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표

 




劉表
(142년 ~ 208년)
1. 개요
2. 생애
2.1. 형주 평정
2.2. 대외에서의 공격
2.3. 말년
3. 평가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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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 는 경승(景升) 또는 경숙(景叔).[1]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유비처럼 황실의 종친으로 한경제의 4남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아들 유교의 자손이며, 산양군 고평현(현재의 지닝시 웨이산현 근처) 사람인데, 고평현에 욱랑정이 있고 이 욱랑이란 이름은 바로 조상 유교의 봉국과 일치한다. 즉 그의 집안은 기원전 126년 유교가 욱랑 땅에 봉해진 이래로 267년을 넘게 그 땅에 자리잡고 살아온 셈이다.
유학자 출신으로, 역(易)에 관해 당대 최고 인물 중에 하나로 한대 구가역(九家易)중에 하나로 꼽혔다. 이후 자신이 부임하는 형주에서 형주학파를 만들어 그 일원이 된다. 당대 유명한 학자들인 정현, 순상(순욱의 종조부)등과 교류를 했고 건안칠자로 유명한 왕찬의 조부인 남양태수 왕창에게 역을 배워 이후 왕찬이 형주에 자리잡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형주자사 시절 학자들을 모아 오경장구를 편찬했으며 당대 최고 유학자인 송충 등을 불러들여 학문연구를 하게 하기도 했다.[2] 형주학은 마융과 정현이 완성한 훈고학 체계를 좀 더 정묘하게 다듬은 것으로 이후 위진현학이나 당대 훈고학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3] 본디 한실의 후예였기 때문에 명망도 높고 학식이 풍부하다.
이 때문에 팔급(八及)의 한 사람이자 '''강하팔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또한 8척에 달하는 큰 키에 외모가 매우 준수해 학자다운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동탁에 의해 형주 자사로 임명당해 군벌이 되지만 않았어도 평생 학자로만 살다 간 사람으로 꽤 고평가 받을수도 있었던 사람.

2. 생애



2.1. 형주 평정


그는 당고의 금 사건[4]으로 인해 숨어 살고 있었지만, 황건적의 난으로 당고가 해제되자 하진 밑에서 대장군연을 지냈으며, 북군중후(北軍中候)[5]를 지내고 있다가, 동탁이 권력을 잡고 있던 190년에 형주자사로 임명된다.
당시 형주의 상태는 막장이었는데, 실력자였던 원술이 손견을 사주해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고 남양을 점거한 후 노양에 주둔하면서 손견을 보내 동탁과 싸우고 있었다. 유표는 원술의 견제를 받아 자사의 치소가 있는 무릉까지는 내려가지도 못한 채 단기필마로 양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유표의 전임 형주자사였던 왕예손견에게 살해당해 권력의 공백이 생겨 수많은 호족들이 제각기 무리를 일으켜 난립하고 있었다. 이 무리들은 흔히 '도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을 지칭하는 원문은 종적(宗賊)이고 이는 향촌의 씨족을 중심으로 한 무장집단을 뜻하는 것이라 일반적인 도적떼와는 다소 성질이 다르다. 왕예의 죽음으로 인한 통치권력 부재에, 동탁의 집권으로 인한 국가 정통성 붕괴 등으로 치안이 불안정해지자 각 고을의 유력 가문들이 제각기 군대를 조직한 것인데,(이들 중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근에서 왕노릇하려는 소영웅이나 떼강도 같은 무법자들도 일부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국가 권력을 믿지 못하면서 생긴 자경대 개념에 가깝다. 결국 국가 입장에서 봤을 때 똑같은 도적이긴 마찬가지지만, 당시 중앙을 장악하고 있던 동탁은 빼도박도 못할 역적 취급을 받았으며 헌제는 동탁이 마음대로 세운 괴뢰 황제로 여겨졌고 유표는 그런 중앙에서 임명된 형주자사였음을 생각하자.
혈혈단신으로 형주에 부임해 지지기반이랄 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유표는 이토록 중앙을 따르지 않는 호족들이 원술에게 협력할 것을 매우 두려워했으며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도록 조정에 상주하고[6], 산동 반군(=반동탁 연합군)에 합세[7]하는 등 초반에는 원술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유표는 채모, 괴월, 괴량 등의 유력한 호족들과 긴밀하게 연대했으며 특히 채모와는 인척관계를 맺어 친분을 갖는다.[8] 이에 유표는 양양에 치소를 설치하고[9], 괴월의 협력에 힘입어 55명에 이르는 종수들을 초대한 뒤 모두 끔살시켰으며, 채모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두목 없이 혼란에 빠진 무리들을 남김없이 소탕한다. 이렇게 반대세력들을 일거에 정리하며 본보기를 보이자, 기존 형주 각 군현의 태수,현령들은 대부분이 유표를 두려워하여 감히 거역치 못했으며[10] 유표는 형주 전역에서의 통치력을 확고히 하여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유표는 채모의 말을 거절하기 힘든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유표는 원소와 연합하며 원술을 견제했고, 이에 원술은 손견을 보내 유표를 응징한다. 유표는 황조를 보내 번(樊)과 등(鄧)현 사이에서 맞서 싸우게 했으나[11], 황조는 패하고 손견이 한수를 건너 양양을 포위하는 등 전황은 매우 불리했다.
유표는 양양을 수비하는 한편, 황조를 재차 성 밖으로 보내 포위를 뚫고 인근의 군현에서 군사를 모아 합류하게 하는 기각지세를 취한다. 손견은 황조를 추격해 격파했으나 산 속에 숨은 황조를 쫓는 과정에서 단기로 숲을 거닐다가 매복해있던 황조군의 저격수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다.
손견의 죽음에는 이설이 있는데, 형주의 문관으로서 비범한 기억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왕찬의 영웅기에서는 유표가 부장 여공을 보내 산을 타고 손견을 공격하게 하자 손견이 경기병을 이끌고 역공을 가하던 도중 돌에 맞아 머리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손견의 최후에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포위된 유표가 밖으로 별동대를 보내 기각지세를 시도했고, 손견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너무 서두르다가 변을 당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하는 듯 하다.[12] 손견이 죽고 남은 무리들이 혼란에 빠지자 역공에 나서 이들을 깨끗하게 소탕한 유표는 형주의 패권을 확고히 하였으며 천하의 시국을 관망하며 한번에 정세를 뒤집을 적기를 노리듯 남몰래 야심을 키운다.
유표는 일개 형주목에 불과했지만, 천자의 고유한 의식인 교천제를 지낸다든가 크고 작은 예법과 치장 등에서도 천자만의 권리였어야 할 것들을 범하였다. 조조가 헌제를 받들어 조정과 종묘사직의 기틀을 다시 복원하였음에도 이미 동탁에 의해 한나라가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지고 있었던 만큼, 한제국의 붕괴와 군웅할거의 시대에서도 평온함을 지키고 있던 형주의 주인으로 할거하며 '유(劉)'라는 성씨와 청류파의 명망과 유학의 권위에 의지하여 손 한번 대지 않고 코 풀듯 자연스레 왕후의 자리에 오르고 나아가 천자로 추대되길 기대하는 야망이 유표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덕과 도리로써 마치 아래로 내려다보고 타이르듯 외교전을 펼쳐 천하의 대국을 뒤흔들었던 흔적 및 방침이라든가, 장수와 유비를 인근에 주둔시키고 지원함으로써 직접 손을 더럽히고 피를 흘리는 바 없이 영역을 깨끗하고 안전하게 유지해온 노회한 면모에서 유표가 야심과 역량이 만만치 않은 걸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같은 해 6월에 이각곽사가 정권을 장악하자, 유표는 겨울에 중앙으로 조공을 보냈고, 이각 등은 유표를 외원으로 삼기 위해 진남장군(鎮南將軍), 형주목(荊州牧)으로 삼고, 성무후(成武侯)으로 봉했으며, 절(節)을 수여하였다. 형주목 수여 이전에 유표는 안남장군(安南將軍), 형주자사로 임명되어 있는 상태로, 이는 후한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장군(을 포함한 여러 임시 무관직)과 지방 행정관의 결합 형태다. 이각 등이 주체가 되어서 내린 권한은 이 직에서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93년, 조조와 원술이 싸울 때는 원술의 후방을 공격해 양도를 끊는 등. 원소와 같이 조조를 도와 원술을 견제했고, 원술은 참패하여 남양에서의 세력을 완전히 잃고 양주로 달아난다.
194년에 익주목 유언이 죽고 그 아들인 유장이 집권하면서 익주의 호족 감녕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별가 유합을 보내 지원한다. 감녕은 패하여 유표에게로 망명해왔으나, 유표는 감녕을 남양군에 머무르게 할 뿐 별로 신임하지 않는다.[13]
196년, 장제는 식량이 부족해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남양을 침략했다가 활에 맞아 죽는다. 이때 형주의 관리들이 모두 축하했으나 유표는 "장제가 곤궁하여 손님으로 왔는데 주인(=유표 자신)이 무례하여 교전에 이르렀다가 죽었으니, 자신이 빈주의 예를 지키지 못한 것이므로 조문을 받을지언정 축하를 받을 수 없다"며 매우 안타깝게 여기는 듯한 태도 를 보여 장제 잔당들의 환심을 샀고, 사자를 보내 장제 뒤를 이은 조카 장수를 받아들여 남양에 주둔하게 해 번병으로 삼는다.
같은 해에 이각,곽사 등에게 벗어나 낙양으로 달아난 헌제 유협은 태복 조기를 형주로 보내 조세를 보낼 것을 독촉했고, 유표는 조기가 도착하자 즉시 군사를 파견하고 각종 물자를 보내며 황궁의 수리를 돕는다.[14] 다만 이 기록은 다소 애매한 것이 헌제기에 따르면 각 주군에서 강병을 끼고 있었으나 물자를 보내지 않았다고 서술되어 있고,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기록된 군벌은 장양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유표 본인의 전기에서도 같은 해에 장제의 무리를 흡수한 것만 비중있게 기록되고 있을 뿐, 조정에 협력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으며, 여타 기전에서도 유표가 후한 조정과 연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서술만 넘쳐나기 때문이다.
조기의 열전에서도 유표는 헌제를 맞아들여 봉영하려 한 것이 아니라 물자를 보내는 것에 그치고 있는데, 장제의 무리를 흡수한 것이나, 누규가 남양에 주둔하며 삼보의 유민들을 형주로 보냈다는 점, 실제로 상당히 많은 네임드 명사들이 삼보의 난 이후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던 점을 봤을때 아마 유표는 조정을 장악하고 천자를 이용해 패권에 도전할만한 배짱은 없었고, 다만 물자를 보내 중앙에 생색을 내는 한편 삼보의 난으로 대거 발생한 유민들을 흡수해 세를 불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정에서는 유표의 생색마저 아쉬웠으므로 어사중승 종요를 파견해 유표의 격을 삼공과 같게 해 독자적인 부 개설권을 가지고 관리를 천거하며 임명할 권한을 내렸으며, 교주, 양주, 익주의 감찰권을 더했다. 사실상 남중국의 최고 권력자로 임명한 샘인데, 이에 더하여 북, 피리, 큰 수레를 내리고 황제의 '''백부'''라는 극존칭을 주었다.[15] 유표를 황실 최고의 웃어른으로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헌제를 봉영하고 조정을 장악해 허도로 천도한 조조는 불과 4개월도 지나지 않은 197년 1월에 남양을 수비하던 장수를 공격한다.[16] 장수는 일단 조조에게 투항했으나 진심으로 조조를 따른 것은 아니었던 데다, 조조가 장제의 미망인을 취한 일로 조조에게 원한을 가졌기에 조조를 습격해 패퇴시켰으나,[17] 조조가 반격에 나서자 양현[18]으로 달아났고 유표와의 결속을 더욱 굳게 했다.
이후 조조는 황제를 자칭한 원술을 격파하는데, 이 사이 유표는 장수를 지원하며 여러차례에 걸쳐 남양 일대를 공격했고, 조조는 조홍을 보내 막게 하지만 조홍이 패하자 자신이 직접 남하하여 197년 겨울부터 198년 여름에 걸쳐 유표와 여러차례 싸운다. 조조는 198년 5월에 장수를 양현에서 재차 포위하였으나 유표가 원군을 보내 조조의 후방을 차단하도록 하자 퇴각한다.
이때 장수의 모사 가후는 조조군이 후퇴할 때 섣불리 뒤쫓으면 (조조가 대비를 했을 것이기에) 질 것이라 예견했다. 과연 장수와 유표가 패해 돌아오자 "이때야말로 공격할 때다"라고 했고, 그것도 들어맞았다. 조조군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느라 다시 방어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한편 이 무렵 조조는 유표를 견제하기 위해 유표에게 소외되고 있던 장사태수 장선을 부추겼고, 장선은 영릉, 계양군을 들어 유표에게 반기를 들었다. 남북으로 전선이 양면되어 있던 유표는 오랬동안 장선을 토벌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지만 조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마침 장선도 병으로 죽었기에 장선의 세력을 물려받은 아들 장역을 간단히 제압했다.
유언이 188년 주목 설치를 건의한 이래, 멸망으로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던 한나라 중앙정부는 이를 데 없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익주목 유언과 형주목 유표로 더욱 곤란한 상황이 된다. '형주자사'였던 유표에게 '형주목' 등의 확장된 권한을 지닌 관직을 내린 것은 이각 등이 유표를 자신의 편으로 삼고자 함이지 이각과 떨어진 한나라 정부 입장에선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 어쨌거나 덕분에 유표는 유언을 훨씬 능가하는 다음과 같은 매우 파격적인 한나라의 관직을 받게 된다.
사지절 정남장군 벽소개부 의동삼사 독교양이주 형주목(使持節 鎮南裝軍 開府辟召 儀同三公 督交揚二州 荊州牧)
관질 2000석 이하의 관리를 처벌할 수 있는 군사법권을 가지고, 정남장군 부(府)를 개설해 필요한 속관을 임명할 수 있고, 관직의 격은 삼공과 같으며, 교주와 양주의 군사 지휘권을 가진 채 형주의 군령/군사법권/군정/민정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관직이다. 한나라가 당시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이런 관직을 내릴 수가 없다. 물론 양주와 교주는 각각 원술 혹은 손씨일가와 사섭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명목상 그렇다는 것이지만 하여간 어마어마한 권리임에는 틀림 없다.

2.2. 대외에서의 공격


이렇게 야심만만한 유표가 힘을 키우는 것을 보고 중앙조정은 점차 유표를 견제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양주를 장악한 손책과 익주의 유장을 이용해 유표를 견제하려 한 시도를 한 것이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은 사공 조조, 위장군 동승, 익주목 유장과 힘을 합쳐 원술과 유표를 토벌하라는 조칙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중앙의 조조와 동승이 실제로 유표를 치는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명확하고, 유장 또한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손책은 확실히 행동에 나서는데 이는 원술이 남긴 유산이 계기가 된다.
199년 하순, 결국 재정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패망한 원술이 병들어 죽자 그 잔당들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모여들었는데, 그 무리가 워낙 많았으므로 물자가 부족해진 유훈은 손책과 연합해 인접한 예장군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손책은 원술의 잔당들을 탐내 유훈과 거짓으로 동맹을 맺고 배후를 급습할 생각이었고, 유훈이 외부로 나가자 직접 나서 유훈의 근거지인 환성을 점거하는 한편 사촌형인 손분, 손보를 보내 되돌아오는 유훈을 격파한다.
유훈은 유표에게 위급함을 고하며 원군을 청하자 이에 유표가 개입하여 강하태수 황조의 장남 황역을 파견하지만 유훈은 황역이 도착하기 전에 패하여 조조에게로 달아났고, 손책이 역공에 나서 강하군까지 진격하자 황조는 2~3만에 이르는 전사자를 내며 참패하고, 유표에게서 원군으로 파견된 유표의 조카 유호까지 죽는다.[19] 손책은 이를 들어 '폭위를 떨치던 유표의 한쪽 팔이 꺾였다.' 고 표현했는데 내용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고, 유표 진영의 사정은 기록이 없는 관계로 교차검증이 불가능하지만, 동쪽 전선의 책임자였던 황조는 손책 사후 대혼란에 빠진 손씨 정권에게 전혀 공세를 가하지 못했고, 한참 지난 206년에야 고작 한 차례 공세를 시도하기 때문에 정황상 동부 전선이 거의 재기불능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20]
이는 199년 12월의 일인데, 같은 시기에 북방 전선의 핵심인물이었던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한다. 두 전선이 거의 동시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게다가 후계자 문제도 심각했다. 유표는 본디 장남 유기를 총애했으나, 차남 유종은 채모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을 계기로 채씨 가문과 공고히 결탁했고, 채부인과 채모가 안팎으로 유기를 음해하며 유종을 열심히 띄웠기에 유기는 점차 쩌리로 밀려났으며 종국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중앙에서 자발적으로 퇴진하게 된다.
물론 유표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손책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성한 세력이었고, 남중국의 최강자였으나, 이후 유표가 보이는 한심할 정도의 우유부단함과 채모 등 양양 파벌(채씨)의 독주는, 남양(장수)과 강하(황조) 파벌이 일시에 증발(!)하면서 세력 내부의 권력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2.3. 말년


200년, 원소가 조조를 치기 위해 남하한다. 유표와 우호관계에 있던 원소는 조조의 배후를 치며 조력해줄 것을 요구했고, 유표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작 원소와 조조의 대치가 길어지는 상황에서도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사이를 보전하여 움직이지 않고 관망만 한다. 이는 장선의 반란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보이며 당시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을 세웠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치통감에서는 200년에 이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나오는데 관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진압한 것으로 나온다. 어쨌거나 조조와 원소의 대결 당시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 계양, 북으로 한천을 거두어 땅이 수천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조조와 원소의 대결이 있었고 원소가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그저 관망만한 것이다.
남/북의 전선에서 모두 승리해 드넓은 형주 전역을 완전히 제패한 유표는 대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비록 원술처럼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권한인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의 의장을 쓰는 등 야심을 드러낸다. 당연히 중앙에서도 결코 곱게 보진 않았기에 이 무렵에는 사실상 원술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헌제는 유표를 토벌하고자 했으나, 유표를 칠 능력도 없으면서 역적이라 선포해 봤자 비웃음거리만 될 것이니 잠시 덮어두라는 공융의 조언에 따라 일단 유표의 처분을 유보하기로 한다.[21][22]
환계전에 따르면 장사와 옆의 세 군을 인솔하여 유표에게 항거하고, 사자를 보내 조조를 만났는데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마침 이때, 원소와 조조가 전투를 계속했으므로 조조의 군대는 남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표는 급히 장선을 공격하였고, 장선은 병들어 죽었다. 성은 함락되었으며, 환계는 스스로 몸을 숨겼다. 조조는 형주를 평정한 후, 환계가 장선을 위해 계책을 세웠다는 것을 듣고 그를 평가하고는 불러서 승상연주부로 임명하고, 조군태수로 승진시켰다.
어쨌거나 장선을 평정한 후 병력과 땅이 충분한 상황에서 한숭, 유선 등은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하고 괴월도 이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유표는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단지 한숭을 허도에 사신으로 보내 정탐케 하였는데 한숭이 벼슬을 잔뜩 받아 되돌아오곤 조조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유표의 아들들을 조조에게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채부인은 명망있는 한숭을 죽이면 여론이 흩어질 것이라며 말렸으므로 결국 유표는 한숭을 옥에 가두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23]
이후 원소는 유비를 여남으로 보내 유표의 개입을 독촉하지만 유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확인되는 것은 당시 양안군을 다스리고 있던 이통을 회유했던 것인데, 물론 실패했으며, 이후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하고 유비 역시 조조에게 패하여 도주하자 유비를 받아들여 신야(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한다.
유표는 유비를 받아들인 뒤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했다. 삼국지연의에서도 "현덕은 같은 유씨 황실의 종친이니 내게는 동생과도 같다"면서 형제처럼 대접했다. 기존에 장수가 했던 역할을 유비에게 맡기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비에게 귀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며 점점 그 세가 커지자 결국 유비를 두려워하며 견제하게 된다.
관도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표를 공격하고 싶어했지만 원소가 배후를 습격할 것을 두려워해 황하에서 대치할 뿐 움직이지 못한다. 이후 202년, 원소가 병사하고 막내아들 원상이 후계자가 되자 조조는 그 틈을 노리고 하북을 공격했고 원상의 반격을 받아 패했으나, 후계자로서 입지가 취약한 원상이 배후를 공략할 역량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유표 토벌에 나서 예주와 남양군의 경계인 서평군에 주둔한다.(203년 8월.)
일촉측발의 상황이었으나, 마침 후계 문제로 원상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원담이 조조에게 투항하자 조조는 다시 전선을 포기하고 하북으로 향해 원상과의 대결을 벌인다. 조조가 눈앞에서 등을 보이고 퇴각하는 상황이었으나 유표는 조조를 치지 않았고, 이후로도 개입을 요구하는 원상의 독촉이 수차례 이어졌으나 유표는 끝내 조조의 배후를 치지 않고 방관했기에 조조는 배후의 걱정없이 순조롭게 하북을 평정해 나간다.
이에 대해서는 친조조파로 돌아선 채모 등 양양 호족들이 득세하면서 이들에게 휘둘렸다는 분석이 있는데, 이렇게 볼 경우 유비를 공들여 영입한 것은 이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유표는 그런 유비조차도 고삐가 풀릴 것을 견제하며 간을 보다가 모든 기회를 놓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조조는 원상을 죽이고 하북을 완전히 평정한 이듬해에 곧바로 남하하였고, 유표는 조조가 형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으로 숨을 거둔다.
유표가 죽자 후사를 물려받은 차남 유종은 채씨 일족 등 화친파의 여론에 따라 조조에게 항복했고, 당시 형주 내 주전파의 대표격으로 부상해 있던 유비는 유기를 옹립하여 형주자사로 내세웠다. 유종과 유기는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고 한다.

3. 평가


형주는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가 많았으며 인재층 자체도 풍족하다고 할 수 있어 이를 바탕으로 힘을 길러 천하를 도모해 볼 만도 했으나, 유표는 죽는 순간까지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지내기만 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20년간 형주를 다스렸지만 개인적으로 축재한 재산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범엽은 유표에게 장자다운 풍모가 있었지만 단지 가만히 누워 관망하면서 천운을 거두고 천하가 삼분될 것이라 여기니 나무인형과 같은 인물이라며 별로 좋지 않게 평가했다.
태평어람에 따르면 유표는 남쪽 땅을 마음대로 차지했고, 자식들 또한 방자하게 날뛰는 성품이었는데 이들 부자는 하나같이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술잔 세 개를 만들어서 큰 것을 백아(伯雅)라 하고, 다음 것을 중아(仲雅), 작은 것을 계아(季雅)라 했고 백아는 일곱 되, 중아는 여섯 되, 계아는 다섯 되들였는데, 술자리 끝자락엔 큰 바늘을 둬서 취해서 바닥에 쓰러져 뻗은 사람이 있으면 갑자기 바늘로 찌르며 취했는지 확인했다고 한다. 이는 조경후(趙敬侯)가 통에 담은 술을 사람에게 부은 것만큼이나 추악한 일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유표 삼부자의 술버릇은 매우 좋지 않았던 듯하다.
가후는 유표를 만나보곤 평상시라면 능히 삼공에 오를 만한 재주를 갖췄지만, 사세를 살피는 데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 (난세에서는) 무능한 인물로 봐야할 것이라 평가했으며, 제갈량감녕은 유표가 유생이라 군사의 일을 잘 모른다고 평가했다.
일반적으론 야심이 없고 온화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지만, 황실에 조공#s-1을 끊고 황제와 의복, 음식을 동일하게 하고 살았으며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등 황제 흉내를 낸 것을 봤을 때 야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서의 평가도 하나같이 야심가에 가깝다. 말년 행적등을 근거로 군사적으로 무능하다는 면모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유표는 처음 형주자사로 부임할때 거의 단신, 원술의 견제로 자사의 치소가 있는 무릉에는 접근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능란한 차도살인계로 결국 형주 전역을 평정하는 수완을 보였으며, 이각, 곽사에게 대항하기 위해 마등과 연합했고, 원술과 맞서기 위해 원소와 연합하는 한편, 황조를 통해 강동의 손가를 견제했고, 조조가 남쪽을 노릴 무렵에는 장수를 지원하며 조조를 견제했다. 이후 장수가 조조에게로 돌아서자 이번엔 유비를 부려 다시 조조를 견제하는 '''파수견'''이 되게 하는 등, 하여간 음흉했다.
특히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에 의하면 유표는 동탁과 도대체 뭐가 다른지 모를 위인으로 후한 4대 역적을 동탁#s-1, 원소, 원술, 유표라 칭했다.
하지만 본인이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러면서도 과감한 기용은 절대 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부하들을 견제하는 측면이 지방 왕초 수준을 넘어서 패권에 도전하는 것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군사력을 통한 철저한 복속 없이 모략에만 의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24] 유표가 황제 흉내를 내던 것 역시 자신의 부족한 군사적 성과와 내부의 불만을 권위라는 후광으로 억누르는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원소가 병사한 이후에도 후계자인 원상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는데, 서신을 보내 원상과 원담의 화해를 촉구했으며 조조에게 항복하려는 원담을 꾸짖기도 한다. 하지만 원상이 조조와 원담에게 협공당해 망하게 생겼는데도 끝끝내 지원은 안했다.[25] 결과적으로 조조는 별다른 후방의 위협 없이 원씨의 세력을 완전히 흡수하게 됐고 유표만이 고립되어 홀로 남게 된다.
유비는 조조가 원상을 쫓아 오환을 공격했을 때 조조의 후방을 찔러 정복사업을 도모할 것을 유표에게 건의하기도 했지만, 끝내 유표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고, '유표는 유비의 성공을 질투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조조 진영 내 오환 원정 긍정론의 주요 근거 중 하나로 내세워질 정도로 유표의 의심병은 심각했다. 사실 조조의 오환 원정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엄청난 무리수를 안고 시작한 작전이었기에 그동안 비교적 평온하게 내실을 다질 수 있었던 형주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벌을 수행했다면 삼국지의 스토리는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형주의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대병 + '''유비 관우 장비 조운 '''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26][27] 조조의 세력권을 일시 함락은 못 시키더라도 땅을 빼앗고 형주를 안전거리에 둘 수도 있었을 수도 있으나 유표는 유비의 제안을 거절했고 조조가 그 동안 원씨 일가를 쓸어버리고 돌아오자 대세가 다 결정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했다.
다만 조조가 하북의 원씨 일족과 싸우는 동안 유표가 아무것도 안한 것은 아닌데, 교주목 장진을 연이어 공격했고[28], 싸움에 질린 장진의 부장들이 장진을 살해하자 뇌공을 교주자사로 파견했으며, 오거를 창오태수로 보내는 등 교주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조조와 패권을 겨루기보다는 그냥 무난하고 쉬운 상대를 택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세상 점차 고립되어가는 상황에서 패권 장악은 완전히 포기하고 지역할거 의지만 확고히 하는 악수에 가깝다.
이에 조조는 교지태수 사섭을 수남중랑장으로 삼고, 교주 전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며 유표와 대립하게 하지만, 본격적인 결과가 나오기에 앞서 이미 유표는 죽어버렸고, 이후 뇌공과 오거 사이에 불화가 생기면서 이 틈을 탄 손권이 오거를 죽이고 교주에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때는 이미 유표가 죽고 세력이 와해된 이후의 상황이니 유기를 옹립하고 있던 유비가 뭔가 단물을 더 빨아먹을 기회를 놓쳤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두기 어렵겠지만...
유표의 일생이 사실 그렇게까지 저평가 될만한 것은 아니다. 혈혈단신으로 형주에 부임해 와서 형주라는 넓은 영토를 자기 것으로 오롯이 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후계를 넘겼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위업이다. 시대상이 시대상이라 칭제는 못했지만 거의 칭제에 가까운 행세를 했기에 오대십국이나 오호십육국 시대로 따지면 나름대로 하나의 지방왕조를 개창한 정도까지는 된다. 형주에서는 거의 패왕 수준이었던것. 극에 달한 정치력으로 형주의 무수한 호족들을 제압하고 회유하여 권력을 잡았고 남중국에서 최대 세력을 구축했으니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이 항목에 잘 서술되어 있으며 이 시기 수많은 지방 행정관들은 비명횡사하거나 보다 더 큰 세력에 복속되는 게 보통이었다.
유표의 단점이라면 그의 지나친 학자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유표가 그의 전문분야인 모략과 정치술수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 것은 확실하고 명쾌한 진리에 집착하는 학자적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별 권위가 없던 시절 냉정하게 취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모략으로 취하다 강대해진 세력으로 휘몰아쳐 마무리하는 솜씨는 명쾌했다. 이 과정을 보면 기본적인 용기나 결단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 권위와 힘이 주어진 시점에 이르자 오히려 그는 하락세에 빠졌다. 눈앞에 놓인 길이 적었던 시절에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지만, 여러 갈래의 길이 보이자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지극히 안정적인 길만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말년의 언동을 보면 유표 자신도 자신의 행보가 결코 좋지 않은 것은 미리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분야에 대해서는 결코 과감하지 않았고 남을 믿지도 않았다.
채모와 그의 양양 파벌에 휘둘린 것을 감안할 수도 있지만 우두머리는 유표 자신이고 결코 바지사장도 아니었다. 인물이 채모만은 아니어서 감녕이나 황충, 장수, 유비 일파 등 뛰어난 장수들과 인연이 있었으나 써먹지 못했다. 군사세력은 군대를 동원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이용하고 그 이후로는 결코 처음 기용한 세력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특히 다른 장수들은 몰라도 유비 일파는 전국적으로도 맹장 집단임이 검증이 끝났으나 결코 자신의 권력과 통제력을 놓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달리 보면 자신의 수명을 직감하고 이에 걸맞은 행동을 한 것으로도, 지나친 의심과 속좁음과 우유부단함으로, 혹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결코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표가 군사에 무지하다면 유능한 군부인물을 키우다 되려 그들에게 먹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며, 그들과 갈등이 생긴 순간 외부 세력에게 간단히 잡아먹히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29]
즉 유표 자신도 알고 있는 유표의 딜레마는 정치적인 능력과 군사적인 능력이 극단적인 유표의 특성에서 발생한 것이다. 어느 순간 내부 파워 게임이 무너졌다 하지만 본질적인 권위 그 자체는 멀쩡했던 유표는 얼마든지 군사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역량은 있었다.[30] 하지만 천천히 세력을 성장시키고 나니 이제 날로 먹을 수 있는 세력은 영양가도 별로 없는 무리밖에 남지 않았다. 이 때 양양 세력 대신 다른 무장들을 믿고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주자니 유표는 결코 어떤 세력의 군사적 입안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본인의 군사적 역량이 없다시피하고 과감한 판단력이 부족했던 게 가장 큰 단점. 그렇기에 양양 세력이 아닌 다른 세력이 실패하면 유표는 정치적으로 크게 수세에 몰리게 되며 이는 사실 정치밖에 없는 유표의 모든 것이 약화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놔두면 양양세력의 독주를 방관하게 되고 천천히 다른 거대세력에게 숨통이 조이지만, 지도자로서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군사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다는 것이 유표의 딜레마이다. 전국적인 검증도 끝났고 자체적인 전투행정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어서 정치적으로도 그저 군사를 모아서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큰 신경을 써줄 필요도 없는 유비 일파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이들이 딴 맘을 먹으면 유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31] 결국 유표는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 일에 도전할 수 없어서 발로 지휘해도 날로 먹을 수 있어서 딱히 밀어줄 필요도 없는 애들을 제거하는 것 외에는 자신이 가진 확실한 능력인 화려한 의전과 뛰어난 학문으로 얻은 권위로 군사세력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물론 난세의 지도자로서 심각한 결점인 군사적 무능에도 불구하고 유표가 형주를 장악하고 군벌정치시대의 유력주자로 등극한 데에는 적지 않은 행운이 따르기도 했는데, 형주를 둔 원술과의 대립은 괴씨,채씨의 협력을 얻어내며 비협조적이던 호족들을 신속히 모살한 정치력과 원소와 손잡아 원술을 압박하는 외교력을 동원한 승리로 볼 수 있지만 원술군 최고의 맹장이었던 손견의 존재는 거병 초기 유표의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다. 유표는 손견이 유시에 맞고 전사하면서 혼란에 빠진 원술군을 정리하며 형주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후 유표에게 도전했던 장제 또한 유시에 맞고 전사하면서 장제의 잔당들이 유표에게 회유됐으며, 남부의 4군을 거느리고 반기를 든 장선에게도 크게 고전하다 장선이 병으로 죽으면서 승기를 잡는 등 지도자로서 군사적 능력을 시험받는 위기의 순간마다 대립세력 수장의 사망으로 승기를 잡으며 더욱 체급을 키워 가는 행운이 세 차례나 반복되기 때문. 천하에 야심이 없는 얼굴을 하나 뒤에서 1백인의 자객을 부린다고 평가되며 관도대전 당시 손책 암살의 배후로까지 묘사되는 창천항로의 유표 상은 이런 측면을 재해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후계자 분쟁도 마무리짓지 못한 것도 큰 흠이다. 유비의 지지를 받는 큰아들 유기와 유표의 치소 양양의 유력 호족인 채모[32]의 후원을 받는 둘째아들 유종이 대립한다. 이 때문에 유표가 죽은 후 채씨 호족을 등에 업은 유종이 형주의 후계자리를 차지하지만, 당연히 장자이므로 계승 권리가 충분하고 나름대로 인망도 얻어 후계자로서 결격 사유가 전혀 없던 유기를 내버려두고 차남인 유종을 후계자로 삼았으며 거기다가 명색이 장자인 유기를 박대까지 하니 호족들을 비롯, 형주 사람들 대다수가 유기를 동정하고 친 유기(+후견인 유비), 반 유종(+후견인 채모)로 인심이 흐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유표가 죽을 무렵이면 유표와 연대해 형주를 지배하던 양양의 친 조조세력 괴씨, 채씨 등을 빼곤 형주의 호족들과 백성 다수가 강하로 내려간 유기와 전방에 주둔하던 유비에게 기울었고, 이는 심지어 채모의 근거지인 양양의 호족들과 백성들 대다수마저 조조에게 항복을 기습적으로 결정한 유종과 채모를 비롯한 채씨 세력을 버리고 유비에게 귀부하며 유종과 채씨 세력은 그걸 전혀 막지 못했던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채모 등 친 조조파의 조언에 유종은 그런 유비를 두려워해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사실도 유비에게 알리지 않고 조조에게 그 넓은 땅을 고스란히 내주고 만다.
거기다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양양의 괴씨, 채씨 세력 같은 친조조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진춘추에서 나오길 유종이 항복한 후 "조조는 이미 장군의 항복을 얻었고 유비는 달아났기에, 필히 해이해져 방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가벼운 무장으로 단기로 나갈 것입니다. 만약 제게 뛰어난 병사 수천만 주셔서, 험준한 곳으로 요격하면, 가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은 천하에 진동하니, 앉아서 범처럼 걸어나간다면, 중원이 비록 넓다 한들,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 평정할 수 있으니, 다만 한번의 승리만을 거두어서 금일 보전하여 지키는 게 아니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기회는 만나기 어려우니 놓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유종의 장군 왕위가 한다.
이 발언에서 몇 가지를 알아낼수 있는데 첫째, 유표가 생전에 조조에 대한 투항을 거부했던 것처럼 유기와 유비뿐만 아니라 친조조 세력인 채모, 괴월 등에게 추대받아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 세력 내부에서조차도 반조조의 기류가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것, 둘째, 당시 유종이 조조군에 항복했어도 정예 수천을 동원할 수 있었고, 그런 군세를 요청할만한 위치에 있는 장군이 반조조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즉, 유종 세력 내부에서도 물주인 양양의 괴씨, 채씨 호족들 외에 조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세력만 있었던게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유종의 급작스런 항복으로 덩달아 항복했던 유표의 부하 관리와 군사들 대부분이, 적벽대전 이후 패했다해도 아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지고 있는 조조를 버리고 손권도 아니고 유기의 뒤에 있다가 그가 죽자 자연스레 그 세력을 흡수한 반조조 세력의 상징 유비에게 귀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는 실제로 조조가 내려오자 형주의 인심은 유종보다 유비를 따랐던 것도 사실이고, 왕위 같은 이가 했던 발언과 더불어 항복한 유종 세력에서도 유종의 후원자들이 작당해 벌인 기습적 항복에 어쩔수 없이 수긍했을 뿐이지 반조조 세력이 상당했고, 이걸 유비가 대안이 되어 모조리 흡수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유표의 옛 부하들을 받아들이는데 수가 워낙 많아 유비가 다스리던 치소 공안이 좁아 손권에게 땅을 청구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유표의 후계자 선택은 자신이 일군 형주땅을 남에게 주는 꼴만 되었던 것이다.
이렇다고는 하나 유표는 그 난세의 시대에서 자신이 지배하는 형주를 매우 평온하게 지배했다. 유표가 지배하던 시기 형주는 난세의 시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로워 여러 인재들이 잘 자라날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명한 제갈량이나 방통도 이러한 형주의 학문적 배경에서 탄생한 인재들이었다. 유표 자신부터가 건안시대 8준에 들어갈 만큼 학식도 뛰어나 당대의 명현들이 형주로 모여들 정도.[33] 가후의 평가는, 평화시기에 태어났으면 유표는 결코 그 자신의 단점이 드러날 일이 없었을 인물이라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택동은 평소 사서를 즐겨 읽었는데 대장정 와중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특히 모택동은 자치통감을 즐겨 읽었는데, 범엽과 사마광의 평이 인상깊었는지, 유표에 대해 평가하기를 '이 자는 인형과 같은 인간이다'라고 대차게 깠다. 하지만 유표가 인형과 같았다면 결코 형주를 제패하고 죽을 때까지 영토를 유지하고 늘리며 치적을 쌓으며 학문을 진흥시킬 수는 없었을 테니 부당한 평가임은 틀림없다. 모택동이 가진 군사적 능력과 과감함은 없지만 백성을 통치하는 내정 능력은 유표가 모택동 뺨을 수십대는 때리고도 남아서 이자를 붙여야 할 지경이다.
제갈량의 언급에 따르면 매년 대사면을 내리곤 했다고한다. 유종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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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진남비, 수민교위웅군비에는 경승, 백씨육첩에는 경숙이라 되어 있다.[2] 형주 지방이 타지에 비해서 평화로웠다는점도 한 몫 했다.[3] 오나라의 우번같은 인물이 이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이다.[4] 여담으로 이때 벌써 성년의 나이로 20대였다. 유비가 황건적이랑 싸울때랑 비슷한 나이였으니 말이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사실 죽을때도 70살 근처에 죽었으니 거의 자연사급으로 오래 산 것이다. 조조보다 오래 살았다.[5] 북군중후는 당시 중앙군 조직 중의 하나인 북군(北軍)의 수장이다. 후한 말 중앙군은 황실의 근위군인 위랑(衛郞), 궁성을 경비하는 남군(南軍),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북군(北軍), 도성 내의 치안과 순찰을 담당하는 위수군(衛戍軍)의 4개 조직으로 구성되었다.[6] 후한서 원술열전[7] 위서 유표전[8] 채모의 누이가 유표의 후처 채부인이다. 당시 채씨 가문은 형주 최고의 명문 세도가였으며, 제갈량 역시 채모의 외조카와 결혼하여 이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었다. 일설에는 황승언이 제갈량에게 "내 딸이 용모는 별로지만 머리가 좋아서 자네와 짝이 될 만하다"고 해서 결혼에 동의했다고 하나, 진상은 모를 일이다. 권력 관계를 고려하면 제갈량이 황씨를 아내로 고른 게 아니라 황승언이 제갈량을 사위로 고른 것에 가까울 것이다. (제갈량은 형주 출신도 아니고 서주 출생의 이주민에 불과했으나 황씨는 형주 최고 세도가의 외조카이자 형주자사 유표의 처조카이다) 당대 사람들은 제갈량의 결혼을 두고 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었다며 비웃었다고 하니 아마도 처가 덕을 보려고 정략결혼을 한 것으로 여겨졌던 모양이나, 정작 제갈량 본인은 형주의 명사들과 교류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것 외에는 처가의 위세를 빌린 일이 전혀 없었다.[9] 원래 형주자사의 치소는 무릉군이다. 채씨와 괴씨가 양양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10] 태수는 자사의 지시를 받는 것이 원칙이나 관위상으로는 동급이라 상호간 견제가 심했다.[11] 남양과 양양의 경계로 한수 이북에서 요격한 것이다.[12] 일찍이 여러 전승과 군담극에서부터 연의에 이르기까지, 또 비교적 최근의 창작물에서도 주로 후자에 가깝게 묘사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유표군에서 계교를 써 손견을 막다른 곳으로 꾀어낸 후 낙석계로 손견을 죽이는 묘사가 일반적. 이렇게 손견을 유인하고 낙석으로 손견이란 영걸의 목숨까지 거두는 데에까지 계책을 짠 지모의 소유자가 괴량으로 그려지는 점 또한 빠지지 않는 편이다.[13] 감녕 또한 유표가 군사일을 모르는 서생에 불과해 같이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 여겼다고 한다.[14] 후한서 조기열전[15] 유진남비[16] 급성장하는 유표의 견제와 배후의 위협 제거 차원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유표는 조조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고, 남양은 중원의 유민들을 형주로 유입시키는 관문에 해당하는 데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허도를 직접 타격할 위험성도 매우 높았다.[17] 전위조앙이 죽는 싸움이다.[18] 당시 남양군의 남쪽에 있다.[19] 손책이 조정에 보낸 상주문에 따른 것인데, 일단 유표 측의 참패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사자의 수는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있다.[20] 물론 강하군이 아니라 형주 남부의 장사군을 통해 양주 예장군을 거치며 손가를 견제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하고 실제로 유반의 사례를 봤을때 유표가 손가 측에 공세를 가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기록이 워낙 적어서 애매한데다 그마저도 결국 태사자에게 모두 막혔다.[21] 후한서 공융열전.[22] 마침 이때 공손찬을 멸망시키고 하북 4주를 완전 장악한 원소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상황이었기에 조조는 나설 수 없었다. 물론 헌제나 공융은 중앙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조조 역시 원소, 유표와 같은 부류로 보았지만..[23] 진수는 이를 가리켜 유표가 마음에 의심과 꺼림이 많아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유표가 한숭을 허도에 보내려고 하자, 한숭은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유표가 억지로 보냈고, 결국 한숭의 예상대로 그는 헌제에게 벼슬을 받아 유표가 아닌 한 조정을 대변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 한 조정의 실권자인 조조를 대변하는 발언을 하니 유표가 꼭지돌아 죽이려고 한 것이다. 한숭 입장에선 경고를 무시한 주제에 역정을 내고 있으니 결국 배째라고 "주군이 먼저 절 버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따지게 된다. 한숭의 발언이 똥오줌 못 가리는 발언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하게 만든 게 유표 본인이란 걸 생각하면 진수의 평이 마냥 틀리다고 깔 수도 없다.[24] 범엽은 원소와 유표를 비슷한 부류로 묶었다. 원소도 자유자재로 모략을 사용하며 세력을 얻었지만 원소는 유표에겐 없는 군사적 재능이 있었고, 그래서 훨씬 노골적인 내부 숙청을 거듭하면서 철권을 휘둘렀다. 유표가 나무 인형 같다는 평가 역시 원소는 자기 잘난 맛에 오만하고 비정하기가 짝이 없고, 유표는 원소만큼 막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저 앉아서 관망할 뿐이니 한심하긴 마찬가지라는 의미에 가깝다.[25] 연의에서는 이를 '''유비'''의 계략으로 바꿨다. 유비가 원씨 형제가 얼마 못 버틸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괜히 편들어서 조조의 분노를 사느니 도와주지 말자고 유표에게 간언했다는 것. 유표가 "그렇다고 어떻게 단칼에 잘라서 거절하겠나"라고 묻자 유비는 "화해를 주선하는 글을 써서 보내면 됩니다"라고 했고 유표가 이에 응했다.[26] 훗날 주유는 손권에게 제안하기를, 유비를 붙잡아 앉혀놓고 자신에게 관우와 장비를 부리게 해 준다면 서촉 정벌이 순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주유 본인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자신감에 근거한 말이겠으나, 그만큼 관우, 장비 하면 천하의 맹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것. 그런데 형주의 병사들에 관우 장비를 다 쓸 수 있었던 유표는 조조의 배후를 노리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27] 멀리 갈 것도 없이 관우 본인이 훗날 형주의 일부만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조조와 전쟁을 벌일 정도였다. 유비는 조조 본인이 인정하는 맞수였고 장비 또한 관우에 비견되는 용맹한 장수였으니 최강의 용병부대로 쓸 수 있음에도 기회를 놓친 것. 물론 유비 본인이 (원술 밑에 있던 손견/손책 부자와 마찬가지로) 절대 남의 신하로 만족 못할 야심가긴 하지만, 뛰어난 인재를 데리고도 너무 활용을 못한 건 부인할 수 없다.[28] 오서 설종전[29] 실제로 유장한복이 이 과정을 통해 몰락했다.[30] 이게 없었으면 유비가 군사를 내자고 채근하는 일도 없었다.[31] 실제로 유비는 조조가 서주 가라고 준 병력을 그대로 꿀꺽 한 전과도 있다. 물론 유비가 조조와 숙적 관계인 것은 유비의 행보도 그렇고 황제의 밀서도 그렇고 명확하지만 유표와 숙명적 동반자 관계도 아니기 때문에 유표가 전폭적인 지지하기에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후의 전개를 보더라도 유비를 신뢰하는 선택을 한 유장은 유비에게 잡아먹힌다.[32] 채모가 유종의 외삼촌...이란 건 연의의 설정이고, 채부인이 유종의 모친인지 여부는 정사상으로는 불분명. 확실한 것은 채모의 조카와 유종이 결혼하여 인척 관계를 맺은 것이다. 여담으로 채모의 또다른 조카와 결혼한 제갈량은 유종의 사촌 동서가 된다.[33] 유표 사후 갈갈이 찢겨지다못해 조조, 유비, 손권 세력의 형주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형주는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