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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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대전
官渡大戰'''

'''시기'''
200년 2월 ~ 200년 10월
'''장소'''
허난 성 정저우 시 중무 현
'''원인'''
조조의 협천자(挾天子) 이후, 원소와의 관계 악화
'''교전'''
'''원소군'''
'''조조군'''
'''황제'''
황제 유협
'''지휘관'''
'''대장군 원소'''
'''사공 조조'''
'''장수'''
<^|1>고람
곽도
문추
수원진
순우경
안량
여위황
왕마
원담
장합
저수
조예
하무
한거자
한순
유비[1]
가후
곽가
관우[2]
사환
서황
선우보
순욱
순유
악진
우금
유연#s-5
장료
장수
조홍
허저
하후연[3]

'''병력'''
약 10만 명
약 4~5만 명
'''피해'''
약 7~8만 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조군의 승리 및 원소군의 대남 공세 약화
'''영향'''
원소 병사(病死) 이후, 원소세력 분열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조조군의 선전에도 밀고 내려오는 원소군
3.2. 관도를 둘러싼 전투
3.3. 허유의 투항
3.4. 관도의 하이라이트: 등 뒤에 오면 말하라!
3.5. 조조의 대승과 원소의 패배
4. 관도대전 이후
5. 평가
5.1. 원소의 숨은 문제들
5.2. 원소는 왜 관도대전을 일으켰나
5.3. 전풍과 저수를 무시해 진 전투인가?
5.4. 천하의 대세가 완전히 판가름 났는가?
7.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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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 화북의 2대 세력인 조조원소의 전쟁이다.
훗날 일어난 적벽대전이 폭발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조조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위촉오의 기틀을 마련했다면 관도대전은 정반대로 조조가 원소를 상대로 이기면서 다른 군벌들에 비해 압도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게 해준 시작점이 된 전투다.[4]

2. 배경


조조는 헌제를 옹립한 후에 급격히 성장했지만 아직 원소, 마등, 유표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었다. 마등은 거리와 환경상 조조가 견제하기 힘들었고, 유표는 자신의 세력권을 벗어나지 않아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허나 원소는 유일하게 세력이 조조를 압도했고, 조조의 히든카드인 협천자로 내세운 명분과 민심조차 동승 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어서 조조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역성을 무너트림으로써 마침내 공손찬과의 기나긴 전쟁을 끝낸 원소는 자타공인 최고 최대의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협천자에 성공한 조조는 명분으로만 볼 때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황제를 뺀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의 주인이었다. 거기에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야심가였으므로 이렇게 세력이 팽창해나가던 둘은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5]
당시 각자가 차지한 세력으로 보면 원소는 기주, 유주, 병주, 청주 4개주로 하북의 태반을 손에 넣은 상태였으며 조조는 연주 외에는 서주, 예주, 사례의 일부를 먹음으로써 중원을 중심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었다. '''일단, 전체적으로 세력면에서 원소가 우위를 확실히 점했다고 봐야 된다.''' 다만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할 건 '''그 세력 휘하의 땅이라고 세력 주인의 땅은 아니라는 것''' 원소도 조조도 이래저래 군사를 일으키며 영지를 확장시키긴 했지만 모든 지방호족들의 세력을 적대한 건 아니고 받아들일 호족들은 받아들이면서 싸웠다. 당장 하북만 봐도 하북의 극동은 여전히 요동 공손씨 정권이 장악하고 있었고 선우보염유 같은 이들 역시 조조 측에 기울어 있었다. 청주와 병주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병주의 경우 조조와 직접적인 연관은 별로 없지만 애당초 인구가 매우 적은 변경 지역이기도 했고, 원소가 태행산의 흑산적 집단들 다수를 격파하고 조카 고간을 병주자사로 임명하긴 했지만 그곳이 완전히 평정된 것이 아니었다. 흑산적의 지도자이자 공손찬의 동맹 장연은 살아남아 상산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에 청주는 원소가 평정하기 이전 조조가 해당 지역의 병력 상당수를 청주병으로 만듦으로써 빼간 뒤였다.
반면 조조도 영천 사대부 같은 토박이들의 영향에서 아예 자유로울 순 없었으나 그래도 땅 크기에 비해선 자기가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범위가 넓었으며 여포, 원술, 유비군을 각각 이래저래 꺾으면서 조조에게 대항할 만한 대표적인 세력들은 조조의 근거지에는 없어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서주 대학살을 벌인 탓에 민심이 깎이긴 했지만 그 당시엔 아직 후한을 신봉하는 유학자들이 많았고 조조는 황제를 옆에 끼고 다님으로써 이런 유학자들 즉, 지방호족들을 상대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나갈 수 있었다.
200년 초 원소는 서쪽으로는 황하 북부 하내군을 장악한 조조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동쪽으로는 장패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유주가 아직 원소의 손아귀에 확실히 들어왔다고 보긴 무리가 있었다. 이 모든 결론을 종합해 보면 관도대전 당시 북중국의 패권을 원소가 확실히 잡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는 협천자의 이점을 이용해 그를 향해 직접적, 간접적 양면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으니 원소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을 보고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명색이 원소의 동맹인 유표는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다. 유표는 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사태수 장선을 몇 년째 상대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의 장수 황조는 동쪽에서 장강 하류의 손책과 싸우고 있었으며 유표의 끄나풀인 장수누규는 조조에게 귀부하는 등 유표는 조조의 협천자 여파로 세력이 쪼개져서 이를 수습하고 평정하는 데도 바빴다. 물론 유표가 이걸 수습하고 다시 광대한 세력을 구축하긴 하지만 그땐 이미 관도대전이 끝난 이후였다. 즉, 후방 교란의 임무는 유표가 아니라 오로지 유비에게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원소의 관도대전 개시는 약한 적을 상대로 한 공세라기보다는 자신과 대적할 만한 만만치 않은 적을 상대로 한 공세, 협천자의 이점을 낀 조조가 세력을 불리기 전에 적의 심장부를 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그것을 위해 원소는 분명 조조가 당장은 상대하기 힘든 거대한 군대를 모았으며 청주를 맡고 있어야야 할 원담이 그와 동행했다는 것은 그가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다 모았음을 시사한다. 자신의 옛 본거지인 예주와 여남군, 천자가 있는 허현을 공격하기 위해 위해 사용된 패가 그의 장수들이 아니라 독립적인 세력인 유비유벽이라는 것은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공격하기 위한 최상의 패가 유비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조를 상대하는 주 공세에서 병력을 많이 빼낼 여유가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물론 조조가 그렇다고 마냥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조조는 유비에게서 막 서주를 빼앗은 데다, 서주는 조조가 벌인 대학살로 인해 초토화됨은 물론 조조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었으며[6] 게다가 예주는 원소의 정치적 커리어가 시작된 곳으로 원체 원소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역이라서 원소가 예주의 반란을 사주해 단지 양안군 한 개 군을 제외한 예주 전 지역이 원소의 부추김에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사예 지역 역시 동탁에 의해서 초토화되었기에 조조는 연주 하나만의 전력으로 원소에 맞서야 했던 셈이다. 설령 조조가 연주, 서주, 사예, 예주의 4개 주의 군을 동원하더라도 이 지역들을 수비할 수비병을 분산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조는 원소가 배후로 파견한 유비의 예주 여남군 지역 호응과 수도 허현 뒤치기#s-3.1까지 견제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원소는 북방의 이민족들을 포섭하여 배후의 위협을 줄이고, 오히려 오환족 등의 기마민족을 자신의 군사력으로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천자로 인해 명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조 측의 이점이긴 했지만, 원소가 격문을 돌려 조조를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으로 규정한 시점과 조조에 의한 동승 이하 700명의 대숙청사건이 절묘히 겹쳤던 데다 이 동승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를 원소가 영입했기 때문에 오히려 원소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7] 한 마디로 원소나 조조나 관도대전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임에는 매한가지였다.
직접적인 투입 병력은 삼국지연의에서는 70만 대 7만. 사서상으로는 10만 대 1만으로 조조군은 원소군과 10배 이상의 병력차가 있었다. 하지만 배송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대해 길게 반박했는데, 아무리 봐도 1만은 구라라는 게 정설이다.
배송지의 지적으로는 조조가 처음 군을 일으켰을 때 이미 군사 5천이 있었고 청주의 황건적을 100만을 얻고 항복해 온 병졸만 30여만이었다고 지적한다. 물론 최근의 연구결과론 이 황건적으로 구성된 청주병의 숫자는 그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숫자였음에는 분명하지만 그래도 수만 명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배송지는 그 외에도 조조가 수없이 적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가면서 병탄한 것은 일일이 기재하지 못할 정도라고 지적한다. 비록 정벌전에서 손상된 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적은 숫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둔영을 연결해 대치하는 것은 적의 예봉을 꺾고 결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원소가 수십 리에 걸쳐 영채를 구축하며 조조군을 둘러싸려 하자 똑같은 방법으로 맞섰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주 압도적인 열세는 아니었고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첫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또한 원소에게 만약 10배의 군사가 있었다면 이치상 조조는 전력을 기울여 수비하며 출입을 단절해야 했겠지만, 조조는 서황 등을 보내 원소군의 군량운반 수레를 공격케 했고 조조 역시 또한 친히 출전하여 순우경 등을 공격하고 돌아오는데 원소의 역량으로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을 두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거기에 여러 책에서 이르길 조조에게 죽은 원소의 군사가 8만 또는 7만이라고 하는데. 8만 명이나 흩어져 달아나는데, 이들을 수천 명으로 능히 포박할 수는 없는데 원소의 대군이 모두 순순히 죽임을 당했으니 어떤 역량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이냐며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세 번째 이유로 제시한다.
배송지의 결론은 원소와 조조의 병력차는 과장되었으며 조조의 병력은 적은 숫자를 적어 조조의 성과를 과장한 것이지 실제에 부합하는 기록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원소군이 10만이었다면 조조군은 4~5만 정도 되었다는 추측이 많다. 그리고 무제기에 나온 1만 명의 병사들과 3할에 가까운 부상병들의 기록은 조조가 동원한 병력 전체가 아니라 일단 진영을 늘여 대치하다가 회전의 패배로 관도로 밀렸을 때 당시의 전황을 얘기하는 것으로 관도에 고립되어 농성 중인 병사들만을 칭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배송지의 지적은 확실히 타당하지만 일단 병력이 축소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열에 두셋의 부상병이라는 비율은 전투의 패배와 같은 큰 타격을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만큼 그만큼 조조군이 극단에 몰렸단 묘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삼국지 만화에서는 70만 대 '''40만'''으로 조조군까지 대폭 뻥튀기시키기도 한다.
원소군의 병력 수에 대한 소수 의견으로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진세어에서는 당시 원소군이 보병 5만에 기병 8천으로 도합 5만 8천이었다고 비교적 적은 규모로 기록하고 있는데[8], 손성은 이를 반박했고 주를 단 배송지는 손성의 반박 내용까지 같이 실으면서 개인적인 의견은 피했는데, 조조군 1만설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빙성있게 본 것 같진 않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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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조조군의 선전에도 밀고 내려오는 원소군


조조가 유비의 서주를 공략하는 틈에 원소군 중 일부가 남하해오자 우금이 이를 격퇴하고 악진과 합류해 북진하여 두씨진에서 원소군의 별영을 격파하고, 하무왕마를 비롯한 20명의 장수의 투항을 받아내며 양측에 전쟁이 벌어진다.
원소군이 백마에 있는 조조군의 장수인 유연을 공격하자 조조군이 이에 대응하여 서전인 백마, 연진전투에서 원소군의 지휘관 안량, 문추 등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지만, 결국 도하거점인 백마, 연진을 모두 내주며 원소의 도하를 막지 못하고 관도까지 계속 밀려나게 되었다, 조조는 관도로 돌아와 주둔하고, 원소는 진군해 하남군 양무현을 지켰다.[9]

3.2. 관도를 둘러싼 전투


'''내가 황제께 아뢰어 대장군의 자리에 앉혔건만 무슨 이유로 조정을 등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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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삼국지연의>

'''는 지난 날 왕망동탁보다 더한 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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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삼국지연의>

8월, 원소가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모래언덕에 의지해 둔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십 리에 이르렀다. 조조 역시 또한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했다고 나오는데 이때까지는 조조가 원소에게 이렇게 맞대응할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후 무제기와 원소전에 따르면 원소와 조조가 맞붙어 싸웠으나 조조가 불리했다고 나온다. 이후 무제기에 나오는 문장이 이때 조조의 군사는 만 명을 채우지 못하고 부상당한 자가 열에 둘, 셋이었다는 것을 보면 병력수는 과장이 있겠지만 조조가 이 회전에서 대패한 것으로 보인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허유가 원소에게 조조군은 여러 군대를 나누어 대치하게 하고 원소 본인은 다른 길로 황제인 헌제를 탈취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원소가 먼저 조조를 포위한 뒤에 취해야 한다고 그 말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조조는 관도에서 원소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관도에서 포위된 조조와 원소의 공방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소가 다시 진격해 관도에 임하여 토산(土山)을 세우고 높은 망루를 만들어 화살을 쏘아댔으며 땅굴을 파 조조의 진영을 습격했다. 조조는 번번이 안쪽에서 긴 참호를 만들어 막아내고 이에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원소의 누각을 공격하니 모두 격파되고, 원소군에서는 이를 벽력거(霹靂車)라 불렀다. 그러나 토산에서 원소군이 조조군 진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조조군 병사들이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고 한다, 당시 조조군의 불리함이 잘 보이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때 저수는 천천히 지구전을 해서 조조를 말려 죽이라는 조언을 하고 원소는 듣지 않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저수 말대로 지구전을 하고 있었다. 조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 지 시일이 오래되었다고 삼국지 원소전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백성들을 피폐하고 곤궁해져서, 많은 이들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원소에게 호응하였다. 조조는 상황이 불리한 데다가 군량이 적어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자고 할 정도로 몰려 있었지만 순욱이 원소는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하니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하고 조조는 버티기로 작정한다.[10]

한편 여남에서는 항복한 유벽이 원소에 호응하고 허도 주변을 공략했다. 원소가 유비를 보내 유벽을 돕게 하자 여남 주변의 많은 군현이 호응했고 수많은 무리가 모였다. 이렇게 유비가 여남과 허도 남쪽 인근을 돌아다니면서 주변의 호응을 받아 공략하자 조조가 근심했으나 조인은 유비가 원소군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 군사들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라고 조조에게 말한 후 기병으로 유비를 공격해 돌아가게 만들고 유벽의 둔영을 깨뜨렸다.
이 무렵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 수천 승이 도착하자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써서 서황, 사환을 보내 이를 요격해 대파하고 수레를 모두 불태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피폐하지는 건 오히려 조조군이었다. 조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달이 되어 비록 전투를 치루고 적장을 베었으나 군사는 적고 군량은 소진되어 병사들이 피폐해졌다. 함락될 듯 말 듯한 상황에서도 조조는 6개월 동안이나 잘 버텨왔지만, 외부의 정세는 더더욱 조조에게 나빠지는 데다가 원소의 후방교란으로 인하여 보급난까지 겹쳐 그야말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당시 조조의 군량은 한 달치밖에 남지 않아 얼마 있지 않아 조조는 알아서 고사할 판이었다. 조조는 이런 상황에서 짐짓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보름 안에 너희들을 위해 원소를 격파할 것이니 다시는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고 호기롭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타개책을 전혀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원소는 병사들에게 조조를 잡을 수 있도록 3척의 노끈을 준비하게 했다고 한다, 원소는 결단코 조조를 여기서 끝장내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3.3. 허유의 투항


10월, 이 상황에서 조조에게 천우신조의 기회가 오니 원소의 모사인 허유가 재물을 탐내었으나 원소가 이를 능히 충족해주지 못하자, 조조에게 투항한다. 마땅한 타개책을 내놓지 못하던 조조는 말 그대로 맨발로 뛰쳐나와 허유를 맞았다. 당시 원소는 수레를 보내 곡식을 운반하며 순우경 등 5명에게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가 이를 호송하게 해 원소의 둔영 북쪽 40리 되는 오소라는 곳에서 숙영하는 상황이었는데 투항한 허유는 이 정보를 제공하고 순우경 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좌우에서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가후가 이를 조조에게 따르도록 권했고, 이에 조조는 조홍을 남겨 관도의 본진을 수비하게 하고는 직접 보기 5천을 이끌고 밤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도착해 순우경이 지키던 오소의 식량고를 급습한다.

3.4. 관도의 하이라이트: 등 뒤에 오면 말하라!


원소는 증원군을 더 보내야 한다는 장합의 조언을 무시하고 곽도의 조언을 들어 오소 구원보단 조조의 본진을 격파하여 조조를 완전 고립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고 결국 장합과 고람이 이끌던 원소 주력군은 조조의 관도 본진을 공격했으나 조홍의 방어로 인해 함락하는 데 실패한다.
한편 조조는 경기병대로 구성된 원소의 구원병력이 뒤에 오는데도 군사를 나누어 맞서라는 주변의 조언도 무시하고 "적이 등 뒤에 오면 말하라!(賊在背後,乃白!)"라 명령한 후 계속 순우경군을 공격했다. 이에 조조가 이끄는 군사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격렬하게 저항하는 순우경군을 집중 공격, 구원병력이 미처 오소에 다다르기 전에 순우경군이 무너지고 만다. 결국 이 여파로 원소의 계획은 실패했으며 그의 보급선은 완전히 불타버리게 된다. 그 후 조조는 원소의 구원병까지 격파한다. 이는 조조가 오소 습격 이후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때 조조의 판단은 삼국시대에 있었던 전투 단위 싸움들에서 지휘관이 내린 최고의 판단 중 하나라 뽑을 수 있다. 원소군의 경기병을 대비하기 위해 병력을 나눴다면 오히려 순우경군을 밀지 못하고 작전이 실패할 수 있었다. 조조는 오히려 과감하게 순우경을 격파함으로써 포위될 위기를 벗어난다.
한편, 조조의 본진을 공격해 조조의 뒤를 끊으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오소의 패배 책임을 두고 분쟁이 벌어진 결과 곽도가 조조의 본진을 치기보단 순우경 구원을 우선한 원소의 부장인 장합을 참소했으며 장합은 이를 두려워해 고람과 함께 원소를 공격해 원소군의 진지를 불태워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정상적인 군신관계라면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참소가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지만, 전풍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원소는 자기 실수를 면피하기 위해서라면 무고한 신하 하나 죽이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애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고, 장합이나 고람도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로 인해 원소는 800기의 군사만 이끌고 황급히 달아났고 원소군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후 원소가 여양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생존을 알렸다는 점으로 보아 장합의 배반 여파로 총사령관 원소의 생사마저 불분명한 지경에 놓였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조조군은 절대적인 열세를 오소전투로 원소군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격파했으며, 여세를 몰아 창정에 있는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3.5. 조조의 대승과 원소의 패배


원소는 특기를 발휘하여 상대를 일방적으로 때려잡는 전략적인 판을 만드는 행보까지는 완벽했으나, 특유의 오만함과 독선적인 성향으로 수하장수들의 간언을 번번이 무시하였고 그러면서도 곽도를 위시한 최측근들의 행패는 지나치게 감싸고 돌았으며 이는 허유, 장합, 고람의 투항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전술적인 몇몇 불안 요소와 배신자를 적극적으로 아군으로 받아들여준 조조에게 패퇴했다. 조조는 자신보다 강력한 적을 상대로 버틴 끈질긴 저항과 오소에서 순우경을 격파한 탁월한 용병술에 원소군의 내분과 그중 다수의 투항이라는 호재까지 겹치며 승리했다.
하지만 조조는 관도대전 직후 거짓 항복한 원소군 포로들을 모두 다 파묻어버려서 또 명성을 깎아먹는다(삼국지 원소전). 몇몇 논자들은 당시 조조가 포로를 관리할 상황이 아니었고, 원소군도 거짓 항복했기에 이런 극단적인 짓을 불사한 것으로, 포로 학살은 어느 정도는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평대전의 대승에서 국가를 위해 포로들을 학살한 백기가 계속 욕을 먹어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의 개념이 미약한 고대조차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할 지라도 이런 행위는 잔혹하다 보았다. 또 정사 삼국지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거짓 항복했다는 기록이 없다. 자치통감에서도 도망치고 흩어진 원소군 중 그냥 사로잡힌 인원을 모두 다 파묻어 버렸다고 나온다. 무제기에 달린 배송지 주에 따르면 '여러 책에서 이르길 조조가 파묻은 원소의 군사가 8만 또는 7만이라고 한다.' 단 조조 자신은 참수한 게 7만이라고 했으니 전사나 추격 중 살해당해 묻힌 숫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조조 자신이 헌제에게 상주한 것을 기록한 정사 삼국지 배송지 주 헌제기거주에 나오기론 이때 당시 포로 학살을 합쳐서 전후로 조조가 죽인 원소군 병력은 참수한 것이 모두 7만 여 급이라고 나오며 노획한 치중과 재물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조군의 병력이 1만이었다고 기록된 것과 더불어 조조의 승리를 미화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에서도 조조가 원소군 7만 명을 전후로 죽였다고 나오고 원소군의 치중, 도서, 진귀한 보물을 얻었다고 하니 대승임에는 분명하다.
흔히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 적벽대전이릉대전은 완벽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 추측이 어려우며, 무엇보다 민간인이나 포로학살 언급도 없으니 사망자 규모든 그 무게든 같이 비교하기가 힘들다.
나무위키의 관도대전 문서는 적벽대전이나 이릉대전 문서에 비해 문서의 양이 적은 편이고, 실제 전쟁상황은 원소, 조조/생애 문서에 자세하게 설명되니 그쪽을 참고해도 좋다.

4. 관도대전 이후


관도대전 직후 조조는 원소 진영에 있었던 서신들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軍中) 사람들의 서신들이 발견되었다. 원소와 내통하던 이들은 처벌하는게 마땅하지만 조조는 그냥 이것들을 열어보지 않고 모두 불태운 다음 이 일을 입에 올리지 마라고 당부했다. 이는 자기 자신이 그만큼 관대하다는 의미의 퍼포먼스이긴 하지만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를 물리쳤음에도 아직 그를 압도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허도 조정 내부에서조차 전쟁이 원소의 승리로 끝날 걸 예상하고 원소와 내통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소의 세력권이 원담, 원상, 고간의 셋으로 동강났음에도 워낙에 강대했기에, 잔존 세력을 모두 무너뜨리고 하북을 평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조조는 원소가 죽은 이후에도 ''' 공격하지 못했으나''' 후계자 분쟁이 시작되고 나서야 원소의 잔존세력들을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원소 사후 원상과 조조의 대결에서 심배 정도를 제외한 원가 진영의 인사들 대부분은 눈치 보면서 대기하다 적당한 기회에 뒷통수를 치고 조조에게 붙거나 아예 대권을 노리고 원상에게 도전하는 등 매우 지리멸렬한 행보를 보이게된다.
냉정하게 말해서 관도대전에서의 큰 패배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강성했으나 내상이 깊었다.
나머지 자세한 것은 하북통일전 문서 참조

5. 평가


삼국지연의의 이전 전통적인 삼국지 매체에서는 적벽대전에 너무 비중을 싣는 나머지 그리 주목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인공인 유관장 삼형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전투이기 때문인 듯하다. 연의에서는 그나마 조조를 띄워주는 전투라서 재조명되었으나, 원소가 지닌 엄청난 패배 복선과, 막강한 병력수에 비해 바보같이 약하게 묘사된 원소 때문에 별로 재미가 없는 전투이다. 특히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등의 현대 매체에서는 이 전투를 한 컷 정도로 간략하게 넘기는 경우가 흔하며, 초반의 접전에서 안량/문추를 참살하는 관우의 활약이 끝나면 사라진다.
여기에 반발하여 일부 논단에서는 관도대전이야 말로 삼국지의 대세를 판가름한 결전이며, 이 시점에서 조조의 제패가 확정되었고 이후의 전투는 전략적 가치에 있어서 관도대전에 비해 큰 의미가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관도대전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곤란하다. 원소는 관도대전 당시 이후 자신에게 반항하는 반란세력을 철저히 소탕함으로서 하북의 세력권을 더시 튼튼하게 내실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이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여전히 조조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원소 세력이 무너지게 된 원인은 원소 사후의 후계자 내전이지, 관도대전이 아니다. 관도대전이 아니었어도 원소가 급사하여 후계자 다툼이 있었으면 원소는 멸망했을 것이고, 관도대전이 있었더라도 원소가 죽지 않았다면 결코 멸망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을 것이다. [11]
물론 그렇다고 하여 반대로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지 않다. 관도대전에서 이긴 후 조조는 무려 7만 내지 8만[12]에 이르는 원소군 포로를 전사시키거나 생매장 시켰는데, 이릉에서 비슷한 참패[13]를 당한 유비의 경우 2군 별동군을 운용했던 황권이 퇴로를 끊기고 위에 투항하면서 최소 현령급 이상의 간부만 142인을 잃었다. 이것도 유비 본대의 간부진 손실은 제외한 수치인데, 촉은 이 손실로 군부의 현역 중진들인 법정 관우, 황충, 장비, 마초 이릉대전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전후 1년차이로 죽어나간 상황에서 차후를 이끌어나갈 그당시의 하급군관층이 거의 붕괴되었다.[14] 즉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원소 세력의 결집력과 역량은 크게 감소했다고 볼 수 있다.
단, 관도대전 후 원소 측의 인재들의 손실은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고 (특히 후계자 내전을 보면) 원소가 차지한 하북 4주의 인적 자원은 이후 촉과 오에 비하면 더 유리했으니 따라서 어쩌면 금방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순유 등 조조 진영의 참모들도 지적한 바 있고, 그래서 원상이 세력을 키우기 전에 쳐야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패배한 원소가 숙청으로 내부 단속을 하는 동안, 조조는 승리했음에도 원소 진영과의 내통 편지를 불태우는 퍼포먼스까지 하면서 친원소 세력의 숙청은 없을 것이라고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여야 했다.[15] 더구나 선우보, 염유 등 하북 유력자들의 이탈이 관도대전 무렵의 일이었다면, 조조가 원소에 비해 우월한 '협천자' 명분으로 원소 세력을 뒤흔들 수 있다는 히든 카드를 이미 써버렸고 원소가 그런 이유로 자신을 버릴 것들은 모조리 짓밟아놓은 것이니 다음에는 협천자 카드의 위력이 예전만 못할 것이다.
관도대전의 직접적인 결과는 순전히 조조가 원소의 침공군을 저지했던 것으로서, 적벽대전에서 유비 / 손권 연합군과 마찬가지로 '''멸망 위기에 몰렸던 조조의 세력이 운신할 여유를 확보했다'''는 것으로 한정해야 타당할 것이다. 또한 당시까지 '협천자'를 명분으로 세력을 키워나가던 조조가 강대한 군벌인 원소를 이김으로서 조조의 명성은 이 승리를 밑바탕으로 해서 빠르게 치솟게 된다.
관도대전 이후의 세력 구도는 원소가 사망하기 이전에는 본인의 세력권과 가신들은 큰 소모없이 유지되었다. 결정적으로 조조는 원소 사후 '''원소의 세력을 정리하려다가 패배'''하여, '지금까지는 전투에서 져도 처벌을 안했는데 앞으로는 전투에서 지면 처벌할 것이다' 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 [16] 이 부분이 조위정통론을 내세우는 진수가 '''고의로 조조의 패배를 누락''' 함으로서 [17] 팬덤에서는 조조가 '원씨 세력? 그냥 냅두면 알아서 후계자 싸움으로 자멸할거 같아.' 라고 쿨하게 물러난 것으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며 실제로는 조조는 원소 사후 원소 후계자를 정리하려다가 '''패배하여 어쩔 수 없이 물러난 것'''이다. 실제로 진수의 삼국지를 제외한 당대의 모든 역사서에서 조조의 패배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조는 승리해놓고도 본인과 가신들이 원소의 파워를 잔뜩 의식하고 있었다. 조조가 획득한 명성과 제후는 아직 완전히 역전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원소 사후 후계자 내전과 합쳐지면서 이후 조조가 역전하는 발판이 되었다는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조조의 진정한 승리는 원소가 죽고도 시간이 걸린다.[18]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상하였으며 재간과 도량이 있었고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질이 거만하고 괴팍하며 스스로 높여서 선행을 하는 데는 모자랐다. 이런 까닭으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19]


5.1. 원소의 숨은 문제들


원소는 질래야 질 수 없게 완벽한 판을 짜는 능력까지는 여전히 뛰어났으나, 결국 침공에 실패하여 후세에도 두고두고 비난과 조소를 당한다. 대다수의 삼국지 작품에서는 관도대전 하나로 원소의 캐릭터를 잡고 부당할 정도로 까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때의 중대한 실책들을 원소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나타난 '''판단력 저하'''의 일부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나이부터 완벽에 가까운 정치책략으로 세력을 키웠던 원소는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건강을 혹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21세기에는 원소가 무능력으로 져서 홧병에 걸려 죽었다는 조조 중심의 해석보다는, 원소가 과로사하기 몇 년 전부터 보인 몇 가지 단점들이 결합된 모습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워털루 전투 당시에 환상적인 지휘능력을 선보인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병으로 지휘를 놓은 사이 전황이 바뀐 것을 생각하면 아예 일리가 없는 소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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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허유가 배신한 것까지는 원소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설픈 처리가 문제였다. 허유를 확실히 잡으려면 전쟁이 다 끝난 상황에서 하든지 아니면 허유 본인과 가족을 한꺼번에 잡아서 처리를 했어야 했다.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이 잡힌 허유가 '나를 죽여주시오' 하고 가만히 있기를 바랐다면, 당시의 원소 세력은 심각하게 낮은 판단력을 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20] 원소는 정작 관도대전 이후에는 곽도에 대한 애정을 거두고 실권시켰다가, 원소 사후에 곽도가 원담을 부추겨 후계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으로 만드는 실책까지 저질렀다.
이런 지도부의 부패에서 일어나는 혼란은 현대의 독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삼국지연의 이래로 지나치게 영웅주의 중심으로 단순화 되어버린 원소의 실책이 현대인들에게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적인 정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에 가깝다. 거기에 원소는 조조, 손권, 입촉 후의 유비 등 다른 거대 군벌들처럼 참모진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유대를 보여준 바가 없다. 원소는 분명 조조 이상급의 참모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특정참모를 편애하고 다른 참모들이 원소의 독선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구도를 만들었으며 자신의 위치를 위해서 참모 간에 내분과 음해를 거의 방치했다 봐도 무방할 정도다.[21] 누군가는 체제의 문제로 돌리기엔 동시대에 원소 이외에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드니 변명으로 삼기엔 빈약하다지만, 엄밀히 따져 참모 간에 내분과 음해로 보면 '''말년의 손권''' 이라는 원소보다도 더한 인간이 있으니[22] 이걸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결국 유력군벌 가운데 '''그런 체제를 돌린 게 원소뿐이고 결국 그 체제로 인해 무너졌다라고 하는것이 더 정확하다.''' 이런 체제의 문제라면 군주의 카리스마가 붕괴가 곧 그 세력이 와해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원소 사후의 원가가 딱 그런 식으로 무너졌다.
건국군주 자신이 없어도 그 세력이 굴러갈 수 있도록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세력의 흥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원소 이상으로 부하들의 인선과 후계자 문제에서 중대한 실책을 계속 저질렀던 손권은 자기가 죽고 나서 나라가 심각한 내분으로 완전히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사후에 세력이 바로 와해되지는 않았다. 원소가 가진 어린 후계자의 불안정한 입지 문제 같은 건 유비도 가지고 있었지만 유비는 후계자 통치의 기반과 시스템을 완벽하게 마련해서 후계자의 통치가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과 대비해보면 원소의 문제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분명해진다. 원소는 자기의 입지를 절대적으로 만드는 것에 너무 주력한 나머지 이 부분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못했기에 망했다고 할 수 있다. 원소가 죽지 않았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원소가 있는 한 어쨌거나 바로 무너지지는 않는 체제였으니까.[23][24] 그러나 결과적으로 원소는 죽었고 그 후에 대한 대비는 미진했으며 원가는 다른 군벌들과 달리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서 멸망했다. 이렇게 보면 원소를 너무 띄워줄 필요도, 그렇다고 너무 폄하할 필요도 없다. 공손찬이라는 막강한 경쟁자를 누르고 하북 4주를 순식간에 아우른 것도 원소고 그걸 결국 유지하지 못한 것도 원소인 만큼 원소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건 딱 거기까지만 평가하면 될 일이다.

5.2. 원소는 왜 관도대전을 일으켰나


지구전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훗날 삼국정립을 이룬 조조, 유비, 손권 역시 이런저런 문제는 있었고 특히 원소 뺨치는 참모진 분열을 대놓고 조장한 손권도 있긴 하지만, 원소의 경우 지나치게 성급했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원소는 이 시대 거대군벌 가운데 확장속도가 제일 빨랐다. 기주에서 제대로 세력을 불려 하북 4주를 모조리 제패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7~8년 정도인데, 관도대전 당시는 전풍의 말대로 급속한 확장 이후 그걸 제대로 정비해야 할 때에 가까웠다. 원소가 선택한 체제적 한계를 생각하면 더 그랬는데 원소는 공손찬이라는 거대군벌을 완전히 정리하자마자, 비록 본인보다야 약하다지만 조조라는 거대군벌과 다시 충돌한다는 무리한 결정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결국 내부적 모순이 터져나오는 한계에 봉착한 것이 관도대전의 대패라고 할 수 있으니, 원소는 중요한 위기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격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원소가 조조를 먼저 치면 몰라도 조조가 원소를 먼저 친다는 건 세력구도상 어려운 일이었거 따라서 원소가 몇 년간 내부를 다지고 후계구도를 잡아도 괜찮았고, 이게 관도대전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은 조조는 하북 4주라는 땅을 흡수하면서 위나라의 형태를 거의 완성했는데, 그도 잦은 원정을 하긴 했지만 본거지를 하북의 중심지 업으로 두고 하북을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주력했으니 이 점에서 둘이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북출신들이 지구전을 주장했다고 원소를 재평가 하는 차원으로 이들이 전쟁을 두려워하거나, 단순히 조조의 협천자 논리에 굴복했다거나, 또는 천하통일보다 하북의 이득을 앞세웠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으나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애초부터 이각/곽사 혼란 때 원소에게 누 차례 협천자 옹립을 권했던 전풍, 저수 등이 하북 출신들이었고 조조에 대한 전략 또한 조조가 원술, 장수, 유표, 여포 등과 싸울때 조조의 뒤를 치고 천자를 차지할것을 강력히 원소에게 권했을 정도로 오히려 군웅할거 초반에는 오히려 매파에 가까웠다.''' 반면 그 시절 땐 오히려 원소를 비롯한 외부출신들이 조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풍과 저수의 예측대로 협천자를 방치한 결과는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황하 이남의 군벌들을 차례대로 무너뜨리고 한 황실의 위세를 높히니 (표면적이나마) 비록 힘으로는 원소가 앞서지만 명분으로는 딸리는 형국이었고 관도대전 바로 직전 시기 하북 호족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애초부터 (협천자)를 하랄 때 하지 않고 지금 와서 난리를 피운다'라는 일종의 군주(원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역시 전풍, 저수가 우려한 대로 일찍이 조조를 손봐주지 않음으로 급성장을 한 조조가 청주, 하내에서 협천자의 이점을 살려 원소세력을 흔들고 있었다. 이런 조조의 흔들기에 넘어간 선우보 같은 케이스를 보면 원소가 협천자와 조조를 방치한 판단이 미스였다는 점이 적나라게 드러난 셈이고 원소의 카리스마가 흔들리게 됐다. 조조의 관직 뿌리기가 하북에 생각보다 동요를 일으켰다는 정리가 될 것이다. 실제로 어정쩡한 군벌들은 조조가 하북 입성하자마자 조조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원소세력의 구심점이 다소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한 타개책은 군사적인 성과였고 원소입장에서는 이제는 관도대전을 속히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이 말대로 조조는 황제를 끼는 데 성공했고 당시만 해도 조조 세력은 후한의 유일한 합법 정부였다. 조조는 협천자를 통해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정의 영수격이 되었으며, 이에 맞서 후한 조정을 전면 부정하고 독자적인 칭제건원으로 대응하던 원술을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는데,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원술은 비록 회남에서 재기하며 자리잡은 기반이 아직 안정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후한 조정이 조조를 중심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진 여전히 내전기의 핵심 군벌 중 하나였다. 원술이 조조와 손잡은 여포에게, 그리고 조조에게 연달아 참패하면서 유동적이었던 지지세력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에 따라 통치력이 확고히 미치진 못했으나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펼치던 세력권이 공중분해되었는데, 비록 조조는 같은 시기에 형주에서 할거하며 대립하고 있던 유표를 제압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조정의 영수로서 각지의 반역자를 토벌하고 나라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구호를 내걸던 조조의 위상에 엄청난 상승효과를 가져왔다. 즉, 조조가 받드는 한실이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아직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로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당대의 유력자들은 게임에서처럼 제각기 자기 주군이 천하를 통일하길 바란 것이 아니라, 내전기라는 인세에 강림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라는 대안을 훨씬 설득력있고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실제 조조의 협천자와 원술의 몰락 과정을 전후해 한실의 힘이 복구되었다고 여겨지자 예주와 형주 북부에서 독자적인 군벌세력을 갖추고 있던 이들이 조조에게 귀부한다. 조조의 협천자와 이에 대응하던 원술의 몰락을 기점으로 시대적 패러다임이 점차 '내전기의 영웅' 원소가 아닌 정상적인 사회질서로의 복귀를 주도하는 '한나라 조정의 수장' 조조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원소에게 대장군 주는건 그 체제 내에서의 지위 인정일 뿐이지 결국 원소는 부차적 입지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합법 정부니까 군벌들을 꼬드길 때 훨씬 유리하고 실제로 조조가 원소가 장악한 기주와 병주에서 관직 돌리면서 세력 이탈 꼬드긴 흔적은 꽤 발견된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황제권을 쥔 조조가 펼치는 장기적인 후한의 정상화, 애매한 군벌 끌어들이기 효과로 대표적인 거대군벌인 유표는 실제로 관도 전에 한번 세력이 조각난다. 휘하의 장선이 후한 정부인 조조 세력에 붙겠다고 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거기에 한숭 같은 인사를 보면 조조한테 나 보내면 나는 한의 신하지 유표의 신하가 아니라고 하는 판이라 유표가 못 죽이는 상황도 발생한다. 유표 끄나풀 노릇하던 누규, 장수-가후 라인은 아예 조조 쪽으로 이탈한다. 물론 유표도 마냥 호구는 아니라 이걸 어떻게 수습하긴 하고, 헌제가 황제처럼 구는 유표를 보면서 힘이 없어 그냥 이를 가는 상황도 발생하긴 했지만 정작 유표도 한실의 권위 앞에서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을 보면 조조가 끼고 상황이 안정된 후한 조정의 후광은 마냥 약하지가 않았으며, 이 시점에서 조조는 아직 역적의 대명사 망탁조의의 멤버가 아니다. 조조는 반동탁연합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동탁을 공격한 인사 중 하나였기에, 조조가 한실에 충성하는 자라고 순욱이 믿었듯이 한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즉, 이때까지 조조는 후한 구해낸 대영웅 코스프레 하는 상태고 그게 또 어떻게 먹히는 상태였다.
이런 점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고 위세가 절정에 달해 교만해지자 일방적으로 공물을 끊고 황제를 꿈꿨다는 진수의 해석은 세력면으로만 따지면 그렇지 오히려 협천자라는 압도적인 명분을 등에 업은 조조의 원소에 대한 기선제압 시도는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원소의 상황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원소는 더이상 이를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힘만 믿고 이미 명분을 쥔 조조를 공략하기에는 전풍과 저수가 지적한대로 상당히 까다로워서 오히려 공손찬을 깨뜨리고 북중국을 통합한 상승세가 무의미로 흘러갈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도대전이 일어난 200년, 원소가 그토록 원하고 절실히 필요했던,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그대로 뒤집어 엎는 사태가 발생한다. 헌제가 조조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암살지시를 내린 반 조조 친위쿠데타 의대조 사건이 실패하고 그 사건 주도자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가 서주를 거쳐 하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반 조조의 명분덩어리 유비를 몇백 리까지 나가 친히 맞이해 기회를 잡은 원소가 휘하 세력이 더 이탈하기 전에 빨리 일을 벌여버린 것이다.[25] 원소가 유비를 받아들이고 돌린 격주군문만 봐도 자기가 핍박받는 헌제 구하는 충의지사 코스프레 하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조조는 헌제를 핍박하는 역적 동탁 Mk2고. 격주군문에는 절반이 조조 개인사를 까는거고 절반이 조조가 황실을 능멸한다고 까고 있다. 원소는 유우 추대 실패 이후 가짜 황제라고 까던 헌제에 충성하는 충신행세를 하는 정치철새인 인간이니 이런 뻔뻔함도 보였을 것이다.[26]
후일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유비와 손권이 극복했던 이유가 반 조조 세력의 거두 유비가 나서서 일개 지방 토후에 불과했던 손권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결정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각각 한중 공방전/조비의 남정에서 승리하여 자신들의 독립성, 적어도 촉과 장강 이남에서는 독립세력으로 자신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재차 입증해냈기에 촉한손오라는 독립국가가 세워질 수 있었다.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뚜렷한 명분이 없었던 원소에게는 유비가 바친 명분으로 인해 비로써 조조의 협천자 논리를 완전히 깨부수기 위해 군사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결정적인 승리를 위한 조조와 원소의 대결이 바로 관도대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구전으로 가면 원소만 내정 회복하는 게 아니라 조조의 경우도 시간을 주면 파괴된 서주, 예주, 연주의 빈 농지에 사람들 데려가서 농사시키고. 농사시켜서 사람들 먹이면서 내정을 회복시킬 수 있다. 당연히 초기에는 투자대비 아웃풋이 높지만 농지에 사람들이 어느정도 차게되면 투자된 자원대비 효율은 낮아지다가, 회복이 절정에 이르면 더이상 자원이 투자되더라도 추가이득은 0이 되는 시점이 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빈 땅도 결국 관리하기 편하고 농사짓기 좋은 비옥한 땅부터 사람들 채워넣을 텐데 조조의 파괴된 땅들인 서주, 연주, 예주의 경우엔 이런 식으로 남아도는 비옥한 땅에 사람들을 정착시켜 회복이 빠를 수 있지만 원소 세력의 핵심지 기주의 경우, 전란의 데미지 적게 받았다는 가정 안에서는 이미 그런 땅들은 어느 정도 차서 관리되는 상태일 테니까, 기주는 그런 극적인 효과까지는 못 볼 가능성이 높았다. 즉 오히려 조조의 회복 속도가 더 빠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아직 군사적인 우위를 확실히 점하고 또한 의대조 사건으로 어느정도 명분을 회복한 원소에게는 혹시라도 있을 조조의 세력 회복의 여지를 주지 않고 박살내겠다는 전략은 마냥 틀렸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원소는 이각/곽사 날리, 조조가 장수/유표에게 고전했을 때 전풍, 저수 등 기주 인사들이 뒤를 치고 천자를 확보하라는 진언을 무시함으로 미약했던 조조가 협천자를 통해 본인과 견줄 정도까지 성장한 것을 방치했고 그러므로 조조를 물리칠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을 이미 놓쳤다. 그 실책을 만회하고자 해서 1인자 독재체제를 확고히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하북인사-외부인사의 분쟁을 부추겼고, 후계싸움을 스스로 유도하니 내부적으로 원소의 막부는 분열되있었고 그로 인해 관도대전에서 본인의 유일한 강점인 세력 우위를 100프로 활용을 못 하게 되었다.

5.3. 전풍과 저수를 무시해 진 전투인가?


관도대전은 저수와 전풍의 발언이 인상이 강해서 '원소가 충신들 조언 안 받아서 망했다'는 인상이 강하고 초전부터 원소군의 명장인 안량, 문추 죽은거 보면 실제로도 그런 인상을 받기가 쉽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는 조조가 전 전선에서 죄다 밀리는 흐름이고 조조를 결과적으로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주는 다 들고 일어나고, 안량이 죽은 것도 관우가 미친 듯한 하드캐리로 놀라운 전과를 보인 탓이고, 문추가 죽은 건 확실히 원소군의 실책이긴 한데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전선은 여전히 죽죽 조조가 밀리고 관도에 틀어박히기 직전에도 합전에서 불리했다는 묘사가 나오고 나중엔 조조 병력이 만명도 안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나 부상자가 3할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나...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 보면 원소가 조조랑 술래잡기 끝에 조조 본대를 한번 맞붙었고 격파했다는 그림이 나온다.
그러니까 외부에서 관측 가능한 전쟁 진행사항으로만 보면 원소 측이 이기는 판이다. 그리고 막판에는 조조군 군량미가 고갈난 상태에서 쫄쫄 굶은 조조군을 관도에 가두어 놔두고 잠시 지구전으로 상황을 유지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오소 전투에서 원소의 판단 미스와 정치질이 터져나오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오소에 경기병 외 지원군 더 보내자는 장합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설령 오소에서 이겼더라도 조조는 소수의 별동대 가지고 간신히 혈전 끝에 순우경을 이겨놓고 원소 세력 한 가운데서 곧장 압도적인 원소 본군과 마주해서 그냥 인생 종치는 거였다. 그리고 오소 전투에서 패하긴 했어도 아직 원소군이 와해된 것도 아닌데 원소의 정치질로 과도한 총애를 받는 곽도가 오소 패전에서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거짓말로 장합을 모함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장합이 군영에 불지르고 배신해서 군대가 혼란에 빠지고 이 와중에 원소가 10만 명 놔두고 튀는 일 없었으면 오소가 불탔다고 조조 진영의 식량난이 당장 해소되는 게 아니니 어쨌건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원소가 이길 판이었고,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원래 역사처럼 대패할 판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관도대전이 전풍/저수의 조언 때문에 지구전과 대비되는 '속공' 취급을 받는데 오히려 관도대전은 지구전에 가까웠다, 관도대전은 절대로 그렇게 짧은 전역이 아니다. 관도대전은 도하거점 하나씩 먹으면서 천천히 진군하고, 현지 반란 엄호하고 조조군 후방거점으로 병력도 보내서(혹은 일어난 반란에 관직 줘서 이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보급 막아가면서, 병력으로 조조군을 압도하여 공격해 부상자를 속출시키고 관도에 고립되게 만드는 등 할건 다 하면서 간 전역으로 실제로 조조군의 보급이 막혔던 건 이런 적극적인 후방 사보타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조조군의 군량이 부족해진 게 1차적으로는 유비유벽이 허도 주변을 공략하고 많은 군현의 호응을 받아 다수의 무리를 모아 허도를 노리며 돌아다니고 거기다 예주 전역이 거의 다 조조에게 돌아서서이고, 2차적으로는 각지의 도적[27]들이 보급을 노리고 관도에 갇혀있는 상황상 본영에 군량이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서인데 막상 관도에서 원소군이 붕괴하고 조조가 이겨서 추격하는 시점에선 원소군 잔당 소탕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지속적인 작전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후방에서 하후연이 군량 보급을 무난하게 해주어 작전에 무리가 없었다. 창정전투를 거쳐 하북까지 쭉 가는걸 보면 결국 세력 내 물자가 제대로 분배될 수 없던 상황인 거지 물자가 없었던 건 아니라고 봐야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서의 표현과 달리 관도대전은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아예 무시하고 원소가 독단적으로 치른 전투가 아니었다. 삼국지 원소전 주석 헌제전에서 전풍과 저수가 했던 발언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지금은 피폐하니 농사에 힘쓰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자, 이게 안 통하면 조조에게 우리의 왕로(王路)와 멀어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연후에 진격해 여양(黎陽)에 주둔하여 차츰 하남(河南)에 군영을 짓고, 선박을 더 제작하며 군수물자를 수리하고 나서,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 주변을 초략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2, 3년 안에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저 조언과 관도대전의 실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양에 주둔하면서 차츰 하남에 군영을 짓는다? 정예기병을 나눠 파견해 허도 주변 지역을 다 공략한다? '''그것을 실제로 벌인 게 관도대전이다.''' 그러니까 전풍/저수안은 가만히 잘 살펴보면, 적어도 관도대전 내부 경과에 한정해선, (원소가 말을 안 들어서 망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말을 들은 것이다.
삼국지 원소전 주석 헌제전에 실린 이들의 지구전안에서는 농사짓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과 하남 진출과 동시에 후방 사보타주를 진행하는 안이 별도다. 이 안건과 실제 관도대전의 차이라고 하면 이들은 허도 주변을 공략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초략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황건적 유벽이 조조에게 반란해 원소에 호응했고 파견된 유비와 현지의 유벽이 같이 돌아다니면서 허도 주변을 공략하고 유비가 여남을 중심으로 예주 은강현 등 허도 남쪽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많은 무리를 호응하게 해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들에게 군현 다수가 호응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이런 유비와 유벽의 활약과 더불어 예주가 거의 다 원소에게 호응했다는 실제 상황이 오히려 전풍/저수안보다 더 성공적이고 원소 쪽으로 민심을 확실히 사로잡는 사보타주였다는 차이점이 있고 예주 공략 당시 기병을 썼냐 안 썼냐는 확인이 안 되는 부분 정도다. 또 어차피 하남에 도하해서 군영 짓는 순간에 그게 대규모 도하작전이 되는 건 피할 수가 없다. 실제 관도대전이랑 비교해보면 원소 본대의 조조 압박이 명시되었냐 안 되었냐 정도 차이지 나머지는 다 했다. '''한 마디로 전풍/저수의 제안과 실제 관도대전이 진행된 대략적인 전개방식과 차이가 없다.'''
실제로 여기서 분명히 실제 역사와 전풍/저수의 안건이 결정적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관도 압박'의 존재유무 뿐이고 그나마도 이들이 그거 하지 말라고 명시해서 아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풍과 저수가 직접 발언을 안 했다는 것에 불과한데 어차피 하남에 군영 차리고 군사활동 하는 건 똑같으니 다를 게 없던 것이다.
그리고 전풍과 저수의 의견 중에선 굳이 원소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도 존재했기에 원소가 겉으로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존재한다. 일단 이들은 조조의 군사가 더 강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조조를 띄워준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조조는 안량, 문추 등 원소의 상장들을 격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원소 본대와의 합전에서는 대패했다는 정황 증거가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이후, 허유가 배신하면서 오소가 함락되기 전 원소군은 조조군을 궤멸 직전의 상태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딱히 조조군이 더 강하다고 평가할 만한 근거가 없다.
또, 실제로 원소는 저수와 전풍의 방안을 채택하면서도 그들의 의견대로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허도 일대 예주를 약탈하기 보단 유비, 유벽을 이용해서 오히려 현지 호응을 얻고 민심을 얻는 방향을 사용했다. 즉, 원소는 적당히 필요한 부분은 듣고 쓸모없는 부분을 버리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는 기록은 뭘까? 그것은 우선 원소 특유의 정치스타일에서 기인한다. 참모의 단물만 빼먹은 다음 은근히 견제하고 무시하고 내분 조장하는 그 스타일 말이다. 한마디로 원소가 두 사람 계획안의 알맹이만 쏙 빼먹고 전풍이랑 저수를 엿먹인 뒤 견제질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말은 다 들을 거면서 정치질 하느라 면전서는 개무시하고 면박준 꼴이고 거기다 더해져 조조는 이기고 나서 그걸 뭐 어마무시한 사실인 마냥 언플해서 원소를 멍청한 군주로 만든 것이고 사서에 이게 그대로 적히면서 실존하지 않았던 '완벽한 조언과 이를 완벽히 무시한 원소' 흐름이 된 것이다.
다만 조언에선 일단 농사짓고 백성을 안정시키다가 이게 안 통하면 전략을 시행하자는 것이고 기한이 2년, 3년 정도로 잡혀있기 때문에 관도직접 대치를 지지하는지 아닌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이들이 지구전을 아예 주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 볼 수 있다. 또 안량 혼자 보내지 말라는 저수의 조언같은 경우는 원소전에서는 저수의 진언을 거절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혼자 안 보낸 게 무제기에 너무 명확하게 적혀있기 때문에 '무시하는 척하면서 안건 다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실제로는 의견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원소가 안량과 같이 보낸 인물들이 곽도, 순우경이라는 거물급 인사들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원소의 독단적인 정치질과 함께, 조조 측의 원소에 대한 프로파간다는 일정 이상 실존했기에 사서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이다. 바로 앞에 말했듯 맞상대한 조조가 실제 관도대전과 이 제안의 유사함을 모를 수가 없는데 원소랑 나눠서 원소 깔아뭉개고 전풍저수 극찬을 하고 있으니까. 한 마디로 원소가 여기서 한 게 속 보이는 정치질이고 왜 기주 출신 박대하는지 모를 일이라 욕먹을 건 맞는데, '원소는 적절한 조언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안 쓴 멍청이'라는 조조가 욕한 거/사서에서 욕하는 거와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다.
문제는 원소가 전풍과 저수 등 참모의 단물만 쪽쪽 빼먹은 '지구전'스타일 압박이 매우 효과적이었고 전황 또한 잘 나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전풍/저수의 '지구전' 전략과 상반되게 곽도의 조언을 들어 순우경이 군량을 지키는 오소 구원보단 조조의 본진을 격파하는 '속공' 전략으로 바꿨는데 바로 이것이 치명타가 됐고 결국에는 전풍과 저수의 전략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해서 대패했다고 볼 수 있다. ''' 저수가 애초에 순우경만 병량을 맡기는것은 위험하니, 장기에게 별동대를 인솔하게 하여 수비를 치중하라는 진언을 원소가 무시했고 또한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모험적인 공세보다는 이미 우위를 점한 전세를 유지는 차원으로 순우경에게 구원병을 보내 수비에 치중해야 된다는 진언 또한 흘러 들으니 결정적인 판단 미스를 한 셈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조조와 대결 타이밍을 냉정하게 보면 역시 전풍과 저수가 이각/곽사 날리 때 조조 대신 천자를 옹립하라는 진언을 무시함으로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을 놓치게 됐고 이것은 명백히 원소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넒게 보면 전풍과 저수의 말을 안들어 망했다는 평이 얼추 성립이 되긴하다.

5.4. 천하의 대세가 완전히 판가름 났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도대전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다 준 것은 맞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가 이걸로 결정났다고 주장하는 건 매우 성급한 주장이다. 당장 생각해보자, 후한말 황건의 난부터 촉한과 오나라라의 멸망까지 계산하면 대략적으로 이 시대는 한 세기 정도의 시간대가 된다. 관도대전의 타임라인은 황건기의로부터 불과 16년 후의 사건이며 군벌의 난립과 삼국의 정립은 이것보다 몇 배는 더 오랜 기간 진행되었다. 혹자는 조조가 하북을 먹었으니 사실상 통일이라고 주장하나,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말대로 천하 9주 중 6주를 먹었다고 해도 온전히 천하를 아우르지 않으면 그런 말은 무색하기 그지 없으며 누구를 정통이라고 칭할 수 없다고 당대부터 후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관도대전 이후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는 무려 한 갑자가 지나간 시간인 63년이 흐른 뒤였고 오나라는 관도대전으로부터 80년이 흐른 후에 망했다. 관도대전으로부터 60~80여 년 후에야, 그것도 조조 자신이 세운 위가 아니라 그를 찬탈한 진나라에 의해서나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관도대전이 근래 재평가를 받다보니 결정적으로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적벽대전이 폄하받는 경우도 많은데, 단순 스펙상 최강자였던 원소를 무너뜨리고 조조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은 계기가 관도대전이듯이, 천하통일을 목전에 앞두었던 조조의 야망이 붕괴되고 그 위세 또한 무력화된 계기가 바로 적벽의 싸움이었다. 또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융중대가 결과적으로 조조에게 얼마나 위협적으로 다가왔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한중공방전과 형주공방전은 조조가 직접 천도를 언급할만큼 자칫하면 관도대전의 결과를 무력화시키고 천하의 판세를 뒤엎을 뻔한 사건이었다.
조조가 이렇게 총동원전을 펼친 건 관도, 적벽, 한중, 번성 공방전 정도인데 이 중 모두에 유비가 관련되어 있었고 조조는 결국 유비라는 존재가 끝까지 물고 늘어진 덕분에 통일군주가 되는 데 실패했다. 조조의 천통을 저지한 유비라는 인물의 비중이 그만큼 삼국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원소랑 조조랑 붙었던 당시나 유비가 한중 먹었을 때 뒤집힐 확률이나 조조에게 심대한 위협이 된 건 매한가지였고 이후에도 제갈량의 북벌, 제갈각의 북벌, 강유의 북벌 등 위나라를 위협했다.
그래서 조조도 위기감을 크게 가졌던 것이고 사마의가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갈량의 위나라 침입으로 위나라가 위기의식을 느끼고 군권을 사마의에게 몰아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또 직계 황족들이 군권에서 배제된 상황에서 사마의가 군대 조직을 장악했고, 결정적 순간에 뒤집기 한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니 여기에는, 조씨 일가의 삽질도 있었고 유비나 손권이 잘한 것도 있었고 제갈량이 잘한 것도, 강유가 분전한 것도 있었다. 물론 유비와 손권도 실수를 했고 그 때문에 결정적인 기회를 잡고도 삼국을 사마씨로의 정권교체에 넘겨 주었지만 결과적으로만 보아 관도대전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성급한 얘기라는 것, 오의 고질적인 공격전 무능과 제갈량 사후 촉한 수뇌부의 신중론으로 인해 제대로 기회를 잡지는 못했고 기회를 잡았어도 이전 세대보다 지원을 덜 받았음에도 통일까지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보통 우리가 역사를 판단할 때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건 필연이었다'라고 자주 말하는데 그건 후세에서 볼 때에나 그렇고 당시에는 필연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여러 변수가 얽히고 섥혀 하나의 가능성이 그저 우연으로 일어났을 뿐. 최소 산업화가 되지 않은 근대까지의 전쟁은 한 차례 대형 회전에서 얼마나 잘 싸우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고 전쟁에서조차 수많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복잡한 세력의 흥망성쇠야 시작하기 전에 한쪽이 이겼다는 말은 옳지 않다. 관도대전도 적벽대전도 한중전도 가능성의 변화라고 보는 게 옳다. 그냥 몇몇 사람들이 고대시대 이야기인 삼국지에 현대적인 상황을 강제로 적용시킨 게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현대적인 관념을 삼국지가 있던 고대시대의 관념에다가 억지로 적용시켜서 자꾸 이런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요약하면 원소와 조조 간의 관도대전으로 모든 게 종결됐다고 무조건 주장하는 것은 후일 발생한 여러 변수를 무시한 결과론에 불과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1200만에 달하는 하북인구에서 정남 10만동원하여 패배하였기 때문에 세력멸망이 되었다는 대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6. 삼국지연의에서


제3권 제30장의 제목. 굉장히 스펙타클했던 원래 정사와 달리 '''더럽게 재미없는 대목'''이다.
일단 관도대전이 시작하기 전에, 그 유명한 관우의 안량과 문추 참살이 프롤로그로 나오고, 관우가 오관육참장을 거치며 유비에게 돌아가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유비의 배신에 분노한 원소가 손책과 손잡으려고 했고, 당시 곽가의 "손책은 필부의 손에 죽을 것이다." 운운을 듣고 격분해 있던 손책이 호응하여 성사될 뻔했으나, 손책이 급사하고 뒤를 이은 손권이 사실상 조조에게 회유되면서 전부 물 건너간다. 분노를 견디지 못한 원소는 기주, 청주, 유쥬, 병주 등에서 70만 군사를 일으켜 몸소 허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관도대전이 시작된다.
원소가 전풍과 저수의 조언을 무시하고 진격하여, 심배의 지휘 아래 70만 대군의 위용이 펼쳐진다. 원소도 황금빛 투구 및 갑옷과 비단 전포와 옥띠를 두른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장합, 고람, 한맹, 순우경이 뒤를 따르며, 이에 질세라 조조도 허저, 장료, 서황, 이전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온다. 조조는 원소를 대장군에 봉한 은혜를 모르고 모반했다고 욕하고, 원소는 조조를 두고 승상을 자처하는 한나라의 도적이며 죄가 왕망이나 동탁보다 더 심하다고 욕한다.[28] 반동탁연합 이후 조조와 원소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양 진영의 선봉으로 장료와 장합이 나서 4, 50합을 겨루며 조조가 감탄할 정도의 맞승부를 벌이고, 뒤이어 허저와 고람이 나와 싸우며 네 장수의 혼전이 벌어진다. 조조가 하후돈이전에게 각각 3천을 데리고 공격하게 하지만 심배가 준비해 둔 포와 쇠뇌와 궁수들에게 쫓겨나고 초전은 조조의 패배로 끝난다.
이후로는 한동안 정사대로 진행된다. 심배가 토산과 땅굴 작전으로 관도를 공격해 보지만 유엽의 계책으로 발석거를 이용해 토산을 파괴하고 땅굴은 참호로 막아낸다. 그리고 군량이 떨어져가서 조조가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지만 순욱이 보낸 만류 편지를 읽고 관도 사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한맹의 보급대를 서황과 사환이 격파한다. 거의 다 정사에 있던 내용이고 발석거를 벽력거라고 불렀다는 내용이나 순욱의 편지 등은 정사를 그대로 인용까지 했다.
그러나 오소 전투부터 정사와 달라지기 시작하며 재미도 급격히 떨어진다. 정사에 없던 내용으로 허유가 붙잡은 전령을 통해 조조가 식량이 떨어진 것을 알아내고 이 기회에 허도와 조조 본진 양쪽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진언하지만 원소가 조조의 속임수라고 단정하며 무시한다. 이때 정사대로 심배가 허유의 횡령을 알아내고 허유의 아들과 조카를 가두었다는 것을 보고하자, 원소가 벌컥 화를 내며 허유를 쫓아내는 탓에 허유가 배신하여 조조에게 오소를 치라고 제안한다. 웃기는 건, 분명히 앞에서 허유가 횡령을 저질렀다고 나왔는데 그건 얼렁뚱땅 넘어가고 어리석은 원소가 허유를 박대하였다는 식으로 서술되며, 허유가 분을 못 참아 자결하려다가 주위의 만류를 듣고 마음을 바꾸는 내용까지 넣으며 띄워준다.
그리고 정사에서 관도대전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던 오소 전투는 굉장히 싱겁게 진행된다. 조조 군이 원소군으로 위장하니 다들 깃발만 보고 의심을 안 하고 보내주며, 오소에 도착해 불을 지르고 공격하니 원소군은 아주 싱겁게 전멸해 버린다. 심지어 순우경은 술에 취해 자고 있었고 불길을 보고 튀어 나오자마자 포로로 붙잡혀 버린다. 이 와중에 원소는 천문을 보고 오소 방비를 주장하는 저수의 진언을 또 씹으며 찌질함을 보여준다. 정사에 나왔던, 조조가 적군이 뒤에 이르거든 싸우라고 한 말도 나오기는 하는데, 조조가 일방적으로 이기고 있었기에 정사의 극적인 느낌이 없다. 장합이 관도를 공격한 것도, 장합 본인은 오소를 구원할 것을 주장했는데 곽도가 관도를 공격하자고 우겨서 원소가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해놨다. 오소에는 장기를 보냈는데, 장기 역시 조조군이 오소의 패잔병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고 지나치다가 장료와 허저에게 순살당하고, 조조가 '장기가 오소에서 조조군을 물리쳤다.'라고 거짓 보고를 보내니 원소는 그걸 또 믿는다. 대체 원소군은 피아식별 체계도 없는 것인지 안 물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장합과 고람은 길목을 지키던 하후돈, 조홍, 조인과 뒤에서 귀환한 조조군에 박살이 나서 도망친다.
순우경은 조조에게 코과 귀와 손가락을 다 잘린채 말 위에 묶여서 원소의 진영으로 보내진다. 순우경이 취해서 졌다는 것을 안 원소는 순우경을 당장 참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 것이 두려웠던 곽도는 장합과 고람이 애초에 투항할 생각이었기에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고 간하니까 원소는 그게 사실이라면 둘을 죽이겠다고 노발대발하고, 곽도는 여기에 장합과 고람에게 원소가 그들을 죽이려한다고 몰래 전해서 불안감을 부추긴다. 그 결과 귀환 명령을 전하는 원소의 사자를 고람이 베어죽이고 장합에게 투항을 주장했고, 장합도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흔쾌히 받아들여 조조군에 합류한다.
조조의 환영을 받으며 합류한 장합과 고람은 다음 전투에서 선봉을 자처해 원소군의 태반을 궤멸시킨다. 그리고 순유의 계책으로 원소의 본진인 업과 퇴각로인 여양을 동시에 공격한다고 헛소문을 내고, 원소가 여기에 넘어가서 군사를 둘로 쪼개자 조조는 이를 각개격파하여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원소는 갑옷도 못 입고 원상과 함께 도망치고, 이에 장료, 허저, 서황, 우금이 쫓아오자 문서와 의장과 금은보화도 다 내팽개치고 정사대로 800기만 데리고 달아난다.
관도대전 이후로도 조조가 원소를 계속 공격하고, 원소 사후 원담과 원상하고도 삼파전을 벌이며 결국 원소 세력을 전멸시킨다. 이 대목도 특기할 것이라고는 별 거 없고 조조의 계책에 원소와 원담과 원상이 멍청하게 당하면서 군사를 날려먹는 패턴의 반복일 뿐이다.
결국 초반부만 스펙타클했지, 정작 하이라이트인 오소 전투를 허무하게 끝내버리고, 정사에도 없는 원소의 추태와 패전을 추가하며 완벽하게 조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만드는 바람에 긴장감이 없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조조는 압도적인 세력과 능력을 겸비한 악역으로 자리잡은 상황이고, 원소는 반대로 세력은 크지만 늘상 허당스러운 모습과 실책을 연이어 범하는 덜 떨어진 인물로 그려져 왔기 때문에 누가봐도 당연히 조조가 이기겠거니 생각하기 마련이라 긴장감이 전혀 살지 않는 것. 연의의 관도대전은 쉽게 말해 '''잘난 악당이 숫자만 많은 멍청이들을 때려잡는 내용'''이다.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독자들은 응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연의에서 관도대전과, 그에 뒤이은 조조의 하북 평정은 인기가 없는 파트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연의 기반 창작물에서 관도대전을 잘 다루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7. 기타 창작물



7.1.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역경전투와 함께 가볍게 생까버린 전투로 설명과 원소군이 패해 강에 빠지는 장면 하나만 나온다.
중국 대륙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있어 조조가 차례로 적들을 제거하고 그 지위를 굳혀 나갔다면서 원소를 쳐부순 뒤부터 그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원소가 군비, 병력이 조조보다 훨씬 능가했지만 관도의 싸움에서 조조의 기력에 넘어가 궤멸당했고 그 여세를 몰아 조조가 몇 년에 걸쳐 북방의 원씨를 쳐부쉈다는 식으로 짧게 언급된다.
요코하마 미츠테루 삼국지는 연재 형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편집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삼국지의 인기 주인공인 유비나 제갈공명과 무관한 장면들은 짤린 경우가 많다. 80년대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인형극 삼국지의 경우도 관도대전을 비롯한 앞부분 내용은 설명조차 없이 바로 건너뛰고 '''삼고초려'''로 넘어간 전력이 있다.[29]
애니판에서는 젊은 날의 공명이 3자의 시점으로 보는 것으로 해서 꽤 자세하게 관도대전을 다뤘다.

7.2. 창천항로


창천항로의 경우 관도대전 도입부가 그려지던 시기에 스토리 작가였던 이학인 씨가 투병생활 끝에 사망한 탓에 관도대전 초반과 중, 후반의 인물묘사, 사건전개 등이 큰 차이를 보이며[30], 끝맺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전체적으론 왕이 될 자로서 포용심,기개,사랑,자애 등으로 가득 찬 원소와 그에 감화된 원소군 Vs 궁지에 몰린 채 투지와 악으로 가득 찬 조조군의 대결로 그려진다.
역시 조조 찬양으로 가득 찬 작품답게 관도대전 시작부터 조조의 신묘한 군략으로 안량과 문추를 처리하나, 원소는 이에 개의치 않는 왕이 될 자로서 기개[31]와 압도적인 물량으로 밀어붙인다. 워낙 조조군과 원소군 간의 전력에서부터 차이가 나다보니 조조가 장수들은 병졸로, 참모진들은 서기관으로 강등 시킨다.[32]
조조군을 물량공세로 밀어붙이던 원소군이었지만 삼남 원상부터 아버지 원소에 영향 받아 끝없는 긍정으로 기강이 해이 해졌으며, 큰 비로 인해 땅굴이 무너지고 강이 범람해 수송중이던 군량을 크게 잃으며 흔들리게 된다. 거기에 다시 조조군이 강등했던 장군과 군사들을 다시 복직 시키고 반격에 나서자 원소군은 장남 원담과 삼남 원상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이후 고시의 식량고가 불타자 원소군의 불안이 커졌고 이를 타계하고자 허유가 거짓으로 조조에게 투항해 오소로 유인하려 한다. 그러나 조조가 직접 3천 군사와 허유, 가후를 이끌고 오소를 야습해, 역시나 조조의 신묘한 계책과 이를 이해한 가후의 지략으로 3천 군사로 아무 피해 없이 순우경을 죽이고 오소를 접수한다. 이에 살아남은 오소의 원소군들이 조조에게 항복하지만 조조는 청주병들을 동원해 항복을 받지 않고 원소군을 모두 학살한다.
다음날 오소의 함락 소식이 원소군에게 알려졌으며 이에 삼남 원상은 업으로 퇴각을, 장남 원담은 역으로 총 공세를 건의하나 원소는 전쟁도 왕도도 승리도 사라진 하늘의 마음이라며 그냥 싱긋 웃고 말아버린다. 이에 원담과 원상 모두 할말을 잃어버렸다. 이때 순우경부터 오소에 있던 병사들과 소와 말의 머리까지 실어진 수레가 원소군 진영에 도착하며 동시에 사방에서 청주병들이 나타나 원소군을 포위하자 원소군 전체가 모두 멘붕해 버린다.
결국 이 싸움으로 원소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고 원담은 원소를 데리고 토굴을 통해 본영 아래까지 당도하나 토굴이 무너지고 그 위로 보이는 건 조조의 얼굴이었다. 이후 조조가 원소에게 국화로 보이는 꽃 한송이를 던져주고 원소가 그것을 받으려 하지만 꽃잎이 원소의 손안에서 흩어지고 이후 초토화된 원소의 본영에 말을 타고 있는 조조의 모습이 보여지면서 관도대전이 막을 내린다.[33]
그리고 창천항로 전권을 통틀어 무지막지하게 잔인한 장면이 수두룩하니 주의할 것. 예를 들자면 관도에서 역공하는 조조군의 피범벅이 된 모습이나, 순우경이 진군하는 조조군에 맞서 칼을 빼들고 싸우다가 입이 찢어지고 목이 잘려 내던져지고, 수만의 원소군이 인간을 포함해 가축까지 모조리 참수되어 불길과 함께 우마차에 실려진다. 국내판은 수정이 되어있는데도 섬뜩하다.
이후 원소군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나오지 않으며 잠시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한 유비의 이야기와 삼고초려로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이야기 후에 조조가 원소가 죽은 뒤[34] 건안 9년부터 11년까지 원소 북방의 4주를 정복했다고만 짧게 표현된다.
관도대전 이후에도 강성했던 원소 세력과 원소 세력을 조조가 흡수하기까지 걸린 오랜 세월과 과정 대한 묘사가 일절 없이 한 컷에 짧은 설명만으로 북방4주 정복을 묘사하여 마치 원소가 관도대전 직후 멸망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작품 내에서 삼국지 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 중 하나다. 하지만 이후 유비의 도피와 천하삼분지계의 이야기가 매우 비중 있고 임팩트 있게 묘사되는 걸 보면, 작가 입장에서는 관도대전 이후 유비의 성장과 조조-유비-손권의 3강 체제 성립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원소의 패망을 통째로 날려버린 듯ㅇ하다.[35]
애니메이션 판도 관도대전 '''중간에''' 끝나버린다. 조조가 문추를 낚아 죽인 것까지만 나오고, 이후 관우를 죽이려고 벼르던 장비와[36] 조조의 밑에서 심적 갈등을 겪으며 미쳐 날뛰던 관우가 서로 달려들고 유비가 말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나레이션으로 때워버리고 만다.

7.3. 화봉요원


화봉요원의 경우 수경팔기의 맏이인 원방이 조조 휘하의 사제 곽가, 가후, 순욱과 맞서는 상황이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연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조조군이 백마와 연진에서 선전했지만 이후 벌어진 야전에서 원방의 풍후팔진도 앞에 패배, 결국 관도에 틀어박혀 우주방어에 들어간다. 순욱이 부상 당하고 가후가 여남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기존의 모든 공성법을 총동원하는 원방을 상대로 곽가와 순유가 겨우 버티고 있는 판국. 조조군은 원방의 계략으로 인해 내부 곳곳에서 내통자가 드러나고 있고,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원방 또한 원가의 다른 후계자들의 견제를 받고 있어 양쪽 다 위태로운 상황이다.
한편 사마의는 자신의 동문인 허원을 통해,원방의 심복인 허유와 접선, 그의 전향을 유도하고 원방은 이를 역이용한 함정을 파는데…… 원방과 허유의 대사에 따르면, '''오소에 군량이 있다는 건 화계를 위한 함정이고 진짜 군량고는 고시에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관도대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고시 쪽이 함정이었다. 결국 원방은 허유를 버리는 말로 써서 함정을 파 조조를 유인한 것. 오소도 함정은 함정인데, '''원소와 그 세 아들을 위해 준비한 함정.''' 공 때문에 티격태격 하던 원담과 원상이 고시에서 철수해 오소로 몰려오고 때마침 원소가 시찰중이었는데, 뒤늦게 도착한 원희가 고시 쪽이 진짜 함정인 줄 모르고 오소에 모여있는 원소군이 자군으로 변장한 조조군이라 착각,'''자기 형제들과 아버지가 있는 오소에 화공을 가했다.''' 즉 원방은 고시와 오소 양쪽에 함정을 파서, 숙적 조조와 경쟁자인 형제들, 그리고 애비까지 날려버리려고 한 것이다. 원소가 원방더러 원가를 잡아먹고 커지라고 운을 뗀 적이 있긴 하지만, 원소 자신도 이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그리고 고시를 급습한 조조는 장료가 변장한 것이었다. 결국 원방이 예기치 못한 급습으로 죽고 관도대전은 원소측의 패배로 끝난다.

7.4. 삼국



삼국에서는 조조가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원소를 불러 회담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끈다. 조조는 원소에게 "형님"을 연발하며 비굴할 정도로 원소에게 저자세로 나오고 화친을 청하면서 '''황제헌제를 화친의 예물로서 전장에 데려오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데려온 궁녀들로 원소군 병사들과 장수들에게 술까지 대접하게 하기도 했지만, 이는 모두 조조의 계책. 원소는 신나서 황제로는 부족하다며 허도까지 내 놓으면 화친에 응해주겠다 한다. 원소가 낚이자 신난 조조는 더 비굴한 자세로 장단을 맞춰주고 한다.
그 사이에 해는 중천에서 내려오고, 조조는 저자세에서 갑자기 거만하게 걸터 앉아서 '내가 니라면 화친대신 관짝이나 하나 짜겠다! 왜냐면 내가 살아있는 한 내가 반드시 이기니까!'라고 원소를 비웃으며 진영으로 돌아간다. 이때 해맑은 표정으로 목을 돌리며 원소를 조롱한 후 뒤뚱 뒤뚱 돌아가는 개그씬은 덤. 햇빛이 원소군의 시야를 정면으로 맞게 되자, 원소군은 정면을 주시하기가 어려운 지경. 조조는 그동안 철기가 원소군의 배후로 돌아가 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해서 1차전을 승리로 이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조조의 목 돌리기가 등장. 중간에 궁녀들이 투입돼서 원소군 선두 기병들에게 술을 따라주는 장면들이 있는데 한국 더빙판(KBS)에서는 웬일인지 이 장면을 잘라 버렸다. 대신 1차전에서 패배한 원소가 이때의 조조의 계책을 말하는 장면에서 거론되긴 한다. 그러나 8화로 압축한 극장판에선 이 장면이 나온다.
이때 유비는 원소의 은혜를 갚고자 3천 군사를 끌고와 조조군의 추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준다. 덕분에 원소는 패잔병들을 규합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1차전에서 패했지만, 원소는 패잔병을 모아 40만 대군을 회복했고, 다시 조조와 일대 회전을 벌이려고 한다. 조조군은 군량이 다했고 더이상 싸움을 계속하기 어려울 지경. 그러나 배신해서 조조 진영으로 온 허유는 오소 군량 저장처를 알려주고, 조조는 이것이 진실임을 꿰뚫어보고 야습을 실시한다. 오소에 조조군이 기습해왔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묘안을 낸답시고 오소를 구원하는 대신 비어있는 조조 진채를 기습하지만 조조는 이것도 미리 예상하여 함정과 복병을 남겨두었고, 원소군은 이들에 의해 대패한다.
원소는 다시 도주하지만 허유가 숨겨놓은 복병에 걸려 다시 많은 군사를 잃었다. 후에 황하에 이르렀을 때 남겨진 병사는 100여 명이 안 된다는 것을 알자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이후의 원소의 죽음과 아들들의 내분 등의 긴 스토리는 모두 생략하고 원소가 죽은 후, 조조가 원소일가를 멸하고 4개 주를 평정했다고 나온다.

7.5. 영걸전 시리즈



7.5.1. 삼국지 영걸전


유비군이 직접 가세하지 않아서 관도대전에 참전할 일은 없지만,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잡으면서 유비가 원소에게 소환되는 이벤트가 구현되었다. 여기서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비가 사망하는 배드엔딩이 될 수도 있지만, 삼국지를 본 사람이라면 수월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물론 삼국지를 보지 않았거나 너무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안 나더라도 대사를 확확 스킵하는 타입이 아닌 이상은 살아남는다. 유비의 참모격인 손건이 원소를 독대하면 이렇게 답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기 때문.
이후 유비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곽도가 쫓아오는데, 여기서 조운과 재회하면서 가까스로 도망에 성공한다.

7.5.2. 삼국지 조조전


전투를 시작하기 전 허유[37]가 조조군에 투항하려 들고, 여기서 선택지에 따라 전투를 다양하게 진행할 수 있다.
역사대로 허유의 진언을 받아들여 군량고를 털고 순우경을 잡아죽이면 모든 적부대의 방어력이 감소하게 되어 쉽게 승리할 수 있고, 허유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공법으로 상대할 수도 있고, 허유를 처단한다를 선택하면 허유가 원소군 진영으로 되돌아가 조조군이 군량고를 노릴거라고 원소에게 보고하여 원소가 군량고에 적군 상당수를 보내게되어 원소의 본진이 허술해질때 빈집을 털어버릴 수도 있다. 허유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허유의 의견을 무시하고 정공법을 택할 경우 조조가 허유를 주군을 배신한 자라며 감옥에 가둔다. 또한 여기서는 고람이 사망설정으로 나온다.[38] 오소의 적을 공격하는 타이밍에 조조와 고람을 인접시켜 두면, 고람이 당황할 때 조조가 어딜 한눈 팔고 있냐며 칼을 휘둘러 고람을 죽인다. 일기토 없이 필드에서 바로 벌어지는 이벤트.
거대 결전답게 적벽대전이나 최종전의 웅장한 느낌의 bgm으로 선정되어 흘러나오는 첫 전투다.

7.6. 삼국지 시리즈


중요한 전투답게, 삼국지 6부터 이벤트로 구현되거나 파워업키트의 전투 캠페인으로 나오거나 하는 식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시나리오의 경우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이벤트빨을 안 받아도 조조가 더 유리한 경우가 흔하다. 안량과 문추가 이미 관우에게 죽었고 전풍이 옥에 갇혀 안 나온다면 상황은 더 절망적이다. 원소 진영으로 플레이할 시는 마등, 유표, 손책과의 연합을 잘 활용해야 한다. AI 원소 VS AI 조조간의 대결에서도 역사 이벤트만 꺼 놓으면 조조가 4컬러 러쉬를 받고 망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유비 세력은 관도대전 시나리오에선 아예 세력으로 안 나올수도 있고, 여남 하나만 차지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역사 이벤트를 거쳐서 여남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다. 예외로 삼국지 6에서는 장비가 여남에서 군주로 나온다.
삼국지 10에서는 이벤트로 중원지방에서 전역을 치르게 된다.[39] 전역 특성상 한쪽지방을 모두 점령할 때까지 하게 되는데, 원소군 입장에선 공격군이고 중원 지방의 영토라곤 이벤트 개시직후 공백지에서 원소군으로 편입되는 하내를 제외하면 영토상 손해는 없는데, 전역에서 이기면 조조의 영토는 장안 꼴랑 하나만 남게 된다. (연주의 복양, 진류, 서주의 소패, 하비, 예주의 허창, 사예의 낙양 총 6개.) 기본 전력차도 크지 않은 상황이라 승리하면 천자도 옹립하고 전역에서 이기면 해당 도시 장수들은 모두 포획되기때문에 천하는 원소꺼. 조조군 입장으론 불리한 상황이지만 조조와 허유(재수없으면 허유가 전역에 출진하지 않는다 그럼 난이도가 올라간다)를 인접시킨다음 관도(거점)에 가면 오소의 군량고를 태워버리고 장합, 고람의 항복으로 승리. 이후 계속 원소를 격파하고 원소 병사-원담과 원상이 대립하는 이벤트로 이어진다.
삼국지 11에서는 파워업키트의 결전제패 모드에 관도대전 본편이 구현되고, 콘솔판의 스테이지 시나리오에 전초전인 백마 전투가 나온다. 둘 다 담당 세력은 조조군, 관도대전은 일단 시작하면 병력이나 기력 모두 열세라서 전법이나 계략으로 적의 진군을 늦출 필요가 있는데, 적 수송대를 턴 다음 허유가 투항해 오소 군량고 (여기서는 복양 서쪽 끄트머리 땅에서 요새로 등장한다) 의 정보를 불어 파괴하는 데 성공하면 원소군 전원이 혼란에 빠진다. 이때 원소를 집중공략해 퇴각시키면 캠페인 클리어. 오소 기습용 별동대로는 사정 특기에 정란부대로 출전한 이전 부대가 적합하고, 오소 군량고 등장과 동시에 유비와 유벽과 조운이 복양을 노리고 북상하므로 수비부대로 남은 조인과 하후연의 배치에도 신경써야 한다. 백마 전투는 조조에게 잠시 의탁한 관우가 활약해 안량과 문추를 쳐부수는 내용인데, 창병이 전법을 쓸 수 없는 모래땅에 들어가지 않게끔 보조하며 그 둘만 깨뜨리면 클리어 할 수 있다.
삼국지 12에서는 관도대전 시나리오가 있으나… 안량, 문추가 시나리오 오프닝에서 전사하며 관우가 조조 진영에 있다.
삼국지 13은 게임특성상 전체적으로 조조가 더 유리하다. 장수의 질은 물론이거니와 초기 병력면에서도 조조가 앞선다. 게다가 주변에 빈땅이 많아서 이후 병력 동원에서도 유리해진다. 특이사항으로는 관우가 조조 진영에 있고 유비는 원소진영에 있다. 하지만 유비의 충성도가 낮아서 그런지 이벤트를 보지 않게 하면 순식간에 조조진영으로 스카웃된 유비를 볼 수 있고 또 장비와 조운이 조조 땅에 있기때문에 자동적으로 등용되어서 최강 장수진영을 구축하는 조조군을 볼수 있다. 이벤트를 진행하면 유비 휘하 장수들은 여남으로 독립한다.

7.7. 진삼국무쌍 시리즈


보통 시나리오 초 ~ 중반에 끼어 있는 전투라 난이도는 별로 높지 않다. 조조를 한없이 띄어 주는 한편 원소를 반비례하게 가문의 영광에 집착하는 꼴통으로 까내리는게 특징이다.
진삼국무쌍 2에서는 조조군 시나리오면 목표가 되는 원소군의 식량고 4개중 하나만이 진짜고 할때마다 랜덤이라는 특이한 요소가 있다. 또한 원소군 시나리오에서 서황 소속 클론 무장 사환의 모델링이 장군급도 아닌 일반 병졸이라는 괴현상이 있다. 잡졸들 잡다 그 잡졸들 사이에 섞인 사환이 이미 죽어있어서 "적장을 해치웠다!" 가 떠버렸다는 황당한 사태를 겪어본 유저가 적지 않았으리라. 맹장전에서는 제대로 장군 모델링을 줬지만.
진삼국무쌍 3의 경우 연의 재현도가 매우 높은 것이 특징. (조조군 시나리오 기준.) 안량에 의해 백마 고전 → 관우가 안량 격파 → 문추에 의해 연진 고전 → 관우가 문추 격파 → 관우가 유비를 확인하고 전선 이탈 → 원소군의 총공격으로 조조군 후퇴 → 오소 격파로 역전의 완벽한 라인. 처음에 오소가 있는 북서쪽 위치는 텅 비어 있다가, 만총이 지키는 연진, 혹은 우금이 지키는 백마 중 한 곳이 함락된 후 조조군이 관도성으로 철수하여 수비하고 있다 보면 원소군의 충차대가 관도성 파괴를 위해 등장하고 오소 자리에 순우경 부대가 나타난다. 안량, 문추를 잡고 백마와 연진을 수비해 낸 후 진군하거나, 만약 백마나 연진이 함락된다면 관도성으로 오는 원소군의 충차를 막아낸 뒤에 오소를 공략하면 승리로 연결할 수 있다. 단 조조군 1회차의 경우 반드시 충차 출현 이후 오소 공략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장합이 조조군으로 투항하는 이벤트가 발생하기 때문. (안 해도 적벽전투 클리어 이후 합류하긴 한다.) 오소 공략시 본진에 있던 조조가 직접 나가는데, 조조가 오소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면 일반적으로 관도성이 붕괴된다. 플레이어가 빨리 순우경 및 원군으로 오는 여위광을 잡아줘야 한다. 프리 모드에서는 해당이 안 되지만 무쌍 모드일 경우 하비 전투를 클리어하지 않고 관도 전투를 선택하면 여포가 난입해 조조에게 뒷치기를 가한다. 이는 3편 무쌍 모드 특징인 특정 전투를 클리어하지 않았거나 다른 전투를 먼저 클리어했느냐에 따른 변화 요소 때문이다.
원소군 시나리오에서는 오소의 순우경 부대가 처음부터 등장하고, 관우가 안량과 문추의 목을 받고 나서도 다른 장수들까지 잡으러 다닌다. 보통 문추 근처에 있는 원상까지는 그냥 잡혀버린다.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직접 격파하는 조조군 시나리오와 달리 이쪽은 이벤트 취급이라 조우 후 시간 조금 지나면 그 무장이 자동으로 죽는다. 이를 멈추는 방법은 유비와 접근시키는 것. 그게 아니면 직접 격파해야하는데 이때의 관우는 호로관 메뚜기급으로 강회된 상태인지라 충분히 키워놓은 캐릭터가 아니면 좀 버겁다. 물론 3의 관우는 통상타+무쌍난무만 좋은 캐릭터라 메뚜기보단 훨씬 쉽지만… 웬만하면 그냥 놔두자. 관우와 아예 만나지 않으면 99%로 원상까지만 잡고 빠진다. 이후에는 연진과 백마를 함락시킨 후 밀어붙이면 승리는 어렵지 않다. 중간에 오소 기습대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어렵지 않게 격퇴가 가능. 한가지 재밌는 건, 프리모드에서 원소군으로 플레이할 때 오소 함락 이벤트가 뜨면 장합이 배신한다는 점이다.
진삼국무쌍 4에서는 맵 좌우 양쪽에 백마와 연진이 거점으로 준비되어 있고 중앙에는 원소군의 병량고 오소가 있다. 나름 맵도 큰 편이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할 필요가 있는 전투이다. 안량과 문추가 원소군에 있지만 둘 다 관우에게 당한다. 3편에서는 일반 전투이지만 이번에는 이벤트로 처리되어 그야말로 광속 끔살된다. 관우는 두 명을 베고 조조의 은혜를 갚았다고 말하고 나서 후방으로 빠진다. 유비와 관우가 만나면 각자 후방으로 빠진다. 한쪽이 격파당하면 다른 한쪽은 전장을 이탈한다.
원소군 시점에서는 일단 재빨리 관우를 잡아내야 한다. 백마성 쪽에서부터 안량을 향하여 진격하는 관우를 안량이 다치기 전에 잡아내고 곧바로 유연을 격파하여 백마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하후돈 부대 앞의 방어거점인 연진을 떨어뜨리면 그 뒤는 파죽지세이다. 관도성 앞에 출현하는 아군 정란을 지키면서 기다리다가 성문이 열리면 진격하여 역적 조조에게 명문 원가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자. 참고로 이게 원소의 '''유니크 무기'''얻는 조건이다. 정확히 안량과 문추가 견제할때 관도성을 함락시키는 조건이다. 근데 정작 조조군은 유니크 무기얻는 무장이 없다.
조조군 시점에서는 왠지 관우가 안량만 잡고 유비와 만나 물러난다. 어찌 보면 정사를 따른 것일수도 있겠는데 원소군 시나리오에서는 관우가 안량을 격파하면 문추가 관우에게 돌격했다가 끔살당한다… 총대장 조조가 시작부터 백마 쪽에 나가 있는데, 관우가 안량을 격파한 뒤부터 백마쪽은 크게 신경써줄 필요 없다. 가만 놔두면 조조가 50명 격파했다는 메시지가 곧잘 들려온다. 다만 중앙의 연진이나 관도성 서문쪽은 적군의 부대 수가 많고 사기도 전반적으로 높아서 한쪽을 막고 있다 보면 다른 한쪽이 뚫려 약간 힘들 수도. 연진이나 백마가 적군에게 떨어지고 원소군이 관도성 쪽으로 진입하면 관도성 앞에 원소군의 정란이 나타난다. 공세를 막아내며 오소가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공략하여 기세를 반전시키자. 순우경을 격파하여 오소를 함락시키면 장합 부대가 아군으로 투항해 온다. (대사가 가관이다. "원소님의 멋없음은 참을 수 없어요"…) 오소가 열리기 전에 백마와 연진 양쪽이 모두 함락되면 원소군 전군이 진군해 오므로 원소 부대를 노려 격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기에서 밀리기 때문에 신속히 움직이지 않으면 아군이 차례차례 격파당하여 패배하고 만다.
진삼국무쌍 5에서는 조조측과 여포측으로 플레이 가능하다.
조조측으로 시작하면 백마와 연진이 북쪽에 나란히 거점으로 준비되어 있다. 원소는 엄청난 물량빨로 백마와 연진 양쪽 동시에 무장들을 보내기 때문에 거점 두 곳 모두 지키기가 빡세다. 안량과 문추는 백마와 연진에 따로따로 달려오는데 전작만큼의 호구가 아니라 버프를 걸고 나오기 때문에 데미지가 상당히 아프고, 순차적으로 줄줄히 따라오는 무장에 무장과 동급인 부장들도 섞여서 레벨을 충분히 올려두지 않았으면 여러모로 골치 아프다. 한쪽을 지키다가 다른 한쪽이 점거 되기 일수다.[40]
백마나 연진 둘 중 하나를 뺏기거나 관도성의 성문 2군데가 모두 공격받기 시작하면 조조군은 일단 퇴각하고 공성전이 시작된다. 그와 함께 원소군은 원래 본진에서 나와 앞쪽에 있는 거점으로 본진을 옮겨 오소의 방비가 떨어지게된다. 공성전에서 관도를 노리는 적을 모두 처리하고 원래 본진에 나 있는 뒷길로 잠입해 남은 소수의 병력을 기습하면 본진 식량고에 불이 붙고 원소군은 사기가 떨어져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게 된다. 견희가 뒷길에서 오는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지만[41] 혼자라 별 문제가 없는데다가 그냥 상대하지 않고 쌩까고 지나가버리면 그만이다. 식량고가 불타면서 클론 무장인 허유와 고람과 함께 장합이 조조군으로 배신해온다. 원소가 식량고가 불타버린 정도로는 원가의 장병들은 지지않는다고 허세를 부리는것과는 다르게 이 이후로는 큰 문제가 없어 여유롭게 클리어 가능하다.
만약 안량과 문추를 털어버리고 백마와 연진을 지켜내도, 빙 둘러온 원소군이 관도를 노리기 때문에 돌아와서 공성전을 하게된다. 공성전에서 적을 처리하면 그 뒤론 일사천리. 마찬가지로 원소가 오소에서 나와 이동함으로 뒷길로 화공이벤트를 발생시킬수 있지만 백마와 연진을 지켜내고 공성전까지 완수했다면 '''원소군의 장수들이 거의 전멸에 가까움으로''' 화공이벤트를 보지 않고 그대로 원소에게 돌격해서 털어버려도 된다. 물론 화공이벤트를 진행시키면 냅둬도 원소가 알아서 털릴 정도로 더 쉬워진다. 이 쯤되면 고람과 장합 배반이벤트를 보기도 어려운데 아군의 사기가 너무 높아서 수라 난이도에서도 플레이어가 손을 쓰지 않아도 화공이벤트 전에 둘이 먼저 털려버린다. (허유는 뒷쪽에 있기 때문에 종종 그때까지 살아남는다.) 다만 주의할 점은 공성전 시작 전후에 원소가 백마와 연진으로 직접 행차하는데 너무 꾸물대다간 기껏 지켜놓은 백마나 연진이 원소에게 점거당해 전공 목표를 놓치는 경우가 있다.
조조군 관우로 플레이 할 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투가 끝나고나서야 유비를 찾아 떠나지만 관우가 CPU일 때는 성 앞에서 방어에만 열중하다가 공성전이 끝나고 조조군이 반격할때 같이 돌격하여 이벤트로 안량, 문추를 끔살한 후 전장에서 이탈. 따라서 그전에 둘 중 하나를 플레이어가 처치 하지 못하면 전공목표 한개를 놓치게 된다. 공성전이 끝날때까지 안량과 문추가 살아있다면 백마와 연진은 이미 함락되어 목표를 하나 놓친 후겠지만…
그런데 '''전공목표를 싸그리 무시하면 의외로 간단해서''' 이전 전투에서 잘 키워 놓았으면 시작하자마자 그냥 좌측으로 빠져서 거기 있는 장수 몇명만 없애버리고 가면 몇 분 안돼서 원소군 본진 도착하고 거기서 순식간에 원소 없애고 클리어 가능하다. '''단 몇 분 만에.''' (단 잘 키워놨어도 본진에 장수들이 워낙 많아서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제갈량 같이 화계 전서를 가지고 있는 장수로 한다면 냅다 직접 불을 질러 쉽게 털어줄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렇게 직접 불을 지르는 것은 화공 이벤트 발동으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여포군 시나리오는 조조와 원소가 싸우는 전장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썰고 다닌다는 아스트랄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 쪽 스테이지는 그냥 모든 적군을 썰어버리면 되는 단순한 시나리오. 처음에는 여포의 난입에 당황하던 조조와 원소가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동맹을 맺어 여포에 대적하지만 결국 둘 다 박살난다. 15분 내로 백마와 연진을 점거하는 것만 빼면 시간 압박 없이 쾌적한 학살(?)을 벌일 수 있다.
진삼국무쌍 6에서는 위 시나리오와 촉 시나리오에 등장. 촉 시나리오때는 관우가 안량, 문추를 죽이고 난뒤 유비가 원소의 의심을 받아 '''원소군과 조조군 모두 다 적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비를 호위해 관도를 빠져나가는 것이 목표. 딴 짓 생각하지 말고 유비 곁만 지키자. 제일 쉬운 천국 난이도조차 무공 좀 벌어보겠다고 무장 2~3명 치다보면 유비는 끔살 당해 미션 실패가 된다.
진삼국무쌍 7에서도 위와 촉 시나리오에 등장. 위 시나리오는 조조가 원소를 무너트린 후 천하로 나아가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묘사를 하며, 촉은 서주 방위전에서 특정 조건을 실패하면 '관도 요란전'이라는 외전 시나리오를 진행. 6편처럼 삼형제는 물론 조운까지 만나 같이 행보를 하게 되는 전개다.
진삼국무쌍 8에서도 당연히 등장. 원소 스토리 모드에서는 서주에서 조조에게 패해 원소에게 망명하는 유비를 자객들로부터 지켜내는 전투, 어릴 적 조조와 친했던 것을 언급하면서 옛정을 버리고 조조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대화 이벤트 후 관도대전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백마 연진 전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캐릭터가 최전성기 시점 혹은 죽기 직전에서 어중간한 열린 결말로 끝을 내리는 본작인지라 백마 연진 전투에서 기선을 잡고 관도대전을 준비한다는 걸로 끝나 원소군 입장에서 관도대전을 플레이하는 건 이번에도 없다.

7.8. 삼국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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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유비를 토벌한 직후 원소의 진영에서 지구전을 주장하는 전풍저수 그리고 전면전을 주장하는 곽도와 신평, 신비 형제가 대립한 끝에 원소가 얀량을 선봉으로 백마에 진격시키면서 백마전투가 발발한다.
조조는 곽가, 순유, 유엽을 통해 백마에 편성할 수 있는 병력을 확인하고 백마를 향해 이동한다. 이동 중 순유의 제안에 따라 하후돈을 연진으로 보내 안량의 군 비율을 줄이지만 안량이 송헌, 위속을 베고 서황을 패퇴시키면서 고민하게 된다. 이에 관우가 자청하여 나서길 원하자 안량을 이길 수 있을지 기대와 걱정을 하는데, 장료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조조는 이를 수락한다.
장료가 안량에게 돌진해 들어오자 안량은 이를 가볍게 막아내는데, 장료가 덤빈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니타나 안량의 목을 벤다.
안량의 죽음으로 순우경의 지휘 아래 원소군은 백마에서 후퇴하지만, 유엽의 간언에 따라 조조는 백마의 백성을 이주시킨다. 안량의 죽음으로 분노한 원소에게 유비가 죽을 뻔하지만 일단 위기를 넘기고 문추와 함께 연진으로 진군한다. 허나 문추는 순유의 치중대를 선두에 놓는 계략에 걸리고 하후돈의 부대에게 큰 위기를 맞게 되고 서황에 의해 죽게 된다.
유비는 살아돌아온 뒤 관우가 조조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원소에게 관우를 데려오겠다고 제안한다.
본격적인 대전에서 원소가 70만 대군을 이끌고 첫 서전에 선두에 나서자 조조는 허저의 중장보병과 장료의 기병으로 원소의 목을 따올 것을 계획하고 허저와 장료를 출격시킨다. 허나 장료는 장합, 허저는 고람에게 저지된 뒤 포위되어 부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한다. 이 때, 하후돈이 청주병을 이끌고 장료와 허저를 구출한 뒤 그대로 원소를 향해 돌격. 견초와 한맹이 막아서지만 이를 돌파하고, 뒤 따라온 장합을 장료가 저지해주면서 하후돈은 원소 바로 앞에 접근하여 창을 던져 원소에게 부상을 입힌다. 하후돈은 간신히 살아돌아온다.
심배의 공성에 위기를 맞지만 유엽의 대책 덕분에 위기를 넘긴다. 우금악진이 최전방에서 분투하고 서황과 사환이 한맹을 죽이고, 보급을 치지만 원소가 흔들리지 않자 조조는 허도로 후퇴를 고려하지만 순욱의 진언에 따라 항전을 결의한다. 그리고 허유가 투항한 뒤 오소의 위치를 가르쳐주자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격. 장기로 변장한 뒤 오소의 경비병들의 의심을 풀고 들어가 오소의 군량을 모두 불태운다.[42] 거기다 오소가 불탄 책임을 곽도가 장합이 태업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탓에 장합과 고람은 조홍에게 투항한다. 이 여파로 원소는 조조에게 관도대전에서 대패한다.
정사를 많이 반영한 덕분에 굉장히 스펙타클한 진행을 보여준다. 역대 창작물 중에서 가장 화려한 관도대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삼국전투기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대목이다.

7.9. 토탈 워: 삼국


'갈라진 운명' 챕터팩 DLC로 2021년 3월 11일 추가되었으며 주인공이 원소와 조조인 만큼 유니크 무장, 고유 병종, 신규 시스템이 추가되었고 이 두 팩션만 사용할 수 있는 북방군이 추가되었다.

[1] 중도 이탈[2] 중도 이탈[3] 후방에서 식량을 조달했다.[4] 정확히는 후술하겠지만 관도대전보다는 관도대전을 포함해 벌어진 원씨와의 경쟁을 통틀어 그렇게 봐야 한다.[5] 거기에 하필 조조가 낀 그 천자가 원소가 혐오하고 개무시했던 헌제 유협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원소는 "유협은 역적 동탁적법한 황제를 폐위하고 떠밀어 앉힌 괴뢰 황제"라 주장하며 유협의 정통성을 부정하였고, 아예 황실 종친 유우를 대립황제로 추대하려는 시도도 했었다. 정작 그 유우가 추대를 거부하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후일 이는 끝내 원소가 명분에서 한 끗발 이상 밀리는 원인이 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원소는 유협을 정통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고, 조조는 그 유협을 자신이 행세하는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원소에게 '''유협이 황제로서 공인한''' 관직을 '''하사'''하는 모양새를 냈다. 이는 조조가 원소를 대놓고 도발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6] 그나마 이 지방의 군벌 출신인 장패가 적극적으로 조조를 따라서 수비에 임했기 때문에 서주가 원소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장패의 활약에 더해서 서주 출신의 호족인 진등이 조조를 지지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7] 실제로 원소가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던 것은 유비를 받아들인 직후이며 유비가 온다는 소식에 업성에서 이백 리 밖까지 몸소 나와 맞이하며 마음을 기울여 극진히 예우했다는 기록을 보면 원소가 조조 정벌의 대의명분을 마련해줄 유비의 영입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8] 원소군의 군량을 말아먹은 순우경 부대의 규모가 작고, 그 사건으로 원소가 몰린 걸 생각하면 그런 대로 일리가 있다. 조조 본인이 황제에게 올리는 공문서에 원소군을 죽인 게 7만이라고 언급하고 각종 사서에서도 원소군 손실을 일관되게 7, 8만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말이다.[9] 한편 백마에서 안량을 참살했고 원소의 제장이 대적하지 못해 마침내 포위를 풀었던 관우가 유비에게로 돌아갔다.[10] 한편 손책은 조조가 원소와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허도를 기습할 것을 모의했으나, 출발하기 전에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11]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는 2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꼭 끼워맞출 수 있는 사항인지는 애매하다. 다만, 원소는 관도대전 때부터 이미 오랫동안 이어진 독재 체제의 1인자에게 집중되는 스트레스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보는 의견이 많은 편이다.[12] 조조 본인의 기록을 인용한 자치통감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7만이다.[13] 최소 수만 명 ~ 최대 8만 명 손실, 이릉대전은 관도 대전과 달리 확실한 피해 상황이 기록마다 달라서 아주 정확하진 않다.[14] 덕분에 유비 사후 제갈량은 전방을 믿고 맡길 인재가 없어서 매번 후방을 비우고 자기가 직접 뛰어야 했다. 저들 중 하나라도 살아서 참전했으면 이릉에서의 참패는 없었겠지만[15] 대중적인 삼국지 매체에서 이것이 조조가 원소보다 뛰어난 인물임을 추켜세워주는 묘사로 해석하는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관도대전 이후에도 양 세력의 파워가 어땠는지를 나타내는 일화로도 해석할 수 있다.[16] 한중공방전에서 패배 후 법정의 책략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면 그렇지 유비가 잘한 게 아니라 법정덕에 이긴 거다 라고 하고 물러난 정사 기록 등 여러 기록에서 조조는 패배 후 뒤끝이 있는 성격이었다.[17] 진수는 완전히 중립 입장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조조뿐만 아니라 사마의의 패배도 고의로 누락한 모습이 자주 보인다.[18] 세력의 대립 구도와 전쟁의 결과만 보면 "질래야 질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점에서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 물론 원소의 타격이 더 크긴 했지만,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강대했으며, 이게 원소 멸망에 결정타가 된 것도 아니다. 또한 적벽대전 이후 유비와 손권의 네임밸류가 상승한 것처럼 관도대전 이후 "천하의 원소를 패배시킨" 조조의 명성이 (예전보다도) 더욱 커진 만큼 의미가 크기도 했다. 그러나 원소와 조조 둘 다 패배 이후에도 건재하긴 했지만, 원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사망하고 후계 문제로 세력이 멸망하고 말았으며, 조조는 이런 일이 없이 계속 위용을 떨쳤으니 관도대전이 원소 멸망의 결정타로 여겨지는 것이다.[19] 두 문단이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모순된 독재자 스타일 지도자의 성격을 보여준다.[20] 본 항목을 비롯하여 인터넷에는 '''원소의 지능이 낮다'''라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비방이 자주 나오지만, 더 확실히 정리하자면 당시 곽도를 중심으로 원소의 핵심적인 참모들이 부패하여 나타난 한계로서 분석할 수 있다. 곽도에 대한 편애로 일어난 폐해는 관도대전 전후로 상당한 기록에서 교차적으로 검증되며, 후반기의 대부분의 실책이 특정한 참모들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독재주의 특유의 체제가 보여준 한계에서 비롯되었다.[21] 깊이 따지고 들면 몇몇 비슷한 사례는 있지만, 중요한 위기 상황에 이렇게 심각하게 부각된 일은 없었다.[22] 이 인간은 아예 의도적으로 조장했다.[23] 이 관점은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케다 신겐이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과도 매우 비슷하다. 뭐 신겐은 막판에 거하게 말아먹은 원소와 달리 죽기 전까지 오다-도쿠가와를 몰아붙였다는 차이점이 있고, 세력 면에선 원소가 압도적이었다는 차이점도 있으니 세세하게 살피면 다른 점도 많긴 한데 급격한 세력 확장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움직이던 체제, 그리고 사후 붕괴 과정까지 유사점도 상당히 있다.[24] 다케다 신겐은 원래 온갖 세력과 동맹을 맺어 그 맹주로서 오다-도쿠가와 연합을 공격한 거지 국력만 놓고 보면 다케다는 오다의 상대가 아니었다.(오다의 국력이 다케다의 약 2배 정도.) 다케다가 맞선 곳은 도쿠가와였는데 이는 오다를 아사이나 아사쿠라 같은 동맹들이 맡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반대로 도쿠가와는 전투력은 높았지만 오다의 지원을 받지 못해 다케다의 공격에 취약했다.[25] 여담으로 유표는 관도 이후에 하북에서 조조가 놀 때 반조조 세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비를 조조와 맞서기 위한 세력 결집용 카드+조조를 적대하는 입장상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대 조조용 결전병기(?)로 데리고 있어야 했는데 막상 유비를 데리고 있음에도 원소와 달리 유비가 세력을 키울까봐 유비를 이용해 조조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계자 유종은 무기력하게 유표 사후 항복하고 남은 세력 일부는 조조에게, 다른 나머지는 유비에게 흡수된다. 이렇게 유표는 협천자에 대항할 명분을 쥐고서도 활용하지 못했다.[26] 물론 이런다고 바로 각지의 군벌들이 원소에게 우르르 호응하진 않았다. 다른 군벌 입장선 원소가 어차피 압도중이기에 지금 붙나 나중에 이긴 쪽에 붙나 큰 차이가 없다. 자기가 할 일이 별로 없고 굳이 위험 무릅쓰고 먼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조조가 잘 싸우고 잔인한 놈이기도 하고, 어차피 나중에 '''황제 되찾으신 대장군 원소'''한테 숙여도 늦는 거 아니니까.[27] 임준전에서는 임준이 담당한 보급로를 습격한 이들을 두고 '賊'이라고 쓰고 있는데 혹은 보급선을 끊기 위한 원소군을 뜻한다고도 보여진다.[28] 실제로 조조는 이 두 명에다가 이후의 사마의까지 더해 망탁조의라 불리며 역적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다.[29]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경우는 등장인물의 대사 정도는 해주었지만 이 경우는 그런거 없다.[30] 원소의 경우 이학인씨가 사망하자마자 황제병에 걸려 돼지 같은 체형이 되며, 서황이 도망치기 바쁠 정도로 강력했던 원소군의 묘사도 오합지졸로 묘사되는 등.[31] 안량과 문추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풍악과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는 원소군의 모습으로 표현된다.[32]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 시키고, 장수들로 하여금 병졸들의 입장과 생존 의지를 느끼게 하기 위한 조치로 표현된다. 장수진들 중 불평불만에 가득 찼던 이들에 비해 하후돈은 병사들에 녹아들면서 일반병의 시점에서 본 전선의 공포를 체감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으로 기병 돌격을 맞은 병사들의 시점으로 본 적 기병이 저리도 컸었나 놀라는 모습이 있다.[33] 이때 조조가 한 말이 의미심장하다 "원소여! 난세에 핀 거대한 꽃이여! 단 한송이 꽃으로 하늘에 오르도록 하라. 지상에 있는 자는 그 꽃의 향기로움을 맡을 수도 그 화려함을 아낄 수도 없다. 잘가거라 원소." 원소가 절대적인 힘이 아닌 자신의 피로써 천자에 도달하려 한다는 것과 "위정자가 바뀌어도 천하는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로 비추어 볼 때 원소가 이룩한 천하에는 백성들을 포함한 지상에 사는 모든 자들은 그 천하의 향기로움을 맡을 수 없다 라는 뜻이다.[34] 이때 원소가 병사(病死)했다고 하는 걸 보면 관도대전 끝의 토굴에서 사망하는 게 아닌 듯하다.[35] 관도대전 중간에 이학인이 별세하여 이런 마무리는 어찌보면 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학인이 죽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생전에 남긴 이야기의 틀만 가지고 마무리를 지은 작가가 대단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니면 의외로 본래 구성도 별 차이가 없을 수 있는데, 창천항로가 조조 찬양 일대기 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작품 내 유비에 대한 비중도 조조 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36] 당시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괴물탈을 쓰곤 안량을 참했는데, 장비는 바로 뒤에서 관우를 보고 그를 알아챘다. 이때는 달려들던 중 유비가 말려 싸우지 않았지만, 그가 배신했다 여겼다.[37] 출전 전에 정욱이 원소군에 조조와 동향인 허유라는 사람이 있는데 알고 있냐고 묻지만 조조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대답한다. 조조전이 조조가 주인공인 영웅담이 주제다 보니 조조가 허유의 배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리기 껄끄러웠던 모양.[38] 엄밀히는 조조전에서 기존의 영걸전과 비슷한 인재 수를 유지해야 하는데, '''실제 역사상에서도 조조 휘하의 장수가 썩어넘치는 바람에''' 밸런스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실제로 조조에게 투항한 장수 몇몇까지 싸그리 사망처리 시켜버렸다. 장패가 하나의 예시이며, 고람도 그에 속한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했음에도 완성을 다스리는 일을 계속한다는 설정 때문인지 사망처리 되지 않았다. 물론 이 경우 장수를 사망처리 시키면 가후가 아군의 합류하는 스토리도 비틀어야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39] 플레이어가 윈소일 시 본인이 할지, 안 할지 정할 수 있다. 그 외라면 당연히 역사대로 발동한다. 이때 웬만하면 여남의 유비는 원소의 편에 들어 조조를 적대한다.[40] 백마와 연진을 뺏기도록 내버려두는 쪽이 전개가 더 쉽지만 두 거점을 뺏기면 안된다는 전공목표가 있기에 전공목표 완수를 노린다면 특히 힘들게 된다. 이때는 일단 오른쪽의 백마로 가서 적을 성채 밖으로 끌어낸 후 원담까지 날리고 바로 왼쪽 연진으로 가서 다 죽이고 함락 직전의 위기에 있는 백마를 다시 구하러 와야 한다;; 원샷원킬이 아니면 깨는게 불가능. 참고로 왼쪽의 연진부터 가도 되긴 하지만 백마 쪽에 무쌍게이지와 연무게이지를 풀로 채워주는 화타고가 있기때문에 흔히 백마로 먼저 간다. 안그래도 빨랑빨랑 적을 처리해야되니까 화타고는 꼭 먹고 시작하는게 좋다.[41] 꼭 뒷길이 아니라도 오소 본진 가까이에 가면 등장한다.[42] 이 과정에서 서황은 조예, 우금은 여위황, 장료는 한거자, 허저는 목원진, 악진이 순우경을 참하고, 뒤늦게 온 장기의 지원군을 하후돈이 청주병과 함게 전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