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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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손자가 한민구 전 국방부장관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884년[2] 4월 1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일면 세교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에서 가난한 농부인 한진영(韓進英)[3] 과 경주 이씨 이영엽(李榮曄)의 딸 사이의 4대 독자,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문신으로 고관을 역임하거나 무신으로서 무공을 쌓은 이들이 많았지만 11대조 이래로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그의 대에는 상민으로 전락했다. 그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8살 때부터 11살 까지 인근의 북이면 서당리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사격과 사냥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측 자료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한봉수는 청주진위대 상등병 출신이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가 편찬한 한봉수 공적조서는 이를 근거로 삼아 한봉수를 청주진위대 상등병 출신으로 기재했다. 그러나 일제의 다른 기록에는 그가 일진회 회원이라고 잘못 기재되어 있는 등 일제가 그의 신분을 파악하는 데 애를 먹은 것이 확연하기에 그가 청주진위대 출신이라는 기록을 신봉하기 어렵다.
또한 후손들은 한봉수 본인이 자신의 의병투쟁에 대해 종종 밝혔지만 해산군인 출신이라고 언급한 적은 없었다고 밝혔으며, 한봉수의 구술을 바탕으로 소설화했다는 '소년소설 의병대장 한봉수'에는 한봉수가 어려서부터 포수인 의부 한영석(韓榮錫)으로부터 사격을 배웠다고 기술되었다. 또한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가 한봉수를 면담한 뒤 학술적으로 정리한 <독립운동사> 제1권에는 "17세부터 총질만 하며 살아온 명포수 의병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한봉수가 진위대 상등병 출신이라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일등병 출신인 김규환(金奎煥)의 부하가 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를 종합하건대, 한봉수가 해산군인 출신이었다는 통설은 사실일 가능성이 낮으며, 그는 총기를 잘 다루는 일반 평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2. 의병 활동
한봉수는 생계를 위해 청안의 시장에서 목화의 씨를 빼내는 가내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9월 청주진위대 일등병 출신인 김규환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의병진의 명칭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했다. 이후 그는 김규환과 함께 청주, 청안, 미원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교전했으며, 1908년 6월부터는 독자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한봉수의 부대는 대략 20~30명으로 흑색 또는 토색의 복장을 하고 화승총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908년 1월 9일, 한봉수는 청주군 산외일면 세교장을 습격하고 교자동에서 일진회원 김홍식(金弘植)을 처단했다. 또한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하 7,8명과 함께 교묘하게 잠복하여 체포를 모면하면서 수비대 및 경찰관과 수차례 교전했고 1907년 9월 15일 미원에서 교전 중 수비대 한 명을 부상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6월 10일 우편행랑을 호위하며 문백면 옥성리를 지나가던 일본 헌병 상등병 사마자키 요시하루(島崎善治)를 습격해 처단했다. 1909년, 일본군은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서 한봉수가 이끄는 의병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또한 일제는 충청남북도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그들의 행동은 년월(年月)을 경과함에 따라 더욱 더 교묘함을 극하였다. 또한 그들의 첩보근무 및 경계법 등은 놀랄만큼 진보되고 그 행동도 더욱 더 민첩하여, 때로는 우리 토벌대를 우롱하는 듯한 태도로 나오고 있어, 그 세력에 때로 과장이 있다 하여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니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되느냐 하는 점에 대하여 우려하게 되었다.
한봉수는 1909년 중반에는 속리산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했고, 그해 말에는 경북으로 이동하여 계속 활동했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총 여섯 차례 우편물을 습격했으며 26회에 걸쳐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인사, 밀정 및 일본군에게 의병의 위치를 알린 조선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 및 무기를 노획했다고 한다. 그는 1910년 2월초에도 6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청주 부근에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이나 이때의 활약상은 기록이 미비해 확실히 알 수 없다.본도의 폭도도 강원도 방면과 같아 대개 진정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원 진위대 상등병으로서 한봉수라는 자는 다소 계략이 있는 자로서 부하 20~30명을 거느리고 30년식 보기병총(步騎兵銃)과 탄약 약간을 가지고 일찍이 청안군 세전에서 우편물을 탈취하여 1만원을 얻어 부락민에서 배포하여 신용을 얻은 다음 우편물 약탈과 재산가의 습격을 일삼아 왔으나, 교묘하게 토벌망을 벗어나 근근 연명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연말경에 경상북도 북부지방으로 침입했다.
한편, 한봉수는 1909년 음력 8월부터는 상주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조운식(趙雲植) 의병장과 연합하여 500명에 달하는 연합부대를 일시적으로 편성하기도 했다. 조운식에 관한 재판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 내의 모든 의병을 연해주로 이동시켜 이미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인석과 연계하려 했다고 한다. 아마도 한봉수도 그를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는 것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이나, 8월 15일 조운식이 영동경찰서에 체포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2.3. 체포
한봉수는 1910년 2월 청주 오송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군을 피해 2월 중순경 처가가 있는 서울 마포로 피신했다. 후에 체포된 한봉수를 취조하던 검사는 한봉수가 2월 중에 자수했다는 진술을 듣고 경무국에 문의했다. 이에 대한 경무국장의 회신 내용에 따르면, 한봉수는 서울에 잠복하던 중 더이상 도주와 은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람을 내세워 충북 경찰부에 귀순을 출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죄가 큰 점을 인정했고, 충청북도를 횡행하고 있는 문태수 의병장을 체포하는 데 협조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충북경찰부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한봉수는 1910년 5월 12일 충청북도 경찰부에서 급파한 순사에 의해 5월 15일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이미 1908년 11월 20일 공주지방재판소로부터 궐석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체포 후 재차 재판을 받은 그는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죄 수괴로 지목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다 한일병합이 이뤄진 8월 29일 대사령에 의해 면소되어 출옥했다.
한봉수가 체포 직전 부하를 보내 자수 의사를 타진하고 문태수 의병장을 체포하는 데 협력하겠다고 한 일은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점을 근거로 한봉수의 손자 한민구가 국방부장관에 내정되었을 때 한봉수는 변절한 친일파인데 어찌 그의 손자를 국방부장관으로 삼을 수 있냐며 비난했다. 하지만 충북대 박걸순 교수는 이에 대해 근거없는 모함이라고 밝혔다. 한봉수가 귀순 의사를 타진하고 문태수 의병장을 체포하는 데 협력하겠다고 한 것은 기록을 통해 확인되지만, 일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체포했으며, 문태수는 한봉수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루는 동안에도 체포되지 않고 계속 활동한 점을 볼 때 이 점을 가지고 변절이라고 단정짓는 건 무리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기록은 일제의 간교한 의병 이간책이거나 한봉수의 심리전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2.4. 3.1 운동
한일병합 후 대사령으로 출옥한 한봉수는 일제 형사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당시 그의 집이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고위관료의 행차가 있을 때 철저히 자택 내에 연금되었고 모든 창문이 폐쇄되었으며 일본 경찰이 수시로 가택수색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투전판에 자주 참가해 방탕하게 생활하며 일제의 감시를 누그러뜨리곤 했다고 한다. 다만 그의 집이 장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장꾼들이 그의 집에 몰려와서 투전을 한 것이며 그가 실제로 투전을 한 건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던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상경하여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려 했다. 그러다가 홍명희와 만난 그는 1919년 2월 27일 홍명희와 함께 손병희의 집을 방문했다. 손병희는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독립운동에 대한 제반사를 설명한 후 두 사람에게 청주와 괴산으로 내려가서 협력해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한봉수는 즉시 귀향한 뒤 홍명희와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고향에서의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4월 1일, 한봉수는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4월 2일 정오경에 다시 세교장터에 모인 장꾼과 내향보통학교 학생 및 교사 85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1930년대에는 세교리에서 서당리, 부강, 미원 등지를 전전하며 금광체굴을 했다고 한다.
2.5. 말년
8.15 해방 후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3남 1녀[4] 를 두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별세 4개월 전인 1972년 8월에 국가가 주택을 제공했으며, 72년 12월 25일 향년 90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고향인 청주시 내수읍 학평리에 안장했으며, 2007년 묘소 주위를 한봉수 의병장 유적지로 조성하고 한봉수를 기념하는 사당을 건립했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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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봉수에 의해 처단된 사마자키 상등병의 순직비를 사망한 자리(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세웠는데, 이 순직비는 해방된 후에도 남아 있었다. 1977년 문백면 주민들이 그 비를 끌어내리고 주민 성금으로 만든 '한봉수항일의거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 당시 주민들은 순직비를 깨부수려 했지만 암질이 너무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자 글자를 시멘트로 문질러버리고 한봉수 항일의거비 아래에 세워두었다. 이 곳은 의병장을 기리는 비와 의병장이 사살한 일본군 장교를 기리는 비가 함께 서 있는 유일한 장소다. 사실 암질이고 뭐고 진짜 없애려고 작정하면 어떻게든 없앨 수 있다. 한봉수 의병장이 천수를 누렸던 걸 생각하면 저건 의병장의 전적을 증명할 자료로 의도적으로 남겨둔 거라고 할 수 있다.
[1] 장간공파 31세 수(洙) 항렬.[2] 한봉수의 출생년대에 대해서는 1872년설, 1874년설, 1883년설, 1884년설 등이 제기되었다. 청주 한씨 제7교 대동족보에는 갑신년(1884) 4월 18일생으로 되어 있으며, 한봉수 본인이 생전에 남을 시켜 대필시킨 기록에는 188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는 1884년생을 택했다.[3] 족보명은 한영석(韓榮錫).[4] 1926년생인 한정애 여사다. 3남 1녀 중 셋째라 했으니 위로 오빠가 2명, 남동생이 1명이 있다. 고로 한 여사는 한 장관의 고모가 된다.