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마데로

 


'''멕시코 제33대 대통령
프란시스코 이그나시오 마데로 곤살레스
Francisco Ignacio Madero González
'''
[image]
'''출생일'''
1873년 10월 30일
'''출생지'''
코아우일라 주 파라스 데 라 푸엔테
'''사망일'''
1913년 2월 22일 (향년 39세)
'''사망지'''
멕시코 시티
'''신장'''
157cm[1]
'''국적'''
멕시코
'''임기'''
1911년 ~ 1913년 2월 22일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 취임까지
2.2. 대통령 마데로
2.3. 비극의 열흘
3. 참고자료
4. 여담

[clearfix]

1. 개요


멕시코의 33대 대통령이다.

2. 생애



2.1. 대통령 취임까지


코아우일라 주 출신이며 1900년대 말에 포르피리오 디아스 세력의 대항마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멕시코는 전직 대통령이던 디아스 세력(Porfiriato)이 1870년대부터 30년 넘게 과두체제로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마데로는 이런 정국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1910년에는 디아스의 상대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대선 기간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마데로는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발표하며 혁명을 호소했고, 국내에 남은 반디아스 진영은 디아스의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궐기하면서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군을 당해내지 못한 디아스는 마데로와 시우다드후아레스 조약을 맺고 대통령 직위를 포기한 뒤 프랑스로 망명했다. 마데로는 프란시스코 데라바라(Francisco León de la Barra)가 5달 동안 권한대행을 맡은 후 다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마데로


하지만 대통령 마데로의 기반은 매우 불안했다. 20세기 초 멕시코는 디아스 때 막 공업화가 시작된 농업국가였고 인구 대부분이 아시엔다(Hacienda, 대농장)에 묶인 소작농이었기에 에밀리아노 사파타판초 비야처럼 소작농 출신 혁명가와 농민들은 토지개혁 추진을 희망했다. 그러나 대지주 가문 출신이었던 마데로는 토지개혁에 소극적이어서 농민들의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디아스 체제의 지지기반인 군부, 대농장주, 교회, 기업가 등은 마데로를 찬탈자로 여겨 마찬가지로 불만을 품었고, 전국에서 저마다 여러 이유로 마데로에게 반기를 드는 군벌들 때문에 멕시코는 혼란에 빠졌다.

2.3. 비극의 열흘


마데로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을 중용하며 반란군 토벌을 명했으나 실수였다. 우에르타는 마누엘 몬드라곤, 펠릭스 디아스(디아스 대통령의 조카), 헨리 윌슨(주멕시코 미국 대사)과 대사관 협약(Pacto de la Embajada)을 맺고 공모 후 반란군과 내통했던 것이다. 결국 마데로는 우에르타와 반란군 일당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감옥에서 부통령 수아레스, 동생 구스타보[2]와 함께 살해당하며 목숨과 대통령 지위를 모두 빼앗겼다. 이 사건은 멕시코에서 비극의 열흘(La Decena Trágica)로 부른다.
우에르타는 디아스 체제로의 복고 정책을 펼쳤으나, 마데로를 살해한 것에 반발한 혁명 세력은 코아우일라 주지사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를 맹주로 추대해 우에르타와 맞서게 된다.

3. 참고자료


  • 백종국, <멕시코 혁명사>, 한길사(2005)

4. 여담


  • 키가 157cm로 베니토 후아레스(137cm)에 이어 역대 멕시코 대통령 중 가장 작은 대통령 2위다.
[image]

[1] 베니토 후아레스(137cm)에 이어 멕시코 대통령 중 가장 작은 대통령 2위다.[2] 마데로가 거병했을 때 미국에 파견된 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