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상
1. 후한 말의 인물
袁尙
(187년?~ 207년)
후한 말의 군벌인 원소의 삼남(혹은 막내아들)으로 자는 현보(顯甫)다.
원소의 총애를 받아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다. 원소의 병사病死로 인해 내부적으로 수많은 도전을 받았고, 이는 원소 사후 원소 세력이 조조에게 몰락하는 원인중 하나가 된다.
1.1. 정사
1.1.1. 어린 시절
원상의 생년이 언제 쯤인지는 불명이나 토탈 워: 삼국이 발매된 후 한 한국인 플레이어가 레딧에 올린 글이 있다.레딧 출처, 한글 요약 번역 이 글에 따르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 원상은 원희와 원담과 달리 자사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
- 무제기에 기재된 위서에서 190년 무렵의 원소에게 장성한 아들 둘이 있다는 언급이 있는데 정황상 원담과 원희로 보인다. 즉, 원상은 이 무렵에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 176년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원소의 6년상을 고려했을 때, 190년대 후반에 나이가 맞지 않아 자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190년에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원상의 나이를 끼워맞추려면 6년상 이후에 태어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나마 개연성이 있다. 즉, 182년(?)에 6년상이 끝났다는 전제하에 원상은 적어도 183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 위지 원소전에 기재된 한진춘추에 심배가 원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췌되어 있는데 여기서 심배는 원상을 적사(適嗣), 즉 적법한 후계자로 언급하는데 이게 원소가 사망한 202년 시점에 적어도 15, 16살의 성인 나이가 되었다는 전제로 작용한다면 역산해서 원상의 생년은 187년 전후로 정도로 좁혀진다.
- 따라서 원상의 생년은 187년 정도가 적절하다.
진수는 단지 원상이 미소년이었기 때문에 원소의 총애를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의도적인 폄하일 수 밖에 없고, 후한서에 남아 있는 심배의 평가에 따르면 효심이 대단하며 타고난 성품이 배우는 것을 좋아해 이미 일곱 살 무렵부터 신동이라는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심배는 원상 진영의 사람이었으니 이 역시 당연히 과장을 감안해야 한다.
진수와 심배의 평을 적절히 감안하고, 원소 사후 조조와의 대결에서 원상이 보여줬던 어느 정도의 역량으로 미루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일정 수준의 역량과 가진 원상을 원소가 총애했고, 후계자로서 부적절한 특성을 보인 원담, 이렇다 할 자질을 보이지 못한 원희보다 원상을 좀 더 적합한 후계자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1.1.2. 원담 폐출
전론에 따르면 원상은 원소의 후처였던 유부인의 소생으로, 미모가 빼어나 자태와 얼굴 생김새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유부인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항상 원상의 재능을 칭찬했고 당시 유부인이 원소에게 크게 총애를 받고 있었던 데다, 원소 또한 원상의 미모를 기이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장차 원상으로 후사를 이으려는 뜻을 품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원소는 원담을 형[2] 의 양자로 보내 자신의 후계자 서열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청주자사로 삼아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시켰다.[3]
전론은 태자시절 조비의 저작으로 원씨 멸망 이후 10년이 좀 넘은 시점에 쓰여진 당대 사료이며, 원상이 후처 소생의 자식이고 아름다운 용모로 원소의 총애를 받았다는 큰 틀은 후대 사가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1.1.3. 관도대전
이후로도 청주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제법 활발하게 활동하던 원담과 달리 원상은 행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진수의 《삼국지》와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200년 1월 유비가 서주#s-2를 차지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원소가 조조의 배후를 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들의 병 때문이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는데, 원소의 아들은 3명이라는 서술이 있고, 원담과 원희는 모두 이미 장성해서 외지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이 아픈 아들은 보통 원상으로 해석된다.
다만 《삼국지》 <우금전>에서는 우금이 조조가 본대를 이끌고 유비를 치러 가는 사이 연진 사수를 명령받았고, 배후를 노린 원소에 맞서 영웅적인 승리를 이끌었다는 서술이 등장하기 때문에 원소가 배후를 치지 않았다는 통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이 기록을 소수 분견대를 통한 원소의 견제 시도로 선해하여 받아들이더라도, 소극적 태도로 유비의 패망을 방관하던 원소가 유비의 망명을 받아들이자마자 한황실 재건을 명분삼아 대대적으로 남하하며 관도대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원소의 관도대전 승리를 전제한다면 원소에게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었고, 유비가 원소의 대등한 동맹자로서 가지는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몸만 간신히 살아남아 원소에게 명분을 바치는 상황을 원소가 의도했다는 해석 또한 충분히 성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지 아들의 병 때문에 원소가 기회를 포기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위진시대의 조위정통론적 통설에서는, '아픈 아들'로 인한 원소의 불개입이 조조vs원소의 대립에서 조조의 승리에 발판이 되는 것은 물론, 이 과정에서 나타난 원소와 전풍의 언쟁은 전풍과 원소의 불화가 심화되는 계기였으며, 이미 싸우기도 전부터 원소의 패망을 암시하는 해석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4] 이 사건이 원소의 일대기에 있어서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이미 같은 사서 안에서도 해당 기사를 반박하는 기록과 정황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원소가 아들의 병으로 인해 출병하지 않았다는 설은 왜곡되거나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나, 적어도 위진시대의 주류적 관점에선, 원소가 천하대세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자진해 포기하고, 장자방 같은 명참모 전풍과 심각하게 틀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을 정도로 원상을 유난히 총애했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오록〉에서는 원상의 동생으로 원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아들의 병이 사실이었다면 원매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하나, 오록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에서는 원소의 아들들이 원담, 원희, 원상 셋뿐이었다고 일관되게 서술되고 있으며, <오록>과 함께 원매의 존재가 언급되는 둘밖에 없는 기록인 〈조만전〉에서는 원매가 원상의 형의 아들. 즉 조카라고 적고 있어서 오록의 기록과 상충되고, 오록이나 조만전의 저자들 역시 원매에 대해, "불분명하다." 고 서술할 정도로 원매의 실존 여부가 3세기 중국인들에게조차 불명확하게 받아들여졌기에, 원소가 아들의 병 때문에 출병하지 못했다는 설의 진위 여부 그 자체부터가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면 설득력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관도대전 시점에서도 원상은 여전히 13, 14 세 정도의 나이였으므로 장성한 형들과 달리 눈에 띌만한 행보는 없었을 것이다.
1.1.4. 원소의 병사와 후계자 계승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패한 이후 병이 들었고, 202년 6월, 유언#s-1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병사한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때 처음으로 원상이 등장하며, 범엽의 《후한서》에서도 원상이 원담 폐출 기사에서 잠시 언급되는 것을 제외하면 이때 처음으로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삼국지와 후한서에 따르면 이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원담을 후계자로 지지했으나 평소 원담과 대립관계였던 심배와 봉기가 원담의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해 원소의 유명을 사칭해 원상을 옹립했다고 하며, 진수와 범엽이 당시 상황에 대해 참고한 원사료였을 《전론》에서는 이때 심배와 봉기가 유부인과 짜고 원소의 유명을 날조했고, 본심은 원담의 집권 방해에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유부인을 앞세워 유명의 진위여부를 보증하며 원상의 옹립을 정당화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후한서》와 《한진춘추》에서는 심배가 원담에게 쓴 편지가 직접적인 당대 사료로 인용되어 전해지는데, 여기서 심배는 '생전 원소에 의해 원담이 폐출되어 원소의 조카가 되고, 원상은 적사(=대를 잇는 아들)로서 족보에 적힌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적자가 후사를 잇는 것을 원망한다며 원담을 비난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원소가 생전에 원담을 폐출시켰음은 물론 원상을 적사로 세웠다는 심배의 주장은 심배가 원담에게 보낸 공식 서한에서 발췌된 것인데, 원담이 폐출됐다는 주장은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이 되고, 원상의 적사 임명 역시 심배가 사건의 전말을 아는 직접적인 당사자인 원담에게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원소는 원상을 후사로 세울 뜻이 명백했다는 기록자들의 인식이 여러 차례에 걸쳐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기에 의심할 여지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사망 시점에서는 후사문제에 대한 원소의 뜻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담을 지지했다고 서술되는 모순된 상황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 원상의 나이가 어리다는 서술이 여러차례 나타나고, 원소의 유명이 조작되어 원상이 옹립되었다는 사실들을 종합해 판단하면 원소가 의도한 후계자는 원상이 맞았으나, 원담을 폐출한 것 외에는 생전에 원상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공식적으로 드러난 절차가 전무했고, 원칙적으로 업현후를 제외한 원소의 모든 공식적 직위들은 양도나 세습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원상이 나이가 어려 자체적으로 내세울 만한 입지나 경력도 없었던 만큼, 어린 원상을 대신해 장성한 원씨의 일원이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청주자사인 원담을 원소의 후임자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원씨 내부에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심배와 봉기는 원소의 최측근이자 원소 부재 시 근거지인 기주의 행정권과 군권을 총괄하던 실력자들이었고, 하북 원씨의 막부정은 체제 정당성을 원소 개인의 정치적 권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5] 때문에 심배 봉기와 같은 실력자들이 원소의 유언을 명분 삼고, 유명의 진위여부를 원소의 처 유씨가 보증하면서 원담 지지여론을 누르고 원상의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전론》에서는 이 무렵에 일어난 사건으로 유부인의 성품이 잔혹하고 투기심이 심해 원소의 시신을 염하기도 전에 원소가 총애하던 첩 5명을 다 죽여버렸고, 그녀들이 지하에서 원소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 여겨, 그녀들의 얼굴에 검은 칠을 하여 그 형상을 훼손했으며 원상 역시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녀들의 일가족을 모두 죽였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나, 이 설은 후술하겠지만 다분히 의심스럽다.
1.1.5. 여양전투와 내전
뒤늦게 기주에 도착한 원담은 이미 원상이 원소의 뒤를 이어 집권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될 수 없었지만, 원상의 승계에 불복해 원소가 처음 거병하며 자칭한 거기장군의 지위를 따라서 자칭하며 원소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군사를 이끌고 여양에 주둔함으로서 원상과 대립했다.
상당히 험악해진 분위기에서 원상은 봉기를 중재역으로 원담에게 파견했지만 마침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왔고, 원담이 급히 원상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심배는 원군을 보내면 원담이 병사들을 장악할 것이라며 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했고, 분노한 원담이 봉기를 죽이자 원상이 직접 나서 원담을 구원했으며 심배는 업에 남아 후방 사무를 총괄한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서술은 이렇게 나타나나, 한진춘추에 인용된 심배가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봉기가 원소의 의지를 마음대로 곡해하여 해석해 친족간의 불화를 조장했다며 봉기를 악창과 종양에 비유해 비난하고, 원담이 의분을 떨쳐 간신 봉기를 죽이고 원상과 화해하며 조조와 맞서싸웠다고 봉기를 죽인 것을 칭찬하고 있으며, 원상도 원담의 뜻을 받들어 봉기 일족에게 궁형을 가했다는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을 통한 당시 상황의 재구성을 무척 혼란스럽게 한다. 범엽의 후한서에서도 심배의 편지를 인용하고는 있으나 해당 사건의 전말을 알기 어려워 비문에 가깝다고 여겼는지 봉기에 대한 비난을 지워버렸고, 빠뜨리기 어려운 큰 틀은 곽도에 대한 비난과 합쳤다.
상황은 매우 불명확하지만 봉기의 죽음을 기점으로 원담과 원상 사이에 극적 화해가 이뤄져 조조와 맞선 공동전선을 펼친 것으로 보여지며, 202년 9월부터 여양에서 조조와 원상의 격전이 펼쳐졌다. 원상은 서전에서 패하자 방어만 굳게 하며 지연전을 펼치는 동시에 마등 등 서량의 군벌들과 연합하고 흉노의 선우 호주천을 사주해 조조 영역권의 서쪽 지역인 하동을 공격하게 했으며 상장 곽원을 하동으로 파견해 이를 지원했다.
원상이 조조 본대의 발을 묶는 사이 조조의 측면을 우회공격한 이 전략은 거의 성공할 뻔 했으나, 마등의 배신으로 도하작전 중 기습을 받은 곽원이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실패로 끝났는데, 마등이 조조에게로 돌아선 이유는 원씨가 흔들리고 있어 원상이 이기더라도 마등 본인은 조조의 보복을 피하기 어려워 보이니 차라리 조조의 위기를 구해주며 조조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 얻을 것이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6]
원상의 곽원을 통한 우회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여양에서의 본대간 대결도 6개월 째가 된 이듬해 3월에 조조의 대대적인 공세가 펼쳐지면서 원상은 여양을 포기하고 업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업까지 진군했으나 원상은 요격에 나서 조조를 격퇴했고, 이때 원담은 퇴각하는 조조를 추격해 황하를 건너는 사이 급습하여 궤멸시키자고 제안하지만 원상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원담의 진의를 의심했는지 이 제안을 거절한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의 여러 기전에서는 조조가 승리만을 거듭하다 갑자기 허도로 돌아갔다고 기술함으로서 조조의 패배를 감추고 있지만, 곽가전에서는 연전연승하다가 갑자기 남쪽으로 유표를 치는 척 해 원씨 형제를 안심시키며 내분을 노리면 간단히 취할 수 있으니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철수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부분인데,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는 회군한 직후 그동안 전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죄를 물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관직을 박탈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내용의 포고령을 내렸고, 장료전에서 원상이 굳게 지켰기 때문에 업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기록은 조조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다.
아예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원상이 역격해 조조가 격파되고 허도로 달아났다'''고 기록되어 전쟁이 조조의 패배로 끝난 것으로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후출사표에서도 '여양에서 쫒겼다'라고 조조가 패배해서 쫒기면서 후퇴했다고 써 조조의 대표적인 패전으로 여양전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전쟁이 최종적으로 조조의 패배로 끝났고, 이 패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곡필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그러니까 곽가의 저 발언은 무슨 신기묘산의 책략이 아니라 조조가 원상에게 크게 패한 후 '쟤들이 서로 싸울때까지 후일을 기약하시죠' 수준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맨 위에서 나오듯이 원상의 생년이 187년이라고 가정했을시 원상은 겨우 15~16세 정도의 나이에 조조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 준 셈인데 당대 최고의 군략가인 조조 입장에서는 숨기고 싶은 흑역사였을 것이다. 여양전투는 아버지 원소 때 부터 전쟁했던 조조에게 번번히 패했던 원씨 진영이 처음으로 원상의 주도하에 제대로 거둔 군사적인 승리였고 이로 인해 하북 내에서 미약했던 원상의 정통성과 정치적 파워도 한층 더욱더 상승했다고 엿볼 수 있다.
한편 원상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업에 계속 머물고 있던 원담에 대한 병력 증원과 무기의 지원을 중단했는데, 이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지 말고 얌전히 청주로 돌아가라는 종용에 가까웠지만, 원담은 이 행동에 크게 분노한다. 이때 곽도, 신평은 원소가 생전 원담을 폐출시킨 것이 모두 심배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며 원상의 배후에 있던 심배를 비난했고, 원담은 이를 명분삼아 업성의 외문에서 원상을 습격하나 패배해 근거지인 평원으로 달아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203년 4월?)
원담이 패배하고 업에서 쫓겨나자 원담의 근거지였던 평원국에서 부하장수 유순이 반기를 들었고, 청주 내 여러 군현이 이에 호응했으며 원담은 청주를 벗어나 기주 동북면의 남피로 달아나는 청주 내 지배력이 크게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원담은 청주별가 왕수의 구원으로 위기를 넘기고 지지세력을 재차 결집시킬 수 있었으며 청주와 인접한 기주 동쪽 경계의 군현들을 약탈하며 다시 원상에게 도전했다.
원담이 업성이 속해 있는 위군 경계까지 진입하자 원상은 친히 군을 이끌고 응전하여 위군 동부의 관도현에서 맞붙었고, 이때 원상은 서전에서 패해 달아났으나 복병을 숨겨 원담의 주력군을 일시에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7] 원담은 다시 근거지인 평원군으로 달아났으며 원상이 군사를 일으켜 평원을 공격하자 궁지에 몰린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하며 조조를 끌여들이게 된다.
당시 유표를 치기 위해 형주와의 접경지역인 서평에 주둔하고 있던 조조는 원담의 투항을 받아들여 재차 북상을 시작하는데 곽가전에서는 조조가 연전연승하던 중에 유표를 치는 척 해서 원씨 형제를 안심시켜 내전을 유도한 뒤 개입할 계획을 세워 철수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유표를 치기 위해 서평에 주둔하다가 원담이 투항해오자 이를 받아들여 원상을 쳤다는 서술 뿐이며, 심지어 신비전과 순유전에서는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입을 반대했고 조조 역시 원씨들끼리 서로 싸워 피폐해지게 만들겠다면서 시큰둥하다가 순유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꿔 개입을 결정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유표를 치는 것은 원씨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이었다는 곽가전의 서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애초에 연전연승했다는 곽가전의 서술부터가 이미 거짓이라는 게 명백하기 때문에 유표를 치는 척 해 원씨의 내분을 노린 것이었다는 곽가전의 서술 역시 조조의 퇴각을 미화하기 위해 왜곡된 서술일 가능성이 높다. 원씨들이 서로 싸워 피폐해지도록 만들려 했다는 서술에 따르면 오히려 조조 측은 원씨의 내전이 시작되면 장기화될 것이라 예측하고 그 사이에 사이 남쪽의 유표를 정리하려 했을 가능성이 더 높으며, 원담이 원상의 근거지인 업성 근방까지 진격해 왔고, 관도에서 참패하기 이전까지는 오히려 원상 측이 수세에 몰려 있었다는 점에서, 또 정통성에 약점이 있던 원담이 원상을 끌어내리고 후계자를 자처할 경우 또 다른 내부적 도전을 받으며 혼란이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관도현에서의 싸움으로 원담이 치명적 타격을 입으면서 기존의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고 수세에 몰리는 상황은 원소의 정통 후계자인 원상이 도전자를 축출해 권위를 확고히 세우며 원소의 카리스마를 대체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원씨의 내전이 장기화될 것이란 예상 자체가 틀어진 상황에 가까우며[8] , 통일된 원씨는 천하의 근심이 될 것이니 지금 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개입을 주장하는 순유의 발언 역시 이런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조조를 설득하는 내용이기에 원상이 불리한 구도에서 역전을 성공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조조의 경계심을 증폭시키며 조조가 내전에 개입하게 되는 계기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조조가 황하를 건너 여양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상은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온다.
1.1.6. 업성 공방전
203년 10월. 여양에 도착한 조조는 자신의 11남 조정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켜 혼인동맹을 맺었으며, 원담과 내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조조까지 재차 북상하여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원상의 부하였던 여광,여상은 원상에게 반기를 들어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고, 조조는 이들을 열후로 삼는다.
심배는 원담에게 편지를 보내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제거할 것을 종용하며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화해할 것을 권했고, 그렇게 못 하겠다면 기주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원담의 해악을 쳐 없애겠다는 최종 경고의 서한을 보내나 원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 준비를 더욱 굳게 했다.
전론에 따르면 원담은 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으나 곽도에게 겁박당하여 화해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전론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이 시점에서 원담은 이미 실권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기록상 별다른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으나 조조가 여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정황상 이듬해 정월까지 원상과 조조의 대치 국면이 이어진 듯 하다.
한편 원상은 교위 유견, 황하, 전대 등을 유표에게 파견하여 수 차례에 걸쳐 친서를 전달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유표의 답서만이 전해지는데, 발췌된 기록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원상이 원소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인정하면서도 친족간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은 오랑캐도 비웃을 일이니 화해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고, 동맹이라 한들 원상을 돕기 어렵다며 단지 원담에게 따로 친서를 보내 화해를 중재해주겠다는 내용이다. 당시 정황과 답서의 내용으로 볼때 원상은 유표가 조조의 배후를 쳐서 개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유표는 원담 사이에서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이를 완곡히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9]
204년 1월. 조조는 다시 황하를 건너 돌아갔고, 수로공사를 벌여 군량 수송로를 확보하는 등 장기전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조조가 황하를 건너 철수하자 원상은 심배와 소유에게 업의 수비를 맡겼고, 견초를 고간이 있는 상당에 파견하고, 윤해를 병주와 기주의 경계지역인 모성에 주둔시키고, 저곡을 모성의 후방 거점인 한단에 배치해 병주와 업성의 기각지세를 꾀하며 조조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원상 자신은 원담을 공격하러 평원으로 향한다.
204년 2월. 원상이 원담을 치러 평원으로 가자 조조는 황하를 건너 북상해 기주를 공격한다. 이때 업에서는 소유가 조조에게 내응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심배에게 발각되어 업성 내에서 시가전을 벌이다 패하여 조조에게 달아난다. 한편 조조는 황하를 건너고 여양을 거쳐 불과 업에서 50리 떨어진 원수(=洹水.황하의 지류)까지 순조롭게 진군해 소유와 합류하고 곧바로 업을 포위했는데, 심배가 비록 주요인사의 내응을 적발하는데 성공했으나 신속한 제압에 실패하고 수도 내에서 소유의 군사들과 시가전까지 벌이게 되는 등 시간을 지체하게 되어 요격 기회를 놓치고 대응이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조는 업을 포위하고 4월까지 토산과 땅굴을 만들어 업을 공격했으나 소득이 없자, 조홍에게 전선을 맡긴 채 주변지역 공략에 나서 모성에 주둔하던 윤해를 격파해 고간이 다스리고 있던 병주와의 연결을 끊었고, 한단에서 저곡을 격파했으며 역양령 한범과 섭장 양기의 항복을 받는다. 차근차근 업성의 목이 죄어지는 상황에서도 수비전략의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던 고간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데, 형세를 관망하듯 보이는 고간의 소극적인 면모는 기록상의 부실도 원인이겠지만 이후 고간의 행적에서도 드러나듯 조조와 원상의 대립을 틈타 자립할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5월. 업으로 되돌아온 조조는 전략을 수정해 토산과 땅굴을 허물고 장수(=章水. 황하의 지류)의 물길을 바꿔 업을 수몰시킨다. 수공으로 성내의 식량이 썩은 상황에서 8월까지 포위가 지속되자 아사자가 속출해 급기야 성내 인원의 절반이 굶어죽는 등 업의 상황은 막장이 된다.
한편 평원에서 원담과 대결하고 있던 원상은 업의 소식을 듣자 황급히 귀환하여 7월에 업에 당도한다. 일찍이 조조는 원상의 귀환 소식을 듣자 원상이 큰 길로 회군해 온다면 마땅히 피해야겠지만, 서산으로 향했다면 포로로 잡을 수 있다는 발언을 했고, 원상이 서산으로 행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미 기주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기뻐한다.
원상은 업에서 17리 떨어진 부수에 도착해 영채를 세워 이부를 통해 자신의 귀환 사실을 알렸고, 횃불과 봉화를 통해 서로 연락했으며 이부가 재차 포위를 속이고 무사히 귀환하자 원상은 조조의 포위망을 야습했고, 심배 또한 군사를 내보내 호응했지만 이 '양면 야습작전'은 심배, 원상이 나란히 조조에게 나란히 격파되며 참패하고 만다.
조조는 패주한 원상을 추격해 포위했는데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원상은 진림과 예주자사를 지낸 음기를 사절로 보내 강화를 시도하지만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더욱 급하게 포위한다. 이에 원상은 밤중에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업성 남부의 기산(祁山)에 주둔했고,[10] 추격해오는 조조와 회전을 벌이기 직전 부하장수 마연과 장의가 배반하여 조조에게 호응하면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단기로 달아나게 된다.
조조는 원상군의 치중을 모두 노획했으며 원상의 의복과 원소에게서 물려받아 가지고 있던 대장군,강향후의 인수와 절월 등 개인 소지품까지 모두 거두어 이를 업성의 병사들에게 보이는 등 원상의 죽음을 암시하는 선전공세로 업성 수비군의 사기를 꺾었다. 얼마나 동요가 심했는지 진수는 아예 '업성이 무너졌다.' 는 표현을 쓰고 있다.
심배는 오래된 전투로 조조군 역시 지쳐 있고, 유주의 원희가 구원군을 보내올 것이라고 성내의 사기를 독려하며 버텨 보려 했지만 8월에 성문교위를 맡고 있던 심배의 조카 심영이 항복하여 성문을 열고 조조군을 들이면서 업성은 함락되었고, 심배는 맞서 싸우다 패하고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업성 함락의 분기점으로 작용했던 원상의 회군 시점에서 조조가 원상이 큰 길로 바로 향한다면 피해야겠지만 돌아서 서산으로 향한다면 이미 기주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자신한 이유에 대해 사서 내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않지만, 원상 본대의 병사수는 1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조의 군사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조가 업을 포위하고 있던 수공을 위해 너비와 깊이가 2장(약5m)에 이르는 참호를 40리(약16km)에 걸쳐 단 한나절만에 팔 정도의 여력이 있던 것으로 볼때 원상 본대의 규모는 조조에 비해서는 확연히 열세였을 것이며, 서산은 병주와의 경계지인데다, 원상은 서산에서 한단을 거쳐 업으로 회군하기 때문에 원상의 회군로 설정은 병주 접경지역의 패잔병을 수습하고 고간의 원군에 의존하려는 의도 외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간의 소극적 태도를 조조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면 전력을 최대한 집중시킨 한타싸움을 통해 업을 구원하려는 원상의 의도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라 이해했다고 봄이 합당하다.
평원에서 업으로 바로 향하는 대로는 위군 남부를 거쳐 업으로 도달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피해야 할 것이라고 조조가 졍말로 두려워한 것은 원상이 업성을 포기할 각오로 위군 남부에 도달해 황하를 거쳐 길게 늘어져 있던 조조군의 보급선을 공격하는 것이었으나, 원상은 부질없는 고간의 구원에 매달렸으며, 결국 불충분한 전력 보강이 대규모 야습에 양동작전까지 시도하는 올인성 전술로 이어지면서 원상의 패배를 결정지은 것으로 보인다.
뒤늦게 남구에 주둔하며 조조의 보급로를 압박하려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전력을 집중한 한타싸움에서 크게 패한 시점인데다, 원상 자신의 권위나 카리스마 또한 원소와 같지 않았기에, 대세가 결정났다고 파악한 장수들의 이탈을 막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이미 전투가 시작된 상황에서 아군의 배신으로 전열이 붕괴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1.1.7. 거듭되는 도주
업이 함락되기 직전, 조조에 패배하여 군대가 와해된 원상은 단기로 기주 북부의 중산으로 달아나 세력을 수습했다. 병주의 고간은 업성의 위기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 시점까지는 아직 원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은 상황이라, 원상에게서 파견되어 있던 견초는 고간에게 원상을 맞아들이라 권한다. 물론 고간은 이미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그대로 원상의 부하들을 내쫓았고[11] , 업성의 함락 소식을 접하자 조조에게 투항한다. 이때 업이 함락되고 조조가 원소의 일족을 보호하고 잡다한 비단과 솜, 양식을 공급했다는 내용이 무제기에 기록되어있다. 원상은 계속 조조와 싸웠고 나중에 오환족을 부리며 조조를 괴롭히고 유주자사를 죽이는 등의 행보를 보인다.
원상이 회군하여 조조와 싸우는 동안 원담은 반격에 나서 감릉,안평,발해,하간 등 기주 동부지역을 점령했고, 원상이 있는 중산까지 공격하면서 크게 패한 원상은 유주에 있던 둘째형 원희에게 달아났으며,원상이 그나마 수습한 무리들은 이때 원담이 모두 거둬들였고[12] , 원희는 중산과 인접해 있던 탁군 고안현에서 원상을 맞아들인다.
원희가 주둔하던 고안이 기주 북부의 하간,중산과 인접한 유주의 접경지대였다는 점에서, 원상의 중산 주둔은 산세의 지리적 이점에 의지해 원담,조조를 방어하며 유주의 지원을 기대 반격을 꾀하는 판도로 볼 수 있고, 원희의 고안 주둔 역시 원담의 반격을 견제하는 포진이라 해석될 수 있지만, 원담이 기주 동부 전역을 석권하고 탁군과 인접한 발해와 하간,중산까지 치고들어가는 동안 사서상 드러나는 원희의 행적이 전무한데다, 스스로 원상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던 원담,고간과 달리 이쪽은 심지어 정말로 원상을 지지하며 수장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트롤러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4년 11월, 조조는 원담이 무단으로 기주의 절반을 차지한 것을 비난하며 정략결혼을 파기하고 원담과 전쟁을 벌인다. 유방전에 의하면 이 당시의 탁군태수는 어양 사람 왕송으로 왕송은 "대세가 조조에게 있으니 지금 먼저 항복하면 상을 받겠지만, 나중에 항복하면 처형당할 뿐."이라는 유방의 조언에 따라 조조가 원담과 싸우던 무렵에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한다.원상과 원희가 주둔하던 고안현이 탁군의 남서부 방면 속현이었음을 감안하면 탁군태수의 이탈은 심각한 위협이었을 것이며, 조조는 남피에서 저항하던 원담을 공격하면서 별도로 장합을 보내 탁군 남동부의 옹노현을 공격한다.
205년 1월, 원담이 조조에게 패사하고 남피가 함락되자, 원희의 부하인 초촉 등은 원상과 원희를 공격했고 원상은 원희와 함께 만리장성 이북 오환족의 영역으로 달아났으며 원상과 원희를 몰아낸 초촉은 유주자사를 자칭하며 수만명의 군사로 원상을 배반하고 조조에게 투항하도록 유주 각 군현의 태수, 현령들을 협박하여 조조에게 유주를 바친다. 원담의 패배로 조조의 기주 장악이 확실시되자 유주 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 왕송의 배반을 시작으로 조조에 대한 투항이 가속화되며 급속도로 유주의 영향력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1.1.8. 오환 망명
한 제국은 한에 투항한 오환을 북방의 변경 각지에 흩뿌려 놓았다. 오환족은 지파별로 나뉘어 분열된 채 오환교위의 통제를 받았지만, 영제 말기에 제국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우북평,요서,요동속국의 3군을 중심으로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던 오환족 족장들은 제각기 왕을 자칭했고, 가장 세력이 큰 요서오환부의 구력거를 중심으로 뭉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삼군오환의 난[13] 을 일으켜 하북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난은 공손찬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유우의 유화책으로 삼군오환은 장거, 장순을 축출한 채 왕 자리를 인정받으며 자율적 질서를 유지했고, 혈통만 한족일 뿐 사실상 오환족이었던 염유를 오환교위로 내세워 유명무실한 통제를 받았다.
이후 구력거가 죽자 구력거의 조카인 답돈이 그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답돈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부족의 통합을 이끌어냈으며, 원소와 공손찬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원소에게 합류하며 공손찬의 멸망에 큰 공을 세운다. 원소는 황제의 명령을 사칭하며 답돈을 오환선우로 삼아 그를 오환 전체의 지배자로 인정했으며, 동시에 원씨 일족의 여자를 자신의 양녀 자격으로 시집보내며 답돈을 사위로 삼았다.[14]
이후 좌선우,우선우였던 요동오환부의 소복연과 상곡오환부의 난루가 구력거의 아들 누반을 오환선우로 추대하자 답돈은 누반에게 선우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왕으로 강등되었으나, 본인의 주도면밀함과 원소의 후원 덕분인지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은 답돈이 차지했다.
원상이 답돈에게 망명한 것은 이런 연고에서 비롯되었는데, 답돈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며 재기를 꾀하여 유주에서 쫓겨난지 3개월 만인 205년 4월, 오환의 지원을 받아 어양군 일대를 침입해 조조가 파견한 선우보를 공격했으며 조조에 대한 반란을 사주해 유주자사와 탁군태수를 죽였다.[15] 4개월 뒤인 8월에 조조가 직접 나서 반란의 중심인물인 고안의 조독, 곽노를 참수하고 선우보를 구원하러 광평으로 향하자 그대로 만리장성을 넘어 달아났다.
10월에 업으로 귀환한 조조는 대대적으로 오환을 칠 것을 준비했으나, 조조가 오환을 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고간은 이를 기회로 여겨 이듬해인 206년 1월에 반란을 일으킨다. 고간은 반중앙 정서를 선동해 조조의 영역권이었던 사예주 북부와 서부를 장악하고 유표와 연계하며 조조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고, 조조는 고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적지않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배신으로 원상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간이었지만, 고간이 조조까지 배신하고 뒷통수를 치면서 조조의 시선이 고간에게 집중된 것은 결과적으로 원상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고, 206년 내내 원상은 여러차례 유주를 격파하고 10만호의 유주 백성들을 붙잡아 오환으로 돌아갔다.[16]
한편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원상이 답돈에게로 망명하자 이를 따라 오환으로 달아난 기주,유주의 백성들이 10만 호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상의 오환 망명 이후 도합 20만 호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가 만리장성 이북에 거주하게 된 것인데, 1호당 5인으로 쳐도 총 100만에 이르는 등 규모가 워낙 큰지라 10만 호가 이주한 같은 사건을 두고 사가의 사관 차이로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원상이 약탈했다고 쓰고, 범엽이 쓴 후한서에서는 자발적으로 원상을 따라갔다고 적은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사를 같은 사건에 대한 사관의 차이로 해석하든, 별개의 사건으로 해석하든 원상이 오환으로 망명한 이후 매우 많은 규모의 인구가 오환으로 간 것은 사실이며, 황하 이북과 만리장성 이남 지역의 독점적 정치체였던 원씨의 공백을 대체하는 형태로 조조가 이 지역을 장악하긴 했지만, 조조에 대한 하북 내의 여론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고, 원씨와 고리관계로 이어져 있는 하북의 수많은 현지 세력가들은 원상의 잠재적 우군으로 보였으며,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원상에게 적극적으로 내응하며 조조가 임명한 지방관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런 성과에 상당히 고무되었는지 원상은 이를 기반 삼아 조조를 물리치고 다시 중국의 패권을 잡을 뜻을 품었다고 한다.
1.1.9. 백랑산 전투
이듬해인 207년, 조조는 대대적인 북벌에 나서 원상과 삼군오환을 치는 것에 대해 공론화한다. 당시 오환 원정에 대한 여론은 무척 나빴는데, 조정 내의 거물급 비조조계 인사였던 공융은 조조의 오환 원정 시도를 성공하지도 못할 얼빠진 행동으로 비웃었으며, 조조 진영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원상은 도망친 포로에 불과하며 오환족들은 야만족이라 통제가 될 리가 없으니 원상은 그들을 잘 부릴 수 없다며 애써 위험성을 축소했으나 여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남쪽의 강적인 유표의 세력권은 황제가 있는 허도의 지근거리에 맞닿아 있었고, 비록 유표 세력 내부는 친조조파와 반조조파로 여론이 갈라져 있었지만 유표 본인은 조조와 허도 조정에 명백히 비우호적인 태도를 고수했으며, 유표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해 조조를 칠 능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상을 치는 사이에 유표가 유비를 앞세워 후방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으며, 허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외국의 망명객 신세에 불과한 원상보다는 당장 허도를 직접적으로 타격해 불바다로 만들 능력이 충분한 유표를 먼저 치는 것이 사리에 맞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곽가만은 하북 내에서 자신들의 여론이 좋지 않고, 삼군오환의 수장 답돈은 야심가이며 원상 역시 원소의 후광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다며, 원상을 내버려둔 채 남쪽으로 유표를 치러 나서면 오환이 일사불란하게 침입하고 원씨의 옛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내응해 유주는 물론 하북 4주 전역의 판도가 다시 원씨 쪽으로 뒤집힐 것이나, 유표는 의심이 많아 유비를 견제하며 배후를 치지 않을 것이라 유세하며, 오환 원정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두둔했고, 곽가의 지원사격에 힘입은 조조는 오환 원정을 결행한다.
조조는 5월에 우북평군의 무종에 도착했으나, 기세좋게 원정에 나선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가 생긴다. 요서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으로 향하는 주 행군로가 장마로 진창이 되어 행군이 불가능했고, 대안으로 찾은 도로들도 원상, 오환군이 유리한 포진을 선점하며 방어태세를 굳히는 데 성공하면서 돌파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17] 오환족은 지금으로 치면 중국 만리장성 이북에 있었는데, 홍수 때문에 해안가 길이 끊긴 것이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조조는 2개월 동안 무종에서 발이 묶인 채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이때 조조 진영에 합류한 무종의 현지 세력가 전주는 2백년 이상 사용이 끊겨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없던 노룡 계곡의 고도를 언급하며 길잡이를 자처했다. 이때 조조는 크게 우회하여 노룡새로 군대를 이끌고 간다. 노룡새는 지금은 만리장성을 쌓아 놓은 곳인데 이곳은 당시 잊혀진 길로 길이 끊겨져 있었다. 이 도박을 받아들인 조조는 노룡새로 향하면서 주둔지 근방에 지금은 돌아가나 다시 찾아오겠다는 삐라를 남겨 철수하는 것으로 위장했으며, 노룡새의 존재를 몰랐던 원상과 답돈은 조조가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는 몇 차례의 척후를 보고받자 승리를 자축하며 경계태세를 풀었다.
노룡새의 도로는 수백년간 존재가 잊혀져 있었기에 당연 보수공사 따위도 없었고 심지어 중간에 길이 끊겨 아예 행군이 불가능했으나, 조조는 전주의 안내에 따라 산을 뚫고 계곡을 메워 가며 강행군한 끝에 마침내 요서오환의 근거지인 유성에 도달한다.(207년 8월) 본영에서 불과 1백리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척후를 들은 원상과 답돈은 경악하여 황급히 군사를 이끌고 응전했으나, 답돈과 조조가 예상치 못하게 백랑산에서 조우한 전초전에서 답돈이 전사하며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예상치 못한 조조군의 등장과 삼군오환의 실질적 리더였던 답돈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혼란에 빠진 오환군은 범성으로 패주했으나 조조군의 추격과 일방적인 살육을 당해 들판 전체가 시체로 뒤덮였으며, 오환족과 한족을 포함해 20만이 포로로 잡히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나, 원상은 탈출에 성공해 기병 수천기를 이끌고 요동으로 망명했고, 누반, 속복환, 오연 등 삼군오환의 지도부들 역시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향했다.
한편 유표는 조조가 원상과 싸우는 동안 허도를 치자는 유비의 진언[18] 을 거절하며 끝내 개입에 나서지 않았으나 조조의 승리 소식을 듣자 그제서야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서 매우 후회했으며, 조조는 대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중에 현지에서 영입된 토착 세력가 전주의 존재를 배제할 경우 이미 패배가 확정적이었던 상황이었고, 전주의 안내에 따른 행군 과정도 중간에 길이 끊겨 산을 뚫고 계곡을 메우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물을 찾지 못해 말 피로 연명하며 전멸의 위기를 겪는 등 험난한 도박에 가까웠다는 것에서 뭔가 느낀 것이 있었는지 원정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옳은 진언을 했다며 상을 내린다.
조조가 통과한 노룡새가 얼마나 험하냐면 1500년 이후인 조선시대 중국을 방문한 조선사신들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다음은 계산기정[19] 이라는 책에서 묘사하는 노룡새의 묘사와 그에 관한 한시이다.
노룡새(盧龍塞)
쌍망보(雙望堡)부터는 들판의 빛이 다시 활짝 트이고 북쪽으로 바라보면 먼 산이 옹기종기 빼어나 아름답다. 십팔리보(十八里堡)까지 가면, 그곳이 옛 노룡새이다. 옛날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군(烏桓軍)을 정벌하느라고 무종(無終)에 머물렀다. 그때 마침 비가 와 물길이 막히고 뚫리지 않아서 조조는 그 일을 근심하고 전주에게 물었다. 전주가 말하기를, '전의 우북평(右北平)의 관아가 평강(平剛)에 있어 길이 노룡(盧龍)으로 나 있고 유성(柳城)으로 통했습니다. 지금도 아직 샛길이 있습니다.' 했다. 드디어 조조는 군대를 돌려 노룡의 입구로부터 험준한 백단산(白檀山)을 넘어 공허한 곳으로 나가는데, 조조는 전주를 길잡이로 삼고 서무산(徐无山)으로 해서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까지가 200여 리가 되었다. 적은 그제서야 놀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무종(無終)은 곧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이다. 어떤 사람은 '조조가 노룡새에 도달해서 산을 좇아 길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산이 터지고 벼랑이 끊긴 곳이 있어 길이 그 사이로 나 있다.' 한다.
새벽에 유관의 달을 밟고 / 曉踏楡關月
저녁에 노룡새의 눈 뚫었네 / 夕穿龍塞雪
예부터 황막한 땅이라 / 古來荒漠地
마을과 끊긴 지 오래다 / 人煙久阻絶
황사에는 북방 기운 흐르고 / 黃沙朔氣流
백룡퇴는 천연으로 험준하다 / 白堆天險設
노회(老獪)한 아만(阿瞞, 조조의 아명)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 老瞞東出征
오환이 그 굴혈을 짓이겼다 / 烏桓擣巢穴
열흘 내내 비 멎지 않고 / 一旬雨不止
잔 길은 곡절 많았다 / 小徑多曲折
요행히 군막에 객이 있어서 / 幸得帷中客
군사 돌려 이길 계획 결정되었다 / 回軍勝籌決
철마로 멀리 달려오니 / 鐵馬長驅來
팔락팔락 바람 깃발 잡아제친다 / 獵獵風旌掣
들판이 열리니 강물에 다리 둥그렇고 / 拓野河橋圓
길을 쪼아내어 산 구름 이그러졌네 / 鑿路山雲缺
백단산에 군사의 방비가 없어 / 白檀兵无備
격전(激戰)을 칼날에 피 없이 끊었다 / 鏖戰刃不血
북방 길 드디어 뚫려 / 北方道遂通
만 리를 내 수레에 기름 치고 간다 / 萬里膏吾轍
먼 길 와서 무엇을 하려는지 / 遠道來何爲
날 저문 오랑캐 땅엔 바람이 맵다 / 日暯胡風烈
1.1.10. 요동 망명과 최후
조조 진영은 예상 밖의 대성공에 고무되었고, 혹자는 이 참에 요동까지 정벌해 원상을 사로잡고 화근을 끊을 것을 제안했으나 조조는 공손강이 평소 원상을 두려워했으므로 요동을 공격하면 원상과 힘을 합치겠지만, 느슨하게 내버려 두면 서로가 도모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회군한다.
당시 요동 공손씨 정권은 요동 안에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이 행세하며 조조가 이끄는 중앙정부와 대립하고 있었으나,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던 직함은 일개 요동태수에 지나지 않았다. 하북 4주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허도 괴뢰정권에 대항하는 대장군부의 수장 원소의 계승자임을 표방하는 원상의 존재는 요동 공손씨 정권이 중국 내의 패권다툼에 참가할 생각이라면 이용가치가 있었겠으나, 자치를 인정받는 선에서 조정 질서에 순응하고자 한다면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였고, 실제로 선대였던 공손도가 원상과 조조의 전쟁에 난입해 패권경쟁에 참여할 뜻을 내비치던 것과 달리 공손강은 자치권에 대한 인식만큼은 확고했으나 공손도만한 야심은 없던 인물이었다.
조조는 요동을 치지는 않았지만, 공손강의 반응을 지켜보듯 이듬해인 208년 1월에서야 업에 도착할 정도로 아주 느리게 철수했으며 이를 본 공손강은 지금 원상을 죽이지 않으면 영원히 조정과 화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삼국지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어환의 전략과 후한서 원소전에 따르면 원상은 사람됨에 용력이 있어 공손강을 만나기 전부터 그를 제거할 뜻을 품었기 때문에 공손강과 대면하는 회담 자리에서 그를 죽여 요동을 장악한다면 오히려 이전보다 광활해질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원희에게 한다.
비록 몰락했다고는 하나 원상은 원소의 후계자로서 당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국적인 유명인이었고, 여전히 수천의 기병이라는 정예 전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공손강이 원상을 꺼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조와 공손강의 밀당이 이어지고 있던 상황에 먼저 선수를 쳐서 공손강을 죽인 뒤 치소를 장악하고 요동 지배를 선포한다면 공손씨의 철권 통치에 눌려 있던 호족들 중 일부의 협조를 기대할 수는 있었을 것이며, 이 시점까지도 원상을 따랐던 군사들이 문자 그대로 원씨에 모든 명운을 걸었을 정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숫적 열세를 감안하더라도 지휘부가 몰살된 채 분열된 공손씨 잔당들과의 군사적 승부에서 우위를 기대할 수 있었으므로 해 볼 만한 도박이긴 했다.
하지만 요동에 도착한 원상이 첫 회견 자리에서 그대로 공손강을 살해할 생각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로 공손강 역시 결단에 주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공손강은 마구간에 다수의 정예병들을 숨겨두었고 신호를 하면 나타나 원상 일행을 치도록 계획했으며 후한서에 따르면 원상 일행이 공손강을 만나 회담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원희가 불안감을 느끼며 두려워해 들어가지 않으려 했으나 원상은 이를 못마땅해 하며 원희를 강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원상 일행이 들어가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공손강은 소리쳐서 복병을 불러들였으며 이 때 원상은 죽지는 않았지만 생포되었다.
삼국지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전략에 의하면 생포된 원상은 결박되어 꿇어앉혀졌고 추위가 일찍 찾아와 날씨가 무척 춥자 앉을 자리를 구했는데 이에 원희가 "우리 머리가 만릿길을 떠나는데 무슨 자리가 필요하겠느냐"며 원상을 나무랐다고 한다. 원상은 곧 죽는다는 상황 자체도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앉을 자리를 구해 빈축을 샀다는 이야기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원상의 기량이 용렬함을 알 수 있는 일화로 이를 소개하고 있다.
다만 후한서의 묘사는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내용이 다른데, 원상이 사로잡힌 뒤 결박되어 심문을 받았고 이때 날씨가 무척 추웠다는 부분까지는 같다. 후한서의 묘사는 비슷하지만 앉을 자리를 구하며 원상이 한 말이 자세히 나온다.
이에 대답하는 사람도 원희가 아니라 공손강으로 되어 있으며 이 말에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진 공손강이 화를 내며 "경의 머리가 만리 길을 떠날 텐데 무슨 자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한 뒤 원상을 참수했다고 한다. '죽지 않는 사이'로 스스로의 죽음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과 공손강이 화를 내며 만리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전략과는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는데,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 일화는 원상이 최후의 허세를 부리며 의연함을 과시하고 공손강을 비꼬는 내용의 발언이다.未死之間(죽지 않는 동안), 寒不可忍(추위를 견딜 수 없으니), 何相席與(자리를 마련해줌이 어떨지).
1.1.11. 사후
삼군오환의 선우들 중 일부는 원상과 동행했다가 원상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는 따로 주둔하다가 원상을 처치한 공손강이 재차 군대를 내어 격파하고 참수한 것으로 보인다. 공손강은 이들의 머리 또한 원상,원희의 머리와 같이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의 협천자 이후 조정 안에서 원소가 차지하던 위치는 조정의 최고대신이자 황제로부터 하북 4주 안에서의 독점적 권리를 위임받은 대장군부의 수장이었고, 이러한 정치적 권위를 바탕삼아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 허도의 조정을 권신 조조에게 장악된 괴뢰정권으로 규정하며 한나라 재건의 사명을 띈 대장군부의 체제적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조조 역시 자신을 황제를 받드는 조정의 영수로서, 황하 이북의 불법적 군벌집단 원씨 토벌을 통한 후한 재건의 기치를 세웠으므로 원담과 고간이 일시적으로 조조에게 항복했고, 근본적으로 원씨와 조씨의 막부정은 한 쪽이 다른 쪽을 거꾸러뜨리지 않은 채로 양립이 불가능했다.
요동에서 원상 형제의 머리가 도착하자 조조는 이를 효수하고 삼군에 영을 내려 곡을 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수한다는 엄명을 내린다.물론 조조는 정적이기 이전에 친구로서의 개인적 감정으로 원소의 묘에 참배해 눈물을 흘렸으나 원소는 조조의 하북 평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고 이미 하북 내부에서 신성화되어 원씨 막부의 이념적 표상으로나 남아있는 권력이었고[20] 왕수의 요청에 대범하게 원담의 장례식을 거행했으나, 원담은 엄밀히는 원씨 막부의 직계라고 보긴 어려운 방계세력인데다 원씨를 내부에서 뒤흔들며 조조의 기주 침공에 호응했으니 사실 조조로서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원상은 원소의 적통을 이어받은 후계자였고 바로 얼마 전까지 반조조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서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예전에 원상을 섬겼던 견초가 원상의 효시된 머리를 보고 통곡하며 그 앞에 제사용품을 차려와 장례를 주관했으며 전주가 제문을 읽는 등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조의 엄명에도 원상의 장례식이 치뤄지고, 백랑산전투의 설계자이자 최대 공로자였던 전주가 원상의 장례에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하는 상황은 조조로서는 무척 불쾌한 일이었으나, 조조는 하북 여론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이를 불문에 부치고 장례식을 주관한 견초를 의리 있다며 무재로 천거했으며, 전주는 제후로 삼아 구국의 영웅으로 대접하려 했으나, 전주는 노룡의 길을 안내한 것을 원씨와 조씨 간 체제 정당성 차원의 문제가 아닌 과거 삼군오환의 난으로 자신의 고향인 우북평군이 파괴된 것에 대한 개인적 원한의 차원으로 국한시키며, 노룡의 길을 팔아 사익까지 추구할 수는 없다는 논리로 분봉을 완강히 거부했기 때문에 조조의 진노를 샀다.
전주의 경우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서 조정의 공식적 책봉을 다섯차례나 거절하며 조조의 체면을 팍삭 깎아내렸기에 조조는 전주가 작은 절개를 앞세워 대의를 더럽힌다며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처형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조비와 순욱, 종요는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대로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자며 변호했기에 조조는 전주의 처벌을 그만두었다.
전주의 이런 외골수적인 행동은 명예와 절의를 숭상하던 고대 중국인의 관점으로도 유난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받아들여졌는지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본인이 원상 패망의 최대 공로자인 주제에 저럴 거면 애초부터 조조를 도와 원상을 핍박하질 말아야 했다면서 전주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조조의 편을 든 공손강은 좌장군,양평후의 지위를 받으며 바라던 대로 요동의 자치를 인정받았고, 조비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는 이미 죽었지만 대사마로 추증되는 등 우대받았으나,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은 원상의 사후 30년이 지난 237년에 위왕조에 반기를 든다. 이때 관구검이 요동을 치러 오자 우북평오환 선우 구루돈과 요서오환도독 호유가 5천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공손연 토벌에 합류하는데, 이들은 본디 원상을 따라 요동으로 들어온 잔당들로 언급된다. 원상 사후 공손씨의 토벌을 피해 살아남은 잔당들이 이때까지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1.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무인 이미지로 등장. 원담의 막장성이 다소 희석되는 대신 원상은 원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밀리지 않는 훌륭한 막장으로 묘사된다.
관도대전에서 오소가 털리고 장합,고람이 항복해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원소 본대의 전력을 줄이기 위한 업과 여양을 공격하는 척 양공을 펼치자 여기에 낚인 원소가 원상에게 별군을 이끌고 업을 지키게 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관도전 이후 재기를 노린 원소를 따르며 창정전투 초반에 사환을 일기토로 죽이는 등 활약하지만 원소가 십면매복게에 걸리며 창정전투에서 참패해서 별 의미가 없었다. 창정전투 직전 원소는 원담이 난폭하고 성질이 급해 사람 죽이기 좋아하며, 원희가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반면, 원상은 영웅다운 기상이 있으며 어질고 선비를 아껴서 후사를 잇기 적합하다고 띄워주는 대사를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데 이후 조조가 하북으로 침공해오자 중병에 걸린 원소를 대신해 총대장으로 나서지만 사환을 잡은 자신의 무예를 과신해 형제들의 합류를 기다리지도 않고 깝치다가 장료에게 패하여 군사의 태반을 잃는다. 이 때문에 원소가 빡쳐서 피를 토하며 죽는다.
그렇게 원소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심배, 봉기와 짜고 원소의 유서를 위조해 후계 자리를 가로채는 등 막장성을 보이고, 조조가 북상해오자 다시 원담과 연합하며 여양에서 싸우고 연패를 거듭한다. 이후 곽가의 조언에 따라 갑자기 조조가 철수하자 원담은 원상을 연회에 초대해 죽이려 하는데, 이것이 함정일 것이라는 심배의 조언에 원상은 그대로 군사를 일으켜 원담에게 선공을 걸고 형제간에 일기토까지 벌이는 등 막장 드라마를 찍는다.
최후 부분도 좀 다른데 조조에게 연이어 털려서 결국 요동의 공손강을 만나러 갔지만 회견하는 장소에 앉을 자리가 없자 공손강에게 일단 자리부터 깔자고 먼저 요구하고 이에 공손강이 만리길 드립을 치며 복병을 불러들여서 복병들에게 죽는다.
1.3. 평가
찌질하게 상속 싸움 하다가 망했다는 인상이 대부분이라 안습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원소의 급사로 후계구도가 꼬였을 뿐 원소가 의도한 후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원상이었고, 행적을 살펴보면 어린 나이에도 조조의 침입을 격퇴했고, 내전 당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 차례의 회전으로 원담에게 완승을 거둬 하북의 혼란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조조 측의 예측을 뒤엎으며 경계를 샀으며, 조조의 내전 개입으로 패주를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성실성과 의지만큼은 두드러졌고, 오환 망명 시점에서의 수완이나 요동에서 마지막으로 판 뒤집기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판단력도 뛰어나고 결기와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붙여 정국을 유리하게 이끄는 정치적인 교묘함이나 전략적 시야가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조조를 격파한 이후 승세를 타고 입지를 확고히 하기는 커녕 패배한 원담이 청주로 달아나 내전이 시작된 시점에선 그 모자라다던 원담조차도 청주의 자원을 활용해 기민하게 반격에 나서고 있었는데도 그저 수세적인 태도로 본인 영역권이 공격받는 상황을 방관하는 등 명백히 단호하지도 못하고 일관적이지도 못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원담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서도 원담을 재빠르게 축출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진압에 시간을 끌다 끝내 조조의 개입을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10대 중후반 정도라는 진짜 햇병아리 수준의 어린 나이로 경험과 권위도 부족한데다, 권력을 얻게 된 과정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단지 어머니인 유부인을 포함한 실력자들 몇몇의 합의에 따라 추대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런 결점은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적절한 안배로 이를 보완해줘야 했을 원소의 급사와 원상의 위치를 대체하려는 권위있는 이복형과 방계 일족들의 도전, 외부에서 밀려오는 초강적인 조조가 이들과 결탁하며 쳐들어오고, 대세가 결정됐다 판단한 유력자들이 조조에게 원상을 팔아넘기며 배신하는 상황은 본인의 힘만으로는 애초부터 극복불가능한 난국이었다. 때문에 원상의 몰락은 본인 스스로의 오판도 물론 있었지만 또한 이런 저런 일들이 꼬여버려서 나온 복잡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가후는 조조의 후계자 논란에 원본초와 유경승의 일을 잊었냐며 원가의 멸망원인으로 장자를 두고 원상을 세운 것을 거론했으며, 손권도 원소의 후사문제를 꼬집는 등 여기저기서 반면교사로 많이 인용되나 딱히 원상이 군주로써 불합격이였다는 뜻보다는 장남이 아닌 아들을 후계자로 세움으로서 옹립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분란을 경계하는 의도에 가깝다.[21] 물론 장자계승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원담을 내쳐서 후계구도가 심각하게 꼬여들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다른 후계를 내세우면 장자인 원담에게 군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저수의 진언을 듣지 않은 독선적인 원소의 잘못이 크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일정의 능력은 있었지만 시류의 한계에 부딪혀 결국은 실패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1.3.1. 당대의 평가
진수는 원상이 오직 미모 하나만으로 원소의 총애를 받아 총애해 후계자가 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고, 범엽도 큰 틀에서는 별다른 비판없이 이 시각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사관이 확인되는 최초의 기사는 조비의 전론으로, 조비는 진수와 달리 원소를 상당히 고평가하는 편이지만, 위대했던 원소가 악녀 유부인의 부추김과 원상의 파멸적 미모에 홀리면서 장자를 폐하여 모든 재앙의 근원을 만들었다면서 포사,서시,달기와 같은 신화적 팜 파탈의 서사를 그대로 원상에게 대입하고 있다.
조비가 원상의 외모를 묘사하며 완(婉= 예쁠 완) 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도 그러한데, 완은 아름답다는 뜻의 미(美)와 일견 비슷해 보이나 적어도 남자 외모를 묘사하면서 쓸 법한 표현은 아니다. 미(美) 역시 그리 흔하게 쓰인 표현은 아니지만 당대 기록에서 손책 등 일부 인물들의 외모를 긍정적으로 수식하는 형태로 종종 사용된 적이 있으며, 가면을 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갑골문과 양(羊)과 대(大) 가 합쳐져 크다→ 아름답다의 해석으로 이어지는 한대의 설문해자에서 드러나듯 기본적으로는 크고 화려하다는 뜻이 아름다움으로 발전된 형태인 반면, 완(婉)은 글자 형태 자체부터 대놓고 여성형인 데다, 완곡어법 같은 표현에서 보이듯 기본적으로 순함,연약함,말랑말랑함 등의 뜻이 있고, 최소한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런 뜻으로 사용되어 왔으며,[22] 이것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에서 예쁨이란 뜻으로 발전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자 외모를 묘사하며 미를 넘어 완의 단계까지 가면 아예 최소한의 남성성조차 부정해버리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 이는 당대에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든 외모평이었다.[23]
전론은 원씨 멸망 이후 10년 남짓한 시점에 쓰여진 책이며, 조비 역시 조조를 따라 원상과의 싸움에 직접 종군했던 인물이니만큼 엄연한 당대 사료로서 가치를 가지며, 원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적어도 조조 진영 중심부의 인물들이나 혹은 군중에서 원상을 모욕할때 자주 쓰이던 말로서 일정부분 통용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심배의 서신에서 묘사된 모습은 조금 다르다. 원상을 옹립한 중심인물인 심배는 원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상이 이미 일곱 살 무렵부터 신동이라는 명성이 있었고, 유순한 성품에 검소하고 성실하며, 글재주가 탁월하고 사리에 밝고 통찰력도 뛰어나다고 극찬하며, 그토록 현명한 아우를 의심해 정신줄을 놓고 분노에 사로잡혀 조조와 붙어먹으며 자신의 가문을 멸망시키려 하는 원담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심배의 서신 역시 엄연한 당대 사료로서 가치를 가진다. 다만 후술하듯이 원소의 유명마저 조작하여 원상을 옹립했기 때문에 그의 정통성에 의존하려 했던 심배 본인의 서신이며, 심배의 독선적이고 내부분열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서신이 객관적인 서술이라고 보기엔 힘든 부분이 많다.
조비는 원소가 원담 같은 현명한 장자를 내치면서 대의를 잃은 원씨 일족이 멸망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며 원씨 몰락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했으며 이는 충효와 명분이 강조되던 고대사회에선 당연한 덕목이었다. 별개로 원씨를 무찌른 조조의 후계자이자, 장유유서의 명분으로 동생들과의 정쟁 끝에 후계자로 등극한 조비로서는 장남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원상을 비판하여 장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해야 할 동기가 충분했으며, 심배 역시 스스로를 주공단과 계우에 비견하던 원상의 후견인으로서 원상을 찬양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할 동기가 명백했던 만큼 양극단에 위치해 있는 두 평가는 전혀 근거없이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겠으나 서술주체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과장, 왜곡되어 있는 프로파간다의 성향이 아주 짙다.
1.3.2. 유씨는 질투심에 미쳐서 원소의 첩들을 살해했는가?
전론은 후한이 존속되고 있었던 시점에 쓰여진 귀중한 1차사료이며, 원소의 죽음 직후 시점에 일어난 상황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지만, 서술주체의 정치적 의도가 명백한데다 같은 기록 안에서도 모순이 나타나기 때문에 미리 결론을 내놓고 짜맞췄다고 비판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전론의 기록을 신뢰할 경우 당시 원소를 정점으로 한 하북의 대장군부 체제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원소의 유명이 실은 존재하지 않았고 조작된 것일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이미 부고 발표 시점부터 파다했을 상황이었으나, 유명 조작이 드러날 경우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얻을 원담조차도 유명의 조작여부에 대해 감히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고, 단지 원상 측의 실세인 심배가 생전 원소와 원담의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원소의 유명은 원상의 승계에 절대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유명이 조작된 것이라는 정황이 너무나 명백한데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심지어 후계에 도전하던 원담조차도 감히 유명의 조작 여부에 공개적으로 도전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면 이는 구체적 물증을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 생길 역풍, 궁극적으론 자신들이 체제 정당성의 상징으로 신격화하며 떠받들던 원소의 권위 자체가 훼손돼버리는 상황을 부담스러워 했다고 이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해석의 여지가 성립되지 않는데, 전론의 서술에 따르면 원소 유명의 진위여부는 유씨 빼면 증언할 사람이 없었다. 이미 유씨가 원소의 죽음과 동시에 원소의 첩들을 모두 죽여버렸고 일족들까지 모두 죽였으므로.
기본적인 사실관계 서술에 대한 전론의 신뢰성을 긍정한다면, 투기심에 미친 악녀의 패악질과 악녀를 기쁘게 하기 위한 어린아이의 패륜적 효도가 도리를 잃은 원씨 패망의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한다는 조비의 프로파간다식 결론과는 별개로 당시 유명 조작의 진위여부를 은폐하기 위한 정치적 테러를 유씨가 '여인의 투기심' 을 핑계삼아 총대를 멨을 정도의 가능성이 성립된다.
1.3.3. 다른 기록들
심배와 조비의 평가를 필두로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윤색된 평가를 제외하면 원상 자체의 개인적인 인물상은 기록상 거의 드러나지 않는 편이며 현대 한국에서의 평가도 원상의 행적이 교차검증의 과정 중 큰 틀에서 재구성된 이미지에 가깝지 디테일한 인물상은 직접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원소가 청렴한 이미지를 여러차례 강조하며 명성을 얻은 반면 원소의 아들들은 방탕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24] 원담은 말할 필요도 없고 원희 또한 개인적 사치와 낭비벽 문제 관련해서 평판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원상은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워낙 크기에 형들이 사치스럽다는 평을 얻었던 197년 무렵엔 고작 9세 전후로 사치 등의 악평이 두드러질 나이가 아니었고, 202년에야 15, 6세가 되지만 당시 상황상 사치는 커녕 격무에 시달렸으리란 점과 실제로 심배의 평가에서도 검소함과 솔선수범하는 측면을 중점적으로 칭송받고 있다는 점. 다른 부분은 몰라도 심배의 그런 평가만큼은 원상의 행적에서 어느정도 검증이 된다는 점에서 적어도 품행이나 처신, 성실성의 측면에선 형들과 확연히 비교되면서 원소의 총애를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전략과 후한서에 나타나는 최후의 일화는 그나마 원상의 성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상 유일한 기록이고, 이 일화는 두 사서의 내용에 따라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전략에 따르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파악이 안 됐는지 뜬금없는 드립으로 보다못한 원희에게 한소리 듣던 얼빠진 인간상이고, 후한서를 따르면 이미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히 자리를 요구하며 공손강을 열받게 하는 상황이라, 일부러 의연함을 과시하며 공손강을 맥이는건지 종 잡기가 힘든 일화다.
최후 시점에 상당히 특이한 발언을 했고, 그 발언에 대한 해석이 갈렸는지 아니면 이 일화 자체가 처음부터 원상에 대한 당대인들의 상상력이 개입된 창작이었을지 진실이야 알 수 없으나 어떤 쪽으로 받아들이든 사람됨에 용력이 있고, 진작부터 먼저 선수를 쳐서 요동을 장악할 생각이었으며, 이를 기반삼아 조조와의 재대결을 염두했고, 공손씨와의 첫번째 회담에서 본인이 직접 공손강을 제압할 각오를 했으며, 사로잡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빈주의 예를 찾는다는 얼개는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심배나 조비 같은 추종자/적대자들의 과장된 프로파간다식 평가들과 별개로 원상이 원소의 후계자라는 자의식이 무척 강하고 판단도 기민하고 호전적이며 몸을 사리지 않는 성향의 강골이지만 한편으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당돌하다는 당대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일화로 해석될 수 있고, 원상이 기주를 두고 조조와 대결하던 과정에서 보인 대체적인 행보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최후 일화에 대한 평가는 현대에도 각양각색인데, 죽는 순간에서도 자리나 찾던 한심한 인물이라는 해석부터, 오히려 해당 발언이 시간끌지 말고 빨리 죽이라는 오기섞인 도발에 가깝다는 해석, 단지 하도 날이 추워 견디다 못해 자리를 요구했으나 그조차도 거부당한 채 죽는 원씨의 비참한 몰락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 이시다 미쓰나리의 최후 일화와 비견하는 해석, 의연한 듯 공손강에게 혓바닥을 놀리며 궤변으로 위기를 모면해보기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해석, 죽음에 직면해 떨고 있는 연약해보이는 모습을 추위 탓을 하며 감추기 위한 허세라는 해석, 이를 경국지색 기믹에 맞춰서 부정당하는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애처로운 어필이었다는 드립성 해석[25] 등 다양한 평가가 나온 바 있다.
조비를 비롯한 위나라 주류의 시각에서 파멸적 미모로 아버지를 홀린 취급을 받기도도 했으나 원상의 최후에 대한 전략과 후한서의 기사에서는 서두부터 원상의 위인됨에 용력이 있다고 평가하며 이어지는 원희와의 대화에서도 호전적 성향의 발언들을 연이어 쏟아내는 데다 최후 발언 역시 그런 뉘앙스의 해석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당대인들에게 원상이 남자답지 못하며 유약하고 수동적이라는 이미지보다는 호걸에 가까운 이미지기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이를 뒷받침하듯 유표는 앉아서 지키기만 하는 도적에 불과하나 원상은 교활하다는 조조의 촌평이나 원상을 내버려둔 채 유표를 치면 하북 4주를 모두 잃으며 위태로운 상황이 될 것이라는 곽가의 유세 기록을 살펴보면 조조 진영 내부에서는 진지한 태도로 원상을 무시못할 적수로 여기던 인식 또한 존재했다.
한편 후한말과 위진남북조 시대의 민간 설화집인 수신기에서는 도삭군 전설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슴을 닮았고, 눈처럼 새하얗고, 보들보들하고,매끈하고, 극도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원상의 외모를 묘사하고 있다. 이 설화는 대체로 원씨에게 동정적인 편인데, 공식적인 기록은 아니나 지괴소설류에 해당하는 민담으로서 후한말 일반 백성들의 인식이 아래로부터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있고, 사대부들의 공식적 기록들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당대인들에겐 원상의 외모가 미남이라기보다는 절색의 미소녀에 가까운 유난히 여성스러운 인상으로서 회자되었으며[26] , 긍정적인 시각에선 이를 도삭군 전설의 묘사와 같이 신령함의 징표로 받아들였고, 부정적인 시각에서는 조비의 인식처럼 경국지색, 파멸을 불러오는 요사스러운 미모 혹은 남자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살아생전에도 이러한 프레임으로 인해 무수한 성희롱에 시달렸을 원상에게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원소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원상 또한 원소의 적통 후계자로서 재조명되는 추세에 더해 경국지색 기믹이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정사였다는 점에서 오히려 일종의 신비주의가 생겨 컬트적인 인기가 늘어 가는 추세다. 정작 원상을 비난하던 조비는 무슨 인생사 새옹지마인지 1800년 전 자신이 원소와 원상에게 했던 비난과 정확히 같은 맥락의 역 프레임이 걸려서 맹달의 미모에 홀려 오직 외모만으로 맹달을 과도하게 총애했다는 과장섞인 비난도 자주 받는 편.
1.4. 미디어 믹스
삼국지의 스토리 라인 자체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인공인 유비가 투명라인으로 전락하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거의 모든 삼국지 창작물에선 여포의 죽음까지가 군웅할거의 클라이막스로, 관도대전은 아예 생략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혹여 관도대전을 다루더라도 이쯤 되면 대부분 기세를 잃는다.[27]
의무감에 관도전을 다루더라도, 이후 원소의 죽음과 원상vs조조의 5년간의 대립은 "이후 조조가 하북을 평정했다.식으로 내레이션 처리되는 것이 거의 필연적인 클리셰에 가까운 수준이며 이렇게 쿨타임 가진 뒤 삼고초려와 적벽대전이란 메인 이벤트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원류가 되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구성 자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주마간산으로 진행되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줄기 정도는 묘사하던 나관중은 그나마 양반에 속한다.
1.4.1. 영걸전 시리즈
시리즈 중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등장한다. 얼굴은 영걸전의 손환의 것을 재탕했다. '''2장의 공동 최종보스 중 한 명이다.''' 다른 한 명은 원희다. 하지만 이 위치에 비해 역할은 거의 없고, 원담과 함께 한심하기가 난형난제를 다투는 수준으로 묘사된다. 연의에서는 초반에 사환을 베는 것으로 무력을 강조한 편이지만, 조조전에서는 오히려 지능적인 모습이 더 부각되어서 병력을 대부분 날려먹었던 관도대전 이후에 빠르게 병력을 모아 원소의 칭찬을 듣기도 한다.[28] 그러나 상기한 지능적인 면모가 무색하게 곧이은 창정 전투에서 허저의 뻔한 도발에 허저 본인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쉽게 넘어가[29] 십면매복을 설정한 지역으로 깊숙히 유인당하고 복병이 예상된다며 이를 수습하려는 원소와 원희까지 같이 말려들면서 원소의 참패를 결정짓는가 하면, 업성 전투에서는 평원에서 원담과 싸우던 중 업성의 고전 소식을 듣고 회군해 구원하려던 것이 아니라 원담과의 싸움은 뒤로 미룬 채 정상적으로 조조를 요격하러 나갔지만 '''조조군의 위치를 착각해 전혀 엉뚱한 곳에 포진하면서''' 요격계획 자체가 무산되고 업성은 포위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대한 조조의 평가는 '''"원소의 아들치고는 애교있군. 조비도 본받았으면 한다."'''
유성 전투는 오환족이 등장하지 않은 채 원희의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으로 설정되었는데, 여기서도 명목상은 총대장이지만 조조군의 움직임을 보며 멍떼리거나 우왕좌왕하는 등 뻘짓만 하고 있고, 그나마 지휘다운 지휘는 원희가 다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나마 유성전투에서 정사&연의에 없는 조조전 한정 클래스인 맹호대라는 것을 선보이지만, 곽가를 살리기 위해 퇴각을 하건[30] , 아니면 씹고 진격을 하건 결국에는 패배하고 퇴장한다.
도대체 어떻게 후계자가 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개노답으로 나오는데, 일단 원희는 능력과 별개로 너무 착해서 배제되었다고 하고, 원담은 그나마 원상이 나아보일 수준의 열혈바보로 나오기 때문에, 원소 입장에서는 원상이 원담보다는 조금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연의에서는 원희와 함께 공손강에게 참수당하지만, 조조전에서는 공손강은커녕 전쟁에 시달려서 궁핍해진 농민 출신의 잡졸 1, 2에게 시골길에서 습격당해 죽는다. 어째 연의보다도 더욱 초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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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전 온라인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경기병/중기병이 된 두 형과는 달리 원상은 아버지와 같은 군주 클래스가 되었다. 아무튼 원소의 적통 후계자인 덕을 본 모양. 연의 원소전 후반부(관도 전투)부터 참전 가능한데, 성능은 그냥저냥 쓰자면 못쓸 정도는 아닌 C급 무장이다. 주력으로 채용하는 일은 사실상 없고 주로 '군주계 장수가 출진하여 승리' 임무에 동원되는 노동자 정도다.
1.4.2. 삼국지 시리즈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찌질한 장수로 나온다. 대체로 모든 능력치가 원담보다 약간 높지만 이러나저러나 둘다 오십보백보의 D급 무장이다. 정사에서나 연의에서나 어느정도 네임드에 속하는 사환이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환이 등장하면 연의에서 사환을 간단히 잡아버린 원상의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대폭 상향되어야 하기 때문이란 농담도 돌았을 정도다.
미소년이었다는 기록 때문인지 삼국지 시리즈에 장수열전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이래로 열전란엔 그 외모에 대해 항상 '''수려한, 빼어난, 단정한, 아름다운''' 등의 수식어가 붙는데, 그런 주제에 일러스트는 항상 찌질하게 나온다. 그럴 거면 아예 외모드립을 치질 말든가. 게다가 일러스트 우려먹기도 심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코에이한테는 어지간히 미움을 받는 듯하다.
원상의 외모가 문제가 되는 것은 동시대인이었던 조비가 원상을 파멸적 미모와 귀여움으로 원소를 홀려 재앙을 불러온 남자 달기로 묘사한 이래, 삼국지와 후한서의 저자들도 특별한 비판적 인식 없이 이 해석을 받아들였고, 연의에서도 사환을 일기토로 잡는 등 무용적 버프가 들어가긴 하지만 미모로 인해 원소에게 총애받으며 장남 원담을 위협한다는 기본적인 서사는 그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활약이나 비중을 떠나 미모 자체가 캐릭터적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상황이고, 코에이에서도 이를 인식하는 상황에서 일러스트는 매번 찌질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위화감이 쩌는 것이다. 코에이가 원소 세력을 터무니없이 까는 성향이 있긴 하지만.
방랑군 시스템이 있던 삼국지 10에서는 세력이 멸망한 이후에도 방랑군으로 독자 세력을 갖던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삼국지 11부터는 원희,순심과 같이 207년 시나리오에서 공손강 휘하의 무장으로 설정되었고, 방랑군 시스템이 부활한 삼국지 13에서도 공손강 휘하의 무장으로 고정되는 추세다. 황당한 인사 배치지만 공손강이 조조에게 둘러싸인 데다, 장수가 적고 재야풀도 빈약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설정한 듯 하다.
시리즈를 통틀어 보면 전투에 제한적인 활용이 가능하고 진용이 충분히 갖춰진 상황에선 턱걸이로 2선급에 낑겨넣을 수 있는 C급 정도인데, 삼국지 7부터는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D급으로 하향되었지만 12 이후 최신작으로 갈수록 다시 종전의 C급 수준으로 조금씩 상향되고는 있다. 머릿수 채우기 외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원담이나, 스탯 총합은 높으나 특화된 분야가 없이 어정쩡한 원희와 비교하면 무력에 특화된 맹장형 스탯에 전법이나 특기들도 괜찮은 편이라 형제들보다는 밥값을 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상향된 게 하후은이나 형도영, 포륭같은 일기토 칼받이용 가공인물들과 비등비등한 수준이라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사실 아버지 원소도 상향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지라.
삼국지 1에서는 다른 능력치는 그렇다 쳐도 무력이 87, 매력이 98이나 된다. 삼국지 시리즈 통틀어 가장 쓸만한 원상이라 할만하다. 물론 이후에는...
삼국지 3에서는 육전이 74 수전이 20 무력이 69 지력이 63 정치가 57 매력이 51인데 무력이 69라 장군이 될 수는 없지만 육전과 무력,지력이 괜찮아서 의외로 성능이 괜찮다. 원소군이라면 전투요원으로 충분히 굴릴 수 있는 수준이다. 그리고 원소의 아들들 중에서는 그나마 능력치가 좋게 나왔다.[31]
삼국지 4와 이를 리메이크한 삼국지DS2에선 원소의 삼남중 능력치합[32] 이 두번째로 높게 등장한다[33] . 통무지정매순으로 61/72[34] /46/52/70으로 전체적으론 잉여지만 그나마 원가 삼형제중 가장 전투적인 스탯이다. 사실 매력도 70이면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낮은 원가기준으론 상당히 고스텟이며 무력 72도 꽤나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지력이 40대로 매우 낮고[35] 정치력도 원담보다 낮다는 점이다. 게다가 원가기준으론 고스탯이지만 보통 기준으론 조비보다도 넘사벽으로 약한 수준이다. 특기도 총 6개밖에 없지만 장특기중 보병을 가지고 있고 전법중 쓸만한 강습과 파격을 가지고 있다. 계략중 알짜배기 화계도 있고. 물론 매도나 화공같은 희대의 쓰레기도 보유 중이고 특기수도 많지 않아서 대충 C급 취급이다. 능력치를 템으로 떡칠한다면 나름대로 쓸만한 군주로 거듭날 수도 있다.
삼국지 5에서는 무지정매 70/47/42/77 으로 어중간한 스탯이지만 진형이 추행, 언월으로 범용성이 높은 데다, 무쌍, 화시, 복병, 원시라는 유용한 특기를 가지고 있어 능력치 대비 매우 쓸만하다. 언월과 특기덕에 잉여급 취급에서는 벗어났다.
삼국지 6에서는 통무지정매 56/72/68/36/81 로 통솔과 정치가 다소 하향되었지만 지력이 크게 상향되고 매력도 80대를 찍어서 나쁘지만은 않게 되었다. 숨은특기로 무용을 가지고 있어서 필살기를 배울 수 있으나 꿈이 패권이라, 왕좌인 원담과 대립이 생기기 쉽다.
삼국지 7에서는 지력이 70대를 찍었지만 어째선지 무력은 40대로 급격히 내려가는데 삼국지 8에서 무지정매 73/44/42/76 으로 재조정 된 것을 보면 무력과 지력수치가 서로 뒤바뀐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62/73/44/34. 병법은 보병계 최하위 전법인 분전 외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써먹기 힘든 충차와 매도 뿐이다. 결국 버려진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66/70/50/44/79에 특기도 4개밖에(징병, 돌격, 회복, 명사) 없어 역시나 쩌리이지만 전작보다는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상향된데다 매력이 79에 징병특기가 있어 징병담당관이나 후방 태수 역할로서는 나름의 효용가치가 있으며 명사칭호 보유자라는 점도 강점. 그리고 '''모든 능력치가''' 원담보단 높다.(원담은 62/68/30/40/57에 특기 3개) 역사 이벤트로 원소가 죽으면 원소의 후계자가 되는 이벤트가 있다. 당연히 형 원담은 이에 반기를 들고 원가는 분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적벽염상 시나리오에도 방랑군을 이끌고 양평에 있다. 부하는 원희, 순심, 전주, 답둔 등이 있지만 플레이어가 지휘하지 않는 이상 보통은 거병을 시도하다가 금방 망해버린다.
삼국지 11에서는 63/71/44/38/72로 무력이 1 상승한 것 외에는 전부 하향된데다, 무특기에 병종적성도 좋지 않아 다시 삼국지 9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 삼국지 갤러리를 중심으로 원소가 미소년이었던 원상을 총애해 후계자로 삼으면서 나라가 기울어졌기 때문에 삼국지 11에서 원상의 특기로 경국을 줘야된다는 꾸준글이 있었다.
삼국지 11 콘솔판 추가 시나리오인 영웅난무에서는 무릉에서 군주로 등장한다. 유씨, 원희, 심배, 봉기, 고간, 곽원, 여광, 여상, 이부를 부하로 데리고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부하의 질도 썩 좋지 않은데 바로 밑에 깡패 유비, 위에는 육손, 옆에는 조예, 한 다리 건너면 조조까지 있어서 매우 하드코어하다.
삼국지 12에서는 63/75/42/38로 매력이 삭제되어 평균치가 많이 떨어졌으나, 연의에서 사환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하는 점이 감안되었는지 무력 70을 턱걸이로 찍거나 60대에 머무르던 전작들과 달리 11에 비해 4가 상승한 75가 되었고, 전법도 원담은 무력상승, 원희는 사정약화라는 매우 잉여스러운 전법들인데 반해 원상은 전법 자체로는 꽤 쓸만한 전공격강화를 가졌기에 무력이 '''87'''을 찍은 삼국지 1 을 제외하면 역대 최고의 무력 수치에 형도영, 포륭, 방열, 목순 같은 약소세력 에이스들과 대등하게 자웅을 겨룰 만한 포지션이 되었다.
다만 일러스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지 않은데, 역사적 기록 기준으로 원상은 경국지색의 파멸적 미모를 지닌 남자 달기라는 이미지가 있고, 연의 기준으로는 젊고 용모와 무용이 빼어나지만 오만하며 욕심 많고 비정한 인물이라는 캐릭터가 잡혀 있으나 삼국지 시리즈의 원상은 미모가 강조되는 열전의 내용과 달리 찌질한 인상으로 나오긴 해도 수염이 없는 젊은 장수라는 상은 삼국지 3 이후로 쭉 정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삼국지 12에서는 링컨 스타일 턱수염을 달고 나왔는데, 미모나 젊은 이미지가 강조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염이 그려진 게 딱히 남성성이나 맹장 이미지를 강조한 것도 아닌 데다, 포즈조차 뜬금없이 벨트를 자랑하는 듯한 개그스럽고 어색한 포즈라 최악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삼국지 13에서는 능력치는 그대로이며(통무지정 순 63/75/42/38) 일러스트도 재탕. 중신특성도 당연히 없고, 전법은 아군의 사기를 올려주는 고무. 특기는 훈련 3, 순찰 1, 신속 2, 공성 3, 일기 3. 전수특기는 훈련으로 원담, 원희보다는 확실히 나은 편이다. 다만 병종적성이 좋지 못한데, 창병과 기병 B가 전부. 문관들의 부장으로 쓰면 밥값은 하나 원소의 아들이자 후계자라는 신분 때문에 관직이나 계급이 높다는 게 문제. 아예 원소랑 한 부대를 이뤄 출진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환이 이번 13에서 출연했다. 능력치는 75/68/72/41이며 무력을 제외하면 원상보다 높게 나왔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3, 무력 72, 지력 42, 정치 40, 매력 73으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2 상승한 대신 무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붕벽, 동원, 저돌, 경솔, 오만, 주의는 패도, 정책은 시설개발 Lv 3, 진형은 어린, 충차, 전법은 돌격, 경파, 도발, 충차, 친애무장은 원소, 유씨, 혐오무장은 원담, 조조다. 일러스트가 똑같이 쓰이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100만인의 삼국지에서의 원상 일러스트가 하후영의 일러스트로 재활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자 삼국지 도원결의 카페 등에서는 13살에 죽은 하후영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일러스트를 쓰기보다는 차라리 원상의 일러스트를 100만인의 삼국지 버전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았겠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여담으로 원소와 같은 성을 가진 무장 중에서 무력이 제일 높다.
1.4.3. 토탈워 삼국
게임 내 캠페인에서 원소 진영의 셋째 아들로 등장한다. 발매 초기부터 2020년 말까지 고유 일러스트는 커녕 고유 배경조차 없는 클론 캐릭터였으나 2021년 2월말에 발표된 DLC '갈라진 운명'에서 유니크 캐릭터가 됐고, 감시자에서 지휘관으로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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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창천항로
창천항로에서는 형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등장. 여포의 사망 이후 원소의 하북 평정과 공손찬의 최후를 그리는 에피소드에서 역경루가 무너지자 중앙누각을 포위한 채 가족들을 죽이고 자살하려는 공손찬의 최후를 지켜본다. 이때 공손찬은 아직 하늘의 때는 오지 않았다면서 심리적 평정을 유지하며 기름을 붓고 횃불을 든 채 길동무가 될 테냐고 한껏 여유를 부리지만 원상은 하늘의 때, 즉 공손찬이 자신의 패업을 맡긴 것이 흑산적과 결탁한 아들을 말하는 거냐며 공손속의 잘린 머리를 내보이고, 망연자실한 공손찬에게 패업을 이루려는 자는 자신의 일생 안에서 완수하려 노력해야지 차대로 미룰 생각을 하면 안되고, 어떠한 명문이라 할지라도 부모에게 물려받아야 할 것은 영토나 병력 따위가 아닌 패자로서의 도량 뿐이라고 일갈하며 절망 속에 자살하는 공손찬을 가장 꼴사나운 부류의 패배자라 비웃는다.[36]
등장에만 한 화 전체가 할애되었고, 수염쟁이 아저씨가 가득한 창천항로에서 흔치 않은 젊은 청년의 이미지로 그려지며 막다른 곳까지 몰리고도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던 공손찬의 심리적 밑천을 싹 털어버리고 공손찬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일침을 가하며 절망 끝에 자살하도록 몰아붙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였기에 관도대전과 하북평정이라는 차후의 전개에서 나름대로 무게감 있게 묘사될 것처럼 보였으나 관도대전이 시작되면서 뚜껑을 열어보니 그저 패기 넘치는 바보일 뿐이었고, 깝죽대면서 이런저런 병크[37] 를 저지른다.[38][39]
관도 이후 조조와의 싸움은 내레이션 한컷으로 처리되었으며 오환과의 싸움에서 수염을 기른 채 재등장하지만 여전히 바보로 나오며 오환족에게도 무시당한다.
항상 조조를 의식하며 조조는 원가를 라이벌로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작중의 조조는 원가따윈 안중에도 없고 작중 인물들에게서도 조조가 원상따위를 의식할 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등 등 철저히 무시당하며 [40] 작중에서 조조가 북방 원정을 이유 역시 딱히 원상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화를 넘어 북방 대지에 조조라는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답돈이 죽자 오른손이 잘린 채로 요동으로 도망가 공손강에게 조조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천하의 백성들이 아직도 아버지인 원소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감하여 자신이 재기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같이 조조를 쳐서 천하를 탈환하자고 말하지만 공손강은 이에 대해 '어이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몽매하다.'고 평가.
이후 복병으로 원상 일행을 포위한 뒤 조조가 당신의 목을 원해서 북으로 올라왔을 리는 없지만 조조가 있다는 자체는 그 자체가 질문이기에 자신들은 뜻을 밝혀야 한다고 얘기하자 공손강 이름 부르다가 찌질하게 죽는다. 공손강은 원상, 원희의 머리를 들곤 "이정도 선물로 우리 의사를 받아줄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후 조조가 투항자들을 이끌고 재차 장성을 건너 돌아갔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원희와 함께 까마귀가 아무렇게나 버려진 머리에서 눈알을 뽑아먹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 등 죽은 뒤조차도 능욕수준으로 안습하게 나왔다.
첫등장에 한 회 전체를 할애해서 뭔가 대단한 놈처럼 띄워줬다가 정작 관도 시점부터는 안습캐로 전락했다. 작중 원씨 자체가 관도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나름 재해석 빌드업이 깔리다 정작 관도대전 본편을 기점으로 흐지부지해졌다는 평가가 우세한데 작품 외적으론 스토리 작가인 이학인이 관도대전 연재 초반 투병 끝에 작고하고 그림 작가인 킹곤타가 이학인 생전의 콘티와 설정을 기반으로 연재를 이어나갔다는 점에서 스토리 작가의 건강문제와 사망이 묘사가 애매해진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1.4.5. 화봉요원
화봉요원에서도 형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등장한 원소의 아들. 초반에는 꽤나 깐죽거릴 뿐더러 뭔가 나름대로 똑똑한 척 행동하는게 사실 바보짓이라 상당히 안습한 캐릭터 였는데...형들이 '''더 안습한 꼴로 등장한 후''' 그래도 형제 중에서 나은 편임이 밝혀졌다. 관도에서는 잠시 원방을 대신해 전선을 총괄하기도 했고, 최측근인 심배가 그래도 원소 군 내에서는 원방 다음으로 똑똑한 편인지라 그의 보좌 덕을 많이 본다. 원방과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지, 관도대전 중반부 까지는 나름대로 손발이 맞는 것 같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이용 당하고 만다.
어찌 됐든 관도대전 이후 조조와의 길고 긴 전쟁을 이끌어나갈 중심인물이 되어야 했으나....
작중 원소 진영에서는 작가 오리지날 캐릭터인 원방이 모든 사건의 중심축이 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물론 심지어 원소조차도 이야기의 축이 될만한 힘이 없이 거의 잉여에 가깝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관도대전을 끝으로 원방이란 캐릭터가 퇴갤하면서 원소 사망과 그 이후 조조와의 대립은 거의 대부분이 내레이션 처리되거나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식으로 처리되는 등 주마간산으로 진행되며 광탈한다.
작중 1년의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현실에서도 1년의 시간이 진행되던 화봉요원의 전통이 깨진 샘인데, 애초에 작가 오리캐인 원방을 제외하면 원소진영 인물 전원의 비중이 공기, 잉여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우려가 많았다.
1.4.6. 삼국전투기
데긴으로 역변한 원소의 젊은 기믹을 이어받아 가르마 자비로 나온다. 원소의 아들들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했는데, 당시 가르마는 원소가 먼저 써먹었고 원담이 기렌 자비로 나왔으니 기렌과 대립관계였던 키시리아 자비로 나올 것이란 예측도 많았지만 결국 원소의 젊은 모습과 똑같다는 설정으로 가르마 자비로 등장한다.
다만 머리모양과 색깔이 미묘하게 다르고 정복을 입고 나오던 원소와 달리 항상 갑옷차림에 등엔 칼을 메고 있는 디자인인데, "우유부단한 원소와 달리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지만 정치적 역량은 비할 바가 못된다."는 소개를 보면 대체로 전투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듯 하다.
역경 전투에서 원소군의 에이스 중 한 명으로 처음 등장[41] 했다. 문추, 순우경 등과 함께 공격을 들어온 공손찬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며, 역경루가 무너지자 가장 먼저 중앙누각으로 달려가 공손찬을 죽이는 공을 세우고 실속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녀석이라고 공손찬을 비웃는다.
소패2 전투에서는 조조쪽으로 갈아탄 선비족 문제를 흉노의 선우와 의논하고자 부장 견초와 함께 국경 부근인 이석으로 이동했다. 견초가 이런 일로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냐고 묻자 무슨 일이든 직접 움직여야 주목을 받는 법이고, 특히 탁상공론자인 담과는 더욱 비교가 될 것이라며 후계자 자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후 선비족의 기습을 받게 되고, 그 소식을 듣고 냅다 도우러 달려온 원소와 조우하지만, 정작 선비족의 공격에는 큰 피해가 없던 것으로 묘사된다.
창정 전투 편에서는 이후 연의와 믹스해서 창정전투에 병이 든 원소 대신 총대장으로 참전하게 됐다. 원소의 의도는 원상이 조조를 치고, 그것을 원담이 서포트하게 하여 각자의 역할을 인지하게 하는 거였지만, 애초에 원상은 원담에게 떡고물을 넘겨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려고 작정한다. 이후 창정에 도착하고, 고간에게 합류한 뒤 지휘권을 넘겨 받는다.
이후 고간이 자신이 적군을 요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전투를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던 원상은 자기가 직접 선봉에 서서 총공세를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고간이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자 적도 똑같은 생각을 할 테니 그 허를 찌르는 것이라고 둘러대고 자기가 이끄는 선봉대가 교전을 시작하면 전군을 끌고 들어오라고 고간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조조군의 선봉으로 나온 사환을 죽이며 기세를 잡고, 조조군을 10여 리 가량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정욱에게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는 점을 간파당하게 되고, 다음 번에도 총공세로 올 것까지 간파당해 버리게 된다. 이후 우금과 교전하게 되어 우금을 강가까지 몰아넣는 듯 싶었지만 애초에 우금이 원상을 잡기 위한 정욱의 미끼였고, 그렇게 정욱의 십면매복계에 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42] 대부분의 병사를 잃으며 완전히 작살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난다.
이 소식을 들은 원소의 병세가 악화되어 식물인간이 된 사이 심배, 봉기와 업을 장악하고 원담의 후계자 자리를 가로챈 것으로 나오는데, 원소의 사망을 두고 1년 이상 의식불명 상태였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로 얼렁뚱땅 넘어갔기에 욕을 많이 먹었다.
평양 전투 편에서는 원담이 청주에서 업으로 오는 사이 발빠르게 원소의 빈 자리를 차지하고 원담을 몰아냈다고 언급된다. 밀려난 원담은 여양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여양으로 조조군이 쳐들어오자 원담은 원상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원상은 지원받은 군사로 자신을 공격하려는 것 아니냐며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담과는 별개로 조조군이 쳐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했기에 원상은 심배에게 업을 지키라고 시킨 뒤 직접 군대를 끌고 여양으로 출진하지만 조조에게 대패하게 되었고, 조조군은 강한 반면 아군은 구심점이 사라진 직후라 흐트러진 상태라서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회해서 조조군을 공격하기로 정했고, 방비가 튼튼한 동부보다는 서부 전선을 공략하는 게 유리하다고 여겼기에 서부 전선을 공략하기로 한 뒤 심배에게 이를 전달했다. 다만 서부 전선 공략은 마초, 방덕에 의해 곽원군이 전멸당하면서 실패하게 됐다고 묘사된다.
업 전투 편에서는 여양을 조조에게 뺏긴 뒤 잠시 원담과 손을 잡고 조조에게 대항해 조조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조조가 군을 물리자마자 다시 원담과 거하게 한 판 붙었다고 언급된다. 이후 원담을 평원으로 쫓아 버리는 데 성공했고, 아예 원담을 무너트려 버릴 작정으로 평원까지 쫓아가서 여광을 시켜 원담의 마지막 장수인 잠벽까지 죽이면서 승리하는 듯 했으나, 원담의 항복을 받아들인 조조가 업을 공격하게 되자 여광, 여상을 평원에 남겨 두고 업으로 회군했다. 그리고 여씨 장수들은 원상이 돌아가자마자 즉각 원담에게 회유돼 버렸다(...)
그렇게 업으로 돌아왔지만, 심배에게 원담을 잡는 게 우선이라는 말을 듣고 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다는 심배의 다짐을 들은 뒤 마연, 장의를 선봉으로 삼아 다시 평원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업이 위태롭다는 의견을 듣고 역시 자기가 남았어야 했다고 투덜대며 자신은 조조의 뒤로 돌아서 간 뒤 업성과 함께 양쪽에서 공격하기로 하지만, 조조에게 읽혀 버린 바람에 서황에게 막히게 되었고, 결국 패배한 뒤 조조에게 항복하지만, 조조가 항복을 받는 척 하면서 원상의 군을 초토화시켜 버려서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 원상은 원희가 있는 유주로 도망쳤다.
유성 전투 편에서는 유주의 원희에게 의탁하던 중 견초를 보내서 고간과 동맹을 맺어 보려고도 했으나 실패하기도 했다. 견초 또한 이 이후 아예 조조에게로 갈아탄 건 덤. 유주에서 초촉의 반란이 터지자 원희와 함께 답돈이 있는 요서로 도망치기도 했다. 답돈이 죽은 뒤에는 다시 요동의 공손강에게로 도망치지만[43] 공손강이 자기에게 의탁한 원씨 형제를 죽이면서 사망했다고 묘사되었고, 그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다.
원담 폐출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으나 한 독자가 이를 지적하자 단행본에서 원담 폐출에 대해 언급하며 이를 적극 부정했는데, 문제는 일정한 논거를 들어 반박한 게 아니라 "못 믿겠다, 아니겠지, 그만하자"는 행간이라.
삼국전투기 역시 어지간한 2차 창작물과 비슷하게 관도전투 이후 급전개가 진행되어 창정전투와 원소의 사망도 날림이란 말이 많았지만 원소 사망 이후와 오환 원정까지는 대놓고 날림으로 연재해서 6화만에 끝내버렸는데, 그 와중에 마초 띄워준다고 중심축이 아니라 곁가지에 가까운 곽원과의 전투에만 그 절반인 3화를 할애했기 때문에 사실상 여양 전투부터 시작된 원상과 조조의 5년간의 대립을 단 3화만에 끝내버린 샘이다.
이후 3화를 더 연재한 뒤 1부 종결이란 말로 6개월간 휴재를 때려버렸다. 본래 이보다 한참 이전부터 답돈을 등장시키며 뭔가 있을것처럼 묘사했는데, 답돈 역시 단 한컷만에 순삭당했기 때문에 당초 계획은 최훈이 강한 빠심을 밝혔던 곽가나 장료를 띄워주기 위해서라도 원소 사후 원가에 대해(혹은 최소한 유성전투 정도는) 나름 비중 있게 연재하려다 아무래도 귀찮아지면서 소드마스터 야마토마냥 급전개로 간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1.4.7. 삼국지를 품다
관도대전이 시작되는 3막 후반부부터 등장하며 원씨 삼형제 관련 번외퀘스트가 있는데, 삼형제가 모두 고유 모델링도 있는 등 의외로 비중이 있다. 젊은 미남형의 모델링이지만 미소년 이미지는 전혀 아니고, 거구의 대장부 이미지로 등장한다. 성우는 시영준이다.
연의에서 나름대로 일기토 전적이 있어서인지 관도전 시작하자마자 죽는 안량, 문추 이후 원소군 무력의 아이콘 겸 원소 사후 조조의 하북 평정을 다루는 4막 초반부의 보스 컨셉으로 기획된 듯하다.
원소의 비위를 잘 맞추고, 특히 공손찬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거의 원맨쇼 급의 맹활약으로 입지를 확고히 하며 원담과 대립한다. 원담에 대해서는 머저리 같은 놈이 장남이라고 설친다며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원담은 어린놈이 위아래도 모르고 건방지다며 열폭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꾸미지만 결과적으로 더욱 입지를 깎아먹는 식이다.
등장 초반에는 공손찬과 조조를 통해 원소의 아들 중 이렇게 대단한 놈이 있는 줄 몰랐다며 띄워주는 대사도 치지만, 호전적이고 거만한 성격에 야심이 많아 끓임없이 분란을 조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4.8. 삼국지톡
시즌 6 관도대전 41화에서 첫등장. 기주대부속초 5학년(12살) 학생이다. 이복형들과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 유부인의 외모를 잘 물려받았는데, 눈매는 어머니를 닮고 나머지 부분은 아버지를 말 그대로 빼다박았다.[44] 심지어 원본초체까지 그대로 닮았다(...)
원소는 원담, 원희를 냉대하는 것과 달리 원상을 아주 노골적으로 편애하고 있다. 원상이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길 정도로 원소를 가깝고 편하게 여기며, 원소는 원상의 머리가 약간 흐트러진 것을 꾸중하기는커녕 농담을 하며 웃을 정도로 너그럽게 대한다.
74화 시점에서는 키가 좀더 커서 꽤 의젓해졌다.
2. 조선 시대의 임시 관직
院相
조선 왕조 시기 국왕이 질병이나 사망, 기타 이유로 정상적인 업무가 곤란할 때 재상들을 중심으로 국정을 관리하는 직책. 섭정과 비슷하다. 다만 실제 원상의 기능 수행은 일반적인 섭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선에서는 실제 집무가 곤란해도 국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은 최대한 피하려 했으며, 섭정 또한 왕세자/세제의 대리청정 또는 수렴청정 등의 형태로 주로 이뤄졌다. 따라서 원상은 보통 선대 국왕이 사망한 직후에 기능을 수행해서 차기 국왕이 공식 즉위할 때까지의 공백 기간 동안 단기간 기능을 수행하는 형태로 주로 이뤄졌다.
시초는 1467년(세조 13년)에 국왕인 세조가 병으로 인해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 곤란해지자 공진 정승인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에게 승정원에서 국정 업무를 수행하게끔 하는 것에서 비롯하였다. 이후 세조가 사망하기 전에는 17명이 4조로 운영되다가 1468년 예종 때는 이를 9명이 4개조로 맡았으며 성종 재위기간까지 지속하였다. 이후에는 그 규모를 축소하여 의정부의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국정을 총괄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서 마지막으로 원상이 기능을 수행한 것은 철종이 사망한 직후로, 고종이 즉위할 때 까지 당시 영중추부사인 정원용이 원상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