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몬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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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ter Cornelis "Piet" Mondrian(나중에 성을 Mondrian으로 바꿨다.)
1872년 3월 7일 ~ 1944년 2월 1일
1. 개요
2. 생애
3. 작품의 특징
3.1. 화풍의 변화
4. 여담


1. 개요


네덜란드 출신 화가로 점, 선, 면만을 이용한 ''''차가운 추상''''의 거장으로 꼽힌다.

2. 생애


1872년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아 화가였던 숙부에게서 그림을 배웠는데 이때 그의 숙부는 자연미를 중시했다. 후의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그 자체다. 20세에 교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사 자격증을 땄고, 같은 해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이때 당시만 해도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1년 입체파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의 작품이 크게 변화한다. 현대 미술을 더 가까이 접하기 위해 그해 파리로 건너가 입체파를 연구하기 시작, 풍경을 점차로 추상화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1914년, 잠시 귀국한 사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네덜란드에 고립된 몬드리안은 이즈음부터 수직, 수평선만으로 그림을 구성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의 작품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몬드리안 스타일의 그림들인데, 이렇게 자신의 작풍을 정립한게 그의 나이 무려 42세. 그야말로 대기만성의 전형인 셈이다.
1917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다른 현대 화가들과 함께 데 스틸(De Stijl, 양식)이란 그룹을 형성하고 같은 이름의 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이 모임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신조형주의'라고 규정하고 잡지에 자신의 신조형주의 이론에 대해 게재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수직선, 수평선, 원색, 무채색만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진리, 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를 위해 그림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였다고 주장한다.
1919년 전쟁이 끝난 후 몬드리안은 다시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가벼운 수채화들을 그리는 한편으로 계속 추상화 탐구를 지속하던 몬드리안은 이때 데 스틸 그룹과 멀어지게 된다. 이들에게 갈등을 일으킨 것은 다름아닌 '''대각선을 그림에 넣느냐는 문제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스틸 대신 바우하우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자신의 아틀리에를 자신의 작품 스타일에 맞추어 개조한다.
파리에서 그의 생활은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엄격했다. 개조한 아틀리에만 해도 삼원색과 무채색의 직사각형 보드만으로 꾸미고 색의 통일을 위해 장식용 꽃까지 흰색으로 칠해놨다. 또한 식생활면에서도 비슷해 손님이 왔을 때에도 콩, 감자 요리 등으로 소박하게 차려놓고 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1928년, 그의 나이 56세에 지인의 딸 리리를 우연히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이때 그의 아틀리에에 유일하게 자연색인 꽃화분을 장식해 놓을 정도로 둘의 사랑은 깊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리리의 나이는 '''20살'''이었다. 당연하게도 둘의 사이는 리리의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였고, 그녀가 아버지의 강요로 네덜란드로 돌아가면서 둘의 사랑은 좌절되었다.
60대 들어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몬드리안의 작품들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이 인기가 높아졌고, 그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몬드리안룩이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몬드리안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다시 뉴욕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뉴욕의 역동적인 분위기, 당시 유행하던 비밥 재즈에 심취한 몬드리안은 뉴욕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기존의 검은 수직선, 수평선에서 원색의 선들로 캔버스를 채운다. 몬드리안은 1944년 2월 폐렴으로 사망한다.

3. 작품의 특징


'''''《빨강, 파랑과 노랑의 구성 II(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피트 몬드리안, 1930, 캔버스에 유화''.
몬드리안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차가운 추상'[1], '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이라고 할 수 있다.[2] 위에서도 말했듯이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진리, 근원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가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던 신지학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 이렇게 엄격했던 그의 작품세계가 많이 활달하게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원색을 많이 사용하여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3.1. 화풍의 변화


몬드리안이 처음부터 차가운 추상의 화풍을 추구했냐고 하면 그건 확실히 아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나무 그림들의 화풍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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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나무>, 19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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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나무>,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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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핀 사과나무>,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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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있는 타원형 구성>, 1913년
비록 짧은 기간 내이지만 큰 화풍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를 인상파 화풍과 유사하게 표현하였던 초기 그림에 비해 갈수록 선이 단순화되고 선의 리듬감을 강조하기 시작해 현재 몬드리안의 화풍으로 널리 알려진 '차가운 추상'의 화풍으로 완성되었다. 몬드리안은 이런 자신의 화풍을 '신조형주의'로 직접 명명했다.

4. 여담


  • 춤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사교 댄스를 좋아해 배우기도 했는데 실력은 꽝이었다고 한다. 스텝도 제멋대로에 엇박자를 내기 일쑤라서 주위 사람을 여러차례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 그가 작품 스타일에 맞춰 개조한 아틀리에를 보고 한 젊은이가 '이 보드들이 움직이면 더 보기 좋을텐데'라고 말했지만 그는 이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유는 '이미 이 자체로 완벽한데 뭘 움직이냐'다. (참고로 이 말을 한 젊은이는 모빌 아트와 키네틱 아트를 창시한 알렉산더 칼더이다.)
[1] 기하학적 추상이라 하기도 한다.[2] 서울 시내버스 도색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몬드리안 도색도 이와 같은 형태를 띄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