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모두스

 


로마제국 제17대 황제[1]
콤모두스
Commodus

[image]
<colbgcolor=#BA0E09><colcolor=#FCE774> 출생
161년 8월 31일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라누비움(Lanuvium)[2]
사망
192년 12월 31일(향년 31세)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벡틸리안 빌라
능묘
하드리아누스 영묘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77년-180년)
재위
로마 황제
177년 중기[3] ~ 192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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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Luci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42]
제호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Aurelius Commodus Antoninus Augustus)
가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부모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 소(小)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가족
외조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첫째누나 루킬라
둘째누나 파딜라외 11명의 형제자매
첫째매형 폼페이아누스
둘째매형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
황후
브루티아 크리스피나(178 결혼)
자녀
없음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2.2. 황제
2.2.1. 즉위
2.2.2. 누나의 암살 시도와 보복
2.2.3. 근위대장 페렌니스
2.2.4. 간신 클레안데르(클레안드로스)
2.2.5. 검투사 황제
2.3. 암살
3. 평가
3.1. 부자세습제의 폐해?
4. 대중 문화에서
4.3. 《로마 제국의 멸망》
4.5. 《Reign of Blood》
5. 여담


1. 개요


콤모두스의 치세는 한마디로 로마 제국의 재앙이었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당시의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금의 왕국에서 철과 녹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 디오 카시우스(155~235)[4]

로마제국의 제17대 임페라토르. 콤모두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손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아들이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풀네임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가끔 "코모두스"로 표기하는 책도 있다. 로마인들의 표현대로 서술하면 제국 역사상 최초로 공인된 암군이자 폭군. 당대 로마인들과 대중들에게 로마의 무능하고 악랄한 황제의 스테레오타입으로는 네로, 카라칼라도 함께 거론되지만, 콤모두스에 비하면 양반이다[5].
황실 가문에서 현직 황제와 황후의 적통으로 태어난 뒤 정상적인 제왕교육을 받고 즉위한, 최초의 로마황제였다[6]. 하지만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제왕교육까지 멀쩡히 받은 황제임에도 호부견자의 대표 사례로 항상 거론되는 황제로 당대와 후세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공인된, 로마 제국의 암흑기를 연 폭군이자 암군으로 꼽히고 있다. 또 그는 여러 번의 암살 경험 후 얻은 후유증으로 과대망상증 환자가 틀림없는 괴물같은 폭군이자 심각한 정신분열증편집증, 우울증에 시달린 사람으로 쉽게 말하면 황제 부적격자였다.
당대 사람들에게 암살 직후 도미티아누스,[7] 네로를 합친 것보다 최악인 사람이라고 욕을 먹었고, 사후 후대 로마인들에게 카라칼라와 함께 무능함, 악랄함의 대명사로 평가받고 부자 세습과 혈통주의 폐단의 상징으로 공인됐다. 다른 로마 황제들은 그나마 업적이 인정되는 사례도 있으나 콤모두스는 해당 사례도 없다[8].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열정을 보인 취미활동인 검투사 분야에서 업적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이것도 전혀 없다. 그래서 구경거리만 제공했을 뿐이지, 트렌드를 주도하지 못했다고 계속 비난받고 있다[9].
사실 군인 황제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은 콤모두스가 암살당하고 40여년 가까이 지난 시기인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암살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한 235년이고, 로마 황제 중 스스로를 군인황제로 칭하면서 선군정치를 표방하고 로마군과 근위대의 권위를 빌린 인물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대부분의 연구가들에게 로마 제국 최고의 혼란기인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의 막을 연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콤모두스 시대 때 그가 나라를 방치하면서 측근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근위대의 정치개입 등을 크게 키워주거나 사실상 방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에 의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책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천 년에 걸친 로마 제국이 본격적으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는 시점을 콤모두스의 즉위 연도로 보고 있고, 실제로 콤모두스가 즉위한 뒤 다른 황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본격적으로 개판이 되었고 이번에는 극복하지 못했다.
즉위 전이나 직후 그 위험성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친누나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을 경험한 이후부터 정치에 의욕을 잃고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후 피바람과 황음으로 나라를 첫 쇠퇴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연산군의 프로토타입[10]이라고 말하기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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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는 서기 161년, 로마 근교의 도시 라누비움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파우스티나 황후의 자녀 14명 중 열 번째로 태어났다. 로마 최상류층 내에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이후 오랜 만에 태어난 남자 일란성 쌍둥이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콤모도스의 남자 형제들은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고 그의 쌍둥이 형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도 4살 때 요절했다. 그는 아버지가 제위에 있을 때에 태어나 황제의 직위를 물려받은 유일한 황제였다. 물론 티투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그들은 아버지가 황제가 되기 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 매형이자 양숙부는 루키우스 베루스, 외할아버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였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혈통상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어준 이름은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의 프라이노멘과 그의 혈통적 친가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가문에서 따온 이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로 있는 동안 워낙 막장인 탓에 악의적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부모와 삼촌 등 황실 식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정된 후계자로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콤모두스는 금가루를 뿌린 듯한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콤모두스가 제위에 있은 12년 동안 그가 행한 포악한 행위 때문에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그를 후계자로 삼는 데 주저했다고도 하며,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에서처럼 다른 인물을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전해지는 얘기들이 있지만 실제로 마르쿠스 황제는 일찍부터 아들을 후계자로 기르는 수순을 밟아왔다. 콤모두스는 이미 다섯 살 때인 166년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고 171년에는 '게르마니쿠스'라는 아버지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176년에는 로마에서 아버지와 함께 개선식을 했다. 그리고 177년에는 공동 황제의 직위에 올랐으며, 아버지와 원로원으로부터 제호까지 받은 뒤 그해 첫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콤모두스가 첫 집정관에 올랐던 17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원로원은 어린 콤모두스를 위해 특별히 법까지 완화해 콤모두스를 도왔다.
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후계자 콤모두스를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한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 브루티아 크리스티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은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허례허식 없이 평범한 결혼식으로 진행시켰으며, 결혼 직후 새신랑은 로마를 떠나 본국 이탈리아의 북부 국경으로 향했다고 한다.

2.2. 황제



2.2.1. 즉위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178년과 179년에 도나우 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180년으로 계획된 원정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같은 해 3월에 제위에 올랐다. 그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진중에서 죽은 후 콤모두스는 로마 제국황제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온갖 악평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19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가 굳이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콤모두스가 아버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체육이나 검투사 경기를 좋아하는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이것은 황제로서의 자질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취향의 차이였다. 검투사 경기는 좀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공부보다 체육을 좋아했다는 것이 로마 상류층에서도 딱히 흠이 될 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권장되기도 했다. 콤모두스는 180년 3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후 이에 대해 군사들에게 연설을 했는데 매우 진지하고 솔직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장군,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의 아버지는 천상으로 올라가 신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는 인간사에 관심을 갖고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

즉위 후 다 이겨가던[11] 게르만 부족과의 전쟁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사실 이 자체는 그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가 최악인 것을 감안하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에 로마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갈수록 쇠퇴하고 있는 판국이었던 차에,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게르만족과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로마에겐 득보다는 실이 컸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12]처럼 이후 내치에 전념했으면 모를까 이후 행적을 봤을 때 그렇지 않았다는 걸 보면, 도나우 강 건너편의 오지에서 갑옷 입고 군막 생활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콤모두스는 지금 나이로 치면 영락없는 대학교 1학년 정도의 철없는(?) 젊은이였다.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모인 회의에서도 장수들의 강력한 전쟁지속 요청을 단호히 기각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콤모두스가 부황의 별세 이후 로마의 전례대로 현장에서 군단의 승인을 받아서 곧바로 황위에 등극한 초짜 황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의로 배짱도 두둑하고 군왕의 권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로마로 돌아온 이후 182년 엄마같이 따르던 친누나 루킬라가 원로원과 공모해 자신을 암살할 뻔한 사건을 경험한 이후부터, 정치는 아버지 시절의 관료들과 침실 시종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놀고 먹는 세월을 보냈다.[13]
이렇게 게으르고 무능한 황제로 치세를 끝냈다면 모르겠지만...

2.2.2. 누나의 암살 시도와 보복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는 주인공을 어찌어찌 도와줘서 황제로 등극시키려고 하다가, 동생이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를 잇자 주인공을 도와 폭군이 된 동생을 죽이고 로마를 구원한 히로인으로 나오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녀가 일으킨 사건 하나가 이 당시에는 무능해도 나름 국정에 열의를 가지고 있고, 자기 절제도 상당했던 동생 콤모두스의 치세와 인생, 그리고 로마 제국의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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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
루킬라는 164년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해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됐지만, 베루스는 게르만족과의 전쟁 후 로마로 귀환하다가 쓰러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루킬라는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이마저도 딸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얼마 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믿음직한 충신이었던, 젊은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와 루킬라를 강제로 재혼시켰다.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는 외모도 괜찮고 성격이 겸손하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오늘날의 터키 안티오키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 능력, 성격과 별개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로마시민권을 얻은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이었고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였다. 따라서 본래부터 황후로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했던 루킬라는 신분의 격을 이유로 39살에 갓 접어든 새남편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고, 재혼 직전까지 새남편을 거절할 정도로 불쾌해했다. 그래서 부부 사이는 자연스레 굉장히 나빴는데,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170~217)를 낳았다.
어머니 파우스티나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루킬라는 사실상 유일한 아우구스타와 다름없었다. 또 그녀는 아버지가 외치에 전념하는 동안 로마 내정에 간섭해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여장부였고, 자신의 혈통과 지위에 대한 자존심과 야망도 상당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말년부터는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월권을 행사했고 그 영향력을 키웠으며, 아버지가 죽고 2년 동안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며, 음모를 꾸몄다. 반면, 사춘기 때 어머니 파우스티나를 여읜 콤모두스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을 엄마처럼 의지하고 따랐다고 한다. 특히 맏누나 루킬라와 큰매형 폼페이아누스에게 심정적으로 많이 의지했는데, 정작 친누나 루킬라는 그 반대였다. 이때 루킬라는 황제가 된 친동생 콤모두스를 질투하고, 그 원한이 갈수록 커졌다. 또 루킬라는 자신의 유일한 지위라고 생각된 아우구스타 자리를 공유하게 될 콤모두스의 황후이자 올케 크리스피나에게 불만을 품었다. 루킬라는 자신의 자리가 되었어야 됐던 황후 자리를 차지한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피나를 미워했는데, 결국 어처구니없는 악감정으로 182년 두 번째 남편의 조카, 루킬라와 내연관계였던 애인들, 콤모두스의 장인, 다른 여동생들의 남편들과 음모를 꾸몄다. 안토니누스 일가 여성들과 친인척, 근위대장, 원로원 등이 대거 참여한 루킬라의 황제 시해미수 사건은 콤모두스의 모든 것을 180도 바꿔버리면서, 그의 치세를 그야말로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사실 로마 귀환 직후, 콤모두스는 180년 10월 22일 정식 개선식을 올렸는데, 자신이 총애한 시종 사오테루스를 자신의 황제 마차에 태우고 개선행렬이 거행될 동안 수시로 사오테루스에게 키스를 하는 애정행각을 공개적으로 보인 행동 외에는 아직 폭군으로서의 광기, 피에 굶주린 과대망상적인 폭군으로서의 언행을 크게 일으키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인들에게 콤모두스는 "행동이 참 경박하다", “나이답지 않게 철이 없고 유순해보인다”는 비난 외에는 큰 비판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맏누나 루킬라는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현직 황제의 황후가 되면서 자신이 점차 허울뿐인 아우구스타 지위를 갖게 된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루킬라는 자신이 스스로 콤모두스 암살 계획을 주도해, 182년 암살을 계획했다.
그녀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Claudius pompeianus Quninitianus)가 이때 완력이 상당하고 건장한 콤모두스 암살을 담당했고, 콤모두스 암살 시도는 콜로세움에서 결행되기로 결정났다. 그래서 그는 옷에 단도를 감추고 콤모두스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가 가까이 오자 그는 숨어 있던 곳에서 급히 달려 나오며 단도를 휘둘렀는데,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라고 외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이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즉각 호위병에게 칼을 빼앗기고 붙잡혔다. 콤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암살되자[14] 그는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완전히 사람이 변하더니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이것이 도져버렸다.
심문 이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은 젊은 황제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암살범이 본인 앞에서 원로원을 대놓고 언급했기에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다. 이때 암살미수범 퀸티아누스는 심문 후 당연히 처형되었고, 암살 주동자였던 누나 루킬라, 루킬라가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질녀 부부는 유배 후 처형되었다.
근위대장 타루티에누스 파테르누스(Taruttienus Paternus) 역시 사오테루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는데, 그냥 죽이지 않고 사고로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해 살해했다. 콤모두스는 앞서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파테르누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파테르누스가 처형되자 페렌니스가 근위대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통치권까지 전권을 잡았다.
다만 루킬라의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15]는 모든 암살 사건과는 무관했고, 암살범인 친조카와도 전혀 관련도 없어서 숙청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위로 삼을 만큼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큰누나와의 내외간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으며, 콤모두스 본인 역시 이 사람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무척 신뢰하고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킬라와 공모했던 5명의 누이들의 남편 - 매형, 매제 - 들 중 3명은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의 공모자로 체포돼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그래서 콤모두스의 여동생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본인은 오빠 암살에 참여하지 않고, 남편이 개입되었다는 이유로 북아프리카로 추방되는 선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고, 애초부터 죄와 무관했던 둘째누나 파딜라와 한살 위의 누나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 내외는 폼페이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콤모두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루킬라를 포함한 암살 가담 황족들은 거진 유배 후 처형됐다.
이후 콤모두스의 행동들은 스토아 철학자로서 평생 일부일처로 절제된 생활을 한 아버지와 전혀 달라지게 됐다. 가장 믿고 엄마처럼 따랐던 맏누나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콤모두스는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해버렸다. 이때부터 의심이 많아지고 정치에 대해 그나마 관심있던 의욕도 잃어버린 데다, 애첩과의 결혼을 위해 조강지처인 황후 크리스피나를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카프리 섬에 유배했고 며칠 후 자객을 보내 암살하는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콤모두스는 본래 또래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쾌활한 사람이었지만,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이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고 모든 사항을 페렌니스를 통해 전달하게 했다. 페렌니스가 통치권을 잡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는 인물을 바꾸어 가며 권력을 쥐어주고 황제 자신은 사치와 향락으로 세월을 보냈다. 또 기록에 의하면 콤모두스는 술에 취해 궁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며, 수시로 온천을 즐기면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3백 명에 달하는 첩들과 함께 놀았으며 3백 명의 어린 소년들을 사들여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한 명씩 골라내며 하렘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2.2.3. 근위대장 페렌니스


큰누나 루킬라 주도의 암살시도 실패 이후, 급부상하게 된 사람은 파테르누스와 함께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한 또 다른 근위대장 티기디우스 페렌니스였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의 암살을 경험하면서 완전히 멘붕 상태에 빠진 젊은 황제가 새로운 공동지휘관 대신 페렌니스만 신임해 과거 세야누스, 마크로 사례처럼 프라이토리아니를 단독으로 맡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182년 루킬라 주도의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페렌니스가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를 통솔하면서 전반적인 제국 통치권까지 전담하게 된다.
페렌니스는 전권을 휘둘렀고,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재산을 축적하고 그 돈을 가지고 황제의 타락한 생활을 뒷받침했다. 따라서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자리까지도 공공연하게 판매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고 황제 역시 그 과실을 함께 취했다. 또 그는 콤모두스를 위해 제국 각지의 미소년 300명, 미녀 300명을 선발해 콤모두스가 사는 황궁에 공급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콤모두스는 세간에 얼굴을 비추기 보다는 시끌벅쩍한 파티와 양성과의 난교 등에 빠져 지내기 시작했으며, 재위 기간 내내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검투사 경기에만 심취했다. 그리고 이런 증세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콤모두스의 검투사 경기 중독 증세로 발전했다.
그래도 근위대장 페렌니스는 나름 유능해 콤모두스가 노는 와중에도 제국이 돌아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185년 페렌니스는 권력에서 밀려났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진 그가 콤모두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황제로 세우려고 했지만, 페렌니스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이 장정 대표 1500명을 로마로 보내 황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고 한다. 또는 브리타니아 군단이 시위를 한 실제 이유는 페렌니스의 정부가 부패해서였거나 또는 페렌니스가 그해에 일찍이 브리타니아 내의 로마군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가혹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2.2.4. 간신 클레안데르(클레안드로스)


페렌니스의 반란 음모가 사실이어서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콤모두스가 자신의 의심병과 간신배의 농간에 넘어가 오히려 자신의 충신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반란의 사실여부는 모르지만 콤모두스는 결국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을 즉각 반역죄로 처형했다. 그들이 죽고 나서 로마 제국의 전권은 콤모두스가 아낀 새 침실 시종이자 탐욕스러운 해방노예 출신인 클레안드로스(클레안데르)가 근위대장이 된 뒤 가져가게 됐다.
프리지아(프리기아) 출신의 클레안드로스는 노예로 고향에서 로마로 팔려왔다가 황실로 들어가 황궁 안에서 뛰어난 머리와 눈치를 바탕으로 황실 내에서 차근차근 승진하여 최고 관직에 올랐다. 클레안드로스는 분명 유능한 인물임은 틀림없었지만,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며,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부패했어도 유능한 전임자 시절보다 신임 근위대장 클레안드로스가 실권을 쥔 뒤로 로마는 본격적으로 막장으로 치달았다. 페렌니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력 역시 황제를 원하는 방식대로 살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클레안드로스는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자리를 공공연히 판매하는 매관매직을 행하였고 이러한 행위로 인해 어느 해에는 무려 25명을 집정관직에 임명하면서 막장통치는 극에 달했다. 또 클레안드로스는 벌어들인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가졌지만, 상당한 몫을 콤모두스에게 주는 방식으로 일처리를 했다.
이 무렵 콤모두스를 노리는 두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주동자는 궁정 관료가 아니라 완전히 외부인으로, 군대를 이탈하고 산적 두목이 되어 갈리아 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마테르누스(Maternus)였다. 그는 187년 3월에 로마에서 열리는 키벨레[16] 축제 기간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음모 사실이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축제 기간 전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미 암살사건을 세 번이나 경험한 콤모두스는 182년 초의 첫 암살사건 때 처음 얻은 두려움과 강박증세, 분노조절, 의심 등 정신적 불안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더욱 강하고 많은 수의 호위병을 곁에 두었고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황실 사유지나 자신이 무척 편안해하던 퀸틸리 빌라[17] 같이 신변보호가 보장된 교외 지역에서 보냈다. 또 그는 무책임했어도 그나마 하는 시늉이라도 하던 재판과 황제의 업무를 피하면서 불안감을 호소하고 신변 보호를 더 철저히 했다.
이런 콤모두스에게 정치적으로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서기 19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클레안드로스의 정적들이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클레안드로스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곡식들을 사들여 인위적인 곡물 부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주범은 곡물 담당관인 파피리우스 디오니시우스(Papirius Dionysius)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여러 차례의 재난에 이어 전염병과 기근으로 초래된 곡물 부족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들을 취한 후에 그 책임을 클레안드로스에게 뒤집어 씌웠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의 의도대로 로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대전차 경기장에서는 성난 군중들이 남쪽으로 아피아 가도를 지나 로마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리 빌라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클레안드로스의 처형을 요구했다. 클레안드로스는 기병대에게 군중들을 로마로 쫓아 보내라고 명령했지만, 군중들이 밀고 들어오자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옥상에서 공격을 당했고 수도 경찰대마저 민중의 편에 섰다.
시민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야 콤모두스는 사태를 깨닫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는 모든 이들의 표적이 된 클레안드로스를 참수하고 시민들에게 수급을 던져주는 걸로 봉기를 가라앉혔다. 이에 군중들은 기뻐하며 몰락한 권신 클레안드로스의 시신을 마구 다룬 후에 그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환호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 사태 이후, 콤모두스는 클레안드로스 같은 사람을 재상에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권력을 모조리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장악만 할 뿐 매우 무책임했고 일처리도 건성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로마 황제들은 자주 속주의 총독이나 국경의 군대 지휘관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제국 전역에 부임한 총독이나 지휘관의 수를 합하면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하다보니 보통 황제들이 일일이 서신을 쓰기보다는 몇가지 지침만 내려주면 그걸 가지고 서신을 작성하는 관료들이 살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콤모두스의 숙청극으로 이런 관료들이 아예 공직에서 쫓겨난 데다가, 콤모두스 본인도 통치에 관심도 없다보니 황제가 보내온 편지에는 늘 Vale[18] 하나만 달랑 적혀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은 조금이라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먼저 콤모두스의 막장행보는 아직 암살 전처럼 심각한 과대망상 증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지 않은 터라서 덜 알려졌다. 또 콤모두스의 매형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원로원에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과 군대는 확고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콤모두스를 버리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들인 두 사람은 루킬라의 암살계획 당시 개입하지 않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콤모두스는 맛이 가버린 이후에도 이들의 말을 잘 따르고 신뢰를 계속 보냈다.
이 당시, 고령의 폼페이아누스는 선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든 고명대신이었고 당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불손한 움직임이 나오기 직전 상황에서도 끝까지 안토니네 황실과 콤모두스에 대한 신뢰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 그는 이 시기동안 세 차례나 제위를 제안받았음에도 모두 거절했으며 그때마다 마르쿠스와 콤모두스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언급했다. 따라서 의외로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의 막장극에 질린 나머지 나이와 눈병으로 인한 이유를 들어 은퇴해버리고 교외의 시골별장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한다[19]. 반면, 누나 파딜라의 남편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복점관과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끝까지 로마에 남아 장인의 유지에 따라 콤모두스를 도우려고 했던 고문으로 있었다. 또 둘째누나 파딜라 부부는 콤모두스를 돕기 위해 카파톨리노 언덕의 황궁 일부에 거주했다고 한다.

2.2.5. 검투사 황제


2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인 190년 직전부터 콤모두스의 부도덕하고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특히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클레안드로스가 죽고 난 뒤였는데, 이때 콤모두스는 애첩 마르키아, 새로운 침실 하인이 된 그리스인 해방노예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레토를 형식적인 친정체제에서 신뢰했다.
오늘날 콤모두스의 과대망상 증상은 계속되는 암살 시도와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목숨에 불안을 느낀 불안감 때문에 정신이 불안해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따라서 콤모두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신격화를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라고 불러 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는 병약했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아버지를 경멸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마도 계속 암살에 시달린 탓에 스스로를 불사신이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헤라클레스로 스스로를 대입시켰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친정과 동시에 콤모두스는 마침내 자신을 강인함과 용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직접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두르며 곤봉을 든 모습의 조각상을 남기게 했다. 맨 위에 보이는 저 조각상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여겼고 사자 가죽 옷의 헤라클레스 복장을 입고 곤봉을 휘두르며 직접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한 기행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검투 시합을 예행연습한 장소로 추정되는 미니 콜로세움까지 발견됐다.
검투사로서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실제로 엄청난 완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매 싸움마다 전승무패였다. 물론 전승무패의 기록 자체는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곤봉과 칼에 희생당한 자들은 검투사들보다는 주로 본인이 스스로 조달하게 한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문 검투사들과 싸운 경기의 승리는 반드시 상대의 항복으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와 대결한 검투사들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베스티아리로서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검투사들 쪽에서 먼저 죽고 싶지 않아 항복했을지언정, 그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억지로 상대를 지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그의 무서운 힘과 기술은 베스티아리로서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기린, 얼룩말을 포획하고, 코끼리 3마리를 제압했으며,[20] 하루에 100마리의 사자을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외 각종 맹수들을 무대에서 죽이곤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단순히 완력이 셌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한다. Augustan History에 따르면 전력질주하는 타조도 활로 쏴 죽였다고 하는데, 타조의 속도는 최대 70-90 km/h 가량이다.
콤모두스는 192년 11월에 열린 플레부스의 경기가 있는 동안 투기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묘기를 보여주었다. 디오 카시우스와 헤로디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 장면을 적었다.
첫날 그는 난간에서 활을 쏘고 ...(중략)... 혼자 힘으로 100마리의 곰을 모두 죽였다. 다른 날들은 위층 자신의 자리에서 투기장 바닥으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축들을 모두 베어버렸으며 ...(중략)... 그는 또한 호랑이, 하마, 코끼리도 제압을 했다. 그는 이러한 묘기를 보여주고 난 뒤에는 물러났다가, 다시 점심식사 후에 검투사가 되어 격투를 벌였다. 그의 격투 방법과 입은 갑옷은 '세쿠토레'의 것이였고 ...(중략)... 그는 오른손으로 방패를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 검을 쥐었으며,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디오 카시우스, 73. 18-19
그의 사격술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고 ...(중략)... 한번은 그가 끝이 초승달 모양인 화살로 미우레타니아의 타조들을 쏘았는데, ...(중략)... 콤모두스가 화살로 타조들의 목 맨 윗부분을 맞추어 쓰러뜨렸더니, 새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 헤로디아누스, 1. 15
이외에도 그는 이 시기부터 원로원과 사이도 최악이 되었다. 왜냐하면 원로원 역시 자신들을 포함한 계층 전체가 콤모두스의 막장행동 탓에 부도덕함과 잔인함의 동조자로 질타받고, 콤모두스의 과대망상적 행동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191년에는 로마 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반이 소실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부유한 많은 로마인들이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던 팍스 로마나의 상징인 평화의 신전까지도 불에 탔고,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는 성상과 베스타 신전이 파괴되기도 했다. 도심의 많은 지역이 큰 타격을 입어 대대적인 복구 작업과 재건축이 필요했고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지휘한 콤모두스는 자신이 제2의 로마를 창건했다며 로마를 '콤모두스의 땅'이라고 이름을 짓고 달력에서 달의 이름을 자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꾸는 등 광기를 드러냈다.

2.3. 암살


치세 마지막 몇 년 동안 콤모두스는 점차 원로원 의원들에게 불안감을 느끼고 적대적이 되었다. 로마가 재건되었으나 황제는 신의 화신임을 자처했고, 많은 의원들이 파면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나마 죽이지나 않은게 다행이었을 거다. 검투사 활동을 하면서 왼손으로 잘려나간 타조의 머리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피 묻은 검을 휘두르며 관중석의 원로원 의원들을 향해 걸어오면, 오락거리는 협박 그 자체가 되었을 테니. 그것은 타조에게 한 것처럼 의원들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의 광기는 192년 마지막 몇달 동안 절정에 이르렀다. 192년 11월의 시합들이 끝나고 콤모두스는 새해를 맞으며 신을 넘어 로마의 새로운 건국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로 재건한 것을 축하하고, 황제를 '로마의 건국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선출된 집정관 두 명을 모조리 죽이고, 다음 날 자신이 검투사 복장을 하고 스스로 검투사 집정관까지 되려고 했다.
이와 같이 피에 굶주린 고어한 분위기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으며, 정적들은 황제의 변덕에 벌벌 떨었다. 황제의 최측근들조차 그에게 치를 떨며, 민중들의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하여 불러올 수 있는 파멸을 미리 막아보기 위해 축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는 데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장한 채 지내는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음식에 독을 탔으며, 그가 독 때문에 욕실에서 토하고 괴로워하는 틈을 타서 그의 레슬링 교관이자 파트너를 보내서 목 졸라 죽이게 된다.[출처1-17]
어처구니 없게도 암살의 원인은 지독한 검투사질 때문이었다. 그가 일도 안 하고 범죄자들과 맹수들을 경기장에 동원해서 때려죽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콤모두스는 아예 검투사 숙소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검투사질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근위대장과 애첩이 어이없어하며 이를 말렸다. 아무리 황제가 검투사질을 하는건 둘째치고라도 신분상 천민인 검투사와 똑같이 숙소에서 살겠다는 건 황제의 체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측근들이 지극히 상식적인 만류를 했음에도 되려 콤모두스는 빡쳐서 오히려 근위대장과 애첩을 처형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고 이를 알게된 그들이 결국 살기 위해서 레슬링 교관과 짜고 콤모두스를 죽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실 그와 별개로 콤모두스를 죽여서 다음 황제를 일찍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이 그전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정적들이 암살 계획을 보조했다.
황제의 시신은 콤모두스가 죽일 계획이었던 집정관 당선자 가운데 한 사람인 파비우스 킬로(Fabius Cilo)에게 넘겨져 밤 사이에 매장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신을 파내 일반 죄수처럼 시내를 끌고 다녀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지만 그것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 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대로 그도 당하게 하라"

  • 단, 네로는 사치나 코르불로와 같은 장군들을 위협이 될 지 모른다며 자결을 강요한 것을 비롯해 원로원 측에서 깔 만한 거리가 많았던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그저 기득권인 원로원을 무시하고 로마가 공화정이 아닌 제정 국가가 되었음을 분명히 한 인물이었기에 야만적이라고 욕먹은 것일 뿐이다.[21]
그런데 콤모두스의 시신은 그 뒤 상당 기간 그대로 매장되었다고 해도, 놀라울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한겨울이라서 그대로 매장되었다고 해도, 테베레 강에 던져지는 굴욕도 없었고 제위에 오른 페르티낙스 황제에 의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로 이장되었다. 다만 기록말살형은 그대로 집행됐는데 이마저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자신과 장남 카라칼라의 정통성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철회시켰다. 아울러 사후 4년 만에 콤모두스는 기록말살형 철회와 동시에 신격화까지 되면서 자신보다 양반이었던 이전 황제들보다 융숭한 대접까지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어서 반감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가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철회를 명령한 까닭은,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기록말살형 철회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크나큰 굴욕이었을 것이다.

3. 평가


대중들에게 흔히 칼리굴라[22], 네로, 카라칼라[23], 엘라가발루스, 등과 묶여 폭군의 대명사로 평가받고 있고, 카라칼라와 함께 로마 제국에서 폭군 중 제위 세습의 부적격 사례로 함께 묶여 오늘날까지 비난을 받고 있다. 이는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로마인들에게 콤모두스라는 사람은 잔인함과대망상, 그리고 피의 굶주림으로 가득찬 광기로 집약된 무능한 구제불능 폭군이었다. 또 카라칼라와 마찬가지로 당대 로마인들에게 공인된 진짜 폭군인 만큼, 당대부터 지금까지 평가는 최악이다.[24]
그러나 콤모두스는 함께 묶이는 황제들과 비교해도 업적이 전혀 없는 무능한 황제였기에 칼리굴라, 네로, 카라칼라와 달리 재평가조차 되지 않고 있다. 먼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폭군들로 인식되고 있는 칼리굴라와 네로에 대해 살펴보자면 두 사람 중 전자는 폭군보다는 암군 내지 재위 3년 10개여월 만에 측근인 근위대의 배신으로 암살된 황제였고, 후자는 폭군인 것은 맞았지만 암군에 가까운 황제였다는 것이 오늘날의 평가다. 칼리굴라는 콤모두스처럼 ‘사치와 성적 쾌락, 폭력에 집착했던 무절제한 미치광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기록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 시작된 이미지였으며 실상은 통치 내내 로마 제국이 굴러갈 수 있는 정책들을 유지했던 황제였다. 더해서 그는 이미지와는 달리, 콤모두스처럼 측근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정사를 돌봤고 당대에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필로 등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비난받는 ‘사치가 심했다’, ‘티베리우스의 유증금들을 마구 퍼줬다’는 부분 역시 네로, 콤모두스처럼 언제까지나 본인이 닥치고 한 사치가 아니라, 즉위 후 ‘빵과 서커스’라는 로마 황제들의 즉위 초 인기영합정책이었다.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 본인과 황실 일가 전체가 세야누스라는 사람 한명에게 멸문될 뻔한 위기를 겪은 이후, 즉위 초반 직후부터 노골적으로 자신과 율리우스 가문을 우상화했다. 또한 지나치게 근위대와 반대파들을 견제했는데 이때 그가 활용한 방법은 후기 로마 황제들이나 헬레니즘 제국의 절대 군주들을 연상케했다. 여기에 더해 통치방향 역시 할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비슷해진 까닭에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과 상류층에게 인기가 없어졌다.[25] 그래서 그는 4여년 만에 원로원 내 공화정 복귀론자들과 황실관리, 칼리굴라의 방식에 불만을 품은 근위대 일부에 의해 일가족이 모조리 살해됐다. 이후 칼리굴라는 원로원에게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위기를 겪었고,[26] 대중들과 상류층에게는 중병을 앓았던 이력과 그를 깎아내리던 소문들이 엮이면서 그가 죽고 백여년 뒤 역사가들(특히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오늘날까지 ‘미치광이’, ‘근친상간하는 변태’ 등으로 불리며 까이게 됐다. 또한 이 소문들은 2차, 3차 가공돼 진짜 그가 한 일이 되면서 민중들에게도 구제불능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됐다.
그러나 비록 마우레타니아 문제처럼 제국 내에 소요를 일으킨 사건도 벌어졌지만, 전반적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가 내린 중요 결정들을 제멋대로 교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지시와 결정으로 로마 시에 물을 공급해주는 수도교 건설, 그리스 일대의 경제 활성을 위해 만든 운하 건설이 시작됐고, 속주 정책 역시 알렉산드리아 일대의 유대인 문제 등 의외로 가려진 업적 등이 꽤 있다. 또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경제, 사회 정책들도 칼리굴라가 입안했거나 실행에 옮긴 부분이 이어진 것이 의외로 발견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주장되는 기행과 악행[27]들도 오늘날 로마사 연구자들의 대차대조 결과, 거의 대부분 사실무근의 뜬소문으로 결론내려지면서 과거처럼 콤모두스와 함께 묶일 폭군으로는 분류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칼리굴라는 정치력 부족과 개인적인 성격 결함으로 실패한 황제인 건 맞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과는 달리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폭군으로 낙인찍힐 정도는 결코 아니었고 제국에 폐를 끼치지도 않았다.
칼리굴라와 함께 폭군으로 엮여 까이는 네로 역시 문제가 있었기는 해도 콤모두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폭군은 아니었다. 영화나 대중매체, 코미디 등을 통해 네로는 콤모두스처럼 놀고 먹는 막장 황제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네로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정무는 계속 봤고 파르티아 문제 등의 외교정책 성공은 트라야누스 시대 이전까지 대 파르티아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 또 그가 까이는 사건이자 몰락의 시발점인 로마 대화재 역시 마찬가지다. 죄없는 크리스트교도들에게 방화죄를 덮어 씌운 것은 분명히 그가 잘못한 행동이지만, 네로는 오늘날 알려진 “불타는 로마 시내를 보면서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와 달리 휴가 중 로마 대화재라는 엄청난 사건을 보고 받고, 눈물날 정도로 앞장서 이 초유의 사태를 해결하는 노력을 보여줬다. 또한 네로가 사치를 위해 속주세를 인상하고 직계 가족, 방계 황족, 귀족, 부자들을 반역죄로 숙청했어도 콤모두스처럼 검투사 놀이를 한다고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취미활동에만 매달린 사람은 아니었다. 즉,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네로 역시 콤모두스와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은 하는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네로는 콤모두스처럼 사치가 심했다. 특히 그는 콤모두스와 달리 그리스 문화에 대한 지나친 심취[28]로 당대에 평가가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화재 전에 로마는 아름답지 못해서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말한 데다가 화재 후 복구 사업 때 자신의 궁전을 크게 지으려고 한 부적절한 처사 때문에 폭군으로 낙인이 찍히게 됐다. 그러나 네로는 이런저런 이벤트도 많이 열었고 개인적인 매력도 상당해서, 사후 본가 개인 무덤에 묻힌 그의 묘소에 매일 꽃이 바쳐졌을 정도로 일반 시민들에게는 꽤나 인기있는 황제였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정치할 생각을 아예 그만둔 황제였고, 뒤에 등장할 카라칼라처럼 본인의 관심을 살려 군사행동과 군제 개편 같은 부분에 열정과 업적도 보이지 않았다. 또 엘라가발루스처럼 고향 레반트에서 태양신 신관 수업을 받고 있다가 카라칼라 암살 후 외할머니 마이사의 도박으로 황제가 된 사람도 아니었다. 따라서 엘라가발루스처럼 아무런 일도 안하고 놀고 먹은 황제여도 제왕교육을 멀쩡히 잘 받은 사람이 제 역할을 그만뒀다는 부분에서 더 비난받고 있다. 아울러 엘라가발루스와 같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기행은 없었어도, 매관매직과 무관심으로 나라를 방치한데다 업무대리인으로 지정한 인사들도 족족 문제가 많은 탓에 쉴드의 여지도 없이 진정한 암군이자 폭군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콤모두스는 현대 로마사 학자들에게 당대에 폭군으로 공인돼 까인 도미티아누스나, 오늘날에는 암군이어도 기록처럼 막장 내지 폭군은 아니었다고 평가받는 칼리굴라, 네로처럼 재평가조차 못 받고, 말 그대로 나라를 방치한 채 이후 온갖 부작용들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까이고 있다.
다행이라면 말 그대로 나라를 방치한 덕에, 당대와 후대 로마인들에게 세트로 합쳐져 욕먹는 카라칼라처럼 국고를 바닥나게 만들어서 200년 넘게 유지되던 조세 체계 등을 뒤흔드는 행동, 다시 말해 폭정이든 실정이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이 부분에서 욕을 덜 먹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카라칼라와 달리 콤모두스는 로마인들에게 공인된 폭군임에도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은 폭군’이었고, 후배 카라칼라와 달리 제국에 어떠한 공헌도 해주지 않았다. 아울러 콤모두스는 사후 그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을 때, 했던 일이 하나도 없어서 원로원에서 지울 기록이 한 가지도 없었다고 이 부분에서도 욕을 먹었다.
콤모두스는 오직 여흥과 취미생활 분야에서만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으려고 노력했고, 카라칼라와 달리 자신을 욕하는 일반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학살하는 행동은 없었다. 또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해도 한번 제대로 성질을 부리면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재산을 전부 뺏은 행동 외에는 가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사람들에 대해서 숙청을 가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는 카라칼라나 동서고금에서 폭군으로 공인된 군주들에 비하면 약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왕권이 어쩌니 하면서 신하들에 대해서 스토커적 감시를 하며 최대한의 경계를 하는 전제군주들에 비하면 아주 점잖은(?) 수준이었기 때문.
불행 중 다행이지만 콤모두스가 제위에 앉은 12년은 기근, 홍수, 전염병, 야만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던 아버지, 삼촌의 통치기와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시기였다고 한다. 하다못해 그의 치세에 노예,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언급이나 이야기도 없다. 콤모두스가 즉위한 시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인 오현제 시대 직후였다.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의 성장에 대한 대비가 소홀하다는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자 나섰던 황제였다. 그런데 콤모두스는 아버지의 노력을 이어받기는커녕 평화조약을 맺고 돌아온 직후 암살 위협을 겪고 난 이후부터 아예 제국을 내팽개치고 제국을 박살내 버린다. 로마 제국의 번영기에 즉위했음에도 그 모양으로 로마를 박살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 동아시아의 다른 폭군들을 보면 수 양제는 대운하 공사라는 업적[29]이 있고 충혜왕은 토지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상업을 진흥시킨 업적이라도 있다. 또 카라칼라는 기동대와 타격대로 군체계를 정비해 한바탕 주변 이민족들과 외부 세력을 두들겨 패는 예방전쟁으로 수십년 간의 평화라도 가져왔다. 그러나 콤모두스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심지어 본인이 관심있어 했고, 가장 열정을 바친 유흥 분야, 특히 검투사 경기에서 눈에 띄는 트렌드 변화조차 가져오지 못했다.
“검투사로 활약(?)하며 전문적인 검투사들은 죽이지 않고 범죄자들을 죽였으니 범죄율이 떨어졌을 것 아니냐”며 재평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멀쩡하게 있는 국법을 무시하고 범죄자를 황제의 심심풀이용으로 죽인다는 것도 분명 문제이며, 사적 처벌을 허용해서 피해자에게 처벌권을 준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도 재평가는 어렵다. 전문 검투사들을 직접 죽이거나 직접 죽이라고 명하지만 않았을 뿐 자신이 관전을 하는 경기에서 검투사들이 소극적으로 싸울 때에는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명한 사실도 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철인 황제(철학자 황제)라고까지 불렸던 아버지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 오죽하면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도 생겨났다. 이때 돌던 소문에 따르면, 황후 파우스티나가 검투사를 애인으로 삼아 해안 휴양지에서 즐기며 얻은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를 채용한 픽션까지 나오면서 대중들에게 부모까지 비난받게 만들었다.[30]
두 차례 암살 위협을 겪으면서 생긴 강박증과 암살에 대한 공포, 의심병으로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고 쉴드의 여지가 있다고 쳐도, 콤모두스는 오랜 평화기 직후, 여러 문제가 대내외적으로 터져 고생한 아버지와 비교해 안정적인 상황에서 즉위했음에도 불성실한 데다 모든 것을 방치할 정도로 무능했다. 이런 까닭에 즉위 직후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서둘러 종결짓고 돌아온 이후 그의 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의 정치나 국방에서는 문제점이 하나도 개선된 게 없었다.
또한 콤모두스가 완전히 정사를 내팽개치고 측근들에게 나라일을 맡기면서 근위대장의 시대가 시작되는 후유증까지 생겨났다. 콤모두스 초기에 국가를 통치했던 페렌니스는 근위대장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시절까지의 문민 통치가 이때부터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로 전환된다. 페렌니스가 피살되고 그 뒤를 이은 클레안드로스는 아주 탐욕스러워 제국을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었고, 이제 지방 정부에서 딴 생각을 품고 비위를 저지르더라도 아무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콤모두스 시대 이후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해 이후 황제인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장인 레토에 의해 피살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내전 당시 일리리쿰에서 황제를 자처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나라를 안정시켰지만, 스스로 군인황제를 자처한 세베루스는 커져버린 근위대의 힘을 이용해 선군정치를 벌이면서 이후의 로마 제국의 군국주의화가 시작되는 결과까지 연결됐다. 또한 콤모두스 암살과 페르티낙스가 피살된 직후 곳곳에서 군대가 들고 일어났던 것을 생각하면 속주에 대한 감시도 이때부터 해이해졌다. 따라서 여러모로 제국의 종말의 시작을 기하는 황제라고 공인되듯 평가받고 있고, 실제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콤모두스의 치세부터 시작되고 있다.
더해서 콤모두스 시대 이후부터 하필이면 야만족의 침입이 격화되고 제국의 재편성이 필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터져버리면서, 짦지도 않은 그의 치세기동안 본인이 고집을 피워 서둘러 강화조약을 맺고 재정비할 시간조차 방치한 부분 역시 그가 로마 제국이 변형되고 해체되는 결과의 시발점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의외일지 모르는데, 현제로 알려진 트라야누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콤모두스의 통치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콤모두스가 기독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통치에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콤모두스의 애첩이 된 마르키아의 입김 또한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마르키아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해서 기독교 박해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기독교도를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그의 얼마 안 되는 선행 중 하나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신고해도 콤모두스 황제가 무시하고 기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일로 과인을 귀찮게 하지 마." 정도의 대응이었고 큰 연관성은 없겠지만 그를 시해한 암살건에 가담한 후실황비가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어쨌든 잠시나마 기독교 공동체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계속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정말로 큰 업적이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선황 아우렐리우스에게 탄압을 받은 기독교가 콤모두스 치세에 연속해서 궁지에 몰리지 않았기에 다른 건 몰라도 기독교 문헌이나 교황청에서 콤모두스를 지적해서 비판하는 경우는 없다. 사실 교황청 입장에서는 빌라도처럼 표창장을 주고 싶을지 모른다. 의외로 세상사람들에게는 명군으로 알려진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후세에 기독교가 제국을 장악한 로마 말기나 중세 유럽에 신나게 혹평당했고, 그의 기마상이나 동상은 보는 즉시 파괴될 정도로 미움을 받았다.
로마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 기질은 뛰어났고 또한 특별히 대형사고를 친 것도 없으며 시민들을 핍박하거나 무리한 세금징수도 하지 않았기에 로마 제국이 그의 치세 중에 막장으로 치닫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다. 사실 로마 제국의 막장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황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화였다. 이후 즉위한 황제들도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처럼 그럭저럭 수습만 했을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 게 그 증거다. 다만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 제국의 막장화 수습에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초동 진화에 성공했다면 쇠퇴가 꽤나 미뤄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31]
여담이지만 그의 치세에 중국 한나라에서는 역시 비슷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 군웅들이 한 왕조를 무시하고 거병하는 내란이 발발했으며 삼파전 분할대립으로 이어져 중국이 엉망이 되는 전개가 벌어졌다. 중국이나 로마나 이런 전개는 절대로 낭만이나 대서사시가 아니며 민생이 파탄나고 전란으로 생지옥이 되는 혼돈 그 자체였다. 중국의 경우를 봐도 삼국 분할이 끝나고 서진이 일시적으로 재통일했지만 얼마 못 가 5호16국시대로 더 엄청난 재앙이 도래했다. 로마의 경우는 군인황제시대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치세에 일시적인 안정이 있었지만, 그들 사후에 야만족의 침공을 저지하지 못해 제국의 통제력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결국에는 절반이 멸망하였다.
중국 명나라천계제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황제로서는 부적합하지만 이들이 했으면 매우 적합한 직업이 있었다는 점이다. 콤모두스는 황제로서는 부적합했지만 검투사를 했으면 대성했을 인물이었고, 천계제 역시 황제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었으나 목수를 했으면 대성했을 인물이었다. 다만 천계제는 지금도 보기 힘들만큼 친절하고 성격이 좋았던 데다가 숭정제라는 훗날을 위한 최후의 희망을 남겼다는 점에서 암군일지언정 폭군 취급은 받지 않는다.

3.1. 부자세습제의 폐해?


콤모두스는 여러 폭군 중 위에서 언급했듯이 카라칼라와 세트로 묶여 로마제국 부자세습제의 폐해의 아이콘으로 공인돼 비난받고 있다. 따라서 로마 최고의 명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 사후 내란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모두 뒤를 이은 아들들이 폭군이었던 까닭에 이 부분에서 비난받고 있다.
콤모두스의 즉위 후 막장에 가까운 면모 때문에 당대부터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모두 사후 아들의 악행과 실정 탓에 자식교육을 못 시켰다고 비난받고 있다. 모후 파우스티나는 아들의 검투사 놀이 덕에 휴양지에서 검투사들과 바람이 나서 얻은 아들이 콤모두스이고,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비방성 소문의 피해자가 돼 대중매체에서 문란한 황후로 알려지게 됐고, 로마 최고의 무결점 명군이었던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과 완전히 반대로 나라를 이끈 아들에게 제위를 물러줬다고 강하게 비난받고 있다.
아울러 콤모두스의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폭군으로 놀고 먹은 조카 덕(?)에 후대 로마인들에게 “삼촌이라는 작자가 금발머리 자부심 내세우고 외모만 신경쓰고 눈치없이 경박하니, 조카가 어릴때 그걸 보고 뭘 배웠겠냐?”라고 욕먹고 , 후대 로마인들은 그를 조카 콤모두스와 세트로 묶어 아예 잘난 형 덕에 황제 타이틀만 얻고 밤낮으로 놀기만 하다가 죽은 황제로 기록하면서 비난했다[32].
콤모두스의 부모에 대한 이런 비난은 오늘날은 물론 당대 후임황제들 입에서 그의 부모와 작은아버지까지 공식석상 자리를 통해 공개적으로 언급될 정도였다. 콤모두스 못지 않은 폭군이자 로마 제국 시스템 전반을 완전히 헝클어 놓았다고 까인, 카라칼라의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즉위 후 원로원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식농사에 실패했다고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로마 최고의 명군을 욕했는데, 이는 이 사람 혼자 언급한 작심발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이를 주요 떡밥 삼아 계속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아우렐리우스 부자를 싸잡아 욕하길 주저하지 않던 세베루스 역시 다른 오현제처럼 유능한 인사를 골라서 양자로 삼아 계승하지 않고 어린 아들들에게 제위를 물려 줬다. 특히, 그의 장남은 콤모두스와 달리 10대 초반의 나이부터 그 위험성을 드러낸 카라칼라였고, 차남은 형이 분노조절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와 대립각을 세운 게타였다.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 본인은 두 아들 사이가 원수보다 못한 최악임을 알고 있음에도 상황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33]
사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오현제, 즉 같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전임자들이 양자를 세워 제위를 물려준 이유는 선대 황제 4명 모두 처음부터 제위를 물려줄 만한 친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아들이 있던 그의 입장에서 더욱이 멀쩡한 아들을 놓고 양자를 두기에는 리스크도 컸다. 전임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손자인 콤모두스는 혈통부터 정통성을 타고난 인물이었고, 정신병과 같은 매우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거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한 왕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버지와 달리 건강하고 체격이 상당히 좋은 활발하고 유쾌한 청년인데다 외모도 막장으로 치닫던 암살직전에도 로마인들에게 “남자답게 잘생기고 건장하며 금발머리는 햇볕을 받아 밝게 타오르는 듯 돋보였다”고 이야기 나올 정도였다. 또 그는 아버지 사망 직후 루킬라에게 첫 암살사건을 경험하기 전까지 다소 철없게 행동하긴 해도 그 나이대에 맞게 철이 없고 경박하다고 이야기가 나왔고, 정치에도 나름 관심이 있고 자기 스스로 사생활적으로 절제할 줄도 알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콤모두스는 즉위 전부터 포악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드러낸 후계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부모 모두로부터 확고한 혈통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멀쩡한 아들을 두고, 양자를 세워야 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비난이었다.
이는 당대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아무리 통치를 잘했어도, 자식 농사를 망쳤다”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강하게 비난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비난받은 마르쿠스가 서로 결이 다른 선택을 했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가장 큰 이유다. 당장 콤모두스 부자를 싸잡아 욕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아우렐리우스와 달리 죽기 직전 유언에서 언급했듯이 두 아들이 제국을 쪼개 나누거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벌일 것을 확신하듯 예감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를 무척 걱정했다.
또 그는 차남 게타를 공동후계자로 내세운 이후에 이미 파르티아와의 전쟁 후 동방에 머물다 귀국 직후 분노조절 제어 등에 어려움을 겪던 큰아들의 잔인함과 위험성을 직접 경험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즉위전부터 장인, 아내, 처남 등을 죽이고, 독불장군식으로 행동한 장남과 그런 장남과 원수지간이었던 차남 게타에게 제위를 물려줬고,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죽고 난 뒤 상황을 예측했음[34]에도 이를 강행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욕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두 아들을 제치고 다른 사람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그나마 셉티미우스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카라칼라가 게타를 제 손으로 죽이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학살하는 등 악행을 저질러도, 군사적 재능을 즉위 후 유감없이 발휘할 정도로 군제개편이나 제국 방위에는 큰 공을 세워 폭군이어도 콤모두스같은 폭군+암군은 아니었으므로 제국이 카라칼라 사후에도 한동안 안정기를 누려 차악의 선택이었다는 비난 정도일 것이다.
즉,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멀쩡한 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은 선정 당시 당연했고, 만약 아우렐리우스가 양자 계승을 시도했다가, 친아들인 콤모두스가 자신이 정당한 친자 계승자임을 내세우며 대항한다면 로마 제국이 난장판이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실제로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왕조 국가에서 왕위 계승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내란을 일으켜서 나라를 말아먹는 사례는 역사에서 매우 흔했다.[35] 굳이 지적하자면 자식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계승하는 전제군주제 자체의 한계로 봐야 할 것이다.[36][37]

4. 대중 문화에서



4.1. 《라이즈: 선 오브 롬



4.2. 《글래디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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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는 훗날 영화 조커아서 플렉을 맡게 되는 호아킨 피닉스가 배역을 담당. 한국어 더빙판 성우는 김일. 베스테아리로서의 전투 능력은 어딘가로 증발하고 찌질+시스콘[38] 기질이 다분한 악당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상 만큼은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조각상이 입은 갑옷을 그대로 가져온지라 간지가 철철 넘친다. 여기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베어허그로 질식시켜 살해한다.[39] 누나인 루킬라는 암살 시도 얘기가 없어진 채 선역으로 부각되었다. 사실 이 정도면 대체역사물이고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고증보다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비주얼에 좀더 집중했다고 감독 리들리 스콧이 당시 밝힌 적이 있었다.[스포일러]

4.3. 《로마 제국의 멸망》


[image]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라프 남작(트랩 대령)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콤모두스로 열연한 고전영화 로마 제국의 멸망[40]에서는 생부가 유명 검투사라는 설정이 나온다. 클라이막스에서 이 비밀이 밝혀지고 격분한 콤모두스는 친부를 죽이게 된다. 황후의 부정을 아버지 아우렐리우스가 눈 감아주었고 대신에 믿을 만한 부하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공화정을 부활시키려고 했는데 콤모두스의 부하가 그것을 알고 독살한 것으로 처리된다. 콤모두스도 나중에 그 진실을 알게 되고 원래 황위에 오를 수 있던 부하도 그걸 알지만 일부러 황위를 포기하고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긴다.

4.4. 《비르투스


고증에 충실하게 무패의 검투사로 묘사되며 서쪽 나라에서 300승을 올린 웨르키우스가 콤모두스에게 도전하지만 패배하고 콤모두스는 내심 서쪽 나라에서 최고라고 칭송받는 자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시시하다고 한숨을 쉰다.
원로원의 의원인 루프루스의 아내이자 미녀인 류밀라가 콤모두스의 하렘에 들어가서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데, 모든 음모를 알고 있었던 콤모두스는 그녀의 앞에 남편과 두 자녀의 목을 접시에 담아 대령하는 잔인한 성격을 보인다. 이후 류밀라는 가족들의 잘린 목 앞에서 콤모두스에게 강간당하며 그의 성노예가 된다.

4.5. 《Reign of Blood》


넷플릭스 드라마 Roman Empire Reign of Blood는 콤모두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자로서 방탕하게 지내다가 게르마니아에서 전투 중인 아버지에게 교육 받으러 강제적으로 보내진다. 의욕도 없는데다가 아버지도 자신을 시원찮게 봐서 그러려니 하던 날, 어머니가 정치적 음모로 아버지에게 암살당한 것을 시점으로 각성한다. 제왕의 교육을 제대로 받기로 결심, 기초가 되는 검술부터 시작하였고 재능이 있었는지 아버지가 인정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인다.

4.6. 《무사만리행


한국의 고대국가인 고리국의 무사가 나라 멸망후 로마의 검투노예로 활동하게 되는 무사만리행에서도 등장한다. 실제 역사대로 검투에 미치고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 하는 폭군황제로 나온다. 인간이라 할 수없는 괴력의 소유자로 건장한 남성 6명이 겨우든 곤봉을 한손으로 들고 사자 3마리와 싸워 이길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주인공에게 죽는 것이 확실시 되는 인물[41] 상세한 내용은 항목참조.

5. 여담


  • 선입견 탓인지 묘하게 흐리멍텅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대에는 꽤 괜찮은 미남으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 콤모두스는 균형 잡힌 몸매에 남자답고 잘생긴,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눈은 이글거렸고, 머리는 날 때부터 금발에 곱슬로 햇빛을 받으면 하도 반짝거려서 마치 금가루를 뿌린 듯 여겨질 정도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를 불가사의하게 여겨 하늘의 후광이 그의 머리를 비추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
>헤로디아누스, 1.7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선 수백 명의 미소년, 미소녀들을 모은 하렘이 있었다는데 그 숫자가 각각 33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며 매일매일 술판을 벌이고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등 타락의 극치를 달렸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진짜라는 주장도 있고 가짜라는 주장도 있다.

신빙성이 높지 않다는 쪽에서는, 물론 콤모두스에게는 여러 명의 후실 황비가 있었으며 정실 황후는 귀찮다는 이유로 폐서인하고 살해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콤모두스의 후실 황비와 자녀들에 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콤모두스가 하렘 같은 것을 운영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로 이런 하렘이 있었다는 측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보면 콤모두스가 자신의 첩들이나 자신의 아들들까지 모조리 제거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콤모두스가 즐겼다는 하렘이 있었으며, 자식이나 첩들이 없던 이유는 콤모두스가 그들을 모두 죽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슬하에 자녀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며 여러 명을 얻었는지 몰라도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원로원과 근위대에게 참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콤모두스의 자녀들이 잠시 동안의 내란기에서도 무사히 생존했다고 해도 후에 황위에 등극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며, 비록 그가 콤모두스의 '기록말살형'을 철회했다고 해도 냉정한 세베루스 황제가 콤모두스의 후궁과 자녀들을 살려둘 리 없다.
  • 이 황제의 제위기간에 중국에 일어났던 것이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반동탁연합, 즉 삼국지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당시 황제가 누구였는지 생각하면 평가가 어째 여러모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을 준다.

[1] 기록말살형 선고 후, 복권[2]로마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3] 180년 3월 17일부터 단독 통치.[4] 카시우스는 콤모두스의 치세에 20대~30대를 보낸 인물이다. 게다가 서기 180년부터 원로원 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해, 실제로 콤모두스를 접견한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당대의 평가.[5] 네로는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군대 모두에게 탄핵된 다음 국가의 적으로 몰락하긴 했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좀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해서 그렇지 나름대로 노력이라는 건 했었다. 또 카라칼라는 잔인하고 분노조절을 못한다고 까였어도 암살당한 뒤 기록말살형 언급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의 암살에 관여한 마크리누스에게 신격화됐다.[6]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동안 황실 적통 출신으로 태어난 이들이 있긴 했다. 이중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브리타니쿠스는 공동계승권을 유언장으로 보장받았음에도 끝내 제위에 오르지 못했고,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숙청됐다. 그리고 3대 황제 가이우스는 즉위하긴 했지만 콤모두스처럼 예정대로 제왕교육과 훈장, 명예을 받고, 원로원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관직을 경험하고 제위에 오른 케이스가 아니다.[7] 오늘날에는 재평가와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네로,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폭군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원로원과 부유층은 원한이 엄청났는데 공포정치가 기본에다가 트집 잘못 잡히면 숙청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정도면 얼마나 원한이 심했는지 알 수 있다.[8] 카라칼라가 무능하다고 하지만 콤모두스에 비하면 양반인 것이, 오히려 도미티아누스 마이너카피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시민권 부여는 의도는 좋았고 결과물도 나쁘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며, 군사적 재능과 관련해서만큼은 당대에도 지금도 업적을 인정한다. 그가 정비한 리메스가 260년 제국의 위기 전까지 방위선을 지탱해 준 것이 사실이기 때문. 게다가 그 위기도 리메스 체계 자체가 구식이 돼서 위기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황제가 포로로 잡히고 동방 방위선이 완전히 붕괴되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하여 제국이 방위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게 더 컸다.[9] 로마 황제 중 본인의 취미활동 분야나 정치스타일에 맞춰 새로운 트렌드를 개발하고 바꾼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이중 긍정적으로 영향을 준 이들로는 칼리굴라와 하드리아누스가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칼리굴라는 즉위 후 전차경기를 주최하면서 자신과 율리우스 가문 홍보 중 펼친 전차경기 룰을 과격하고 박진감 넘치게 바꿔서 이 부분에서 인기를 주도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수염과 패션, 그리고 그리스 문화를 긍정적으로 도입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당대 사람들인 수에토니우스와 타키투스에 따르면 잔혹한 심문방식과 고문법을 개발해 후대 로마황제들의 반역죄 심문 수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까였다.[10] 친정 당시 한국 나이로 콤모두스는 스물, 연산군은 열아홉이었다. 아버지의 재위기간 중 태어나 즉위한 최초의 계승자이며, 12년을 단독 통치하다가 심복에게 끝을 맺었다는 점도 닮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명군이며 그런 아버지의 재위기간 및 본인의 즉위 초까지는 폭군의 기질을 발하지 않고 아버지의 치세 분위기가 지속되다가 일련의 사건이나 정변 이후 흑화되어 폭군 기질이 나타난 것까지도 겹친다.[11] 게르만 부족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하면 정치적,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기에 로마군의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12]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반 죽여놓은 상태에서 죽은 후 파르티아와 화해했다.[13] 그래도 그나마 콤모두스를 보필하던 관료들도 자신의 아버지가 통치했을 시절에 보좌한 경력이 있는 데다 오랫동안 정계에 몸을 담은 덕분에 관록과 정치적 능력과 감각이 있는 인재들인지라 그들의 조언을 받으면 아버지보다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로마를 무난하게 통치하고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자는 그러기는커녕 자기한테 간언하는 것을 자기한테 대든다고 멋대로 여기는 등 시덥잖은 이유로 이 유능한 관료들을 처형시키거나 공직에서 추방시켰으며 인사관리도 허술해서 부패하거나 무능한 관료들이라도 자기 비위를 맞춰주면 무조건 고위직을 하사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로마 정치판을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었다.[14] 별개의 싸움 중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15] 누나의 연인관계(?)라는 설정 때문인지 이 시대를 다룬 2차 매체에서는 반드시 이 사람과 루킬라를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등장한다.[16] 대지의 여신으로 가장 위대한 어머니로 숭배된다고 한다.[17] 퀸틸리 형제 소유의 고급빌라였지만, 콤모두스가 이들에게 빼앗아 차지한 대저택이다. 현재도 그 뼈대는 유적으로 남아있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18] 라틴어로 작별인사. 잘 지내라 혹은 안녕 정도의 의미.[19]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폼페이아누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원로원 의원으로 복귀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인 193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20] 흔히 대중들이 생각하는 사하라 사막 이남에 서식하는 거대한 아프리카코끼리(Loxodonta africana)가 아닌, 북아프리카산 난쟁이코끼리(Elephas falconeri)라고 어깨 높이 2미터쯤의 작은 종이다. 현재는 야생에서 멸종. 물론 현생 아프리카코끼리 등의 거대한 코끼리와 비교할 때나 작고 약하지 사람보다는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출처1-17] 황제사(Augustan History) 17.1[21] 도미티아누스는 군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22] 재위 4여년 만에 자신의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칼리굴라의 경우만 봐도 대도시 로마로 직접 깨끗한 물을 공급해주는 수도교 2개를 건설하기로 계획해 실행에 옮기고, 그리스에 운하를 파게 해 동방 속주 일대의 경제를 활성화시킬 기반을 만들었다.[23] 로마군제 개편, 예방 전쟁 등 군사적 업적[24] 카라칼라의 경우에는 콤모두스와 달리 암살 후 공식적으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악행과 잇딴 실책들은 당대부터 콤모두스처럼 폭군으로 인정돼 비난받았다.[25] 칼리굴라는 8개월만에 중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된 직후부터 너무 빨리 원로원과 대립하면서 원로원 내 인기가 떨어졌다. 그는 사촌이자 조카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인 이후, 원로원에게 자신과 누이들에 대해 신격화 형식으로 충성을 맹세케하고 속주 총독임명권과 조폐발행권까지 빼앗아 암살 직전 원로원 내에서 불만이 상당했다.[26] 실제로 칼리굴라 암살 직후, 원로원에서는 공화정 복귀 및 칼리굴라 기록말살형 시도 움직임의 낌새가 있어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에게 죽은 조카의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물론, 원로원에게 클라우디우스의 부탁은 정중함이 포장된 협박이었다. 왜냐하면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에게 부탁할 당시, 근위대 내 칼리굴라 암살참가자들과 군사호민관들을 색출해 전부 죽인 상황이었고, 로마 내 정보를 장악한 뒤 일찌감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의 업적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여론을 완전히 친 황제여론으로 돌려놨다, 아울러 그는 이탈리아 내에서 유일한 무력집단인 근위대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즉위 직후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도 싱겁게 끝나 원로원 입장에서는 클라우디우스의 부탁을 들어주는게 체면치레할 상황이었다.[27] 대머리에다 온 몸에 털이 북실북실한 괴물이었다, 간질환자였다, 자신의 여동생들과 근친상간을 맺었다, 앞줄에서 관람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부자들을 사자밥으로 던져줬다, 원로원 의원들의 부인들을 희롱하고 개처럼 발정했다, 할아버지 티베리우스를 베개로 질식시켜 죽이고 돌아와서 슬픈 연기를 했다, 매춘세를 신설하고 가문의 온갖 재산을 내다 팔았다, 하늘에 큰 재해가 나길 기원했다, 자신의 애마를 집정관으로 삼았다 등.[28] 로마가 그리스 문화를 많이 수용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1세기까지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애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로마인이 많았다. 철학만큼은 예외였지만 그것도 쾌락주의 같은 경우는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네로의 그리스 문화 애호는 로마 제국의 그리스화가 완료된 동로마 제국 때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29] 물론 자기 잇속만을 챙기기 위해 굉장히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당, 송, 원, 명, 청 제국 때 전 국토가 하나로 연결되어 상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 바로 이 대운하다.[30] 하지만 조각상이나 기타 문헌을 보면 생긴 게 완벽하게 닮았다고 한다. [31] 어느 정도였나면 콤모두스 사후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지만 뭘 한 게 없으니 이름을 지울 기록조차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냥 용상에 등극하지 말고 콜로세움의 검투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좋을 뻔 했다.[32] 루키우스 베루스는 자신의 외모와 금발머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미남이긴 했지만, 적어도 놀고 먹는 듯한 이미지여도 본인이 할 일은 진짜 최선을 다하면서 놀았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동생에 대해 형으로서 많은 인내심을 갖고 살면서도 아주 사랑했다고 직접 기록했다. 또 그는 놀고 먹다가 요절한게 아니라 게르만족이 본국 이탈리아 북부를 처들어온 뒤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위기상황에서 마르쿠스와 함께 군을 이끌고 싸운 뒤 로마로 돌아가다가 과로로 쓰러져 사망했다.[33] 카라칼라와 게타는 일찍부터 서로 이미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넌 상태라서 집정관 공동취임도 아버지가 황제로서 명을 내려 강제로 화해시키고 가까스로 취임시킬 정도로 험악했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요크에서 숨이 거의 헐떡거린 순간까지도 두 아들에게 “사이좋게 지내고, 항상 믿고 의지해라”고 간곡히 부탁할 정도였다.[34] 세베루스의 걱정처럼 그의 두 아들은 서로 대립하고 황궁까지 반으로 나눠 사용했으며, 매일같이 내치 전반에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제국을 동서로 나눠 통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분할 약속은 어머니의 반대로 실패했고, 결국 1년 만에 골육상쟁이 발생해 카라칼라가 동생 게타를 어머니 앞에서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지지자들 20,000명까지 학살했다.[35] 우리나라만 봐도 나라가 멸망한 건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초 혼란의 극이라고 볼 수 있었던 왕자의 난이 있다. 그나마 태종은 혼란을 종식시키고 이후 아들이 성군의 치세를 펼칠 수 있도록 조선 초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사실 그나마 전제군주제에서 무난하게 직계자식에게 계승하고 정통성을 모두 갖춘 왕이라 할지라도 서열순위에서 더 밀리거나 아예 계승권에선 논외였을 다른 직계 형제들이나 방계 친족이 들고일어나서 왕위를 차지하려들거나 실제로 차지하는 상황도 역사 속에서 반복된 바 있다.[36] 혈족에게의 세습하 대신 투표로 지도자를 뽑고 법적으로 탄핵 같은 절차도 써서 지도자를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민주정 사회다. 고대 아테네나 현대 민주정 국가들이 그 예시. 다만 당시 로마는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는 세습형 전제군주제였다. 이런 제도를 따르는 모든 국가 지도자의 공통점은 혈족, 특히 직계자식을 무시하고 권력을 세습시켜줄 다른 후계자를 만들기에 부담스럽다는 점이었다.[37] 또한 콤모두스와 그 누나의 예시처럼, 전제군주제 하의 후계세습 구도에선 직계자식들끼리도 왕좌를 받을 수 있던 자와 없던 자끼리 실권다툼이나 아예 자리 그 자체를 놓고 벌어지는 암투가 일어나는 것도 흔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후계자로 삼을 직계자식들의 인재풀이 어떤가와는 별개로, 좀 멀쩡했던 직계들끼리도 암투로 서로 숫자를 줄여버리거나 암투 등으로 인해 자질을 잃을 확률도 높았다. 게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민주정에 비해 지도자를 아랫사람들이 정당한 방식으로 쉽게 몰아내기도 어렵다는 점 역시 전제군주제의 한계이다.[38] 작중 대사에 "누나는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내가 누나를 사랑하니까..."란 대사가 나오는데 웹툰작가 정철연마린블루스에서 이 대사를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꼽기도 했다. 사랑받지 못한 자의 슬픔을 표현한 이 대사 하나로 악역인 콤모두스를 동정하게 되었다고.[39] 배우 호아킨 피닉스는 이 씬을 찍다가 진짜로 기절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꽤 유명한데 너무 감정이입이 돼서 호흡곤란이 왔을 정도였다고 한다.[스포일러] 게다가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인 막시무스와 검투장에서 1대1 대결을 벌이다가 허무하게 패배하고 사망한다. 황제이면서 검투사로 나오는 건 어느 정도 실제역사와 동일하지만 실제 역사인물은 상술했듯 여러 전적도 있고 과장이 어느정도 있긴 하지만, 일단 하루에 곰 100마리를 때려 죽였다는 인간흉기급의 괴물로 서술되어 있을 정도인데 막시무스도 수십 년간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초베테랑 겸 글라디에이터 챔피언이지만 고문도 실컷 당하고 칼빵까지 전에 맞은 상태에서 너무나도 간단하게 황제를 쳐죽인다. 거기에 더 심하게도 자꾸 이름이 거론되다가 콤모두스가 엎어져 있는데 등장하는 사람은 300년 전에 가문이 멸망한 그라쿠스다. 사실 초반에 여러 명과 동시에 대련하면서 검술을 연마하는 장면도 나왔고, 막시무스와의 대결에서도 제법 화려한 칼솜씨를 뽐내며 초반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간다. 단 막시무스가 콤모두스가 미리 찌른 상처 덕분에 반쯤 실신 상태였다는 점, 그리고 제 실력을 발휘해서 콤모두스를 정면승부로 이겼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력 자체는 확실하게 막시무스의 한 수 아래.[40] 원제나 시대를 보면 로마 제국의 쇠퇴라고 보는 게 더 낫다.[41] 실제 역사에서 황제를 암살한 사람의 이름이 주인공 이름과 같은 나르시수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