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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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츠우라 히로(松浦鴻).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인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링크
2. 생애
울산 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인 상점에서 일하다가 돈을 더 벌기 위해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일했다고 한다. 귀국 후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하여, 1920년에 경남에 있는 순사교습소를 졸업, 경상남도 경찰부 보안과 소속으로 경찰 근무를 시작하여, 사법계에 근무하면서 1921년에는 순사부장이 되었고 1924년 경부보, 1932년 경부, 1943년 경시로 진급하여[1] , 1944년 수송보안과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고등계의 형사로서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했는데, 불령선인으로 찍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 취조하는 데에 앞장섰으며 고문치사한 사람까지 나왔고, 고문 취조를 통한 건수 올리기로 일사천리로 승진가도에 올랐으며, 일제로부터 훈8등서보 같은 수훈을 받았다. 어찌나 악랄했던지 민중들 사이에도 '''친일 고문 경찰=노덕술'''이라고 인식될 정도. 장택상은 차라리 이 사람보단 양반이라고 인식될 정도다.[2] 사실 노덕술을 능가할 악질로는 고문 전문인 하판락이 있는데, 하판락은 인지도에서 노덕술만 못하다.[3]
1927년 노덕술은 좌우연합 단체인 신간회 간부 박일향을 잡아들어 무자비하게 고문했고, 이때 노덕술에게 고문받고 죽은 독립운동가가 3명이나 듼다. 1928년 혁조회가 적발되었을 당시 노덕술은 혁조회의 회장 김규직을 비롯한 9명등을 잡아들여 고문했고, 고문받았던 김규직, 유진홍, 양정욱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32년 5월 당시 ML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 시위행렬에 참가했다가 잡혀 노덕술에게 천장에 매달려 구타를 비롯한 숱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김재학의 조카 김문한 씨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이 뿐만 아니라 1938년 혜산 사건을 수사하며 박달과 박금철[4] 등 조국광복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최연, 고등계 형사로서 독립 운동에 대한 사찰 업무를 맡은 최운하 역시 노덕술과 같은 반열에 든다. 심지어 그의 외삼촌이 살인혐의가 있는데도 놔주거나 수사를 목적으로 금품을 수수하는 등 부패한 면모를 보였다."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악인열전 p.133
해방 이후 잠시 평양경찰서장을 맡고 있던 중 공산주의 세력에게 체포되어 몇 달간 구금되었다가, 1945년 말에 월남하였고, 다음 해에 장택상에 의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하였다. 장택상과 더불어 여운형 암살 배후로 거론되기도 한다.[5] 1946년 4월 당시의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의 암살범 한현우 등 일당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의 인정을 받았고, 이승만에게서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러는 와중에 독립 투사 중 최고 거물이었던 김원봉을 체포, 김원봉의 뺨을 때리는 등의 치욕을 주어 그가 월북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49년 1월 26일 공범 백민태의 자수로 반민특위 간부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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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에 출석하는 노덕술
노덕술은 지명수배 상태에서도 번호판을 단 경찰 지프에 경호원까지 대동하여 다녔고 내무부장관 윤치영이나 외무부장관 장택상 등의 집을 방문하여 "내가 잡힐 줄 아느냐"며 큰소리도 쳤다고 한다. 결국 동화백화점 사장 이두철의 집에서 검거되었는데 권총 6자루와 다량의 실탄, 현금도 34만 1천 4백 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경향신문. 반민특위 조사기록에 따르면 1949년 노덕술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80킬로그램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고,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은 셈이다.[6]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이 체포되자 노덕술은 그저 기술자일 뿐이라며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직접 만나 그의 석방을 종용했고## 공보처장 명의로 '정부인사의 조사를 중지한다'고 공포하고 특위법의 개정까지도 시도하는 등 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 이에 대한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과 부위원장 김상돈의 당시 국회 증언
노덕술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바로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영전하였고, 이후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헌병 중령으로 변신하였으며[7] 1950년에는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 1954년 부산 제2육군 범죄수사단장, 1955년 서울 15육군범죄수사대 대장을 지내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로 대공수사 업무를 담당했다.
그의 일화 가운데 유명한 것은 '저놈 잡아라!' 사건이다. 이 사건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롤모델 격이며, 1948년 초에 벌어진 장택상 피습 사건의 용의자 임화를 고문하던 중, 임화가 수사관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하자 시체를 몰래 얼어붙은 한강에 구멍을 내고 유기한 후 노덕술이 취조실 창문을 열고 "저놈 잡아라!" 라고 외치며 임화가 도망간 것으로 둔갑 시킨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놈 잡아라! 문서를 참조.
2016년 7월, 뉴스타파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노덕술은 놀랍게도 이 시기 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무공훈장 세 개를 받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그 악행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던 인물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처벌은커녕 훈장을 받았으니...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인 노덕술은 1956년 군에서 예편한 후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다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4만 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무소속 정해영 당선) 크리를 먹었다.[8]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1965년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여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때 앓던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1968년 4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비슷한 경우로 김창룡이 있다. 노덕술이 공산게릴라의 공격에 대처할 치안전문가가 필요하여 이승만이 빼준 인물이었다면 김창룡은 군내 좌익 숙청을 목적으로 고른 인물이었으니 맡은 임무도 비슷하고 둘이 초래한 부작용도 비슷했다. 차이점이라면 권력 투쟁에서 밀린 노덕술은 자택에서 병사하고 이승만의 총애만 믿고 사방에 적을 만들었던 김창룡은 56년에 암살당했다는 점이다.
5공 시절 치안본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대공수사단장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를 진두지휘했던 박처원 치안감과도 인연이 깊다. 물론 박처원은 이 사건으로 결국 감옥에 갔다.
2014년 울산의 인물 후보로 선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선정 기준은, 울산 출신이며,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서 활동 여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후보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후에 당연히 취소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신충식이 연기했으며, 1990년 광복절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노덕술과 김창룡을 모티브로 가상의 악역 박창주(박상면)가 역할을 대신한다. 예외로 34회에서 딱 한번 등장하는데 계급상 박창주보다 훨씬 상관.배우는 윤관용.
- 2019년작 MBC 드라마 이몽에서 나오는 친일경찰 노정술이 이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3.1.1. 야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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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에서는 서영탁[9] 이 배우로 등장하는데 이정재의 찌질한 상관으로 등장하며 사실상 이정재를 다시 주먹사회로 돌아가게 만든 원흉이자 동대문파 탄생의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두한, 유진산, 이정재를 비롯한 반민특위 암살 기도를 했다가 암살을 맡긴 백민태가 항일 극렬 테러리스트였기에 그대로 자수해서 이정재에게 체포당한다.하지만 이승만에 의해 노덕술은 풀려나고 오히려 이정재가 체포를 당해 고문을 당하고 이 일을 계기로 이정재는 정치권에 환멸을 느껴 경찰을 그만두게 된다.[10] 그리고... 미약하나마 정의감을 지닌 이정재를 타락시킨 결정적 인물임은 틀림없다.
고문 당하고 비참하게 경찰서를 나가는 이정재를 보면서 득의양양했으나[11] 얼마 후 자기 부하였던 곽영주가 이승만의 눈에 들어 고속으로 승진하는 걸 보고는 똥 씹은 표정이 되고 곽영주에게 오히려 굽신거린다. 6.25 전쟁 이후 에피소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합성물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다.[12]
3.1.2. 관련 문서
3.2. 기타 창작물
- 2015년작 영화 암살에서의 맨 마지막 장면에 반민특위에서 재판을 받은 후 석방된 염석진이 노덕술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의견이 많다. 노덕술은 이후 떵떵거리며 잘 살았지만 염석진은 안옥윤과 명우의 총탄에 사살된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울분을 대리만족시킨 것으로 보인다.
- 웹소설 재벌강점기에서는 현대의 토지대장 건으로 나오마사를 만나고 있던 어진에게 가배차를 내온 신입 순사보로 등장. 이화관에 와서 소담에게 치근덕대는 바람에 망했어요 루트를 탔다. 거물 기업가의 부인을 건드린 파렴치한 놈이라는 낙인이 찍혀 순사보 자리에서 짤리고, 소담에 의해 양쪽 검지손가락이 다 잘린 뒤 모르핀에 취해서 빈민가에서 난동을 피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로 등장이 없을 줄 알았으나...[13]
4. 수상경력
- 공로상신 (1940)
- 훈8등서보 (1941)
- 화랑무공훈장 (1950, 1951)
- 충무무공훈장 (1953)
[1] 일제 시기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지배 기간 동안 21명뿐이었다. 즉 노덕술은 친일을 해서 올라갈 수 있는 곳 그 이상을 간 것이다.[2] 그런데 이 사람을 출세 시켜준 장택상은 굳이 나누자면 항일 운동가였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미군정 시기 장택상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3] 물론 항목을 보면 알지만, 하판락도 노덕술과 같은 행보를 걸었다. 일제강점기의 악행, 반민특위 체포, 습격으로 탈주, 이후에 잘 먹고 살다가 친일명단에 등재됐다.[4] 이 둘은 훗날 북한 초기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갑산파'의 일원이 되었다.[5] 직접 암살한 것은 아니지만, 여운형이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할 때 경찰임에도 테러범을 봐주고 고의적으로 방관함으로써 암살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노덕술은 암살범들하고 비밀리에 서로 짜고 '단독범행'으로 축소하는 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6] 출처 악인열전 p.137[7] 이근안은 군인에서 경찰로 변신했다.[8] 당시에는 친일파라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놈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노덕술이 이렇게까지 망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세상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심지어 본인을 반민특위의 처벌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이승만의 눈밖에 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9] 본명은 서동근으로 여러 대하사극에서 조연과 단역을 맡았다. 2017년 사망.[10] 이후 이정재는 김두한과 가진 술자리에서 억울하다고 울분을 토했다.[11] 이에 분노한 이정재에게 "어이 친일파! 그래, 더럽고 분하지만 네 말이 맞다. 네 말이 맞다 이 새끼야!"라고 까이고 침세례까지 받았다.[12] 특히 이정재가 노덕술에게 침 뱉는 장면이 많이 쓰인다.[13] 이승만의 제안으로 어진의 저택에 비행기 자폭테러를 일으켰고, 핀을 뽑은 수류탄을 쥔 채 어진과 동반자살을 꾀했으나, 어진이 그대로 벽장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칼이나 전기 충격기, 수류탄처럼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물건은 벽장 반입 금지) 본인만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