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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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진행
2.1. 배경
2.2. 쿠데타로 향하는 길
2.3. 쿠데타 발발
2.4. 진압
2.5. 이후
3. 기타
4. 매체에서
5. 관련 항목


1. 개요


二・二六事件. (に・に・ろくじけん 니니로쿠지켄) 쇼와 11년(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병력 1483명을 동원해 일으킨 쿠데타.

2. 진행



2.1. 배경


황도파일본 육군의 청년 장교 파벌들 중 하나였다. 이들이 황도파(皇道派)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천황이 국가 수장으로서 직접적으로 친정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군부의 정치개입을 거부하고 민간인의 문민통제를 존중하는 파벌을 통제파(統制派)라고 한다.
이들은 사악한 일본 정부의 중신들이 천황을 등에 업고 권위를 침탈하여 민생의 피를 빨아먹고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데 급급할 뿐,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대내적으로는 정재계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수년간 냉해가 지속되면서 도호쿠 지방을 비롯하여 심각한 흉작이 거듭되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현실에서 농민들의 삶은 재앙적으로 파탄나고 있었는데, 군인들 상당수가 농민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변혁에 대한 갈망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첨언하자면, 토호쿠 지방은 당시 일본에서도 개발이 더딘 지역으로 에도 말기까지도 보릿고개로 인한 기아로 굶어죽은 사람이 많았고, 강물에는 굶어 죽은 어린이 시체가 둥둥 떠내려가는 실정이었다.[1] 그래서 가난한 집안은 부모가 어린 딸을 인신매매해서 창부로 팔려가는 현실이었다. 특히 일본군 내에서는 토호쿠 출신 청년들은 머리가 좋아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대학 진학할 돈이 없어서, 이시와라 간지처럼 국가가 운영하는 육군 사관학교같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국가 세금으로 돈도 주는 군인 장교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자란 토호쿠 지방의 실상과 여동생같은 어린 여자애들이 인신매매로 팔려간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분노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민중을 배려하는 사려깊은 세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계급 갈등이 주 원인이었다.[2] 당시 일본 군대는 이미 포화상태라 장교층은 윗대가리들이 잔뜩 쌓여있어서, 밑에 청년 장교들은 계급 진급이 안 됐다. 나이 먹고 무능한 고급 장교들은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고 아무 일 안 해도 높은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고, 힘든 일은 밑에 계급이 다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육군과 해군은 서로 갈등하고 국민의 세금으로는 전함이니 항공모함이니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전쟁무기만을 늘리고 군비확장만을 욕심냈다.[3]불공평한 부조리에 청년 장교는 무능하고 멍청한 윗대가리 장교를 싹 다 숙청해 버리고, 우리가 천황과 담판을 지어서 권력을 쥐자라고 생각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만주사변 등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한 미국, 영국과의 관계악화 등으로 혼란과 갈등이 초래되었는데, 이 혼란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극대화된다. 국체론자들에 따르면 천황의 대권과 통수권은 각각 내각과 군부에 위임되어있는데, 해군 통수권을 행사하는 군령부의 반대에도 내각이 런던 조약을 강행하자, 과격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나라를 멋대로 말아먹던 간신들''''이 이제는 아예 ''''신성한 통수권까지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육해군과 민간 극우파들 모두의 공분을 사게 된 것.(...)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 사상가들의 자극을 받은 5.15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군에 의한 정변은 가시화되고 있었고 2.26 사건은 그 절정이었다.
2.26사건을 주동한 청년장교들의 사상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 등이 있었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통수권이 농단 당하는 현실에 분개하던 청년장교들에게, <일본개조법안대강>을 비롯한 기타 잇키의 저작들은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경험을 통해, 혁명의 주요 기반은 군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기타 잇키의 전략전술은 변혁에 목말라 하던 청년장교들에게,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는 간신과 재벌들을 타도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동력은 오로지 순수한 청년장교 자신들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적들을 살해한 뒤 쇼와 덴노에게 권력을 돌려주는[4] "쇼와 유신"(昭和維新)을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참고로 재미있는 것은, 통제파들은 '장차 다가올 미국, 소련 등 열강들과의 결전을 위해서는 국가 주도의 강력한 준비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는데 황도파 장교들은 이를 일본의 파쇼화로 보고 경계했다는 것.
이들이 몇 년 전부터 이런 낌새를 보였으므로, 육군 고위층과 헌병 등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이런 성향인 사람들을 찾아내어 체포하기도 하였으며, 츠지 마사노부는 당시에 이런 인물들을 찾아내 고발하였다. 특히 츠지 마사노부는 2.26 사건 직전, 자신을 따르는 사관후보생 사토 가쓰로에게 불온한 움직임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는 그를 2.26 사건 주동자들에게 침투시켜 쿠데타 음모를 캐내려 하였다. 2.26 사건 주동자들은 처음에 구체적 답변을 회피하였으나, 사토 후보생이 '''"청년 장교들이 미지근하게 나온다면 당신들과 절연하고 후보생들끼리라도 궐기하겠다"'''고 강수를 두자 마지 못해 일부 계획을 공유해주었다. 이 사건으로 2.26 사건은 이미 1934년 11월 20일 덜미가 잡혔으나, 사건 관계자들은 '''"과격하게 나오는 후보생을 달래지 않았다가는 또 다시 5.15 사건과 같은 불상사가 터질까봐 거짓 계획으로 상황을 무마한 것"'''(...)이라고 변론하였고 재판정에서 이 변론이 받아들여지면서 가벼운 처분만 받게 되었다.
참고로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도 이들이 이런 짓거리를 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 해당 사건 가담자들의 이름들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2019년에 발견된 해군이 작성한 2.26사건 관련된 극비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5]

2.2. 쿠데타로 향하는 길


육군이 민정당과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을 뒤엎고 군사독재를 현실화하기 위해 계획했던 3월 사건 당시, 황도파는 육군 중진들의 정권탈취 시도를 비판하며 종국에는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이후 1931년, 10월 사건[6] 등을 거치면서 민정당 정권이 붕괴하고 정우회의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들어서자, 황도파의 수장격 인물인 아라키 사다오(荒木 貞夫) 장군이 육군상에 임명되는 등 육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황도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자파 위주의 인사가 지속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통제파를 구성하며 아라키 등을 실각시키는데 성공, 이후 황도파의 거두들이 차례로 거세당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2.3. 쿠데타 발발


1935년이 되자 황도파 숙청이 본 궤도에 올랐다. 황족으로서 무력한 허수아비 역할에 불과했던 간인노미야 참모총장까지 황도파 숙청에 가담하였고, 황도파의 중심인물로 여겨지던 육군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가 교육총감직에서 해임되면서 황도파 내 청년 장교 세력은 더이상 통제파의 '전횡'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35년 8월 12일, 마사키 대장을 경질했던 통제파의 중심인물 군무국장 나가타 테츠잔이 청년장교들의 큰형님격이었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 의해 참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아이자와를 따르던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근위보병 제3연대ㆍ보병 제1연대ㆍ보병 제3연대ㆍ야전중포병 제7연대를 주축병력으로 삼고, 살해할 주요 고위관료의 목록을 작성하였으며, 결국 1936년 2월 26일에 도쿄의 주요 정부기관을 점거했다.
황도파 장교들은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당시 총리대신을 최우선목표로 삼았지만, 착각하는 바람에 의형제 마츠오 덴조를 살해하였다.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내대신[7](전 조선 총독,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전 일본 내각총리대신),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郎) 육군교육총감[8]을 살해했다. 런던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서 특히 시종장직을 맡으며 임금 측근에서 천황의 눈과 귀를 가리는 간신으로 지목된 스즈키 간타로 당시 시종장 역시 살해 대상으로 지목되어 습격당했다. 스즈키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쿠데타군의 안도 데루조 대위가 병사들을 물리고 홀로 권총을 쏘았고, 마지막에는 군도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했으나 그 순간 스즈키 부인이 만류하면서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스즈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스즈키는 3발을 맞았으나 운좋게도 모두 급소를 피해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시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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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다 총리와 그의 매부인 마츠오 덴조(松尾傳藏) 육군 대좌.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 오카다는 수상관저에 있다가 관저에서 일하는 하녀의 방에 숨었다. 경찰 4명이 반란군에 응전해 권총사격을 했으나 곧 사살되었다. 총리의 비서이자 경호담당이기도 했던 마츠오가 총리를 대신하여 자진해서 나갔는데, 오카다와 마츠오의 외모가 비슷했으므로 반란군은 마츠오를 총리로 착각하고(...) 살해하였다. 반란군은 오인사살에 대비해 시신의 얼굴을 응접실에 걸린 총리 초상화와 대조해보기까지 했지만 구분하지 못하고(...) 총리가 맞다고 판단했다. 총리 비서관 후쿠다 타카야스와 헌병조장 코우사카 게이스케는 오카다가 생존했음을 눈치채고 관저에 빈소를 차려 사람들이 조문하게 하여 혼잡해진 틈을 타 오카다를 탈출시켰다. 오카다 총리가 탈출한 뒤 차 안에서 처음으로 한 말은 "자네, 담배 가지고 있는가?"였다고 한다. 그 뒤 총리 관저에서 오카다의 비서이자 사위였던 사코미즈 히사쓰네(궁성사건 당시 내각 서기관장.)가 계속 마츠오의 시신을 노출시킬 경우 들킬 것을 우려해 관을 준비한다음 시신을 천으로 감싸서 집어넣고 오카다의 자택으로 운송시켜서 오카다의 안전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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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과 전임 총리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반란군은 다카하시의 사저를 기습하여 응전한 경찰을 제압하고 군도로 다카하시를 찔러 살해하였다. 사이토는 사저에 있었는데 반란군이 와서 몸에 '''47발'''을 발사했다. 사이토의 처도 반란군의 총검에 부상당했으나 목숨은 건졌다. 처는 1971년 향년 97세로 천수를 누리다 갔다.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9] 옥쇄관은 외손녀[10] 요시다 카즈코(吉田和子)와 아타미의 유가와라 온천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중에 반란군에게 습격당했다. 마키노 노부아키와 요시다 카즈코는 아타미 언덕으로 도주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카즈코가 추격해오는 군인들을 몸으로 가로 막고 추적을 지연시켰다. 여담으로 카즈코는 훗날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와 결혼하여, 아들 아소 다로 총리와 딸 아소 노부코를 낳았다. 노부코는 토모히토[11] 친왕과 결혼하여 아키코 공주요코 공주를 낳았다. 아버지도 본인도 고관대작, 사위도 총리, 증손대까지 총리에 왕자비 등 후대까지 집안 대대로 명문가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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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초를 점령한 병사들. 나카타초는 일본 국회가 있는 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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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군부측에서 반란군에게 투항하라고 올린 애드벌룬. "칙명은 하달됐다. 군기에 반항하지 마라"라고 쓰여 있다.

2.4. 진압


당일 내각과 군부의 주요인사가 4명이나 살해당하였으므로 일본 정가는 충격을 받았다.
이에 황도파 세력은 육군대신 가와시마 요시유키와 황도파 장성들이 궐기주동자들과 면담하기에 이르렀다. 육군대신은 "대명에 따를 수밖에 없다"며 궐기군에 즉답을 피했지만 청년 장교들의 궐기 취지서를 천황에게 상주하였다.[12] 육군사참의관들은 청년 장교들을 방문하여 지지를 표했고, 청년 장교들은 마사키 진자부로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 정권을 건의하였다. 기타 잇키는 런던 군축조약 당시 군령부총장으로서 조약에 반대했던 가토 간지 대장에게 연락하여 해군 내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등 나름 대책마련에 힘썼고, 가토 대장으로부터 현 해군 군령부총장이기도 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가 천황을 배알하기로 했다는 답[13]을 들었다. 천황의 동생인 야스히토는 육사동기이며 기타 잇키의 제자인 니시다 미쓰기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상기의 고위 장성들과 일부 황족들의 지지 속에서 사태는 궐기군이나 기타 잇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사태 내에서 가장 중요한 쇼와 덴노는 궐기를 지지하는 황족들이나 신하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궐기군들에게 원대복귀하라고 명령하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쇼와 덴노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하여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노신들이 궐기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덴노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 육군대신은 아예 토벌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혼조 시게루 등 궐기에 호의적이었던 신하들은 "그래도 젊은 애들이 폐하께 충성하겠다고 일으킨 반란인데 좀 너그럽게 봐 주시죠"라고 권했지만 쇼와 덴노는 '''"충성이고 나발이고 내 군대가 내 명령도 없이 움직인 것 자체가 이미 반역이고, 그것들은 이미 내 군대가 아니야"'''라며 역정을 냈다. 궐기군으로부터 궐기취지서를 받은 육군대신이 이를 대독하자 '''왜 그것을 내 앞에서 읽느냐'''며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고, 군부가 이들을 진압하기에 미온적이라고 질책하며 '''"군부가 안 나서겠다면 내가 몸소 내 근위사단을 이끌고라도 저놈들을 진압하러 가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사흘 동안 회유와 무력시위가 잇따랐다.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결정되었고[14] 28일 5시 8분 시점에서도 일부 부대에는 여전히 전달되지 못했다. 다음날 오전 5시 8분에 이 봉칙명령이 궐기군에게 하달되었다. 공식적인 봉칙명령이 나오면서 궐기군을 부르는 칭호는 '점거부대'에서 '반항부대', 그리고 '반란부대'로 바뀌었다.
쇼와 유신을 부르짖으며 궐기하고, 천황의 대어심(결정)을 기다렸던 청년장교들에게 원대복귀를 명하는 천황의 봉칙명령은 큰 충격이었다. 자살을 해야할지, 끝까지 버티며 마사키 정권 수립 공작을 계속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28일 오후 1시, 하사관 이하는 원대복귀시키고 자신들은 자결할 생각이니 칙사를 보내달라는 청년장교들의 부탁이 야마시타 도모유키 소장을 통해 천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천황은 '''"자살을 하려면 마음대로 하든지, 그런 자들에게 칙사라니 말도 안된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토벌에 적극적이지 않은 군부의 태도를 문책하였다. 쇼와 덴노의 확고부동한 진압의사에 가사이 계엄사령관은 태도를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고, 일본군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다. 28일 오후 3시, 헌병대는 궐기군의 정신적 지주인 기타 잇키를 연행하였다. 그 직전까지 기타의 저택에 있었던 니시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내뺐다가 3월에 체포되었다.
11시에는 '계엄작전명령 제14호'에서 '무력'에 의한 '반란부대' 진압이 명령되었다. 인근 주민들에게 긴급 피난 권고[15]가 내려진 가운데 비행기와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육군 병력뿐 아니라 해군 역시 전함 나가토도쿄 앞바다에 있던 제1함대 예하 함정들도 2월 28일 함포를 사용하여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16]하고 해군 육전대를 긴급히 편성하여[17] 궐기군에 의하여 점거당한 내무부 및 외무부 청사를 회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3일차 이후에는 일부 병력들을 해군성 경비에 투입하였다. 살해당한 이들 중 퇴역 해군대장 출신 원로인 사이토 제독도 있었으므로 해군은 더욱 반군에게 이를 갈았다.
2.26사건 주동자들은 척살대상과 점거장소만 정했을 뿐, 궐기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어떤 통일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18] 상층의 명확한 협조자를 포섭해두지도 못했다.[19] 그저 간신들을 소탕하고 천황의 대어심(결정)을 기다린다(...)는 것이 전부였다.[20] 특히 하사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장교들에게 끌려온 터라 불안해했다.[21]

下士官兵ニ吿グ

하사관·병에게 고함

一、今カラデモ遲クナイカラ原隊ヘ歸レ

\1.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원대로 복귀하라

二、抵抗スル者ハ全部逆賊デアルカラ射殺スル

2. 항거하는 자는 전부 역적이므로 사살한다

三、オ前達ノ父母兄弟ハ國賊トナルノデ皆泣イテオルゾ

3. 너희들의 부모형제는 역적이 되어 모두 울고 있다

二月二十九日   戒嚴司令部

2월 29일 계엄사령부

반란군 측 하사관과 병의 투항을 독려하는 삐라. (실제 모습)
간신들을 제거하여 천황을 떠받들고 국가를 개조하한 애국심으로 궐기했다고 생각하던 청년장교들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귀순 전단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앞서 스즈키 간타로를 습격한 바 있던 안도 데루조 대위는 전단을 보고 크게 격노하여 계엄군의 전차 앞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전차에 저항하지 말라. 모두 여기서 깔려 죽자"라고 큰 소리로 명령했고(...) 이에 따라 30여 명의 하사관과 병사들이 도로에 드러누웠다. 30m 앞까지 다가온 전차는 이 광경에 당황하여 물러났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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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를 겨누는 반란군들. 결국 이들은 투항했다. 병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하고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와 고노 히사시 대위는 자결,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2월 29일 오후 5시에 상황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해 7월,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판결을 받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총살되었다. 4년 전(1932)에 5.15 사건을 일으킨 해군 장교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생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데다 단순 테러 수준을 넘긴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됐다. 무엇보다도 다카하시 고레키요사이토 마코토를 살해한 일은, 쿠데타이기 이전에 고관대작을 죽인 일이기 때문에 사형 아니면 달리 내릴 형벌이 없기도 했다.
기타 잇키와 니시다 미쓰기는 재판이 조금 더 오래 걸려서 1년 반에 걸친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이 두 사람의 사형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는데, 엄연한 민간인을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때린 것도 절차적으로 문제였거니와, 두 사람은 쿠데타 주모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쳤을 뿐 쿠데타 계획과 실행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아서 니시다는 쿠데타 직전, 기타는 쿠데타 당일에야 거사를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재야우익과 육군 황도파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했던 마당발 니시다는 그렇다 쳐도, 기타는 중일전쟁을 막아보겠답시고 중국으로 건너갈 준비에 한참이었기 때문에[22] 쿠데타 당일까지 이에 연루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23] 하지만 군부는 쿠데타의 실체적 배경인 군 내부의 파벌싸움이 이런 대형사고로 만천하에 드러나서 병영국가 수립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외부의 불순분자들이 순진한 위관들에게 빨간 물을 들인 것으로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 기타와 니시다를 희생양으로 삼아 극형을 내린다는 방침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24] 군 상층부의 이런 방침에 재판장이 기타는 끽해야 방조죄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저항하면서 재판이 1년 반씩이나 질질 끌린 것이다. 정작, 기타 잇키 본인은 앞서 청년장교들이 사형되자 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신을 사형시켜달라 탄원했다.

2.5. 이후


비록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군부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과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전쟁 수행은 곧 대본영태평양 전쟁으로 나타났다. 5.15 사건[25]과 이 사건 이후 일본군, 특히 일본 육군은 군의 쿠데타 위협을 이용하여 자꾸 정치에 관여하고 꾸준히 문민정부를 겁박한 끝[26]에 결국 정부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군사정권화되었고, 그 결과 침략전쟁에 의하여 국정은 파탄에 이르러 결국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는 등 대규모 희생 끝에 패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해당 사건으로 육군에서 황도파는 소멸되었지만, 정작 통제파에 몸 담은 군인들이 이 사건을 이용해서 총리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통제파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이었다.

3. 기타


  • 당시 영친왕일본 육군 대좌로서 도쿄 근처에 있는 우츠노미야 59연대 연대장이었다. 2월 28일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연대에서 긴급하게 차출한 혼성대대를 이끌고 상경해 29일 0시에 신주쿠역에 도착하여 구단에 있는 호텔에 주둔하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치했다. 2월 29일에 반란군이 와해되었으니 대치는 그리 길게 끌지는 않았다. 남의 나라의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동원된 망국의 왕족이었던 셈이다.
  • 이 당시 주동자들은 처형당하고, 연루자들은 만주로 추방당했는데, 이들 중에 인맥으로 만주군으로 복무한 자들도 있었다. 일제 말기 건국동맹에 가담해 있던 박승환은 만주군 내부에 있는 이런 '불순자'들의 협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 당시 아사히 신문사도 반란군들의 표적이 되어 습격을 받기도 했다.
  • 이 사건과 5.15 사건에는 아주 골 때리는 공통점이 있는데,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니치렌종이라는 불교종파가 사상적으로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2.26 사건의 사상적 지도자 취급을 받으며 총살당한 기타 잇키와 5.15 사건의 배경이 되는 혈맹단 사건의 이노우에 닛쇼와 그 스승격인 다나카 지카쿠가 일련종 신도로 시작했고, 법화혁명을 주장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 다만 다나카 지카쿠는 니치렌을 강조하면서 불교와 국가의 통합을 주장한 극우파 사상가가 되었고, 기타 잇키는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니치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하면서 좌익 법화혁명 드립을 쳤다는 차이가 있다. 덤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시하라 간지 역시 다나카 지카쿠의 열렬한 숭배자로 거의 오컬트 수준인 국가전략을 꺼내들었으니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데에는 일련종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창가학회의 경우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교주가 투옥되고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이시하라 간지는 사건 발생 2일차에 육군대장 마사키와 단독 대담을 통해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 김재규10.26 사건 이후 재판정에서 2.26 사건 당시 주동자들만 사형당했음을 언급하며 "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 부하들을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재규와 각별한 사이였던 이종찬은 김재규의 변호인단에 2.26사건 관련 판례 자료를 건네며 '김재규는 어렵더라도 그의 부하들은 구명해보라'는 의향을 전하기도 했다.
  • 참고로 이 사건에 사상적 영향을 미친 기타 잇키는 천황 신격화를 싫어했다고 한다.[27] 기타는 "천황의 일본과 그 국민"을 "일본과 그 국민의 천황"으로 뒤집으려 한 인물로서,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진적인(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물이었다. 기타에게 천황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후세 다쓰지조차 천황제에 대해 황통 단절로 인한 자연소멸을 원한 것을 생각해 보면, 기타가 얼마나 골때리는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기타의 영향을 받은 2.26 청년장교들은 천황을 도구로 삼는다는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진심으로 천황에게 충성했고, 이것이 그들의 "혁명"이 실패한 이유가 되었다. 함께 총살되던 청년장교들이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기타는 거부했다. 기타의 사세구는 “도련님에게 투구를 빼앗겨 져 버린 싸움(若殿に兜取られて負け戦)”인데, 여기서 도련님이란 히로히토, 투구는 청년장교들을 의미한다.
  • 이 당시 쿠데타 주역들이 부르던 군가인 쇼와유신의 노래(昭和維新の歌)#는 금지곡이 되었다. 참고로 이 노래의 작사자 미카미 다쿠(三上卓)는 이전 5.15 사건과 패전 이후 삼무사건에 참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 2.26 사건 중 일부 궐기군 병력들이 봉쇄망을 뚫고 당시 육군 참모이며 쇼와 덴노와 친분이 깊은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저택 서문 앞에 서서 그가 자기네들 앞에 나타나서 자기네들의 주장을 쇼와 덴노에게 전달해주기를 원했으나 결국 간인노미야는 나타나지 않았다.
  • 해군 군령부가 작성한 해군 기밀문서가 2019년에 공개되었는데, 해당 문서에서는 해군측 역시도 사전에 이런 것이 벌어질지 알았고 나름대로 사전 준비를 했는지 사건 발생 직후에는 당시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사건 현황을 거의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28]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신속하게 궐기군들을 감시할 수 있는 위치에 감시초소 수 개소를 설치하여 실시간으로 궐기군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고 육군이 설치한 계엄사령부에 해군 장교를 신속하게 파견하여 육군측 동향을 살피고 궐기군이 점거한 주요 국가 시설들에게 사복차림을 한 첩보요원들까지 동원하여 정보수집에 나서며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쇼와 덴노와 당시 해군 참모였던 후시미노미야와의 대화나 육군대신이 궐기군들과 대화를 마친 다음에 부른 육군 내 궐기군측에 호의적인 마사키 대장과의 대화, 마사키 대장과 이시하라 간지 당시 대좌간의 단독 대화, 근위사단 대위와 궐기부대 간부가 문부대신 관저에서 가진 대화 등도 상당히 상세하게 파악할 정도의 고퀄리티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해군 첩보요원들이 얼마나 폭넓게 배치되어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참고로 해당 기밀문서는 일제가 패망할 당시 해군 군령부 사령관으로서 미주리함에서 패전 서명식에 참석했던 토미오카 해군 소장이 패전 후에 문서고 깊숙한 곳에 숨겨버린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 말년의 쇼와 덴노가 자신이 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2개의 사건들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한다.
  • 해군측 기밀문서에 의하면 그동안 해군 내에 동조자가 없었다는 추론과 달리 오가사하라 예비역 중장이 사건발생 이틀째 후시미노미야 등을 위수로 한 해군 고위층들과 접촉하여 이들에 협조하도록 설득했다는 게 밝혀졌다.
  • 5.15 사건 당시 암살대상이 되어 암살될뻔했던 찰리 채플린은 이때도 도쿄에 있었다. 4년만에 일본을 다시 방문해 도쿄에 머물던차에 2.26 사건이 터졌던 것. 그나마 이때는 5.15 사건때와는 달리 채플린을 암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 5.15 사건과 이 사건 때문에 일본 경찰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공안경찰 내에 "자위대 감시반(自衛隊監視班)" 까지 만들어 가면서 자위대의 쿠데타를 경계하고 있다. 경시청 관계자가 대놓고 저 두 사건을 언급하며 "바보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전과가 있는 이상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라고 할 정도이며 # 2016년에는 시큐리티 폴리스가 2.26 사건 때 순직한 경찰관들의 무덤을 참배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었다. #1 #2

4. 매체에서



  • 미시마 유키오는 11살의 나이로 2.26 사건을 경험했는데 미시마가 다니던 가쿠슈인 초등과 바로 뒤편이 사이토 마코토의 자택이었다. 이날 미시마는 총리가 죽었다는 친구의 말에 '총리가 뭔데?'라는 식으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이후 패전을 겪으면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우국, 십일의 국화, 영령의 소리 3부작을 쓴다. 한국에서는 신경숙이 표절한 우국(憂國)이 제일 유명한데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다케야마 중위'는 진압군 측에서 황도파 반란군에 가담한 친구들을 사살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국가와 벗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위는 결국 할복을 택하고, 그의 아내 '레이코'도 남편을 따라 자결한다. 묘하게도 미시마는 훗날 중위처럼 군복을 입고 할복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우국은 미시마의 2.26 3부작 중에서 주인공이 신혼이라는 이유로 궐기군에서 빠졌다는 점, 주인공이 치중병이었다는 점 등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 때문에 2.26을 단순한 배경으로 차용한 소설로 여겨져서 2.26 3부작 중 제일 비정치적 소설로 평가되었다는 점이다.
  •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가모우 저택사건'은 2.26사건 당시로의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표현력으로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상상해보기 좋다.
  • NHK 스페셜에서 본 주제를 다룬 내용을 방영했다. 위에 올린 영상이 이를 다루고 있다.

5. 관련 항목



[1] 쇼와 시대 말기까지도 시골 깡촌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 정도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싶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숨겨진 검,오니노츠메에 이런 실상이 잘 그려진다.[2]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 쿠테타도 알고 보면 진급이 늦어지는 불만(특히 육사 8기생)이 그 배경에 있다.[3] 만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은 당시의 이런 사정을 신랄하게 까고 있다[4] 2.26사건 당시 궐기한 청년장교들의 사상적 토대였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기타 잇키는 천황의 존재를 천황 기관설에 입각해서 바라보았다. 즉 천황 절대주의가 아닌 국민의 천황으로서 하나의 국가기관으로 기능하여 변혁에 정당성을 제공해줄 얼굴마담인 것. 따라서 기타의 뜻대로라면,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는 구실로 초헌법적 급진개혁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궐기한 청년장교들은 천황에 대한 기타의 마키아벨리즘적 시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바라보았고, 이는 쿠데타의 패착으로 이어진다.[5] 이는 사건 발생 1주일도 더 전에 도쿄 헌병대측 인사가 해군성을 방문하면서 해당 사건 가담자 및 살인 대상자들의 이름들을 모조리 불어버린 것이다.[6] 1931년 10월에 만주에 전개한 관동군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빌미로 육군이 정권을 전복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쿠데타 시도.[7] 內大臣. 궁내부대신으로 내무대신과 구별해 부르기도 하며 일본 율령제 시기부터 설치된 조정 소속 대신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시종장과 더불어서 궁내성의 업무를 맡아보는 직책이 되었다. 내각이 현실 권력을 지녔다면, 내대신은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권위가 있었다. 내대신이라는 명칭 때문에 내무대신의 준말로 오인되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내대신과 내무상은 궁정과 내각이라는 다른 조직에 속한 다른 직위였다. 2.26 사건 당시 오카다 내각의 내무대신은 고토 후미오(後藤文夫)였다. (비록 무사히 발견됐지만) 오카다 총리가 난리통에 잠시 행방불명되자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내무대신으로서 이틀간 잠시 총리 임시 대리를 지냈다.[8] 참모총장, 육군대신과 함께 일본 육군의 3대 수장이었다.[9] 내각제 도입 이전에 총리 역할을 수행한 오쿠보 도시미치 초대 내무경의 차남이지만, 마키노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어 '마키노 노부아키'가 되었다.[10] 요시다 시게루(훗날 총리)와 결혼한 장녀 요시다 유키코(吉田雪子)의 딸.[11] 나루히토 덴노의 5촌 당숙[12] 하지만 해군 기밀 문서에 의하면, 당시 육군대신은 주저하던 중 궐기군의 협박에 일단 구두로 동조한다고 밝혔고 그 결과가 궐기 취지서가 천황에게 간 것이라고 한다.[13] 해군측 기밀문서에 의하면 쇼와 덴노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를 보자마자 "해군 장교들은 이들 궐기군에 가담하지 않을까"라고 물었고 후시미노미야는 "그런 일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쇼와 덴노는 해군 육전대 지휘관에 대해서 조건을 거는 등 해군이 궐기군에 가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해군이 이번 사건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확인한 이후에는 쇼와 덴노가 대본영 해군에다가 공식 진압명령을 3번이나 내리면서, 사실상 해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제압하려고 한 것이다.[14] 봉칙명령을 하달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 고헤이 중장이나 궐기군에게 이를 전달하러 간 코후지 육군소좌 등도 궐기군에게 동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명령이 전달되는 과정이 다소 지연되었다고 한다.[15] 대피장소는 학교나 극장.[16] 당시를 기록한 해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이들 제1함대의 목표 중 하나는 당시 궐기군에 의하여 점거된 상태였던 제국의회 즉,국회도 있었다고 한다. 해군 기밀문서에서도 포격시 국회 인근에 있는 해군측 감시초소에 영향이 미칠지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을 보면 수가 틀리면 국회를 점거한 궐기군을 대상으로 쏠 생각이였던 모양.[17] 당시 기밀문서에 의하면 20만발 이상의 탄약이 이번 사건 제압을 위하여 불출되었으며 긴급 소집된 이들 병력 규모는 대략 연대급으로 추정되며 사건 발생 3일차 이후에는 이들에게 방독면까지 지급하였다.[18] 가령, 군사정부를 수립할 것인지의 여부,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을 그대로 적용할지에 대해서도 주동자들 간 생각이 달랐다.[19]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고위인사들도 많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실제로 협력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거사에 가담한다는 명확한 협조를 받아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군사행동이나 사후수습에 협조가 절실했던 이들이 포섭되지 않은 것은 패착 중 하나였다.[20] 기타 잇키는 이에 대해 본인이 궐기를 지휘했다면 궁성부터 점령했을 것이라며 순진하게 천황을 맹신한 궐기군을 혹평했다.[21] NHK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당시 궐기군 중 하나(촬영 당시 103세)는, 자신과 동료들이 있었던 국회의사당으로 오는 전차들의 소리를 듣고서야 그제서야 자기들이 반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22] 신해혁명 참여자였던 기타는 국민당 인사들과 안면이 있었다.[23] 거사를 전달받은 이후에는 어쨌든 자기가 원하는 정국을 만들기 위해서 거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쿠데타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 부외자에 머물렀다.[24] 혈맹단 사건 때도 테러범들이 사용한 권총이 해군 내 협조자에게서 얻은 것이라는 진술이 나왔지만 민간인 참여자들만 처벌되고 해군 내 참여자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혈맹단 잔당들이 5.15 사건을 일으킨 것. 2.26 사건 때도 혈맹단 사건의 사후처리를 그대로 따랐다고 보면 된다.[25] 해군 장교들이 현직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를 암살한 사건.[26] 실제로 해당 사건 당시 양상을 보면 알겠지만 육군 내에서도 궐기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뒤에서 지지하던 육군 간부들이 상당했기에 언제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27] 참고로 기타 잇키는 관동 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당시 박열을 피신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 우익 노선과 사회주의 등이 복합적으로 짬뽕된 경우라 행적에 모순점이 꽤 생긴 듯하다.[28] 기밀문서 기록에 의하면 해군성 당직사관이 해당 사건에 대한 초동 보고를 들은 게 오전 7시였고 그때조차도 간략하게나마 상황 파악을 했고 이후 해군으로 실시간으로 들어온 정보들은 사건 종료 후 수사를 통해서 밝혀진 진실과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