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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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判洛
1912. 2. 15. ~ 2003. 9. 11.
일제강점기 시절 악명을 떨쳤던 친일경찰로, 종로경찰서의 미와 와사부로와 함께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였다. 반공 시절의 고문귀가 박처원과 이근안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엔 김덕기, 노덕술, '''하판락'''이 있었다.[1] 창씨명은 카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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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2]#에서 면협의원을 지낸 하한운(河漢云)의 차남으로 태어난 하판락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2월에 처음 순사로 일본 제국의 경찰관이 되었다. 그런 하판락이 사천경찰서를 거쳐 1938년에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악명을 떨쳤다.[3]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고문귀'(고문 귀신)가 그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의 증언에 의하면, 하판락은 본인 역시 한국인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한 고문이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그가 거듭 부인하자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졌다. 그리고 이어진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명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된 것. 그리고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하지만 이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하판락이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어떻게 고문했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한 후,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린 것. 그리고는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 결국 이같은 고문 끝에 여경수 등 독립투사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설령 살아남았더라도 신체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이었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순국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하여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체포된 것.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부산 시민들이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애원했을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된 하판락은 반민특위로부터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자신이 저지른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결국 하판락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6년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출마했지만, 당시 막강한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이후 부산시의원에 도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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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금융업자로 변신, 신용금고를 설립[5] 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이 돈으로 고향에 기금을 희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등 생색을 냈고, 부산에서는 부산시장에게서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신분세탁을 제대로 했다. 이후 2003년 9월 향년 91세의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 그는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하판락의 친일 행적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증언으로 다시 한 번 까발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광우 선생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평판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불같이 타오르자,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경의 간부를 지낸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했다. 2002년 3월 10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편에서도 얼굴을 비췄다.
같은 해 12월, 하판락의 고향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 이 자의 집안인 '''진양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이 밝힌 바로는, 하씨 문중이 마을회관으로 자신을 불러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광주 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고 비난했다고 한다. 결국 <명석면사>에서 하판락에 대한 내용은 삭제되었지만, 화가 난 김경현은 편찬 후기에 '''명석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라고 적어 시간차 공격을 날렸다. 진양 하씨 일동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펄펄 뛰었지만, 책은 이미 인쇄가 끝난 뒤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90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영인이 연기했다.
河判洛
1912. 2. 15. ~ 2003. 9. 11.
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악명을 떨쳤던 친일경찰로, 종로경찰서의 미와 와사부로와 함께 '''악질 친일경찰의 대명사'''였다. 반공 시절의 고문귀가 박처원과 이근안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엔 김덕기, 노덕술, '''하판락'''이 있었다.[1] 창씨명은 카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카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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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2월 15일 경상남도 진주군 성태동면 관지동(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2]#에서 면협의원을 지낸 하한운(河漢云)의 차남으로 태어난 하판락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2월에 처음 순사로 일본 제국의 경찰관이 되었다. 그런 하판락이 사천경찰서를 거쳐 1938년에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악명을 떨쳤다.[3]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고문귀'(고문 귀신)가 그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고문당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의 증언에 의하면, 하판락은 본인 역시 한국인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한 고문이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그가 거듭 부인하자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젓가락으로 지졌다. 그리고 이어진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명이 끝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 때문에 모두 신체 불구자가 된 것. 그리고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3. 고문귀
하지만 이같은 죄상이 '하판락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하판락이 자행한 이른바 '착혈 고문'이 그것이었다.
지난 2007년 사망한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하판락의 고문 행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 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어떻게 고문했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한 후,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한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린 것. 그리고는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 결국 이같은 고문 끝에 여경수 등 독립투사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설령 살아남았더라도 신체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4. 해방 후
해방이 되었음에도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 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했다.'''그를 만나면 직이뿌라(죽여 버려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4]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이었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순국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고발하여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체포된 것.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부산 시민들이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애원했을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된 하판락은 반민특위로부터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자신이 저지른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결국 하판락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6년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출마했지만, 당시 막강한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이후 부산시의원에 도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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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일제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금융업자로 변신, 신용금고를 설립[5] 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았다. 이 돈으로 고향에 기금을 희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등 생색을 냈고, 부산에서는 부산시장에게서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신분세탁을 제대로 했다. 이후 2003년 9월 향년 91세의 천수를 누리며 살다가 죽었다. 그는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하판락의 친일 행적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증언으로 다시 한 번 까발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광우 선생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평판은 다시 한 번 추락했다. 친일 죄상과 고문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난 여론이 불같이 타오르자,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정운현 대한매일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경의 간부를 지낸 과거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했다. 2002년 3월 10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편에서도 얼굴을 비췄다.
같은 해 12월, 하판락의 고향 명석면에서 발간된 <명석면사>에서 이 자의 집안인 '''진양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이 밝힌 바로는, 하씨 문중이 마을회관으로 자신을 불러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 "광주 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고 비난했다고 한다. 결국 <명석면사>에서 하판락에 대한 내용은 삭제되었지만, 화가 난 김경현은 편찬 후기에 '''명석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라고 적어 시간차 공격을 날렸다. 진양 하씨 일동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펄펄 뛰었지만, 책은 이미 인쇄가 끝난 뒤였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1990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영인이 연기했다.
[1] 유명세는 덜하지만, 악명은 노덕술 보다 한 수 위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를 '''뛰어넘는(!) 최악의 악질'''도 있다. 바로 '''조선 최고의 고문의 황제 김덕기. '''심지어 일본 헌병들도 이 사람에게 한 수 배우고자 했을 정도였다.''' 자세한 건 반민특위 참고.[2] 진양 하씨 집성촌이다.[3]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시대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인 것이다.[4] 하판락의 착혈 고문을 폭로한 이광우 선생이,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려는 목적으로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5] 아직도 하판락의 후손이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으므로 직접 언급은 힘들지만, 네이버 뉴스 아카이브로 검색해보면 이름이 나온다. 설립 시기는 1972년이지만, 기사는 1973년도로 나온다. 다만 그 신용금고는 90년대 말에 다른 신용금고로 흡수돼서 지금도 하판락 일가와 연관이 있는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