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센주로

 



'''
일본 제국 제33대 내각총리대신
하야시 센주로
林銑十郎 | Hayashi Senjūrō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76년 2월 23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사망'''
1943년 2월 4일 (향년 66세)
도쿄부 도쿄시 (現 도쿄도)
'''재임기간'''
제33대 내각총리대신
1937년 2월 2일 ~ 1937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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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하야시 하쯔지
'''학력'''
육군대학교 (17기)
'''정당'''

'''약력'''
제27대 육군대학교
제23대 근위사단장
제9대 조선군 사령관
제14대 육군교육총감
제39-40대 육군대신
제53대 외무대신
제46대 문부대신
제33대 내각총리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8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97년 ~ 1936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러일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이전
2.2. 총리 이후
3. 여담
4. 주요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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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인, 정치가, 33대 내각총리대신. 일명 '''먹튀 내각'''의 수장. 육군대장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조선군 사령관으로 있던 사람인데,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어 통제파의 지지를 받으며 황도파의 거두였던 교육총감 마사키 진자부로를 잘라버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2.26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

2. 생애



2.1. 총리 이전


33대 총리 취임 후
1876년 2월 23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난 하야시는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를 중퇴하고 사관후보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8기로 졸업한 후 1903년에 육군대학 제 17기로 졸업했다. 1905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참여하여 뤼순 공략전에 참가한 하야시는 이후 육군대학 교장, 근위사단장, 조선군 사령관을 거쳐 육군대신으로 일하다가 1937년에 총리가 되었다.
만주사변 당시 조선군 수비대를 독단적으로 만주에 파견했고 이로 인해 센주로에게는 "월경장군"이란 별명이 늘 따라 다녔다. 그는 수염을 멋지게 기르고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성격은 좋았고, 담배와 당구를 즐겼지만 술은 심지어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그가 수상일 당시 내각은 여러 가지 악평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하야시는 평소 자신의 주변에 모인 강경파의 말만 들었기 때문에 군부 혁신파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원래부터 총리감으로 거론되던 양반은 아니었고, 또 나이도 있어 본인은 별로 총리직을 내켜하지 않았었는데, 당시 총리로 임명될 예정이었던 전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에 대해서 불신이 깊었던 육군 소장파는 우가키의 조각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우가키는 과거 우가키 군축을 주도하여 군부에 원한을 많이 샀으며, 3월 사건을 통해서 쿠데타를 도모하다가 조각의 대명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자 발을 빼는 행보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군 소장파는 우가키가 덴노 일가와 원로들에게 휘둘릴 것이라고 그를 반대했다. 이에 이시와라 간지를 중심으로 우가키 반대 공작이 실행되었다. 이시와라는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상에게 절대로 우가키를 위한 신임 육상을 추천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결국 우가키는 육상을 구하지 못해서 조각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우가키가 몇년만 더 일찍 임명되었으면 예비역, 후비역까지도 육상에 임명될 수 있는 조항을 이용해서 억지로 수상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히로타 고키 내각 때 현역대장이 군부대신에 임명되는 조항이 부활되는 통에 군부의 협조 없이 우가키가 조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일본군정계에서 근성가이로 이름 높았던 우가키가 조선군 사령관 고이소 구니아키를 육상으로 초빙하는 등 인맥을 총동원해서 저항하자[1], 헌병감이 찾아와 '''"그러면 님 내각에서 일할 육군대신은 없음 ㅋ"'''이라고 대놓고 협박했고 결국 육상을 구하지 못한 우가키는 조각을 포기했다. 망명 높은 귀족들도 잇달아 조각을 포기함으로서 육군에서 마지 못해 추천한 하야시를 총리 자리에 앉혀 버린 것이었다. 하야시가 총리가 되자 이시와라 간지는 "하야시 대장이 총리라면 고양이도, 호랑이도 될 수 있다.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2]

2.2. 총리 이후


하야시 센주로는 평소에 말이 부족했고 결정을 내리는데 우유부단한 성격이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일이 많았으며, 하야시는 군부의 일원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부정하고 일당 독재를 주장하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사상에 동조했다. 하야시의 내각은 여러 자리를 겸임하는 장관들이 많았기 때문에 "2인 3각 내각"이란 별명도 듣기도 했다.
하야시가 임기 중에 한 일이라곤 전 내각이었던 히로타 고키 내각에서 넘어온 현안 문제들을 싹 '''날치기 처리'''하더니 '''의회를 해산'''시키고 친군 세력을 규합하여 총선을 실시한 것밖에 없다. 사회주의계 정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친군파 정당들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하야시 총리는 군인답게 다시 '''재해산을 추진'''하려다가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되자 바로 사퇴. 이래서 먹튀(食い逃げ) 내각의 먹튀 수상이라 불렸다. 그렇게 하야시는 취임 5개월 만에 총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대일본흥아동맹(大日本興亞同盟)의 총재로 일한 하야시는 1943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3. 여담


이슬람교에 관심이 많았는지, 무슬림도 아닌데 '대일본 회교협회(大日本回教協会)'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4. 주요경력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image]
32대

33대

34대
히로타 고키

하야시 센주로
(1937년 2월 2일 ~ 1937년 6월 4일)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역대 육군대신'''
[image]
38대

39대

40대
아라키 사다오

하야시 센주로
(1934년 1월 23일 ~ 1934년 7월 8일)

하야시 센주로

39대

40대

41대
하야시 센주로

하야시 센주로
(1934년 7월 8일 ~ 1935년 9월 5일)

가와시마 요시유키

[1] 정작 고이소는 우가키의 요청을 거절했다.[2] 웃긴 것은 전후에 이시와라는 우가키를 찾아가 그때 조각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