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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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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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튀링겐주에 위치한 도시로 주도인 에어푸르트에서 기차로 약 30분 걸리며 라이프치히에서는 약 80km, 뉘른베르크에서는 약 170km이다.
'''인구는 2018년 현재 65,090명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도시이지만 이 도시가 독일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나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문학, 철학, 음악, 과학등의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거의 모두 이 도시를 거쳐갔고 또 이 도시 안에서 크게 활약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프리드리히 실러, '''알렉산드르 푸시킨''', '''프란츠 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실리 칸딘스키, 발터 그로피우스, 칼 자이스 등. 말 그대로 '''독일 문화의 중심지'''이자 독일 계몽주의의 산실인 셈. 그래서 베를린이 독일의 정치적 수도, 프랑크푸르트가 경제적 수도라면 문화적 수도는 바로 바이마르란 말이 나올 정도이다.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또 이 도시의 이름이 공화국의 별명에 붙여졌다. 이러한 문화 중심지 답게 바이마르 안에는 수많은 문화유산이 자리잡고 있다.
2. 역사
2.1. 초기
바이마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세기 후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개신교가 바이마르에 들어오게 된다. 이때 마르틴 루터도 몇 번 바이마르에 머무른 기록이 존재한다. 이때 무역으로 잠시 번성했으나 이후 에어푸르트에 밀려 쇠퇴한다. 이후 바이마르 공국이 성립된다.
2.2. 황금시대(1758년 ~ 18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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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1803년》. 독일의 화가 Otto Knille이 1884년에 그린 벽화. 아테네 학당과 마찬가지로 바이마르에서 열린 가상의 모임을 상상하여 그려낸 것이다. 가운데의 석상은 호메로스의 조각상이며 조각상에 팔을 걸친 사람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맨 오른쪽의 인물이 프리드리히 실러, 오른쪽에서 세번째로 서있는 인물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3] , 그 외의 인물들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 빌헬름 폰 훔볼트[4]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카르스텐 니부어,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이플란트,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클링거,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티크, 장 파울,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석상 밑의 여인은 합창과 가무의 뮤즈 테르프시코레이다.
1714년 작센-아이제나흐 공국과 작센-바이마르 공국이 동군연합이 되었다. 쇠퇴 이후 그저그런 시절을 보내던 바이마르가 독일의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시기는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였다. 이 당시 바이마르 공국의 대공비였던 안나 아말리아(Duchess Anna Amalia)와 그녀의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공은 문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고 많은 투자를 한다. 이는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되는데 바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가 바이마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재직하면서 파우스트 등의 걸작들을 집필하면서 동시에 바이마르를 예술의 중심지로 꾸미는데 일조한다. 1815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으로 공국이 승격된다.
2.3. 은의 시대(1832년 ~ 1918년)
1832년 괴테가 타계하면서 바이마르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듯 하였으나 바이마르의 문화적 영향력은 계속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프란츠 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등 걸출한 철학자, 음악가, 문학가들이 바이마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독일의 문화적인 역량은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또한 이시기에 바이마르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건축 붐이 일기 시작한다. 다만 이러한 문화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는 자체적인 산업 기반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고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벌어진 독일 혁명으로 인해 제정이 무너지자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도 함께 무너지고 바이마르에서 새로운 헌법이 발표됨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다.
2.4.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 ~1933년)
이 시기에도 바이마르의 영화는 꺼지지 않았다. 이 당시 독일 뿐만 아니라 훗날 전세계 건축에 영향을 끼칠 새로운 건축 사조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가 이곳에 바우하우스 학교 (훗날 데사우로 이전)를 설립하면서 이 건축 사조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곧 들어선 나치 정권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었고 많은 건축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2.5. 나치 독일
이들이 이 시기 바이마르에서 한 주요한 활동은 강제수용소의 건설이었다. 바이마르의 교외에 나치의 강제 수용소인 부헨발트(Buchenwald)를 세웠다. 1937년 세워졌으며 1945년까지 이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는 56,545명으로 추산된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바이마르 시민들은 근처에 수용소가 있었다는 것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이 수용소에 진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바이마르 시민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종전 후 연합군은 바이바르의 시민들을 데려다 나치 독일의 만행[5] 을 보게끔 했다.
2.6. 동독 시절
- 참고항목 : 독일민주공화국
2.7. 통일 이후
- 참고항목 : 독일연방공화국
3. 볼거리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볼거리는 매우 많다. 특히 도시 중간 중간에 이 도시에서 활약한 인물들의 두상이나 동상이 세워져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을 것이다.
-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Herzogin Anna Amalia Biblioth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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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박물관
- 실러 박물관
- 니체 하우스
- 바우 하우스 박물관
- 시청(Rathaus)
- 바이마르 궁전
- 괴테-쉴러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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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헨발트 강제수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