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후미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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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34·38-39대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 Konoe Fumimaro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91년 10월 12일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現 도쿄도 치요다구)
'''사망'''
1945년 12월 15일 (향년 54세)
도쿄도 스기나미구 자택
'''재임기간'''
제34대 내각총리대신
1937년 6월 4일 ~ 1939년 1월 5일
제38대 내각총리대신
1940년 7월 22일 ~ 1941년 7월 18일
제39대 내각총리대신
1941년 7월 18일 ~ 1941년 10월 18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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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부친 고노에 아쓰마로
어머니 고노에 엔코
'''배우자'''
고노에 치요코
'''자녀'''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
장녀 노구치 아키코
차녀 호소카와 아쓰코
차남 고노에 미치타카
'''친인척'''
외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
'''학력'''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철학 / 중퇴)
교토제국대학 (법학 / 학사)
'''종교'''
신토
'''정당'''

'''약력'''
귀족원 의원
제10대 귀족원 부의장
제2대 일본방송협회 총재
제9대 귀족원 의장
제57대 외무대신
제13대 척무대신
제18대 추밀원 의장
농림대신 권한대행
제43대 사법대신
초대 대정익찬회 총재
제34·38-39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일생
2.1. 초기
2.2. 정치인 생활
2.3. 일본 총리 취임 이후
2.4. 패전과 자살
3. 기타
4.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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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가, 일본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가문(近衛家)의 30대 가주. 고노에 가문은 일본 귀족가였던 후지와라 씨족의 혈통을 잇는 5개 가문인 고셋케(五攝家)[1] 중 하나인 섭관가로, 이 5개 가문에서 돌아가며 일본의 태정대신과 관백을 배출해 온 그야말로 '''황실 다음으로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생'''이다. 그중에서도 고노에 가문이 장자 중 장자이기에, '''후지와라 씨족 전체의 당주'''이기도 하다. 가문 내 문서에는 아직도 '후지와라 후미마로'로 기록한다고 하니, 천황 다음가는 일본 최고혈통의 장자.
자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일 일본 총리가 되는 외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호소카와 총리의 동생인 일본적십자사 총재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2][3]등이다. 다다테루는 국제적십자연맹 총재이며, 히로히토 천황의 막내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큰사위이다. 부인 고노에 야스코와의 사이에서 고노에 다다히로(近衛忠大)라는 아들을 낳았다. 다다히로는 고준 황후의 큰오빠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손녀인 구니 게이코(久邇桂子)와 결혼, 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외 도쿠가와 가문과도 밀접하게 혈연이 닿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와 함께 태평양 전쟁을 주도했으며,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처형당할 것이 유력해지자, 전범 재판 출두 직전 자살로 최후를 맞이했다.

2. 일생



2.1. 초기


도쿄에서 유서 깊은 공가고셋케 중 하나인 고노에가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계 혈통상 고요제이 덴노의 12대손[4]으로, 고요제이 덴노의 제4황자인 니노미야(二宮)가 외가인 고노에가로 입적되면서, 혈통이 시작되었다.[5] 어머니인 엔코[6]는 일찍 사망했고, 이후 아버지 아츠마로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이모이자 아내의 동생, 즉 처제와 재혼하였다. 그래서 후미마로는 이모인 계모 밑에서 자랐다. 오랫동안 이모이자 계모가 친모인 줄 알고 있었으나 장성해서 진실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 아츠마로가 1904년 상당한 부채를 떠안기고 죽어버리자 고작 13살에 작위를 승계하고 고노에 가문의 가주가 된다. 아버지 아츠마로는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의 기초가 되는 아시아 먼로주의를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런 아버지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것으로 술회했지만 '''그는 총리를 재임하면서 아예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그가 퇴임하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청장년 시기에는 고노에는 머리는 꽤나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같은 명문가 출신 정치가이자 자유주의 귀족이었던 사이온지 긴모치의 신임을 얻어, 어린 나이임에도 사이온지를 따라 외국 조약체결식이나 파리 강화 회의에 전권차석대표인 마키노 노부아키 남작의 수행원으로 참가했고 이때 윌슨의 평화주의에 대해 이미 전 세계를 다 해처먹은 구미열강이 일본의 생존권을 핍박하면서 일본에게 후배국가의 위치를 강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인종차별 철폐와 국제적 평등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이상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중퇴하고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로 학교를 옮긴 후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수하는 등, 젊어서는 좌익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그 당시 고노에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이었느냐 하면, 궁중 내에서 양성애자(!)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복잡한 황실 격식을 거부했고, 나중에 천황이 되는 히로히토 앞에서 다리를 꼬거나 반말을 쓰는 등[7] 여러 궁중 예절에 어긋나는 행위로 귀족 원로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80cm가 넘는 장신에 준수한 외모,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 등으로 당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여기에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일본 대표단의 수행원으로 유럽을 다녀온 후 일본은 답답하고 꽉 막힌 곳이라서 싫고 유럽 이민을 가고 싶다고 떠들고 다녀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결국 본인도 사태가 커지자 일본인은 일본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민설을 무마했다.

2.2. 정치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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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고작 25세에 세습 공작으로 상원의원 격인 귀족원 의원이 되어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신을 비호하던 사이온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1927년에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고 1933년 42세의 나이에 귀족원 의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성장했다. 그때부터 줄기차게 차기 총리의 물망에 오르기 시작해,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 이후에는 쇼와 덴노가 직접 고노에에게 내각총리로 조각할 것을 부탁할 정도였으나 건강을 핑계로 빠져나갔다. 고노에에게 긍정적이였던 황도파가 2.26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고 제거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없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였다.
오카다 내각 이후의 내각들이 삽질만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되자, 결국 1937년 6월에 사이온지 긴모치의 추천으로 하야시 센쥬로의 후임 내각총리에 임명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온지는 고노에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여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정치를 펼 거라고 믿고 있었다.[8] 실제로도 고노에가 총리에 취임하고 취한 행동이 "정당인의 지혜를 모은다"는 취지를 내세워서 중간내각 시기에 폐지되었던 각 성청의 정무관을 부활시킨 것이었고, 이것이 해당 자리에 갈 만한 소장의원들의 마음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이후 2번에 걸친 총리 취임에 큰 도움이 되었다.

2.3. 일본 총리 취임 이후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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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7월 26일자 타임지 모델이 된 고노에
34대 총리 취임 후
'''그러나 열정적으로 개혁을 외치던 고노에는, 권력을 잡자마자 귀족적 독재자로 돌변해버린다.''' 처음 집권하자마자 한 짓이 2.26 사건을 일으킨 장교들을 석방조치하려는 시도였다. 사실 그 전부터 2.26 쿠데타를 일으켰던 황도파 장교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이었는데, 총리가 되자마자 이들부터 풀어줘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 당연히 사이온지가 경악하며 반대해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1달 후인 1937년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본인이 일으킨 건 아니긴 하지만 잘도 끌려갔다. 육군이 "2.26 사건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라고 협박하기만 하면 '''일단 맡기고 육군이 망하면 수습하자는 식으로 생각없이 대처했다니'''.
노구교 사건 처음, 고노에는 전쟁 확대론을 부정하며 수습하는 척 중국과 정전협상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육군 사단을 증파해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거기에 육군에서 주장한 국방 예산까지 올려줌으로써 육군의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그 정도로 끝이 아니다. 육군이 화북과 상하이에서 신나게 분탕을 치고 전쟁이 생각외로 확대되자 1937년 10월,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을 통해 중화민국에 화평 교섭의 의사를 전달했으나 중화민국이 화북에 설치된 기찰정무위원회를 유지시킴으로 명목상의 주권을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자, 장제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육군 장성들을 '''유약하다'''고 질타하며, "중국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전쟁의 브레이크를 박살내버렸다. 이를 본 육군 수뇌부는 '''내각과 군부의 입장이 바뀐 것 같다'''며 당황했다.
그걸 넘어 1938년 1월 16일, 1차 고노에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정부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주중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를 소환해버렸으며, 1월 18일에는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담화의 내용은, 단순히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살하겠다'는 것"이라는 보충설명까지 발표하면서 외교교섭의 가능성을 잘근잘근 밟아버렸다. 고노에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경악한 사이온지 긴모치는 여러 차례 고노에를 불러 질책하면서, "그딴 식으로 일할 것 같으면 총리를 그만 두라"고 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노에는 그런 사이온지를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서 그의 조언을 무시했고, '''내각총리인 자신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군부에게 놀아나고 있었다'''.
고노에의 성품을 일찍 간파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유아사 구라헤이였다. 그는 고노에를 디스하며 후지산에 비겼다. "후지산을 멀리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돌이 굴러다니는 황무지인데, 고노에 후미마로라는 사람의 성품이 딱 그러하다"고 말을 남겼다.
거기에 고노에는 전쟁의 확실한 전력 지원을 위한 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민학교령을 발표하고 국민 총동원령까지 통과시킨 후, "흥아원"[9]문제로 1939년 돌연 사퇴한다. 그가 사퇴하고 나서의 내각은 하나같이 미친 군국주의자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후임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지구상에서 유대인공산주의자 박멸을 외치고 다니는 진성 파시스트인 데다가 사임한 이유도 걸작인데,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어서. 세상이 미쳐돌아간다며 "구주천지 복잡괴기(歐洲天地 複雜怪奇)"[10]라고 개탄했다. 이후 할힌골 전투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나마 중간에 해군 출신의 요나이 미쓰마사[11] 총리가 어느 정도 개념있긴 했는데 군부, 정확히는 육군에서 지랄하는 바람에 반년만에 사임하는 안습한 사태도 있었다.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후임 내각들의 정책 자문을 하면서 있다가, 요나이 미쓰마사 총리가 육군 정책에 항의하다가 분노해서 사임하자 다시 총리직에 오른다.
고노에 1차 내각 당시에는 여러 원로들과 특히 사이온지의 눈치를 보았던 면이 있었으나, 원로들이 연로해 점점 죽어가고 특히 1차 내각 당시 팔팔했던 사이온지도 1940년 말 죽었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걸어 줄 대상이 사라진 고노에는 2차 내각에서 똘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게다가 2.26 사건에서 보았듯이, 이미 일본 군부 급진파들의 독단전행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곪아터지면서 발생한 것인데다가, 예전처럼 현실적인 막강한 원로들이 배후 합의를 하든 말든 알바 아니고 원로들도 간신으로 보고 죽이려 들면 그만이라서 사이온지가 아니라 야마가타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개인에 불과한 원로들이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고노에는 다시 권력을 잡자 그는 군부의 힘으로 의회를 강제해산시켰고, 정당들을 폐지해 "대정익찬회"라는 일당독재체제를 수립, 스스로 익찬회 당수에 올라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독-이-일 추축국 삼국동맹을 체결했고, "신질서 운동"을 선전하고 다녔는데, 흔히 아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단어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때 "삼국동맹을 지켜야 하니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대는 일본 육군과 "자원 확보를 위해서 남방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일본 해군이 다투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고 점령하는데 성공하자 석유수출을 금지시켰다. 이에 1941년 8월 8일에 도요다 외무상이 미국무성에 교신을 보내 1. 미국과 교역재개 2. 필리핀 방어 중단 3. 중국,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무기수출 금지 4.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우월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영구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반대로 일본은 1. 인도차이나 이남에 진출을 포기하고 2. 태평양에서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군을 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일본의 현실성 없는 요구안을 거절했고,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더 내려와서 영국 식민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침공을 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박살을 내겠다고 경고했다.
이렇게 미국이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도조 히데키일본군은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해대는 가운데에서도, 고노에는 대미전쟁에 대해선 반대 입장은 고수하면서 정작 군부를 제어하지는 않고, 거기에 미국 성질을 돋을만한 군사적 도발 조치들을 승인하고 전쟁까지 각오하는 국방방침을 통과시키는 등 대체 원하는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만 잔뜩 만들면서 악화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노에는 개인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을지언정 개전의 책임을 아주 무겁게 질 수밖에 없다. 이미 중국에서 전선을 형성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고, 거기에 인도차이나 침공을 하면 미국의 주권(필리핀)과 영국의 주권(말레이시아)이 침해당해 반드시 개입을 한다는걸 알면서도 남방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침공을 했는데. 미국은 7월에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인도네시아)와 함께 석유수출금지를 포함한 대(對)일본 수출수입 금지령과 일본의 해외재산 동결령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되니 일본 석유 수입의 90%가 날라가버려 경제와 사회전체가 난리가 났고 개전파와 미국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총리질 못해먹겠다고 도망치듯이 사임해서 히로히토까지 당혹케 만들었다.
총리 퇴임 후 처음 전황이 유리할 적에는 죽은 듯이 지내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반전주의자로 변신한다. 고노에는 공개적으로 전황에 대해 비웃으면서 이래서 내가 대미 개전을 반대했다! 라고 으스댔고 이 때문에 군부의 미움을 사서 비국민 소리까지 듣게 된다. 이 당시 군부를 중심으로 소련과 교섭하여 중재평화의 형식으로 종전을 하려는 공작이 있었는데, 여기에 맞서 당시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결탁해 미국, 영국과의 평화협상을 하려고 했고, 천황에게는 "소련은 믿을 수 없으니, 공산주의자들이 난리를 일으키기 전에 당장 서방에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며 서한을 보낸 것이 1945년 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련과의 중재평화에 대한 기대와 결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히로히토가 시종장을 보내어 "나대지 마라."라고 전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전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 것은 1945년 스즈키 간타로의 총리 취임 이후의 일인데, 이때 무슨 장난이었는 줄은 모르겠으나 소련의 중재에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거론되었던 협상 조건은 일본의 모든 식민지 한반도, 중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오가사와라 제도, 가라후토, 쿠릴 열도, 북해도, 류큐 등의 영토들을 포기하고 소련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일본군 장병들을 보내는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 이긴 전쟁을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소련은 고노에가 소련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렸고, 붉은 군대만주 작전을 발동한다.이 과정에서 만주에 있던 고노에의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 중위는 포로가 된다.[12]

2.4. 패전과 자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난 후에 항복을 결정하고 옥음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직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일본 총리로 취임한 뒤 만든 내각에서는 부총리 겸 국무대신으로 입각했지만, GHQ가 일본에 들어오자 내각 자체가 유명무실해지자 요시다 시게루 등 종전 공작으로 친해진 인사들을 정계로 진출시켜 영향력을 유지했다. 연합국 쪽에 제대로 전범으로 찍혔다는걸 자각했는지, 형벌을 면하기 위해 잡지에 군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고를 하기도 하기도 했다.
1945년 10월 4일에 고노에는 맥아더를 만나서 "천황과 그 주변사람들이나 일본의 귀족세력, 일본의 재벌들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변명하거나, "전쟁을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제거한다면 일본은 공산화가 될 거에요"라며 살아보려는 발버둥을 쳐보았다.

중일전쟁부터 시작하여 내가 저지른 정치적인 실수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한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는 거짓 주장과 오해로 팽배해 있다. 어떤 진실을 말해도 사람들은 거짓말과 변명으로 비난하기 일쑤이다. 자기 주장만 일삼는 이전투구식 혼탁한 싸움에는 더 이상 몸을 맡길 수 없다.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는 한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겠는가. 언젠가는 나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정의가 밝혀줄 것이라 믿는다. 전쟁에 대한 열광과 증오, 승자의 오만함과 패자의 비굴함, 의도적으로 조작된 루머들, 이런 것들이 소위 여론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나는 신의 법정에 서서 당당한 재판을 받고 싶을 뿐이다. 내가 전범 용의자로 미국인들의 앞에서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일전쟁을 야기했다는 책임감 때문에 나는 미국과의 협상을 서둘러 태평양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중일전쟁을 마무리짓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협상의 성공을 위해 나의 역량을 다했다. 그런데 이제 미국이 나를 전범 용의자로 취급하려고 하니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내가 열망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에도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출처

초기에 맥아더는 반공 자유주의자처럼 그럴듯하게 행세한 고노에에게 호감을 느껴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는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과 몇몇 정치인들은 고노에 후미마로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에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결국 1945년 말 사이토 타카오의 연설이 고노에의 몰락을 가져오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책임의 문제에서, 본인의 의견으로는 도조와 고노에 이 양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지나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번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이 도조 대장에게 있다면, 지나사변의 책임은 고노에 공에게 있다. 무력한 왕징웨이내세운 일, 삼국동맹을 맺은 일, 이런 것들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도발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미회담은 왜 이루지 못했는가. '''도조 대장은 전범이 되었지만, 고노에 공은 아직도 궁중과 엮이고 있다. 이건 국민의 사상에 악영향을 준다. 이걸 방치하는 건 왜인가?'''"

― 사이토 타카오[13]

, 1945년 말, 국회에서.

'''이 연설이 고노에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냈다.'''
이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GHQ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일본의 새로운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전범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노에 후미마로의 살아보려는 발버둥은 모조리 실패하고, 고노에 후미마로는 GHQ로부터 "스가모 형무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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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칙서를 읽고 있는 후미마로.
고노에는 쇼와 덴노가 자신을 변호해주길 바랐지만, 천황은 그렇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고노에가 자살하기 하루 전, 고노에는 쇼와 덴노&고준 황후 부부와 식사를 하길 원했지만 천황 부부는 고노에의 요청을 거절했다. 고위 귀족 출신인 고노에는 언제든지 천황을 접견할 권한이 있었으나, 그걸 거부당했다는 것부터가 버림받았다는 증거다. 사실 전범 여부를 떠나서 히로히토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일전에 고노에가 자신에게 저지른 무례한 언사 덕에 정나미가 떨어졌을테니.
1945년 12월 6일 미 군정청으로부터 A급 전범혐의로 조사받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스가모 구치소로 출두하라는 명령에 고노에는 출두명령 최종기한일을 하루 앞둔 1945년 12월 15일 청산가리를 마시고 음독자살했다. 자살하기 전날에 차남 고노에 미치타카(近衛通隆)를 만나서 천황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으면서 마지막 말을 남겼는데 "나는 많은 과오를 범했지만, 전범으로 재판받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14] 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3달 앞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있던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의 죽음에 "그 심정을 이해한다. 깔끔하게 죽은 그가 부럽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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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체를 조사하기 위해, 미 제1기병사단 소속 대위가 시체를 살피면서 검시를 하고 있다.
결국 그는 일본 총리 중에서 2번째로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되어, 가장 단명한 총리(54세)이자,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총리'''가 되었다. 1945년 12월 21일에 장례가 치뤄졌고 교토의 다이도쿠지(大德寺)에 고노에 후미마로의 묘지가 있다. 고노에는 귀족 출신인 모리 치요코와 결혼해서 2남 2녀를 낳았는데,차녀가 호소카와 가문에 시집을 가서 낳은 외손자들 중 하나는 훗날 제 79대 일본 총리대신이 되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이다.

3. 기타


  • 개전 직후 "우리 집 뒤에 있는 우물에서 휘발유가 나오던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말인데 이걸 군부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 물에서 휘발유를 뽑아낸다는 터무니없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 몇몇 사람들은 고노에가 태평양 전쟁 전후(前後)로 미국과의 교섭에 공을 들인 것을 들어 동정어린 평가를 내리거나, 고노에의 자결에 대한 책임을 미군에 지우고 있다. 이는 고노에가 평화주의자라는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지만, 고노에가 사이온지 긴모치를 비롯해 대내외의 신망을 저버리고 군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해당 주장은 단순한 책임 회피, 전가에 불과할 뿐이다.
1898.11.18~1973.06.02
그의 이복동생인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麿)는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자기 돈 주고 사서 지휘했고, NHK 교향악단의 직계 모체인 신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는 등 일본 관현악단 역사의 초기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15] 하지만 이 사람도 자기 형과 마찬가지로 독선적인 면모 때문에 신교향악단 단원들한테 비난을 받으며 쫓겨났고, 1930~40년대에는 나치 독일에 빌붙는 어용 음악가가 되는 등 흑역사를 연출해 그 형에 그 동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 고노에 후미마로의 사후 가문의 가주는 원칙대로라면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가 되어야 하나 그는 소련이 만주 진공때 포로로 잡혀버린 상태[16]였으며 차남 미치타카는 이복동생 히데마로의 양자[17]가 되었고 장녀인 고노에 아키코는 명문가인 시마즈 공작가문에 시집을 가나 1945년 다른 남자와 눈 맞아서 도망치는 대사건을 일으켜서 시마즈 가문과 절연해버리는 동시에 고노에 가문을 먹칠한 탓에 결국 차녀 고노에 요시코가 호소카와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차남 호소카와 다타테루를 후미타카의 사후양자로 들이는 식으로 고노에 가문을 이었다.

4. 매체


  • 2008년, TBS에서 1부 다큐멘터리와 2부 드라마로 구성된 2부작 특집극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개전과 도조 히데키'(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에 등장한다.육군대신이자 개전파인 도조는 빨리 개전 하라며 고노에 총리를 압박하고 있었고, 이에 고노에 내각은 버티지 못하고 총사퇴를 해버린다.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여학생에도 이름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본 주인공이 "이마가 이상하게 생겨서 호감 안 가는 얼굴이다."라고 깐다.

[1] 고노에, 다카츠카사(鷹司), 이치조(一条), 니조(二条), 구조(九条). 이 5개 가문이 태정대신과 관백을 대대로 독점해왔다. 일본 황족 바로 다음으로 치는 가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직전까지 일본 직계 황족은 고셋케나 같은 황족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다.[2] 본명은 호소카와 모리테루(細川護煇).[3] 네이버에서 이 사람을 검색하면 아버지가 고노에 후미마로라고 되어있는데, 고노에 후미마로는 아버지가 아니라 외조부다.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이었던 모리테루가 고노에 가문를 잇게 된 이유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유일한 적자 고노에 후미타카가 패전 후 소련에서 포로 생활하던 중 죽었기 때문에, 모리테루를 죽은 후미타카의 아들로 입양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호소카와 모리테루(細川護煇)에서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로 개명했다.[4] 이 항렬이면, 아키히토 상황의 24촌 족형이며, 나루히토 천황의 25촌 족백부이다.[5] 이 혈통의 직계는 후미마로의 아들인 후미타카가 자식없이 죽으면서 단절된다.[6] 衍子. 카가 번주였던 마에다 요시야스(1830~1874)의 셋째딸.[7] 고노에가 히로히토보다 나이가 10살 많긴 하지만, 차기 천황 앞에서 다리를 꼬고 반말을 썼으니 칼 안 맞은 게 기적이다.[8] 고노에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암살되었을 때, 총리 추천권을 가진 사이온지를 찾아가서 '''"강력한 정당내각을 만들거나 아니면 군부에게 내각을 만들고 엉망으로 굴러갈 경우 군부세력을 이것을 빌미로 제거하자"'''고 강경한 주장을 폈다.[9] 興亞院. 군부가 대만주, 대중 문제와 외교 문제를 한꺼번에 통합하기 위해서 세운 기관으로, 외무대신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10] "유럽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는 뜻으로 쉽게 말해 "유럽 돌아가는 꼬라지가 괴상망측하다"는 뜻이다.[11] 해군 대장 출신. 해군 대신과 총리 재임기간 동안 독일-이탈리아삼국동맹을 반대하고 대미 화평을 주장해서 육군과 충돌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1944년 도조 히데키가 사임하자 다시 해군 대신을 맡아서 화평교섭에 나섰고 항복 선언을 주도했다.[12] 후미타카 중위는 이후 1953년경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사망한다.[13] 만화가 사이토 타카오와 동명이인(1870년 9월 13일~1949년 10월 7일). 그는 13선의 기록을 가진 중의원 의원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총독의 아들인 테라우치 히사이치 육군 대신과 격렬한 언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강경한 반전(反戰)태도 때문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의회에서 대놓고 반전 연설을 한 경력이 있고, 이로 인해 중의원에서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그 다음 선거에서 오뚜기처럼 일어나 당선되었다. 타카오의 입장에서 고노에의 박쥐스러운 처신은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리라[14] 우습게도 전범인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1890~1945)도 비슷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교도소 생활은 먹을 것도 좋고 부족할 게 없지만, 나는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유서. 그러고 보니 둘 다 나이도 비슷했다.[15] 안익태가 도쿄고등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스승이기도 했다.[16] 후미타카는 1953년 시베리아 수용소 내에서 사망한다.[17] 원래 미치타카의 장남이 있었으나 관동대지진에 의하여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