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
1. 老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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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마타[1] 의 노포 타카기야 시니세.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를 뜻하는 말.
일본어로 '시니세'(老舗 しにせ)라 읽으며, 한국의 '노포'는 90년대에 언론에서 일본의 단어를 베껴 음독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오래된 전통이 있는 기업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전통이란 짧게는 100년, '''길게는 천 년 이상 장수하는 기업들을''' 가리킨다. 크기로는 작게는 영세한 음식점부터 구찌, 프라다, 루이비통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도 모두 유럽의 노포에서 비롯되었다. 서양과 일본은 풍부한 잉여 생산물을 바탕으로 상업이 발달해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국가였던 조선보다 훨씬 여유로운 환경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유럽도 마찬가지로 예로 부터 상업을 진흥하려 한 국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다. 상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상인들로 하여금 군주에게 정치적 위협이 되게 하였고 군주 입장에서도 적국의 배를 불려주려는 자들로 밖에 보이지 않아 근대에 와서야 상업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들이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기 보다는 억상정책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상업이 발전할 정도로 잉여생산물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경우 상업을 중시하던 고려시대[2][3] 와 달리 조선시대는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의 모순으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지 못하여 장사를 하더라도 대대손손 이어나가기가 어려웠다. 성리학에서는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 되는 산업이라 하면서도 상업은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이익을 취하는 산업이라 하여 천하게 여겼다. “상업을 쫓는 행위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쫒는 일이다”고 여겨 조선 조정에서는 꾸준히 중농억상 정책을 펼쳤으며 시전이나 보부상 등은 철저히 국가의 등록 하에 움직여야 했다.
조선 시대와는 별개로 대한민국에서 노포가 생기기 어려운 것은 좁은 주거면적으로 인한 아파트 위주의 주거 문화와 재개발이 잦은 도심 환경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6시 내고향 등의 방송에서 국내의 노포를 발굴, 소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지만 외국에 비해 역사는 짧아서 100년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 등으로 인해 상업 및 주거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이런 노포들이 오랫동안 성장하기 어려운 부분도 존재한다.
중국도 문화대혁명으로 상당수 노포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마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점포 1600여 개가 수백 년 역사를 이어가는데, 그중에서 제약회사 '''퉁런탕'''(동인당)이 가장 유명하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는 야마나시현의 게이운칸 료칸으로 무려 '''705년'''에 설립돼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잘못 읽은 것이 아니다. 역사가 1300년이 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텔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사실 일본의 노포 수는 200년이 넘는 업체 혹은 가게의 수가 약 3100여 곳이 넘는다. 이는 당연 세계 1위인 수준으로 2위인 독일의 3배가 넘는 수이다. 사전
일본에 노포가 많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신분상승이 절대로 불가능한 에도 시대의 사회 제도에 있다. 모두가 높은 자리로 오를 수 있다는 꿈을 품었던 전국시대에 엄청난 전쟁을 겪었던 일본인들은 더 이상 신분상승을 꿈꿀 수 없는 사회가 된다면 전쟁 없는 이상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 결과 일본은 조선, 중국과 달리 과거제가 실시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대로 가업을 이을 수 밖에 없는 문화와 높은 장인정신이 생겨나게 된다. 그외에 특정 브랜드나 제품만을 사용하는 일본인 특유의 보수적인 소비경향으로 안정적인 수요가 존재한다는 부분 등이 요인이라 볼 수 있다.[4] 또한 국토 전체가 불바다가 된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포들이 살아남은 것도 주요 이유이다. 재개발이 거의 없고 보수적인 도시 환경도 한몫 한다.
하지만 곤고구미의 사례처럼 경제불황과 인구감소 등 변화상을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는 가게 및 회사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의 자영업이 '''모두''' 3대 이상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비세 인상과 코로나19로 닫고 있는 곳도 늘고 있다.#
오래된 가게라는 말을 놔두고 일본식 조어를 남용한다는 비판이 있다.# 1960년대에 국어사전에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가게라는 의미로 수록되었다고 하지만 이또한 식민지기에 정착한 일본어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게 국어로 착각되어 해방 직후 사전에 수록된 것일 뿐이다. 경영, 경제, 헌법, 수학, 세계, 예술, 신문, 방송 등 이제 와서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뿌리박힌 일본어는 어쩔 수 없다쳐도 노포와 같은 말마저 베낄 필요가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2. 老圃
3. 弩砲
4. 기타
No + '포'로 시작하는 단어와 합쳐져 요상한 줄임말들이 간혹 나온다. 뽀샵질 안한 사진(No + Photoshop)이나 포경수술 안 한 남자 내지는 그 자지(No + 포경수술 → 노포경)를 노포라고 하기도...
[1] 사내는 괴롭다네의 배경이 된 곳.[2] 고려는 상업을 국가 경제를 구상하는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하였고, 상업이 부진한 경우에는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장려하고자 했다.예컨데 시전을 운용해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아냈던 것은 조선과 같았지만, 만약 시전의 벌이가 시원찮다 싶으면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장사를 할 정도로 상업활동 자체에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사실 고려를 세웠던 태조 왕건부터가 상업활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신라 말기부터 해상과 강을 이용하여 상업 활동을 하고 그것을 기반 삼아 지방 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이 많았는데 왕건의 집안 또한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또 고려를 건국한 호족세력 중에는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당연히 상업이 중시될 수 밖에 없었다.게다가 당시 생활 전반에 깔려있던 불교 역시 상업활동에 호의적이었고, 사원 스스로도 상업에 적윽 참여했던 시대상과도 맞물려 있었다.[3] 하지만 고려가 상업을 중시했다고는 하나, 고려 역시 생산의 대부분을 농업에 의존하던 농업국가였고 상업이 선도적 위치에서 경제를 견인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무신정권기와 원간섭기를 거치며 귀족들의 토지겸병과 그로 인한 농민의 유량화, 노비화만 심해졌을 뿐 상업이 발달해가는 흔적을 찾기란 힘들다. 그러니 상업에 대한 인식과 상업의 발달은 별개인 셈이다.[4] 가성비 또는 '현존 최고사양'을 중시하는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신뢰성'과 '익숙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때문에 다소 성능이 타사 제품보다 낮고 조작법이 불편하더라도 자신이 익숙하고 신뢰하는 제품을 구매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한때 일본 제품 상당수가 '잘라파고스'화 됐던 건 이러한 소비자들의 소비경향도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