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실러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폰 실러, 1759.11.10 – 1805.5.9)
1. 개요
독일의 문학가, 극작가, 철학자, 역사학자.
2. 생애
1759년 11월 10일에 독일 서남부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마르바흐 암 네카르(Marbach am Neckar)에서 태어났다.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머리가 좋았던 실러는 본래 신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당시 뷔르템베르크의 영주인 오이겐 공작의 눈에 띄어 영주의 강권 끝에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법학을 전공했으나 16살에 전공을 의학으로 바꿨다. 실러는 엄격한 전제주의적 생활에 치를 떨며, 존경하던 괴테를 멀리서나마 보면서 언제나 억압적인 폭군 오이겐 공작이 괴테라는 작가 하나를 정중히 모시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읽고 감명을 받아 익명으로 첫 작품인 군도를 발표한다.
그러나 군도의 내용은 반전제적이고 반귀족적인 것으로써 이를 알게 된 오이겐 공작은 불같이 화를 내며 실러를 구금시켰고 나중에는 의학 서적 집필 외 그 어느 서적의 집필행위도 모두 금지시킨다. 결국 실러는 사관학교를 탈출하여 다른 영지로 달아나 가명으로 살아갔다.
1782년에는 슈투트가르트와 만하임으로 가 머물며 희곡 '피에스코'(Die Verschwörung des Fiesco zu Gunua)를 썼으며, 그 후로는 프랑크푸르트 등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았다. 듣보잡 극작가로서 무시당하고 빵 한두개로 하루를 버티던 적도 많았다. 그러면서도 1787년에 돈 카를로스를 내놓는 등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 이후 예나에 역사학 교수로 초빙받았다. 강의를 하면서 역사학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또한 본래 철학 교수 자격이 있었다. 예나 정착시기 이후 칸트 연구에 열중했다. 칸트 연구에 있어서의 성과는 미학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윤리와 교육에 관련해서도 족적이 있다.
1794년에는 예나에서 그가 존경하던 괴테와 처음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는 괴테와 친해지면서 독일 고전주의(Weimarer Klassik) 문학양식을 확립하였으며, 아예 괴테가 있는 바이마르로 이사를 가서 작가 및 잡지 편집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비로소 인정받아 책도 잘 팔리고 1802년에는 귀족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von 칭호를 붙이게 되었다. 이렇게 성공적인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몇 해 안가서 1805년 5월 9일에 바이마르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1805년 친하게 지낸 괴테가 실러에게 연하장을 쓰다가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써서''' 깜짝 놀라며 새로 쓴 일화도 있다. 괴테는 뭔가 불안하다고 느꼈는데 실러가 차츰 아프기 시작했던 것. 결국 연하장 글처럼 실러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만 45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에 괴테는 서재에 홀로 앉아서 아무 말없이 하루종일 슬퍼했다고 한다.
3. 작품
- 군도
- 환희의 송가
- 돈 카를로스
- 빌헬름 텔
- 다몬과 핀티아스(Damon und Phintias)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달려라 메로스의 원전.
-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 - 스코틀랜드의 메리 1세를 다룬 희곡.
- 오를레앙의 처녀(die Jungfrau von Orleans) - 잔 다르크를 다룬 비극.
- 발렌슈타인(Wallenstein) -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다룬 희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