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키 가즈시게

 



'''제3대 일본 참의원 의원'''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宇垣一成 | Ugaki Kazushige'''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출생'''
1868년 8월 9일
비젠국 이와나시군
(現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사망'''
1956년 4월 30일 (향년 87세)
시즈오카현 다카타군
(現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재임기간'''
조선 총독 임시대리
1927년 4월 4일 ~ 1927년 12월 10일
제6대 조선 총독
1931년 6월 17일[1] ~ 1936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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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학력'''
육군대학교 (14기)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1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891년 ~ 1931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러일전쟁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여러차례 실패한 총리의 꿈
2.3. 조선 총독 우가키
2.3.1. 경제정책?
2.3.2. 식민지 총독
2.4. 재임기와 이후 영향
2.5. 전쟁과 패전, 그 이후
3. 평가
4.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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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인, 정치가, 제6대 조선 총독.
오카야마현 출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 농사꾼의 5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모쿠지.[2]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0년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였다.[3] 1891년에 일본군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후 러일전쟁참모로 참전했다.
1906년, 아내를 잃고 38살의 나이로 상관 오하라 요시지로 소장의 딸인 오하라 사다코와 재혼했다. 신부의 나이는 18살. 1913년에는 현역 무관을 군부대신으로 뽑지 않는다는 법령에 열 받아서 괴문서를 뿌리기도 했다. 191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24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의 육군대신에 취임했고, 1925년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1927년까지 4개 내각(기요우라 게이고~다나카 기이치)에서 육군 대신을 지냈다. 사이토가 제네바 군축협상으로 총독에서 물러나자 4대(야마나시 한조) 부임 사이에 임시 총독(1927년)을 지내기도 했고, 이후 차기 총리로 하도 유망해서 정계의 혹성(惑星)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이 별명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니, 뒤에 보듯이 총리(태양)만 뺑뺑 돌다 끝난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가키가 육군장교단이 치를 떠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우가키 군축(일본군 항목 참조)으로 21개 사단 중 4개 사단(3만 4천명)을 날려버렸던 것.[4] 줄인 예산은 교련과 현대적 무기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육군 내부에서 눈에 띠는 현실주의적, 민주주의 친화적 군인으로, 6사단장 재직 시절에는 상당히 민주적인 병영 문화를 만들어냈고 세계 대전의 교훈을 받아들여 현대화, 차량화, 화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며 정신력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우에하라 유사쿠 등과 대립했다. 사실 이러한 현실적인 면모는 조슈벌 전반에서 보이는 것으로, 꼬장꼬장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다이쇼 시대부터는 정당정치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고 처음에는 입헌동지회, 그 다음에는 하라 타카시입헌정우회와 연대했으며 야마가타 이후 조슈벌의 지도자가 된 다나카 기이치는 정당정치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다. 우가키가 일본 육군의 이단아는 아니고 이러한 흐름 중에서도 상당히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던 셈. 하지만 그런 그도 완전한 영미식 민주주의자가 아닌, 기본적으로 육군의 조직적 이익과 크게는 일본 제국의 대륙에서의 전략적 성취를 주장하는 인물로, 1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에서 현역 무관 군부대신제를 폐지하자 이에 격렬히 반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1년에는 군 소장파로부터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라고 추대되기도 하여 본인 역시 호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3월 사건인데 정작 우가키가 정식으로 총리로 지명될 가능성이 보이자 발을 빼버려서 우가키는 이후 군에서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찍히고 말았다.
이후 매우 유력한 조선총독 후보로 꼽혔으나 다나카 기이치와 정우회의 빽으로 야마나시 한조가 총독에 임명되면서 밀려난다. 하지만 야마나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뢰사건으로 사이토 마코토로 다시 교체되고, 이후 사이토가 정무총감 해임 문제로 총독에서 사임한 후 총리로 영전하면서 1930년대 전반기의 6대 조선총독을 지냈다. 조선총독의 막강한 권력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승진이었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야심가인 그를 중앙에서 쫓아내려는 조처이기도 했다. 그의 통치 분위기는 후술하겠다.

2.2. 여러차례 실패한 총리의 꿈


원래는 사실 총독이 아니라 총리가 먼저 될 수 있었다. 1927년 와카쓰키 레이지로[5] 다음의 총리으로 내정하려 했는데, 육군장교단이 나서서(…) 적극 방해했다. 이후 한동안 한직을 보낸다.
1930년 7월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기용되었고, 미수로 끝난 1931년 3월 쿠데타[6] 기도에서 사건에서 총리로 옹립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군대를 써선 안된다."라고 만류했다(그리고 여전히 육군장교단 일부는 반대했다).[7]
이후 하마구치 내각이 무너지고, 1931년 다시 총리로 지명된 와카즈치 레이지로는 그를 조선 총독으로 발탁했다. 정당색이 없고, 청렴하다는 이유였다. 전전임 야마나시가 정치 인사 + 탐관오리였다는 것을 고려하여 반대로 뽑은 것. 일각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은 민정당의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그를 중앙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 총독직 던져준 것이라는 말도 있다.
1936년 총독으로 물러난 직후, 히로타 고키 내각이 붕괴되어 수상으로 지명되었으나, 육군 측에서 아예 육군장관을 내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려서;; 내각 구상을 무산시켰다. 당시 우가키는 쇼와 덴노의 부름을 받고 도쿄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가던 도중 헌병감 나카지마 게사코가 올라타 육군의 뜻이라며 조각하지 말 것을 '''협박했다.''' 우가키는 처음엔 나름대로 저항했지만, 육군장관을 추천하지 않겠다는 말에 결국 우가키는 조각을 포기했다. 육군 때문에 총리 지명자가 조각을 포기한 최초의 사건. 결국 총리가 된 사람은 엉뚱하게도 당시 조선 배치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하야시 센주로였다. 이렇게 3번이나 총리 물망에만 오르고 끝난다.
1938년 6월 3일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아, 중화민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어떻게든 중일전쟁을 중지시키려 했으나 또 이번에도 군부의 방해로 실패하자 열받아서 9월 29일 사임했다. 일본 정국에서의 기믹은 가히 사이토의 뒤를 이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 고군분투한 기믹이다.
1941년에도 도조 히데키 대신 내각을 맡을 뻔 했지만 도조가 기어코 총리를 먹었다. 4번째 실패.

2.3. 조선 총독 우가키


한편, 조선 총독으로서의 업적은 '''눈부시다'''. 어느 정도는...

2.3.1. 경제정책?


"내가 조선으로 가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그의 정책은 '조선인에게 약간의 '''빵'''을 주겠다'로 요약된다. 악명 높던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근무기강을 개선해 제대로 된 행정을 구현했으며, 총독부 조직을 개편했고,[8] 농업진흥정책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 공업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스스로도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자부했다. '''조선의 총독'''이라는 별명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나진한반도 북부의 중심 항구로서 역사에 나타난 것도 이 때문이다. # 인구가 3자리 간신히 되던 작은 어촌이었던 나진의 땅값은 만주 철도의 종착역이 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졸지에 '동해의 다롄항, '조선의 경제수도'로 거론되면서 천 배나 폭등했다. 본격 부동산 신화의 선조 격이랄까. 거꾸로 다른 곳들에 땅 사놓은 인간들은 제대로 망했어요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지정하고 1934년 1차 발표한 지정문화재에 보물, 고적(사적), 천연기념물을 지정했다[9]. 다보탑을 본뜬 극우단체 흑룡회도쿄 '합방기념탑' 건립을 반대하기도 했다. #
이 농업진흥정책이 훗날 새마을운동의 일부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멸사)봉공, 자조, 협동이란 슬로건은 "근면, 자조, 협동"으로 거의 비슷하게 차용했다고 한다. 우가키의 정책 외에 북한의 천리마 운동도 새마을운동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뉴라이트계열이나 일본 우익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농업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지만, 이런 것 때문에 일본이 한국 농업에 발전을 시킨 존재라고 미화하는 건 당연히 잘못된 판단이다.[10]

2.3.2. 식민지 총독


조선인들에 대해 어느정도 개인적 호의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식민지의 총독이었으므로, 당시 조선도 일본의 영토이고 식민지라고 생각하고 발전시키기로 한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경제정책을 표방하기는 했으나 문화통치에서 이어진 민족기만책과 억압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조선을 살리겠다고 입으로만 떠들어댄 일본이 정작 조선 경제나 농업에 발전을 시켰던 것도 아니었고, 농업 진흥책은 '''어디까지나 일본 본토를 위한 것'''이였다.
내선일체보단 덜했지만 내선융화를 강조했으며 조선어 교육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장충단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와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파를 기리는 박문사를 박아넣기도 했다. # 이 때문에 그의 시대는 이른바 1기 무단통치, 2기 문화통치에 뒤이은 3기 전시체제나 그 준비기간으로 여겨진다.
광산 정책은 총독부의 자금으로만, 또 장진강 수력발전공사의 전력은 일본의 노구치사의 흥남비료공장에 대부분이 돌아갔다. 또 "남면북양(南綿北羊)[11]"과 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농촌진흥운동"은 당시 조선의 농민들 대부분이 소작농 + 문맹이었던 상황이라 근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뒤바뀌지 않는 이상에 큰 효과를 내기 어려운것이었는데[12] 이런 현실은 극복하지 않고 "자력갱생 정신교육"만 쑤셔넣은 것이다. 결국 농업진흥정책은 총독이 스스로 각반을 차고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일본 본토 농업을 덴마크급으로 끌어올렸다는 관료 등도 열심히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시행정이 되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고 대차게 실패하였다.

2.4. 재임기와 이후 영향


여튼 우가키는 이렇게 5년간 조선을 다스리고, 1936년2.26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정계에 나설 때라고 생각하고 총독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 양반이 물러나고서 나타난 후임 총독이 미나미 지로... 가히 헬게이트가 열렸다. 물론 단순히 성장률만 따져서는 미나미 지로 때의 조선 경제도 만만치 않았다만... 이런 시기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좋은 떡밥이 되는 시기로써, 경제 성장률만으로 모든걸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시기는 그 유명한 고용 없는 성장이 이루어졌다. 우가키 총독 초기에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남아있어 '''보통학교 이상을 졸업한 졸업생 75%가 취업을 못했다''' 이때 상륙해 큰 인기를 끈 독일어 단어가 그 유명한 '''룸펜.''' 이상의 《날개》나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이 이 시기의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때는 세계 대공황 중이므로 어느 나라나 그랬지만...
[image]
1938년의 우가키 사진. 하얗게 새어버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콧수염이 있다.
사족으로, 우가키의 사위 야노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보고 "'''홀딱 반했다'''"고 전해진다. 여자였다면 몽양 선생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결혼했을 텐데, 남자로 태어나서 그러지 못했다고. 우가키 본인도 여운형에 대해서 상당한 호감을 표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외무상에 임명되어 장제스와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노에 후미마로의 지원을 받아 1938년 우가키 공작이라는 것을 지휘했지만 군부 강경파의 폭주 때문에 말아먹었고 열받은 우가키는 외무상을 사직했다.

2.5. 전쟁과 패전, 그 이후


결국 정치에서 은퇴하고 타쿠쇼쿠대학[13] 학장에 취임했다. 군사와 정치에 관한 폭넓은 안목 덕인지, 모두가 일본의 승승장구를 확신하던 태평양 전쟁 개전 초에도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하고 일본의 앞날에 회의감을 품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필리프 페탱이 맡았던 역할을 자신이 맡겠노라' 생각하며 당시 막 남방작전에서 승리한 제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에게 인편으로 일본의 장래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이마무라는 '일본군이 무리한 팽창으로 병력이 분산되고 공세한계점에 도달하면 수세에 몰릴 것'이라며 그의 전망에 동의했다.
자신의 조선총독 재임에 대해서 상당히 자부심을 느꼈던 모양인지 조선의 해방과 조선 민중들의 환호에 대해서 전해듣고는 무척이나 분노(...)하면서 "머지않아 비애를 느낄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 일본 육군 내부에서 합리적인 인물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합리적 제국주의자였지 오늘날 시각의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패전으로 공직에 추방되었으나 '''공직추방령이 해제된 후에 이루어진 제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1953년)에서 전국 최고의 득표수로 의원직 당선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전후에도 정당총재이자 수상 후보로 꼽혔다. 이후 참의원 임기 중인 1957년에 죽었는데, 당시 나이가 88세로, '''전후 일본 참의원 최고령 의원'''이다.[14] 그간 조선 총독과 일본 정치인을 여러 번 오간 세월을 생각하면 정말 오래 산 셈(...) 여담으로 역대 조선 총독들 가운데에 가장 나중에 사망한 인물이며 가장 장수한 인물이기도 하다.[15]

3. 평가


병맛 넘치기로 악명높은 그 일본 육군의 장군치고 개념은 어느 정도 있는 인물이었고, 능력도 나름대로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시 군국팽창주의자. 육군 대신으로서 "만주몽골은 일본이 반드시 영유해야 한다"라고 여러차례 강조했으며, 그의 재임 직후 일어난 만주사변도 그 돌발적인 측면에선 놀라긴 했지만 그 이후의 만주 침략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여 만주 침략을 착실하게 도왔다. 이는 일본 군부의 온건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당장 이시와라 간지도 중일전쟁은 결사반대했고 호리바 가즈오를 비롯해서 만주사변을 칭송하던 참모들도 중일전쟁 불확대파를 이루어 확대파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중국이라는 대국과의 전면전과 일부 영토만을 침탈하는 국지 도발의 차이 및 당시 일본의 주적을 중국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냉정하게 이해했던 셈.
우가키의 총독 재임 기간은 흔히 "민족말살통치 시대"로 분류되었으나, 실상은 아직 중일전쟁 이전이라 문화통치기의 연장선 상에 있던 시대였다. 최근 교과서에는 문화 통치기로 서술되고 있다.[16]
1910년대 무단통치의 데라우치 마사타케, 1920년대 문화통치의 사이토 마코토, 그리고 민족말살통치의 미나미 지로, 이 세 총독의 임팩트가 강한 일제강점기사에서 사이토와 미나미 사이 이런 인물이 있었다.. 정도로 보면 될 법하다.
실로 우가키가 물러난 뒤, 미나미가 본격적으로 민족말살통치를 벌이자 일부 조선 식자층에서는 '''우가키는 신사였다'''며 우가키를 그리워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듯하다.[17]
한편 육사 1기이자 수상 물망에 여러차례 오르내린 만큼 "우가키의 역사는 일본제국 육군의 역사다"라는 평도 있는데, 이 점에서 일본 육군에도 황도파나 통제파 같은 병맛뿐만 아니라 이런 인물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 주요 경력


'''역대 조선총독'''
[image]
3대

권한대행

4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1927년 4월 15일 ~ 1927년 10월 1일)

야마나시 한조

5대

6대

7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1931년 6월 17일 ~ 1936년 8월 5일)

미나미 지로

'''일본 역대 육군대신'''
[image]
34대

35대

36대
다나카 기이치

우가키 가즈시게
(1924년 1월 7일 ~ 1925년 6월 11일)

우가키 가즈시게

35대

36대

37대
우가키 가즈시게

우가키 가즈시게
(1925년 6월 11일 ~ 1926년 1월 30일)

우가키 가즈시게

36대

37대

38대
우가키 가즈시게

우가키 가즈시게
(1926년 1월 30일 ~ 1927년 4월 20일)

시라카와 요시노리

38대

39대

40대
시라카와 요시노리

우가키 가즈시게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미나미 지로

[1] 정확히는 7월 11일 부임. 취임 직전에 만보산 사건(7월 2일)과 뒤이은 조선인들의 화교 린치로 뒤숭숭하던 상황이었다.[2] 가즈시게(一成)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1등으로 성공하겠다"라는 의미로, 1896년에 중위로 진급하면서 스스로 바꾼 이름이다.[3] 1932년 윤봉길 의사에게 죽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동기. 그 외 스즈키 소로쿠, 스기야마 하지메, 하타 슌로쿠, 하타 에이다로, 가와시마 요시유키, 아베 노부유키 등의 후배들도 그의 파벌이었다.[4] 이때 짤린 야마나시 한조 대장이 그대로 총독으로 직행하여 금권정치를 펼친다.[5] 와카쓰키 수상은 재임 때 그를 「진정한 평화 애호자」라고 말하고 뒤에 보듯 그를 총독으로 발탁하는 등 그의 재능을 아꼈다.[6] 고이소 구니아키 군무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획이었다. 노동법이 상정될 3월 20일 군중 1만명으로 의회, 입헌 민정당사, 수상관저를 습격해 혼란을 일으키고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육군을 보내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계획이었다.[7] 일설에는 전후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쿠데타에 관여했으나, 그가 총리 물망에 오르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3월에 갑자기 뒤집었다는 이야기. 여하간 쿠데타는 이후 불문에 부쳐졌고 참여한 장군, 장교들도 처벌받지 않았다.[8] 토지개량국과 산림국을 통폐합하여 농림국을 신설하고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9]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 보물 2호는 경성 동대문(흥인지문)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국보 1호 남대문, 보물 1호 동대문으로 이어졌다. 사적 1호가 포석정, 사적 2호가 김해시 봉황동 패총 유적인 이유도, 대구광역시 도동의 측백나무 숲이 천연기념물 1호인 이유도 이와 같다. (고적 3호부터 10호까지는 북한 소재). 또한 보물 4호였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국보 2호, 5호였던 대원각사비가 보물 3호, 8호였던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국보 3호가 되었다. 다만 보물 3호였던 종로의 보신각은 오늘날 기념물 10호이다. # 참고로 보물만 지정한 이유는 문화재 체계상의 "국보"는 일본에 있다는 논리 때문. 여하간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체계는 이 시대의 것을 답습한 측면도 있으며, 특히 임진왜란 당시의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숭례문흥인지문, 그리고 경애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포석정이 1호라는 것이 일제의 조선 정복의 상징이라며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10] 물론 새마을운동의 슬로건이 비슷하다고 해서 한국정부의 모든 정책이 일본 정부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렇게 따지면 전술했듯이 천리마운동이 새마을운동의 자극제니까 한국의 정책이 북한의 정책도 베낀 것이 되어버린다. 한편 자극제는 단순 행위 동기라는 점에서 '같다=베끼다', '모티프'라는 표현이 구체적 정책 시행과 비교해 적용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일제-만주국부터 이어진 근대주의 농촌운동이 새마을 운동에도 철저히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로서는 분명하다.[11] 조선 남부에서는 면화 농업을, 북부에서는 을 중심으로 한 모직 목축업을 장려하겠다는 정책.[12] 애초에 1920-30년대에 조선에서 쌀 수출량이 대폭 늘었났음에도 실질적으로 농민들이 만주로 이민가느냐니 북부지역 도시로 가야했다느니 했던것도 바로 이것때문이었는데 산미증산계획으로 일본인들은 싼값에 쌀을 먹을수 있어서, 지주들은 돈을 대거 벌수있어서 이득이었지만 쌀 수출이 늘어난다 해서 그 이득이 소작농들에게 돌아가는건 아니었고 되려 소작농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해야했기 때문에 때문에 소작농들은 별수없이 시궁창스러운 삶을 살아야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런 상황은 모른건 아니었지만 소작농들의 희생으로 본토의 쌀값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시정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니 효과가 제대로 나기가 힘들었던 것.[13] 이름부터 매우 수상한 일본의 극우 성향 대학으로, 원래 대만 총독부의 관료 양성을 위해 세워진 교육 기관이 모체다. 김완섭과 함께 전후 양대 친일파로 절찬리에 병신짓 중인 고 젠카(오선화)가 여기서 교수질을 하고 있다.[14] 현재 참의원에서 최고령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의원이다.[15] 데라우치 마사타케 - 1919년 사망/ 67세, 하세가와 요시미치 - 1924년 사망/ 74세, 사이토 마코토 - 1936년 피살/ 77세, 야마나시 한조 - 1944년 사망/ 80세, 미나미 지로 - 1955년 사망/ 81세, 고이소 구니아키 - 1950년 사망/ 70세, 아베 노부유키 - 1953년 사망/ 78세.[16] 대입 국사에서는 이 인물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대학입시에서 조선총독의 이름은 그저 1910년대에는 초대 총독이자 '무단통치'의 테라우치 마사타케, 3.1운동 후 1920년대에는 '문화통치'의 사이토 마코토, 1930년대에는 '민족말살통치'의 미나미 지로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다.[17] 계몽사 학습만화한국사에선 미나미가 '우가키라면 몰라도 이 미나미에겐 어림도 없다!!' 라며 우가키를 물러터졌다는 식으로 디스하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