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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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28년, 요안니스 2세의 치세간 벌어진 동로마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전쟁, 로마인들은 이 승리를 발판으로 동방 원정을 위한 서방 속주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음은 물론, 수십년 뒤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 왕국 자체를 속주화시키기까지 이르렀다.
2. 발단
2.1. 헝가리의 왕위 쟁탈전
1095년 헝가리 왕자 콜로만은 자신의 형제 알무스와 그 일가를 내쫒고 왕위에 올랐다. 알무스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로마령으로 도망쳤는데, 이는 당시 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둘째, 요안니스 황자가 알무스의 친척인 피로스카 공주와 약혼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정계에 신경을 쓰지 않던 피로스카 공주였지만, 그녀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는지 알무스와 정치범들에게 환대를 베풀어주었고, 평소 피로스카와 금슬이 좋던 요안니스 황자[1] 또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마케도니아에 영지를 수여하기까지 하였다. 콜로만은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빠 당시에는 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갈등의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다.
2.2. 전초
이후 콜로만 사후에 그의 후계자이자 알무스, 콜로만의 형제인 스테판 2세가 1116년에 집권하자. 갈등은 재점화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정식으로 알무스와 망명자들을 소환하라는 항의를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1118년 제위에 오른 요안니스 황제는 헝가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좋은 기회를 내버릴 리가 없었고, 장장 10년간이나 스테판의 요구를 씹어버렸다. 그동안 알무스의 마케도니아 영지는 반 스테판 헝가리 귀족들의 구심점이 되어갔다.
1125년, 스테판 2세는 군대를 모아 베오그라드, 니시 등의 헝가리 - 동로마 국경을 공격했고, 요안니스 황제 또한 3로로 요격군을 보내 헝가리 국경 안까지 반격을 가하는 등 공방전이 벌어졌다. 기록은 부정확하지만, 헝가리의 선제 공격과 로마인들의 반격이라는 루틴이 각각 1125년, 1126년, 1127년에 계속해서 반복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128년경, 결국 스테판 2세는 대규모 군대를 결집해 전선 내부로 깊숙히 공격해 들어갈것을 결정했고, 동로마령 세르비아의 라쉬카 주판(대족장) 볼칸과 결탁해 내부에서의 반란 또한 선동하기 시작했다. 1128년, 다시금 최전방 요새인 베오그라드의 봉화가 울리고, 다뉴브강을 따라 전쟁이 소용돌이쳤다.
3. 하람 전투
3.1. 헝가리군의 반전
헝가리군은 스테판 2세의 지휘 하에 다뉴브강을 넘어 베오그라드, 니시를 점령하고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당시 불가리아 테마의 중심지였던 세르디카와 필리포폴리스가 헝가리군의 손에 유린당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은 승리를 거둔 이후 갑자기 병력을 반전하여 북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헝가리군에게 악재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중앙군을 모은 요안니스 2세가 헝가리군이 예상 밖으로 빨리 필리포폴리스에 도착한데다가[2] 로마인들의 함대가 다뉴브강을 거슬러 헝가리군을 포위하려 시도했고, 스테판 2세 본인도 와병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르쿠스 계곡의 로마 도로를 탄 요안니스의 중앙군은 북상하는 헝가리군을 맹렬히 추격했다. 헝가리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온존한 채로 다뉴브 강 북안에서 로마인들의 반격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테판 2세의 일사불란한 지휘 하에[3] 이들은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세르비아와 헝가리의 국경선에 있는 하람의 요새와 그 주변에 진을 치고, 비교덕 안전한 도나우와 네라 강의 지부에서 도하를 시작했다.
헝가리군 대부분이 도하를 마치고 헝가리 국경으로 들어온 상황에서, 요안니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는 도박을 감행하여 수륙 양면으로 헝가리군을 포위하기로 했다. 요안니스 킨나모스의 기록에 따르면, 랑고바르드족 기사들과 투르코폴레스로 구성된 용병단이 하람 요새 하류 2km 지점에서 몰래 도하했고, 요안니스 본인은 로마인으로 이루어진 본대를 이끌었다. 그는 직접 하람 요새의 전면으로 트리메레를 타고 공격을 선도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3.2. 다뉴브 강의 피바람
작전의 승패는 일사불란함에 있었다. 양 군이 비슷한 크기인 상황에서 병력을 나눈 터라 한쪽이라도 더 빠르게 적에게 공격을 가한다면 각개 격파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트리메레에 설치된 노포와 로마 장궁병들의 사격을 시작으로 다뉴브 북안의 랑고바르드족, 투르코폴레스 기병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륙하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강가를 보고 집결해있는 헝가리군의 측면은 카우치드 랜스에 통달한 서구 기사들과 궁기병들의 기마 궁술에 최적의 먹잇감이었다. 용병대는 돌격을 통해 적을 흩어버렸고, 적절한 타이밍에 상륙한 로마인들의 군대는 바로 방진이 무너진 이들을 도륙했다. 하람 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 개의 헝가리 요새들도 그날부로 접수되었으며, 엄청난 병장기와 금품, 포로들이 노획되었다.
하람이 점령당했음에도 학살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건넜던 가교와 얕은 강둑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려했지만 로마 함대는 가교를 그대로 박살내며 패잔병들을 익사시켰다. 로마군은 전투 와중에 헝가리인들을 강에 집어던졌는데, 이 숫자가 하도 많은 통에 시체로 얕은 강가가 일시적으로 메워져 헝가리 패잔병들이 도망칠 수 있었을 정도였다. 병상의 스테판 왕은 겨우 도망쳤지만 이미 로마군들은 빼앗긴 영토를 모조리 되찾은데다, 피해를 상회하는 영토와 전리품을 얻은 뒤었다.
3.3. 세르비아 반란 진압
제국군은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라쉬카의 대족장이 일으킨 반란을 뭉개버렸다. 지원을 약속한 헝가리군이 박살난 상황에서 이들은 잘 훈련된 대군을 막을 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이 제국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들에겐 다행이게도, 요안니스는 이들에게 관대했다. 반란을 일으킨 라쉬카의 부족들과 헝가리인들은 모두 아시아의 니코메디아와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 국경선으로 재정착되었고[4] , 오히려 토지와 상여금을 지급받으면서 다음 아나톨리아 정벌의 예비 전력으로써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요안니스가 부여한 역할을 톡톡히 했다. 12세기 ~ 13세기동안 '아나톨리아의 세르비아인' 부대에 대한 기록은 심심찮게 등장하며, 그 숫자가 어찌나 많았는지 14세기까지도 아나톨리아에 세르비아인 풍속을 가진 동로마인들이 꽤 있었을 수준이었다. 세르비아는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이 이후로 4차 십자군시기까지는 대체로 제국의 권역에 확고히 편입되게 되었다.
4. 전후
4.1. 헝가리의 혼란과 반격
아픈 몸을 끌고온 스테판을 기다리는것은 책임론이었다. 보리스 칼라마노스와 이반 백작은 각각 왕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병구를 추스린 스테판은 이 두 참칭자들을 각지에서 격파하였다. 이반 백작은 참수당했지만, 이번에도 보리스 칼라마노스와 그의 병력은 남쪽으로 달아나 로마에 귀순해버렸다. 스테판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로마를 다시 침공해야했다.
스테판은 다음 해인 1129년에 다시 거병하여 세르비아의 중심 도시인 브라니케보를 점령하고 농성했지만 제국은 보란듯이 다시 대군을 편성해 헝가리군을 박살냈고, 이번에도 오히려 헝가리의 도시인 시르미움을 점령해버렸다. 결국 헝가리는 두번 연거푸 패배한데다가 1129년에는 원정의 이유였던 망명자 알무스까지 사망하면서, 불리한 평화 협정을 맺을수밖에 없었다.
4.2. 결과
이미 헝가리 왕가와 혈연적으로 이어지게 된 로마 제국은 헝가리 반란자들을 품으면서 그 정치적 영향을 키우게 된다. 보리스 칼라마노스와 알무스 아르파드의 후손들은 각각 모에시아와 마케도니아에 웅거하면서 헝가리의 내정을 간섭, 결국 마누일 1세 시기에는 이 망명자들의 후손이 왕으로 봉해지는 시르미온 전투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