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키투스(황제)

 


[image]
'''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Marcus Claudius Tacitus)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가족'''
이름 미상의 부인과 여러 명의 자녀
'''형제자매'''
플로리아누스(이부동생)
'''출생'''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인테람나[1] or 도나우 강 인근 속주
'''생몰 년도'''
200년 ~ 276년
'''재위 기간'''
275년 ~ 276년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2. 황제
2.2.1. 즉위
2.2.2. 전쟁과 사망
3. 평가
4. 여담


1. 소개


로마제국의 황제. 즉위 전 이름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개인비서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된 뒤, 무려 2개월이 지난 후 군대의 요청에 따라 원로원의 선출로 즉위했다. 군의 요청과 원로원의 선출로 즉위한 황제인데다 온화한 성품과 검약한 성품 탓에 군인황제시대 황제 중 자연사한 황제이기도 하다[2].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200년경 태어났으며 고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오늘날까지도 엇갈린다.고대 기록에 따르면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도시 인테람나(오늘날의 테르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학자 중 스카레 등은 그가 도나우 강일대의 속주에서 태어난 로마인이라고 말한다.
고향도 불분명하고, 아내와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음에도 그 이름이나 행적은 알려지지 않다. 아울러 사생활과 달리 즉위 전까지 경력들도 크게 알려진 게 없어서 황제로 즉위한 사람임에도 75살 이전까지 어떤 경력을 쌓고 즉위했는지 수수께끼라고 한다. 그러나 명문귀족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집안의 후손이거나 역사가 타키투스의 먼 후손, 또는 원로원 계급이나 기사계급 출신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일단 타키투스 황제는 이런 출신들과 달리 미궁의 경력에 세베루스 왕조가 나름 안정적인 시대에 태어났던 사람임에도, 273년 늦은 나이에 집정관을 생애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한다[3]. 그럼에도 그는 즉위 당시 개인재산이 거의 3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부자 원로원 의원이었고, 이탈리아에 부유한 저택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볼때 타키투스는 설령 도나우 강 일대 속주에서 태어났음에도 이 당시 괜찮은 경력을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그와 그의 이부동생 플로리아누스가 도나우 일대 군인 황제들과 연계된 사람이고 허수아비 황제여도 나름 군을 통제한 것을 볼때, 그가 최소한 군업무와 관계된 일을 오랫동안 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따라서 학자들에게 이 사람의 고향이 어디인지 엇갈리더라도, 타키투스는 이탈리아 또는 속주 태생이어도 군사 업무를 오랫동안 맡은 원로원 의원 내지 군단장급을 경험하면서 군부를 알고 있던 퇴역장군 출신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2.2. 황제



2.2.1. 즉위


타키투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시대 당시, 원로원 의원 중 중진이며 평이 상당히 좋았다고 하며 실제로도 검소하고 온화한 성격에 밭에서 기른 상추 같은 농작물을 즐겨했다고 한다. 또 유리 제품을 유독 좋아했는데, 그럼에도 겉치레를 싫어하고 절제된 생활 속에서도 교양도 풍부해 이 부분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이후, 아우렐리아누스의 후임 황제로 원로원에 선출됐다. 하지만 즉위 당시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4] 타키투스는 이때 당시 나이가 이미 일흔 다섯였고, 이는 로마인들의 평균 수명상 굉장히 고령이었다. 갈바네르바가 생각나는 경운데, 실제로 타키투스는 그냥 평범했을 뿐 권좌 공백을 줄이면서 시간을 벌려고 한 군부의 의도처럼 군대의 지지는 크게 받지 못했다.
이 당시, 대개 황제 자리가 빌 때에는 야심많은 군단장이나 근위대장, 혹은 기병대장이 황제 자리를 꿰차지만, 275년 당시 로마 군부 내 황제 유력후보들은 아우렐리아누스 암살에 말려 사형당했거나 그냥 슬퍼만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부 내에서 존경받는 경력을 갖춘 황제 유력후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즉위할 수 있던 프로부스 등은 황제가 되겠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여러 장군들과 의견을 모아 원로원에 황제감을 뽑아달라고 서한을 보냈다. 그런데 정작 원로원에서는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군대의 입김과 그들의 제안이 떠보기였던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숙청의 빌미가 된 탓에 의심부터 했다. 또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오랫동안 군사에 개입하지 못한 탓인지 결국 이 편지를 받은 원로원은 부담만 느끼고는 도로 돌려보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이 주고받기를 세 번씩이나 했다.
그렇게 8주가 지난 2개월 가량이나 원로원은 군부와 군대를 믿지 못하고 계속 상황만 지켜보면서 그들의 운직임을 파악했는데, 군대와 유력 장군들은 자신들의 요청이 진심인 뜻을 계속 전하면서 후임 황제가 논의되게 된다. 그래서 황제 자리를 비워두다가 원로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타키투스가 황제로 발탁됐다.[5][6]
원로원 추대로 즉위한데다 군부 내에서 프로부스 같이 덕망과 야심을 두루 갖춘 장군들이 건재한 만큼, 사실상 죽을 각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연구들에서는 원로원 의원 중 갈리에누스 시대부터 군업무를 오래 본 사람 또는 장군으로 있던 사람인 만큼, 타키투스는 고령임에도 프로부스 등 군부 수뇌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7][8], 원로원 의원 출신 황제임에도 군부를 통제할 줄 알았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부인과 자녀들이 있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만큼 이 무렵 죽거나 있어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개인재산을 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즉위 후,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국고에 기부했고, 자기 저택도 해체해서 공중목욕탕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역사가 타키투스의 책을 로마 도서관에 가져다 놓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2.2.2. 전쟁과 사망


황제 취임 이후, 다음 해 트라키아로 출발했는데 그 이유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모집한 군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타키투스는 이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군해 276년 봄에 헤룰리족과 싸워 승리하고 원로원에게 '고티쿠스 막시무스'라는 존칭을 선물받았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를 통해 타키투스가 원로원 의원 신분이어도 사실상 로마군 내에서 간접적으로 선출한 황제라고 확정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겉은 허수아비 황제 같아도 실제로는 퇴역장군이나 원로원 의원 신분으로 포장된 군인황제 중 한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타키투스는 그해 7월 터키 소아시아 반도의 카파도키아에서 노환으로 병사했다. 이때 그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준비 중이었다고 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터키 남부지방의 티아나에서 암살됐다는 이야기도 있다[9].
그가 죽은 후에 원로원에서는 그의 이부(異父)동생인 플로리아누스(Marcus Annius Florianus)를 황제로 지목했으나, 군단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조기 탈락했다. 따라서 군단에서 황제로 추대한 프로부스가 뒤를 잇는다.

3. 평가


한때 타키투스 황제는 평범한 로마시민이자 원로원 의원 중 매우 나이 많고 온화한 황제로 묘사되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연구에서 발표됐듯이, 여타 군인황제들과 큰 차이가 없던 황제였고 본인의 가족이나 부하들의 행동도 제어하기 힘들어했던 사람에 가까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이런 이미지와 즉위과정상의 모양새 때문에 군인황제라는 이미지가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4. 여담


참고로 역사가 타키투스와 혈통적으로 후손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여겨진다. 애초에 로마식 작명법의 중간 이름, 혹은 성인 노멘이 다르다.[10] 그래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어서 점점 소실되어 가던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술을 다 긁어모아서 유통시킨 걸 보면 타키투스의 후예나 성이 같은 것에 대해 자긍심은 많았을 듯하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술이 약간이라도 남아있는 데는 황제 타키투스가 큰 공헌을 한 셈.
[1] 오늘날의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테르니[2] 물론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무작정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3] 원로원 의원 중 왕정,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명문가 출신들은 극소수였고 타키투스 황제처럼 지나친 고령의 나이에 집정관에 취임한 세습 의원들은 보통은 중장년 나이에 경험해본 전직집정관 출신들이 많았다.[4] 심지어 무려 '''15대 전'''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보다도 더 일찍 태어났다. 단, 이 점에서는 일단 타키투스의 경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당한 후 시작된 군인 황제 시대에 속하는 황제라는 점, 그리고 군인 황제 시대 자체가 49년간 공동 황제 빼고도 18명의 황제가 즉위하여 각 황제의 제위 기간이 길어봤자 5년, 짧으면 15일, 평균 2년이 채 못 된다고 할 정도로 황제 댓수가 확확확 미친듯이 올라가던 혼란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어린 나위에 즉위하여 젊은 나이에 사망한 황제였던 점과 타키투스가 고령에 즉위한 점까지 감안하면 15대 전 황제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닌 셈.[5] 일부 역사가들은 타키투스도 젊었을 때 장군이었지 않나 추측하고 있다. 군부에서 그냥 슬퍼만 하고 있었다는 것은 조작이고 사실은 현역 장군 중 황제를 맡을 만한 인물이 없자 전직 장군인 타키투스를 황제로 세우도록 원로원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는 추측.[6] 최근에는 그가 갈리에누스 황제의 전면적인 군사개혁 이전에 군사 경험을 한 원로원 의원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즉 일리리쿰 황제들과 같은 고향출신의 장군이 아니고 원로원 의원에서 군사 경험을 한 원로원 계층이라는 소리.[7] 타키투스는 로마군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프로부스와 사이가 좋았다. 이는 프로부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 이은 제국 내 군부 2인자였고 마음만 먹으면 즉위하는게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부스는 이상할 정도로 타키투스와 일종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아우렐리아누스 사후부터 타키투스 시대 내내 보였다.[8] 이런 프로부스의 태도는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실제로 그가 제 목소리를 낸 것은 플로리아누스가 즉위한 이후였다.[9]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암살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 타키투스는 시리아에 있던 친척 막시미누스의 가혹한 세금징수 때문에 욕을 많이 먹었고, 여기에서 군부와 부하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이를 통제하지 못해 고생했다고 한다.[10] 대충 따지면 '''개인 이름-일족명-가문명'''인데 이 중 '''일족명'''이 다르다.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김씨라고 해서 김구김유신의 후손이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양자결연이나 가문명 하사와 같은 경우의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