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지간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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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어록
5. 관련 문서


1. 개요


Vincent Louis Gigante (영어) / Vincenzo Luigi Gigante (이탈리아어)
1928년 3월 29일 ~ 2005년 12월 19일 향년 77세.
권투 선수 출신으로 미국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된 인물.
일명 턱(The Chin), 괴상한 대부(The Oddfather), 목욕 가운을 입은 수수께끼의 인물(The Enigma in the Bathrobe), 가운(The Robe), 뉴욕의 진정한 두목(The Real Boss of New York)
목욕 가운을 입은 정신질환자 행세로 법망을 피한 마피아 두목이자 카를로 감비노 이후의 미국 조직범죄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인물로 여겨진다.

2. 생애


빈센트 지간테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미국 뉴욕 시로 이민 온 시계공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난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랑을 담아 부른 친지노(Chinzeeno)란 애칭이 훗날 그를 상징하는 '''턱(Chin)'''이란 별명으로 이어진다.
빈센트 지간테는 전설의 마피아 두목 러키 루치아노의 부하 비토 제노비스의 제자가 되어 자연스럽게 암흑가에 발을 들였다. 어린 지간테는 시칠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어진 이탈리아계 마피아 조직 라 코사 노스트라(La Cosa Nostra•우리의 것)와 조직에 소속된 구성원이라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에 대해 배움과 동시에 자신의 완력을 기반으로 학교 친구들에게 25~50 센트 사이의 보호비를 상납 받는 등 전형적인 폭력배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이 시기 후견인 제노비스는 가난했던 지간테 어머니의 수술비를 대신 지불해 주었는데, 이는 지간테가 평생 동안 지속되는 충성을 그에게 바치는 계기가 되었다.
맨해튼섬유고등학교를 중퇴한 빈센트 지간테는 1944년부터 3년간 라이트헤비급 권투 선수 활동을 했다. 선수 시절의 지간테. 그의 권투 경력 역시 마피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당시 지간테의 매니저는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고위 간부 토마스 에볼리였다. '''25전 21승 4패 13KO'''의 최종 성적표를 받아든 19세의 지간테는 루치아노 패밀리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마피아 세계에 투신했다. 하급 조직원 시절의 지간테.
빈센트 지간테는 17~25세 사이에 장물 수수, 불법 권총 소지, 도박업, 마권업에 이르는 혐의로 7번이나 체포되었지만 60일간 구금되는데 그쳤다. 이 시기 마피아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된 그는 비토 제노비스의 경호원 겸 운전기사를 맡았고 대외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재단사라고 밝혔다.[1]
1957년 비토 제노비스는 29세의 빈센트 지간테에게 러키 루치아노의 후계자이자 암흑가의 수상이라 불리었던 당대 최고의 미국 마피아 두목 프랭크 코스텔로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뒤 '''지간테가 발사한 38구경 권총 탄환이 코스텔로의 머리에 명중했다.''' 자신의 아파트 로비에서 총격을 당한 코스텔로는 사망하진 않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했다.[2]
목격자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빈센트 지간테는 프랭크 코스텔로 살인미수 사건에 대해 재판을 받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된 지간테의 모습이 담긴 영상. 법원에 출석한 지간테와 부모님이 찍힌 사진. 결국 지간테의 후견인 비토 제노비스는 코스텔로를 밀어내고 당시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이었던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되었다.
1959년 비토 제노비스는 자신의 후계자 프랭크 코스텔로를 은퇴시킨 것에 격분한 러키 루치아노의 계략에 빠져 마약사범으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도 함께 기소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하지만 루치아노는 추방되어 이탈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제노비스는 통제력을 유지했고 그가 지정한 대리인들이 차례로 두목 대행(Acting Boss)을 맡아 변함없이 패밀리 사업을 감독했다.
1964년 약 5년간 복역한 뒤 조기 출소한 빈센트 지간테는 프랭크 코스텔로를 은퇴시킨 장본인으로 암흑가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지간테는 비토 제노비스 파벌이 완전히 장악한 패밀리 내에서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를 담당하는 지부장이 되었고 조직 활동을 계속했다.
'''1969년 빈센트 지간테는 5명으로 구성된 뉴저지 주의 1개 경찰팀 전체를 매수하려는 시도로 기소되었지만 자신에게 정신적인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며 승소했고 이런 기만행위는 향후에도 계속된다.''' 같은 해 교정시설에서 패밀리를 운영하던 비토 제노비스가 연방수용자 의료센터에서 사망했다. 이후 두목 대행을 맡아 사업을 감독해온 필립 롬바르도가 새로운 두목이 되었다.[3]
1971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빈센트 리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NYPD 조직범죄수사관 조셉 코피는 리조가 뉴욕 시 쇼어 뷰 아파트에서 지부장 빈센트 지간테와 자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뒤 코피는 리조의 수상한 독일 여행 소식을 접하고 그를 미행했다. 유럽에서도 감청과 감시를 이어간 코피는 '''미국의 제노비스 패밀리와 버팔로 패밀리가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과 결탁하여 바티칸은행에 9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위조 채권을 매각하려 한다는 충격적인 계획을 입수했다.''' 이후 마피아 측은 5회에 걸쳐 6억 5000만 달러 상당의 위조 채권을 매각했고 고위 성직자 측은 1억 5000만 달러 상당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시기 이탈리아인 은행가 미켈레 신도나는 자신이 통제하는 은행을 이용해 제노비스 패밀리의 역외(off-shore) 주식이나 채권을 세탁하여 합법적인 자금으로 전환시키곤 했다. 이듬해인 1972년 12월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마테오 디로렌조와 휘하 행동대원 리조 외 23명의 관계자는 살인미수•증권사기•마약 유통•갈취•대부업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리조는 1800만 달러 규모의 증권사기와 코카인 밀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지만 그의 직속상관인 디로렌조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바티칸은행장은 미국 출신의 폴 마르친쿠스 대주교였는데, 그 역시 미 연방검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은 기밀이라고 밝히며 묵비권을 행사했고 수사관들이 바티칸은행을 상대로 압수수색 절차를 진행할 권한도 없었기 때문에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1978년 바티칸의 개혁을 추구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한 지 1달 만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1979년 마피아-마르친쿠스 대주교-바티칸은행의 수상한 관계를 취재하던 이탈리아 기자가 살해되었다. 1980년 지간테가 패밀리의 부두목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수감되었던 리조가 약 8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1982년 바티칸은행 비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암브리시아노 은행장 로베르토 칼비가 런던에서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일명 신의 은행가(God's Banker)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칼비는 누군가에게 교살되어 숨이 끊어진 뒤 목이 매달린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를 살해한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다. 여러 정황상 필립 롬바르도, 지간테, 디로렌조 같은 미국 마피아 고위 간부들과 주세페 칼로 같은 시칠리아 마피아 고위 간부들도 당대 바티칸은행 비리에 깊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들은 모두 법망을 피했다.[4][5]
1970년대 마피아 위원회는 허가받지 않고 마약을 판매한 조직원들을 처형하는 임무를 빈센트 지간테에게 맡겼다. 당시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은 대부분의 마피아는 지간테와 연관 있는 인물로부터 호출되었는데, 이는 곧 처형 대상자의 마지막 모습이 되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75년에 헤로인 재판을 받는 중이었던 카마인 콘살보가 24층 건물 옥상에서 던져져 살해되었고 3개월 뒤 그의 형제 프랭크 콘살보가 5층 건물 옥상에서 던져져 살해되었다. 이런 해결사로서의 평판은 지간테를 더욱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주었다.
1980년 필라델피아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안토니오 카포니그로와 지부장 프랭크 신돈은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필라델피아 패밀리 두목 안젤로 브루노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비록 대체 이론이 존재하긴 하지만 카포니그로는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직속 부하들에게 납치된 뒤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문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시신은 뉴욕 시에 주차된 자동차 트렁크에서 나체로 발견되었는데, 14발의 총상과 수많은 칼자국이 몸에 남아 있었고 탐욕을 상징하는 지폐가 입과 항문에 꽂혀 있었다. 카포니그로의 시신을 순화하여 재현한 모습. 사실 카포니그로와 신돈은 사전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허가를 받고 브루노를 살해했지만 자신들이 뉴욕 마피아와 필라델피아 마피아 간 애틀랜틱 시티 카지노 이권 다툼 과정에서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6] 같은 해 지간테는 상부의 허가 없이 콜롬보 패밀리 지부장 토마스 스페로를 살해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제라드 파파의 처형을 승인했다. 얼마 뒤 콜롬보 패밀리가 행동에 나섰고 파파는 산탄총에 맞아 머리가 터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1981년 70대 고령의 필립 롬바르도가 은퇴하면서 53세의 부두목 빈센트 지간테가 두목이 됨과 동시에 마피아 위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 시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롬바르도는 뉴욕대학교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뇌졸중을 겪은 앤서니 살레르노도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본래 살레르노는 지간테와 더불어 유력한 차기 두목 후보였으나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아 그 뜻을 단념했다. 당시 지간테는 패밀리 고위 간부 사베리오 산토라, 루이스 만나와 함께 그들의 병문안을 갔고 그곳에서 공식적인 승계가 이루어졌다. 두목이 된 지간테는 산토라를 서열 2위인 부두목(Underboss), 만나를 서열 3위인 상담역(Consigliere)으로 지명했다.[7] 살레르노는 서열 1.5위 격인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아 지간테의 승계를 대외적으로 위장했다.
약 36년 동안 조직 생활을 하며 온갖 수라장을 헤쳐온 뒤 암흑가의 정점에 오른 빈센트 지간테는 음산한 분위기와 위협적인 기질로 악명 높았고 극단적인 폭력과 기만으로 무장한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매서운 시선은 담판에서 상대를 위협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범죄 활동을 조력하는 4명의 형제가 있었다. 형 마리오 지간테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로, 조직 내에서 동생을 보좌했다.[마리오_지간테] 큰형 파스칼레 지간테와 동생 랄프 지간테 역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으로, 두목이 된 형제를 보좌했다.[8]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가톨릭 신부이자 뉴욕시의원으로, 자신의 형에게 광범위한 종교적•정치적 후광을 안겨줄 수 있었다.[9] 루이스 지간테는 빈곤층을 위한 공공 아파트 건설 사업을 주도하는 SEBCO란 단체를 결성했고 SEBCO는 지간테 가문의 프런트 회사 겸 돈세탁 창구가 되었다.[10] 형제 중 유일하게 마피아 세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루이스 지간테는 언론에 빈센트 지간테의 입장을 전달할 일이 생기면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외에도 빈센트 지간테에겐 일명 4인의 돔(The four Doms)이라 불린 측근 그룹이 존재했다. 이 그룹은 도미닉이란 이름을 가진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로 구성되었는데 과묵한 돔 도미닉 시릴로, 뱃사람 돔 도미닉 디콰르토, 뚱뚱한 돔 도미닉 알론지, 대머리 돔 도미닉 칸테리노가 그들이다.
빈센트 지간테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된 첫해에 감비노 패밀리 두목 폴 카스텔라노와 담판을 가졌다. 지간테는 코네티컷 주에서 활동하는 감비노 패밀리 지부장 프랭크 피콜로가 자신들의 건설 사업을 침해한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고 결국 카스텔라노로부터 살인 허가를 얻어냈다.[11] 얼마 뒤 피콜로는 브리지포트에 위치한 전화 부스 밖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감비노 패밀리 행동대원이었던 새미 그라바노는 훗날 "감비노 패밀리의 모든 조직원은 카스텔라노가 지간테를 달래기 위해 정규조직원을 제물로 바친 것을 보고 크게 동요했다. 나는 그 소식을 들은 뒤 카스텔라노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지만 지간테는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결코 카스텔라노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지간테를 상대로 장난칠 수 없었다. 그는 군함의 함장처럼 질서를 통제했다."라고 얘기했다.
이 시기 빈센트 지간테는 4개 뉴욕 마피아 패밀리가 통제하는 노동조합•계약회사•공급업자•하청업자들을 규합한 콘크리트 클럽(Concrete Club)에 가담했다. 이 클럽은 당대 마피아 위원회의 두목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도시 내에서 진행하는 2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의 입찰을 조작하고 500만 달러 규모 이상의 모든 건설 공사에 사용될 콘크리트를 독점했으며 관련된 모든 회사와 노동자로부터 2%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규칙에 저항하는 일부 관계자들은 끝없는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타협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살해되거나 상해를 입거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당대 FBI 요원들은 건설업계 내 드라이월 같은 다른 분야에도 이와 유사한 마피아 클럽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두목이 된 빈센트 지간테는 FBI의 도청을 경계한 탓에 직접 소리 내어 말하는 걸 꺼리는 등 더욱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도 노트에 글씨를 써 의사소통을 했고 사용한 종이는 즉시 찢어 불에 태웠는데, 반드시 말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귓속말을 사용했으며 각종 지시는 측근들을 통해서만 하달했다. 지간테는 자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는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은 그 즉시 살해될 것이고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다른 패밀리 소속 조직원도 가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했다.[12] '''마피아 조직원들은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는 걸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굳이 그를 거론할 필요가 있을 땐 자신들의 턱을 만지거나 가리켰고 손가락으로 Chin(턱)의 머리글자인 알파벳 C를 만드는 등 여러 수신호를 사용했다.''' 대화 도중 자신의 턱을 만지는 마피아 조직원의 모습(gif). 특히 자신을 만나고 싶은 부하가 있으면 기꺼이 만나주었던 감비노 패밀리의 존 고티와 달리 지간테의 곁엔 직책이 낮은 부하들이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다. 지간테를 만나러 온 6명의 부하 조직원 중 간부급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실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외에서 보초를 서는 모습(gif). 더욱이 다른 패밀리 소속 조직원은 정규조직원으로 입단하고 난 뒤에야 제노비스 패밀리의 실제 두목이 지간테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비록 그의 정체를 모르는 말단 준조직원이나 다른 뒷세계 인사들도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인물이 전설적인 마피아 원로라는 사실만큼은 잘 알았기에 별다른 무례를 범하지 않고 큰 존경을 보였다. 전임 두목 필립 롬바르도만큼 용의주도했던 지간테는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두목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형태의 마피아 위원회 회합은 수사기관의 감시에 상당히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정기적인 위원회 회합에 본인 대신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앤서니 살레르노를 참석시켰다.[13]
'''상술했듯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을 수사하는 FBI 요원들을 기만하기 위해 정신질환자 행세를 했는데, 미국 내 대대적인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인 1980~90년대에 마피아 두목으로 재직하면서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법망을 피했다. 그가 처음으로 정신적 결함을 주장하며 승소했던 1969년부터 계산하면 약 28년 동안, 마지막으로 출소했던 1964년부터 계산하면 약 33년 동안 법망을 피한 셈이다.''' 지간테는 자신의 IQ가 69라고 주장했고 1년에 한 번은 정신병원을 방문했으며 미국 최고의 부촌에 거주하는 본인의 상류층 생활과 거리의 정신질환자 연기를 결합하기 위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업가 행세를 했다. 일상 속에서 우연히 지간테와 마주치는 일반 시민들은 그 허름한 차림의 괴상한 남자가 암흑가의 제왕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수행원들과 함께 병원을 나서는 지간테의 모습(gif).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는 지간테의 모습(gif).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동차 뒷좌석에 탑승하는 지간테의 모습(gif). 영상 46초부터 목욕 가운을 입고 거리를 걷는 지간테의 모습. 전 FBI 요원 존 프리처드 3세는 "지간테는 제가 본 가장 영리한 조직범죄 인물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FBI가 찍은 감시 영상을 보면 지간테가 부하들과 정상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gif). 이에 연방정부는 하버드 대학의 토마스 구틸, 컬럼비아 대학의 도널드 클라인, 텍사스 대학의 윌리엄 리드, 코넬 대학의 윌포드 반 고프, 뉴욕 대학의 스탠리 포트노어, 뉴욕 의과대학의 아브라함 할퍼른을 포함한 수많은 정신과 의사에게 지간테를 검사하게 했다. 그들은 지간테가 재판을 받거나 형을 받을 능력이 없다고 보증해 주었다. 정부의 요청으로 지간테를 검사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인 조너선 브로디에 의하면 "미국의 대통령이 누구입니까?"라는 간단한 질문을 받은 지간테는 머리를 긁적이며 "알아야 하는데.. 정말로 답을 알아야 하는데..."라고 중얼대다 한참 뒤 "부시! 조지 부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FBI는 이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재판에 회부시키기 가장 어려운 1980~90년대 마피아 지도자로 지간테를 꼽았다.
1985년 상술한 콘크리트 클럽을 겨냥하여 일명 세기의 재판(Case of Cases)이라 불린 마피아 위원회 재판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실제 두목인 빈센트 지간테를 대신해 기소된 인물은 거리 책임자(Street Boss)를 맡고 있던 앤서니 살레르노였다. 당시 지간테는 기소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소장이 발표되자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을 머물렀다. 사실 FBI는 수사 과정에서 "우리 세계에서 턱(지간테) 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Nobody knows more about this thing than Chin does.)"라고 말하는 살레르노의 육성을 포착했고 그가 다른 패밀리의 신입 정규조직원 후보자 명단에 자신들이 추천한 사람이 누락되어 있는 점에 대해 어깨를 으쓱하며 “이번 일은 두목에게 맡겨야겠다.(I'll leave this up to the boss.)"라고 말하는 육성도 포착했다. 이 발언들은 살레르노가 패밀리의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신호였다. 즉, FBI는 살레르노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간테를 기소할 수단이 없어 살레르노가 두목이라고 언론에 공표하고 그를 기소한 것이다. 훗날 연방정부는 마피아 변절자 빈센트 카파로가 제공하는 증언을 통해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다.[14]
1986년 마피아 위원회 재판이 치러지는 도중 대통령 자문위원회에 제출된 조직범죄 보고서는 미국 내 모든 범죄 사업의 연간 총수익을 GNP의 1.1%에 해당하는 500억 달러로 추산했다.[15][16] 당시 대통령 자문위원회 보고서가 제시한 500억 달러라는 수치는 미국의 철•철강•구리•알루미늄 제조업의 총수익을 합친 것보다 컸다. 아울러 보고서는 조직범죄의 경제 장악이 공정한 경쟁을 억누르고 산업자본을 빼돌리며 일자리 41만 4천 개 감소, 총생산 182억 달러 감소, 1인당 국민소득 77.2 달러 감소, 소비자물가 0.3% 증가라는 악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범죄조직원들의 탈세로 인한 선량한 시민들의 세금 부담 규모가 65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빈센트 지간테는 이 시기에 국가에서 가장 주도적인 조직범죄 인물로 손꼽혔다.
'''마피아 위원회 재판을 피해 간 빈센트 지간테는 새로이 재편된 위원회에서 명실상부 가장 영향력 있고 강한 두목이 되었다. 동시에 자신의 조직을 감비노 패밀리를 뛰어넘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파벌로 만들었다.''' 상술했듯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신인 루치아노 패밀리가 1890년대 미국 마피아 태동기 때부터 가장 강력한 파벌이었지만 내부 항쟁을 겪고 조직이 혼란스러워지면서 1950년대 후반 즈음 카를로 감비노가 두목으로 재직하던 감비노 패밀리에 역전되었는데, 그 상황을 1980년대 중반에 지간테가 다시 뒤집은 것이다. 연방정부는 이 시기의 제노비스 패밀리를 약 300명의 정규조직원, 약 1000명의 준조직원, 약 20개의 지부로 구성되어 수뇌부의 지휘 아래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매년 수억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거대한 다국적 범죄 기업(Multinational Huge Crime Operation)으로 정의 내렸다. 연방정부에서 파악한 당대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도. 당시 FBI는 지간테의 측근인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페데리코 지오바넬리가 정계 거물인 민주당 브루클린 지역위원장 미드 에스포지토와 대화하는 장면을 포착했는데, 도청을 경계한 당대 마피아 조직원들은 에스포지토 같은 정치인과 대화할 땐 지간테를 줄리아 이모(Aunt Julia)라는 은어로 부르곤 했다. [페데리코_지오바넬리][미드_에스포지토] 마피아 간부와 거물 정치인의 친분관계를 보고 부패 혐의를 감지한 연방수사관들은 에스포지토의 전화기를 도청하는 등 관련 수사를 진행하여 약 3년 뒤 민주당 소속 연방하원의원 마리오 비아지의 징역형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 비슷한 시기 에스포지토도 징역형의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벌금 50만 달러를 선고받았다.[17]
'''1986년 4월 빈센트 지간테는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 없이 폴 카스텔라노를 제거하고 정점에 오른 신임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와 부두목 프랭크 데치코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8] 얼마 뒤 두 사람을 노린 폭탄 공격이 있었지만 고티는 살아남았고 데치코는 사망했다. 폭발한 데치코의 자동차를 살펴보는 수사관들. [프랭크_데치코_살인사건] 고티를 살해하는데 실패한 위원회는 감비노 패밀리에 대한 그의 통제권을 인정한 뒤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간테와 고티는 서로를 제거하는 계획을 비밀리에 계속 추진했다.[19]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으로 재직하던 빈센트 지간테는 창문 교체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권을 두고 신임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빅터 아무소와 마찰을 빚었지만 담판 끝에 그를 굴복시켰다. 또 조셉 디팔레르모, 일명 조 벡(Joe Beck)이라는 루케시 패밀리 지부장의 처벌 수위를 논의하는 자리에선 섬뜩한 발언으로 상대를 침묵하게 했다. 당대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 빅터 오레나는 지간테의 내정 간섭이 심하다는 불만을 동료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 마피아의 근거지인 뉴욕 시를 주름잡는 지간테의 영향력은 당연히 도시 밖에서도 강력했는데, 상술한 필라델피아 패밀리에 더해 뉴잉글랜드 지방을 기반으로 한 페트리아카 패밀리의 신임 두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 영향력이 뉴저지 주코네티컷 주플로리다 주까지 미치는 등 전국적인 실력행사를 했다.[20]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교활한 전략은 언론을 완벽하게 속였다. 1986년 미국의 유명 경제지 포춘은 국가 최고의 조직폭력배 순위를 정했는데, 지간테는 19위에 불과했지만 지간테의 간판으로 마피아 위원회 재판을 받는 중이었던 앤서니 살레르노는 1위였다. 당시 18위로 선정된 전 콜롬보 패밀리 지부장 마이클 프란지스는 훗날 "당시 지간테는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였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나보다 아래 순위에 올릴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포춘지의 순위를 비판했다.
1986년 11월 마피아 위원회 재판은 유죄판결로 끝났다. 이후 두목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정기적인 위원회 회합이 폐지되었고 각 패밀리는 전령을 통해 의사를 교환하며 사업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당대 마피아 두목들은 위원회 재판을 주도한 루돌프 줄리아니 연방검사에 대한 암살을 논의했다. 당시 존 고티는 찬성했지만 빈센트 지간테는 사업에 좋지 않다며 반대했고 결국 암살은 실행되지 않았다. 지간테는 이 시기를 전후로 거리 책임자(Street Boss), 전령(Messenger) 같은 직책에 자신의 측근들을 새로 지명해 그들로 하여금 앤서니 살레르노를 대신했다. 특히 이때를 기점으로 리보리오 벨로모가 지간테의 후계자로 급부상하였다.
존 고티 등 당대 다른 마피아 두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빈센트 지간테의 부패한 영향력은 보호비 갈취•고리대금•도박•매춘•마약 유통 같은 전통적인 범죄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조직범죄의 입김이 강한 건설업•목공업•폐기물처리업•운송업•해운업은 물론이고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 여러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노동 공갈을 통해 다양한 사업체의 실질적인 통제권을 휘두르며 연방정부와 뉴욕시정부의 공공입찰을 조작하고 갈취하는 등 합법적이고 공적인 영역까지 주관했다. 지간테는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리틀 이탈리아의 성 젠나로 축제, 대형 전시장 제이콥 재비츠 센터, 부둣가의 풀턴 어시장 같은 뉴욕 시의 상징적인 행사와 명소들도 갈취 대상으로 삼았으며 상술한 미드 에스포지토 관련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정계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1990년대 초 연방정부는 매년 제노비스 패밀리가 도시를 약탈하여 얻는 1억 달러 상당의 범죄수익 중 일부를 지간테에게 상납한다고 추정했다.'''
1990년 12월 존 고티가 구속 기소되자 그의 아들 존 고티 주니어가 대리인이 되어 감비노 패밀리의 두목 대행을 맡았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는 풋내기에 불과했던 고티 주니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 간부들에게 절대로 고티 주니어와 직접 만나 사업을 논의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는 지간테가 라이벌 고티에 가한 마지막 타격으로 여겨진다.
빈센트 지간테는 유죄인정을 적극 활용하여 1980~90년대 조직범죄와의 전쟁 시기에 기소된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형량을 축소시켰다. 이는 일체의 사법거래를 금지하여 기소된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을 장기 징역형에 직면시킨 존 고티와 대비된다. 더욱이 지간테는 조직원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전제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예컨대 1988년 재판에서 이기적인 변론을 하여 함께 기소된 3명의 동료 중 혼자만 무죄판결을 받은 죄로 살해된 존 디질리오와 1992년에 패밀리 도박 사업의 돈을 훔친 죄로 살해된 안젤로 상지올로라는 2명의 마피아 조직원은 모두 지간테의 지시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존_디질리오_살인사건][안젤로_상지올로_살인사건]
끈질기게 빈센트 지간테를 추적하던 연방정부는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피터 사비노를 수사하여 알아낸 범죄 혐의를 구실로 그를 FBI 측 정보원으로 회유시키는데 성공했다. 준조직원이었던 사비노는 단 한차례도 지간테와 독대한 적이 없었지만 도시주택청이 주관하는 창문 교체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부두목 베네로 망가노와 독대할 수 있었다. 함께 거리를 걷는 망가노와 사비노의 모습. 당시 FBI는 사비노를 이용해 망가노를 노렸는데, 패밀리 서열 2위인 망가노는 지간테와 독대할 수 있었고 많은 범죄 사업을 함께 공모했기 때문이다. 목욕 가운을 입은 지간테와 의자에 앉아있는 망가노.[21] 정보원이 된 사비노는 도청기를 차고 여러 마피아가 범죄를 논의하는 대화들을 비밀리에 녹음하며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얼마 뒤 동료들은 사비노가 소유한 건물 지하실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체포되지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지도 않는 모습을 보고 수사기관과 협력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부하들의 보고를 받은 지간테는 사비노가 정보원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처형하지 않았다. 얼마 뒤 다른 패밀리의 주요 지도자들도 사비노를 의심하여 망가노에게 우려를 표했다. 이에 망가노는 "나도 그놈을 좋아하지 않지만 턱(지간테)은 그놈을 좋아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답했다. 이후 사비노는 망가노와 대화하며 패밀리의 금기를 어기고 지간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에 이른다.

사비노: 유니실 회사 기억하세요.

망가노: 그래.

'''사비노: 빈센트 씨가 할 때가 됐다고 말했대요.'''

'''망가노: 그 사람 언급하지 마.'''

사비노: 좋아요, 언급 안 할게요. 좋아요, 그분이 그 일을 입찰하라고 말했어요.

당시 망가노는 지간테의 실명이 언급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부두목인 그마저 지간테를 두려워한다는 정황을 나타내고 있었다.[22] 마침내 사비노가 진짜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간테는 법원 증인석에 서지 못하도록 그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연방정부는 사비노를 보호하기 위해 작전에서 철수시킨 뒤 가족들과 분리하여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적용했다. 얼마 뒤 사비노의 아내에게 협박전화가 걸려왔는데, 상대방은 사비노를 밀고자로 부르며 그녀와 6살 아들의 목숨을 위협했고 "운전을 조심해라."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전화를 끊자마자 아들을 데리러 가기 위해 자신의 자동차로 달려갔지만 앞좌석에서 폭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뒤 당국에 이를 신고했다. 연방정부는 범인들이 전화를 걸어 미리 언질을 준 점과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위치에 폭탄을 설치한 점으로 보아 범행 목적을 보복살인이 아닌 단순 위협으로 추정했는데, 당시 폭탄을 제거한 정부 측 관계자에 의하면 범인들은 사비노의 아내가 전화를 받고 있을 때 폭탄을 폭발시켜 자동차를 날려버리려고 했지만 도화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결국 미수에 그친 것으로 결론 내렸다.[23] 비록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사비노의 아내를 위협한다는 범인들의 목적은 달성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 사비노의 가족들도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적용받아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오랜 세월 살아온 뉴욕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시기 공공입찰 갈취 혐의로 기소된 망가노는 1993년에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15년과 벌금 10만 달러를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베네로_망가노의_대리인]
1960년대부터 수십여 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법망을 피해온 빈센트 지간테는 당시 조직범죄와의 전쟁 캠페인을 수행하던 뉴욕 동부지구 연방지방검찰청에 의해 6건의 살인을 지시하고 3건의 살인을 공모하였으며 12년간 1억 4200만 달러와 1억 9100만 달러 사이의 방대한 공공입찰을 조작하고 갈취한 혐의로 1990년과 1993년 두 차례에 걸쳐 기소되었다. 동시에 '''연방정부는 미국 암흑가의 정점인 마피아 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Mob’s Commission)이 지간테라고 지목했고 언론은 그를 미국 마피아계 두목들의 두목(Boss of all Bosses in American Mafia)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지간테의 변호인단이 심신장애를 주장하며 최초 기소로부터 사법절차를 무려 6년이나 지연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과로에 시달린 검찰 측 대표 찰스 로즈 연방검사가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은퇴하기도 했다.
1996년 8월 빈센트 지간테에 대한 재판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재판 개시 결정을 알리는 뉴스. 하지만 12월에 지간테가 두 번째 심장수술을 받으면서 재판이 1년 더 연기되었다.[24] 이런 장외 공방이 약 7년 넘게 벌어지는 동안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낸 지간테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변함없이 패밀리를 운영했다.
1997년 6월 25일 마침내 뉴욕 동부지구 연방지방법원에서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1심 공판절차가 시작되었다. 재판관은 잭 와인스타인 연방판사였고 검찰 측 대표는 앤드루 와이스먼 연방검사였으며 변호인단의 대표는 마이클 마리나치오였다. 배심원단은 남성 4명과 여성 8명으로 구성되었고 배심원들의 신원은 신변 안전과 매수 방지를 위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빈센트 지간테는 재판 내내 측근들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출석했다. 지간테 재판을 그린 그림. '''교도소 복역 중 증인으로 소환된 제노비스 패밀리 부두목 베네로 망가노는 협력하면 감형을 해준다는 연방정부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총을 맞는 한이 있어도 증언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25] 변호인단은 지간테가 앓고 있는 정신질환 때문에 그가 뇌물을 받거나, 입찰 조작을 하거나, 살인을 지시하는 등의 정교한 계획을 할 수 없고 마피아 행동대원들에게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다고 변론했다. 나아가 정부 측 증인단은 사이코패스와 거짓말쟁이들이며 정부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맞춘 것이라고 비난했다. 더욱이 증거로 제출된 도청 자료 중엔 지간테가 범죄를 논의하는 육성이 없었는데, 단지 딸을 뉴욕 대학교에 입학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이나 애인과 나누는 파스타 이야기가 전부였다. FBI는 수십 년간 지간테를 감시했지만 단 한 차례도 그가 패밀리 사업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검찰 측에선 자신들이 수집한 다른 증거들과 마피아를 배신한 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로 대표되는 내부 증인들로 맞섰다. 그중엔 조직으로부터 처형 대상이 되어 12발의 총격을 당하고도 살아남은 전 루케시 패밀리 지부장 피터 치오도가 있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정부 측 증인이 된 치오도는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를 어긴 것에 대한 마피아 측의 보복으로 여동생이 총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 삼촌이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꿋꿋이 증언대에 섰는데, 자신은 마피아 생활 도중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으로 언급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정부 측 증인인 전 필라델피아 패밀리 부두목 필 레오네티의 경우 자신은 지간테를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과거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본인의 삼촌이 중요한 의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간테를 만났다고 증언했다. 그 자리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자 마피아 위원회를 대표하는 지간테가 1980~81년에 벌어진 필라델피아 패밀리 내부 항쟁과 관련된 책임 있는 모든 사람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본인의 삼촌이 이를 수용해 여러 사람이 제거되었다고 밝혔다.[26] '''그러나 지간테 재판의 정부 측 증인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라바노나 치오도나 레오네티가 아닌 앞서 소개한 피터 사비노였다.''' 상술했듯 그는 고위 간부는커녕 정규조직원도 아니었지만 제노비스 패밀리 출신이라 내부 사정에 밝았으며 무엇보다 도청기를 차고 여러 범죄 공모를 직접 녹음한 당사자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 다른 지역의 비밀 장소에 설치된 CCTV를 통해 증언대에 선 사비노는 패밀리의 입찰담합과 갈취 계획이 얽힌 방대한 네트워크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특히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제라드 파파 살인사건의 내막과 더불어 마피아가 도시주택청에서 주관한 창문 교체 계약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불법 리베이트를 받은 내막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직접 녹음한 마피아 간 대화들을 재생했다. 한편, 지간테는 재판 내내 머리를 흔드는 등 정신질환자 연기를 멈추지 않았고 정부 측 증인들의 증언이 이루어지는 동안 때때로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잠을 잤다.
'''1997년 7월 모든 공판절차가 종료되자 익명의 배심원단은 3일 동안 16시간의 심리를 거친 끝에 빈센트 지간테가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 감비노 패밀리 지부장 진 고티, FBI 측 정보원 피터 사비노에 대한 살인을 공모하였고 방대한 공공입찰을 공갈하였다고 결론지으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 밖에 제기된 살인 혐의 6건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평결 직후 배심원단은 연방보안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급히 법원을 떠났다. 5년 전 두목의 유죄판결에 분노한 폭력배와 추종자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존 고티 재판과 달리 지간테 재판은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1심 유죄판결로 신변이 확보된 지간테는 정부의 엄중한 계호를 받으며 민간시설인 뉴욕 주 웨체스터 의료센터에 입원했고 12월에 있을 형량 선고를 기다렸다. 말기 암 환자였던 사비노는 증언이 있은지 불과 3개월 만에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는데, 이를 두고 많은 관계자들은 지간테가 4개월만 더 시간을 끌었더라면 재판에서 승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1997년 12월 18일 잭 와인스타인 연방판사는 법원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온 빈센트 지간테에게 "부적절한 의복을 입고 온 피고인들을 위해 비치해놓은 옷 저장소가 있으니 가서 정장을 꺼내 입기 바랍니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지간테가 말뜻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며 "좋은 아침입니다.(Good morning.)"라고 대답하자 어쩔 수 없이 선고를 진행했다. 이후 '''와인스타인 연방판사는 피고인이 앓고 있는 심장질환과 고혈압 등 건강 문제를 고려했다고 밝히며 징역 12년과 벌금 125만 달러를 선고했다.''' 판결 직후 “마침내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악랄한 범죄의 폭정 끝에 피고인은 인생의 황혼기에 궁지에 몰렸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지간테의 석방 예정일은 79세가 되는 2007년이었다.[27] 당시 와인스타인 연방판사의 선고를 듣는 지간테는 음침하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고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 원래 지간테 재판의 검찰 측 대표였던 찰스 로즈 연방검사는 지간테에게 유죄가 선고된 이듬해 사망했다. [앤드루_와이스먼]
형량 선고 후 텍사스 주 포트워스 연방의료센터에 수감된 빈센트 지간테는 FBI와 교정당국의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지간테가 대부분의 형기를 복역한 연방의료센터는 다른 교정시설에 비해 처우가 자유로운 시설이었는데, 매달 평일 9회 또는 평일 1회 및 주말 4회 접견이 보장되었고 모든 접견은 몇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 여기에 매달 300분의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으며 서신 수•발신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지간테는 이런 환경에서 자신이 지정한 대리인을 통해 변함없이 패밀리를 운영했다.[28] 한편, 동료 수용자들은 시설 내에서 가장 악명 높고 유명한 인물인 지간테를 매우 존경했다. 당시 근무한 교도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간테는 가끔 정신질환자 연기를 중단하고 자신의 이부자리를 직접 깔거나 전직 권투 선수답게 70대 고령의 나이에도 섀도 복싱을 연습했다고 한다. 실제로 어느 교도관이 “만약 다른 수용자가 당신을 괴롭히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지간테에게 묻자 정신질환자 연기를 중단한 그는 "어느 누구도 날 건드릴 수 없소."라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1998년 디스커버리 채널은 빈센트 지간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29]
1999년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2심을 맡은 미국 제2연방항소법원은 지간테 측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이에 지간테 측은 1심 공판절차에서 법정에 설치된 CCTV를 통해 피터 사비노의 증언이 이루어진 사실은 피고인과 증인의 직접적인 대면(Face-to-Face Confrontation)이 불발된 것이며 이는 수정 헌법 제6조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과 대질할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는 이유로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2000년 빈센트 지간테 재판의 3심을 맡은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간테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같은 해 지간테의 가족들은 그를 뉴욕 시로 이송해 주치의가 실시하는 외부 건강검진을 받게 해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이에 검찰 측에선 지간테가 연방의료센터에서 받고 있는 치료는 지난 30여 년간 그의 주치의로부터 받아온 치료보다 더욱 우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냈다. 결국 지간테 측의 요청이 기각되면서 외부 건강검진은 무산되었다.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된 뒤 측근 도미닉 시릴로, 상담역(Consigliere) 로렌스 덴티코, 형 마리오 지간테 같은 대리인들이 차례로 두목 대행을 맡으며 많은 권한을 위임받았지만 '''여전히 빈센트 지간테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공식적인 두목이자 최고 의사결정자(Top Decision Maker)였다.''' 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조지 바론은 빈센트 지간테 같은 마피아 두목이 교정시설에서도 사업을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자 "가능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빈센트 지간테는 죽는 날까지 패밀리의 두목이자 두려움의 대상이고 성직자 동생을 통해 자신의 지시를 외부에 전달한다."라고 대답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조지 아나스타시아는 "빈센트 지간테가 누리는 교정시설 내 처우는 그가 패밀리를 운영하는데 충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조직 운영은 지정된 대리인이 맡고 있겠지만 몇몇 중요한 사안은 두목 대행 보다 더 상부인 최고위 인사(빈센트 지간테)가 결정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는 대기업의 CEO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빈센트 지간테의 아들 앤드루 지간테는 정기적으로 라과디아 공항에서 댈러스-포트워스 국제공항까지 가는 항공기를 타고 가 아버지를 접견했다. 당시 마피아 정규조직원이 아닌 일반인 신분이었던 그는 전과가 없었기 때문에 접견 제한 대상이 아니었고 조직 계보에 올라와 있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은밀하게 아버지의 각종 지시를 패밀리 측에 전달할 수 있었다. [빈센트_지간테의_대리인들] 두목 대행 체제로 21세기를 맞은 제노비스 패밀리는 노동 공갈 같은 기존의 전통적인 범죄 사업을 유지함과 동시에 새로운 수법들을 도입했다. 대표적으로 바카라스포츠 배팅 같은 도박업의 영역을 해외 사이트를 이용한 온라인 공간으로 확장시켰고 기존에 시칠리아 마피아와 함께하던 국제 마약 사업을 은드랑게타 같은 본토 조직과의 연계로 대체했으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잘 알려진 신종 모기지저당증권 사기도 적극 활용했다. 여기에 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새롭게 생겨난 대마초 시장을 통제했고 펌프 앤드 덤프(Pump and Dump) 주식 사기도 감행했다. 패밀리가 이러한 사업들을 통해 벌어들인 모든 범죄수익의 일부는 변함없이 빈센트 지간테 측에 상납되었다. 2000년대 중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을 찍은 FBI 감시 사진.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 중에도 실질적으로 패밀리를 운영한 증거 중에는 1998년 다른 마피아 정규조직원을 자신의 재판에 증인으로 요청했다고 알려진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로사리오 갠지를 빈센트 지간테가 살해하라고 지시한 일화를 통해 잘 알 수 있다.[30] 당시 패밀리 내 고위 간부들이 갠지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적극적으로 해명하여 빈센트 지간테의 오해가 풀린 뒤에야 처형 명령이 취소되었다. 특히 2000년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앨런 롱고의 녹취된 육성을 보면 “비토 제노비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빈센트 지간테는 존재한다. 우리가 여기 있음으로써.”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31] 동시기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살바토레 아파로는 "넌 항상 두목을 위해 하는 거야. 네가 누굴 죽이든 상관없어 그건 두목으로부터 내려온 지시니까."라고 얘기했다. 또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폴 제라시는 조직원으로 위장한 FBI 측 정보원에게 "여전히 서피코(제노비스 패밀리 거리 책임자 'Frank Serpico') 씨가 있긴 하지만 그분이 결정권자는 아니야. '''(턱을 만지며) 이분'''이 결정권자지."라고 얘기했다. 동시에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파스칼레 팔세티는 "아이(앤드루 지간테)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건 '''(턱을 만지며) 이분'''의 말이다. 누가 도전하겠나?"라고 얘기했다. 2001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조지 바론이 밝히길, 플로리다 항구에서 패밀리 사업을 하던 자신은 두목의 아들 앤드루 지간테와 마찰이 있었고 결국 두목인 빈센트 지간테가 자신을 선반 위에 올렸다(Put on the shelf)고 얘기했다. 그 말은 마피아 세계에서 제명하진 않되, 일정 기간 권력을 박탈하고 기존 사업에서 배제시킨다는 뜻이다.[32] 그렇게 선반 위에 올려진 바론에게 예전에 빌려준 돈을 받으러 뉴욕 시로 돌아오라는 의심스러울 만큼 자상한 패밀리의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은 바론의 오랜 친구인 노조 간부 지미 캐신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이는 가까운 사람을 통해 처형 대상자를 유인하는 전형적인 마피아 수법이었다. 실제로 바론을 아꼈던 캐신은 "오지 마 자넬 죽일 거야. 모두가 알고 있어."라고 경고했다. 얼마 뒤 같은 메시지가 옛 친구의 아들에 의해 재차 전달되었다. 바론은 지인들의 경고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FBI에 갈취 혐의로 체포되었다. 심사숙고를 거친 그는 조직 세계에 더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정부 측 증인이 되어 본인이 아는 범죄 정보들을 수사기관에 제공한 뒤 보호를 받았다. 이후 "난 살고 싶었다. 그들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다.[33] '''이 일화들은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 중에도 패밀리의 최고 의사결정자였음을 보여준다.'''
'''2002년 정신질환을 가장한 사법방해 및 공갈 혐의로 추가 기소된 빈센트 지간테는 이듬해 자신의 정신질환자 행세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인정했다.''' 상술했듯 그의 아들 앤드루 지간테는 마피아 정규조직원이 아님에도 아버지의 각종 지시를 패밀리 측에 전달하다 범죄 사업에 깊이 연루되어 다른 조직원들과 함께 기소된 상태였는데, 재판에서 패소할 경우 최대 징역 20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빈센트 지간테가 아들의 형량 축소를 위해 유죄를 인정하면서 약 34년 동안의 정신질환자 연기가 막을 내렸다. 더불어 이 재판을 통해 수감 중인 빈센트 지간테가 대도시해양유지계약자협회(Metropolitan Marine Maintenance Contractors Association 이하 MMMCA)를 조종하여 미 동부지방의 부둣가를 암암리에 통제해온 사실이 밝혀졌다.[34] 당시 빈센트 지간테는 연방검사와의 협상을 통해 정신질환을 가장한 사법방해 혐의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공갈 혐의와 아내•애인•동생의 사법방해 혐의에 대해선 불기소 처분을 받아냈다. 이 사법거래를 두고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의 마피아 전문가 셀윈 랍은 '원래 유죄인정을 고려조차 하지 않는 마피아 두목으로서는 전례 없는 항복'이라고 평했다. 빈센트 지간테의 변호인단 대표 벤자민 브리프만은 "모두가 그렇듯 제 의뢰인 역시 인생의 어느 지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너무 늙고, 아프고, 지쳐서 싸울 수 없는 지점 말입니다."라고 얘기했다.[35] 검찰 측 대표였던 뉴욕 동부지구 연방검사 로슬린 마우스코프는 "빈센트 지간테는 교활한 사기꾼이었고 우리 중 몇몇은 그것이 연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연기는 수십 년 동안 행해졌지만 오늘 끝났습니다."라고 얘기했다. 당시 검찰 측에선 공판절차에 대비해 빈센트 지간테가 교정시설에서 비밀스럽게 범죄 사업을 운영하는 여러 육성과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다양한 영상을 증거로 제출할 예정이었지만 사법거래 때문에 사용할 일이 없어졌다. 예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수척한 모습으로 법정에 들어선 빈센트 지간테는 더 이상 정신질환자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아들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가족들에게 키스를 보냈고 자신을 도와준 변호인단과 악수를 했으며 재판관 레오 글래서 연방판사에겐 “신의 가호를 빕니다.(God bless you.)”라는 덕담을 건넸다. 결국 빈센트 지간테는 3년의 형량이 추가되었고 같은 날 유죄를 인정한 앤드루 지간테는 최대 형량 보다 훨씬 낮은 징역 2년과 몰수 200만 달러를 선고받았다. 훗날 빈센트 지간테의 딸 리타 지간테는 거짓의 짐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좋아 이제 난 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는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빈센트 지간테는 정신질환자 연기를 중단했을지언정 은퇴를 선언하진 않았고 대리인을 통해 변함없이 패밀리를 운영했다.
2005년 10월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로렌스 리치가 실종되었다. 다음 달 리치는 약 6주 동안 방치된 자동차 트렁크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비록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은 빈센트 지간테가 마지막으로 지시한 (혹은 승인한) 조직 내 처형으로 여겨진다. 당시 송금 사기 및 갈취 혐의로 기소된 리치는 유죄인정을 통한 징역형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는데, 그 과정에서 패밀리 수뇌부와 마찰을 빚다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조직의 간부인 지부장을 처형하는 데에는 당연히 패밀리의 정점인 지간테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시신이 발견되기 전 피고인 소재불명 때문에 궐석재판으로 치러진 선고공판에서 리치와 2명의 공동 피고인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리치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한 FBI 관계자는 "제노비스 패밀리는 우리더러 찾으라는 듯 재판 중인 피고인을 자동차 트렁크에 던져놓은 뒤 '이제 어떻게 나올 거야?'라고 묻습니다. 2005년인데 아직도 자동차 트렁크에서 시신이 발견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36] [로렌스_리치_살인사건]
2005년 11월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 연방수용자 의료센터에서 복역하던 빈센트 지간테는 갑자기 호흡 곤란과 산소 부족을 호소했고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지간테의 변호인이 교정당국을 고소하여 형 집행을 일시 정지시킨 뒤 자신의 의뢰인을 급성환자전문 민간병원으로 이송시켰다. 지간테는 전문 의료진과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을 회복했고 약 1달 동안의 외부진료를 마친 뒤 원래 있던 연방수용자 의료센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일 뒤인 2005년 12월 19일 7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37][38] 뉴욕 타임스 매거진은 지간테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금세기 최후의 위대한 마피아(the last great Mafioso of the century)'''로 고인을 묘사했다. 국내 제도권 언론사 중엔 세계일보에서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마피아 대부 옥사」'''라는 제목으로 사망 소식을 전했다. 지간테는 2010년 6월 28일 82세의 나이로 석방될 예정이었지만 고질적인 심장질환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피아 전문가 제리 카피시는 일찍이 "암흑가의 제왕(지간테)은 거리로 돌아와 패밀리를 운영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한 적 있었지만 이 예상은 결국 빗나갔다.
빈센트 지간테의 장례식은 뉴욕 타임스에서 취재했다. 라이벌 존 고티의 장례식은 부하 조직원들이 총출동하여 100대가 넘는 자동차가 동원되는 등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빈센트 지간테의 장례식은 생전의 그가 추구한 익명성에 걸맞게 운구차 1대와 리무진 3대만 동원되었고 비교적 간소하게 치러졌다. 빈센트 지간테를 추모하기 위해 뉴욕 시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당을 거의 가득 메운 조문객들은 그의 가족•친척•지인 등 일반인이 대다수였고 제노비스 패밀리 측에선 두목 대행을 맡아온 형 마리오 지간테를 포함해 고인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몇몇 원로 조직원만 참석했다. 그 밖에 다른 폭력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생전의 빈센트 지간테가 마피아는 드러나게 행세하면 안 되는 비밀결사라고 믿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FBI는 두목의 장례식이 제노비스 패밀리의 계보를 파악하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지만 이러한 비밀주의 때문에 새로 입수할 정보가 거의 없었다. 빈센트 지간테의 장례미사는 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가 집전했다.[39] 언론에서 장례식을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장례 절차가 끝난 후 빈센트 지간테의 시신은 그린우드 묘지에서 화장되었다.
빈센트 지간테는 17세 때 조직에 입문한 뒤 사망하기 전까지 약 60년을 마피아로 살며 수많은 폭력 사태를 지휘했고 공포를 수반한 공갈•협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총 13년의 수감생활을 했고 47년은 거리를 지켰다. 지간테는 거리에서 16년, 교정시설에서 8년 도합 24년 동안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으로 군림했으며 이는 패밀리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기록이었다. 그는 세간에 알려진 13건 외에도 수많은 암흑가 살인사건의 배후로 추정되지만 살인죄로는 단 1건의 유죄판결도 받지 않았고 조직범죄에 가해지는 연방정부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패밀리를 책임지며 정부를 이겨내야 했다. 수사관들은 지간테가 자신의 범죄조직을 안정시켰을 뿐만 아니라 법 집행을 저지하는 다양한 방법도 개발한 유능한 상사라고 묘사했다. 그가 패밀리의 두목으로 재직하며 내린 빈틈없는 결정들은 본인이 하급 조직원이었을 때 저지른 다양한 실수와 극명하게 대조되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생전의 지간테는 목욕 가운을 입고 면도도 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리니치 빌리지를 배회하곤 했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암흑가를 공포로 지배했던 교활한 마피아 두목이었다. '''지간테의 사망 이후 정신질환자 행세로 법망을 피한 그의 이야기는 법정신의학(Forensic Psychiatry) 교과서에 전례 없는 사례로 추가되었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대리인을 맡고 있던 마리오 지간테는 동생이 사망하자 두목 대행직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조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패밀리 고위 간부 다니엘 레오가 집단지도체제의 임시 지도자가 되어 조직을 재정비했다. 2006년에 부두목 베네로 망가노가 약 13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고 2008년엔 전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가 약 12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같은 해 빈센트 지간테의 첫 번째 대리인이었던 도미닉 시릴로가 약 3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이듬해 빈센트 지간테의 두 번째 대리인이었던 상담역(Consigliere) 로렌스 덴티코가 약 4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고 유력 지부장 매튜 이아니엘로도 약 2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40] 여기에 약 10년 넘게 부두목 대행을 잘 수행한 마이클 제네로소도 있었다. 외부에 자신들의 두목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하지 않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그 특성상 열거한 후보자들 중 누가 빈센트 지간테의 뒤를 이었는지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패밀리가 여전히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FBI에서 잠입 요원 투입 등 비밀작전을 전개하여 빈센트 지간테 사망으로부터 약 11년 만인 2016년에 벨로모가 두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41]

3. 여담


  • 빈센트 지간테의 서명은 2개의 X자를 휘갈긴 모양이었다.
  • 한창때의 빈센트 지간테는 183cm의 키에 몸무게는 90kg 정도 나갔다.
  • 시계공이었던 빈센트 지간테의 아버지는 1979년에 사망했다.
  • 기소를 피하기 위해 정신질환자 행세를 한 빈센트 지간테의 이야기는 영화 애널라이즈 댓에서 정신질환자 연기로 가석방되는 마피아 두목 폴 비티 캐릭터와 드라마 소프라노스의 치매 걸린 마피아 두목 코라도 소프라노 캐릭터 등 여러 대중예술 작품에 영감을 제공했다.
  • 빈센트 지간테는 두 집 살림을 했다. 아내 올림피아 그리파와는 뉴저지 주에 위치한 교외 주택에 거주했다. 지간테 부부의 결혼식 사진. 애인 올림피아 에스포지토와는 뉴욕 시에 위치한 (2018년 기준) 1200만 달러 상당의 고급 연립주택에 거주했다.[42] 지간테의 전기를 쓴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래리 맥셰인은, 이탈리아계 마피아 패밀리는 조직원의 두 집 살림을 금지하지만 지간테에겐 그러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고 이는 그가 누린 권력과 암흑가에서 받은 존경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말했다. 특히 지간테와 애인이 함께 거주한 연립주택은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은 뉴욕 시내 최고의 부촌이자 미국의 상류층과 유명 인사들이 대거 거주하는 곳이며 드라마 가십걸섹스 앤 더 시티의 주요 배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43] 1983년 음반기획사 사장 모리스 레비가 49만 달러에 주택을 구입한 후 이유는 불명이나 지간테의 애인에게 단 돈 1만 6천 달러에 기증했다. [모리스_레비] 지간테는 특히 어머니가 거주하는 맨해튼 리틀 이탈리아의 오래된 아파트에도 자주 머물렀다.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을 포함해 성인이 된 후에도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이곳인데, 1995년 뉴욕지(New York Magazine)는 허름한 아파트의 외관을 찍은 뒤 「정말로 이 저층 아파트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두목의 집인가?」라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 빈센트 지간테를 감시하던 FBI 요원들의 진술을 통해 그의 생활패턴을 잘 알 수 있다. 매일같이 어머니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던 지간테는 오후 즈음 자신의 사교클럽 트라이앵글 시민개선협회로 가서 자신의 부하들과 트럼프 카드피노클을 하며 사업을 논의했다.[44] 그들은 사교클럽이 도청되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요한 대화는 라디오 음량을 키운 채 하거나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어놓고 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노트에 글씨를 써 의사소통을 했고 사용한 종이는 즉시 찢어 불에 태우거나 변기에 흘려보냈으며 아예 사교클럽 밖으로 나가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밤 11시가 되면 지간테를 맨해튼 연립주택까지 태우러 갈 자동차가 도착했고 조직원들은 뒷좌석 문을 열고 두목의 탑승을 도왔다. 이후 자정이 넘도록 근처 옥상에서 지간테를 감시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집까지 동행한 부하들과 대화를 이어나가며 신문을 읽거나 TV를 시청했다고 한다. 다음날 오전 9~10시에 다시 어머니의 아파트로 돌아가는 게 일과의 전부였는데, 이에 대해 전 뉴욕 주 조직범죄특별수사팀장 로널드 골드스톡은 "지간테가 마피아 두목으로 지내며 어떤 즐거움을 얻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의 유일한 쾌락은 자신이 행사한 권력 그 자체인 것 같았습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연방검사 그렉 오코넬은 "지간테는 지부장과 행동대원들에게 많은 돈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매우 좋아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도 "지간테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미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을 어디에 숨기느냐였다. 그는 대부분의 지부장으로부터 돈을 상납 받지 않았다."라고 얘기했다. 전 감비노 패밀리 준조직원 루이스 페란테 역시 자신의 저서에 "지간테는 지부장들이 상납금을 가로채도 그냥 내버려 뒀다. 범죄활동 자체를 사랑해 정작 물질에는 초연해진 것이다."라고 썼다. 물론 패밀리 도박 사업의 돈을 훔치다 적발되어 처형된 안젤로 상지올로라는 조직원이 있긴 하지만 보통 지간테는 검은 돈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수뇌부 회의가 열리면 짜증부터 냈다. 그는 고위급 조직원들이 참석하는 회의장에선 돈이나 헤아릴 게 아니라 거시적인 평화 유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마피아 수뇌부라면 전체 조직을 위한 정책을 정의하고 규칙을 집행하는 데 보다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빈센트 지간테를 근거리에서 수행하는 부하 조직원들을 도청한 FBI에 의하면 그들은 매일 자정까지 사교클럽에서 두목과 피노클을 한 뒤 이른 아침이 되면 자신들이 또 사교클럽을 열어 놓아야만 해 힘들다는 불만을 다른 조직원들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더욱이 지간테는 악명 높은 타짜로 유명한데, 조직원들은 그의 사기도박을 알면서도 감히 지적할 수 없었다. 특히 지간테와 자주 피노클을 한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페데리코 지오바넬리(Federico Giovanelli)는 자신이 본 최고의 카드 기술자로 지간테를 꼽았다. 심지어 다른 조직원은 지간테가 카드 게임에서 지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밝혔는데, 진 게임도 그가 이겼다고 선언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빈센트 지간테의 정신질환자 연기는 이러했다. 그는 연방정부로부터 언제•어디서•어떻게 감시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종종 주차 미터기와 대화를 나누거나, 뒷골목에 노상방뇨를 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후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발톱을 깎곤 했다. 한 번은 소환영장을 집행하는 공무원이 방문할 사실을 미리 알고 욕실에서 우산을 쓴 채 샤워를 하며 영장을 받았다. 그야말로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수준의 연기였다. 여기에 더해 지간테가 높은 수준의 타짜였다는 사실을 종합해보면 그는 극단적인 기만자형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지간테는 자신을 감시하는 수사관들과 온 세상을 속이며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 역시 자서전에 “지간테는 자신의 얼간이 행동을 통해 연방정부를 얼간이로 만들면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썼다. 실제로 여러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한 내용 중 ‘남이 나를 속이기 전에 내가 남을 속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자들이 꽤 많다고 한다.
  • 빈센트 지간테의 정신질환자 연기는 한 번씩 허점을 노출했다. 수사기관이 찍은 사진 중에는 목욕 가운을 입은 지간테가 야외에서 부하들과 담배를 피우는 사진이 있다. 아주 맑은 정신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진 속 그의 모습은 정신질환자는커녕 보통사람 이상의 강렬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무서운 남자로 보인다.[45] 이러한 사진들은 FBI와 NYPD의 합동 조직범죄전담반 소속 톰 브루노 수사관이 촬영했다. 그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을 때의 지간테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밝혔는데, 한 번은 지간테의 아들이 자동차를 몰고 동네로 들어오면서 경적을 크게 울리자 인도에 서 있던 지간테가 "야! 뭐가 그리 급해?(Hey! what are you in a rush?)"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자신을 감시하는 수사관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정신질환자 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자택에 있는 지간테를 감시하던 FBI 요원 역시 집에서의 그는 돈을 세는 등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샤워 후를 제외하면 가운을 입지 않았다고 밝혔다. 특히 실내에서 지간테가 입은 가운은 야외에서 정신질환자 연기를 위해 입는 허름한 제품이 아닌 브룩스 브라더스 스타일의 명품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FBI 요원은 임무 수행 중 지간테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가 있었는데, 교활한 지간테는 허름한 가운 안에 고급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고 밝혔다.
  • 빈센트 지간테는 운전기사가 모는 2세대 검은색 링컨 타운카를 타고 다녔다.
  • 전 콜롬보 패밀리 지부장 마이클 프란지스는 인터뷰에서 "빈센트 지간테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패밀리 내 어떤 위치를 가졌는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라고 얘기했다. 이윽고 1980년대에 있었던 어느 일화를 소개했는데, 프란지스가 콜롬보 패밀리 두목 카마인 페르시코와 사업상 마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간테는 자신의 부하 페데리코 지오바넬리를 시켜 그를 호출했다. 이후 지간테가 “뒷감당 걱정은 하지 말고 소속을 제노비스 패밀리로 옮기라.”라는 다소 무리한 제안을 했지만 프란지스가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 일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당시 지간테는 뉴욕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보통은 가졌다.” 프란지스는 특히 존 고티앤서니 살레르노를 언급하는 2020년 인터뷰에서도 지간테가 거리에서 가장 강력했다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 빈센트 지간테는 주요 목표였던 존 고티는 살아남고 부두목 프랭크 데치코만 살해된 1986년 폭탄 공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존 고티 살인 계획을 추진했다. 마피아는 철저한 비밀결사라는 생각을 가졌던 빈센트 지간테는 연예인 기질이 충만해 대중의 관심을 끈 존 고티를 경멸했고 나아가 자신이 소속된 마피아 위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감행한 폴 카스텔라노 살인사건에 대한 처벌의 일환으로 그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고티 살인 계획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1987~88년 사이 FBI가 제노비스 패밀리 상담역(Consigliere) 루이스 만나를 도청한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당시 빈센트 지간테의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나는 존 고티의 사교클럽 근처에서 그를 살해하는 계획을 부하에게 설명하며 "위장을 해, 거긴 오픈된 장소니까.(Wear a disguise, It's an open place.)"라고 얘기했다. FBI는 도청 내용을 토대로 입수한 정보를 존 고티 측에 전달할 법적•도덕적 의무가 있어 그에게 알렸다. 이후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들의 대화를 도청한 기록에 따르면 한 조직원이 "존 고티가 우리를 알아챘어.(John Gotti knows we.)”라고 경고한다. 며칠 후 FBI는 만나와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제임스 나폴리의 대화를 도청했다.

나폴리: 언제 작업합니까?

만나: (존 고티의 동생) 진 고티는 죽은 목숨이야.

나폴리: 아시다시피, 우리는 남은 평생 동안 이 대가를 치를 겁니다.

  • 한편, 제노비스 패밀리가 자신을 살해하는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에 분노한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에게 담판을 제안했다. 두목들의 만남에 앞서 존 고티의 안전에 관한 사항은 동생 진 고티가 확인했고 빈센트 지간테의 안전에 관한 사항은 측근 도미닉 시릴로가 확인했다. 빈센트 지간테는 이 담판에서 존 고티에 대한 부하들의 음모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며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자신이 만나를 살해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다른 패밀리의 두목을 제거하는 중대한 계획을 부하들이 독자적으로 기획했다는 빈센트 지간테의 주장은 믿기 힘든 변명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볼키스를 나누며 표면적인 화해를 이루어냈다. 이후 빈센트 지간테의 속내를 알게 된 존 고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만나와 그의 부하들을 잘 감시하라는 지시를 조직원들에게 내렸다. 얼마 뒤 존 고티도 빈센트 지간테를 살해하고 자신과 가까운 알폰스 말랑고네를 제노비스 패밀리의 새로운 두목으로 추대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FBI는 이 정보를 빈센트 지간테의 형 마리오 지간테와 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에게 알렸다. 이후 빈센트 지간테의 사교클럽 트라이앵글 시민개선협회 일대 경비가 더 삼엄해졌고 빈센트 지간테의 집 앞은 그의 경호원 겸 운전기사 비토 팔미에리가 항시 지켰다.[46] 하지만 빈센트 지간테를 노리는 존 고티의 계획은 다른 패밀리들, 특히 루케시 패밀리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실행할 수 없었다. 훗날 빈센트 지간테의 전기를 쓴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래리 맥셰인은 ‘존 고티는 정말로 빈센트 지간테를 두려워했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수사기관 관계자와 전직 마피아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대표적으로 전 FBI 감비노 패밀리 담당팀장 브루스 모우가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를 두려워했습니다. 존 고티는 제노비스 패밀리가 가장 강력하고 터프하며 악랄한 조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얘기했고 이에 연방검사 그렉 오코넬이 "반면 빈센트 지간테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동의했다. FBI의 대표적인 마피아 전문가 리처드 로스 역시 "여러분들은 존 고티가 두목들의 두목(Boss of all Bosses)이라는 헛소리를 듣고 계시지만 언제나 제노비스 패밀리가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이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전 필라델피아 패밀리 부두목 필 레오네티는 "존 고티는 빈센트 지간테가 가진 힘을 자신은 절대로 갖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을 것이다. 내 말은, 신문과 언론에서 존 고티를 말쑥한 두목으로 만들었지만 거리의 사람들과 다른 마피아들은 뉴욕의 진정한 실권자가 빈센트 지간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 고티는 목욕 가운을 입은 그 남자를 결코 이길 수 없었다."라고 회상했다.
  • 상술했듯 빈센트 지간테는 가장 강력한 패밀리의 두목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하는 형태의 마피아 위원회 회합은 수사기관의 감시에 상당히 취약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위원회 재판 이후인 1986년부터 두목들의 정기적인 회동이 폐지되었는데, 1988년 감비노 패밀리 두목 존 고티와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빅터 아무소는 모처럼의 두목 간 회동을 추진했다. 지간테는 전령을 통해 의사를 교환하자며 계속 거부했지만 신임 콜롬보 패밀리 두목 대행의 위원회 참여를 다루는 중대한 문제는 만나서 논의해야 한다는 그들의 설득에 마지못해 동의하는 대신 회동을 감비노 패밀리 지부장 프랭크 다폴리토 형의 아파트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지간테가 그 아파트를 약속 장소로 정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친척이 같은 건물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동 전날 친척 집에 잔 뒤 회동 당일 목욕 가운을 입고 부두목 베네로 망가노와 함께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즉, 지간테는 자신이 회동에 참석하는 모습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그 아파트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회동을 마친 고티는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에게 “그는 여우처럼 빈틈이 없어.(He's crazy like a fox.)”라고 얘기하며 지간테의 교활함을 인정했다.
  • 미국 연방법원 문서에 따르면 1989년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 앤서니 토르토렐로는 동료들에게 빈센트 지간테의 아내 혹은 애인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47] 이 사실을 안 지간테는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빅터 아무소에게 토르토렐로를 살해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아무소는 자신의 정규조직원을 그렇게 쉽게 죽일 순 없다고 말하며 지간테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 토르토렐로에게 가하는 폭행은 허가했다.
  • 1989년 뉴욕 시의 타블로이드 신문이자 미국 최초의 대안 신문(Alternative Newsweekly)인 빌리지 보이스가 빈센트 지간테의 막냇동생 루이스 지간테 신부에 관한 심층취재를 했다. 지간테 신부는 처음 사제 서품을 받은 뒤 푸에르토리코의 한 교구에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스페인어를 배우며 빈민가 성직자의 이미지를 쌓았다. 지간테 신부는 중남미에서 약 2년간 사목한 뒤 고향인 뉴욕 시의 교구로 돌아왔고 훗날 연방대법관이 되는 소니아 소토마요르를 비롯한 여러 신도들의 성직자로 활동하며 1973년 시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일찍이 그는 빈곤층이 대다수인 자신의 교구민들을 위한 도시재생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1968년부터 브롱스남동부공동체조직(South East Bronx Community Organization 이하 SEBCO)을 결성해 공공 아파트 건설 사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이 순전히 공익만을 위한 건 아니었는데, SEBCO를 위한 공적 자금조달은 지간테 신부의 형제들이 몸담고 있는 마피아 패밀리에 5000만 달러 상당의 사업 기회를 제공했다. 실제로 지간테 신부의 교구민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크고 작은 아파트들은 제노비스 패밀리의 고위급 조직원들이 소유하거나 소속된 건설사들에 의해 지어졌다. 여기에 SEBCO를 통한 제노비스 패밀리의 돈세탁 규모 역시 상당할 것으로 추정되었다.[48] 관련 문서 수천 건을 입수한 빌리지 보이스는 마피아와 연관된 도급업자들이 주정부와 연방정부에서 주관하는 약 8000만 달러 이상의 건설 계약을 받은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여기에 지간테 신부는 7000만 달러 상당의 추가 건설 계약도 갖고 있었다.[49] SEBCO는 건설 프로젝트가 끝나도 부동산 관리를 통해 연간 45만 달러가 넘는 돈을 지속적으로 벌어들였고 모든 관리는 지간테 신부와 연관된 회사들이 맡았다. 더욱이 FBI는 SEBCO가 관여하지도 않는 브롱스의 건설 사업을 논의하는 사업가들이 "신부가 우리 사업을 허락해야 돼."라고 말하는 육성을 포착했다. 이는 지간테 신부의 건설업계 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물론 대부분의 수사관과 기자들은 지간테 신부가 행사하는 모든 권력이 마피아 두목인 형 빈센트 지간테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지간테 신부는 공공 아파트 건설 사업을 통해 지역 내에서 성자의 반열에 올랐고 존 오코너 추기경은 지간테 신부를 가톨릭교회의 뛰어난 건축가(Master Builder)로 묘사했다.[50] 에드 코흐 뉴욕시장은 지간테 신부의 조언과 지지를 구했으며 연방주택청과 도시주택청 소속 고위 공무원들도 지간테 신부를 자주 방문했다. 한편, 대부분의 교구민은 빈곤층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지간테 신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1989년 시점의 그는 브롱스에서 4시간 거리에 위치한 상류층 주택에 거주했고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에 멋진 리조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맨해튼엔 2개의 협동조합을 갖고 있었으며 캐딜락이 포함된 6개의 자동차와 6개가 넘는 부동산도 보유했다. 지간테 신부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친구에게 "사람들은 내가 공짜로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게 바로 그들의 문제야."라고 말했다. 또 본인을 '통제받지 않는(Non-order)' 성직자로 묘사했는데, 자신은 예수회처럼 엄격한 재정적 한계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여러 마피아 조직원의 장례미사를 집전해온 지간테 신부는 자신의 가문이 '이탈리아인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왔으며 사실 마피아라는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니치 빌리지를 산책하는 빈센트 지간테와 루이스 지간테 형제. 시간이 흘러 2004년 시점의 SEBCO엔 6개의 비영리 단체와 12개의 영리 회사를 포함한 18개 사업체가 등록되어 있었다. "내가 온 동네를 지었다!"라며 본인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는 지간테 신부는 연봉 15만 달러를 받으며 5개 회사의 CEO 및 비영리 단체 대부분의 회장이 되어있었다. SEBCO의 비영리 단체들은 5000만 달러 상당의 부동산을 자체적으로 보유했고 영리 회사 중 하나인 센트리 보안회사(Sentry Security)는 SEBCO가 지은 아파트 일대의 치안 유지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보안회사의 서비스가 그다지 좋지 않아 동네의 마약중독자와 매춘부들 때문에 주민들이 불안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된 적이 있다.[51] 지간테 신부의 뒤를 이어 SEBCO를 장악할 후계자는 빈센트 지간테의 차남 살바토레 지간테로 알려져 있다.[52][53] [빈센트_디나폴리]
  • 어느 날 빈센트 지간테는 자신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인사를 하거나 경의를 표하지 않은 어떤 남자 이야기를 애인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FBI는 그들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지간테의 정신건강이 멀쩡하다는 증거가 되었고 그의 육성이 대중에 공개된 몇 안 되는 자료가 되었다. (이하 대화 내용.)

애인: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는데? 이발소? 그 사람은 당신이 거기 있는 줄 몰랐을 거야.

지간테: 아니야 내가 거기 있는 줄 알았어. 그놈이 제일 먼저 나왔단 말이야. 집 들어올 때 뭐 좀 사 올까?

애인: 아니 괜찮아. (입맞춤 소리)

  • 빈센트 지간테의 어머니는 그녀의 셋째 아들이 마피아 두목일 수도 있다는 기자의 말에 "두목? 걔는 화장실의 두목이야!(Boss? He’s boss of the toilet!)"라고 버럭 소리칠 정도의 여장부였다. 어머니와 빈센트 지간테가 함께 찍은 사진. 1996년 94세의 그녀는 가톨릭 신부인 막내아들 루이스 지간테와 함께 산책을 하던 중 윌리엄 킹이란 할렘 사람에게 지갑을 강탈당했다. 범인은 몇 구역을 못 벗어나 경찰관에 현행범으로 검거되었는데, 뉴욕 시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이를 두고 한낱 거리의 강도가 국가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두목 어머니의 지갑을 훔친 것도 모자라 경찰에 즉시 붙잡힌 점을 꼬집으며 세계에서 가장 멍청한 강도(The World’s Dumbest Mugger)로 풍자했다. 이후 징역 1년 6개월~3년의 부정기형을 선고받은 강도는 법정에서 지간테 가문을 향해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사건 이듬해인 1997년 5월 빈센트 지간테의 어머니는 셋째 아들의 재판이 열리기 약 1달 전에 사망한다.
  • 연방정부는 1997년에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 빈센트 지간테가 가짜 정신질환자라는 증거와 교정시설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를 변함없이 운영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아내기 위해 그의 모든 접견과 통화를 감시했다. 실제로 고질적인 심장질환을 앓고 있던 지간테는 아내와 통화하며 교정시설 의사에게 진료받은 이야기와 처방받은 약 이야기를 주로 하곤 했는데, 자신의 담당의가 최고의 의사는 아닐지언정 그럭저럭 괜찮은 의사이며 본인에게 상당히 친절하다고 말하는 등 정신질환자는커녕 의사소통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직폭력배와 연예인의 유착관계는 쉽게 관찰된다. 물론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할리우드 유명 연예인과 친분을 가진 거물급 마피아의 사례들이 잘 알려져 있다.[54] 다만 빈센트 지간테의 경우 연예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모습이 노출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자신의 정신질환자 연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유명인들과 공공연히 향락을 즐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지간테의 부하들은 일부 연예인과 친분을 다지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2000년에 감비노 패밀리 지부장 앤서니 시코네에게 위협을 받고 갈취를 당한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이 당시 수감 중이었던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안젤로 프리스코가 복역 중인 교도소 접견장까지 찾아가 그에게 1만 달러를 지불하고 시코네와 자신의 갈등을 잘 중재해달라는 부탁을 한 사례가 있다.
  • 2001년 빈센트 지간테는 교정시설 TV로 9.11 테러 뉴스 소식을 접하자마자 뉴욕 시의 가족들에게 안부전화를 걸었다. 훗날 연방정부는 이 일화를 통해 지간테의 정신건강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하루는 존 고티가 빈센트 지간테에게 자신의 아들을 정규조직원으로 입단시켰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이에 빈센트 지간테는 "이런, 그거 유감이군.(Jeez, I'm sorry to hear that.)"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빈센트 지간테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반대로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못되었다. 그럼에도 장남 앤드루 지간테는 2003년에 수감 중인 아버지의 지시를 외부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마피아 사업과 깊게 연루되어 약 2년간 복역한 사실이 있다. 당시 가택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그는 유죄판결이 확실시되자 정부의 허가를 얻어 아내와 4명의 자녀를 데리고 디즈니 월드에 다녀온 뒤 수감되었다. 2018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 존 페니시에 의하면 빈센트 지간테의 장남 앤드루 지간테와 사생아 빈센트 에스포지토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정규조직원이 되었다고 한다.[55]
  • 2005년 연매출 1억 8600만 달러를 달성한 워스 건설사(Worth Construction)가 수십 년 전부터 빈센트 지간테의 제노비스 패밀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지적이 나왔다.
  • 빈센트 지간테는 뉴욕 시 맨해튼에 위치한 유명 레스토랑 일 물리노(Il Mulino)의 단골이었다. 이곳은 2009년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만찬을 즐긴 레스토랑이기도 하다.[56] 한편, 빈센트 지간테의 조카 루이스 지간테는 뉴욕 주 웨체스터에 위치한 물리노스(Mulino's)라는 레스토랑의 주인이다. 이곳은 상술한 일 물리노와 이름만 유사할 뿐 아무 관계가 없다. 지간테 가문에서 경영하는 물리노스는 운치 있는 폭포를 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으로 유명하고 시장, 주 상원의원, 주 대법관 등 지역 내 정관계 인사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본인을 빈센트 지간테의 사촌이라고 밝힌 사람이 지간테에 대해 짧게 얘기하는 2009년도 영상이 있다. 영상 속 그는 과거 지간테의 사교클럽이었지만 지금은 폐쇄된 트라이앵글 시민개선협회 건물을 방문하고 1980~90년대에 제노비스 패밀리와 지간테가 누렸던 막대한 권력과 부하 조직원들이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어 자신들의 턱을 만졌던 이야기 등을 지인의 입장에서 꽤 실감 나게 얘기하고 있다.
  • 의외로 빈센트 지간테에 대한 이웃 주민들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한 여인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매우 화려한 사람이었어요. 거리에서 지간테와 마주치면 그가 먼저 모자를 기울여 저한테 인사하곤 했지요."라는 증언을 남겼다. 특히 지간테가 소유하고 있던 사교클럽 트라이앵글 시민개선협회를 타인이 인수하여 2011년에 찻집으로 재개장하자 이런 변화를 반기지 않는 주민도 있었다. 뉴욕 포스트와의 인터뷰에 응한 어느 시민은 "원래 그곳은 마피아 영화에서 갓 튀어나온듯한 장소였어요. 이제 바질을 파는 꽃 가게를 보니 좀 우스꽝스럽네요. 저는 그들(마피아들)이 그리워요. 그 사교클럽을 드나들던 건장한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모두 마피아 영화 속 배우 같았죠."라고 증언했다. 관련기사. 실제로 고리대금•도박 등 마피아가 일상적으로 관장하는 범죄 사업이나 그들이 행하는 불법 리베이트•입찰 조작•파업 조종 등은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이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다. 거기다 마피아는 그 나름대로 무분별한 스트리트 범죄를 억제하는 일종의 질서 악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가까운 주민들은 마피아가 진정한 거악이라는 인식을 잘 못하는 편이다.
  • 2011년 취재에 의하면 지간테 가문 구성원들은 빈센트 지간테의 생전 영향력으로 여전히 뉴저지 주 항구의 여러 합법적인 회사에 근무하면서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데, 도합 200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빈센트 지간테의 사위와 조카는 각각 40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으며 지간테 가문 구성원 11명의 평균 연봉은 17만 5천 달러라고 알려졌다.
  • 빈센트 지간테의 1967년생 딸 리타 지간테는 2012년에 대부의 딸: 사랑, 치유, 구원에 관한 뜻밖의 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간테 부녀가 함께 찍은 사진. 리타는 가부장적인 이탈리아계 미국인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어도 자신이 마피아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년 시절 기억 속 선명한 공포의 흔적은 그녀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그 기억은 5살의 리타가 할머니 집 책상 밑에 숨어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녀는 남자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와 누가 폭행당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윽고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폭행당한 남자의 몸이 들려나갈 때까지 딸이 그 방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유년기에 그러한 공포를 경험한 리타는 성장기에 지속적인 불안 증세•우울증•강박장애를 겪었다. 이후 초등학생이 된 그녀는 아버지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이에 리타의 언니는 아버지가 망상형 정신분열증(Paranoid Schizophrenia)을 앓는 환자라고 얘기해 주었다. 시간이 흘러 16살의 리타는 갓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자신을 마피아 공주(Mafia Princess)라고 부르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티나라는 여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참다못한 리타는 그녀를 찾아갔는데, 티나는 얼굴이 예쁘고 워싱 청바지를 입는 걸로 유명한 학교에서 소위 '잘나가는 여학생(Popular Girl)'이었고 당시 2명의 친구와 함께 있었다. 분노한 마피아 두목의 딸을 대면한 티나는 공포에 질렸고 몸이 굳었다. 리타가 티나의 친구들을 향해 화장실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자 그녀들은 티나를 두고 달아났다. 이윽고 리타는 티나의 머리를 화장실 싱크대에 처박고 얼굴을 구타했다. "다신 우리 가족에 대해 얘기하지 마."라고 쏘아붙인 뒤 쓰러져 울고 있는 티나를 걷어찬 리타는 결국 교장실에 불려가 혼이 났지만 그때만 해도 티나가 거짓말을 했거나 정신질환자인 자신의 아버지를 놀린 줄 알았다. 리타는 티나의 피가 옷에 묻었지만 곧장 집에 가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가까웠던 친구 알레산드라의 집을 찾아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리타: 오늘 학교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 우리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어.

알렉산드라: 알고 싶은 게 뭐야?

리타: 우리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지?

알렉산드라: 너희 아버지가 누군지, 손이 어디까지 닿는지 몰라?

리타: 응? 그냥...

알렉산드라: 좋아. (의자를 더 가까이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너 뉴욕의 5대 조직범죄 패밀리를 알아?

리타: 아니.

알렉산드라: 루케시, 제노비스, 감비노, 보난노, 콜롬보... '''내가 듣기로 너희 아버지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야.'''

리타: (입이 벌어지며) 두목?

알렉산드라: 그게 다가 아니야. '''너희 아버지는 1개 패밀리의 두목만이 아니고 위원회의 의장일 거야.'''

리타: 그게 무슨 뜻이야?

알렉산드라: 위원회 의장은 5대 패밀리의 수장이야. 그건 전체 조직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해. 만약 큰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너희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돼. 넌 아무한테도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안 돼. 알겠지?

리타: 우리 아버지는 아픈데 어떻게 그 모든 걸 할 수 있어? 망상과 정신분열증 말이야.

알렉산드라: (한숨을 쉬며 동정 어린 눈으로) 리타, 너희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속이고 있어.

  • 대화를 마친 리타는 그제서야 가문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평상시 아버지에 대한 그녀의 이미지는 하얀 반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식탁에 앉아 시리얼을 먹는 환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버지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범죄조직의 두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의 이상했던 일들이 함께 떠올랐는데, 생각해 보면 리타의 친구들은 결코 집에 놀러 올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전화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타인이 전화기를 사용할 때에도 멀찍이 떨어졌다. 가족들이 자주 시간을 보냈지만 너무 어두웠던 탓에 그녀가 지하감옥(Dungeon)이라 부른 할머니 집안의 커튼은 항상 드리워져있었으며 굳이 아버지가 말을 할 때는 (도청을 경계한 탓에) 반드시 TV나 라디오의 음량을 크게 키웠다. 덩치 큰 남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아버지의 귀에 속삭였고 그들은 아버지를 왕처럼 숭배했다. 특히 아버지와 남자들이 대화 대신 쪽지를 주고받던 모습도 기억났다. 그 밖에 거리에서 아버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공포와 감탄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던 일, 뉴욕 시내 할머니 집 근처 주차요원들이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돈을 받지 않았던 일, 가족 외식 때 예약 없이 레스토랑의 뒷문으로 들어가도 종업원들이 즉시 테이블을 세팅했던 일, 아버지로부터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항상 고무줄로 싸인 지폐 뭉치였던 일 등이 떠올랐다. 특히 유년 시절 동네 불량배가 리타를 부적절하게 건드렸을 때 어머니는 절대로 그 이야기를 아버지한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는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만약 아버지가 알았다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어머니가 잘 알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어쨌든 어렸을 때의 리타는 가족들이 받는 특혜가 단순히 아버지가 아프기 때문에 받는 배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눈에 띄게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어느 순간 막내딸이 자신의 비밀을 알았다는 걸 아버지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산책에 리타를 동참시켰다. 훗날 그녀는 이 시점을 '거대한 연극의 조연배우가 된 순간'으로 묘사했다. 리타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산책에 나설 때면 자동차 안에서 자신들을 몰래 감시하는 FBI 요원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바닥에 두고 걸었고 종종 아버지가 주차 미터기와 대화를 시도할 때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한편, 어린 시절부터 본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그녀는 11살 때 아버지를 뺀 다른 가족들에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고백했다가 분노한 오빠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19살 땐 용기를 내 마피아 두목이자 엄격한 가톨릭 신자인 아버지에게까지 커밍아웃을 했다. 뉴저지 주 자택에서 쉬고 있는 아버지를 본 리타는 "할 말이 있어요.(I need to tell you something.)"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백이 끝나자 아버지는 "이해해, 그건 그저 과정이야.(I understand, it's just a phase.)"라고 얘기하며 자신은 딸의 성적 취향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면서도 의외로 화를 내진 않았다. 훗날 리타가 회고록을 써 가문의 비밀을 출판하려는 점에 대해 오빠들과 이복형제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 아닐 거라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어머니와 언니들이 용기를 줬다. 성공적으로 책을 출간한 그녀는 2013년에 동성 연인과 혼인했다.
  • 리타 지간테는 아버지의 정체를 친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1983년의 감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 같았어요. 저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모자 가게나 과자 가게를 운영한다는 의심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었죠. 사실을 알고 나니 처음엔 아무도 우리 가족을 해코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엔 연방정부가 두려워졌습니다. 마침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는 안도감도 있었죠. 제 아버지 빈센트 지간테는 수십 년 동안 모든 뉴욕 마피아의 우두머리였고 매우 강력하고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전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다 받아들였죠. 그분은 제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우리 부녀는 단 한 번도 그 주제에 대해 대화해본 적 없습니다." 리타 지간테는 2012년에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한 영상을 찍었는데 이때 역시 "빈센트 지간테는 뉴욕 시에서 가장 강력한,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범죄 두목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제 아버지였죠."라고 얘기했다.
  • 리타 지간테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부활절에 거대한 초콜릿 토끼를 사 왔던 일, 수두(Chickenpox)에 걸린 자녀들을 위로하기 위해 살아있는 병아리를 사 왔던 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Jailhouse Rock을 따라 부르며 춤을 추던 모습, 영화 대부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보며 넋을 잃던 모습 같은 자상하고 평범했던 순간들을 꼽았다.[57] 반면 가장 싫어하는 기억으론 아버지가 애인과 두 집 살림을 하며 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던 때를 꼽았다. 그녀는 그 순간을 고통스러운 배신(Painful Betrayal)으로 묘사했다.
  • 리타 지간테의 증언을 통해 빈센트 지간테가 영화 대부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부는 세계 영화사에서 첫손에 꼽는 기념비적인 갱스터 영화라는 것 외에도, 당대 미국 마피아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마피아를 비장하고 낭만적으로 그린 대부가 흥행하면서 마피아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동경은 작품의 유명세와 비례해 상승했고 영화에서 다루는 뉴욕 시의 5대 마피아 패밀리는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처럼 행동하는 조직원들의 수도 늘어갔다. 이러한 변화들은 마피아 조직 입장에서 결코 좋지 않은 현상이었고 실제로 존 고티라는 무비스타 같은 두목이 등장하기도 했다. 반면 지간테의 경우, 그 역시 대부의 작품성에 매료되었을지언정 영화와 실생활을 엄격히 구분했다. 제노비스 패밀리는 지간테 같은 뛰어난 두목이 재직한 덕분에 내부의 기강 해이와 연방정부의 대대적인 기소로 미국 마피아가 큰 타격을 입은 1980~90년대를 거친 21세기에도 조직범죄계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of Organized Crime)로 남아있다. 실제로 뉴욕 주 조직범죄특별수사팀장 조셉 코피는 2001년 인터뷰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의 경우, 우리는 생채기도 내지 못했습니다."라고 시인했다.
  • 리타 지간테는 빈센트 지간테의 1997년 재판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법정에서도 정신질환자 연기를 계속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분은 목욕 가운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들어왔고 우리 자녀들은 방청석에 앉아 있었죠.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저희들을 바라봤는데 마치 '너희들이 보여'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랑해 난 괜찮아' 같은 느낌으로요. 마음이 아팠어요."
  • 2013년 빈센트 지간테가 입었던 목욕 가운이 뉴욕 시에 위치한 미국 폭력배 박물관(The Museum of the American Gangster)에 전시되었다.
  • 2013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제작한 마피아 관련 다큐멘터리에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철저히 숨긴 채 출연한 어느 콜롬보 패밀리 준조직원은 "빈센트 지간테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서 죽일 사람이 없으면 옆에 있는 사람을 죽였다."라고 평했다.
  • 2015년 빈센트 지간테의 아내 올림피아 그리파가 사망했다.
  • 2015년 빈센트 지간테의 손자 필립 지간테가 뉴욕 주에 위치한 소도시 에어몬트의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지간테 가문의 내력을 알았음에도 그에게 투표했다.
  • 2016년 빈센트 지간테를 다룬 전기를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 래리 맥셰인이 집필하여 출간했다.
  • 빈센트 지간테의 사생아 빈센트 에스포지토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관계자로 파악되며 과거 아버지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gif) 되었다.[58] 그는 2018년에 4명의 제노비스 패밀리 정규조직원 및 준 구성원과 함께 노동 공갈 혐의로 기소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FBI가 에스포지토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때 황동 너클, 불법 권총 2정, 현금 380만 달러, 수기로 쓴 마피아 정규조직원 명부가 발견되었다. FBI는 압수수색 때 발견된 현금 380만 달러를 제노비스 패밀리가 운영하는 대부업 자금 및 구금된 조직원들의 변호사 비용과 영치금으로 쓰이는 비자금의 일부로 파악했다. 조직범죄 전문가들은 에스포지토가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고 정규조직원 명부를 소유하고 있으며 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 상담역(Consigliere)의 법정대리인을 위한 자금 지원 방안을 논의해온 점으로 보아 패밀리 간부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59] 당시 검찰 측 공소장엔 에스포지토가 1200만 달러 상당의 연립주택, 500만 달러 상당의 할렘 부동산, 주소를 밝히지 않은 다수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판사는 판결에 앞서, 재판 도중 45명의 지지자가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탄원서를 받은 후 피고인의 열렬한 인물상(Glowing Portrait)을 느꼈지만 피고인이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식품노조로부터 금전을 갈취한 사실이 인정되어 유죄판결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얘기했다.[60] 10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불구속 재판을 받은 에스포지토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현금 380만 달러가 범죄활동으로 얻은 재화임을 인정하고 몰수에 동의한 뒤 2019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여담으로 전 감비노 패밀리 지부장 마이클 디레오나르도는 에스포지토의 집에서 발견된 불법 권총과 어마어마한 액수의 현금을 보고 놀랐다고 밝혔는데, 마피아들은 수색에 대비해 불법 무기나 범죄수익금을 절대로 자택에 보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과거 자신은 유사시 사용할 합법적인 산탄총 한 자루와 외출 시 착용할 시계나 보석을 제외하면 그 어떤 물건도 집에 두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빈센트 지간테의 손자 빈센트 파이프는 다른 지간테 가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1995년에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식품•상업노동자연합(United Food and Commercial Workers 이하 UFCW) 내에서 주류업을 담당하는 간부가 되었다. 6년 뒤 그는 연봉 35만 달러를 받으며 1500여 명의 노조원을 이끄는 지역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한편, 제노비스 패밀리 내 UFCW 갈취 계획의 선두주자로서 매달 노조 간부들에게 상납금을 받는다고 알려진 지부장 존 바르바토는 파이프와 상당히 가까웠는데, 실제로 FBI는 바르바토의 경호원 겸 운전기사인 레이먼드 파팔로가 UFCW 간부 존 파지오와 함께 비밀 회동을 가지는 장면을 여러 차례 포착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이프는 자신보다 고작 6살 많은 삼촌 빈센트 에스포지토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매년 1만 달러의 상납금을 삼촌에게 지급해왔지만 이 상황을 상당히 못마땅해 했고 2015년경에는 상납금을 받으러 온 관계자에게 "(만약 돈을 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나? 총을 맞나? 작업을 당하나?"라고 따져 물었다. 당시 파견된 관계자가 "그들은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끝내 상납금을 받아 갔지만 이 사건 이후 삼촌에 대한 파이프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어느 시점에 범죄행위가 발각된 파이프는 정부 측 정보원이 되었고 2019년에 에스포지토가 노동 공갈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을 때 결정적인 증거와 증언을 제공했다. 물론 당시 파이프의 비위사실도 함께 발각되었기 때문에 그는 노조 지역위원장 직책을 잃었고 향후 노조와 관련된 취업도 제한되었다. 이후 주류 판매로 연간 5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브레이크스루 음료 그룹의 회장 찰스 메리노프가 파이프를 고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61]
  • 빈센트 지간테는 전 감비노 패밀리 부두목 새미 그라바노의 삶을 다룬 1998년 영화 위트니스 맙에서 니콜라스 케프로스가, 존 고티의 삶을 다룬 2018년 영화 고티에서 살 렌디노가, 흑인 범죄조직 두목 범피 존슨의 삶을 다룬 2019년 드라마 갓파더 오브 할렘에서 빈센트 도노프리오가 각각 연기했다.[62]
  • 빈센트 지간테의 형 마리오 지간테와 동생 루이스 지간테는 2020년에도 생존해있다. 두 사람을 찍은 사진. 좌측이 마리오, 우측이 루이스.[63] 85세가 넘도록 정정한 둘의 모습은 생전 심장수술을 여러 차례 한끝에 결국 77세에 사망한 빈센트 지간테와 대비된다.

4. 어록


'''프랭크, 이건 당신을 위한 거야!'''

This is for you, Frank!

뉴욕 루치아노 패밀리(현 제노비스 패밀리) 두목 프랭크 코스텔로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한 말.

'''고마워, 프랭크.'''

Thanks, Frank.

프랭크 코스텔로 살인미수 사건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코스텔로에게 한 말.[64]

'''이번 철야 담판을 살아서 나가면 행운일 거야.'''

Lucky to leave this wake alive.

뉴욕 루케시 패밀리 두목 빅터 아무소와 창문 교체 사업을 논의하는 담판에서 한 말.[65]

'''우리는 지부장들을 정직(停職)시키지 않아, 그들을 죽이지.'''

We don't break our capos, we kill them.

마약 거래 금지라는 마피아 규율을 어긴 다른 패밀리 소속 지부장의 처벌 수위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 말.[66]

'''어느 누구도 날 엿 먹일 수 없소.'''

Nobody fucks with me.

만약 다른 수용자가 당신을 괴롭히면 어떻게 하냐는 교도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


5. 관련 문서



[1] 이는 지간테가 섬유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2] 마피아의 역사를 다룬 국내 모 카페 게시물에서 지간테가 22구경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에 코스텔로의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지간테는 38구경 권총을 사용했다.[3] 사진 속 목도리를 한 인물이 롬바르도.[4] 관련 수사를 진행했던 NYPD의 코피 수사관은 1982년에 자신의 경험과 기록을 바티칸 커넥션: 가톨릭교회와 마피아 사이의 10억 달러 음모 실화라는 책으로 출간해 에드거상을 수상했다. (링크 속 책은 2018년 재판본이다.) 훗날 코피는 뉴욕 주 조직범죄특별수사팀장으로 영전한다.[5]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은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대부 3편 각본에 영감을 제공했다. (영화 속 길데이 대주교 캐릭터의 모티브가 마르친쿠스 대주교다.) 2019년에 본인을 콜롬보 패밀리 조직원 출신으로 소개한 러키 루치아노의 조카 앤서니 레이몬디가 자신이 바티칸은행 내 비리를 밝히려는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를 독살하는 데 가담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말이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6] 브루노 살인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마피아/국가/미국 문서의 필립 롬바르도 항목 참고.[7] 부두목 산토라는 1987년에 사망하여 베네로 망가노(Venero Mangano)가 그 뒤를 이었다. 상담역 만나는 1989년에 2건의 살인 공모와 공갈 혐의로 8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제임스 아이다(James Ida)가 그 뒤를 이었다. 아이다 역시 여러 살인 혐의로 1997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아 그 뒤를 로렌스 덴티코(Lawrence Dentico)가 이었다.[마리오_지간테] 1950년대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정규조직원이 된 마리오 지간테(Mario Gigante)는 암흑가에서 일명 그림자(The Shadow)로 불렸다. 그는 1970년대에 연간 110만 보루 이상의 담배를 밀수했다거나 연간 5000만 달러 규모의 스포츠 도박 사업을 운영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지만 승소했다. 뉴저지 주의 폐기물처리업계에 깊이 관여한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지부장이 되었고 1981년에 동생이 두목이 되자 조직 내 최고 소득자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1983년에 대규모 대부업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징역 8년을 선고받는데, 이후 공화당 소속 연방상원의원 알 다마토(Al D'Amato)가 형량을 줄이기 위해 루돌프 줄리아니 연방검사에게 로비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1989년에 마리오 지간테의 형량은 6년으로 감형되었다. 훗날 마피아 변절자 빈센트 카파로의 증언으로 로비 혐의를 조사했으나 정식 기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빈센트 지간테는 형제들 중 마리오 지간테를 가장 신뢰했고 훗날 부재중인 자신을 대신해 패밀리 사업을 감독하는 두목 대행(Acting Boss)직을 맡긴다.[8] 파스칼레 지간테는 1983년, 랄프 지간테는 1994년에 사망한다. 특히 랄프 지간테는 14전 9승 3패 2무의 전적을 가진 웰터급 권투 선수 출신이다. 빈센트 지간테와 랄프 지간테가 함께 찍힌 FBI 감시 사진.[9] 상술한 1970년대 바티칸은행 비리 의혹에 제노비스 패밀리가 개입한 게 사실이라면 당시 두목 필립 롬바르도의 입장에선 성직자 동생이 있는 빈센트 지간테에게 사업을 맡기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고 빈센트 지간테 역시 사업을 함에 있어 동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10] 루이스 지간테와 SEBCO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문서 하단 여담 참고.[11] 사진 속 담배를 문 인물이 피콜로.[12] 건설 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다 FBI 도청기에 포착된 콜롬보 패밀리 행동대원 조셉 고르곤은 만약 지간테가 기소될 경우 그 대가로 살해될 것이란 경고를 받았고 슬롯머신 매매 과정에서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한 루케시 패밀리 준조직원 조 피오레는 그 대가로 3명의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다.[13] 롬바르도 역시 위원회 회합에 본인 대신 거리 책임자를 참석시키곤 했다.[14] 카파로는 "살레르노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이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라고 밝혔다.[15] 보고서를 작성한 워튼경제연구소는 고리대금•도박•매춘•마약 유통 같은 전통적인 범죄 사업만 계산했고 합법적인 사업에서의 조직범죄 활동은 제외했다.[16] 이 보고서가 나오기 20여 년 전인 1960년대 정부 분석에선 (다른 범죄조직을 제외한) 미국 내 20여 개 마피아 패밀리의 연간 총수익을 70억 달러로 추산했다.[페데리코_지오바넬리] 제노비스 패밀리의 실력자였던 지오바넬리는 1982년에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의 접선 장소를 FBI가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수사에 큰 혼선을 주었다. 또 1986년에 자신을 미행하는 NYPD 소속 수사관 앤서니 벤디티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2005년엔 1999년에 뉴저지 주를 기반으로 한 데카발칸테 패밀리의 일부 조직원이 기소될 거라는 연방검찰의 내부 정보를 빼돌린 혐의가 인정되어 범행 6년 만에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형기를 복역한 뒤 출소했고 2018년에 사망했다. 연방정부는 마피아였던 지오바넬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내부 정보를 알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끝내 밝히지 못했다.[미드_에스포지토] 에스포지토는 당대 뉴욕 시의 그림자 시장(Shadow Mayor), 언론 부호들의 힘으로 법원을 장악한 중세 국왕(Medieval King holding court with his barons by sections of the press),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 중 한 명(One of the finest leaders in the country) 같은 수식어가 붙을 정도의 정계 거물이었다. 그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지오바넬리 외에도 감비노 패밀리 지부장 앤서니 스코토(Anthony Scotto), 루케시 패밀리 고위 간부 폴 바라오(Paul Vario) 같은 유력 마피아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에스포지토는 암흑가 스타일의 사람 관리, 협박 전술, 조직범죄와의 연관성 등으로 주위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았다.[17] 교도소행을 피한 에스포지토는 1993년에 사망했다. 반면 임기 2년인 연방하원의원직을 19년째 지켜오던 비아지는 이 사건으로 공직을 내려놓아야 했고 약 3년간 수감되기까지 했다. 그는 2015년에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었지만 2019년에 손녀가 뉴욕주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18] 당시 루케시 패밀리 두목 앤서니 코랄로가 지간테와 함께 고티 암살 계획을 논의했다.[프랭크_데치코_살인사건] 보통 미국 마피아는 작업에 총을 사용한다. 폭탄을 사용할 경우 수사기관과 대중, 언론의 관심을 불러오는 데다 자칫 일반인이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고 치밀한 성격으로 유명한 지간테가 폭탄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부터 위원회에 대항한 고티를 일종의 본보기로 삼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간테의 의지는 미국 마피아 역사에서 가장 소름 끼치고 폭발적인 암살로 이어졌다. 사건 당일 제노비스 패밀리 암살자는 데치코가 차명(借名)으로 타고 다닌 뷰익 엘렉트라 하부에 폭탄을 설치한 뒤 근처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자동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원래 고티와 데치코는 같은 차량에 타기로 되어 있었으나 계획이 변경되면서 루케시 패밀리 행동대원 프랭크 벨리노가 데치코와 함께 사교클럽을 나왔다. 기폭장치를 들고 사교클럽 앞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암살자는 벨리노를 고티로 착각했고 데치코가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폭탄을 폭발시켰다. 이윽고 충격과 굉음이 울리며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당시 사교클럽 안에 있던 50~60명의 감비노 패밀리 조직원은 폭발 소리를 듣자마자 모두 뛰쳐나왔지만 '''데치코는 즉사했고 벨리노는 3도 화상에 왼쪽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사건을 다룬 기사. 당시 마피아의 보복이 두려워 익명을 요구한 부상당한 어느 행인은 "집이 흔들렸다."라고 폭발 상황을 묘사했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감비노 패밀리 소속 새미 그라바노(Sammy Gravano)는 훗날 끔찍했던 폭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 “난 데치코가 땅바닥에 누워 있는 걸 봤다. 자동차가 다시 폭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를 끌어내려 했다. 내가 다리를 잡고 끌어당겼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보니 다리가 절단되어 있었고 한쪽 팔도 잘려 있었다. (데치코를 들기 위해) 밑으로 손을 넣자 내 손이 피부를 뚫고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엉덩이와 모든 것이 사라져있었다. 나는 흰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피가 하나도 묻지 않았다. 폭발의 위력이 데치코 몸속의 모든 액체를 증발시켰기 때문이다." 훗날 정부 측 증인이 된 루케시 패밀리 부두목 앤서니 카소(Anthony Casso)는 1997년 인터뷰에서 “제노비스 패밀리 준조직원 허버트 페이트가 고티와 데치코를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터트렸다.”라고 증언했다. 카소는 페이트가 암살자로 선택된 이유는 감비노 패밀리와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이고 총이 아닌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감비노 패밀리로 하여금 시칠리아 마피아의 소행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실제로 사건 발생 직후 그라바노는 공격의 배후로 지간테를 지목했지만 고티가 "아니야, 턱(지간테)은 폭탄을 사용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그라바노의 말을 부정했다고 한다. (이때 데치코가 사망하면서 훗날 그라바노가 부두목이 된다.) 한편, 유력한 용의자인 페이트는 데치코 사건을 전후로 재판이 진행 중이었고 사기•탈세•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었다. 그는 약 10년의 복역을 마치고 1996년에 출소했고 데치코 살인 혐의로는 결코 기소되지 않았다.[19] 문서 하단 여담 참고.[20] 이 시기 유명 변호사 살바토레 아베나는 제노비스 패밀리의 동업자이자 독자적으로 1억 달러 규모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폐기물처리업계의 거물 카마인 팔코네(Carmine Franco)와 분쟁이 있어 그를 고소했다. 이후 아베나의 사돈인 콜롬보 패밀리 지부장 살바토레 프로파치가 찾아와 고소 취하를 종용하며 "우리 모두 다칠 겁니다, 제노비스 패밀리는 너무 강력해서 거스를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 육성이 도청기에 포착되었다. 같은 대화에서 프로파치는 뉴욕의 두목들이 법정이 아닌 '명예의 법정'에서 갈등을 해결하길 원하며 팔코네가 제노비스 패밀리의 최고 소득자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이에 아베나는 금전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 고소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에 대해 항변했지만 프로파치가 '''"마피아는 마피아를 고소하지 않습니다. 마피아는 마피아를 죽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안 가 고소는 취하되었고 아베나와 팔코네는 법정 밖에서 합의를 보았다.[존_디질리오_살인사건] 1988년 38전 28승 10패 9KO의 전적을 가진 웰터급•라이트급 권투 선수 출신의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디질리오가 5발의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뉴욕 주뉴저지 주에 걸쳐 있는 해컨색강에서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직후엔 범인이 검거되지 않았지만 사법당국의 수사는 계속되었다. 결국 10년이 지난 1998년에 이미 다른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루이스 오리키오가 상부의 지시를 받고 직속 지부장 디질리오를 살해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영화 대부파울리 가또 처형 장면처럼 자동차 뒷좌석에서 앞좌석에 앉은 디질리오의 머리를 쏘았다고 밝혔다. 오리키오는 16년이 넘는 복역을 마치고 2010년에 출소했고 지부장 대행을 맡는 등 조직 생활을 이어가다 2021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오리키오는 제109대 뉴저지주상원의장 존 A. 린치 주니어의 처남이었다.[안젤로_상지올로_살인사건] 제노비스 패밀리 준조직원 상지올로 처형은 그의 사촌이자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인 안젤로 프리스코(Angelo Prisco)가 주도했다. 1992년 프리스코의 부하들은 브롱스에 있는 사교클럽으로 상지올로를 유인한 뒤 살해했다. 프리스코는 1998년에 방화 혐의를 인정하여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2002년에 가석방되었다. 당시 가석방위원회 의장은 제52대 뉴저지 주 주지사 짐 맥그리비(Jim McGreevey)의 보좌관이 프리스코의 가석방을 요청했다고 폭로했다. 주지사와 보좌관은 즉각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주 검찰총장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정식 기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프리스코는 상지올로가 살해되고 17년이 지난 2009년에 상지올로 살인 및 다수의 범죄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2017년에 플로리다 주 콜먼 교도소에서 사망했다.[21] 뒷모습 인물은 신원을 알 수 없고 제일 오른쪽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비토 팔미에리다. 사법당국에 따르면 팔미에리는 지간테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이자 그의 경호원 겸 운전기사였으며 평소에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지간테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었다고 한다. 지간테를 수행하는 팔미에리.[22] 이 녹취는 미래에 있을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된다.[23] 사비노의 아내를 협박하고 자동차에 폭탄을 설치한 범인들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다.[베네로_망가노의_대리인] 망가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마이클 제네로소(Michael Generoso)가 부두목 대행을 맡았다. 그는 러키 루치아노 시대 때 패밀리에 입단한 뒤 한평생을 마피아로 살았는데, 1997년과 1998년에 공갈 혐의로 약 15개월 동안 복역한 걸 제외하면 별다른 수감 기록이 없다. (망가노는 제네로소의 공백기 동안 조셉 지토(Joseph Zito)에게 부두목 대행을 맡기며 앞으론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제네로소와 거리 책임자(Street Boss) 리보리오 벨로모가 함께 찍힌 FBI 감시 사진과 제네로소와 다른 조직원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 두 번째 사진에서 제네로소 옆에 앉아있는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앤서니 페데리치(Anthony Federici)다. 제네로소는 2006년에 망가노가 출소한 후에도 패밀리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다 2015년에 사망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미국 마피아 권력의 핵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망을 잘 피했기 때문에 '''뉴욕의 숨겨진 대부'''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여담으로 제네로소의 외손녀 장 마리 그라지아노는 변호사가 되었다.[24] 첫 번째 심장수술은 1988년에 있었다.[25] 정확히 연방검사에게 '''"뭘 원해? 차라리 날 총으로 쏴! 어떤 심문에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수작들은 이제 지겨워.(What do you want to do? shoot me! but I'm not going to answer any questions. I'm tired of these charades.)"'''라고 얘기했다.[26] 레오네티가 증언한 희생자 중엔 상술한 안토니오 카포니그로(Antonio Caponigro)와 프랭크 신돈(Frank Sindone)이 포함되어 있다.[27] 한국과 달리 미국의 사법 제도는 선시제도와 감형 등 징역형 집행방식의 변경이 흔한 편이라 선고 형량 보다 적은 형기를 복역하는 경우가 많다.[앤드루_와이스먼] 건강이 좋지 않아 1994년에 은퇴한 로즈의 뒤를 이어 지간테 재판의 검찰 측 대표를 맡은 앤드루 와이스먼(Andrew Weissmann) 연방검사는 2002년 엔론 사태 수사팀장을 맡아 성공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등 공직 세계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는 2011년에 FBI 법무자문위원(General Counse)을 맡았고 2015년에 법무부 범죄사기국장을 맡았으며 2017년엔 러시아 게이트를 수사하는 로버트 뮬러 특검에 2인자로 합류했다. (와이스먼의 선배인 뮬러는 1992년에 존 고티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냈고 약 12년 동안 FBI 국장을 지냈다.) 특검팀에서 활약한 와이스먼은 한번 물면 놓지 않는 '뮬러의 핏불'이란 평가를 받았다. 2019년 법무부 국장직을 끝으로 민간으로 돌아간 그는 뉴욕 대학교에서 공익사업을 할 것이란 추측이 있었지만 MSNBC 방송사에 법률고문으로 취직했다.[28] 연방의료센터에서 복역한 지간테의 수감생활은 1992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대부분의 형기를 일리노이 주의 슈퍼맥스급 교도소에서 복역한 존 고티와 비교된다. 고티 역시 교도소에서 대리인을 통해 패밀리를 운영했지만 그는 법원 명령으로 하루 23시간 독방 감금 등 유독 엄격한 처우 제한을 받아야 했다. 고티가 수감되었던 마리온 교도소는 그가 사망한 뒤인 2006년에 중간 계호급 교도소(Medium-Security Prison)로 하향 조정되었지만 여전히 중경비시설로 분류되는 곳이다.[29] 본방송은 1998년 11월 3일에 방영되었지만 링크 속 영상은 2003년 이야기가 추가된 편집본이다.[빈센트_지간테의_대리인들] 1997~98년: 도미닉 시릴로(Dominick Cirillo)→1998~2005년: 매튜 이아니엘로(Matthew Ianniello)→2005년~: 다니엘 레오(Daniel Leo) 일반적으로 영문 위키피디아를 포함해서 이렇게 알려져 있지만 2004년 뉴저지 주 조사위원회(State of New Jersey Commission of Investigation)는 빈센트 지간테가 수감된 이래 일상적으로 제노비스 패밀리의 사업을 감독해온 두목 대행(Acting Boss)으로 그의 형 마리오 지간테(Mario Gigante)와 패밀리의 상담역(Consigliere) 로렌스 덴티코(Lawrence Dentico)를 지목했다. 조사위원회는 특별히 마리오 지간테를 조직의 관리인(Caretaker)으로 묘사했다. 2003년에 정부 측 증인이 된 보난노 패밀리 부두목 살바토레 비탈레는 2000년 마피아 위원회 회합에서 제노비스 패밀리를 대표해 참석했던 인물이 덴티코였다고 밝혔다. 한편, 2005년 어느 수사기관 관계자는 1997년에 공갈•갈취죄로 수감된 뒤 약 4년의 복역을 마치고 2001년에 출소한 마리오 지간테를 제노비스 패밀리의 두목 대행으로 지목하며 '''“그는 빈센트 지간테와 혈연이라는 점 만으로도 자신의 권리를 가진 폭력배입니다.(Mario is gangster in his own right. He’s Chin’s blood-family connection.)”'''라고 설명했다. 덴티코의 경우 뉴욕 주 조직범죄특별수사팀장 조셉 코피에 의해 ''''고전적이고 품위 있는 최고의 폭력배(He is an old-line, classy, top-shelf gangster)''''로 묘사된 적 있다. 종합하면 1997~2001년 까지는 시릴로나 덴티코 같은 측근들이 두목 대행을 맡았고 2001년부터는 형 마리오 지간테가 두목 대행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30] 여러 마피아 조직원이 오메르타를 지키기 위해 정부로부터 요구받은 대배심 증언을 거부하여 1~3년의 징역형을 감내하는 마당에 어느 마피아가 다른 마피아에게 자신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결백을 밝혀달라고 요청하는 건 충분히 처형 사유가 된다.[31] 당시 롱고가 빈센트 지간테의 이름을 언급하면 안 된다는 패밀리의 금기를 어긴 것이다. 같은 대화에서 롱고는 두목 대행 로렌스 덴티코가 빈센트 지간테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언급함과 동시에 제노비스 패밀리엔 30~40명의 해결사가 있어 다른 조직과의 전면전이 일어나도 가장 강력한 패밀리라고 발언했다. 여담으로 롱고는 207cm의 키에 몸무게가 145kg이 나가는 거구로 알려져 있다.[32] 즉, 마피아 세계에서 선반 위에 올리는 것은 정직(停職)을 뜻한다.[33] 소망대로 바론은 2010년에 자연사했다. 국내 제도권 언론사 중엔 경향신문에서 「마피아 최고의 살인자 조지 바론, 86세로 자연사」라는 제목으로 사망 소식을 전했다.[34] 1945년에 제노비스 패밀리와 감비노 패밀리가 20여 개의 사업체를 규합하여 만든 MMMCA는 국제항만노동자협회(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와 함께 모든 노사 간 단체협상을 담당하고 수억 달러에 달하는 항운노조원들의 임금과 연금을 공동으로 관리한다. (2019년 기준) MMMCA는 1300만 달러 상당의 자산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2010년대에 제노비스 패밀리의 거리 책임자(Street Boss)로 확인된 마이클 라구사(Michael Ragusa)의 형제 조셉 라구사(Joseph Ragusa)가 협회장을 맡고 있는 등 조직범죄(특히 제노비스 패밀리)의 영향력이 여전하다.[35] 브리프만 변호사는 마피아 두목 빈센트 지간테 외에도 가수 마이클 잭슨, IMF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백악관 선임고문 재러드 쿠슈너의 아버지 찰스 쿠슈너, 래퍼 퍼프 대디, 뉴욕주상원의원 칼 크루거 같은 유명 인사들을 변호한 인물이다.[36] 훗날 처형된 리치의 뒤를 이어 사업을 관장하게 된 인물은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스티븐 데피로로 밝혀졌다.[로렌스_리치_살인사건] 리치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는 제노비스 패밀리 행동대원 마이클 코폴라(Michael Coppola)다. 젊은 시절 악명 높은 제노비스 패밀리 작업조 주먹(The Fist)에 속해있던 그는 수많은 살인과 방화와 폭행을 저질렀으며 지도력을 인정받아 지부장 대행을 맡기도 했다. 코폴라는 1996년에 상부의 지시를 받고 마피아 조직원 존 래디에를 살해한 혐의로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았다. 쫓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내와 함께 도주했고 약 11년 동안 지명수배를 피했다. 수사기관은 네바다 주, 펜실베이니아 주, 플로리다 주, 캐나다, 이탈리아, 코스타리카에서 수색 작전을 펼쳤음에도 코폴라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지명수배자 신분에도 불구하고 샌프란시스코뉴욕 시를 오가며 지속적으로 패밀리 사업에 관여했는데, 2005년엔 직속 지부장 티노 피우마라(Tino Fiumara)의 지시를 받고 리치 살인 작업에 가담했다고 추정된다. 결국 2007년 뉴욕 시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검거된 코폴라는 재판에 넘겨졌지만 1996년 래디에 살인사건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고 2005년 리치 살인사건도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불기소처분이 내려졌다. 하지만 지명수배 기간 동안의 갈취•신분증 위조 등 다른 혐의들이 유죄로 인정되어 법정 최고형에 가까운 도합 19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자신의 형량을 듣고도 보호관찰을 선고받은 아내에게 "괜찮아.(It's O.K.)"라고 위로했다. 장기 징역형에 직면했지만 오메르타를 지키며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은 코폴라는 2024년에 77세로 출소할 예정이다. 법망을 피한 그의 지부장 피우마라는 2010년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피우마라의 조카는 제55대 뉴저지 주 주지사이자 2016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연방검사 출신 정치인 크리스 크리스티다.[37] 지간테가 사망한 스프링필드 연방수용자 의료센터는 그의 후견인 비토 제노비스와 라이벌 존 고티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38] 당시 지간테의 유족들은 연방수용자 의료센터의 치료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당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39] 가톨릭 뉴욕 대교구폴 카스텔라노, 존 고티, 프랭크 데치코 같은 다른 마피아들의 장례미사는 불허했지만 빈센트 지간테에겐 허용했다.[40] 당시 덴티코가 상담역에서 물러나고 시릴로가 상담역이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시릴로 역시 몇 년 뒤 피터 디키아라(Peter DiChiara)에게 자리를 물려준다.[41] 빈센트 지간테 사후 고위 간부들의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던 제노비스 패밀리가 벨로모를 공식적인 두목으로 추대한 시점은 2010년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부두목 망가노 역시 강력한 두목 후보였고 수감 중에도, 출소 후에도 변함없는 맨해튼 조직의 책임자였지만 고령의 나이와 건강 문제 탓에 스스로 두목 자리를 고사한 것으로 보인다. 패밀리의 원로가 된 망가노는 2017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뉴욕 마피아의 수뇌부를 다룬 몇몇 기사에서 언급되었지만 큰 뉴스엔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고 기소되거나 수감되지도 않았다. 2019년에 발표된 연방정부 문서를 보면 망가노가 사망한 뒤 부두목 자리를 어니스트 무스카렐라(Ernest Muscarella)가 이었음을 알 수 있다.[42] 공교롭게도 지간테의 아내와 애인의 이름이 모두 올림피아로 똑같다.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가 아내와 애인의 이름을 혼동하여 잘못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다.[43] 어퍼이스트사이드는 이방카 트럼프가 졸업한 채핀 스쿨(Chapin School)이 소재한 곳이며 캘리포니아 주의 부촌 베벌리힐스 보다 땅값이 더 비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모리스_레비] 지간테 같은 거물급 마피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지적된 레비는 90개 이상의 회사와 9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렸던 인물이다. 그런 그를 빌보드지에선 음반업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화려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버라이어티지에선 그의 광범위한 산업 통제력을 일컬어 문어(The Octopus)로, 올뮤직 가이드에선 예술가들에게 로열티를 사취한 악명 높은 사기꾼으로 각각 묘사했다. 훗날 FBI의 음악 산업 내 조직범죄의 역할에 대한 수사 대상이 된 그는 유죄판결을 받지만 수감되기 2달 전인 1990년 5월에 암으로 사망했다.[44] 지간테는 사교클럽 외부에서 내부를 일절 볼 수 없게 창문을 온통 검은색으로 만들었다.[45] 2라고 표시되어 있는 인물이 지간테.[46] 뉴욕 마피아 세계에선 가족들이 보는 앞이나 거주하는 집 앞에서만큼은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의 경호는 비교적 신경을 덜 쓴다.[47] 아마 지간테의 두 집 살림을 겨냥한 말이었을 것이다. 상술했듯 이탈리아계 마피아 패밀리는 조직원의 두 집 살림을 금지하지만 지간테에겐 그러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았다.[48] 실제로 SEBCO는 뉴욕 시와 뉴저지 주 일대에 다수의 세탁소를 운영한다. 잘 알려져 있듯 세탁소는 직업 범죄인들이 아주 선호하는 돈세탁 사업이다.[49] 언급된 것만 더해도 약 2억 달러가 나온다.[50] 이 부분만 보고 오코너 추기경을 부패한 성직자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는 수많은 성범죄를 저지른 시어도어 매캐릭 신부의 악행을 규탄하는 서한(오코너 서한)을 교황청에 보낸 최초의 고위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모두가 “확실하지 않다”, “근거 없다" 그러나, 남달랐던 한명의 추기경 기사 참고.[51] 1997년 어느 광인이 센트리 보안회사 소속 경비원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60세 할머니와 9살 손녀가 사는 아파트에 침입했다. 그 광인은 자신이 HIV 감염자이며 두 사람에게 병을 옮기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할머니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마피아 보안회사의 경비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1시간 넘게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다행히 이웃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고 별다른 인명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훗날 지간테 신부는 그나마 있던 보안인력마저 없앴는데, 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세상에 돈을 내지 않고 받는 서비스는 없소."라고 답했다. 이후 지간테 신부는 보안회사를 철저히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체로 바꿨다.[52] 뉴욕 대학교 부동산학과,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경영학과에서 학업을 마친 살바토레 지간테는 센트리 보안회사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맡는 등 형 앤드루 지간테와 달리 직접적인 마피아 사업과 거리를 두고 합법적인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53] 상술한 이야기를 종합하면 지간테 신부는 마피아와 결탁한 성직자이면서 부동산업계과 관련된 인물로 정의 내릴 수 있는데,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대부 3편의 길데이 대주교 캐릭터와 상당히 유사하다.[빈센트_디나폴리] 제노비스 패밀리 지부장 빈센트 디나폴리(Vincent DiNapoli)는 지간테 신부와 함께 1970~80년대 조직의 건설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결국 노동 공갈•건설 입찰 조작•갈취•도박업•살인 공모 등의 혐의로 기소된 그는 1988년에 징역 24년을 선고받고 코네티컷 주에 위치한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교정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로렌스 웨커가 정기적으로 디나폴리를 접견했고 다른 루케시 패밀리 조직원도 디나폴리와 함께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16개월간 35번 넘게 연방교도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이후 1991년 항소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뒤집혔고 디나폴리는 곧 석방되었다. 출소 후에도 조직 생활을 이어간 그는 2005년에 사망했다.[54] 마피아/기타 문서 참고.[55] 둘 다 고위 간부로 추정된다.[56] 2000년대 후반 일 물리노의 원래 주인들은 상표명과 함께 레스토랑을 팔았다. 새로운 주인들은 본점을 포함해 10개가 넘는 가맹을 보유한 레스토랑 체인으로 일 물리노를 발전시켰다.[57] Jailhouse Rock의 가사는 교도소 파티 이야기고 대부는 마피아 영화다. 즉, 빈센트 지간테가 특히 좋아할 만한 대중예술인 셈. 여담으로 Jailhouse Rock의 뮤직비디오(44초 부터)를 보면 빈센트 지간테가 어떤 식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을 췄을지 상상할 수 있다. 리타 지간테에 의하면 아버지는 제대로 된 노래를 단 1소절도 못 불렀지만 최대한 원곡을 흉내 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58] 지간테를 오른쪽에서 수행하며 링컨 타운카에 탑승하는 걸 돕는 인물이 에스포지토.[59] 수감 중인 전 상담역은 루이스 만나(Louis Manna) 혹은 제임스 아이다(James Ida) 둘 중 하나로 추정된다.[60] 이 사건에서 제노비스 패밀리와 연관된 노조는 (2013년 기준) 127만 4156명의 조합원을 보유한 식품•상업노동자연합(United Food and Commercial Workers 이하 UFCW)이다. 지미 호파가 위원장이었던 전미트럭운송조합이 (2020년 기준) 약 250만 명의 조합원을 보유하고 있다. 즉, UFCW도 전미트럭운송조합 못지않은 거대 노조인 셈이다.[61] 이러한 결정의 배경은 과거 메리노프가 지간테나 지간테 가문으로부터 받은 어떠한 은혜를 갚기 위함일 수도 있고 파이프의 마피아 연줄과 노조 지역위원장 이력이 자신의 주류사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62] 갓파더 오브 할렘은 주인공 존슨과 프랭크 코스텔로를 우호관계로 묘사하는 데 비해, 존슨과 지간테는 적대관계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론 둘 사이에 어떠한 불화도 없었다. 오히려 존슨은 모든 이탈리아계 마피아와 두루두루 가까운 동업자였다. 전 콜롬보 패밀리 지부장 마이클 프란지스(Michael Franzese)는 드라마 내용의 90%가 허구라고 지적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일부 예외 사례가 존재하긴 하지만 모든 마피아 패밀리는 정규조직원의 일상적인 마약 거래를 금지하며 지간테가 마약 유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드라마 속 설정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다.[63] 사진을 찍은 장소는 뉴욕 주에 위치한 지간테 레스토랑 & 바(Gigante Restaurant & Bar)이다. 이 레스토랑은 지간테 가문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의 요리를 책임지는 셰프한국계 미국인 사무엘 킴(Samuel Kim)이다.[64] 당시 피해자로 법정에 선 코스텔로는 지간테가 자신을 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65] 당시 아무소의 옆엔 돌처럼 차가운 암살자(Stone Killer) 2명이 있었지만 그들도 지간테의 엄포를 듣고 전율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담판 이후 루케시 패밀리는 창문 교체 사업 이권을 양보했다.[66] 규율을 어긴 지부장은 1986년에 마약 유통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루케시 패밀리 소속 조셉 디팔레르모(Joseph Di Palermo)다. 당시 처벌 수위를 놓고 함께 논의하던 다른 고위 마피아들은 지간테의 섬뜩한 발언을 듣고 일순간 침묵했다고 한다. 하지만 디팔레르모는 이미 고령의 나이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기 때문에 강등 혹은 정직 처분을 받았고 1992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