작했으며, 결국 729년 안서-하서-농우 지역 진출에 필요한 토번의 최중요 거점이었던 석보성을 삭방 절도사 이의[25]가 점령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토번은 730년 금성공주를 내세워 화친을 요청했다.

2.2.4. 토번, 발해


이후 737년 다시 토번과 전쟁이 발발하고, 석보성을 741년에 다시 빼앗겼지만, 당은 또다른 요충지 안융성을 계략으로 점령하여 토번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다. 거란족 또한 마찬가지로, 현종은 이이제이를 적절히 걸어 거란을 분열시키고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발해를 상대로는 실패를 맛보아, 발해 무왕이 보낸 장문휴에게 등주를 공격당하고, 반격에 나섰으나 이 역시 실패해 버렸다. 이 시기 당은 모병제로 유지하는 대규모의 군진과, 이를 지역별로 엮어서 통솔하는 절도사직을 신설하였고 천보 연간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절도사직 10개가 설치되었다. 736년에 그 유명한 이임보가 재상의 일원이 되어 장구령[26]을 몰아내 버리면서 불길한 징조가 감돈다. 그리고 737년, 현종은 '''황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사사시키고''' 738년 충왕 이여를 황태자로 세워 태자를 교체했다.

2.3. 천보난치


그러나 이런 태평성세가 계속되며 재위 중반을 향해가자 명군 현종도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명재상들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한다. 즉위 초기의 현종은 상당히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이 시기 즈음부터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보통 기점으로 잡는 건 741년에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꾼 이후로, 이 때문에 현종 후반의 치세를 개원성세에 대비하여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외 정책에서는 유명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무장 고선지가 서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일시적으로 영토가 크게 넓어졌고 재정도 나아졌으나, 이슬람 세력의 등장, 이들과 충돌한 천보 10재[27] (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 이후로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28]
내치 측면에서는 고종 이후 측천무후의 치세를 거치면서 몰락했던 관롱 귀족세력이 유명한 간신 이임보를 필두로 내세워 다시 정국을 장악했으며, 개원의 치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빈천한 가문 출신의 과거제로 입문한 관료들은 세력을 상실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752년 이임보가 사망한 이후 총애하던 후궁 무혜비 사후 맞아들인 양귀비로 인해 양씨 일가가 전횡하게 되었고, 이에 국정의 문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때 이임보는 장성 안쪽의 내지 절도사직을 문신이 아닌 무신이 담당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아예 막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오히려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이 급성장한 탓에 결국 이임보 사후 절도사직을 셋이나 역임하던 안녹산이 755년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까지 들이쳤고, 현종은 사천을 향해 피난가기에 이르렀다. 이임보가 권력을 잡은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피난길에 이게 다 양귀비양국충 때문이라고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들고 일어나서(마외정변), 양국충은 죽고 양귀비는 병사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귀비가 목숨을 잃자 일단 사태는 수습되어 무사히 피난갈 수 있었지만 현종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사천에 피난 가 있는 동안에 다른 방면으로 피난을 보내 분조를 이끌고 있던 황태자가 병사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숙종이 되었다. 자칫하면 황실의 분란이 일어날 위기였지만, 현종에게도 공연히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총기는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양귀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정식으로 양위를 인정하고 사천에서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3. 퇴위 후


이후 각지에서 반란군을 토벌하려는 세력과 숙종의 반격으로 장안을 탈환하여 757년 장안에 돌아와 은거했으며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762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늙은 황제는 죽는 순간까지도 양귀비를 그리워하며 죽었다..고 하는데, 안사의 난 진행 과정을 보면 '''별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것 같지 않은'''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장안 탈환 이후 안록산에게 붙었던 대신들 처벌 내용을 보면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현종에게 숙종이 제발 좀 봐달라고 싹싹 비는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물론 안사의 난 때문에 양귀비가 죽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런 강력한 현종의 영향력에 두려움을 품은 숙종 옹위파가 두 황제 사이를 갈라놓아 결국 현종의 최측근인 고력사를 비롯, 여러 측근들이 귀양가고 그 자신도 말년에는 흥경궁에서 태극궁으로 거처가 옮겨져 유폐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현종 사후 13일 뒤에 아들 숙종도 사망하면서 당의 정국은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는 나라의 쇠퇴로 이어지게 된다.

4. 평가


개원성세를 이루어 천명을 받들고 천하를 얻으며, 옛일을 오랫동안 교훈으로 삼았다. 경사스러운 기운이 화통하고 밝았으며, 침울한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위정의 재능이 정치에 권태를 느꼈고, 요사한 이들이 조정의 관직으로 모여들었다. 선철들의 말로 ‘처음에는 누구나 잘한다.’고 이야기 한다.

구당서, 현종 논찬

“그 나라의 바로 전 임금인 당 명황[29]

만 하더라도 양귀비란 계집에게 미쳐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은 탓에 필경 안녹산의 난을 빚어 내어 오랑캐의 말굽 아래 그네들의 자랑하는 장안이 쑥밭을 이루고 천자란 빈 이름 뿐, 촉나라란 두메 속에 오륙 년을 갇히어 있지 않았는가.

현진건, 「무영탑」 中

개원성세라는 전성기를 이끌었으면서 나라의 쇠퇴까지도 초래한 군주라서 평가가 여러 가지로 엇갈리곤 한다. 역시 인생은 말년까지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체현한 임금.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거의 그를 상징하는 요소이며 그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거리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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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양귀비와 관련해서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다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가인데, 이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도덕적 역사관이기도 하지만, 사실과도 좀 다르다. 후기의 현종이 암군의 모습이 보인다는 점은 잘 따져보면 정치적인 영역에 가깝다. 바닥까지 몰락했던 관롱 귀족 집단이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여 국정을 전횡하는 것을 다름 아닌 그가 방관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경제 개혁도 몇차례 시도했지만 이에 반하는 귀족들이 정국을 장악했는데 그게 과연 먹히겠는가. 이런 상태에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과거제 출신 관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면서 정치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현종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변화들을 학자들이 상징적으로 평가한 것이 '양귀비와 놀아나면서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임보 사후 양국충이 집권하면서 이들 관롱 귀족 세력은 다시 힘을 크게 상실한다. 양국충은 가문이 빈천한 과거 급제자 출신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아 이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과거 출신 관료들은 외척인 양국충의 지원으로 기용되었다는 게 약점이 되어 양씨 가문의 전횡을 막지 못했다.

4.2. 절도사 문제


게다가 개원지치 즈음에 군진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절도사 제도도 문제가 심각했다. '''막대한 수의 직업 군인을 지방의 군사 지휘자가 단독으로 통솔하여''' 군벌이 되기 쉬운 태생적 단점을 가진 절도사제는 그렇기에 엄중한 통제가 필요한 제도였으나, 천보 시대부터 관리가 극도로 소흘해진다. 대표적인 안록산의 경우 평로 절도사로 14년, 범양 절도사로 12년, 하동 절도사로 5년을 재임했고, '''이들 셋을 겸임하는 상태'''로 있었는데, '''절도사의 원래 정해진 임기가 2년'''이란 점을 생각하면 이건 말 그대로 관리를 손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안록산이 통제하던 병력은 지방 절도사들이 관리하던 총 병력인 48만 6,900명 중 37.8%인 18만 3,900명, 여기에 수만명에 달하는 사병 집단까지 확보하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통제 불능의 세력이 된 것.[30] 이걸 방관한 말년의 현종이 과연 암군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이런 거대한 병력을 통제하고 있던 안록산이 반기를 들면서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결국 당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그 책임을 현종과 양귀비라는, 정국 혼란의 상징적이자 책임이 있는 인물들이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4.3. 도덕적 결함


당현종은 부인들과 형제들에게는 따뜻한 성격이었지 아버지로써는 최악인 인물이었는데 역모혐의로 확인이 되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 이영, 광왕 이거, 악왕 이요 등, 자기 아들 셋을 죽여버렸고 게다가 아들인 수왕 이모의 왕비인 양옥환을 빼앗아가는 등, 중국사에서 후륵의 황제인 석호와 더불어 최악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심지어 후임 황제인 당숙종이 무기력해진 이유 역시 아버지에 의해 형제들이 쓸려나가는 꼴을 보거나 인생이 불행해진 삷을 봐서 그렇다는 반응이 많다.

5. 기타


한국의 성씨인천 이씨가 이 사람과 연관이 있다. 인천 이씨의 시조 이허겸의 6대조 할아버지인 허기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당에 왔다가, 안사의 난 당시 피난가는 현종을 따라가게 됐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현종이 그에게 이씨 성을 줬다고 한다.
황자였을 때 장안성 동쪽 춘명문 부근에 있던 융경방(隆慶坊)에 저택이 있었는데, 황제로 즉위한 후 방의 이름을 흥경방(興慶坊)으로 고치고 여러 차례의 공사 끝에 방 전체를 흥경궁(興慶宮)이라는 이름의 궁궐로 만들었다. 732년에는 장안성 북쪽의 대명궁과 남쪽의 곡강지 인근에 있던 이궁인 부용원 및 그 중간에 있는 흥경궁을 연결하는 협성(夾城)을 장안성 동쪽 성벽에 잇댄 이중 성벽으로 완성해 황제 전용 통로로 사용했다. 현종 때의 특기할 사항 중 하나는 천보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친 것. 즉 천보 3년 이후부터는 천보 3재, 4재... 이런 식으로 써야만 했다는 뜻. 그래도 지엄한 천자의 명령인지라 당나라 전역은 물론 이웃나라 신라에서도 '''천보 ~재'''라고 표기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천보 11재(752년)라고 적힌 습자용 목간이 있다. #

표기가 '재' 에서 '년' 으로 회복된 건 현종의 아들 숙종 때인 건원 원년 2월로, 그동안 천보(天寶), 지덕(至德), 건원(乾元)의 3개 연호가 20년 이상 사용되었다[31]. 78세까지 장수했기에, 차기 황제가 될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을 생전에 모두 봤다. 현종의 현손인 순종이 태어난 해가 761년, 바로 현종이 붕어하기 1년 전. 등극하기 전에는 당나라 격구 대표 선수였다고 한다. #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앙아시아 소그드인[32]으로 추정되는 조야나희와의 사이에서 혼혈 수안 공주를 두었다. 별개로 총애했던 양귀비와 안록산이 비만으로 알려져서 뚱보 취향의 황제라고 불린다.(...)
정이 많은 황제로 불리곤 한다. 중국의 황제들은 수많은 후궁을 들이고 이들을 성욕 처리 또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런데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는 적절치는 않았다 해도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특히 양귀비 이전에 총애했던 매비 강씨와의 눈물나는 일화는 현종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6. 둘러보기(계보)


'''당의 역대 황제'''
5대 예종 정황제 이단

'''6대 현종 명황제 이융기'''

7대 숙종 무황제 이형



[1]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현종을 개원천자라 지칭하기도 했다.#[2] 천보 3년(742년)부터 n재를 사용하였다.[3] 송 휘종대에 황실의 시조로 숭상하던 도교의 신 조현랑(趙'''玄'''朗)의 이름을 피휘하여 묘호인 현종대신 시호인 명황제로 지칭되었다. 또한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본명인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여이(愛新覺羅'''玄'''燁)을 피휘하기 위해 이렇게 지칭하는 것이 후대 왕조 및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도 확산 및 고착화되었다.[4] 남군 16위군과 북군 우림군 및 만기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 이융기의 생모인 덕비 두씨가 무측천을 저주했다는 죄로 사사당했다.[6] 독살 건은 현종이 쿠데타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설이 있다.[7] 사실 이들의 권력은 중종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들 입장에서는 중종은 죽지 않는 것이 훨씬 낫긴 하나, 이들의 행적과 권력욕을 보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두뇌가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일화가 있다. 하지만, 이미 측천무후를 겪은 적이 있던 당의 신하들이 그보다 훨씬 못한 자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것이니 프로파간다를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 역시 충분히 있다..[8] 무삼사 사후에도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씨 가문은 위씨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융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태평공주까지 정변에 동참한 걸 보면 무씨 가문과 측천무후의 자식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 실제로 무씨 가문의 전횡은 말년의 측천무후의 심기를 어지럽힌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9] 그게 아니더라도 측천무후는 차기 황제를 무씨에게 잇는게 좋지 않을까 고려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친정보다는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게 측천무후 개인에게도 더 나을 거라고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기 때문에 그냥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사실 당나라는 이씨들이 피를 흘려가며 다른 군벌들을 평정하고 세운 국가인데 이걸 아무 공도 없는 무씨가 낼름 삼켜봤자 어떻게든 반발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당장 무후 본인부터가 원래 고종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일 뿐 당의 건국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지분도 없었기도 하고.[10] 균전제가 붕괴하여 율령제도 변화했다.[11] 약 5288만 명으로 추정.[12] 약 4600만 명으로 추정.[13] 참고로, 이 순서는 재상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시대순이다.'''(...)[14] 요숭은 제한이 "공은 당시의 문제를 구해낼 수 있는 재상이다."라고 하니까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을 어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무진장 자랑스러워했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한 시대의 걱정거리를 해결한 재상'이란 뜻의 '구시지상'[15] 이때 현종의 대답은 전형적인 명군의 발언이다. '''"짐은 야위었으나 천하의 백성들은 반드시 살이 쪘을 것이다. 내가 한휴를 기용한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일 따름이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이 발언이 나온 건 개원 21년(733).[16] 단, 뇌물을 밝히는 게 심해서 우문융은 재상직은 올랐으나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다.[17] 당은 수도를 장안에 잡고도 자주 낙양으로 정부가 움직이곤 했는데, 이는 관중 지역의 식량부족으로 인한 것으로 '축량천자'(逐糧天子)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18] 군진에 소속된 장교 중 소장급으로, 요즘으로 따지면 '''잘해야 중대장ㆍ대대장쯤 되는 지위'''[19] 신당서에 따르면 홀로 있을 때 자장[18] 학령전과 우연히 만나 참수당했다고 하고, 통감에 따르면 반란을 일으킨 발예고를 완파하고 승리감에 취해 경비병 없이 홀로 돌아가다가 발예고의 패잔병 일부와 우연히 조우, 공격받아 사망하고 그 수급이 자장 학령전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정말 이것이 '''측천무후와 대등한 위치에 서서 하북을 총공깽으로 몰아넣으며 유목 민족 전체를 아우르던 위대한 가한의 죽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무하다.[20] 비가가 734년 독살당하면서 돌궐 제2제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21] 이 제안은 당시 조정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22] 이렇게 정략적인 이유로 외국에 시집보내는 공주를, 중국에서는 화번공주라 불렀다.[23] 이 건의는 '''토번의 뇌물을 먹은''' 양주 도독 양구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24] 이에 상당히 다혈질이던 현종은 기존의 농우 일대의 병력에 더해 병력 10만과 군마 4만 필을 추가로 징발하고 스스로 '''토번으로 친정'''하려는 의도까지 내비첬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친정은 그만뒀다.[25] 황족이지만 현종의 형제는 아니었다.[26] 한 고조를 보좌했던 장량의 후손이다[27] 당 현종 천보(天寶) 3년 1월에 '년(年)'이라는 표현을 '재(載)'로 고쳤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결론적으로 당 숙종의 건원(乾元) 원년부터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28] 참고로 탈라스 전투로 인해 제지술이 이슬람을 거쳐 유럽까지 전해졌고 결과적으로 유럽은 큰 변화를 겪었다. 자세한 사항은 탈라스 전투 항목 참조.[29] 송대 이후의 중국에서는 묘호가 아닌 시호를 따온 당명황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린다. 이는 송 태조 조광윤, 송 태종 조광의 형제의 시조인 조현랑이 황제로 추존되어 현 자가 피휘되었기 때문이다.[30] 절수만 따지자면 4개 절도사를 겸직하여 27만의 병력을 관리했던 데다가 인맥마저 엄청나던 왕충사도 있지만, 왕충사가 4개 절도사를 겸직한 기간은 고작 몇 달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왕충사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현종의 보살핌을 받아서 대성한 인물이라 이방인인 안록산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심지어 그 왕충사조차도 결국은 이임보의 모략으로 인해 현종의 눈 밖에 나서 몰락했다.[31] 다만 이전 버전에서는 載라는 표기를 '괴악하다', '난리를 쳤다' 라고 단정하며 안녹산의 난까지 연결시켰었으나, 그건 지나친 표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조별로 특정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 문자가 제각기 달랐으며(가령 학교를 가리키는 글자를 예로 들면 하나라에서는 校, 은나라에서는 序, 주나라에서는 庠를 사용했다), 오늘날처럼 年이라는 글자가 '한 해' 를 가리키게 된 것은 주나라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반면 載는 요순시대에 '한 해' 를 가리키는 글자로 쓰였던 것으로, 어쩌면 요순 시대를 재현하겠다는 의지에서 이런 조치를 내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건 상관없는 백성들이야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상관없는 백성들' 중에 문자 생활을 했던 사람이 얼마나 되려고?[32] 이란계 백인 민족으로 상업에 능했다고 한다.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소수 민족인 야그노브인이 이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