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카스텔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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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tantino Paul Castellano
1915년 6월 26일''' ~ '''1985년 12월 16일 향년 70세.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
일명 빅 폴(Big Paul), 마피아계의 하워드 휴즈(The Howard Hughes of the Mob), 교황(The Pope)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로, 부하들에 의해 맨해튼 한복판에서 살해당한 인물이다.
뉴욕 시에서 태어난 폴 카스텔라노는 8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19살에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공범자 2명의 신원을 경찰에 밝히기 거부하고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당국과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오메르타로 명성을 높였다.
1926년 폴 카스텔라노의 누나는 미래의 마피아 두목 카를로 감비노와 결혼했다.
1940년대 폴 카스텔라노는 망가노 패밀리(현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되었다. 그 후 패밀리의 두목인 앨버트 아나스타시아 휘하에서 지부장을 맡았다.
1957년 폴 카스텔라노는 마피아 전국 위원회 회동이 발각된 애팔러친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 회동에 대한 대배심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법정 모독죄로 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같은 해 카스텔라노의 매형 카를로 감비노가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를 제거하고 패밀리를 장악한 뒤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폴 카스텔라노는 폭력배라기보다는 사업가로 여겨졌다. 그는 합법적이지 않은 사업들을 인수하여 합법적인 사업으로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카스텔라노의 사업과 그의 아들들의 사업은 마피아 조직과의 연대를 통해 번창했다. 카스텔라노는 감비노 패밀리에서 자신의 입지가 강해지자 건설 콘크리트로 거액을 벌기 시작했다. 이 시기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고 있었던 카스텔라노는 다른 마피아 두목들과 함께 자신들이 통제하는 노동조합•공급업자•계약 회사•하청업자들을 규합하여 콘크리트 클럽(Concrete Club)을 결성했다. 마피아는 이 클럽을 통해 도시 내에서 진행하는 2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의 입찰을 조작하고 5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를 독점했으며 관련된 모든 회사와 노동자로부터 2%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규칙에 저항하는 일부 관계자들은 끝없는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타협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살해되거나 상해를 입거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당대 FBI 요원들은 건설업계 내 드라이월 같은 다른 분야에도 이와 유사한 마피아 클럽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975년 폴 카스텔라노는 딸의 남자친구 비토 보렐리가 자신을 식품 대기업인 퍼듀 팜의 회장 프랭크 퍼듀와 비교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보렐리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지인들에게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치킨맨(Chicken Man)으로 지칭했는데, 실제로 카스텔라노는 퍼듀와 같은 가금류 유통계의 거물이었다. 그가 설립한 회사 중 하나인 다이얼 가금류는 키 푸드(Key Food)나 월트바움(Waldbaum's) 같은 슈퍼마켓 협동조합•체인들을 협박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공급했다. 치킨이란 단어에는 닭고기란 뜻 외에 겁쟁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카스텔라노가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던 것.[1]
1976년 '''카를로 감비노가 사망하면서 폴 카스텔라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시 부두목 아니엘로 델라크로체는 탈세 혐의로 수감되어 카스텔라노의 승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감비노는 패밀리의 합법적인 영역은 카스텔라노가, 전통적인 불법사업은 델라크로체가 담당하게끔 했는데 이는 패밀리를 양 집단으로 분열시키는 결정이 되었다. 카스텔라노의 승계는 델라크로체가 참석한 1976년 11월 24일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1978년 폴 카스텔라노는 뉴욕 시의 아일랜드계 범죄조직 웨스티스 갱단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사법당국이 감비노 패밀리와 연관 지을 수 없는 암살자를 원했다. 웨스티스 측은 감비노 패밀리가 뉴욕의 다른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길 원했다. 감비노-웨스티스 동맹은 웨스티스 지도자인 제임스 코난과 카스텔라노의 만남에서 합의되었다. 웨스티스 소속 폭력배 미키 페더스톤에 따르면 카스텔라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두목으로 재직하던 폴 카스텔라노는 로이 디메오, 제임스 에폴리토, 니콜라스 스키베타 등 스무 명 넘는 휘하 조직원과 관계자들의 살인을 지시했다. 훗날 감비노 패밀리 준조직원 출신 존 앨라이트는 '''"카스텔라노는 살인을 저질러도 살인자라 불리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살인자는 맞아요.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당대 최고의 마피아 두목으로 두루 인정받으며 권력의 정점에 있던 폴 카스텔라노는 스태튼 아일랜드 토트 힐 능선에 자신이 거주할 방 17개짜리 호화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암흑가에서 백악관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그의 고립을 상징한다. 일부 원로 마피아들은 비밀결사의 일원인 카스텔라노가 보란 듯 거대한 저택을 짓는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을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한 채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상류층으로 여기면서 거리 조직원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1985년 폴 카스텔라노는 상술한 콘크리트 클럽을 겨냥한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기소되었다. 보석금 2백만 달러를 내고 풀려나왔지만 FBI가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거기다 부하 지부장 존 고티와 허가받지 않은 마약 거래로 분쟁이 있었다. 특히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다소 이기적인 이유로 거리 조직원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던 부두목 아니엘로 델라크로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해 부하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었다.
1985년 12월 16일 '''폴 카스텔라노는 신임 부두목 토마스 빌로티와 함께 맨해튼 한복판 스파크 스테이크 하우스 앞에서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암살된 카스텔라노와 빌로티. 이는 아니엘로 델라크로체가 사망한지 14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폴 카스텔라노 사후 감비노 패밀리는 존 고티가 장악했다. 카스텔라노와 가까웠던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는 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두목을 살해한 고티와 그의 오른팔 프랭크 데치코를 처형하라고 지시했으나 고티는 운 좋게 목숨을 건졌고 데치코만 살해되었다. 결국은 위원회도 고티의 통제권을 인정하고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폴 카스텔라노를 수사하던 FBI 요원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아주 허탈해했다. 훗날 그들은 "수 년째 카스텔라노를 수사하다 보니 그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꼈다. 카스텔라노는 그렇게 죽을 게 아니라 우리들이 수집한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갔어야 됐다."라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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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nstantino Paul Castellano
1915년 6월 26일''' ~ '''1985년 12월 16일 향년 70세.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
일명 빅 폴(Big Paul), 마피아계의 하워드 휴즈(The Howard Hughes of the Mob), 교황(The Pope)
카를로 감비노의 후계자로, 부하들에 의해 맨해튼 한복판에서 살해당한 인물이다.
2. 생애
뉴욕 시에서 태어난 폴 카스텔라노는 8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19살에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공범자 2명의 신원을 경찰에 밝히기 거부하고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당국과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오메르타로 명성을 높였다.
1926년 폴 카스텔라노의 누나는 미래의 마피아 두목 카를로 감비노와 결혼했다.
1940년대 폴 카스텔라노는 망가노 패밀리(현 감비노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되었다. 그 후 패밀리의 두목인 앨버트 아나스타시아 휘하에서 지부장을 맡았다.
1957년 폴 카스텔라노는 마피아 전국 위원회 회동이 발각된 애팔러친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 회동에 대한 대배심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법정 모독죄로 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같은 해 카스텔라노의 매형 카를로 감비노가 앨버트 아나스타시아를 제거하고 패밀리를 장악한 뒤 두목으로 추대되었다.
폴 카스텔라노는 폭력배라기보다는 사업가로 여겨졌다. 그는 합법적이지 않은 사업들을 인수하여 합법적인 사업으로 전환시켰다. 그럼에도 카스텔라노의 사업과 그의 아들들의 사업은 마피아 조직과의 연대를 통해 번창했다. 카스텔라노는 감비노 패밀리에서 자신의 입지가 강해지자 건설 콘크리트로 거액을 벌기 시작했다. 이 시기 패밀리의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고 있었던 카스텔라노는 다른 마피아 두목들과 함께 자신들이 통제하는 노동조합•공급업자•계약 회사•하청업자들을 규합하여 콘크리트 클럽(Concrete Club)을 결성했다. 마피아는 이 클럽을 통해 도시 내에서 진행하는 2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의 입찰을 조작하고 5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를 독점했으며 관련된 모든 회사와 노동자로부터 2%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규칙에 저항하는 일부 관계자들은 끝없는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타협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살해되거나 상해를 입거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당대 FBI 요원들은 건설업계 내 드라이월 같은 다른 분야에도 이와 유사한 마피아 클럽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1975년 폴 카스텔라노는 딸의 남자친구 비토 보렐리가 자신을 식품 대기업인 퍼듀 팜의 회장 프랭크 퍼듀와 비교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보렐리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지인들에게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치킨맨(Chicken Man)으로 지칭했는데, 실제로 카스텔라노는 퍼듀와 같은 가금류 유통계의 거물이었다. 그가 설립한 회사 중 하나인 다이얼 가금류는 키 푸드(Key Food)나 월트바움(Waldbaum's) 같은 슈퍼마켓 협동조합•체인들을 협박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공급했다. 치킨이란 단어에는 닭고기란 뜻 외에 겁쟁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카스텔라노가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던 것.[1]
1976년 '''카를로 감비노가 사망하면서 폴 카스텔라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시 부두목 아니엘로 델라크로체는 탈세 혐의로 수감되어 카스텔라노의 승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감비노는 패밀리의 합법적인 영역은 카스텔라노가, 전통적인 불법사업은 델라크로체가 담당하게끔 했는데 이는 패밀리를 양 집단으로 분열시키는 결정이 되었다. 카스텔라노의 승계는 델라크로체가 참석한 1976년 11월 24일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1978년 폴 카스텔라노는 뉴욕 시의 아일랜드계 범죄조직 웨스티스 갱단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사법당국이 감비노 패밀리와 연관 지을 수 없는 암살자를 원했다. 웨스티스 측은 감비노 패밀리가 뉴욕의 다른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길 원했다. 감비노-웨스티스 동맹은 웨스티스 지도자인 제임스 코난과 카스텔라노의 만남에서 합의되었다. 웨스티스 소속 폭력배 미키 페더스톤에 따르면 카스텔라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981년 폴 카스텔라노는 비토 보렐리 살인사건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업가 프랭크 퍼듀와 2번 만났다. 퍼듀는 카스텔라노에게 버지니아 주의 노동 운동을 막는 데 힘써달라고 부탁했지만 카스텔라노가 모두 거절했다.'''너희들은 카우보이처럼 굴면 안 돼. 난폭하게 구는 짓 말이야.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할 거야. 앞으로 누군가를 죽일 거면, 우리와 사전협의를 해야 돼.'''
You guys got to stop acting like cowboys – acting wild. You're going to be with us now. If anyone is going to get killed, you have to clear it with us.
두목으로 재직하던 폴 카스텔라노는 로이 디메오, 제임스 에폴리토, 니콜라스 스키베타 등 스무 명 넘는 휘하 조직원과 관계자들의 살인을 지시했다. 훗날 감비노 패밀리 준조직원 출신 존 앨라이트는 '''"카스텔라노는 살인을 저질러도 살인자라 불리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래도 살인자는 맞아요.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당대 최고의 마피아 두목으로 두루 인정받으며 권력의 정점에 있던 폴 카스텔라노는 스태튼 아일랜드 토트 힐 능선에 자신이 거주할 방 17개짜리 호화 저택을 지었다. 이 저택은 암흑가에서 백악관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그의 고립을 상징한다. 일부 원로 마피아들은 비밀결사의 일원인 카스텔라노가 보란 듯 거대한 저택을 짓는 모습을 못마땅해했다. 더욱이 그는 자신을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한 채 스스로를 화이트칼라 상류층으로 여기면서 거리 조직원들의 신망을 잃어갔다.
1985년 폴 카스텔라노는 상술한 콘크리트 클럽을 겨냥한 마피아 위원회 재판으로 기소되었다. 보석금 2백만 달러를 내고 풀려나왔지만 FBI가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거기다 부하 지부장 존 고티와 허가받지 않은 마약 거래로 분쟁이 있었다. 특히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다소 이기적인 이유로 거리 조직원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던 부두목 아니엘로 델라크로체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해 부하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었다.
1985년 12월 16일 '''폴 카스텔라노는 신임 부두목 토마스 빌로티와 함께 맨해튼 한복판 스파크 스테이크 하우스 앞에서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암살된 카스텔라노와 빌로티. 이는 아니엘로 델라크로체가 사망한지 14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폴 카스텔라노 사후 감비노 패밀리는 존 고티가 장악했다. 카스텔라노와 가까웠던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빈센트 지간테는 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두목을 살해한 고티와 그의 오른팔 프랭크 데치코를 처형하라고 지시했으나 고티는 운 좋게 목숨을 건졌고 데치코만 살해되었다. 결국은 위원회도 고티의 통제권을 인정하고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폴 카스텔라노를 수사하던 FBI 요원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자 아주 허탈해했다. 훗날 그들은 "수 년째 카스텔라노를 수사하다 보니 그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꼈다. 카스텔라노는 그렇게 죽을 게 아니라 우리들이 수집한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갔어야 됐다."라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3. 여담
- 폴 카스텔라노는 젊은 시절 189cm 정도의 키에 몸무게는 120kg 정도 나갔다.
- 폴 카스텔라노는 운전기사가 모는 1세대 검은색 링컨 타운카를 타고 다녔다.
- 폴 카스텔라노는 자신의 히스패닉 하녀 글로리아와 내연 관계였다.
- 전 뉴욕시장 루돌프 줄리아니는 점잖은 성격의 폴 카스텔라노와 거친 성격의 제노비스 패밀리 일선 두목 앤서니 살레르노를 대비한 바 있다. 줄리아니는 CBS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각기 다른 두 사람의 대처를 예로 들며 둘을 비교했다. 카스텔라노의 경우 기자에게 명함을 꺼내며 자신의 변호사에게 연락하라고 한 반면, 살레르노는 어딜 가나 시가에 불부터 붙였고 질문하는 기자에게 "꺼져버려(Go fuck yourself)" 혹은 "네 엄마랑 붙어먹어(Go fuck your mother)"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살레르노가 카스텔라노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우아하게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본 일화도 존재한다.
- 폴 카스텔라노를 연기한 여러 배우 중 2001년 카스텔라노의 전기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채즈 팰민테리가 가장 유명하다.
- 2006년 마피아 재판에서 드러난 사실로, 폴 카스텔라노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살해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감비노 패밀리 측에 돈을 상납했다. 형제 입장에서 결코 좋은 감정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이 이끄는 사업체 스카라-믹스 콘크리트가 마피아 패밀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34년 간격으로 총격에 의해 살해된 두 명의 감비노 패밀리 수괴 폴 카스텔라노와 프랭크 칼리는 공교롭게도 둘 다 뉴욕 시 스태튼 아일랜드의 부촌 토트 힐(Todt Hill)에 거주했고, 시신이 묻힌 장소도 같은 곳이다.
- 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에 의하면, 당시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폴 카스텔라노가 일개 행동대원이었던 자신에게 콘크리트 클럽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물어와 본인이 "우리가 가진 막대한 힘을 모두 쏟아부은 그 클럽으로 인해 훗날 큰 법적인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카스텔라노가 "맞아. 하지만 우리 코사 노스트라는 절대 뒤로 물러설 수 없어. 만약 우리 패밀리가 그 클럽에서 빠진다면 우린 힘을 잃게 돼."라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카스텔라노는 훗날 자신이 마주할 마피아 위원회 재판을 비교적 예상했었지만 마피아로서의 본분을 다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어록
'''만약 미국 대통령이 똑똑한 데다 도움이 필요하면 날 찾아올 거야. 그럼 나는 대통령을 위해 호의를 베풀 수 있지.'''
If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f he's smart, if he needs help, he’d come. I could do a favor for the president.
'''법정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보다도 신성한 약속들이 있어, 네가 얼마나 많은 성경 책 위에 손에 얹고 증인 선서를 했는지는 상관없이.'''
There are certain promises you make that are more sacred than anything that happens in a court of law, I don't care how many Bibles you put your hand on.
5. 관련 문서
[1] 2004년에 정부 증인이 되는 보난노 패밀리 두목 조셉 마시노는 1975년 당시 마피아 준조직원이었던 자신이 카스텔라노를 위한 보렐리 살인 작업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