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사카 큐베에
早坂久兵衛 (はやさか きゅうべい) 1888년 12월 16일 - 1946년 1월 6일
1. 소개
한국, 일본의 가톨릭 성직자, 세례명은 이레네오이다.
가톨릭 센다이 교구에서 사목하다가, 1942년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3대 교구장이 되었다. 해방 후 대구교구장직을 사임하고 대구시에 머물던 중 선종했다. 일본인 최초의 주교인 하야사카 큐노스케 야누아리오의 동생이기도 하다.
2. 생애
1888년 12월 16일 미야기 현 센다이 시에서 태어나 1898년 3월 센다이 모토테라고지 소학교를 졸업, 1902년 3월에 센다이시 히가시니반쵸 고등소학교를 졸업, 1907년 3월에 도호쿠 중학교 졸업. 1907년 9월 제2고등학교[1] 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문과를 졸업했다.
1910년 11월 이탈리아 로마의 프로파간다 대학에 입학하여 1915년 5월 29일에 같은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일본 귀국 후 1916년 6월에 미야기 현 오오카와라 본당 주임 신부가 되고, 1923년 6월에 센다이시 모토테라고지 본당에 부임했다. 1927년 3월에 센다이시 츠노고로쵸 본당 주임, 1931년 9월에 이와테 현 모리오카 본당 주임, 그리고 1940년 6월에 센다이시 타타미야쵸 본당 주임이 되었다. 1941년 12월에는 센다이 교구의 회계를 담당했다. 1942년 1월, 센다이 교구장 서리와 센다이시 타타미야쵸 본당 주임을 겸임했다.
1942년 8월 30일 조선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에 임명되어 동년 10월 8일 대구대교구에 부임했다. 같은 해 11월 10일 대구대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동년 12월 25일 주교 서품을 받았다. 하야사카 주교가 사제 생활 동안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조선의 대구 지역의 주교가 된 것은 순전히 일본 정부의 의도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대구대교구와 광주대교구의 책임자로 일본인 성직자가 임명된 것은 조선 가톨릭 교회를 일본 당국의 손아귀에 두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주교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안되어 하야사카 주교는 결핵성 늑막염에 걸렸다. 그는 어느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자기에 주어진 일을 제대로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전임자였던 프랑스인 무셰 주교에게 사제 서품식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도 되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끝끝내 하여 병을 악화시킨 일은 어떤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하야사카 주교의 부임으로 교구의 영향력이 약화된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하야사카 주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한편 하야사카 주교는 1943년 정읍본당 주임으로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로 1930년대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던 고군삼 베네딕토 신부[2] 를 본당 재정의 장부 정리 미숙 등의 이유로 서품을 무효화했다. 당시 교회법정의 기록이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하야사카 주교를 통한 일본 당국의 개입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군삼 신부는 이후 정선에 독신으로 은거하며 평신도 사도 활동을 하다 1980년 선종하였고, 끝내 복권되지 못하였다.
하야사카 주교는 1945년 일본 패전 후 교구장을 사임하였다. 지병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주교는 1946년 1월 7일 대구 수도원의 병원에서 선종하였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