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통일전
1. 개요
삼국지연의와 정사 삼국지에서 관도대전 이후 조조가 기주,청주,병주,유주를 평정하여 하북을 통일하고 원담,원희,원상,고간은 모두 패해 원가가 몰락하는 사건이다.
2. 배경
2.1. 관도대전과 원소의 급사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후 원담을 장자에서 폐출하고 원상은 기주,원담은 청주,원희는 유주,고간은 병주를 나누어 다스리게 한다.
200년 원소는 남하하여 조조를 공격하여 양안군을 제외한 예주의 대부분의 지역을 빼앗는데 성공하고 조조를 연이어 패퇴시키며 관도땅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허유가 조조에게 항복해버리면서 오소에 군량이 몰려있다는 군사기밀이 알려지게 된다. 이에 원소의 신하들은 원소에게 오소에 지원군을 보내라 했으나 원소는 깔끔히 무시한다. 그 결과 오소는 급습당해 군량을 모두 잃고만다.
이후 장합과 고람에게 오소의 재탈환을 명했으나 장합과 고람은 조조에게 항복해버린다. 이에 원소군은 붕괴되었고 원소는 예주를 잃고 즉시 퇴각했다. 이때 조조군에게 퇴각하면서 항복하거나 잡혀 죽은 군사 수만 7~8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원소는 다음해 조조를 공격하나 창정에서 또다시 패하고 만다. 또한 관도대전의 여파를 틈 타 하북 곳곳에서 여러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나 모두 평정하여 세력 내부의 분열을 다시 잠재우고 조조를 공격할 작정을 한다. 그러나 얼마 후인 202년 5월, 원소는 병으로 급사했으며 이로 인해 원소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2.2. 원가의 분열
생전 원소는 삼남·원상을 총애해 장남이었던 원담을 폐출시키고 내심 원상을 후계자로 생각했지만 당시 원상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리고 원소는 원상에게 지지기반을 만들어줄 틈도 없이 후계자를 공표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로 인하여 후계자 분쟁이 시작된다.
원소의 뜻과 달리 대신들은 나이와 경력에서 검증된 원담을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희와 고간은 원상을 지지했고 연이은 심배의 유언 조작으로 인해 원상이 공식 후계자로 지목된다. 이로인해 원담은 분노했고 직접 군사를 일으켜 원상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 당시 조조는 유표를 치기위해 남하했는데 원가가 내분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유표와 화친한 후 급히 회군하여 하북을 칠 준비를 한다.
3. 전개
3.1. 조조의 선제 공격과 원담의 항복
203년, 원소 사후. 조조가 황하를 건너 북진하자. 이를 막기위해 원담과 원상이 함께 여양에서 조조와 싸웠다. 이후 조조가 업성까지 포위하며 공격을 시도했으나 원상이 굳게 지켜 조조는 패해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또 다시 원담과 원상이 계속해서 내분을 펼치며 싸우고 그 와중에 원담은 기주에서 연달아 패해 조조에게 항복한다. 곧이어 여광과 여상까지 조조에 귀순하여 원소 생전 원소가 조조를 압도하던 판도는 차츰 뒤바뀌기 시작했다.
3.2. 업군의 전투와 심배의 고군분투
204년 봄 원담이 항복하자 청주는 조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원상은 원담의 세력을 기주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심배에게 업성을 맡겼다. 원상은 청주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직접 청주로 나아갔다. 조조는 원상이 청주를 공격하러 오는것을 확인한후 업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조조는 저곡,윤해를 연달아 격파하면서 병주와의 길을 끊고 마침내 업을 포위하였다. 또한 이때부터 병주의 고간은 원상을 돕지 않기 시작했다.[1]
204년 가을 평원에서 원상은 원담과 싸우며 대립하고 있었으나 업의 소식을 전해듣고 업으로 퇴각해 심배를 지원하였다. 당시 업성의 상황은 만신창이가 되어 자칫하면 금방 패할수도 있었으나 심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6개월간 힝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상이 심배를 도운것이나 원상의 군사 수는 1만명에 불과했으나 이때도 고간은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다. 원상은 서산에서 조조군을 기습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였고 업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후 심배의 조카 심영이 배신해 조조에 항복하면서 마침내 업은 함락되었다. 원상은 기주를 버리고 달아나 유주의 원희에게로 도망쳤다. 그러나 초촉,장안이 유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유주를 장악한 후 조조에 투항하자 원희와 원상은 오환족으로 달아나 공손강에게 의탁했다.[2][3]
3.3. 원담의 반기와 호관의 저항
204년 12월 원담은 조조가 업을 함락시킨 틈을 타 기주의 절반을 무단으로 차지한다. 이에 조조는 원담과 기주에서 크게 싸웠다. 원담은 연이어 조조에게 패하며 평원까지 잃고 남피로 달아났다. 그러나 역시 남피에서도 조조에게 패하고 말았고 205년 1월 결국 조조에게 잡혀 참수 당했다. 이로써 조조는 기주를 제압하였다.[4]
205년 4월 오환족에 의탁한 원상은 오환의 공손강과 힘을 합쳐 마침내 유주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8월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나아가 오환을 공격해 유주를 재탈환하였다.
한편 206년 1월 병주의 고간은 조조가 오환을 치러간 틈에 난을 일으켜 사예주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업을 공격해 기주를 되찾으려했다. 그러나 순욱에게 전략을 완벽히 간파당하며 사예주에서 연달아 패해 땅을 다시 모두 잃었고 고간의 본거지 호관은 포위되고만다. 고간은 3달간 저항했으나 점점 열세에 몰렸고 흉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흉노는 이를 거절했고 고간은 호관을 버리고 달아난다. 고간은 유표에게로 도망치려했으나 도중에 조조군에 잡혀 끝내 참수당하고만다. 이에 조조는 병주마저 손에 넣게되며 하북을 재패하였다.
3.4. 원상의 죽음과 조조의 하북 통일
206년 8월 산둥지방의 관승을 물리친 조조는 오환과 연합한 요서 지방의 원상을 공격했다. 그러나 원희와 원상이 무종에서 방어하고 샛길을 장악하자 조조는 나아갈길을 찾기 못했다. 하지만 전주가 조조에게 가세하여 길을 안내하자 조조군은 금세 유성에 다다랐고 백랑산에서
승리해 유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원희와 원상은 다시 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달아났다.
조조는 공손강의 본거지 요동을 직접 공격하면 원씨 형제를 잡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업으로 회군한다. 이에 공손강은 원희와 원상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 여기고 원희와 원상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는 보내었다. 이로써 원가는 다시 부활하지 못했고 조조는 하북을 완전히 통일하였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